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 히로부미 (r20210301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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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술국치
庚戌國恥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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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일본 제국의 대한제국 병합 과정
전개
운요호 사건 · 강화도 조약 · 시모노세키 조약 · 영일동맹 · 한일의정서 · 가쓰라-태프트 밀약 · 포츠머스 조약 · 을사조약 · 정미 7조약 · 대한제국군 해산 · 기유각서 · 경술국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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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한일병합 (일제강점기 · 한국통감부 · 조선총독부 · 무단 통치 · 친일반민족행위자 · 토지 조사 사업) · 일본어 잔재설 · 식민사관 · 식민지 근대화론 · 한일 무역 분쟁
관련 문서
식민지 · 강점기 · 병합
[a] 박영효 등이 고종의 퇴위에 협조한 대신들을 암살하려다 처벌된 사건은 이완용이 고종 퇴위를 반대하던 대신들을 제거하기 위해 조작된 사건이라는 주장도 있음.







일본 제국 제1·5·7·10대 내각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
伊藤博文 | Itō Hirobumi
[1][2]


파일:1920px-Itō_Hirobumi.jpg

출생
1841년 10월 16일
스오국 쿠마게군 쓰카리촌
(現 야마구치현 히카리시)
사망
1909년 10월 26일 (향년 68세)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시 하얼빈역
재임기간
초대 내각총리대신
1885년 12월 22일 ~ 1888년 4월 30일
제5대 내각총리대신
1892년 8월 8일 ~ 1896년 8월 31일
제7대 내각총리대신
1898년 1월 12일 ~ 1898년 6월 30일
제10대 내각총리대신
1900년 10월 19일 ~ 1901년 5월 10일
서명
파일:ItoH_kao.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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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부친 이토 쥬조, 모친 이토 코토네
배우자
선처 이토 스미코, 후처 이토 우메코
자녀
장녀 이토 사다코(요절)
차녀 스에마츠 세이코 - 사위 스에마츠 켄초
삼녀 니시 아사코 - 사위 니시 겐시로
사녀 오타케 사와코 - 사위 오타케 타케
양자 이토 히로쿠니
서장자 이토 분키치
서차남 이토 신이치
현손자 마쓰모토 다케아키
학력
쇼카손주쿠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30] [31]
종교
유교신토무종교
신체
154cm[32]
정당


통칭
리스케(利助) → 도시스케(利助)[33] → 슌스케(春輔)
아호
슌포(春畝)
약력
참의[34]
제4·6대 내무경
제1·5·7·10대 내각총리대신
초대 입헌정우회 총재
귀족원 의원
초대 귀족원 의장
제1·3·8대 추밀원 의장
황실제도조사국 총재
초대 한국통감

1. 개요
2. 생애
2.1. 유년기
2.2. 신정부 수립 이후
2.3. 1차 이토 내각
2.4. 대일본제국 헌법 제정
2.5. 2차 이토 내각
2.6. 3차 이토 내각
2.7. 4차 이토 내각
2.8. 러일전쟁 개전과 한국 통감 부임
2.9. 처참한 말로
2.9.1. 암살 1차 시도
2.10. 장례
3. 암살에 대한 논란
4. 한일병합을 반대했던 인물?
4.1. 반론
6. 평가
7. 기타
8. 대중매체에서



1. 개요


일본 제국의 제1, 5, 7, 10대 내각총리대신이자 초대 한국 통감.

메이지 유신을 이끈 인물 중의 하나이며, 대일본제국 헌법의 초안을 작성했고 현재 일본의 내각제를 시행시키고 양원제를 포함한 의회제도를 확립한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한마디로 오늘날 일본 총리직과 대신직들을 비롯한 행정부, 그리고 입법부(일본 국회)는 이토가 그 시작을 주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총리로서는 도합 7년 6개월(2,720일)을 지냈는데, 1885년 만 44세 2개월의 역대 최연소 총리로 취임해 마지막 총리를 지낸 1901년에는 만 60세에 조금 모자란(만 59세 7개월) 나이였다. 일본에서는 개국공신 중 한 명이자 남긴 업적과 수완이 수준급이었던 원로 정치인으로 기억되는 인물이다.

야마구치현 쿠마게군(現 히카리시) 출생. 야마가타 아리토모, 이노우에 가오루와 더불어 "조슈 3존"으로 불리는 인물. 한국 한자음은 이등박문이며, 대한민국의 어르신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풍신수길로 부르는 것처럼 이등박문으로 더 많이 부르는 편이다. 이토 히로부미 암살 이후 이토를 기리기 위해서 서울 남산에 지어진 사찰도 히로부미 절, 즉 박문사(博文寺)이다.[3] 참고로 박문초등학교, 박문중학교, 박문여자고등학교나 출판사 박문각은 이 사람과 무관하며, 한자 이름이 우연히 겹친 것에 불과하다. 이는 박사나 박학다식에 나오는 것처럼 학문에 힘쓴다는 뜻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한국에서 남녀노소 막론하고 대중적으로 아는 사람이 많다. 제국주의의 첨병으로 팽창주의를 부르짖은 데라우치 마사타케, 미나미 지로, 도조 히데키, 이시이 시로, 기무라 헤이타로, 고이소 구니아키는 아는 사람만 아는 정도인 것과는 대조적이다.[4] 아무래도 초대 한국통감이기도 하고[5], 몇 안 되는 독립운동가의 거물 암살 성공 사례이기 때문인 듯 하다[6]. 때문에 한국인에게 '구한말 침략의 원흉'이라고 물으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인물이다.

이토 씨(氏)는 일본에서 인구로 따지면 5위 ~ 6위나 될 정도다. 한국과 다르게 일본은 동성(同姓)이 별로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정말 흔한 성씨라는 것이다. 사실 일본인은 성씨에 대한 관념이 상당히 흐릿한 편이다. 대한민국에서는 성을 바꾸는 것이 아주 특별한 사유가 아니면 금지되어 있지만(양육자의 재혼. 부모 중 다른 한 명의 성으로 바꾸는 경우다.) 일본의 경우는 결혼만 해도 성이 바뀐다. 심지어 데릴사위가 되면서 성을 처가 쪽으로 바꾸기도 한다(대표적인 사례가 김전일이다.). 또한, 전과자가 성씨까지 개명해서 살아가는 일 또한 흔하다. 그러니 성씨에 대한 관념이 뚜렷할 수가 없다. 일본의 다른 역사적 유명인들은 명문 사무라이나 귀족 출신으로 성씨가 워낙 독특하기에 성이 같은 사람이면 후손일 확률이 그나마 높지만, 이토 히로부미는 평민 출신이기 때문에 흔하디 흔한 평민 성씨라서 일반인의 이름과 별로 분간이 안 되는 것이다. 오히려 덴노의 전쟁 책임에 대해 주장했던 양심적 정치인인 이토 잇쵸 전 나가사키 시장 같은 인물도 있다. 일본에서 성씨에 애착을 갖는 건 도쿠가와 같이 거물급 성씨나 되어야 그나마 애착을 갖는 편이고, 그렇지 않은 성씨들은 자기 성이 어떻거나 말거나 수준으로 생각하고 있다.

일본 국회 건물 정문 쪽 메인 홀에는 방의 4귀퉁이 중 한 귀퉁이에 이토 히로부미의 동상이 있다.[7]


2. 생애




2.1. 유년기


어릴 적 이름은 리스케(利助)였지만 천하다 하여 도시스케(利助), 슌스케(春輔)를 거쳐 히로부미(博文)로 이름을 바꿨다.

1841년 10월 16일, 하야시(林) 가문에서 출생하였다. 이토 히로부미의 어릴 적 이름은 하야시 리스케(林利助)였다. 그의 아버지 하야시 주조(林 十藏)는 소작농 출신이었지만, 주겐 미즈이 다케베(水井 武兵衛)에게 근면함을 인정받아 그의 양자가 되면서 주겐 신분을 얻는다. [8] 이어 미즈이 다케베가 이토 야에몬(伊藤弥右衛門)의 양자가 되면서 아시가루가 되고, 두 부자도 성을 이토로 바꾸고 하급 무사 아시가루 신분을 얻는다.

1857년, 16살 때 요시다 쇼인의 쇼카손주쿠(松下村塾 송하촌숙)을 찾아가 배웠다. 15살 때부터 조슈번의 지금의 말단 공무원으로 에도만 경비직으로 파견갔는데, 윗 상관인 쿠루하라 료조가 요시다 쇼인의 송하촌숙을 추천하면서 거기 가보라고 해서 찾아갔다. 신분이 낮아서 교실 밖에서 서서 수업을 들었다고도 한다. 쿠루하라 료죠, 카츠라 코고로[9]의 종자(하인) 일을 하면서 공부했다.

쇼인의 제자들은 후에 메이지 유신을 위해 크게 활동하고 근대 일본 정국을 주도하게 된다. 기도 다카요시이노우에 가오루, 노기 마레스케를 제외한 대부분의 조슈계 인사들은 대부분 쇼인의 제자. 가장 대표적인 예만 들어봐도 쇼인 문하의 천재로 불렸던 타카스기 신사쿠, 부정 선거의 달인 시나가와 야지로,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있다. 요시다 쇼인은 이토에게 그다지 관심이 없었고 본인도 쇼인에게 큰 영향을 받지 않은 듯 하다. 오히려 타카스기 신사쿠이노우에 가오루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는 것이 학계의 중론이다. 이노우에 가오루와는 나이 차이도 있고, 계급 차이도 있었지만 절친한 평생의 동지였다.

이토가 있던 조슈 번은 막말기에 존황양이를 주도한 대표적인 세력이었다. 막부가 덴노의 허락을 받지 않고 미일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자 가장 격렬하게 막부에 반대하던 지역이었고(도막) 이런 존황양이 세력을 억누르기 위해 막부의 정치가였던 이이 나오스케는 안세이의 대옥사를 일으켜 요시다 쇼인을 처형한다. 탄압받을수록 조슈 번은 더욱 더 외국인에 대한 테러와 막부 인사들에 대한 테러를 자행하였다. 이토는 그 일원 중 한 명이었다. 19살 때인 1862년 다카스키 신사쿠, 이노우에 가오루 일당이 주도해서, 에도의 시나가와에서 건설 중이던 영국 공사관 방화 사건에서 불을 붙이는 역할을 한 적도 있고, 본인은 부인했지만 천황의 퇴임을 주장한 국학자를 암살하기도 했다(1863년 2월).

조슈 번은 서양을 몰아내기 위해선 서양의 기술을 배워야한다면서 이토를 포함한 5명을 영국에 유학보낸다(조슈 파이브). 이토는 영국으로 가는 길에 들린 상하이에서 아편전쟁 이후의 중국의 실태를 실감하고, 영국에서는 칼리지 오브 런던(University College London)에서 영어화학을 공부하였다. 이 때 배워놓은 영어 실력은 그가 크게 출세하게 되는 배경로 남는다. 그는 건축물, 공장, 증기기관를 견학하면서 압도적 국력 차이를 체감하고 쇄국에서 개항으로 돌아선다. 붙임성이 좋은 이토는 영국에서 외교관인 어네스트 사토(Ernest Satow)와 연을 맺는다.

