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진(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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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김덕진.jpg
출생
1864년 4월 16일
충청도 정산현 적면 낙기리
(현 충청남도 청양군 장평면 낙지리)
사망
1947년 3월 7일
충청남도 청양군
본관
안동 김씨
자 / 호
경명(景明) / 낙계(樂溪)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김덕진은 1864년 4월 16일 충청도 정산현 적면 낙기리(현 충청남도 청양군 장평면 낙지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병자호란남한산성에서 독전어사를 맡았고 세자시강원, 부제학을 지낸 김중일(金重鎰)의 9대손으로, 어렸을 때부터 불의를 그대로 지나치지 않고 반드시 정의의 편에 서는 성품이었다고 한다.

1876년 일본이 윤요호 사건을 이용해 강화도에 군함 수 척을 보내 위협했다. 이때 12살이었던 그는 앞마당에 동네 아이들을 모아놓고 땅에다 감옥을 그리고, 종이에 일본 측 외교관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의 얼굴을 그려 아이들에게 주면서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이놈을 결박해 옥에 가둬라!", "당장 이놈의 목을 베어라!"


1895년 을미사변단발령이 잇달아 발발하자, 안병찬김복한이 창의토왜(倡義討倭)를 외치며 홍주성을 점거했다. 이때 김덕진은 이들을 지지하는 격문을 써줬다. 이후 향리에 은거하던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그는 민종식을 찾아가 의병을 일으키는 일을 논의했다.

1906년 홍주성을 공략한 뒤 의병이 집결했으나, 일본군의 반격으로 5월 31일 홍주성이 함락되고 의병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김덕진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덕진은 용렬한 선비로서 만 가지가 사람에게 미치지 못하나, 다만 의리의 한계에 있어서는 일찍이 스승과 친구들의 강론한 나머지를 얻었으므로 충분심이 격동되어 역량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시세도 살펴보지 아니하고 동지 6, 7명과 함께 대략 서로 모의하여 의기 있는 사람 천여 명을 규합해서 홍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하느님이 끝내 죄 준 것을 뉘우치지 아니하여 필경 반목이 생기자 이로 인해 멀리 섬 중으로 귀양간 사람도 적지 않았는데 모두 함께 죽기로 약속한 사람들이다. 나는 요행이 화를 면하여 구차히 목숨을 유지하고 있노라니 그 마음조차 세상에 내보일 수 없어서 쳐다보아도 부끄럽고 굽어보아도 부끄러울 뿐이다.


김덕진은 민종식 등과 함께 예산군 대술면에 소재한 이남규의 집에 숨어 다시 기회를 엿봤다. 그러나 충청도 관찰사 김가진에게 발각되었고, 그는 민종식을 비롯한 10여 명의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어 공주 경무청으로 끌려갔다. 그를 취조한 타카하시 아스미쓰이(高橋淺水) 경사가 물었다.

"우리 일본은 그대의 나라를 보호하기 위하여 갖은 노력을 하고 있는데 너희는 우리를 원수로 대하니 그 이유가 뭐냐?"


김덕진이 대답했다.

"우리나라는 고려 이래로 너희 나라의 침략을 수없이 받아 왔고 임진년에는 이유 없는 군사를 일으켰을 뿐 아니라, 능을 파고 을미년에는 우리나라 국모를 시해하였다. 또한 을사조약은 누구를 위하여 맺어진 조약이냐? 생각하면 이 원수를 어떻게 갚을지 꿈에도 잊을 수가 없다. 더구나 오랑캐에게 당하는 생각을 하면 더 한층 분통이 터질 뿐 이다."


타카하시가 재차 물었다.

"너희는 왜 우리를 오랑캐라고 하느냐"


김덕진이 답했다.

"임금의 아비를 죽인 이등(伊藤)을 공신(功臣)이라고 떠드는 너희가 오랑캐가 아니고 무엇이냐?"


이후 경성 평리원으로 이감되어 문초를 받은 그는 다음과 같이 공술했다.

"아! 종묘 사직의 존망과 임금의 안위(安危)와, 문명과 야만의 한계나 사람과 짐승의 구분이 이번 거사에 달려 있으니, 만약 성공만 했다면 오늘날 먼저 네 머리를 베고 또 장차 네 놈의 종자를 토벌하며, 저 5적 놈들을 처단할 터인데, 시운 소관으로 형세가 당적할 길이 없으니 다시는 여지가 없다. 다만 유감 되는 바는 그 뜻을 마침내 펴지 못했으니 죽어도 눈을 못 감고, 또 사방의 웃음거리를 면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죽어 없어지는 것이 좋겠다. 나는 언제나 몸을 희생하여 인(仁)을 이루는 것과 목숨을 버리고 의리를 취하는 것으로 평생의 법을 삼아 온 처지다. 네놈들의 이른바 법률이란 것은 어떤 것인지 모르지만, 이것으로써 보고하여 하루 빨리 처결해 주기 바란다."


1907년 7월, 김덕진은 종신형을 선고받고 지도(智島)로 유배되었다. 그러다 7개월만에 사면을 받고 풀려났다. 그 후 고향에서 은거하던 그는 1919년 곽종석, 김창숙, 장석영 등이 주도하는 독립청원서에 서명했다. 이 일로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공주형무소로 이감되었고, 모진 고문을 받은 뒤 훈방 조치되었으나 가혹한 옥살이의 후유증에 시달렸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그는 서울에서 정두화(鄭斗和)를 만나 임시정부의 재정 조달 문제를 협의했다. 하지만 고문 후유증 때문에 운신이 어려워서 일체 출입을 끊고 짚신을 삼고 자리를 매며 여생을 보냈다. 1947년 3월 7일 청양군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 김덕진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