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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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활약
3. 김원술이 부모에게 쫓겨났던 이유
4. 기타
5. 창작물에서


1. 개요[편집]


金元述
(? ~ ?)

신라의 인물. 명장 김유신의 둘째 아들이다. 벼슬소판이었다. 어머니인 지소부인태종 무열왕문명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다. 문명왕후가 김유신의 여동생이므로 지소 부인과 김유신은 외삼촌과 조카 사이이다. 이쪽 족보가 좀 꼬여있다보니 고모가 외할머니인 셈이다.


2. 활약[편집]


나당전쟁이 한창이던 문무왕 12년(672년), 석문 전투에 비장(裨蔣)으로 출전하였으나 전투 초반 신라군이 승리하자 자만한 나머지 당군을 무리하게 추격하다 빈틈을 찔려 참패한 상황에서 적진에 뛰어들어 싸우다 죽으려 하였으나 부관 담릉이 말리는 바람에 죽지 못하고 귀환했다. 사실 원술은 계속 싸우려고 했는데 담릉이 말로 설득하다 안 되니까 말고삐를 쥐고 놓지 않았다고 한다. 퇴각 중에도 죽을 고비가 있었지만 칠십이 넘은 노장 아진함(阿珍含)과 그의 아들 등이 목숨을 걸고 시간을 벌어 김원술은 살아남는다.

아버지인 김유신은 격노하여 전장에서 죽지 않고 도망쳐 왕명과 가훈을 저버린 죄를 물어 목을 벨 것을 요청하였으나, 문무왕은 김원술의 전공과 그가 후퇴할수밖에 없는 상황을 알고 있어 중형을 내릴 수 없다고 하며 거부하고 용서하였다. 그러나 김유신은 원술을 용서하지 않고 의절을 선언하며 찾아온 그를 쫓아냈다.

원술은 부끄러운 나머지 시골에 은둔해 있다가 이듬해 김유신이 죽은 후 어머니를 만나 보고자 하였으나 어머니 지소부인조차 "살아 생전의 아버지에게 아들 노릇을 못했으니 나 역시 네놈의 어미가 아니다. 나가라!"라고 하여 결국 만나지 못했다. 김유신이 유언으로 지소부인에게 원술을 들이지도 용서하지도 마라고 했을 것이다. 결국 부모에게 쫓겨난 원술은 땅을 치며 통곡하다가 그 길로 태백산에 들어갔다.

문무왕 15년(675년), 매소성 전투에서 당군이 매소성으로 쳐들어 올 때 김원술은 정식으로 신라군을 지휘한 것은 아니지만 전투에 참여해 산에서 내려와 신라군에 합류해 힘껏 싸워 신라를 승리로 이끄는 공을 세웠다. 그러나 비구니가 된 어머니는 끝까지 원술을 용서하지 않았고 원술은 이에 세상을 비관하고 벼슬에도 오르지 않고 은둔해 살았다.

3. 김원술이 부모에게 쫓겨났던 이유[편집]


이 일화만 보면 김유신지소부인 내외가 매우 비정해 보이며 실제로도 비정한것이 맞다. 김원술은 전쟁터에서 뼈를 묻으려 했으나, 사실상 그를 살리려는 주변인들에 떠밀려 도망친 케이스이기 때문. 그래서 김원술의 입장에서는 매우 억울하고 문무왕도 이를 잘 알기에 용서하며 그가 매소성 전투에 참전하는것을 허용한것이다.

김유신 부부의 비정한 행동을 이해하려면 당시 석문 전투의 영향과 당시 분위기, 그리고 신라 귀족 사회의 분위기를 고려해야 한다. 석문 전투 이전까지 신라는 고구려 부흥군과 손을 잡은 뒤 당군을 수차례 격파하고 웅진도독부를 상대로 여러 차례 승리하며 황해도에서 적극적으로 공세에 나서고 있었다. 그러나 석문 전투의 패배로 고구려 부흥군은 거의 소멸했으며 임진강 이북은 당나라에 넘어갔고, 신라는 많은 병력과 다수의 지휘관을 잃고 수 년간 수세로 버텨야했다.

