제3차 여요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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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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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및 활동
생애 및 업적 | 평가 | 여요전쟁
관련 문서
선릉 | 김훈·최질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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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




第三次 麗遼戰爭

1. 개요
2. 배경
2.1. 요나라와의 약조 안건
2.2. 전쟁 직전 상황
3. 전개
3.1. 12월, 흥화진의 수공
3.2. 1월, 개경을 지킨 현종
4. 결과
4.1. 거란에게서 강역을 지켜낸 고려
5. 대중매체
6.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거란고려를 침공한 세 차례의 대규모 침공 중 세번째에 해당하는 전쟁으로 1018년에 일어났다.


2. 배경[편집]



2.1. 요나라와의 약조 안건[편집]


1010년의 2차 침입의 약조는 "고려 현종의 요나라 친조", 그리고 비공식적으로 "강동 6주의 반환"의 떡밥이 있었다.

1012년 6월, 고려 현종은 전공지를 문후사로 파견하여 '왕은 병이 있어 친조가 불가능하다'고 통고하자 분노한 요 성종은 강동 6주를 무력으로 빼앗겠다는 공식 성명을 냈다. 또한 야율행평(야율자충), 이송무를 보내 강동 6주의 반환을 강력히 요구해왔다. 이에 고려도 다시 대대적인 전쟁 준비에 들어간다. 개경의 나성(송악산을 낀 산성) 건설은 현종 즉위 원년부터 진행되어 왔으나, 3차 침입을 앞두고 대대적으로 실시되었다.

1014년 10월, 국구이자 상온인 소적열이 이끄는 거란군이 통주를 침략했는데, 흥화진장군 정신용과 별장 주연이 이를 격퇴하고 7백여 명의 목을 베었다.

1014년 11월 ~ 1015년 3월, 김훈·최질의 난 - 문신들이 국난으로 녹봉이 밀리자 무신들의 밭(영업전)을 빼앗자, 무신들이 정변을 일으키고 이를 주장한 문신들의 귀양을 요구했다.[1] 이 정변은 고려 현종이 서경 유수 이자림과 짜고, 고위 무신 19명을 위로하는 잔치를 벌이겠다는 명목으로 불러들여 전부 살해하여 싱겁게 끝났다.


2.2. 전쟁 직전 상황[편집]


1015년 1월, 거란군이 흥화진, 통주에 연이어 쳐들어왔는데, 흥화진에 침입했을 당시에는 장군 고적여, 조익 등이 물리쳤다.

1015년 중, 고려 현종은 국내외적 위기를 타개하고자 민관시랑 곽원을 송에 사신으로 보내 토산물을 바치고 거란의 견제를 요청했다. 하지만 북송은 고려가 오래도록 조공하지 않았다는 핑계로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고려는 그럼에도 1016년에 북송의 연호를 사용하긴 했으나, 거란의 재침공을 혼자 대응해야 하는 상황을 맞이했다.[2]

1015년 9월, 거란군이 국경을 넘어 통주를 침략하자, 흥화진의 대장군 정신용과 별장 주연, 산원 임억, 교위 양춘, 태의승 손간, 태사승 강승영 등이 병사들을 이끌고 거란군의 후방을 공격해 700 여 급의 머리를 베었다. 그러나 정신용 등 지휘관 6명은 전투 도중 전사했다. 이후 거란군은 영주를 노리고 다시 공격하였으나 실패하고 물러났는데, 그들을 노리고 추격한 고적여 등 5명은 전사하고, 2명은 포로로 잡히게 된다.

1015년 12월, 거란군이 선화진(宣化鎭)[3]과 정원진(定遠鎭)[4]를 침공해 성을 쌓았다.

1016년, 거란의 야율세량(耶律世良)과 소굴열(蕭屈烈)이 곽주(郭州)[5]를 침공해 대승을 거두고 물자를 챙겨 돌아갔다. 고려사에는 당시 고려군 전사자가 수만 명에 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때문에 여태 거듭된 찔러보기에도 소기의 성과를 못 내는 거란 대신 고려에 조공 줄을 대던 여진조차 외교를 거두었다.

1017년 5월, 거란의 소합탁(蕭合卓)의 부대가 흥화진을 포위해 9일간 공격을 했으나 견일, 홍광, 고의가 성을 지켜내는데 성공했다.