파일:external/0d4e8b2f3608aca454561d0453403de3f3d12735ca858a0eb4275720f2990dfb.jpg
조슈 파이브 (오른쪽 맨 뒤가 이토)

그러나 이들이 요코하마 항구를 출발한지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조슈 번이 영국 함선에 포격을 가하여 시모노세키 전쟁이 일어나자 영국에서 이 소식을 알게되고 영국 생활 6개월 만에 귀국을 결심, 전쟁을 중재하려고 노력했다. 전쟁은 영국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다. 귀국한 뒤에는 조슈 번에서 일하며 조슈번이 영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과 벌인 시모노세키 전쟁의 영국과의 중재 회의에 통역으로 참여했다. 이때 수완을 발휘해서 조슈가 부담해야할 전쟁배상금을 막부 쪽으로 돌리는 데 성공한다.

막부(幕府)와 조슈번 사이에 내전(幕長戰爭 '제1차 조슈 정벌')이 터진 뒤 막부와의 타협을 생각하던 보수파를 몰아내는 데 참여,(타카스기 신사쿠의 시모노세키 거병) 이후 조슈번을 주도하게 된 소장파의 일원이 된다. 타카스기의 거병에 맨 먼저 참여했고 이것은 일생 자랑거리가 된다.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맨 나중에야 거병에 참여했는데, 당연히 이토의 반응은 "야마가타 군대들 지금까지 뭐했어?" 이후 이토는 평생 이 일을 들먹이면서 야마가타의 기를 죽였다.


2.2. 신정부 수립 이후


조슈 번은 도막파의 일원으로 사츠마 번과 동맹을 맺어 막부군을 상대로 연전연승하면서 승승장구하였고 입지가 좁아진 막부는 대정봉환으로 그들에게 빌미를 주지 않으려 하였다. 그러나 곧이어 일어난 무진전쟁으로 도막파가 구 막부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자, 도막파가 정국을 주도하였고 조슈 번 소속의 이토도 신정부의 일원으로 참여한다. 이토는 1870년 경제제도, 화폐제도를 조사하기 위해 미국으로 유학하였고 이듬해 그는 불평등 조약을 개정하기 위해 파견된 이와쿠라 사절단의 멤버로 발탁되어 미국, 영국,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스위스, 독일, 러시아 등을 견학한다. 이토는 사절단 파견 중 정부의 실세였던 오쿠보 도시미치와 친분을 쌓아 그의 신임을 얻었다. 이토는 오쿠보 밑에서 일하면서 도사, 히젠(사가), 사쓰마 사이에 벌어진 정한 논쟁 등의 여러 정쟁에서 파벌을 중재하면서 수완을 발휘하였다. 후에 이토는 사이고 다카모리사임반란, 기도 다카요시의 병사, 오쿠보 도시미치의 암살 등으로 정권 실세가 잇따라 사라지는 공백에서 최고 실권자가 되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Iwakura_mission.jpg
이와쿠라 사절단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이토)

이토는 일본이 서구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헌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헌법에 대해 연구하기 위해 1882년 영국과 독일에 유학한다. 18개월 동안의 유학한 배경으로 헌법을 작성하고 내각제를 조직하여 그가 초대 내각총리대신이 되었다. 그 배경에는 그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영어 실력이 뛰어나다는 점이 한 몫하였다.

파일:external/www.weblio.jp/souri01.jpg

그 후 초대 추밀원 의장, 의회 창설과 함께 초대 귀족원 의장에 취임하는 등 정상가도를 달렸다. 이어 메이지 덴노의 신임을 얻어 원로의 지위를 얻으면서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함께 원로 정치를 주도하였다. 멀쩡한 무사들조차 죄다 평민으로 격하되던 시절에 평민이나 다름없던 일개 하급 무사가 되려 공작과 온갖 '초대' 감투는 다 쓰는 출세를 한 것이다.


2.3. 1차 이토 내각


1885년 12월 22일 ~ 1888년 4월 30일. 각성 관제를 제정하고 관료 육성을 위해 제국대학(도쿄대학)을 설립하고 헌법과 황실 전범의 초안을 완성했으나 추밀원이 신설되자 의장에 취임하기 위해 총리직을 사임하였다.

이 시기 이토 총리는 각종 개혁 정책을 주도하였으나 정권의 위험요소 두 가지를 안고 있었다. 첫 번째는 로쿠메이칸 외교에 대한 국민들의 반발이었고, 두 번째는 히로부미가 각종 요직을 겸직하는 것에 대한 번벌들 사이의 반감이었다.

당시 이토 총리는 업무만 끝나면 로쿠메이칸으로 달려가 음주가무를 즐기고 파티에 참석한 여성들을 범하고 있었는데, 로쿠메이칸 외교의 본래 목적이었던 불평등 조약 개정에는 진척이 별로 없었다. 이로 인해 자유민권운동가들의 반정부 운동이 격화되고 있었다. 이에 이토 총리는 정부 밖에서 자유민권운동을 주도하던 지도자 중 하나였던 오쿠마 시게노부를 외무대신으로 임명하여 자유민권운동 세력의 한 축을 와해시키는 한편, 오쿠마에게 조약 개정의 전권을 맡김으로써 한 고비를 넘기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토가 헌법 제정, 황실 전범 제정 과정에서 덴노 교육을 목적으로 궁내 대신까지 겸직하자 번벌들의 불만이 높았다. 이토의 독주에 사쓰마번 출신들을 중심으로 불만이 제기되자, 이토 총리는 정부 내외로부터의 비판 여론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총리직을 사임, 초대 추밀원 의장으로 취임하여 헌법 제정에 전념하게 된다.


2.4. 대일본제국 헌법 제정


히로부미는 내각총리대신 자리에서 물러난 후, 이토 미요지, 이노우에 고와시, 가네코 겐타로, 독일인 법률 고문 뢰슬러 등과 함께 헌법 제정에 전념하였다.

히로부미는 헌법 공부를 위해 프로이센으로 출국하기 전, 자신의 헌법은 "자유과격론자들에 대해 대항할 수단"이 될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대일본제국 헌법은 히로부미의 그 말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도록 프로이센 헌법을 모방하여 만들어졌다.

히로부미는 덴노를 서구 세계의 교황과 같은 것으로 설정하고, 행정부의 권한을 극대화하되 총리대신이 막부의 쇼군과 같은 독재자가 되는 것을 막고, 동시에 무책임하고 무식한 민중을 언제라도 제압하여 시민혁명 없이 일본을 발전시킬 헌법을 만들었다. 더불어 일본의 국회, 재판소, 기본권, 투표권 등은 신성불가침의 덴노로부터 하사받은 은혜로 간주하였다. 따라서 국민주권이 아닌 덴노주권이 선포되었다. 일본 신민들은 덴노에게 충성으로써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논리도 동시에 성립됐다. 이는 히로부미가 프로이센에 유학하면서 습득한 경험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었다.

히로부미는 이와 같은 흠정헌법을 통해, 각 지방의 일본 국민들을 덴노의 신민으로 통합하여 봉건제의 잔재를 청산하고, 서구사회의 삼권분립도 동시에 일본에 구현하려 했다. 덴노와 행정부의 막강한 권한은 국회의 간섭 없이 여러 신하들이 회의를 통해 행사함으로써, 무식한 일본 민중들에 의해 방해받지도 않을 것이며 특정 한 개인에 의해 남용되지도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이로써 2차대전 이전의 일본 정치는 다분히 과두정의 요소를 띠게 되었다.

헌법 초안은 추밀원의 심의를 거치면서 몇몇 조항이 수정되었다. 그러나 민간의 반발을 우려해 헌법 조항과 관련된 어떤 내용도 외부로 공개되지 않았다. 1889년 2월 11일, 히로부미가 약 10년에 걸쳐 연구한 결과물인 대일본제국 헌법이 제정되었다.

이 헌법에 대한 일본 국민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당시 일본의 일반 국민들은 헌법이 무엇인지도 잘 몰랐고, 그저 정부가 조성한 축제 분위기에 편승해 기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메이지 유신을 이끈 번벌들은 덴노의 대권이 광범위하게 인정되었으며, 국회의 권한이 크지 않은 것에 만족하였다. 막부 시절의 주요 기득권들도 화족 제도를 통해 배려받았기 때문에 큰 불만이 없었다.

한편 자유민권운동가들은 다소 불만을 갖기는 했으나 대체로 환영하였다. 당시에는 덴노의 신격화가 꽤 진행돼서 대놓고 불만을 표출하기 어려웠다는 점도 감안하긴 해야 하지만, 자유민권운동가들은 비록 중의원의 권한이 약하더라도 예산안만큼은 중의원에서 먼저 심의한다는 것에 만족했다. 예산안 통과를 거부하며 국회의원들이 드러누워버리면, 예산안 통과를 미끼로 내각과 협상하여 다른 정치적 이득을 따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일본제국 헌법이 제정된 날, 중의원 선거법도 제정되었다. 이로써 일본은 아시아 최초로 국회를 개설한 국가가 되었다. 히로부미는 헌법 제정 공로로 훈일등욱일동화대수장을 받았다. 히로부미는 헌법 조항에 대한 주석이 달린 "헌법의해(憲法義解)"라는 책을 집필하여 입헌정치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대일본제국 헌법은 일본 국민을 덴노의 신민이자, 덴노, 즉 신의 선택을 받은 민족으로 만드는 제도적 근간이 되었다. 또한 통치 질서를 유지하는 핵심 권한(군 통수권, 문무관 임면권, 계엄령 발동, 조약의 체결과 비준, 선전포고 등)은 국회의 간섭을 받지 않고 덴노의 이름으로 행사할 수 있게 하였지만, 그 권한들이 여러 신하들(훗날 원로, 중신들이 덴노의 대권을 행사)의 대화와 타협을 거쳐 행사되게 함으로써 권력 남용과 독재자 출현을 방지하려 했다.

한편으로 히로부미는 일본 국민들의 교육 수준이 높아짐에 따라, 유권자의 숫자를 늘려나가려 했다. 또한 점차 민권을 신장하는 방향으로 헌법 조항(특히 제67조)을 개정 또는 폐지하고, 헌법 조항(특히 제11조)의 해석을 달리하거나 하위 법령으로 보완하는 방식을 취하려 했다. 히로부미 본인은 이를 점진적 실리주의라고 칭했다(그러나 히로부미 본인은 유권자의 숫자를 늘리는 데만 어느 정도 성공했고, 내각총리대신도 군대를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도록 제11조를 손보는 데는 실패했다).

