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룽팅 (r20220720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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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육영정.jpg
중화민국 호법정부 원수
광서변방독판

본명
육아송(陸亞宋)
정체
陸榮廷
간체
陆荣廷
한국식 독음
육영정
영문
Lu Rongting

간경(干卿)
출생
1856년[1] 9월 9일 청나라 광서성 무연현
사망
1928년 11월 6일 중화민국 상하이
국적
청나라 파일:청나라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svg
학력
없음
직업
정치가, 군인
원수임기
1917년 9월 2일 ~ 1918년 5월 4일

1. 개요
2. 생애
2.1. 초기이력
2.3. 몰락과 말년
3. 참고문헌
4. 관련문서


1. 개요[편집]


중화민국군벌. 구 계계군벌의 창시자이자 수장으로 광서를 지배했으나 리쭝런, 바이충시를 비롯한 신 계계군벌이 조직되면서 권좌에서 축출되었다.


2. 생애[편집]



2.1. 초기이력[편집]


광서성 무연에서 태어났으며 좡족 출신이다. 어려서 고아가 되어 정식교육을 받은 일이 없으며 1882년 삼점회에 가입, 토비가 되어 중월 국경지역에서 산적질을 했다. 이후 청나라 조정에 귀순하여 1894년 광서순방영통대(廣西巡防營統帶)에 임명되었고 1907년, 유용을 이끌어 진남관(鎭南關)의 봉기를 진압하여 좌강진총병(左江鎭總兵)에 임명되었다. 1911년 광서제독(廣西提督)에 임명되었고 신해혁명이 일어나 광서성의 독립이 선포되자 자의국에 의해 왕지상과 함께 광서성 부도독으로 추대되었다. 1912년, 계인치계의 구호를 내세워 광서도독 겸 민정장관에 취임하여 광서성의 통치권을 장악했다.


2.2. 계축전쟁에서 호법전쟁[편집]


1913년 계축전쟁이 발발하자 위안스카이의 편에 서서 류저우의 혁명군을 진압하고 용제광의 광동 공격을 지원한 공을 인정받아 영무장군의 칭호를 받았다. 하지만 선후대차관 사건, 중화민국 국회 해산 이후 위안스카이와 계속 사이가 악화되어 위안스카이 타도에 나선 량치차오를 광서에 초청하기도 했다. 1915년 위안스카이가 홍헌제제를 단행하여 인근한 운남에서 량치차오, 차이어, 탕지야오 등이 호국전쟁을 일으켰는데 처음에는 장쉰, 펑궈장, 리춘, 니쓰충, 용제광, 돤즈구이 등과 연명으로 호국군 토벌을 통전하였다. 이에 위안스카이는 1916년 루룽팅을 귀주선무사로 임명하여 혁명군을 진압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루룽팅은 눈치를 보다 량치차오의 설득을 받아 1916년 3월 15일 광서의 독립을 선포하고 천춘쉬안을 수령으로 추대, 호국군에 가담했다. 이후 호남 호국군 사령관 청첸과 함께 호남에서 북양군과 교전을 벌여 북양군을 축출했다.

3월 23일 위안스카이는 제제를 취소하고 사태를 수습하자고 제안했지만 호국군은 광저우에 군무원을 수립하여 위안스카이를 끝까지 타도할 것을 선언했다. 1916년 6월 6일 위안스카이가 사망하고 리위안훙이 구국회과 약법을 복구시키자 호국전쟁은 끝났고 루룽팅은 광서독군 겸 양광순열사에 임명되었다. 이어 광동도독 용제광을 축출하고 광동을 장악하고 스스로 도독의 자리에 올랐다. 루룽팅은 휘하의 천빙쿤, 탄하오밍 등에게 광동독군과 광서독군 자리를 주어 세력을 확장했다.

1917년 국무총리 돤치루이와 대리총통 리위안훙 사이의 부원지쟁이 벌어지자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했다. 7월 1일 안휘독군 장쉰장훈복벽을 일으켜 국회와 약법을 폐지했고 7월 12일 이를 진압한 돤치루이가 구국회와 약법을 무시하고 신국회를 수립하여 독재를 펼치자 쑨원과 혁명당이 7월 17일 광저우로 남하하여 1차 호법운동을 전개했다. 루룽팅은 이를 자신의 세력 확장의 기회로 노리고 쑨원을 지원했으며 광저우에서 1차 군정부가 수립되자 월상계연군원수에 추대되었다. 하지만 취임하지는 않았으며 쑨원의 북벌 계획에 비협조적으로 나오면서 쑨원의 북벌을 견제했고 자신의 세력 확장을 위해 독자적으로 행동했다. 탕지야오가 1918년 서남각성연합회를 수립하여 쑨원을 축출하자 시기상조라는 반응을 보였으나 북양정부가 화해의 손길을 내밀자 이에 합세하여 군정부 개조에 개입했다. 이에 쑨원이 5월 21일 대원수에서 하야하여 광저우를 떠나버리면서 1차 호법운동이 끝났다. 1918년 11월 호법전쟁이 끝났고 남북화의가 결렬되자 우페이푸, 차오쿤의 직예파와 연대하여 무력통일을 천명하는 돤치루이의 안휘파를 견제했다.


2.3. 몰락과 말년[편집]


루룽팅의 군세는 한때 10만에 달했고 북풍남육, 북장남육이라는 말이 떠돌면서 펑궈장, 장쭤린에 맞먹는 대군벌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루룽팅은 자신의 군사력을 바탕으로 정부와 국회를 장악하고 국정을 농단하였는데 이 때문에 탕지야오와의 관계가 악화되어 탕지야오는 정부에 파견한 대표를 철수시키고 군정부에 대한 보이콧을 선언했다. 1920년 3월에는 오정방도 군정부 보이콧을 선언하고 광저우를 떠나버려 1차 광저우 군정부의 일곱총재 중 천춘쉬안, 임보역, 루룽팅 이렇게 세명의 총재만 남게 되었다. 여기에 광동에서의 학정 때문에 루룽팅에 대한 광동인들의 불만이 높아졌다.

결국 1920년 6월 쑨원이 루룽팅 타도를 호소하자 복건에 주둔하던 광동군벌 천중밍이 원민월군을 이끌고 루룽팅과 루룽팅의 측근 막영신을 광동에서 축출했다. 루룽팅은 광서로 돌아왔고 1921년 광저우에서 비상국회가 소집, 쑨원을 비상 대원수로 추대하고 2차 군정부를 수립하자 이를 견제하기 위한 북양정부의 지시에 따라 1921년 월계전쟁을 일으켜 광동을 다시 공격했지만 천중밍에게 격파당하면서 하야를 통전하고 상하이로 달아나야 했다. 1922년 9월, 북양정부로부터 광서변방독판(廣西邊防督辦) 자리를 받고 재기를 꿈꾸었으나 1922년 휘하의 리쭝런바이충시 등이 신계계 군벌을 중심으로 광서자치군을 조직하여 그를 축출했다. 1923년 변리광서군모에 임명되었으며 1924년 2월, 북양정부로부터 광서군무독판에 임명되었다. 그해 3월, 과거 그의 부하였던 심홍영의 부대와 교전하다가 계림에서 포위당했다. 호남성장 자오헝티의 중재로 겨우겨우 풀려나 호남성 전주로 물러났고 1924년 10월 9일 하야를 통전했다.

이후 상하이를 거쳐 쑤저우로 이주했으며 1928년 상하이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3. 참고문헌[편집]




4. 관련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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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진지양의 군신정권의 기술, 위키백과는 1859년 설을 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