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의/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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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참모에서 지휘관으로
2.1. 사마의의 전략
3. 제갈량의 라이벌
3.1. 유사하면서도 대조되는 행적
3.2. 군사적인 측면
3.3. 내정적인 측면
4. 충의
5. 장합의 죽음에 대한 책임 논란
6. 인재 안목
7. 연의의 수혜자인가 피해자인가
8. 학살 논란



1. 개요[편집]


사마의의 평가를 정리한 문서.


2. 참모에서 지휘관으로[편집]


사마의는 독특하게 처음엔 참모로 시작해서 지휘관으로 전환한 케이스이다. 기동전으로 명성을 얻은 그답게 다양한 공세 전략을 제시했다. 정작 공세 작전을 펼친 곳은 워낙 빠르게 사건이 종결되고 이목이 쏠린 제갈량의 북벌에선 수세 전략으로 나왔기 때문에 인기가 없는 걸지도. 덕분에 사마의의 이미지가 문관에서 무관 사이의 그쯤에 있어 코에이삼국지 시리즈에선 이미지가 흐릿한 편, 다만 문무 모두 뛰어나다는 이미지 때문에 스텟은 높게 잡히는 편이다.


2.1. 사마의의 전략[편집]


  • 익주 침공: 득롱망촉의 일화로도 유명한데 유비와 손권이 익양에서 대치하고 있는 동안, 장로의 항복을 받아 한중을 점령한 조조에게 촉나라까지 점령하자는 건의를 하나 들어지지 않았다. 근거는 아직 촉나라의 내부 사정이 안정되지 않았다는 것. 첫 출진으로 보이는 지라, 조조의 신임을 얻기 위한 오버라고 보는 이들도 있다. 어쩌든 제갈량의 북벌시기엔 지키기만 했던 사람이 익주를 향해 적극적인 공격을 건의했다는 점에서 주목할만하다. 삼국지 위서 유엽전에는 유엽이 혼자 간언한것으로 나오고 진서 선제기에는 사마의 혼자 간언한 것으로 나온다. 자치통감은 사마의가 먼저 건의하고 조조가 반대하자 유엽이 다시 재반박했다고 기록했다.

  • 천도 반대와 촉, 오 분열 예언: 우금 등이 수몰당한건 전투에서 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충분히 막아 낼 수 있으며, 천도를 하면 다시 생겨나는 혼란을 걱정했으며, 유비와 손권은 겉으로 친하지만 속으로는 소원해 관우가 뜻을 펴는걸 손권이 원하지 않을터이니 그로 하여금 관우의 배후를 치게하고 강남을 나누어 손권을 책봉하는 걸 약속하면 번성의 포위는 절로 풀릴 것이라 했다. 놀라운 예측력이라고 볼 수 있다. 위서와 촉서 관우전에는 장제와 사마의가 함께 진언했다고 하는데 진서 선제기에는 장제의 일은 빠져있어 마치 사마의 혼자 진언한 것처럼 서술했다. 자치통감에는 원래대로 장제와 사마의가 함께 진언했다고 서술했다.

  • 오나라 침공: 유사 봉건제 수준인 오나라는 핵심전력만 무력화하면 심장을 찌르듯이 공격할 수 있다는 전략. 상당히 과감한 전략으로 환성으로 향해 손권을 유인한 후 수군을 하구로 보내자는 의견. 조예도 수긍했고 이에 조예는 오를 칠 생각을 하는데 조휴는 주방의 거짓 투항을 믿고 윤허를 얻어 적진 깊숙이 환현까지 들어갔다. 이에 조예는 사마의에게 강릉을 향하게 하고, 가규는 동관[1]을 향하게 하여 세 길로 나아가게 하고 추가적으로 만총에게 하구로 가도록 한다. 이는 곧 석정 전투로 이어지나 석정 전투는 대실패 해버렸고 제갈량의 지속적인 북벌 때문에 여력이 안났는지 이후엔 실행되지 않았다.