히로부미는 이같은 헌정질서를 구축함으로써, 시민혁명 없이 부국강병과 제국주의를 향한 험난한 여정을 효율적으로 마무리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실제로 메이지 시대, 다이쇼 시대에는 히로부미가 강조한 중용과 점진적 실리주의가 돋보인다.

그러나 "신의 선택을 받은 일본 국민"이라는 구호는 선택받지 못한 민족에 대한 지배와 무모한 제국 팽창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덴노의 대권은 군인과 중신들의 균형감각이 무너질 때 위험천만하게 악용될 소지가 컸다. 덴노에게 입은 은혜를 죽음으로 갚으라는 구호 아래 국민들을 무제한적으로 동원하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국회와 내각총리대신이 이를 제어할 수 있다는 규정은 헌법 조문 중 어디에도 적혀있지 않았다. 히로부미가 구축한 헌정 질서 아래에서 내각총리대신은 군 통수권도 문무관에 대한 임면권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국회가 내각에 대해 직접 책임을 물을 장치 또한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총리대신이 대신 하나를 해고하려면, 스스로 그만두게 괴롭히거나 자신의 내각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일본군 인사들이 내각에서 파업을 벌이는 식의 분탕을 쳐도 이를 통제할 법적 수단은 없었던 셈이다. 국민적 존경을 받는 정치인, 또는 강력한 파벌, 자금력, 실무적 감각을 두루 갖춘 정치인이 있을 때는, 그 정치인이 개인의 파워, 덴노 또는 국민들을 앞세워 군인들을 통제할 수 있었다. 일본에서는 그 역할을 원로 정치가들이 잘 수행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원로들이 세상을 떠난 후에는 얘기가 달라졌다. 일본 국민들은 대공황을 비롯한 온갖 사회 불안 요소의 타개책을 전쟁에서 찾으려 했다. 정치인 대부분은 보통선거 실시 후 천문학적 선거자금을 동원하느라 국민적 불신을 받고 있었다. 이로써 일본 군부를 통제할 사람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훗날 일본군은 헌법 제11조를 악용하여 폭주하고 말았다.

2.5. 2차 이토 내각


이토 히로부미 인생의 최전성기

1892년 8월 8일 ~ 1896년 9월 18일. 청일전쟁을 지휘하고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하여 매듭지었으며 이 기간에 을미사변이 일어나기도 했다.

오쓰사건과 만용 연설 등으로 제1차 마쓰카타 내각이 만신창이가 되자, 마쓰카타 총리는 정권 연장을 위해 선거간섭(부정선거)을 획책하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부정선거에 강하게 반대하였으나, 시나가와 야지로 내무대신은 이토 히로부미도 예계령(건달 등을 처벌하던 법률)으로 응징하겠다는 식으로 대들었다. 훗날 시나가와는 이토 히로부미의 혐오를 받고 정계에서 축출당한다.
부정선거에도 불구하고 민당이 승리하자, 더 이상 정권 유지가 어려워진 마쓰카타 총리는 사임했고, 그 후임으로 이토 히로부미가 취임했다. 이토 히로부미가 부정선거에 반대하던 모습이 국회의원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번벌타도를 주장하는 사람들 일색인 중의원은 이토에게도 큰 부담이었다. 이에 이토는 원로들을 총동원하여 내각을 구성했다. 제2차 이토 내각의 당면 목표는 불평등조약 개정, 그리고 임박한 청일전쟁의 원활한 수행이었다.

이토 총리는 무쓰 무네미쓰 외무 대신과 함께 영국과 협상하여 치외법권 철폐, 주요 수입품목에 대한 관세 인상을 골자로 하는 불평등 조약 개정에 열을 올렸다. 그런데 중의원의 오쿠마 시게노부를 중심으로 한 개진당 세력과, 이토 총리에게 찍혔던 시나가와가 이끌던 대일본협회 등이 불평등 조약 개정에 문제를 제기했다. 이들은 "치외법권만 철폐하는 것은 있을 수 없으며" 일본이 진정한 주권국가가 되려면 "관세자주권까지 회복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만약 영국이 이에 응하지 않으면 "기존 조약을 파기해서라도" 영국을 짜증나게 하면 된다는 강경 일변도의 주장을 펴고 있었다.

이토 총리는 대외강경파들의 주장이 영국을 분노하게 할 뿐이며, 그나마 얻을 수 있는 눈앞의 성과마저 물거품으로 만든다고 생각했다. 이토 총리는 이타가키 다이스케를 중심으로 하는 자유당 세력과 연대하였으나, 중의원의 반대를 물리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토 총리는 중의원을 해산해버렸다. 그러나 그 다음 선거에서도 이토 총리의 반대편에 서있는 국회의원들이 다수 당선되었고, 국회의원들을 관직으로 매수하기 위한 정치공작이 무위로 돌아가자 다시 국회를 해산해버렸다. 자신이 원하는 결과가 나올 때까지 선거를 다시 하겠다는 식으로 이토 총리가 국회를 무시하자 일본 정치는 엉망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이토에게 호재가 닥쳤다. 동학농민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당시 이토 총리 본인은 청일전쟁에 반대하며 이홍장과 접촉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홍장으로부터 "조선은 청의 속방이며 일본은 간섭하지 말라"는 대꾸를 받고, 이토 총리의 대청외교가 연약하다는 비판이 쏟아지자 최종적으로 전쟁에 동의하게 되었다.

풍도해전에서 일본 해군이 압승을 거두자 이토 총리에게 반대하던 국회의원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이토 총리를 욕하던 국민과 신문들은 이토 총리를 찬양하느라 바빴다. 이토 내각이 제출한 특별예산안은 국회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되었으며, 개정된 조약에 대해 감히 반대하는 국회의원도 없었다. 게다가 이토 총리는 메이지 덴노의 배려를 받아 문관으로서는 유일하게 대본영 회의에 참석하여 전쟁을 지휘하는 등, 최고의 권세를 누렸다.

청일전쟁의 승리로 이토 총리의 장기 집권이 가능해졌으며, 높은 지지율을 바탕으로 이토 총리는 일본 민법 제정을 완성하여 근대 법전의 정비를 완결하였다. 제2차 이토 내각의 뒤를 이어 집권한 마쓰카타 총리는 청나라로부터 받을 배상금을 전부 영국 파운드 금화로 받아 금본위제를 정착시키게 되었다.

그러나 하늘을 찌르던 이토의 권세도 국채 모집에 실패하면서 무너지기 시작한다. 이 무렵 이토는 마쓰카타 마사요시 대장대신이 말을 안 듣는다는 이유로 해고해버리면서 그로부터 원한을 샀고, 마쓰카타의 후임자는 그다지 능력이 좋지 않은 편이라서 국채 모집에 실패했다. 이토에게 해고당한 마쓰카타는 이토의 안티팬 중 하나였던 오쿠마 시게노부와 손을 잡고 진보당을 출범시키며 이토 내각 타도를 외치기 시작했다.
이토는 최대 안티팬이었던 오쿠마 시게노부와 마쓰카다 마사요시 중 한 명을 입각시켜 국채 모집을 해보려 했으나, 그들 모두 이토 내각에 입각하기 싫다는 뜻을 표명했다. 마침 이토는 스트레스 때문에 위장병이 생겨서 더 이상 총리직을 수행할 수 없는 지경에 몰려있었다. 이토 총리는 사임했고, 그 뒤를 이어 제2차 마쓰카타 마사요시 내각이 성립했다.

마쓰카타 마사요시 내각에 입각한 각료 중 이토의 친구, 후계자라고 볼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굴욕을 맛본 이토는 해외여행을 다니게 된다.

2.6. 3차 이토 내각


1898년 1월 12일 ~ 1898년 6월 30일. 중의원을 해산하고 국무회의에서 신당 결성을 주장하다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반대에 봉착하여 총리직을 사임하였다.

제2차 마쓰카타 내각은 오쿠마 시게노부와 연대하여 금본위제를 정착시키는 등의 성과를 올렸다. 그러나 지조 증징 문제를 둘러싸고 마쓰카타 총리와 오쿠마 간에 합의가 이뤄지지 않으면서 내각은 제1차 마쓰카타 내각처럼 만신창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마침 러시아가 한반도 진출을 모색하면서 대외적 리스크까지 가중되자 마쓰카타 총리는 사직서를 내버렸다.

번벌들은 한편으로는 중의원의 국회의원들을 설득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러시아와 협상까지 진행할 수 있는 사람은 이토 히로부미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이토 히로부미에게 내각을 조각하라는 대명이 내려졌고 제3차 이토 내각이 성립되었다.

먼저 이토는 대외중립을 선포하고 러시아와 협상을 진행, 러시아와 니시-로젠 협정을 체결했다. 이로써 러시아는 한반도에 군사적으로 개입하지 않는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이 약속은 머지않아 깨지게 된다). 또한 타이완의 안전 보장을 위해 청나라와 협상을 진행하였다. 그 결과, 청나라는 대만과 인접한 복건성을 어느 나라에게도 할양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외교와 달리 내정은 엉망이었다. 이토는 자유당 세력과 연대하여 지조 증징을 해보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들은 증세안 통과를 대가로 "대신 자리를 비롯한 관직"을 달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이토 총리는 중의원의 국회의원들이 삼국 간섭을 굴욕이라고 외치면서도 증세안에는 반대하고, 증세안 통과를 미끼로 뇌물을 요구하는 것에 분노하고 있었다. 이토 총리는 국회의원들의 본심이 민생을 돌보는 데 있지 않고, 지조 증징 반대 투쟁을 더욱 열심히 해서 자신으로부터 뇌물을 얻어내는 데 있다고 생각했다.

몹시 화가 난 이토 총리는 국회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이토 총리는 증세안을 제출함과 동시에, 중의원에서 싫어할만한 선거법 개정안을 제출하려 했다. 이 선거법 개정안은 유권자 확대는 물론이고 농촌 출신 국회의원 숫자를 축소시키고 도시의 지역구 숫자를 늘리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었다. 이는 당시 국회의원의 다수를 차지하던 지주층의 힘을 빼겠다는 의도였다.

이토 총리의 화풀이성 법안 제출에 대해 소네 아라스케, 이토 미요지, 사이온지 긴모치, 이노우에 가오루 등을 비롯한 각료들은 이토 총리에게 재고를 요청했다. 이토는 이에 반발하듯 선거법 개정안과 지조증징안을 손수 만들어 중의원에 제출하는 패기를 보였다. 중의원의 국회의원들이 비웃기 시작하자, 이토 총리는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계엄령 발동과 국회 해산을 결행해서라도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겠다는 협박을 일삼거나, "차라리 중의원의 국회의원들에게 정권을 맡겨보겠다, 도저히 못해먹겠다"는 식의 자포자기성 막말을 쏟아내며 정국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이토 총리는 국회의원들의 반발이 예상외로 심하자 지가 수정 법안도 같이 제출했다. 지가가 과도할 정도로 높게 측정된 지역의 지가는 깎고 지가가 과소평가된 지역의 지가는 인상하면, 지가가 인하된 지역의 국회의원들만큼은 자신의 지조증징안에 동의를 해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과는 이토 총리의 상상 이상으로 굴욕적이었다. 이토 총리의 지조 증징안은 중의원에서 찬성 27표, 반대 247표라는 압도적 스코어로 부결되고 말았다. 멘탈이 무너진 이토 총리는 중의원을 해산하고 집으로 가버렸다.

