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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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
3. 특징
4. 여담
5. 외부 링크
6. 같이 보기


1. 개요[편집]




원 제목은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줄여서 《고려도경》이라고 한다.

원 제목의 '선화'(宣和)는 북송의 실질적인 마지막 황제였던 휘종의 마지막 연호이다.[1] 선화 연간에 휘종 황제의 명을 받들어 고려에 사신으로 다녀온 것을 글과 그림으로 정리한 책이라는 뜻이다.

북송의 사신 서긍(徐兢, 1091~1153)이 1123년에 고려에 사신으로 와서 방문하여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보고서인데, 고려시대 생활 풍속을 알기 쉽게 설명하여 오늘날 고려사 연구자들이 필히 참고하는 서적이다.


2. 역사[편집]


선화 5년인 1123년은 고려 제16대 예종이 붕어하고 제17대 인종이 즉위한 다음해인데 북송은 예종을 조문하고, 인종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해 사신을 보냈다.

이 사신단은 벽란도를 통해 고려의 도성 개경의 사신 숙소인 순천관에 1개월 가량 머물렀다. 이때 보고 들은 것들 중에서 중국과 같은 것은 버리고, 중국과 다른 풍속을 기록해서 300여 조가 되었고, 이를 정리하여 40권으로 만들었는데, 물건은 그 형상을, 사건은 설명을 달아 《선화봉사고려도경》이라 명명했다고 한다.


3. 특징[편집]


'도경'이라는 말 답게 원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헌데 이 책 간행 2년 만에 한족 역사상 최대의 치욕이자 북송의 멸망을 불러온 정강의 변이 일어나는 바람에 그림을 날려먹었다. 만약에 남아 있었다면 고려의 사찰 및 궁궐같은 고려 건축과 회화는 물론 고려시대 복식사와 생활사를 이해하는데 있어서도 매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아래에도 언급하지만, 《고려도경》 자체는 그 한계 때문에 정확도를 의심받는 책이라서, 시간이 없어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타국인이기 때문에 편견을 가질 사신의 생각을 서술한 글보다는, 눈으로 본 경험이라 할 그림이 더 중요한데, 그 그림이 날아갔다. 물론 개화기 서양인들이 제대로 이해 못하고서 그린 조선에 대한 온갖 말도 안되는 그림들을 보면, 그림이라고 완벽하게 믿을 만한 것도 아니지만...

서긍도 이 책 한부를 따로 가지고 있었는데, 누군가에게 빌려주었다가 나중에 그림을 분실한 상태로 다시 찾았다고 한다. 이때 다시 그림을 그릴 수도 있었지만 안 내켜서 안했다고(...). 이후 1167년 서긍의 조카 서천이라는 사람이 그림이 없는 버전으로 재간행한 것이 오늘날에 이른다. 서긍은 본업이 화가였지만 조카인 서천은 그림 일과는 전혀 인연이 없었다.

《계림지》(鷄林志) 등을 참고하여 건국부터 풍속 등까지 내용을 소개하고, 작업 과정 등을 설명했는데, 아무래도 사신이 고려를 오가는 과정과, 개경에 틀어박혀서 보고 들은 정보 위주에, 중국인 기준으로 서술해 북송 황제인 휘종에게 올린 글이기 때문에 교차검증이 필요한 부분이 많다.

  • 서긍은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가 아니라 정말로 고구려에서 그대로 이어져내려온 똑같은 나라라고 착각했다. 그래서 고려의 역사와 관직에 대한 설명이 고구려의 것과 혼재되어 오류가 많다. 현대에는 고구려와 고려를 구분해 부르지만, 사실 고구려는 장수왕 때 국호를 '고구려'에서 '고려'로 바꿨다는 것이 정설이다. 태조 왕건은 그 국호를 그대로 가져다 고려를 건국한 것. 그러니 정보의 유통이 원활하지 않았던 고대와 중세에는 착각할 만도 하다.
이런 혼동은 중국이나 일본의 여러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전근대에는 외국인이 고려가 고씨에서 왕씨로 바뀌었다는 정도만 알아도 한국사를 비교적 많이 아는 것이었다. 나중에 몽골 관리인 사천택이 '너희 나라에서는 재상을 막리지라 부른다지?' 라고 물어봐서 고려 사신 이장용(李藏用)이 뻘쭘해한 일화도 있다.

