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흐탄그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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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베리아 왕국 34대 군주
ვახტანგ | 바흐탄그 1세
파일:바크탕 1세.jpg
제호
한국어
바흐탄그 1세
조지아어
ვახტანგ
라틴어
Vakhtang I
별명
고르가살(Gorgasali, გორგასალი)
생몰 년도
440년 ~ 522년
재위 기간
447년 ~ 522년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이베리아 왕국 34대 군주. 사산 왕조의 침략에 맞서 수십년간 항전한 군주로, 오늘날 조지아의 민족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2. 생애[편집]


이베리아 왕국 33대 군주 미흐르다트 5세와 사산 왕조의 트란스캅카스 총독 마즈반 바르자부드의 딸 사두후트의 아들이다. <바흐탄그 고르가살의 생애>에 따르면, 그는 태어날 때 이란식 이름 바라즈호스로브탕그(Varazkhosrovtang)를 받았는데, 조지아어로 바흐탄그(Vakhtang)로 번역되었다고 한다. 이 이름은 이란어 단어 "vahrka-tanū(늑대의 몸)"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고대 조지아의 늑대 숭배를 반영했을 가능성이 있다. 한편 별명인 고르가살(Gorgasali)은 그가 착용한 투구의 모양에서 빗댄 것이었다고 한다.

그의 생애에 관한 기록은 중세의 이름 미상의 작가가 집필한 <바흐탄그 고르가살의 생애>에 의존한다. 그 외의 중세 조지아 역사서들은 그에 대해 간략하게 언급할 뿐이다. 사실 중세 조지아 역사서들은 바그라티온 왕조 이전의 다른 조지아 군주들에 대해서는 별로 다루지 않았다. 바흐탄그 고르가살의 생애는 전설과 서사시가 뒤섞여 있어서 신뢰성이 높게 평가되지 않지만, 프로코피우스 등 당대 역사가들의 기록과 교차검증되는 부분들도 여럿 있기에 이 왕의 행적을 알아볼 수 있는 주요 출처로 인정받는다.

바흐탄그 고르가살의 생애에 따르면, 그는 아버지가 사망했을 때 7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지만 나이가 어려서 어머니 가두후트가 섭정을 맡았다. 저자는 당시 이베리아의 어려운 상황에 대해 서술한다. 이 나라는 조로아스터교를 전파하려는 사산 왕조의 시도와 카스피해 관문을 통한 백훈족의 침략에 시달렸다. 어린 왕은 이런 현실에 좌절하지 않고 기량을 키워갔다. 16살 때 여동생 미란두크를 납치한 오세트 족과 맞서 싸운 끝에 적으로 나선 거인을 결투에서 처치하고 여동생을 구출했다고 한다. 또한 19살 때 호르미즈드 3세의 딸 발레두흐트와 결혼했고, 호르미즈드 3세의 요청에 따라 원정에 참여했다고 한다. 이 원정은 호르미즈드 3세의 정적 페로즈 1세와 동맹을 맺은 에프탈에 대항한 원정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 바흐탄그는 이 원정에서 에그리(라지카)와 압하지아(아바지아)를 점령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이베리아로 귀환한 뒤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몇 가지 결정을 내렸다. 로마 황제 제노의 친척[1] 헬레나와 결혼했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부터 므츠헤타의 주교이자 이베리아 교회의 수장을 이베리아 대주교로 승격시키는 허가를 받아냈다. 그는 므츠헤타 대주교와 12명의 새로 임명된 주교들을 안티오키아로 보내 사제 서품을 받도록 했다. 하지만 당시 이베리아에서 강성했던 네스토리우스파 신자들이 정교회 교리를 배워온 주교들에게 복종하길 거부했다. 특히 므츠헤타의 전 주교 미켈의 반발이 극심했다. 그는 이들의 반발을 억누르느라 갖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한편, 그는 사산 왕조에 복종하는 귀족들에 대한 탄압을 감행했다. 482년, 조로아스터교로 개종하고 사산 왕조가 코카서스에 영향력을 확대하는 걸 지원하던 고그레네의 비탁사 바르스켄이 기독교인 아내 슈샤니크를 죽인 혐의를 적용해 처형했다. 뒤이어 조로아스터교를 강요하는 아르메니아 총독에 대항하여 전쟁을 선포하면서, 아르메니아의 반란군 지도자 바한 마미코니안과 동맹을 맺었다. 아르메니아 총독 아드후르 구슈나프는 이베리아-아르메니아 연합군에게 패해 전사했고, 바한은 사하크 2세 바그라투니를 새 총독으로 세웠다. 사산 왕조 샤한샤 페로즈 1세는 진압군을 보내는 한편, 샤푸르 미흐란이 이끄는 또다른 군대를 이베리아로 파견했다.

