료에이마루 조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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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사건의 진행
2.1. 발단
2.2. 표류
2.3. 최후
2.4. 도착
2.5. 의의
3.1. 비슷한 사건
4. 조난한 실존 인물/사건

良栄丸遭難事故

1. 개요[편집]


1926년 12월 일본 제국 어선 료에이마루(良栄丸)호가 조난하여 선원 12명 모두가 죽거나 실종된 사건.


2. 사건의 진행[편집]



2.1. 발단[편집]


료에이마루호는 와카야마현 와부카촌(현재의 쿠시모토정 와부카) 선적 소속의 어선으로 42톤의 소형 동력선으로 1924년 가을에 만들어졌다. 당시의 대부분의 어선들처럼 무선통신장비는 없었다.

이들은 1926년 12월 5일 카나가와현의 미우라정(현재의 미우라시)의 미사키 어항에서 출항했는데 치바현 조시정(현재의 조시시) 앞바다에서 악천후를 만났다. 료에이마루호는 이를 피하러 조시 항에 6일 오전에 들어왔는데 선장은 엔진을 재정비하고 7일 오후 다시 나가 대략 100km 해역에서 조업했다. 이들은 조업을 마치고 미사키 어항으로 돌아올 예정이었으나 12일 오전 갑자기 엔진의 크랭크샤프트가 끊겨 운항이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료에이마루는 만들 때부터 기관에 결함이 있었고[1] 일지에도 ‘일단 방법을 생각해보자. 할 수 없이 보조 돛을 올리고[2] 운 나쁘게 불어오는 서풍에 배를 흘러가게 내버려두자’라고 적은 것으로 보아 별 대책도 세우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바람은 이들의 편이 아니었다. 서풍은 멈출 생각을 안 했고 이들은 꼼짝없이 15일까지 표류했다. 마침내 계절풍이 멈췄을 때 이들은 이미 조시 항으로부터 무려 1600km나 떨어진 곳에 있었다. 이 날 처음으로 북쪽에서 오는 20톤 급의 어선을 보고 후라이키[3]를 올렸지만 해당 어선은 구조 신호를 못 본 채 지나쳐 갔다. 16일 오전 7시와 10시에 각각 기선을 목격하여 다시 후라이키를 걸고 불까지 피웠지만 이 역시 그냥 지나가 버렸다.

서풍이 계속 세차게 불었는데 이를 보고 료에이마루 호의 선원들은 말도 안되는 상상을 했다. 그리고 선장 미키 토키조는 26일, 마침내 하나의 결단을 내리기에 이르는데 그것은 바로 바람을 거슬러 일본 본토로 돌아가기 보다는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미국까지 가기로 한 것이다.

결단을 내리기 전 날, 덴노가 바뀌어 다이쇼 시대가 끝나고 쇼와 시대가 시작되었지만 이 배에 탄 사람들은 누구도 그 사실을 알 도리가 없었다.


2.2. 표류[편집]


목적지를 정했어도 이들의 항해는 순조롭지 않았다. 아마 표류했던 이들 스스로도 다시 쉽게 육지를, 특히 미국 땅을 밟을 가망이 있으리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않은 듯하다. 왜냐하면 미국행을 결정하기 이전의 19일의 일지에서 이미 일본으로의 귀환을 포기한 듯한 기술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으로 료에이마루에는 식량이 비교적 풍족하게 남아 있었다. 표류 당시 식량을 점검하니 쌀 1석 6말(약 240kg), 간장 3되(약 5.4리터)와 된장 1관(약 3.75kg)의 부식, 기타 무・우엉・감자와 같은 채소, 그리고 조업한 참치・상어・오징어 등의 생선이 있어서였다. 선장은 약 4개월 정도 버틸 식량이라고 생각하였고 이후에도 종종 새를 잡거나 해초를 캐고 낚시로 물고기를 낚아 식량으로 삼았다고 한다. 참치도 잡은 적이 있었다고.