그런데 그런 전투에서 최고 지휘관이자 군부의 기둥인 김유신의 아들이 살아돌아왔으니 전투에서 죽은 장병들의 가족들과 김유신의 적대세력에게 도련님이여서 아버지 덕에 살았다며 비난받았을 가능성이 크다.[1] 특히 6세기 신라는 사방이 적국이었다. 건국 때부터 신라를 괴롭혀 온 왜, 진흥왕나제동맹의 파탄과 관산성 전투불구대천의 원수가 된 백제, 내물 마립간 때 백제의 침공을 막아준 대신 광개토대왕-장수왕 시기까지 지속적으로 내정 간섭을 일삼으며 신라를 속국으로 만들려 했던 고구려, 북쪽으로 영토를 확장하면서 부딪치게 된 고구려 통제 하의 말갈까지. 일대 다수의 상황에서 지속적으로 침략에 시달리며 위기를 맞았던 신라는 이때 목숨을 내놓다시피한 과감한 공세로 대응한 사례가 많았다. 개중에는 말 그대로 죽기 전에 발악이나 해보자는 식의 돌격이 없진 않았지만 반전을 노리고 시행된 계획된 군사 작전도 많았다. 당장 김유신이 낭비성 전투에서 그렇게 싸워 전세를 뒤집은 사람이고 황산벌에서 단기 필마로 돌격했다고 알려진 관창삼국사기 열전에선 소부대를 이끌고 함께 움직였음이 확인되며 자연히 먼저 돌격한 반굴도 일련의 별동대를 이끌고 싸운 것이 아닌가 하는 주장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이런 별동대나 돌격대장 임무는 전사할 위험성은 굉장히 높았고 김유신의 친족 젊은이들 또한 이 과정에서 상당수가 전사했다. 황산벌 전투에서 소수 병력을 이끌고 돌격하여 죽은 반굴은 김유신의 조카였고, 마찬가지로 죽은 관창 또한 김유신과 가까운 친족 관계(설명이 복잡하므로 관창 문서 참고)였다. 하지만 이 두 젊은이의 사례는 당시 신라에서 결코 '특별한 상황'이 아니었다.

신라가 본격적으로 팽창을 시작한 진흥왕 대 이래 관창과 반굴 같은 사례는 정말 수두룩하게 나온다. 원광에게 세속오계를 청해받은 두 젊은이, 귀산과 추항만 해도 아막성에서 백제군에 맞서 싸우다 죽었다. 611년 가잠 성주 찬덕은 백제의 공격을 받아 군량이 다 떨어져 시체를 파먹고, 오줌을 마셔가며 이듬해까지 악착같이 버티다 도저히 지킬 수 없게 되자 귀신이 되어서라도 성을 되찾겠다며 자결했다. 찬덕의 아들 해론은 618년 아버지가 전사한 가잠성 수복전에 참전해 기꺼이 선봉에 서서 싸우다 전사했다. 642년 대야성주 김품석의 부하였던 죽죽과 용석은 군량고가 불타고, 성주가 자결한 상황에서 끝까지 싸우다 죽었다. 647년 백제가 무산, 감물, 동잠 3성을 공격해 왔을 때 구원에 나선 김유신은 전세가 불리해지자 부하 비령자에게 돌격대장 임무를 부여했다. 기꺼이 명에 따른 비령자는 전사했다. 아버지의 죽음을 지켜본 비령자의 아들 거진은 비령자에게 자신을 부탁받은 노비 합절이 출정을 말리자 그의 팔을 자르고서 까지 적진에 돌격해 싸우다 죽었고, 뒤이어 노비인 합절까지 적진으로 뛰어들어 전사했다. 세 사람의 희생으로 신라군은 승리를 거뒀고 김유신은 그들의 시신을 거두어 장사지냈다.

김유신의 동생 김흠순은 나당전쟁이 시작되자 당의 본격적인 군사력 투입을 늦추고 신라가 옛 백제 영역에 대한 지배권을 다질 때까지 시간을 벌기 위해 당에 사죄사로 떠났다. 사실상 목숨을 내놓은 사행길이었고 김흠순은 겨우 풀려났으나 함께 간 파진찬 김양도는 옥사했다. 겨우 돌아온 김흠순도 이때 건강을 심하게 해쳤는지 귀국 후 역사서에서 기록이 사라진다. 김흠순의 손자이자 김반굴의 아들인 김영윤보덕국 반란 진압에 참전해 전세가 불리함에도 물러나지 않고 싸우다 끝내 전사했다. 김유신의 동생이자 문무왕의 외가로 삼국통일전쟁기간 형과 함께 전공이 큰 장군이자 각간까지 오른 고위 귀족이었음에도 삼대가 모두 기꺼이 목숨을 내놓았다.

나당전쟁 시기에 이르면 진골 출신 고위 지휘관들이 너무 많이 전사해서 도저히 깨질 것 같지 않던 골품제마저 흔들려 설오유, 시득 같은 6두품 출신 장군들에게 수만의 병력을 맡기기까지 한다.