사산 왕조군은 482년 여름 아르메니아-이베리아 연합군을 격파했고, 사하크 2세 바르가투니와 바한의 동생 바삭이 전사했다. 그는 이베리아를 잃고 동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는 라시카로 도주했다. 그러다 타리크 산으로 숨은 뒤 유격전을 전개한 바한과 연합하여 샤푸르 미흐란과 맞서 싸웠다. 샤푸르 미흐란은 이들에게 연이어 패배하다가 크테시폰으로 소환되었고, 바한과 바흐탄그는 아르메니아의 수도 드빈을 탈환했다. 483년, 자르미르 하자르우스트 휘하의 사산군이 드빈을 포위했다. 바한과 바흐탄그는 포위망을 뚫고 빠져나온 뒤, 동로마 제국 국경 인근의 산속으로 이동했다. 그들은 사산 왕조군이 동로마 제국과의 충돌을 회피하려고 추격하지 않기를 바랬으나, 자르미르는 야간 행군 후 그들을 급습하여 상당한 포로를 확보했다. 두 사람은 가까스로 탈출한 뒤 산맥 깊숙이 숨었다. 하지만 아르메니아 곳곳에서 사산 왕조의 지배에 불복한 농민들이 폭동을 일으켰기 때문에, 사산 왕조의 아르메니아 지배는 여전히 불안정했다.

그러던 484년, 페로즈 1세가 에프탈과의 전쟁에서 전사하고 사산 왕조군이 궤멸당했다. 이후 새 샤한샤에 즉위한 발라시는 이베리아-아르메니아와 평화 협약을 맺었다. 바흐탕은 이베리아에 돌아와 권력을 회복한 뒤에도 친로마 정책을 고수했다. 502년, 사산 왕조 샤한샤 카바드 1세가 100여 년간 이어지던 동로마 제국과의 평화를 깨고 소아시아로 쳐들어갔다. 이때 카바드 1세는 그에게 봉신으로서 전쟁에 참여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그는 거부했고, 카바드 1세는 이베리아로 군대를 파견했다. 바흐탄그는 침략군에 맞서 사력을 다해 싸웠지만, 전세가 불리해지자 동로마 제국에 망명해야 했다.

프로코피우스에 따르면, 이베리아의 구르제네스(Gurgenes) 왕이 522년경 라지카로 피신했고, 아들 페라니우스, 파쿠리우스와 파자스가 로마군의 군영에서 활약했다고 한다. 키릴 투마노프(Кирилл Туманов)는 프로코피우스가 바흐탄그의 별명을 이름으로 착각하고 '구르제네스'로 명기했다며 구르제네스가 바흐탄그 1세와 동일 인물이라고 추정했지만, 이에 동의하지 않는 의견이 있어서 진위 여부는 불분명하다. 바흐탄그 고르가살의 생애에 따르면, 그는 로마군과 연합하여 사산 왕조군과 맞서 싸우다가 반역자 노예가 쏜 화살이 갑옷 사이의 겨드랑이에 박히는 바람에 중상을 입고 우자르마에 있는 그의 이송된 뒤 그곳에서 사망하고 므츠헤타의 대성당에 안장되었다고 한다.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죽기 전에 다음과 같은 유언장을 남겼다고 한다.

მე ესე რა წარვალ წინაშე ღმრთისა ჩემისა, და ვმადლობ სახელსა მისსა, რამეთუ არა დამაკლო [or: დამარხო] გამორჩეულთა წმიდათა მისთა. აწ გამცნებ თქუენ, რათა მტკიცედ სარწმუნოებასა ზედა სდგეთ და ეძიებდეთ ქრისტესთჳს სიკუდილსა სახელსა მისსა ზედა, რათა წარუვალი დიდება მოიგოთ. მე ჴორციელებრითა დიდებითა გადიდენ თქუენ ნათესავთა ჩემთა. და სახლსა ჩუენსა ნუ შეურაცხჰყოფთ, და სიყუარულსა ბერძენთასა ნუ დაუტეობთ.

하느님 앞으로 나아가며 그의 이름에 감사하노니, 이는 그가 거룩한 자들을 나에게서 빼앗지 아니하셨음이라. 이제 내가 너희를 그분께 소개하노니, 너희가 믿음에 굳게 서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음을 구해 영원한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나는 너희와 내 모든 세대를 영광으로 높였다. 주님의 집을 모욕하지 말고 그리스인을 모욕하지 마라.


바흐탄그 고르가살의 생애에 따르면, 그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다. 장남 다치는 발렌두흐트와의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이베리아 왕위를 계승했으나 사산 왕조의 봉신으로 돌아가야 했다. 두 아들 레온과 미흐르다트는 헬레나와의 결혼에서 태어났으며, 남서부 이베리아의 클라르제티와 자바케티 지방을 다스렸다. 레온과 미흐르다트의 후예는 7세기까지 이베리아에서 이어가다가 바그라티온 왕조에 대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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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바흐탄그 고르가살의 생애에는 '딸'이라고 기술되어 있지만, 제노는 황후 아일리아 아리아드네와의 사이에서 자식을 보지 못했다. 그의 친척일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