3. 제갈량의 라이벌[편집]



3.1. 유사하면서도 대조되는 행적[편집]


  • 제갈량은 서주 출신이나 서주 대학살을 피해 형주로 피난갔으며 사마의는 하내 출신으로 하내에 주둔한 반동탁 연합군의 약탈을 피해 중원으로 피난갔었다.
  • 제갈량은 유비의 삼고초려를 통해 출사했으나 사마의는 조조의 강압적인 명령을 통해 출사했다.
  • 둘 다 황제의 탁고대신으로 지정받았다. 제갈량은 유비, 사마의는 조비, 조예 두 황제의 탁고대신이었다.
  • 그리고 둘 다 함께 탁고를 받았지만 잘못을 저지른 이엄, 조상을 물러나게 했다. 제갈량은 이엄을 은퇴시키고 그의 아들을 계속 임용하는 선에서 끝냈지만 사마의는 조상을 살려주겠다고 거짓말을 한 후 조상 일파의 3족을 멸했다.
  • 제갈량은 자신과 혈육이 아닌 장완을 후계자로 삼았지만 사마의는 자신의 혈육 사마사를 후계로 삼아 권력을 물려줬다.


3.2. 군사적인 측면[편집]


227년, 제갈량의 1차 북벌에서 사마의가 제갈량을 공격했지만 제갈량이 꾀를 써서 일부러 성을 비우고 성문을 열어놓자 복병을 의심한 사마의가 군을 물렸다. 그러나 이 기록은 배송지가 당시 사마의는 완성에 있었으니 거짓이라고 반박했으니 신빙성이 낮다. 이 일화를 거짓으로 본다면 실질적으로 사마의와 제갈량이 맞붙은 전투는 다음 나오는 두 차례 뿐이다.

사서에 기록된 사마의와 제갈량의 직접적인 전투는 2번이며 둘 다 사마의가 패했다. 231년 노성 전투는 진서에 따르면 사마의가 압승을 거두었다고 나오나 <한진춘추>에는 제갈량에게 패했다고 적혀 있다. 사마의가 이겼다고 적은 기록은 진서 하나뿐이고 진서는 그 편찬 과정과 신뢰성에 심각한 결함이 있는 사서다. 다시 말해 서진의 역사를 다룬 진서가 한 곡필. 자치통감에도 제갈량의 승리로 적었다.[2] 또 234년 오장원 전투에서는 거점을 만드는 촉군이 도하 작전을 개시하자 정예 기병 1만을 보내 선제 공격을 했지만 이 또한 제갈량의 기민한 대응으로 패했다.

사실 사마의가 지구전을 펼친 건 5차 북벌 딱 한 번뿐이다. 4차 북벌때는 위군도 군량이 간당간당해서 지구전을 할 상황이 아니었고 5차 북벌때에 와서야 비로소 지구전 여건을 조성할 수 있었기 때문.[3] 그러나 제갈량이 여성 의류를 보내 사마의를 도발하자 이 도발에 넘어간 사마의가 자꾸 제갈량을 공격하려고 했으나 신비가 말려서 넘어갔다. 사마의가 제갈량의 도발에 차분하게 대응한 것은 연의의 창작일 뿐이다.[4] 사마의 역시 처음에는 무공수를 넘어와 거점을 만든 촉군과 교전하다가 제갈량이 강을 건너자 철퇴한 적이 있고 제갈량 역시 동서로 군사를 움직이며 교전을 유도하였다. 5차 북벌은 이후 제갈량이 오장원에 눌러 앉으면서 장기전 양상으로 가고 사마의도 조예의 지원을 받아 가면서 싸운것이다. #

사마의 입장에선 오랜 북벌을 통해 단련된 촉군을 야전으로 깨부수기에는 만만찮은 상대라는 것이 한번의 야전을 통해서 드러났고 촉군이 장악한 위빈 지역, 즉 위수 남쪽 무공수 인근에서 교전을 하기엔 꺼림직하게 여겨졌을것이다. 결국 제갈량이 적극적으로 현지 백성들을 회유, 행정력을 넓히고 둔전을 통해 많은 군량을 확보하여[5] 사마의의 지구전에 맞대응하고 이 지역을 장악하는 것을 막는데 사마의는 실패했다. 그가 이길 수 있던것은 제갈량의 병사라는 의외의 변수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수비 전략 자체를 "사마의가 제갈량을 두려워했다."는 식으로 지나치게 폄하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다. 무엇보다 사마의는 제갈량의 관중 진출이라는 전략적 목표를 좌절시키는데 성공했다.[6] 스포츠에서조차 "공격은 관중을 부르고 수비는 승리를 부른다."는 말이 있는데, 전쟁은 스포츠보다도 승리가 중요하고 전력 손실이 기피되는 영역이다. 설령 공격적인 전략으로도 이길 확률이 있더라도, 위험이 너무 커보인다면 수비적인 전략을 취해 피해를 더 줄이면서 보다 안전하게 전략적 목적을 달성하는게 지휘관으로서는 현명한 것이다. 사마의가 제갈량과의 교전에서의 위험성을 검토해서, 만만한 상대들에게 취하던 신속한 공격적 전략을 버리고 진중한 수비에 임했다는건 곧 자신과 적의 역량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리스크 관리를 잘 한다는 뜻이며, 이는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는 전략의 근본에도 부합된다.