3. 전개[편집]



3.1. 12월, 흥화진의 수공[편집]


1018년 12월, 거란은 소배압(蕭排押)을 도통으로, 소굴렬(蕭屈烈)을 부통으로 삼아 10만의 대군을 이끌고 내침하였다. 고려에서는 평장사 강감찬(姜邯贊)으로 상원수, 강민첨(姜民瞻)을 부원수로 삼아 군사 20만 8,000명을 이끌고 영주(寧州, 安州)에 나아가 대기하였다.

강감찬 등은 흥화진(의주)으로 나가 정예 기병 12,000기를 뽑아 산곡 사이에 매복시키고, 큰 줄로써 소가죽을 꿰어 흥화진 동쪽의 큰 내를 막은 후 거란군이 마음 놓고 건너가기를 기다렸다가 수공을 가해서 도하하는 거란군의 허리를 끊고 매복한 기병을 돌격시켜 거란군을 크게 격파하였다. 이 일화가 너무 유명해서 흥화진 전투를 귀주대첩의 일화로 잘못 아는 예가 많다. 그냥 흥화진 전투를 귀주대첩과 합쳐서 퉁치는 학습만화도 있다.


3.2. 1월, 개경을 지킨 현종[편집]


그러나 아직까지는 거란군의 기세가 여전한 상황. 고려군이 매복 작전으로 큰 타격을 주자 소배압은 기존의 거점을 무시하고, 남진하여 그대로 개경을 위협하기로 결심하였다.[6] 2차 침입 때에 개경으로 직진하여 성공을 거두었으므로 이때에도 남진을 꾀한 것이다. 이 시점에서 고려 조정에서는 항전과 후퇴 사이에서 분명한 마찰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고려사에 보면 당시 여러 귀족들이 2차 전쟁의 상황을 설명하고 후퇴를 이야기한 흔적들이 있다. 실제로 옛 고려의 개경 성터에 관한 조사서를 보면 개경은 평시에 수도로서 기능하기에 최적이지만 평야지대의 성으로서 수성에는 좋지 않아 고려시대 전쟁이 일어나면 서경 중심으로 군사 거점을 확보하거나 강화도로 천도하는 일이 많이 발생했음을 알수 있다. 하지만 현종은 과감한 결단을 내리며 물러서지 않고 항전한다는 기조를 확실히 한다.[7] 이에 고려에서는 개경의 방어에 진력하였다. 거란군이 무리하게 남하하여 개경으로 향하였으므로, 고려군은 지리적인 이점을 이용하여 곳곳에서 타격을 주었다. 거듭된 패배에도 불구하고 거란군이 계속 개경으로 공격해오자 태조의 재궁을 북한산의 향림사(香林寺)로 옮기고 개경을 계엄하였다.

마침내 현종 10년 정월 3일에 소배압이 이끈 거란군이 개경에서 150리 정도 떨어진 신은현(新恩縣 황해도 신계)에 이르자, 현종은 청야전술을 써서 성 밖의 민호를 전부 성안으로 들어오도록 하고, 들판의 작물과 가옥을 전부 철거토록 한 후 도성의 방비를 엄하게 하였다.

제2차 침입의 교훈을 받아들여서 개경의 주산인 송악산에 산성을 구축하는 등 수도 일원의 경비가 굳건한데다가 거듭되는 패전으로 군사들의 사기마저 떨어지니, 소배압은 더 이상 개경에 대한 공격이 불가능함을 알고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8] 또 소배압이 탐색전 삼아 300명의 기병을 개경 주변 금교역으로 파견하자 현종은 100기를 보내 야간 기습으로 거란군 정찰대를 전멸시킨다.

상식적으로 적을 상대하기 위해 더 많은 병력을 보내는 것이 최선이었으며, 개경의 병력이 충분하다는 것을 거란군에게 과시하기 위해서는 더욱 그럴 필요가 있었다. 굳이 적보다 적은 병력을 내보낼 이유가 없었던 것을 생각하면 그만큼 당시 개경의 수비 병력이 부족했다는 의미이며, 이 100기가 오히려 거란군에게 당했다면 소배압도 결전을 택할 수도 있었던 것을 생각해 보면 현종으로서도 엄청난 도박수를 걸었던 셈. 따라서 저 100기도 일반 병사들이 아니라 현종의 근위대에서 차출한 병력으로 보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이런 거란군의 정황을 포착해 내고 기민하게 대처한 개경의 고려군 지휘부의 능력에 찬사를 보낼 만하며 당시 개경 고려군의 총사령관이었던 현종의 군사적 능력과 대담함, 용기에도 고평가를 줄 수 있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고려군은 2차 침입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치밀한 계획을 세워 전쟁에 대비하였고 수적으로도 적을 압도할 수 있었다.