그러나 앞으로의 상황은 별로 좋지 않았다. 어쨌건 바람이 부는 대로 표류할 상황이었고, 이 사이 다른 배나 육지를 못 만난 듯하다. 기관 수리도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표류 만 3개월차인 3월 5일 아침, 끝내 식량이 모두 떨어졌다. 그리고 다음 날인 3월 6일, 선원들은 나무 판자에 다음과 같은 유서를 썼다.

와카야마현 니시무로군 와부카촌 선주 호소이 오토마츠(細井音松), 료에이마루 승조원 연명 선장 미키 토키조(三鬼登喜造), 기관장 호소이 덴지로(細井伝次郎), 같이 적는 쿠와타 후지요시(桑田藤吉), 테라다 하츠조(寺田初造), 나오에 조타로(直江常太郎), 요코타 요노스케(横田良之助) 이자와 스테지(井澤捨次), 마츠모토 겐노스케(松本源之助), 츠지우치 료지(辻内良治), 미타니 토라키치(三谷寅吉), 츠메미츠 유키치(詰光勇吉), 우에히라 유시로(上平由四郎), 이상의 12명은 다이쇼 15년 12월 5일 카나가와 미사키를 출발하여 영업중 기관 프랑크 부분이 부서져 식량 백미 1석 6두로 오늘까지 구차한 목숨을 보전하다 기선의 등장도 어떠한 용기도 없이 여기서 죽기를 결심하다. 다이쇼 16년 신3월 6일.[4]

이 유서는 나무판에 썼는데 이는 만약 배가 침몰하더라도 유서만큼은 육지에 닿도록 하기 위함이었던 듯하다. 이 밖에도 선원들은 각자의 이름을 적은 봉투에 머리카락과 손톱을 잘라 보관했고 미키 선장은 처자에게 따로 카타카나 유서를 남겼다. 내용은 "먼저 생을 마쳐서 미안하다. 남은 자식들 잘 부탁하고 자식들은 절대로 어부가 되지 마라."


2.3. 최후[편집]


이미 1월부터 항해일지는 기록이 줄어 갔다. 아무 것도 안 적거나 그저 흘러간다고 적을 때도 늘어났고 기록이 있어도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만 적어가기 시작했다. 식량이 떨어진 뒤부터 선원들은 각기병영양실조로 하나 둘 탈락했다.

그리고 3월 9일, 호소이 기관장이 처음으로 사망했다. 이후 차례차례 선원들이 쓰러졌으며 4월 19일 우에히라[5]가 죽은 뒤에는 미키 선장과 마츠모토 2명만 남았다. 나머지 선원들의 시체는 장사지낸 기록이 없기 때문에 시체를 물에 버린 것으로 추정된다.

마지막까지 살아있던 이들은 미키 선장과 마츠모토로, 둘은 다른 선원들에 비해 1달 이상 더 살아남았다.

11일, 북서풍이 세게 불어 돛을 달아 올린 채 배를 띄운다. 남서쪽으로 배는 점점 항해한다. 선장의 잔소리에 매일같이 울면서 지낸다. 몸이 아프다.

마츠모토가 쓴 걸로 추정되는[6] 5월 11일의 이 항해일지가 마지막 기록이다. 이후 며칠 안으로 기력이 다해 더 이상 일지도 쓸 수 없게 되었고 곧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2.4. 도착[편집]


해류를 탄 뒤 배가 부서지지 않은 료에이마루는 표류한 지 열 달이 지난 뒤인 10월 31일, 미국 시애틀 앞바다에서 화물선 마가렛 달러 호에 의해 발견되었다. 미국 쪽은 일본 영사의 확인을 거쳐 이것이 전년 12월 치바현 앞바다에서 실종된 료에이마루임을 확인했다. 선내에는 미키 선장과 마츠모토의 시신이 있었고 이들의 시신은 화장해 유품과 함께 일본의 유족에게 보냈으며 선주 호소이의 친척이자 시애틀에 살던 일본인 타니사카 토시오가 귀국하여 전달하였다.

