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일(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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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전 정치인. 정당대표이다. 호는 익전(益田).
2. 생애[편집]
1927년 3월 14일 경상남도 밀양군(現 밀양시) 무안면 삼태리에서 당시 경상남도 일대 대지주인 만석꾼 죽오(竹塢) 박재하(朴在夏)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휘문중학교를 졸업하고 고향 밀양제일보통학교 교사로 있다가 조선어학회 사건에 관련되었다는 이유로 교장에 의해 고발되었다. 그러자 피신해서 노무자 생활을 하다가 8.15 광복을 맞이하였다.
광복 이후인 1949년 연희대학교 문과를 수료하였다. 그리고 반공청년단에 몸담았다. 이후 야당 정치인으로서 민정당, 민중당 등의 정당에 몸담았다. 이후 1963년 민정당 밀양지구당 위원장이 되고, 1965년 민중당 밀양지구당 위원장을 거쳐, 1967년 신민당 경상남도13지구당 위원장, 신민당 정책위원을 역임하였다.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경상남도 밀양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민주공화당 공정식 국회의원을 꺾고 당선되었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경상남도 밀양군-창녕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민주공화당 성낙현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이후 김재광계에 속하였다. 1976년 11월 신민당 이철승 대표최고위원 체제가 출범하자 정책위의장에 임명되었다.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민주공화당 하대돈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1980년 전두환 정권이 출범하자 정치규제를 당하였다. 1984년 정치규제에서 해금되었다.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한국당 후보로 경상남도 밀양군-창녕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민주정의당 신상식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당선 직후 민주한국당을 탈당하여 신한민주당에 입당하였다. 1987년 다시 신한민주당을 탈당하여 통일민주당에 입당하였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경상남도 밀양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이후 민주당 밀양지구당위원장, 한일의원연맹 한국대표, 한국·파푸아뉴기니 의원친선협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1990년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 소속이 되었으나 얼마 안 가 탈당했다. 이후 평화민주당이 신민주연합당으로 당명을 변경할 때 참여했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이후 민주당 전당대회 의장이 되었으며, 한·인도의원친선협회장과 민주당 상임고문을 역임하였다. 이후 1995년 김대중이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할 때 민주당에 남았으며, 이후 홍영기와 함께 민주당 공동대표를 지냈다.
통합민주당 소속이던 1997년, 숙환으로 별세하였다. 향년 70세.
저서로는 '나는 의회민주주의(議會民主主義)를 위하여 이렇게 싸웠다.'가 있다.
3. 선거 이력[편집]
4. 소속 정당[편집]
5. 둘러보기[편집]
[1] #. 밀양 박씨 집성촌이다.[2] 정국군파 19세손[3] 밀양군 을(청도면, 무안면, 초동면, 하남읍, 상남면, 삼랑진읍)[4] 밀양군[5] 밀양군[6] 밀양군, 창녕군[7] 민주공화당 성낙현 후보와 동반 당선[8] 민주공화당 하대돈 후보와 동반 당선[9] 밀양군, 창녕군[10] 민주정의당 신상식 후보와 동반 당선[11] 1985년 신한민주당 입당
1987년 통일민주당 입당[12] 민주당과 신설 합당[13] 신한당과 신설 합당[14] 민주정의당, 신민주공화당과 신설 합당, 이른바 3당 합당[15] 민주당과 신설 합당[16] 개혁신당과 신설 합당
1987년 통일민주당 입당[12] 민주당과 신설 합당[13] 신한당과 신설 합당[14] 민주정의당, 신민주공화당과 신설 합당, 이른바 3당 합당[15] 민주당과 신설 합당[16] 개혁신당과 신설 합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