조선왕조실록에서도 또한 세종대왕북방 6진의 수비를 맡으러 떠나는 김종서에게 "사마의가 제갈량의 도발에도 넘어가지 않고 진중하게 임해서 수비를 성공적으로 해냈다."는 고사를 말해주며 여진의 도발이 있어도 경솔히 넘어가지 말라는 훈시를 한 것처럼, 이 싸움은 결국 사마의의 성공으로 후대에 인식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논리는 제갈량의 4차 북벌에는 걸맞지 않다. 4차 북벌에서는 위군도 식량이 부족했기에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는 논리가 적용하지 않다. 이엄의 근무태만이라는 변수 때문에 확실하게 승리한 것이다. 최진열 교수는 이엄의 근무태만이 없었으면 승산이 있었다는 주장을 했다. 전쟁의 스포츠가 아니라는 논리는 4차 북벌에 적용하기 어렵다.


3.3. 내정적인 측면[편집]


촉한의 제갈량은 한 국가 전체를 책임지는 재상이었으며, 그가 촉한에 남긴 업적은 다양한 분야에서 매우 광범위하다.[7] 하지만 사마의는 국정 전반을 다루는 재상으로는 활약한 적이 없었고 정권을 틀어쥔 고평릉 사변 직후에는 사망했으니 전반적인 내정적인 측면에서의 업적은 제갈량이 압도적으로 우월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사마의 역시 당대의 인재인 만큼 내정에도 공을 세웠다. 주로 사마의는 농지개발과 인사권에 특화된 활약을 펼쳤다. 그는 대장장이 육성, 농지개간, 운하 건설 등 주로 개발 분야나 토목 공사 등에서 재능을 보였다. 송나라 시기 역사를 다루는 송사의 지 47권에 기록된 송태종 지도(至道) 원년(995년) 정월에 관료들이 황제에게 보고한 바에 따르면 등, 허, 진, 영, 채, 숙, 박(鄧, 許, 陳, 穎, 蔡, 宿, 亳)의 땅[8]에서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당시) 경작하지 않은 땅(閑田)이 351곳에 합치면 토지 22만 경이 된다고 했는데, 백성의 힘으로는 논밭을 다 갈 수 없으며, 모두 한나라, 위나라 이래로 소신신, 두시, 두예, 임준, 사마의, 등애 등의 인물들이 제도를 세워 개간했다고 설명했다. # 당시는 사마의가 땅을 개간한 시기로부터 700여년이 지났던 시기로 그가 개간한 땅도 세월이 지나면서 버려진 듯 하다. 어쨌거나 이 기록은 사마의가 한나라, 위나라 이래로 농지개발에 적극적인 인물들 중 하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송서의 지와 진서 선제기에 따르면 제갈량 사망 이후인 235년에 장안(長安)의 곡식 5백만 곡(斛)을 낙양으로 보냈다고 한다. 또한 사마의는 감찰, 인사권을 쥐고 있는 정치적 요직도 두루 거쳤다. 특히 인사권자로서는 등애를 비롯한 수많은 인물들이 사마의의 추천을 받아 활동했다. 사마의는 이렇게 인재를 등용하면서 이들과 긴밀히 연결되어 사마씨가 권력을 잡은 후 이들이 사마씨에게 충성하도록 하는 효과도 거두었다.

또한 제갈량의 식소사번(食少事煩) 일화와 비슷한 일화가 사마의에게도 있는데 <선제기>에서는 야이망침(夜而忘寢)이라고 해서 젊었을때 사마의가 조조의 의심을 받아 마부로 일하면서 관리의 직무에 부지런히 힘써 밤에도 잠을 잊을 정도였고 가축을 기르는 일에까지 이르러 이를 모두 직접 챙겼다는 일화가 있다.