이토 총리는 자신이 직접 정당을 만들어 중의원을 장악해서라도 증세안을 통과시키겠다고 친구들에게 말했다. 그러나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정당이 내각을 장악하면 일본은 그리스처럼 될 것이라며 강하게 반대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토는 일전에 말했던 대로 중의원의 정당에게 정권을 넘겨주겠다는 결심을 굳히고, 자신의 후임으로 오쿠마 시게노부를 지명했다. 이토는 다시 한번 해외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2.7. 4차 이토 내각


1900년 10월 19일 ~ 1901년 6월 2일. 이전까지는 무소속 총리였지만 이때는 입헌정우회를 창립하고 초대 총재로서 총리직에 취임하였다. 허나 내부 분열이 일어나면서 사임하였다.

제3차 이토 내각이 중의원의 국회의원들에 의해 붕괴된 후, 이토는 자신이 직접 중의원을 장악해 정당이기주의와 뇌물의 악습을 바로잡고 일본을 발전시키고야 말겠다는 야망을 품게 되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친분이 있던 자유당 인사들을 흡수하여 입헌정우회라는 신당을 창당하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스스로 그 총재 자리에 올랐다. 입헌정우회는 중의원의 과반을 장악한 제1당이었다. 이토 총리는 입헌정우회의 목표가 영국식 당파정부 건설에 있으며, 자신의 신당이 열강의 국제규범을 익히고 정당이기주의에 빠지지 않는 모범 정당이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한편 총리직을 수행하던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이토 히로부미를 경계하고 있었다. 야마가타는 지조 증징 등에 있어 자유당과 연대하였으나, 돌연 연대를 깨고 이토 히로부미를 다음 총리로 지명하였다. 입헌정우회는 당시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번벌 출신들 관료와, 자유민권운동을 하던 세력들의 연합체였는데 아직은 그 결속력이 단단하지 않았다. 야마가타는 입헌정우회가 자리를 잡기 전에 크게 흔들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다음 총리 자리를 이토에게 넘겨주었던 것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제4차 이토 내각을 출범시키고, 육군대신, 해군대신 및 외무대신을 제외한 대신 자리를 입헌정우회 회원으로 채워넣는 사실상의 정당 내각을 성립시켰다.

하지만 이토 총리에게는 두 가지 악재가 있었다. 첫 번째는 미국발 경제위기로 인한 일본의 불황이었고, 두 번째는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공격이었다. 야마가타는 먼저 자신이 육성해온 관료조직, 특히 귀족원 파벌들을 동원해 이토 내각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마침 이토 내각의 체신대신이었던 호시 도루의 뇌물 스캔들이 불거졌다. 귀족원에서 이토 내각을 비판하자, 이토 총리는 호시 도루가 사임하도록 설득하고 그 자리에 하라 다카시를 임명했다.

그러자 자유민권운동을 하던 세력들은 귀족원의 분위기만 살펴 대신을 쫓아낼 수 있냐며 이토 총리에게 반발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입헌정우회 내부의 파벌들 사이에 소동이 벌어졌다.

마침 일본 경제의 불황이 최고조에 달하면서 특별 예산안 편성에도 차질이 빚어졌다. 의화단 운동 당시 일본군이 지출한 전비를 메우기 위해 특별 예산안이 편성되었는데, 이토의 입헌정우회가 제1당이었던 중의원에서는 통과되었으나, 야마가타가 장악한 귀족원에서는 이토 내각의 예산안에 반대하기 시작했다. 몹시 화가 난 이토 총리는 메이지 덴노를 움직여 귀족원을 제압하는 초강수로 대응했다. 이토를 줄곧 신임해왔던 메이지 덴노가 "귀족원은 이토 내각을 도우라"는 취지의 명을 내리자 예산안은 간신히 통과되었다.

일본의 불황은 공공사업 추진에도 지장을 주고 있었다. 기존의 철도 부설 사업까지 중단하지 않으면 예산 조달이 어려운 형편이었다. 이에 이토 총리가 공공사업의 중단을 꾀하자, 입헌정우회의 지역구 국회의원들은 "지역 발전 공약 없이 어떻게 선거를 치르냐"며 이토 총리에게 덤벼들기 시작했다. 호시 도루를 해임시킬 당시의 계파간 앙금이 사라지지 않은 상태에서 공공사업 중단 문제까지 쟁점이 되자 내각은 만신창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토 총리는 당원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어쩔 수 없이 공공사업 추진을 밀고 나가는 대신, 군비를 감축하고 공무원 숫자를 줄여 재원을 조달하려 했다. 그러나 이는 야마가타가 육성해온 관료들과 일본 육군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이토는 야마가타에게 군비 감축, 관료 감축 등을 골자로 하는 법안 통과를 위해 귀족원 의원들을 설득해달라며 도움을 청했다. 그러나 야마가타는 자신의 후계자인 가쓰라 다로를 총리로 지명하려는 구상을 품고 있었고, 궁지에 몰린 이토의 구원 요청을 거절하였다.

다시 위장이 나빠지기 시작한 이토 총리는 마지막 카드를 꺼내들었다. 이토는 자신의 후임으로 그의 절친한 벗이었던 이노우에 가오루를 지명했다. 그러나 이노우에는 야마가타의 방해 등으로 인해 충분한 숫자의 각료를 확보하지 못했고 조각에 실패하고 말았다. 이토 총리의 후임은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후계자였던 가쓰라 다로로 정해졌다. 이 일로 이토와 야마가타의 사이는 크게 벌어지고 말았다.

제4차 이토 내각이 야마가타의 모략으로 와해된 이후부터 이토는 더 이상 총리직을 맡지 않게 되었다. 이때부터 이토는 원로로서 일본의 대외정책 전반을 살피면서도, 자신의 수제자였던 사이온지 긴모치를 내세워 일본 내정에 관여하였다.


2.8. 러일전쟁 개전과 한국 통감 부임


제4차 이토 내각이 붕괴된 후, 히로부미는 예일 대학교에서 명예 법학 박사 학위를 받기 위해 출국했다. 이 무렵 일본 정계에서는 영일동맹 체결을 두고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히로부미는 영일동맹이 러시아를 자극할 뿐이라고 생각했다. 히로부미는 자신의 오른팔인 이노우에 가오루와 후계자 사이온지 긴모치를 조종하여 영일동맹 반대 공작을 펼치기 시작했다. 히로부미 본인은 예일대의 학위를 받으러 가는 길에 러시아를 들러 러일협상을 개시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히로부미가 제대로 된 협상을 개시하기도 전에 일본의 강경파들은 영일동맹을 체결해버렸다. 히로부미의 위세는 제2차 이토 내각을 이끌던 전성기에 비하면 말이 아닐 정도로 무너져 있었다. 이때의 일로 히로부미와 일본 내 강경파들의 사이는 계속해서 벌어졌다.

한편 히로부미는 예일대에서 학위를 받고 당 총재로서 입헌정우회를 이끌었다. 그러나 가쓰라 총리와 입헌정우회가 예산안을 두고 갈등을 벌일 때 가쓰라 총리와 타협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당원들로부터 큰 불신을 샀다. 대외강경파들 역시 히로부미가 관료개혁, 군제개혁을 외치고 러시아에 대해 우호적인 것에 불만이 많았기 때문에 히로부미를 쉴새없이 흔들어댔다. 히로부미는 입헌정우회 내에서 고립되었다. 이때부터 히로부미의 후계자였던 사이온지 긴모치가 입헌정우회를 이끌어 나갔다.

마침 러시아는 대한제국의 용암포를 조차하며 일본을 압박했다. 의외로 러시아가 강하게 나오자 큰소리를 치던 대외강경파들도 겁을 먹었다. 러시아에 도저히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한 일본군 인사들과 강경파들은 히로부미를 내세워 러일협상을 전개하였다.

먼저 히로부미는 이노우에 가오루를 내세워 남만주에 대한 일본의 이권까지 요구해봤으나 러시아로부터 거절당했다. 사실 이 제안은 거절당할 걸 알고 제안한 것에 가까웠다. 문제는 러시아의 황제 니콜라이 2세가 답장을 너무 느리게 하는 데 있었다. 러시아는 일본이 보낸 외교 서한에 약 50일만에 답장했다. 니콜라이 2세는 일본 같은 약소국에 답장을 빨리 하면 자신의 위신이 깎인다고 생각해 답신을 늦게 했다. 하지만 일본의 강경파들은 러시아가 답장을 느리게 함으로써 시간을 벌고, 뒤로는 전쟁준비를 하는 것이 틀림없다고 주장했다.

히로부미는 주위의 반대를 물리치고 만한교환론으로 양보하는 모습을 보였다. 만한교환론의 핵심은 "러시아는 만주에서 일본은 한반도에서 우월한 지위를 점하는 대신, 일본은 한반도를 군사적으로 활용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러시아는 거절했다. 이때도 답장은 느리게 왔다. 이때문에 히로부미와 그의 친구 이노우에 가오루는 점점 고립되고 있었다.

히로부미는 1903년 12월 16일에 세 번째 외교 서한을 보냈으나, 답장은 다음 해 1월 6일에 도착했다. 최후통첩이었던 네 번째 서한은 같은 해 1월 16일에 보냈는데, 2월 3일까지도 답장이 오지 않았다. 결국 일본은 러시아가 시간을 끌며 전쟁 준비를 하고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일본군 인사들은 러시아한테 선제공격을 당하면 무조건 패전할 것이므로, 선제공격을 해서 무승부로 전쟁을 마무리짓고 강화조약을 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협상 동력을 상실한 히로부미 역시 개전에 동의하였고 1904년 2월 4일에 러일전쟁이 시작되었다.

한편 니콜라이 2세의 네 번째 답장은 2월 7일에 도착했다. 그의 답장은 히로부미의 만한교환론을 거의 대부분 충족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이 선제공격을 개시한 뒤에 도착한 답장이었기 때문에 휴지조각이 되고 말았다. 한편 전쟁의 전개는 일본군의 예상과 크게 달랐다. 러시아군은 전쟁 준비를 별로 하지 않은 상태였다. 러일전쟁 초반에는 일본군이 연전연승했다.