이렇듯 통일 전쟁기 신라에선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전장의 고혼이 되는 것조차 드문 일이 아니었다. 또한 최고위 귀족은 물론 하류층, 사회적으로 천시받은 노비까지 적진에 뛰어들어 싸우길 마다하지 않았고 전사하면 칭송을 받았다. 이런 기록들은 신라 사회가 장기간 백제, 고구려와 양면전쟁을 강요받으며 극도로 상무적인 기풍을 지니고 있었었음 알려준다.

그런데 무수히 많은 신라 장정들의 목숨을 내놓은 분투로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을 이겨내고 삼국간 쟁투에서 승리자가 된 신라에서, 다른 사람도 아닌 신라의 영웅 김유신의 아들이 패배하고도 살아 돌아온 것이다. 이 상황에서 원술을 내치지 않는다면 김유신은 아우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 신라와 그를 위해 싸운 장병들, 더 나아가 백성들 전체를 볼 낯이 없어진다. 좀 과장하자면 김유신과 그 가문의 명예 문제를 넘어 신라 사회 전체의 불신으로도 이어질 수 있는 심각한 사안으로 볼 수도 있다. 위에서 언급된 수많은 신라의 장정들이 김유신과 신라 지휘부의 명령에 초개처럼 목숨을 버리는 사회적 풍토를 가능케 했었던 것은 '신라인은 신분의 귀천을 떠나 모두 국가와 사회를 위해 전장에서 죽을 각오가 되어있어야 한다' 라는 사회적 합의가 강철 규율처럼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투에서 패하는 건 죄가 아닐 수 있어도 패배하고 살아 돌아오는 것은 이유불문하고 사형당해도 할 말이 없는 큰 죄였다. 이러니 최고 지휘권자의 아들이 살아돌아온 것 자체가 사회적 규율에 큰 균열을 낼 수도 있는 중대사안이었던 것이다.

당시 김유신은 단순한 '높으신 분' 수준이 아니라 신라 그 자체를 상징할 수도 있는 노익장이었다.[2] 또한 김유신 본인이 가야계라는 출생의 한계를 실력으로 극복하고 출세한 인물이었기에, 골품제 하의 신라에선 여전히 그를 질투하고 흠 잡으려는 자들 역시 상당했을 것이니 정치적 입지를 유지하기 위해 무뚝뚝하고 엄격한 태도를 보였다고 볼 수도 있다.

김유신 역시 역사에 일일이 기록되지는 않았더라도, 탈영하거나 함부로 퇴각하는 부하들을 처벌한 적이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 원술의 처지를 이해하고 넘어간다면 설사 원술의 상황이 정말로 그럴만한 상황이었다고 해도, 타인의 눈에는 자신의 아들이라 특별히 봐줬다고 흉보일 가능성이 크다. 더구나 당시의 군인 대부분이 자원 입대한 게 아니라 오늘날처럼 징병제로 오는 경우가 대다수였기 때문에, 군기를 잡기 위해서 수뇌부인 김유신으로서는 도망가면 어떻게 되는지 봐라는 의도로 장병들에게 경고하기 위해 그를 쫓아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사실 이는 신라만의 특별한 현상도 아니다. 신라의 적국인 고구려와 백제만 해도 전투에서 패하고 돌아온 사람을 처형한다는 법이 있었다. 고대 로마에서도 적국인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이 이탈리아 본국에 쳐들어와 로마군을 박살낸 칸나이 전투에서 카르타고 군한테 사로잡힌 로마군 포로들이 로마 원로원을 방문하였을 때, 원로원 의원들은 로마군 포로들을 가리켜 "비겁하게 살아남은 저들의 말은 들을 가치가 없다."라고 냉담하게 대한 점을 본다면[3] 비단 신라 뿐 아니라 어느 사회이든지 전쟁을 오래하여 상무적인 기풍이 강할 경우에는 용감하게 죽는 것을 현명하게 후퇴하는 것보다 더 높이 친다. 칸나이 전투 이전의 그 유명한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스파르타군의 아리스토데모스는 도망간 게 아니라 총사령관인 스파르타 국왕 레오니다스의 지시를 받아 스파르타 본국에 전령으로 갔기 때문에 살아남았는데 "당신은 왜 전우들처럼 테르모필레에서 장렬하게 전사하지 않고 비겁하게 살아남았는가?"라는 사회적 압박과 냉담함을 견디지 못해서 이후에 벌어진 플라타이아 전투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무모하게 페르시아군을 향해 돌격하여 전사했다. 그럼에도 스파르타는 정작 명예만 회복시켜 주고 전투에서의 전과는 본인이 부대에 소속되어 싸운 게 아니라 무모하게 돌격하여 이룬 것이므로 공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김원술 본인도 처음엔 싸우다 죽으려 했으나 부장이 제지해서 그만둔 것이었다. 김유신이 원술의 목을 베라고 주청했을 때 문무왕이 그렇게 하지 않고 원술을 용서했던 것은[4] 고대인의 관점으로 보아도 참작의 여지가 있었기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특히 김유신이 원술을 끝까지 용서하지 않고 김유신 사후 어머니와 대면했을 때도 원술이 어머니한테도 쫓겨나고 부모의 용서를 받지 못한 건 참 본인에게나 형제들이나 주변 사람들에게나 서로 애석하며 비정한 일이었다. 그러다보니 김원술의 형제들이랑 문무왕, 신라 백성들은 그를 불쌍하게 여길 정도였다.