내정적인 측면에서 두 사람의 가장 큰 차이는 사법권을 행사하는 방법이었다. "죄를 인정하고 실토한 자는 비록 중죄라도 반드시 풀어주고, 헛된 말로 교묘히 꾸미는 자는 비록 가벼운 죄라도 반드시 죽였다."라는 평가를 받은 제갈량은 엄정한 사법 처리에서 특히 높은 평가를 받았다. 또한 남만 정벌 때도 관대한 통치를 통해 안정적으로 다스렸다. 하지만 사마의는 숙청, 반란군 토벌 시 강경책을 써서 많은 사람을 죽였다. 평상시에는 나이 많은 하급자에게도 깍듯하게 행동하고 조비의 노여움을 산 신하를 변호하는 등[9] 너그러웠으나 조상 일파 숙청, 요동에서의 학살, 수춘에서의 학살 등으로 "의심많고 잔인하다."라는 평가를 받았다.

사마의는 제갈량보다 나이가 2살 더 많은데도 훨씬 장수하여 제갈량 사후 17년이나 더 살았고, 제갈량은 선제가 전쟁에서 패배한 것을 수습함과 동시에 어린 군주를 성실히 보좌하는 충신의 역이라면 사마의는 능력도 능력이지만 여차하면 주인도 쳐버릴 수 있는 권모술수의 화신으로 대비된다. 제갈량은 승상 시절 창업군주 선제 유비의 전폭적인 지원과 탁고대신으로서 여차하면 황제까지 갈아치울 수 있다는 엄청난 권리를 받았기 때문에 아직 어렸던 유선 아래에서 사실상 황제가 해야할 모든 권한을 위임받아 찬탈까지 어렵지 않게 시도할 수도 있는 자리에 앉았고 또 실제로 자신과 버금가는 권력을 가진 탁고대신 이엄으로부터 그러한 제의까지 받았지만 거절하고 끝까지 유선에게 충성을 바쳤다. 하지만 사마의는 조예가 죽고 어린 조방이 황제가 되자 칭병하면서 기회를 노려 조상 일당의 전횡을 바로잡는다는 명분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조위의 실권을 장악하고 조방을 허수아비 황제로 만들어 제위를 찬탈하는 초석을 만들었다.[10]


3.4. 펜팔[편집]


  • 사마의는 제갈량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황공형[11]은 호방한 남자입니다. 항상 앉으나 서나 그대를 칭찬하였는데 말을 빌려 어떤 구실을 찾으려고 하지 않습니다."라고 쓴 적이 있다.

  • 위략에 따르면 제갈량이 1차 북벌 당시 기산에서 사마의에게 답장하였는데, 맹건을 통해 두습[12]에게 안부를 전해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4. 충의[편집]


사마의의 충성심에 대해서 이래저래 말이 많다. 해석하기에 따라 스스로만큼은 순수하게 위에 충성했다고 볼 수도 있고 희대의 역적으로 볼 수도 있는 매우 신기한 인물.[13]

그가 조위에서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업적을 쌓은 영웅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구석을 받고 위왕에 올라 한나라 황실의 권위를 흔든 조조와 달리 그는 죽을 때까지 왕이나 구석은커녕 공작조차 받지 않았으며 후작에서 멈췄다. 그렇다고 조조처럼 승상이 되어 1인 독재를 한것도 아니고 3공의 한 사람인 태위에서 멈췄다. 말년에는 잠깐이나마 태부직을 받아들여 실권을 내놓기도 했다. 조상 파벌 내에서도 말이 나올 정도로 조상 일파의 국정 운영이 혼란스러웠으니 만년에 일으킨 고평릉 사변도 조상 일파의 실정이란 명분이 있었다. 또한 군사적 업적으로 쌓은 엄청난 권위를 내세워 하후현 등 친황 세력을 완전히 숙청하지 않고 남겨뒀으니 본인 대에 권력을 독점한 것도 절대 아니었다. 즉, 그 사후에 더 큰 권력을 넘본 아들들이야 어찌되었든 그는 위의 충신에 그쳤다고 볼 수도 있다. 조위의 주군들로부터의 신뢰도 최고였다. 비유하자면 조비 때는 군왕이 본진을 믿고 맡기는 2인자인 조조-순욱의 관계와도 같았으며, 조예 때는 선황으로부터 탁고대신으로 임명받았으며 현 황제가 아버지처럼 흠모하고 신뢰하는 지휘관이라는 점에서 유선-제갈량의 관계와도 같았다.[14]