3.3. 2월, 귀주대첩[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귀주대첩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후퇴하던 거란군 10만은 전략전술적 길목인 귀주에서 기다리던 고려군 보병 + 기병 20만과 대회전을 벌일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리고 수일 간의 격전 끝에 등 뒤에서 튀어나온 고려군 10,000명에 의해 등짝이 쪼개지면서 전멸에 가까운 대패를 당했다. 이것이 바로 귀주대첩이다.

  • 참고로 한국에서는 대첩이라고 하면 대부분 소수의 병력으로 다수의 병력을 대파한 것으로 생각하는데, 귀주대첩은 두 배나 되는 다수의 병력이 자신들이 의도한 전장에서 피곤하고 상대적으로 소수인 병력을 대파한 전형적인 대회전이었다. 귀주대첩이라고 하면 살수대첩 이미지와 섞이는 이유 중 하나가 주장의 특출난 전략이 표현되지 않고 그냥 정면 충돌하다시피한 회전의 승리라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한 2배의 병력으로 밀어붙이다가 포위해서 끝장냈다고 전투의 가치가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일부 있는데, 이건 전술을 전혀 모르는 소리다. 소수로 다수를 이겨야만 가치가 있다는 발상은 무리수에서 나오는 발로일 뿐이다. 전쟁의 기본이 적보다 다수의 병력을 갖추고 잘 운용하는 것이며, 그 병력을 통해 전략적인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다. 동원할 수 있는 전력을 상대보다 더 많이 갖추는 것이 소수로 다수를 이기기보다 어려우며, 대군을 운용할 수 있는 국가적 역량을 미리 갖추는 것의 가치를 우습게 보면 안 된다. 게다가 교통과 통신 수단이 발달한 현대가 아닌 전근대 시대 전투에서 대규모 병력이 회전에 시간은 커녕 장소마저 맞춰 집결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9] 당시의 도로가 지금처럼 잘 정비되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대규모 병력은 항상 쪼개서 이동시켜야 했는데, 이것도 치밀하게 계획을 짜야 했다. 그렇지 못하면 병력이 모이기도 전에 각개격파당할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이 전쟁에서 거란은 자국이 보낸 10만 병력을 고려가 20만이 넘는 대군을 동원하여 요격하는 것을 보고 고려의 역량을 진지하게 인식하게 되었으며, 그 후 멸망할 때까지 다시는 고려에 대규모 전쟁을 걸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거란군은 대체로 주력이 기병이었던 반면[10] 고려군은 있는 거 없는거 다 끌어모은 군대였음을 생각해야 한다. 당시 야전에서 기병의 위력을 생각하면 절대 유리한 전투가 아니었다.[11]

고려군은 수만 명의 포로를 획득하고, 군마와 낙타, 갑옷, 병기 등을 무수히 노획했다. 게다가 거란군 가운데 살아돌아간 자가 불과 수천에 불과하였으니,[12] 반세기에 걸친 여요전쟁 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최대의 승리를 거둔 셈이었다. 요 성종은 참패 보고를 듣고는 크게 분노하여 사자를 소배압에게 보내어 말하기를, “네가 적을 가벼이 여기고 깊이 들어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무슨 면목으로 나를 대하려 하느냐. 나는 너의 낯가죽을 벗긴 다음에 죽일 것이다”라고 질책했다. 하지만 소배압은 성종의 어머니인 승천태후 소씨의 일가였고, 승천태후 소씨가 이룬 공적이 워낙 컸으므로 실제로 낯가죽이 벗겨지거나 죽지 않고 파직만 당한 후 1023년 복직해서 그 해에 죽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구사일생.[13][14]

1019년 2월 5일, 고려의 국왕인 현종은 직접 영파역까지 나아가 강감찬을 맞이하였다. 전하는 글에 의하면, 이때 임시로 지은 누각에 현종이 친히 올라 주연을 베풀며 강감찬의 손을 잡고 금으로 만든 8가지 꽃을 강감찬의 머리에 직접 꽂아 주었고,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영파역을 흥의역으로 고쳐 부르도록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검교태위 문하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 천수현개국남(檢校太尉門下侍郎同內史門下平章事天水縣開國男)[15]과 식읍 300호에 봉해지고 추충협모안국공신(推忠協謀安國功臣)의 호를 받았다.