4. 기타[편집]


때때로 현대의 서적에선 그를 언급할 때, 성인 김씨를 생략하고 이름만으로 지칭하기도 한다. 덕분에 중국 삼국시대의 꿀물황제와 비교당하기도.

5. 창작물에서[편집]


극적으로는 매우 흥미로운 인물로서 창작할 여지가 많은 인물이다. 특히 비극적 서사를 만드는데 좋은 인물.

  • 비극적인 스토리인 관계로 현대에 와선 원술랑이란 제목으로 연극화되기도 하였다. 작가는 유치진. 원술랑 참고.

  • 드라마 삼국기에서는 천관녀와의 사이에서 낳은 김유신의 또다른 아들 군승의 희생으로 목숨을 건지는 역할을 담당했다.[5] 이복형제인 군승과는 의외로 형님아우하며 친하게 지내던 사이.

  • 신암행어사에서는 동일 인물은 아니지만 비슷한 이름, 뛰어난 무예, 부자지간의 불화라는 설정을 본딴 원술(슈퍼스트링)이 스토리 핵심에서 활약하는 주요 캐릭터로 등장한다.

  • 드라마 대왕의 꿈에서는 역사상의 기본 얼개를 따르긴 하지만, 김유신이 문무왕(김법민)이 왕위를 노리는 동생인 김인문과의 관계를 두고 갈등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이를 단호히 내치게끔 하기 위해 자신도 혈육인 아들을 내침으로써 모범이 되어야 했다는 식으로 보다 당위성을 부여하여 각색되었다.

  • 어린이 드라마 화랑전사 마루에서 21세기에 부활하여 도장을 운영하며 화랑들을 훈련시키는 인물로 나왔다. 배우 이도영[6]이 연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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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대 대한민국에서 이회창이 대선에서 세 번이나 떨어졌던 가장 큰 원인이 두 아들들의 병역 논란 때문이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자. 이유가 어찌되었든 두 아들을 군대에 보내지 않은 사람이 무슨 자격으로 대한민국 국군 통수권자가 되느냐는 反이회창 세력의 주장이 먹혀든 것이다.[2] 쉽게 비유하자면 북한과 군사적으로 대치하고 있는 현재 대한민국의 병역 제도를 보면 된다. 병역의 형평성이나 공정성에 대한 논란이 심심찮게 나오는 한국 사회에서, 육군 참모총장이나 국방부 장관 혹은 대통령의 아들이 병역의무를 기피한다든가, 전쟁 중에 탈영을 한다든가, 프래깅을 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가 되는 정도가 아니라 나라 전체가 발칵 뒤집어지는 일이다. 당시 원술이 살아 돌아온 것은 이 정도로 엄중한 상황이었다.[3] 진짜 로마군에 정규군 8,000명이 필요하지 않았던 건 절대 아니다. 그러나 로마에 포로들 몸값을 낼 돈이 없어 어차피 거절해야 할 상황이었는데 누가 총대를 메고 분위기를 조성해서 거부하도록 한 것. 로마는 포에니 전쟁에서 이긴 뒤 노예로 팔린 포로들을 수소문하여 생존이 확인된 1200여 명을 몸값을 지불하고 다시 데려왔으므로 이 때 거부의 요인은 진짜 겁쟁이라고 생각해서라기보다는 돈이 없어서였을 것이다. 로마는 전쟁에서 이긴 다음이면 몰라도 싸우는 중에 돈주고 포로를 데려오지 않는게 전통이었다. 준 돈으로 적이 무장할테니까.[4] 물론 외삼촌이 자기 아들 죽이라고는 하는데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사촌 형제를 죽이고 싶지는 않았기도 했을 것이지만[5] 김유신은 이에 분노했고 원술을 용서치 않았다. 사실상 원술 때문에 아들을 잃게 된 군승의 어머니 천관녀까지 나서서 원술을 용서해달라 부탁했지만 김유신은 끝내 원술을 용서하지 않기를 택했다.[6] 당시 활동명 백종민. 2009년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진평왕의 젊은 시절을 연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