하지만 다르게 보면 아직 위나라가 건재하던 234년에 사마의의 장남 사마사가 이미 딴 마음을 품고 이를 눈치챈 아내 하후휘를 독살했는데 사마씨 일파는 이미 다른 본심을 품고있던 것으로 보인다. 기록을 고려하면 그의 본심에 대한 의심은 더욱 확고해진다. 아들이 역심을 품고 개국공신 하후가의 여식인 아내를 독살하는 지경까지 갔는데 (가정 교육은 둘째치고) 아버지가 그 상황을 몰랐다고 보긴 힘들기 때문이다. 본인이 주도했거나 암묵적 동의가 있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조예 때 군권과 재정이 사마씨의 수중에 들어왔고, 구품관인법으로 관맥이 형성되었고, 고평릉 사변을 기점으로 사마씨에게 조정 대권이 집중되고[15], 종실 왕공들은 왕릉의 난을 계기로 사마의가 싹 유폐시켰다. 왕릉이 사마의와 절친한 사이였는데도 자신이 위의 충신임을 피력하며 반란을 일으켰다가 죽은걸 고려하면 당대에도 사마의가 역심을 품었다고 널리 받아들여졌다고 해석할수 있다. 어차피 서두를 게 없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신 왕조의 레일은 충실하게 깔아줬다. 더군다나 그는 조씨가 유씨의 황위를 빼앗던 과정을 그 현장인 동한 조정에서 모두 직접 지켜본 산 증인이기도 하며, 젊어서부터 보여준 치밀하고 타산적인 성격을 고려하면 이때의 교훈을 받아들여 더욱 교활하게 진행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그러한 시각은 위의 틀에 있는 사마의의 초상화에 덧붙인 문구[16]에도 나타나 있다.

그러나 군주제의 근본적인 문제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군주제는 권력승계의 정당성을 혈통이라는 빈약한 기반에 두는 정치체제다. 군주가 최고 권력자에 있을 수 있는 것은 이전 최고 권력자의 혈통을 물려받았다는 이유 뿐이다. 한고제 유방과 같은 창업군주를 생각해보더라도, 유방이 세력을 이끌어 천하통일을 이룬 것은 사실이나 한고제의 신하들이 없었다면 유방이 한나라를 세우는 것은 불가능 했다. 즉 창업군주마저 그 나라를 세운 모든 공적을 독차지 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군주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나라를 세운 세력을 이끈 지도자였다는 것뿐인데 그 영향은 세대를 거쳐 이어진다. 군주의 아들은 군주가 되는 것이고 공신의 아들은 신하에 머문다. 그렇기 때문에 군주는 공적이 큰 신하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한고제도 즉위 후 그 소하마저 의심하는 것이다. 유방의 입장에서 생각해보기에, 내가 비록 지금은 황제의 자리에 있지만 쌓은 공적이 크고 거대한 명성을 가진 저자가 만일이 제위를 노린다면 그를 어찌 쉽게 막을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 것이다. 사마의가 조조, 조비, 조예를 섬기면서 쌓아온 공적은 매우 크고, 노년의 나이에 요동까지 정벌하고 돌아왔음에도 한편으로는 그토록 공이 큰 신하를 의심하게 되는 것은 군주제에서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리고 민주정을 제외한 모든 정치체제는 권력의 상실이 최대 죽음까지 각오해야 하는 심각한 사태라는 점도 생각해야 한다. 민주정에서야 실각하면 야권 세력으로서 활동하며 차기를 노릴 수 있지만, 이외의 정치체제에서는 숙청의 대상이 될수 있고 고대사회에서는 멸족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사마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공이 큰 신하로서 큰 영예를 누리고 있으나 한편으로는 군주와 그 주변세력이 자신을 의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을 수 있다. 자신이야 위나라를 위하여 세운 공이 크기에 권신으로 살다 갈 수 있으나 공적이 미약한 자신의 후손들은 과연 어떠할 것인가하는 생각을 가장으로서 한편으로 할 수밖에 없다. 즉 사마의가 적극적으로 모반을 일으켜 황위를 찬탈하려 했다고 보기는 어렵더라도, 그가 자기 자신, 또는 자기 가문의 안위를 조씨 정권의 유지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을 수는 있고(이는 굳이 현대인 관점에서 생각해보지 않더라도, 자신이 충의를 지켜서 장차 멸족될 것인지, 아니면 정권을 틀어쥐어 가문을 보존할 것인지의 선택에서 전자를 선택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자신에 대한 의심과 견제가 지속되는 상황에서 가문을 지킬 수단으로 사병을 육성해두고 여의치 않으면 본인이 모반을 해버릴 수도 있다는 백업 플랜을 세워둔 것일 수 있다. 정리하면 사마의는 결과적으로 정권을 뒤엎은 역신이라고도 할 수 있으나 최소한 그 동기는 방어적인 것이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사마염이 세운 서진이 통일 제국으로서 제대로 움직였다면 선대들의 행각에 대하여 비판이 줄어들었을 것이다.[17] 그러나 오나라를 멸하고 통일을 완수한 후 서진의 초대 황제인 사마염부터 온갖 실정을 일삼기 시작했고 후한 이래로 축적되었던 사회적인 모순이 폭발해 몰락해가다가 50여년만에 화북을 북방 민족에게 빼앗기고 강남 왕조로 전락했으며, 그 다음에 이어진 시대가 5호 16국이라는 난세였다. 한 개인이 감당해낼 수 없는 시대의 흐름 때문에 처음부터 장수할 가능성이 낮았다는 게 가장 긍정적인 평가인 서진의 시조인 3부자에 대한 평은 자연스럽게 더욱 박해졌다. 사마의는 후대에도 망탁조의[18] 중 한명으로 꼽히며 역적으로 간주되었다. 사마씨는 청류파 가문이었기에 그의 행실은 청류파의 위선을 보여준다는 의견도 있다.출처[19]