러일전쟁 개전 후, 히로부미는 고종 황제를 감시하고 미국과 영국에 일본의 입장을 선전하는 역할을 맡았다. 러일전쟁이 끝난 후에는 포츠머스 강화조약 체결을 주도했다. 당시 일본 국민들은 러시아로부터 배상금을 받고 블라디보스토크까지 할양받아야 한다며 폭동을 일으켰는데, 히로부미는 정적이었던 야마가타와 합세하여 계엄령을 발동하고 폭도들을 유혈진압하였다. 1905년 11월 17일에는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늑약을 강요하였다.

러일전쟁이 끝난 후, 정치인 히로부미의 앞길은 더 어두워지고 말았다. 히로부미는 영일동맹과 러일전쟁 모두를 막지 못한 채 강경파들에게 공격당하고 있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승리는 일본군의 위상을 크게 끌어올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일본 군부와 대척점에 서있던 히로부미의 입지는 이전에 비해 더 좁아지게 되었다. 일본 군부는 한반도는 물론이고 만주 전체를 경영하려는 야심을 보이기 시작했으나, 이를 단독으로 제어할 힘이 히로부미에게는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히로부미는 한국 통감으로 부임하는 것이 상황을 반전시킬 돌파구라고 결론내렸다. 히로부미는 자신이 대한제국으로 가면 정적들의 방해를 받지 않을 것이라 판단했다. 히로부미는 한국 통치를 멋지게 성공시켜 일본으로 돌아와 일본군 인사들을 비롯한 자신의 안티팬들을 일거에 부수겠다는 야망을 품고 있었다. 히로부미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일본군과 강경파들은 히로부미가 알아서 일본을 떠나 있겠다고 하니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이로써 히로부미의 한국 통감 부임이 결정되었다.


2.9. 처참한 말로


1909년 러시아와의 회담이 예정되어 있던 하얼빈역에서 안중근에게 저격당하면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2.9.1. 암살 1차 시도


이토 히로부미가 을사조약을 하고 얼마 후 수원에 사냥을 하러 갔다. 이때 과천(오늘날의 안양시)에 원태우라는 농부가 있었다. 원태우는 조국을 도적질한 이토 히로부미와 그가 체결한 을사 조약에 크게 분노하던 상태였다. 그래서 이토 히로부미가 수원으로 놀러 갔다 돌아온다는 사실을 알아내자 길목에 매복해 있다가 열차 레일에 바위를 걸쳐서 열차를 전복시키려 했다.

원태우는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과 이토가 탄 열차가 지나갈 철로에 바위를 놓았다. 그러나 거사를 일으키기 직전 한 동료가 겁을 먹고 몰래 바위를 치우는 바람에 계획이 망했다. 원태우는 포기하지 않고 돌을 집어서 이토를 향해 힘껏 던졌고, 돌은 서리재 고개에서 달리는 기차로 날아가 유리창을 깨고 거짓말처럼 이토의 머리에 정확하게 명중되었다. 이때 깨진 유리 조각도 같이 이토의 얼굴에 무려 8조각이나 박혔다. 이토는 뇌진탕을 일으켰지만 동승하고 있던 주치의가 응급 조치를 해서 살아났다. 멀리서 던져 맞힌 사실을 보면 돌 던지는 솜씨가 여간 뛰어난 것이 아닌데, 조선 시대의 평민들은 석전이라는 돌 던지기 싸움 놀이를 심심찮게 했으니 거기서 비롯되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달리는 열차를 향해 돌을 던진 것에 대해 의혹을 제기하는 위키러들도 있었지만 이런 의문은 다음과 같은 당시 환경을 보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1905년 당시 기차 속도는 시속 20km~30km로 속도가 느렸는데 운전면허시험장에서 볼 수 있는 속도로 열차가 달렸다고 보면 된다. 게다가 돌팔매질을 한 장소는 당시 서릿재 고개라 부르던 곳으로 경사가 급하여 속도를 줄이며 넘어가야 할 정도였는지라 안 그래도 느려터진 열차가 서행을 해야만 하였다는 곳어서 맞추기가 용이했다. 또한 서리재 고개가 언덕을 깎아 기찻길을 놓았기에 비탈진 위쪽에서 아래쪽을 느리게 지나가는 기차 내부를 보기가 쉬운 점도 한몫 했다. 그 느린 속도로 달리는 열차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앉은 의자를 향해 돌을 던졌고, 유리창이 깨지면서 부상을 입었다. 이러한 과정상 의문점에 대해서는 원태우 문서 참조.

원태우는 바로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했는데, 이때 성불구자까지 되어서 후사를 남길 수 없는 몸이 되었다. 이후 일본 경찰들에게 시종일관 감시를 당하며 힘겹게 살다, 정말 다행히도 광복을 맞이하고 세상을 떠났다. 다만 한국 전쟁이 벌어지기 전에 사망했는지, 벌어진 뒤에 사망했는지는 불명.

안양역 1번 출구에 가면 원태우 의사의 모습을 새긴 동판이 있다. 그런데 그 동판이 역으로 통하는 에스컬레이터 한가운데 있는 데다가 제법 멀리 있어서 동판에 새겨진 글귀 읽기도 쉽지 않고 이름을 읽기도 어렵다. 안양 사는 사람 대개가 그냥 장식인지 누군가를 기리기 위한 동판인지 전혀 모른다. 게다가 농부인데 동판엔 갓을 쓴 선비로 표현되었다. 정말 제대로 표현한다면 23살의 농부로서 이토가 탄 기차를 향해 돌을 던지는 모습을 표현해야 할 것이다. 고증오류탁상행정의 표본이라 할 수 있다. 물론 혹여 의인의 모습으로서 격을 높아보이게 하려고 일부러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10] 생각해보면 농부가 부끄러운 것도 아니고 그럴 필요가 있을 것 같진 않다.


2.9.2. 암살 2차 시도(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


안중근하얼빈역에 이토 히로부미가 나타난다는 소식을 듣고 우덕순과 조를 나누어 우덕순은 채가구역을, 안중근은 하얼빈역에 매복했다. 그런데 기차는 채가구역을 통과하고 하얼빈역에 정차했다.

당시 이토는 이때 일행들과 함께 열차에서 내렸기에 누가 이토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오늘날과 같이 사진이 흔치 않았던데다 더욱이 원태우의 암살 미수 사건 때문에 그 후 이토는 자신의 사진이 시중에 유포되는 것을 극히 금지했다. 결국 안중근은 저격 대상인 이토가 코 옆에 점이 있다는 식으로 설명만 들어 알고 있었을 뿐, 얼굴을 모르는 상태에서 하얼빈역으로 가게 되었다. 또한 플랫폼에 이토가 하차했을 땐 워낙 많은 수행원들이 함께하여 도저히 누가 이토인지 분간할수 없었다. 이에 안중근은 체념했으나, 이토의 하얼빈 방문을 환영하는 현지 일본인 환영객들 중 누군가가 이토의 이름을 부르자 이토가 뒤를 돌아서서 손을 흔들어 준 덕에 안중근이 그 자의 얼굴을 보고 점 등을 확인하여 본인임을 알아보고 저격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정말 천재일우의 기회였다.[11]

그리고 그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안중근이 이토를 FN M1900[12]으로 3발 저격하고 그 주위의 일본 측 인물에게도 4발 저격했다. 1탄은 이토의 오른팔 윗부분을 관통하고 흉부에 박혔고, 2탄은 이토의 오른쪽 팔꿈치를 관통해 흉복부에 박혔으며, 3탄은 갈비뼈 아래로 들어가 허리에 박혔다. 3발 다 급소를 맞혔다고 한다.[13] 그리고 남은 총알로 일본 총영사 가와카미의 팔꿈치에 1발, 이토의 수행 비서 모리의 복부에 1발, 만주 철도 이사 다나카의 왼쪽 무릎에 1발, 만주 철도 이사 나카무라의 오른쪽 장딴지에 1발을 맞혔다. (네이버 캐스트 '안중근'과 원재훈의 '안중근, 하얼빈의 11일' 참조.) 하지만 민간인이 다칠 것을 우려하여 머뭇거리다가 체포당했다. 안중근은 체포당하면서 이렇게 외쳤다.

"Корея Ура! Корея Ура!(꼬레야 우라! 꼬레야 우라!)" [14]


20세기 초이지만 당시 러시아 측에서는 이토의 방문 모습을 영화로 촬영하고 있었고, 안중근의 거사 장면도 고스란히 영상으로 기록되었다. 일본 측은 촬영된 필름을 러시아로부터 구입하여 료고쿠 국기관에서 6일간 상영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현재는 거사 직전에 플랫폼을 걷는 이토의 모습과, 거사 직후 체포되어 압송되는 안중근의 모습이 담긴 수십 초 분량만이 남아 있다. KBS에서 사라진 저격 장면 영상을 러시아와 일본의 기록 보관소에서 뒤졌으나, 결국 발견에는 실패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안중근의 저격을 받은 직후 응급처치를 위해 열차 내로 옮겨졌다. 이토는 이때까지는 살아있었으나, 동반했던 비서 모리의 안부를 묻고는 이내 눈을 감았다.

그 외의 내용은 이 기사 참조.


2.10. 장례


사후 그의 유해는 하얼빈 만철병원(현 다롄대학부속 중산병원) 영안실에서 방부처리 후 입관됐고, 군함 아키츠시마에 운구되어 다롄항을 떠나 도쿄에 도착해 아카사카 관저에 안치됐다. 일본 정부는 유해 도착 전부터 장례 준비를 진행한 후 국장으로 정했다. 국장 당시 유가족을 비롯해 야마가타 아리토모, 도쿠가와 요시노부, 이노우에 가오루 등 국내 요인들과 허버트 키치너 장군 등 외국 사절들이 참석했으며, 대한제국 측도 조중응과 민병석 궁내부대신을 보냈다.

11월 4일, 히비야 공원에서 노제를 치르고 시나가와구 니시오이에 안장됐다.


3. 암살에 대한 논란


  •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것이 아니라, 독립군으로서 일본과 교전하였으며 그 결과 이토 히로부미가 전사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러한 주장의 연장선상으로 안중근 또한 일본 측에 "본인은 독립군 중장의 신분이니 전쟁 포로로 취급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제가 이를 인정하지 않았던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제3국의 입장에서도 이를 인정할 수는 없었는데 이는 당시 상황에 근거한다. 안중근은 당시 독립군복 등 자신의 군적, 즉 교전권자임을 상징하는 복장이 아닌 민간인으로 위장하여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법까지 들먹이지 않더라도 상식적으로 민간인으로 위장하여 공격하는 행위를 국가간의 교전으로 인정하면, 민간인을 위장한 적군으로 오해하여 민간인을 사살하는 등 여러 민간인 피해 위험성을 증가시키므로 이를 인정하지 않는 건 너무나 당연하다. 만약 이 주장이 맞으려면 다른 역사적 예에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하는데 민간인 옷을 입고 시리아나 이라크에서 테러를 저지르는 테러리스트들을 정식 군대로 인정해 줄 수 밖에 없다.