  • 고려가 바닷가에 위치해 있으면서 선박이 지극히 단순하고 조잡하며 작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고려는 여진족 해적을 토벌하면서 일본까지 원정을 갈 정도로 선박/항해기술이 뛰어났고(과선 문서 참조), 근래 고려시대의 고선 발굴을 통해 대형선의 존재도 입증되었다. 물론 당시 서긍 일행이 타고 온 사신선인 신주(神舟)에 비하면 보잘 것 없을지 몰라도, 신주 자체도 당시 북송에서 엄청난 기술력과 자본을 투자해 만든 배라는 점을 감안하면 고려의 선박 수준은 전혀 낮은 수준이 아니다. 아마 서긍이 고려에 있는 동안 그런 배를 보지 못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중국과 다른 고려의 풍속을 세세하게 기록하여 남겼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지금까지 내려오는 고려의 세시풍속이나, 고기 음식을 꺼리고 목욕을 좋아했던 고려인의 성향, 남녀혼욕 등의 풍속 기록이 남은 것은 다 이 책 덕분이다.

  • 《고려도경》에선 고려의 육상교통의 실태에 대해서도 다루는데 개경에 있던 고려 외성의 문들이 어느 고려 지역과 연결되는지가 설명되어있고, 왕이나 귀족들이 타는 말과 가마는 꽤나 화려하지만[2] 일반적으로 고려의 우마차는 그 구조가 단순하였고 도로의 사정 또한 나빠 중국과는 비교할 수가 없다고 적었다.

  • 당시 개경 백성들의 집은 벌집같이 모여있고 비바람을 겨우 피하는 수준이며, 기와를 올린 집은 열에 한 두 곳 정도라고 기록했다. 개경 백성들의 주된 주거방식은 수혈주거가 주된 주거방식이었던 걸로 보여지는데 땅을 파서 아궁이를 만들고 흙 침상위에 누웠다고 한다.[3] 또한 약을 구입할 때를 제외하면 물물교환이 주된 거래방식이었다고 한다.[4] 다만 흥왕사의 규모를 보고 놀라거나 궁궐은 날아갈 듯 연이은 용마루가 붉고 푸른 단청으로 꾸며졌다 그 화려함이 꿩이 나는 것과 같다는 둥 칭찬도 한 것 보면 뭔가 문벌귀족 사회였던 고려의 심한 빈부격차를 꼬집는 듯하기도 하다.

  • 서긍은 고려의 감옥에 대한 기록도 남겼다. 당시 개경의 감옥은 둥근 담을 친 원형감옥이었는데[5] 원형감옥은 중국에선 당나라 이후로 사라진 형태였기에 옛날 중국의 감옥과 비슷하다고 했다.

번화가에 대한 기록도 보이는데, 광화문 앞부터 긴 행랑이 이어져 개경의 번화가를 이루었다고 한다. 참고로 이곳은 지금도 개성의 번화가 지역이다. 그런데 여기서 서긍은 실제 시장은 보이지 않고 초목이 무성하여 실은 행랑을 지은 목적이 백성들의 빈곤한 주거지를 가리기 위한 것 아니겠느냐는 추측도 했다. 한편, 고려인들이 을 모르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민가에서 글 읽는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는 표현도 있는걸 보면 이 시대에도 학구열은 꽤나 높았던 모양.