당태종 이세민은 이런 사마의의 태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냉담한 평가를 내렸다.

문제 때에는 (임금을) 보좌하며 권세가 컸으니 허창에서 소하와 같은 임무를 맡고 숭화전에서 곽광 때보다 더한 부탁을 받았다. 응당 성심과 절의를 다했다면 이윤이나 부열(傅說)과 그 이름을 나란히 했으리라. 명제가 장차 임종하려 할 때에 이르러서는 나라의 대들보를 그에게 맡기니, 두 임금의 유조를 받고 3조[20]

를 좌명(佐命)했고, 인사지탁[21]을 받들었으나 일찍이 목숨을 다해 보답하지 않았다.

천자가 바깥에 있을 때 안에서 갑병(甲兵)을 일으키고 (후사를 부탁했던 명제) 능(陵)의 흙이 채 마르기도 전에 급거 서로 주륙하니 충정한 신하의 지체로서 어찌 이 같을 수 있는가! 그가 선(善)을 다했다는 것은 이로 인해 의심스럽다.



5. 장합의 죽음에 대한 책임 논란[편집]


조조 휘하의 다섯 명의 좋은 장수를 뜻하는 오자양장[22]의 1인으로서 위나라의 명장이였던 장합이 무리한 추격전 끝에 전사한 것에 대해 이를 명령한 사마의에 대해 논란이 존재한다.

이에 대해서 사람들의 의견은 여러가지로 나눠지는데, 첫번째로 사마의가 잘못된 판단을 내렸다, 두번째로 주도권 싸움에서 방해가 되는 장합에게 무리한 명령을 내려 죽도록 만든 것이다[23], 세번째로 장합이 전공을 지나치게 탐하다 스스로 죽음을 자초한 것이고, 이에 대해 사마의가 억울하게 책임을 추궁당하는 것[24]이다는 주장이 있다.

장합이 공을 탐내 무리하다가 죽었다는 연의의 창작을 제외하곤, 사마의에겐 부정적인 주장이 대다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자신의 판단 착오로 인해 명장을 죽게 만들었다면 그 자체가 큰 실책이고, 음흉하게 주도권 확보를 위해 자기편을 외적에게 죽게 만든 것이라면 아주 악질이기 때문이다.

사실 조진이 죽고 난 뒤에 대촉전선에 거물이라고 할 만한게 곽회랑 장합 정도인데, 곽회는 장합, 사마의보다 짬이 좀 많이 아래였다. 그렇다면 사마의가 대촉전선을 장악하는데 있어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은 장합인데, 장합은 선대 조조의 전성기때부터 위를 섬긴 숙장이라 황제에게 특진까지 받은 인물이었다. 게다가 일반적인 항장과 달리 장합은 적극적으로 옛 주인을 배신해서 큰 공을 세우고 조위의 공신이 된 인물이기 때문에 다른 항장들처럼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거기에 대촉전선인 농서에서 장합은 제갈량을 막은 일로 명성이 높았다. 호삼성도 농서에서 제갈량을 막은 장합의 명성을 부담스러워 했을거란 평가를 남겼다. 따라서 사마의가 장합을 거슬려 할 이유는 충분히 있었다. 실제로 제갈량의 4차 북벌 당시 사령관인 사마의와 보좌역인 장합, 이 두 사람의 의견이 많이 충돌하기도 했던 것도 사실이다.