4. 결과[편집]



4.1. 거란에게서 강역을 지켜낸 고려[편집]


이후 거란(요나라)의 군사들과 소규모 무력 충돌들이 일부있긴 했지만, 거란은 성종 사후 서하, 북송 등과의 전쟁을 하면서 고려를 침공할 여력이 더 이상 없었으며, 전쟁 직후 고려 또한 요나라와 형식적인 사대 관계를 회복하면서 강역을 지켜냄과 동시에 평화기 동안 정착 시킬 수 있었다.

다만, 한 가지 간과하지 말아야 할 점은 제3차 여요전쟁에서 고려가 거란을 격퇴했다고 해서 양국이 대등한 관계로 변하거나 혹은 입장이 뒤바뀌어지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엄연히 양국 간의 관계에서 대국은 거란이고, 소국은 고려였기에 관계가 회복된다고 했을 때 양국간의 관계는 군신 관계로 맺어져야 했으며 그렇기에 고려는 표문 형식의 국서를 통해 조공국으로서의 위상 회복을 거란 측에 먼저 요청하고, 거란이 이를 수용해주는 형식으로 관계 회복이 이루어지게 되었다.[16]

이는 오늘날 우리들의 생각으로는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 결과지만 전쟁의 성격은 소국(고려)으로서 침략해 온 대국(거란)을 방어하는 식이었는데다가 그 침략국의 조공국으로서의 위상을 다시금 확보하고자 한 것이었기에 결과적으로 고려가 거란측으로부터 조공국으로서의 위상을 다시금 확보받고, 대신에 거란에 사죄하는 식으로 양국간의 관계 회복이 이루어졌으며, 그 결과 본격적인 평화기의 정착 또한 시작될 수 있었던 것이다.[17]

5. 대중매체[편집]


  • 1973년에 방영한 드라마 강감찬에서 75화에서 다루었다고 하지만, 필름이 소실되어 상세한 내용을 알 수 없다.
  • KBS 드라마 <천추태후>가 1차부터 3차까지의 여요전쟁 전체를 다루었으나 드라마의 특성상 각색이 많이 되었다. 3차는 귀주대첩만 나오고 78화에서 중후반 5분 정도로 짧게 표현했다.
  • JTBC 창사 특집 다큐멘터리 <평화전쟁 1019>에서 역사학자들의 자문을 얻어 2부 후반부에 제3차 여요전쟁을 다루었다.
  • 2023년 11월 11일 첫방송하는 <고려거란전쟁>이 2차, 3차 여요전쟁 부분을 다룰 것이다.

6. 관련 문서[편집]