오히려 일제가 국제법을 위반한 부분은 암살 이후 안중근의 처우에 대해서가 아닌, 재판에서 사형에 이르기까지의 그 절차에 있다. 일제는 행정부의 명령으로 안중근을 사형하기로 결정한 뒤 이에 끼워 맞추는 재판을 진행하였기 때문이다. 다만 이 시기는 서구 열강 사이에서도 국제법 위반이 빈번하게 벌어지는 상황이었고, 삼권 분립이 확립되지 않은 국가도 상당수 있었음을 감안할 부분은 있다.

  • 또한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것이 아니란 주장 중에, 러시아군이 위에서 암살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로 서는 러시아와 일본이 둘 다 조선, 즉 러시아에서는 태평양 연안의 항구 등으로 이용할 수 있는 조선을 탐냈고, 일본에서는 섬에서 대륙으로 나가는 하나의 통로로써의 조선을 탐냈다. 여기서 일본이 조선을 독점하려고 러시아와 전쟁을 벌였으며, 러일전쟁의 결과는 러시아의 패배로 막을 내린다. 그러나 러일전쟁에서의 피해는 비등비등하였고 위 문서의 내용과 같이 러시아에게서 배상을 얻어내려는데, "협상하기 싫느냐"라는 압박과 조선의 독점권을 지켜야 하는 것 중 조선에 대한 독점권을 선택해 적은 보상으로 휴전 협상을 마무리하게 된다. 이 중 이토 히로부미는 러시아 재무상과 대화하기 위해 러시아의 블라디 보스토크로 가 대화를 하게 되는데, 여기서 이야기를 끝내고 돌아가는 중 안중근에게 총살당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문단의 첫 줄과 같은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기다리고 있던 역 건물 위의 러시아 저격수가 총을 쏴 죽였다고 하며, 이토 히로부미의 총상은 위에서 아래로 박혀있었다고 주장한다.

  • 야마가타 아리토모를 위시로 한 강경파인 일본 군부에서 언젠가는 처리해야 할 대상이었으며, 그에 따라 일본 군부의 훼방으로 비참한 말로를 보낼 운명이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안중근이 암살한 덕분에 영웅이 되었다는 말도 있다. 알다시피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 내에서 근대화를 이끈 주역이며, 여러번 총리를 맡은 거물급 인사인데, 조선에 대해서는 온건적#였던 인물이며, 조급히 한일병합을 추진하려고 하지 않았었다. 그와 반대로 일본 군부는 이토 히로부미 등의 온건파와는 다르게 즉시 한반도를 병합하는 것을 원하였다. 대륙침략의 야욕을 보이며 일본내각을 장악하여 추진력을 얻고자 했으나, 이토가 천천히 하자며 가로막고 있으니 일본 군부가 직접 암살사건을 꾸미거나 타살을 방치하도록 고의로 경비를 허술하게 했다는 것인데, 실제로 당시 하얼빈역에는 일본군보다 러시아군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당시 러일관계를 생각하면 객관적으로도 경비가 허술했다는 것은 틀림없다. 이토 히로부미가 일본 근대사에 큰 족적을 남긴 거물급 인물이었음을 감안하면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오히려 일본군이 더더욱 적극적으로 이토 히로부미의 안전을 지켜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4. 한일병합을 반대했던 인물?


이원복 교수의 먼나라 이웃나라 일본편 2권에는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의 근대화에는 동의했으나 합방에는 반대했던 인물로 그려져 있다.

실제로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이 조선을 합병하여 직접적으로 통치하는 것을 반대했다. 대신 조선을 만주국처럼 일본의 보호국 하에 두면서 조선인 스스로 자기네들만의 정부와 의회를 구성하게 하여 지배할 생각이었다. 그 이유는 자국의 근대화에 노력을 쏟고 있던 일본이 조선 합병에 따른 병참기지를 비롯한 병원, 철도 등의 기초 시설의 건설 부담을 일본 정부가 스스로 지기에는 예산이 부족했기 때문이며[15], 또한 일본에 대한 조선인들의 호감을 얻지 못한 상태에서 급하게 병합을 추진할 경우 조선인들의 반발도 생길 수 있고, 합병 시 미국, 영국, 프랑스 등 다른 열강들로부터 간섭과 마찰이 생길 것을 예상했던 측면도 있다.[16]

다음은 월간조선 1984년 10월호에 실린 내용으로 조갑제가 이토 히로부미의 손자 이토 도시오를 만나 인터뷰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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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반론


위와 같은 내용을 바탕으로 "한일합병을 반대한 온건파인 이토 히로부미가 암살당함으로써 한일 강제 병합 시기가 앞당겨졌다"는 얘기가 나오기도 한다.[17] 실제 강경파인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이토가 살아있을 때에는 조선 정책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을 자제하였으나, 이토가 암살당하고 나서 본격적으로 조선 정책에 대해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조선을 병합하여 직접적으로 지배하자는 것이다. 그 일환으로 당시 한국통감부 통감이었던 소네 아라스케를 사임시키고 자신의 뜻과 일치하였던 데라우치 마사타케를 통감으로 올렸으며[18], 결국 이토가 사망한지 1년도 안 돼서 조선은 합병된다.[19]

그러나 이토 히로부미는 급진적인 한일합병을 반대했던 것이지, 한일합병 자체를 반대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토는 한국을 괴뢰국으로 삼고 근대화를 시키는 과정에서 한국인들의 호감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고 봤기에 급진적인 합병을 꺼려한 것이다. 일본에 대한 한국인의 부정적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이토는 스스로 한복을 입기도 하고 1909년 순종의 전국 순행에 동참하는 등 일본에 대한 .[20] 그리고 이토는 을사조약 체결로 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들고 조선총독부의 전신인 통감부를 설치, 대한제국 군대해산 등 외교권과 사법권을 빼앗는 등 식민지화의 사전작업에 활발히 참가해 왔었다. 또한 일본에서는 조선을 일본에 종속시키려는 장기적 계획이 꾸준히 논의되고 있었고(대한시설강령 등) 일본의 각의는 1909년 7월 조선 병합을 가결하는 등 가쓰라 다로 수상을 필두로 병합을 이미 추진 중이었다.

결정적으로 이토는 한국통감부의 통치기간 동안 조선인들의 반발이 심하자 결국에는 병합에 찬성하기에 이른다. 1909년 4월, 가쓰라 다로에게 한국 병합에 대해 찬성하는 입장을 표명한 뒤 1909년 6월 통감 자리에서 사임했으며, 4개월 뒤인 10월에 하얼빈 의거가 발생했다.

만약 이토의 계산대로 반발을 최소화한 상태에서 합병이 온건하게 이루어졌다면 당시 조선인들의 일본에 대한 반감은 실제 역사에 비해 적었을 수도 있었다. 오히려 일본의 발전상과 문화에 감화된 당시 조선의 젊은이들이 한일 합방을 지지하는 데에 별다른 거부감을 지니지 않았을 가능성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어차피 2차 대전에서 일본이 패전하였다면 당시 조선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조선의 독립이 이뤄졌을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이토 히로부미는 당시 팽창주의를 부르짖던 일본 제국의 급진적인 군부 세력과 정치적으로 대립되는 위치에 있었다. 그는 무조건적인 전쟁보단 협상하는 것을 우선시하였고 타국을 합병하더라도 해당국 주민들의 지지를 얻는 것을 중요시하였다, 하지만 이토가 사망한 후 강경파들이 득세, 일본의 군국주의는 가속화됐다.[21]

이렇듯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였기 때문에 한일합병이 가속화되었다며, 마치 "한국 편에 섰던 온건한 일본 정치인을 죽였기에 안중근 의사의 의거가 결과적으로는 조선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가져왔다"는 식의 해석은 몰이해적인 시각이다.

정리하자면 이토 히로부미는 한일 합병을 반대했던 것이 아니다. 급진적인 합병을 반대했던 것 뿐이다. 그리고 이는 순전히 수지타산이 맞지 않고 급진적인 합병은 여러 부작용을 낳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 결코 대한제국을 위해서였던 것이 아니다. 그나마도 나중에 가서는 강경파들의 합병론에 찬성하는 입장을 밝혔기에 입장을 끝까지 고수했다고 할 수도 없다.

애초애 모로코, 베트남, 영국령 인도 제국 내 토후국의 사례에서도 그렇듯, 이 제국주의 시대에는 직접 합병과 통치가 아닌 외교권 박탈과 보호국화로도 사실상 그 나라의 식민지로 간주한다. 1910년 한일 합방을 일제강점기의 시작점으로 잡는 관점에 매몰되어서 그렇지 1905년 을사조약이 맺어진 시점에서 이미 한국은 일본의 영향권 아래 든 사실상 식민지였던 셈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이토는 한국 식민지화를 주도한 인물이 맞다.


5. 호색한


"남자의 배꼽 밑에는 인격이 없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는데, 여성 편력으로 덴노에게 야단을 맞았다는 야사까지 있을 정도니 그야말로 본인의 이야기라 할 수 있다. 관련 일화 중 어린애한테 손댔다는 이야기도 있고, 가면무도회 등에서 화려한 스텝으로 활약해 뭇 귀족 부인들과 바람을 폈다는 일화도 있는데 그 중의 한 명이 이와쿠라 토모미의 딸이었다. 다행인지 야마가타 아리토모와는 달리 돈엔 별로 관심이 없어서 그럭저럭 문제 없이 넘어갔다고 한다.[22]

한편 배정자를 수양딸로 거두었다는 둥, 애첩으로 뒀다는 둥의 소문이 유독 한국에서만 나돌고 있지만 사료적 근거는 전무하다. 이토 히로부미의 화려한 여성 편력은 워낙 유명한지라 그가 사망했을 때에도 여자 문제를 풍자하는 만화가 일본 신문에 실렸을 정도였다. 그래서 생전 사귀었던 여성들의 신상은 일본 언론이나 사학자 등에 의해 모두 밝혀졌지만 그 어디에도 배정자[23]의 이름은 없다. 실제로 배정자와 이토 히로부미 간의 비밀스런 관계나 출세 배경에 관한 일화의 출처는 모두 배정자 본인이거나 악랄한 그녀의 행적을 비난하기 위해 만들어진 세간의 소문이 전부다.

또한, 최승희와 함께 1920년대 - 1930년대를 풍미하였던 무용가이며 배정재의 조카인 배구자에 대해 사실은 이토 히로부미와 배정자 사이에서 태어난 숨겨진 사생아라는 소문이 꾸준히 돌았다. 배구자의 동생 배한라는 "언니가 이토 히로부미와 고모 배정자 사이의 딸이었던 까닭에."라고 직접 발언했었던 적도 있다. 그러나 이 배구자 또한 2003년까지 살면서 98세의 나이로 장수를 했는데 말년에는 자신이 메이지 천황의 10번째 딸이고, 할머니는 민자영 이고, 자신의 어머니는 조선의 공주라는 헛소리를 하고 다녔다. 메이지 덴노명성황후의 아들이다?? 두 사람이 모두 1851년생인데?? 자식을 0살에 낳은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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女ずき者の最後
호색한의 최후
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로 사망할 당시의 풍자화로, 그림자가 ''의 형상을 하고 있다.