고려인들이 송나라 한족들이 때가 많으며 더럽다고 멸시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한족이 쓴 기록에 고려인들이 한족들을 멸시했다는 사실이 실려 있는 셈이다. 그런데 사신단이 단순히 비하 드립을 당한 것이 아닌 실제로 더러웠을 가능성도 있다. 《고려도경》이 쓰여진 건 북송 시기인데 황하 이북의 물 부족 현상은 아무리 늦어도 서력 기원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이다. 즉, 사신단 일행 본인들이 객관적으로 보기에도 본인들의 위생 상태가 고려인들에 비해 불량했음을 인정했기에 남긴 기록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상술했지만 마침 고려인들의 목욕 문화에 대한 기록을 남기던 참이었다.[6]

그리고 조선일본에 사신으로 갔다 온 사람들이 일본의 혼욕(혼탕) 풍속을 글로 전하면서 조선인들 사이에 '일본은 남녀가 같이 목욕하는 야만국'이라고 경멸하는 풍조가 생겼고, 근래 한국인들 중에도 그런 태도를 보이는 경우가 있긴 하다. 그런데 《고려도경》에 따르면 이미 고려도 혼욕하던 풍습이 있었다고 하니, 시대에 따라 풍습이 변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당대 고려의 인물들에 대해서도 국왕 인종을 비롯해 이자겸, 윤언식, 김부식, 김인규, 이지미 등을 설명했다. 여담으로 지나가면서 이름과 직책을 언급만 하는 수준으로 척준경을 소개하기도 한다.

이번에 사자가 국경에 들어가매, 모든 신하들 중에 현명하고 민첩한 자들을 가리어 영접하는 예절을 맡겼는데, 주목(州牧) 중에는 형부시랑 지전주(刑部侍郞知全州) 오준화(吳俊和), 예부시랑 지청주(禮部侍郞知靑州) 홍약이(洪若伊)ㆍ호부시랑 지광주(戶部侍郞知廣州) 진숙(陳淑)이 맡았고, 맞아 위로하고 전송하는 일은, 은청광록대부 이부시랑(銀靑光祿大夫吏部侍郞) 박승중(朴昇中), 개부의동삼사 수태보 중서시랑 중서문하평장사(開府儀同三司守太保中書侍郞中書門下平章事) 김약온(金若溫), 개부의동삼사 수태보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開府儀同三事守太保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 최홍재(崔洪宰), 개부의동삼사 수태보 문하시랑 겸 중서문하평장사(開府儀同三司守太保門下侍郞兼中書門下平章事) 임문우(林文友),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척준경(拓俊京)ㆍ이자덕(李資德)이 맡았었는데, 이들은 모두 왕의 근신이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8권 <인물>(人物)



4. 여담[편집]


2015학년도 역사교사 임용고시 단답형 1번 문제로 출제되었다.

5. 외부 링크[편집]




  • 서판교의 아시아퓨전식당 고려도경 [7]

6. 같이 보기[편집]


  • 해동제국기》: 일본에는 《고려도경》 비슷한 포지션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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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119년 ~ 1125년 사용. 선화 다음 연호가 '정강의 변'으로 유명한 정강(靖康)이다.[2] 왕이 타는 말의 안장을 비롯한 장식품은 송나라에서 내린 것이라 한다.[3] 고려의 백성들은 수혈주거에서 거주하며 그릇 같은 기본적인 세간살이조차 갖추지 못했다고 추정되는데# 서긍의 기록으로 볼 때 개경의 백성들도 비슷한 수준이었던 것 같다.[4] 고려는 조정 차원에서 화폐 유통을 여러 차례 시도하였으나 교환경제가 발달하지 않아 실패로 돌아갔다. 물론 그렇다고 고려 전기의 경제수준이 자연 경제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던 것은 아니다. 지배층을 중심으로 한 유통 경제가 발달하였으며, 농촌시장에서도 추포가 교환수단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직접생산자 중심의 유통경제가 활성화되기는 어려웠던 것이다.#[5] 담장만 둥글게 둘렀기 때문에 파놉티콘과는 다르다.[6] 다만 세계로 확대해보면 중국인은 그나마 깨끗한 축에 들었던지 한참 뒤의 마테오 리치는 자신의 책에서 중국인을 가리켜 목욕을 자주한다고 서술하였다.[7] '고려의 맛있는 음식에는 십여가지가 있는데 그중 면을 먹는 것을 으뜸으로 삼았다.'라는 문헌 본문 내용을 인용하여 브랜딩 한 음식점이 바로 서판교에 위치한 고려도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