[1] 무신정권의 프리퀄이자, 임오군란과도 비슷하다.[2] 출처: 고려사 1015년 미상(음) #[3] 지금의 평안북도 선천군[4] 지금의 평안북도 정주시[5] 지금의 평안북도 곽산군[6] 거점을 무시하고 곧장 수도로 돌격하는 것은 예로부터 많이 애용된 군사 작전이다. 특히 기동력이 좋은 유목기마민족이 좋아하는 전법이었다. 몽골이 그랬고, 당장 거란이 이 방법으로 발해를 무너뜨렸다. 병자호란 때도 청군은 후방에 약간의 병력만 배치하고서 본대는 수도인 한양으로 진격했다. 기마민족 외에도 제당전쟁, 여수전쟁, 여당전쟁, 견훤의 서라벌 기습, 임진왜란과 근대 나폴레옹러시아 원정, 러우전 초반의 키예프 전투, 현대의 나치 독일이 사용했다 전해지는 전격전도 다르지 않다. 어렵게 하나하나 무너뜨리기보단 단숨에 수도로 진격해 적국 정부에게서 항복을 받아낸다는 전략인데 장단점이 공존하는 전략이다. 성공하면 빠른 시간에 적국의 항복을 받아 비교적 적은 피해로 승리할 수 있지만, 사전에 발각되는등 계획이 실패하면 오히려 주력군이 적진 한복판에서 포위되어 섬멸당해 버린다. 이러면 피해는 입을대로 입고 얻는 것은 아무것도 없게 된다. 실제로 뒤에 설명되겠지만 3차 침공 당시의 소배압이 지휘하는 거란군은 개경 앞까지 진군하는데 성공했으나 고려에서 이미 침공루트를 예상하고 청야전술과 군사적 대비를 갖추어 놓았기에 어떠한 전략적 이득도 얻지 못하고 퇴각하다가 귀주에서 강감찬에게 섬멸당한다.[7] 현종은 고려사를 넘어서 한국사에서도 최고의 명군으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굉장히 어려운 여건 속에서 성장하며 왕위에 오른 인물인데 당대의 유학자들의 평가에서 항상 무문에 치우침이 없이 이치에 맞는 일을 행하는 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3차 전쟁에서도 본인이 물러선다면 기세에서 밀린다는 것을 파악하고, 후퇴는 없음을 확실히 하며 항전의 의지를 선언하였다고 볼 수 있다.[8] 여기까지의 전쟁 전개 과정은 영락없이 살수대첩의 재판이다. 실제로 근대에 들어오면서 살수대첩과 흥화진 전투의 수공 에피소드가 섞이기도 했다. 그만큼 모범적인 청야전술의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병자호란도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쳤지만, 청야전술의 실패와 기동 야전군 집결 실패 등의 각종 병크가 겹쳐져 조선군은 패배하고 말았다. 앞서 언급했듯 거란군은 전방의 고려 거점들을 모두 무시하고, 목표인 개성 점령을 위해 무리하다시피 남진했다. 따라서 개성을 재빨리 함락시키지 못한 상황에서 2차 전쟁 때 양규 등에게 당했듯이 후방 보급로가 무사할지 확신할 수 없었기에 퇴각할 수밖에 없던 상황이었다. 괜히 고려의 청야전술이 완벽했다는 평가를 받는 게 아니다.[9] 실제 일부 회전들은 기병이나 별동대가 길이나 목표를 잃어 전장에서 이탈하는 상황도 발생했다.[10] 화약이 개발되기 전까지, 중세 유럽에서는 말을 탄 기사는 보병 10명을 상대할 수 있다는 평가를 했다. 이는 당시 동아시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현대에서 기병의 역할은 전차를 비롯한 기계화보병이 계승하고 있다.[11] 현대로 치면 거란군은 전원 기갑부대인 기계화보병사단으로 이뤄진 반면 고려군은 기계화보병사단 + 일반보병사단 + 지역방위사단 등 가용 병력 전체를 끌어 모은 것으로 보면 된다.[12] 즉 전 병력의 90%가 전사 혹은 포로로 잡혔다는 소리다! 게다가 거란은 본질적으로 유목제국이었고 유목제국은 지형과 기후의 특성상 인구가 매우 적다. 때문에 소배압이 이끌고 온 거란군은 거란족+피지배민족 혼합군이었지만 인구상으로 요나라에 제법 타격이 되었을 것이며 지배민족의 인구가 대규모로 날아갔다는 말이 된다.[13] 참고로 소배압은 여기서 대패해서 그렇지 이미 여러차례 승리한 바 있으며 성종에게 여러차례 간언하였고 성종이 이를 받아들일 정도로 유능했다. 2차 여요전쟁에 참전했을 때도 전공을 세웠는지 난릉군왕에 봉해지고 재상까지 겸했다. 그러니까 무능과는 거리가 멀며 외려 동생인 소손녕이 불미스러운 짓을 저질러 처형된걸 감안하면 동생과는 달리 정치적 감각도 좋다. 그런데 그렇게 유능한 사람이 여기서 90% 상실이라는 대패를 겪은 것.[14] 이 패배의 여파로 소배압은 모든 관직을 박탈당해 나가리되고 4년이 지난 뒤 빈왕에 봉해져 재기할 뻔 했지만 그 해 사망한다.[15] 검교는 명예직이란 뜻으로 명예태위와 문하시랑(재상), 문하성평장사를 수여하고, 천수현에 물려받을 수 있는 식읍을 작위로 내린다는 것.[16] <현종대 고려-거란 관계와 외교 의례> 최종석, 《동국사학》, 2016, vol., no.60, pp. 1-42 (42 pages); <베트남 外王內帝 체제와의 비교를 통해 본 고려 전기 이중 체제의 양상> 최종석, 《진단학보》, 2015, vol., no.125, pp. 1-38 (38 pages)[17] <현종대 고려-거란 관계와 외교 의례> 최종석, 《동국사학》, 2016, vol., no.60, pp. 1-42 (42 pages); <베트남 外王內帝 체제와의 비교를 통해 본 고려 전기 이중 체제의 양상> 최종석, 《진단학보》, 2015, vol., no.125, pp. 1-38 (3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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