살아생전 醉臥美人膝 醒掌天下權(술에 취해 미인의 무릎을 베고 눕고, 깨어서는 천하의 권력을 잡는다)라는 한시를 남긴적도 있다.

이토의 여색 밝힘은 해당 기사를 참조할것.


6. 평가


메이지 유신으로 대표되는 일본의 근대화를 이끈 점에서 자국에서의 역사적인 평가는 대체로 호의적이다. 그가 일본의 근대화 및 선진국으로의 급부상에 큰 기여를 한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일본 내에서는 이토 히로부미가 정치적으로 온건파 성향이 강했기에, 그가 사망하여 그의 정치적 노선을 계승할 인물이 없어 일본의 급진적인 군국주의가 심화되고 제2차 세계대전을 불러와 패망했다고 생각하는 학자들이 있다. 이토는 초대 일본 총리로서 입헌군주제의 확립에 큰 역할을 했으며,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같은 골수 천황주의 계열 보수파들과 대립하면서 일본의 근대화에 크게 기여한 것도 사실이고, 청일전쟁이나 러일전쟁에 대해 모두 개전에 반대하는 등 가급적이면 전쟁을 억제하려는 평화주의자적인 면모를 보였던 것 또한 사실이다. 이 점이 일본에서는 위인으로 취급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반대로 말하자면 일본의 제국주의를 더디게 만든 인물이었던 것이지만 말이다.

일본 근대사 학자인 마리우스 젠슨은 이토를 정치적 수완과 미래에의 비전을 동시에 갖춘, 메이지 원로들 가운데서 가장 뛰어난 인물로 평가했다.

한국에서는 만약 그가 1905년에 을사조약고종황제 강제 퇴위, 군대 해산 전에 이전으로만 한정되고 한국에 제국주의적 행위를 저지르지만 않았다면 오늘날에 그냥 한국계에선 사카모토 료마이와쿠라 토모미, 오쿠보 도시미치 정도의 일본을 근대화시킨 인물로 취급을 받았을지 모른다.

한편 이토 히로부미가 친한파이며, 한국 초대 통감으로 취임하여 근대 발전에 기여했다는 주장을 하는 이들도 있다. 이런 주장은 진보 중에서는 김기협 같은 작가들도 고종을 까다가 이런 주장에 동의하기도 한다. 이토는 완전 병합하기보다는 한국을 일본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보호국으로 만들고자 한 사람이다. 만약 이토가 계속 살아있었다면 과격한 군부보다는 정치가 출신들이 주도하여 한국이 독립보다는 자치령 정도에서 만족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천천히 잠식하다가 나라까지 빼앗는 19세기의 영국이 연상될 정도다. 하지만 이와는 반대로 1909년 대한 제국 주재 프랑스 영사는 본국에 보내는 보고서에 "이토는 보호령을 경영하는 영국의 방식보단 식민지로 편입시키는 우리 프랑스의 방식에 더 관심을 보이고 있다."다고 기록했다.[24]


7. 기타



  • 파일:attachment/일본 엔/yen3.jpg
1963년부터 1984년도까지 일본 1000엔권 지폐 도안 인물로 선정됐다. 1000엔권 인물 도안은 1984년 이후 한국 및 중국과 경제 교류가 늘어나면서 이 두 나라를 의식해 나쓰메 소세키로 변경하였다. 그 뒤 나쓰메 소세키가 그려진 지폐를 2004년까지 발행하다가, 현재는 노구치 히데요가 그려진 지폐를 사용한다.[25]

  • 당대 한국에서는 이토가 고메이 덴노를 암살했다는 음모론이 돌기도 했다. 메이지 덴노 대역설에서 더 나간 이야기로, 안중근이 이토를 저격한 뒤 주장한 이토의 죄목 중에 '대일본 명치 천황 폐하 부친 태황제 폐하를 시살(弑殺)한 대역불도의 짓'이란 내용이 있으며 최익현은 의병을 일으키는 격문을 통해 ''자기 나라 임금을 죽이고 다른 나라 임금까지 침범한 이토 히로부미는 마땅히 세계 여러 나라가 함께 토벌해야 할 역적'이라고 주장하였다.

  • 개인적으로 한국 문화에 관심이 많았다. 한국에 올 때마다 기생집에서 놀기를 즐겼으며 한국인 도 있었다. 고려 청자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가졌는데, 그가 조선 통감에 부임을 한 후에 일본 천황과 귀족에게 선물한다는 명목으로 전국에 있는 고려 청자들을 사들였다. 1906년에 통감부 법무원 재판장 평정관이었던 미야케 조사쿠(三宅長策)의 회고록『그때의 기억-고려 고분 발굴시대』에 의하면 '이토는 틈만 있으면 일본인을 시켜 '얼마든지 좋으니 고려 청자를 가져오라'했고, '몽땅 사자'는 식으로 마구 사들였다.'라고 증언하였다. 그가 개인적으로 수집하여 반출한 고려 청자의 수는 최소 1,000점 이상으로 추정된다.역사채널e - 고려 청자를 찾아라

  • 죽기 전에 규장각 보관 문서 1,079권을 대출했는데, 도중에 안중근에게 처단당하였기 때문에 반환하지 못했다. 현재까지의 연체료를 계산하면 대략 37억 원. 규장각 장서들은 현 일본 황실 도서관의 전신인 도서료에 보내졌고, 이 장서들은 이후 일본 황실 도서관인 궁내청 서릉부에 보관 중이었다. 원래 일본에서는 한국에 돌려줄 마음이 없었으나 2010년 하반기 간 나오토 내각과의 협의 결과 1,205권을 마침내 반환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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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복을 입은 사진도 여럿 남아있다. 이토의 평소 생각이 드러난다. 한국 그 자체의 문화와 사회는 인정한다는 메시지를 황실에 전하는 것이다. 심지어는 자기 본마누라 우메코(梅子)에게 한복을 입히고 함께 찍은 사진도 있다. 가운데의 쓴 노인이 바로 이토 히로부미다


  • 영어에 능통했다고 한다. 측근에게 "난 지금 당장 정치가 그만 둬도, 영어교사 정도는 할 수 있다"고 말하거나, 동료 정치가들에게 직접 번역한 영미 신문 발췌본을 돌리기도 했을 정도로 영어를 잘 했다고 한다. 이를 증명하듯 그는 실제로 UCL 화학부에서 수학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청일전쟁 후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을 때 이홍장[26]과 통역없이 영어로 교류를 했고 이완용과도 영어로 의사 소통을 했다고 한다.(이완용은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어를 못했다고;;)

  • 생전에 복어 를 좋아했다고 한다. 먹어보고 매우 좋아서 식용 금지를 해제할 정도로 복어 매니아다. 보다 자세한 사항은 복어 항목에 서술되어 있다.

  • 고향인 히카리에 이토 히로부미 기념공원이 있다.[27]

  • 놀랍게도 「동아찬영회」라는 팬클럽이 있었다. 총재는 장석주라는 친일파이다. 그는 동상을 세웠다고 한다!

  • 2020년 10월 21일 문체위 국정감사에서 전용기 의원이 확보한 사료를 통해 한국은행 본관 정초석(머릿돌)에 새겨진 '定礎'(정초) 두 글자가 이토 히로부미의 글씨로 밝혀졌다. #


8. 대중매체에서


  • 구한말 배경의 영화나 드라마에서 이 사람이 등장할 때는 배우 윤주상이 많이 연기하는 편인데, 실제로 많이 닮았다. 그는 2002년 KBS2 드라마 《명성황후》와 MBC 《너희가 나라를 아느냐》 , 2004년작 영화 《도마 안중근》에서 각각 연기했다.

  • 1959년작 영화 《고종황제와 의사 안중근》에선 배우 최남현이 연기했다.

  • 1972년작 영화 《의사 안중근》에선 배우 박노식이 연기했다.

  • 1979년 KBS-TV 8.15 특집극 《대한국인》에선 대배우 장민호가 맡았으며, 1998년 연극 《대한국인 안중근》에서도 같은 배역을 맡았다.

  • 1980년 MBC 8.15 특집극 《의친왕》 및 1984년작 《조선총독부》에선 배우 전운이 연기했다.

  • 1982년작 KBS 대하드라마 《풍운》에선 배우 이승호가 맡았다.

  • 1984년작 KBS 대하드라마 《독립문》에선 배우 김성원이 맡았는데, 그는 1990년 광복절 특집극 《왕조의 세월》과 1995년작 대하드라마 《찬란한 여명》에서도 각각 같은 배역으로 나왔다.

  • 1985년작 KBS1 국군의 날 특집드라마 《전웅실록: 오성장군 김홍일》에선 배우 박경득이 연기했다.

  • 1996년작 SBS 3.1절 특집드라마 《안중근》에선 배우 박근형이 맡았다.

  • 2010년작 SBS 드라마 《제중원》에선 성우 이광세가 연기했다.


  • 일본 근대사를 다룬 사극 드라마에 많이 나오는 인물이기도 한데, 특히 NHK 대하드라마의 경우 1967년작 <세 자매>부터 2015년작 <꽃 타오르다>까지 총 9작품이나 등장했다. 담당 배우로는 후쿠다 요시유키, 나카무라 아츠오, 이타미 주조, 게키단 히토리 등이 있으며, 이들 중 <꽃 타오르다>에서 이토 역으로 나온 게키단은 아이러니하게도 친한(親韓) 성향 인물이다.[28] 살짝 어리버리하고 심약한 인물로 나온다 보고있으면 참 답답하다

  • 전술한 이가라시 쇼 영화 <조슈 파이브>에선 배우 미우라 아키후미가 해당 인물을 연기했다.