단, 유족들이 시체만 가져가고 배는 미국에 떠넘겼기 때문에 료에이마루는 미국 땅에서 불태워지는 끝을 맞이했다.


2.5. 의의[편집]


단순한 어선의 표류 사건 치고는 의의가 있다. 대개의 선박 조난 사고는 배가 침몰해 사건의 경과를 알기 힘들다. 그러나 료에이마루 조난사고는 비록 모든 선원이 죽었지만 42톤 규모의 목선이 무사히 미국 서해안에 왔고 항해일지가 비교적 자세하게 남아서 조난의 원인・경과가 확실히 드러났다. 이전까지 일본 어선들이 해류에 밀려 태평양으로 표류・실종한 적은 많았지만 료에이마루 조난사고는 이 점에서 매우 이례적이다.

나아가 쿠로시오 해류의 움직임 연구에 기여한 바가 있고 현대 일본 기상학에서는 이 항해일지를 근거로 료에이마루의 경로를 재구성하는 연구를 한다. 이를 연구했던 후지와라 사쿠헤이(기상학자)는 ‘어선이 미국에 도달하고자 함은 콜럼버스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는 것 이상으로 곤란했으리라 판단한다’고 평했다.


3. 도시전설[편집]


절대로 검색해서는 안 될 검색어 중에는 이 사건과 관련된 도시전설인 료에이마루(良栄丸)라는 검색어가 있다. '선원들이 집단으로 미쳐서 죽었다', '미친 듯이 동료의 시체를 잘라 먹었다' 등의 서술이 나오는데[7] 일단은 거짓이다. 위와 같은 내용을 항해 일지의 인용처럼 상세하게 써 놓았지만 모두 날조다.

물론 이들이 인육을 먹었다는 소문은 꽤 오래된 것으로, 그 발단은 선원의 시체를 검식했던 현지 의사가 ‘이들이 시체를 먹었다’고 단정한 데서 시작됐다. 이를 토대로 ‘시애틀 스타’ 지에서 비평 기사를 보도했다. 그 후 ‘시애틀 포스트 인텔리젠서’ 지가 유품을 수거해간 선주의 친족인 타니사카의 인터뷰 내용을 인용하여 항해 일지의 내용을 상세하게 보도했고 그에 따라 ‘백인의 오해가 풀렸다’고 기술하며 선원들이 인육을 먹었다는 사실이 거짓임을 밝혔다. 이미 배를 발견했을 당시 논파한 떡밥이라는 이야기.

3.1. 비슷한 사건[편집]


1960년 1월 21일 시즈오카현 인근 바다에서 같은 이름의 고치현 소속 어선인 제2료에이마루가 조난되었다. 이 배의 선원 3명은 행방불명됐고 9명은 스스로 오가사와라 제도의 무인도에 헤엄쳐 가서 90시간 만에 구조되었다.


4. 조난한 실존 인물/사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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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탓에 이 배를 만든 와카야마 철공소는 이 배가 조난한 직후 도산했다.[2] 이 당시의 어선은 보조동력으로 돛을 달았다.[3] 일본 관련 매체에 흔히 나오는 물고기 모양의 풍어를 기원하는 깃발.[4] 위에서도 설명했듯이 이들은 1926년에 연호가 쇼와로 바뀐 사실을 아무도 알지 못했다. 실제로는 쇼와 2년이며, 다이쇼 16년은 없다.[5] 항해일지에는 우에테(上手)라고 적었다. 오기로 보인다.[6] 항해일지는 원래 이자와가 적었으나 3월 17일 이자와가 죽은 뒤에는 마츠모토가 이어서 쓴 것으로 추정된다.[7] 대개 대한민국의 미스터리 유튜버들이 괴담을 진위여부 확인 없이 단순히 번역만 해서 대본을 짜기 때문에 일본에서 창작된 괴담이 현실처럼 와전된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