게다가 사마의가 하필이면 장합에게 추격토록 종용했고, 오히려 장합은 '병법에서 성을 포위할 때는 반드시 출로를 열어두고, 퇴각하는 군사는 쫓지 말라 했습니다.'라고 하며 이를 반대했다는 기록이 정사 장합전에 있다. 기록대로라면 장합은 위험하기 때문에 안 된다고 거부까지 했음에도 사마의가 이를 그냥 무시해 버린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결국 장합이 전사한 뒤 대촉전선은 사마의 혼자 전권을 차지하게 된다. 사령관이 되자마자 자기 권위에 위협이 될만한 인물이 전사했다는 것이 너무나 시기적절하다. 이렇게 봤을때 어차피 툭하면 태클을 걸어 감정도 안 좋은 같은 편 원로 장군을 함부로 죄를 물어 죽일 수는 없으니, 사마의가 간접적으로 전략적 판단 실수인 척 장합을 죽도록 유도했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기는 하다.

다만 문제는 추격전을 벌이다가 반격을 받는다고 해도 최고 지휘관이 사망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장합이 전사하기는 했지만, 추격하라고 명하면 100% 죽어서 돌아온다는 보장이 없는데 이것을 책략이었다고 하는 것은 무리다. 오히려 추격군이 전멸하고 장합 혼자서 살아 돌아올 가능성도 높았는데, 이렇게 되면 사마의와 장합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을 것이고 무리한 명령을 내린 사마의의 입지도 흔들렸을 것이다.

여담으로 중국 사학자 허쯔취안의 역사서 <위촉오삼국사>에서도 장합 함정설을 주장하고 있다. 근데 근거가 그냥 '사마의는 그러고도 남을 놈!'일 뿐이라서 신빙성이 떨어진다.

이러한 논쟁을 바탕으로 최근의 창작물들은 사마의의 전략적인 실책을 지우고 지략을 미화하기 위해서 이런 설정을 취하는 듯 하다.


6. 인재 안목[편집]


  • 등애는 사마의가 밀어줘 키운 사마의 키드다. 군의 하급관리로 머물던 등애를 처음 태위의 부하로 등용했고,[25] 상서랑으로 발탁한 것도, 대운하 프로젝트를 추진/승인한 것도 사마의다.

  • 사마의 키드의 다른 케이스로 왕창은 원래 중앙 쪽에서 관직을 하고 있었는데 사마의가 눈여겨 봐 서주(자사)+형/예주(제군사)라는, 대오 전선의 사령관으로 전임하여 전공도 세웠고, 아들인 왕혼은 오나라 정벌의 사령관 중 하나로 활약했다.

결국 촉의 멸망과 오의 멸망 모두 직/간접적으로 사마의 그늘 아래 있는 이들이 공을 세웠고 그 외에도 왕기처럼 역시 사마의가 뽑아 대오전선에서 활약한 이도 있으니, 사마의의 인재안목은 의심할 바가 없다. 그런 것치고는 등애는 진서 선제기에 이름 한자도 올리지 못했다. 그리고 정작 그 아들인 사마소는 등애를 끝내 제대로 포용하지 못했던 걸 생각하면[26] 그 도량 면에서도 더더욱 차이가 난다.
형주 자사 호수(胡脩)는 거칠고 난폭하고 남향태수 부방(傅方)은 교만, 사치스러워 둘 다 변경에 두면 안된다고 주장하였다. 조조는 이를 따르지 않았고 관우의 형주공방전에서 호수와 부방은 관우에게 항복한다.
유엽과 함께 맹달의 언행이 간교하여 신임할 수 없다고 주장했으나 조비가 맹달을 총애했고 조비의 측근인 환계하후상과도 맹달이 친했기 때문에 무산되었다. 후일 제갈량과 내통한 맹달은 실제 반란을 일으키고 방심하지 않고 있던 사마의는 이를 진압했다.
왕릉 수하에 있던 왕기를 빼왔다.
주태는 형주자사 배잠의 수하로 있었는데, 재능을 확인하고 이후 맹달을 토벌할 때 선봉으로 세웠다.
조예는 일시적인 기쁨과 노여움으로 사람들을 다스린 적이 많았았는데, 왕관은 뜻을 굽히지 않고 법에 따라 집행했다고 한다. 사마의는 왕관을 종사중랑(從事中郎)으로 임명할 것을 요청했다. 왕관은 그렇게 출세하게 되고 조상 사망 이후 조상파의 군대를 맡게 된다.
사마의가 공손연을 토벌할 때 종사해 격문과 공고문을 작성했다. 그후로도 재능을 인정받아 사마의가 연속해서 벼슬을 내렸다.
이런 일화들은 한편으로는 당시 사마의가 위나라에서 귀족, 관리들의 인사권을 한 손에 쥐고 있었다고 볼 수 있는 일화들이다. 정사 삼국지에도 노육, 손례, 부하, 포훈, 순의 등에게 인사권을 행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7. 연의의 수혜자인가 피해자인가[편집]