  • 와츠키 노부히로의 소년만화 바람의 검심 원작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영화판에서 등장한다. 배우는 오자와 유키요시(小澤征悦). 비중있는 역할로 등장하지만, 닥친 상황을 극복하기보다는 허위 사실을 흘리게 해 능구렁이처럼 피해가거나 권력을 위해 사람을 아무렇지도 않게 희생시키는 냉혹한 정치인으로 그려진다. 한국에선 굳이 원작에 안 나오는 인물을 넣어서 논란을 일으킬 이유가 있냔 반응도 있었지만, 보여지는 모습은 작중 등장하는 이름 있는 유신지사 중에 가장 안 좋다. 처음 등장할 때부터 동행한 수행원이 우오누마 우스이에게 살해당하자 시시오 앞에서는 화도 못내고 도착하기 전에 죽은 거라고 발표하라며 사건을 은폐하고, 그 모습을 본 시시오가 그게 너희들 방식이라며 비웃는다. 그 이후 켄신을 체포하도록 전국에 포고를 돌리고, 켄신이 제 발로 잡혀 들어오자 온갖 소리를 다 붙여 켄신에게 시시오를 처단해 달라고 요구한다. 그래놓고는 후에 켄신이 연옥 호에 올라타고 시간이 오래 걸리자 아예 육상에서 포격을 가해 시시오와 켄신을 같이 매장시켜 버리려고 한다. 그리고 간신히 나룻배를 타고 일행과 불바다에서 탈출해 초죽음이 되어 돌아온 켄신에게 사무라이라고 부르며 경례를 붙이는 모습이 압권.[29]

  • 아이돌 사변에서는 6화에서 일본을 만든 정치인으로 등장해 주인공에게 조언을 해 주는 단역으로 등장한다.

  • 복거일 작가의 소설 비명을 찾아서에서는 안중근이 이토 처단에 실패해서 살아남는다. 이를 원안으로 한 영화 2009 로스트 메모리즈에서는 미래에서 건너온 일본 극우파인 이노우에의 도움으로 살아남지만 후반에 역사가 다시 바뀌면서 안중근에게 처단된다. 해당 영화에서 이토 역은 배우 우상전이 맡았다.




  •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에서는 무진전쟁에서 막부가 이기는바람에 어부로서 훗카이도의 하코다테에 은신중이다. 여전히 체제변혁을 생각중이며, 하코다테에서 대한제국 남부 지역으로 은신처를 바꾼다. 그러나 다시 큐슈로 탈출했다가 도쿠가와 막부의 사주를 받은 대한제국 제국익문사에게 체포된다. 이때 이토 히로부미 체포 작전의 현장 책임요원은 안중근, 이후 황제는 굳이 마지막 남은 도막파의 간부인 그를 처형해 순교자를 만들어 주기보다 평생 철창에 넣어두는 게 낫다며 그를 독도로 유배보낸다. 철창에 들어가면서 안중근과 하는 만담이 일품, 당시 기득권을 끌어내리고 황제를 올바르게 보좌하자는 근왕적 학생운동이 한창이었는데, 이미 절대권력을 확립한 황제가 쓸데없이 이들을 간접 지원해 혼란을 일으키는 이유가 뭐냐고 묻자, 안중근이 황제의 말, 즉 지금 괜찮다고 해서 개혁과 발전을 멈추면 쇠퇴해 과거에 묻힐 뿐이라는 말을 전해주자 한탄하며 "천년 만년 니들이 다 해먹어라." 라고 내뱉고는 순순히 감옥에 갇히는 것이 끝, 아마 독도에서 늙어죽었을 듯 하다.

  • 대체역사물 웹툰왕 그리고 황제에서는 한일합방에 대해 기술적인 입장을 견지한 것을 반영하여, 대한 제국을 합방하려는 야심을 품지만 전면전을 자제하고자 하고, 즉각 합방하자는 강경파들을 제어하며, 본인의 지시에 따르지 않고 강경파들이 자의적으로 저지른 귀국선 폭파 사건을 계기로 강경파들을 숙청할 생각을 품는 인물로 묘사되다가, 안중근에게 피격되지 않고 강경 군부의 쿠데타로 인해 감금신세가 된다. 최면어플의 사용자로 추정된다

  • 1979년작 북한 영화 <안중근 리등박문을 쏘다>에선 배우 황영일이 연기했다.


[1] 이름인 博文은 히로미(ひろふみ)라고 읽기도 한다. 인명에 들어가는 문(文)은 '후미(ふみ)'라고 읽는 경우가 더 흔하며 일본 위키피디아에는 '히로부미'와 '히로후미' 두 발음 모두 기재되어 있다. 물론 일본에서도 '히로부미'로 더 많이 알려져 있고 일본 교육 과정에서도 '이토 히로부미'라고 가르치는데, 일본 사람들(특히 학생들)도 이 사람 이름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헷갈려하는 경우(세 링크 모두 "伊藤博文"은 '이토 히로부미'라고 읽나요? '이토 히로후미'라고 읽나요?"라는 내용의 질문이다)도 적지 않은 듯하다. 이 항목도 '이토 히로후미'라고 검색해도 들어올 수 있다.[2] 허나 아래의 손자와의 인터뷰를 보면 훈독 '히로부미'로 읽지 않고 '하쿠분'이라고 독음으로 부르는 것도 나온다.[3] 박문사가 헐리고부터는 국가에서 운영하는 영빈관이 있다가 현재는 서울신라호텔이 들어서 있다.[4] 여기서 데라우치는 초대 조선 총독을 지냈던지라 이들 중에서는 그나마 교과서로 많이 언급된 사람이다. 도조 히데키는 안경 쓴 대머리에 히틀러 콧수염이라는 전형적인 일본군 외모로 유명한데다 일본군 생김새를 묘사할 때 자신의 외모로 고착시켜버린 장본인이어서 이름은 몰라도 얼굴은 많이 알려져 있다.[5] 의외로 초대 일본 총리로보다 초대 한국통감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침략자의 이미지가 강했던지라 한국을 침략하여 통감 정치를 했다는 점이 더 부각되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인들에게 이토 히로부미의 직책을 물어보면 열에 여덟은 "일본 제국 초대 내각총리대신"이라는 답보다 "초대 한국 통감"이라는 답이 더 많이 돌아온다. 무단 정치를 펼친 데라우치 마사타케도 이토 총리와 유사한 이유로 일본 제국 제18대 내각총리대신보다 초대 조선 총독이라고 답하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다.[6] 잘 알려지지 않은 다른 사례로는 조명하가 있는데, 이 사람은 이토 히로부미보다 더 높은 거물인 일본 황족을 암살했다. 그것도 다른 황족이 아니라 일본의 국구(= 천황의 장인)를 말이다. 끝판왕은 바로 쇼와 덴노를 노린 이봉창이지만 그는 알려졌다시피 실패했다.[7] 다른 귀퉁이에는 오쿠마 시게노부, 이타가키 다이스케의 동상이 있으며 나머지 한 자리는 의원 해당 자리에 올라가도록 노력하라는 의미에서 비어져있다.[8] 추겐(中間)이란 최하급 무사 아시가루와 평민 사이의 세습제 신분으로 짧은 칼을 차는 것은 허용했지만, 상급 무사의 신변을 돌보고 잡일을 담당하는 평민과 다름없는 신분이었다. 야마가타 아리토모도 이 신분 출신이었다.[9] 기도 다카요시의 옛 이름[10] 실제로 농부라는 표현도 일부러인지 아닌지 써져 있지 않다.[11] 안중근과 같이 거사를 담당했던 유동하의 친척의 증언이다.[12] 벨기에제 FN M1900이고 .32 ACP 라는 엄청 작은 권총탄을 사용한 호신용 권총이었다.[13] 일본 야마구치현 히카리시의 한 박물관에서는 이토가 사망했을 당시에 입고 있었던 내복을 보관하고 있다. 그 내복을 통해 어디에 총탄을 맞았는지 알 수 있다. KBS1 역사스페셜에서 박물관을 찾아가 이토가 입었던 내복을 촬영했다.[14] 러시아어로 한국 만세라는 뜻.[15] 실제로 직할 통치 기간 동안 조선총독부의 재정은 만성 적자였다.[16] 이토 히로부미의 염려는 일본이 1930년대에 만주사변, 열하사변 등을 잇따라 일으키면서 현실화되었다. 일본이 중국의 이권을 독차지할 목적으로 중국을 침략하자 영국, 미국을 위시로 한 서구 열강들과 국제연맹은 반발했고 이에 일본은 국제연맹 탈퇴로 응수하면서 군국주의로의 경도가 심화된다.[17] 먼나라 이웃나라 일본편에서 "역사의 아이러니" 란 논지로 서술된바 있다. 하지만 저자인 이원복 교수의 역사관에 대한 비난이 이어지자 재판본에서는 "한일합방을 시급한 문제로 생각하지 않았을 뿐 언젠가는 반드시 한반도를 일제의 아래에 넣으리라 생각했다."라는 내용으로 수정되었다. 또한 이토 히로부미가 한일합병에 반대했는지, 온건했는지를 떠나서 한국침략의 원흉임은 분명하기 때문에 이토를 처단한 안중근 의사의 의로움을 담은 내용도 있다.[18] 후에 조선총독부 초대 총독직을 그대로 유임 승계한다.[19] 그리고 강경파가 득세하였으므로 일제 시대 초기에는 정책은 강압적이어서 조선인들의 반발을 샀고 이는 3.1 운동이 일어나는 원인 중 하나가 되기도 한다.[20] 조선일보에서도 이토 히로부미의 이러한 음모를 기사로 싣기도 하였다.관련 기사[21] 사실 이점이야말로 역사의 아이러니인데, 이토의 죽음으로 가속화된 한일 합병과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강경한 정책 노선, 그리고 걷잡을 수 없어진 일본의 군국주의화에 의한 폭거는 조선인들의 항일 운동으로 이어졌으며, 이토와 같은 영리한 정치인의 부재로 말미암아 일본 제국이 외교적 고립을 자초하여 미국을 공격하고 그들 스스로를 파멸로 몰아넣게 된 결정적 계기가 마련되었다.[22] 돈과 여자 둘 다 더러운 놈은 이노우에 가오루. 이토와 더불어 '메이지 시대 스캔들 메이커'였다.[23] 일본명 다야마 사다코.[24] 민유기 著 <프랑스의 1910년 한일병합과 그 결과에 대한 인식>[25] 근데 아이러니하게도 노구치는 과학사기꾼이 아니냐는 논란이 생겼다. 자세한 것은 노구치 히데요 참조.[26] 이 양반도 놀라운 게 40이 넘은 나이에 독학으로 영어를 학습했는데 영어에 매우 능통했다고 한다.과거 급제자의 위엄[27] 야마구치 출신의 시타오 미우가 여기에 간 사진을 올리는 바람에, 프로듀스 48 출전 도중 엄청나게 비난을 받았다. 결국 이 여파로 시타오 미우는 최종 데뷔조 입성에 실패하고 말았다.[28] 이런 케이스는 또 있는것이 게키단 히토리보다도 더 친한 연예인으로 유명한 초난강 또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역을 맡은적이 있다. 우리가 흔히 아는, 일본의 정서하고도 너무 다른 히데요시라 이질감이 심하다 애시당초 히데요시는 초난강과 다르게 못생긴게 상징적인 인물인데....[29] 당연하지만 켄신 일행은 굉장히 어이없어하거나 노골적으로 거북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무엇보다 경례받는 일행 중에 진짜 사무라이 출신은 한명도 없다는게 유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