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송산리 6호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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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
公州 武寧王陵과 王陵園

Tomb of King Muryeong and Royal Tombs, Gongju




분류번호
대한민국 사적 제13호
소재지
충청남도 공주시 금성동 산5-1
분류
유적건조물 / 무덤 / 고분군
면적
541,524.4㎡
지정연도
1963년 1월 21일
제작시기
백제 중기
관리자
(관리단체)

공주시
유네스코 세계유산
파일:유네스코 세계유산 로고(흰 배경).svg
이름
한국어
백제역사유적지구
영어
Baekje Historic Areas
프랑스어
Aires historiques de Baekje
국가·위치
대한민국 충청남도 공주시
등재유형
문화유산
등재연도
2015년
등재기준
(ii)[1], (iii)[2]

1. 개요
2. 상세
3. 무덤 피장자



1. 개요[편집]


파일:송산리 고분군 6호, 무령왕릉, 5호.jpg
우측이 6호분.

파일:송산리6호.jpg
송산리 6호분의 도면.

무령왕릉 이전에 발견된 백제 최초의 벽돌무덤이자 벽화무덤으로 사신도가 그려져 있다.


2. 상세[편집]


1932년 송산리 고분군 정화작업 현장에서 배수로를 파다가 발견된 6호분은 일찍 발견되는 바람에 가루베 지온의 도굴 대상이 되었다. 가루베 지온은 천장이 파괴되었고 이미 1호분부터 5호분까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일찍이 도굴되어 출토된 게 아무것도 없다고 기록했으나, 이것은 거짓말이었다. 6호분은 무령왕릉처럼 처녀분이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다. 가루베는 마구잡이로 무덤을 도굴하고 빗자루로 깨끗하게 쓴 다음 조선총독부에는 보고서 그대로 아무 것도 없는 무덤이라고 거짓 보고를 했다. 하지만 이것 때문에 조선총독부가 비로소 공주의 백제 왕릉의 관리를 신경쓰기 시작하면서,[3] 어디까지나 아마추어인 가루베 지온은 더 이상 조사를 빙자한 도굴이 불가능해지자 1940년 강경고등여학교로 전근갈 때까지 송산리 고분군을 관광하러 오는 일본의 높으신 분들과 일본인 관광객을 위한 가이드를 자처했다. 결국 광복 후에는 그동안 수집하고 도굴한 콜렉션을 집이 있던 강경에서 빼돌려 트럭에 싣고 대구를 거쳐 부산으로 간 다음, 역시 또다른 도굴광인 대구 남선전기 오구라와 함께 일본으로 도망쳤다.


3. 무덤 피장자[편집]


6호분의 피장자에 대해서는 많은 설들이 존재한다. 그도 그럴 듯이 무령왕릉과 매우 똑같은 벽돌무덤이서서 무령왕과 시대적으로로 가깝고, 관계도 매우 밀접한 인물이 피장자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6호분의 피장자로 추측되는 사람은 총 3명이다.[4]

먼저 6호분의 피장자가 동성왕이라는 설이다. 벽돌무덤은 본래 중국 남제의 양식이고 동성왕때 남제와 교역을 시작했으니 이때 벽돌무덤의 양식이 들어왔을 것으로 추측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6호분은 무령왕릉보다 나중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고 동성왕은 혼인을 하였기 때문에 왕비와 같이 합장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근거와 주장이 희박하다.

2번째로는 6호분의 피장자가 성왕이라는 설이다. 성왕 때에는 벽돌무덤의 양식이 이미 정착(무령왕릉)되었고 6호분 또한 무령왕릉 보다 나중에 축조됐다고 추측되는 것으로 보아 근거는 일부 된다고 할 수는 있다. 하지만 성왕은 재위기간 중 사비로 천도를 한 첫 왕이다. 그러므로 성왕의 무덤이 있다면 사비, 즉 지금의 부여군에 장사지냈을 개연성이 더 높다. 성왕이 공주 송산리 고분군에 묻혔다는 설도 있기는 하지만 현재 성왕릉은 능산리고분군의 중하총으로 추정되고 있다. 따라서 이 또한 설득력이 떨어진다.

그렇다면 6호분의 피장자는 도대체 누구인가? 가장 유력한 후보인 동성왕과 성왕도 아니라면 추정되는 사람은 성왕의 모친밖에 없다. 현재 가장 강력한 설이다. 6호분이 무령왕릉과 같은 벽돌무덤, 무령왕릉보다 나중에 축조되었다고 추측되는 점과 한 명만 매장된 것으로 추정되는 점, 벽면의 사신도가 이 설을 더 뒷받침한다.

무령왕릉이나 6호분이나 전부 성왕 때 지어졌을 것이니 성왕의 입장에서 생각을 해보아야 한다. 진왕제 하에서는 부인이 여럿 있지만, 왕이 즉위하면 부인들 중 한 명을 택하여 왕후로 세우고 자립위왕한다. 오래 전에 태자로 책봉되어 왕이 될 준비를 한 사람은 미리 자립위왕에 걸맞은 강력한 지방 세력의 여인을 태자비로 맞아 자립위왕할 준비를 하고 있다가, 즉위와 동시에 그 여인을 왕후로 세우고 자립위왕하면 된다.[5] 선왕과 선왕비를 같이 합장하고자 한다면, 선왕비가 다음 왕의 친모라면 고민할 필요 없이 아버지 무령왕과 같이 합장하면 된다. 하지만 자신의 친모가 왕후가 아니라면 누구를 아버지인 무령왕과 같이 합장해야 할까? 일단 공식적인 왕후를 합장함이 법도이다. 하지만 성왕의 친모 역시 왕비에 버금가는 좋은 예우을 받아야 했다.[6] 6호분의 사신도인 현무도가 그려진 벽이 무령왕릉을 향한다는 점으로 보아, (고분의 주인이 정말로 성왕의 친모라면) 친모를 아버지와 따로따로나마 죽어서라도 가깝게 붙여놓으려는 성왕의 안타까움이 느껴진다. 벽면의 사신도 또한 어머니를 위해 성왕이 특별히 그리라고 지시했을지도 모른다.[7]

다만 최근에는 축조연도가 무령왕릉보다 먼저 축조되고 피장자가 성왕의 모친이 아니라 무령왕의 장남인 순타태자의 무덤이라는 견해가 나오고 있다.#

[1]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2]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3] 조선총독부는 한반도에서 가장 유적이 많은 평양, 경주 유적지 조사에 관심이 컸고 일본의 이름높은 프로 학자들이 그곳에 투입되었으며, 상대적으로 공주의 백제 유적지는 방치하고 있었다. 이런 빈틈을 타 아마추어인 가루베 지온의 개인적인 '조사를 빙자한 도굴'이 가능했던 것이다.[4] 다만 도굴이 안 됐다고 해도 가루베 지온이 6호분을 무령왕릉으로 생각한 것을 보면 무령왕릉과 달리 지석은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5] 무령왕 초기에는 귀족의 힘이 강했기 때문에 무령왕도 이러한 방식으로 왕후를 맞았을 확률이 높다.[6] #[7] 가루베 지온 때문에 안타깝게도 진짜 고분의 주인은 알 수 없다. 하지만 위의 글이 사실이라면 6호분의 지석에는 성왕이 느꼈던 것이나 당시 왕실 상황을 알 수 있는 기록이 있었을 텐데, 정말 두고두고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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