대체적으로 연의의 수혜자인 것으로 여겨진다. 제갈량을 초인으로 띄우다 보니 재미를 위해서나 제갈량의 체면을 위해서나 사마의도 같이 띄워줘야 했기 때문. 제갈량의 북벌은 조진, 곽회, 장합 등 당시 위나라를 대표했던 베테랑들이 함께 힘을 합쳐서 막아낸 것인데 연의에서는 이 모든 공적을 사마의에게 모조리 몰아준다. 조진은 아예 바보로 묘사되며 곽회, 장합은 제법 유능하지만 사마의가 없으면 항상 나사가 한두개 빠진 모습. 물론 사마의가 제갈량의 북벌을 저지하는데 기여한 것은 사실이며(단 사마의가 대장으로 본격 활약하기 시작한 것은 4차 때부터) 부하 장군들의 제안을 제대로 알아보고 채택하는 것도 대장의 공로인 만큼 최고의 공헌자가 사마의인 것은 맞다.

단 한편으로 보면 손해를 본 구석도 있다. 제갈량이 죽은 뒤 연의는 힘이 쫙 빠지면서 전개가 빨라지는데, 이 시기의 실질적 주인공이었던 사마의의 후반부 업적이 대부분 묻히거나 간략하게 다뤄졌기 때문이다. 그나마 제대로 묘사된 것은 요동 정벌 정도이지만 이것도 분량이 짧아서 '이길 전쟁을 이겼다'는 느낌이다. 실제로 공손연은 위나라의 에이스였던 관구검을 격파한 만만치 않은 적이었고, 요동은 워낙 중원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었기 때문에 쉬운 원정이 아니었다.

더 큰 문제는 사마의의 정치적 능력도 대부분 가려졌다는 것. 연의에서는 그저 조상 일파를 속이기 위해 보여준 연기력(...) 정도만 주목을 받았지만, 위나라의 문무 대신들과 호족 세력 대부분을 휘어잡은 정치력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위에 서술한 것처럼 사마의는 전략가, 군사지휘관으로도 활약했지만 내정 부문에서도 업적이 많은 인물인데 이러한 면모는 연의에서는 아예 나오지 않는다.[27]


8. 학살 논란[편집]


사마의는 요동정벌에서 양평성에서 15세 이상의 남성 전부를 죽이라는 명령을 내려 7,000명을 학살하고 그 시체로 경관(京觀)이라는 기념물을 만드는 초강경 통치를 보여준다. 현대에 봐도 사마의의 행동은 잔혹한 행보였지만, 당대에 봐도 잔혹했다고 평가받아 사마의를 개국자로 모신 후대의 (동)진의 명제조차 사마의의 학살과 고평릉 사변 그리고 사마소의 조모 시해 등의 행동을 보고는 이런짓을 벌였으니 진나라의 운명이 길지 못하겠다며 한탄했다고 한다.[28]
[1] 유수구의 서남쪽[2] 자치통감 8권(원본 72권) : "명제 태화 5년(231년) 여름 , 5월 신사일(10일)에 사마의는 마침내 장합에게 남쪽의 포위한 곳에서 무당감 하평(왕평을 이르는 말이다)을 공격하게 하였고, 스스로는 중앙을 점거하고 제갈량을 겨냥하였다. 제갈량이 위연과 고상, 오반에게 맞아서 싸우게 하니 위의 군사는 대패하였으며, 한의 사람들은 갑병의 목 3천급을 얻었고 사마의는 돌아와서 영채를 지켰다."[3] 이는 조예가 만총 등을 데리고 친정하자 오나라의 손권이 바로 공세를 무르고 퇴각하였기 때문이다.[4] 단, 제갈량의 말을 보아 사마의는 싸우려는 시늉만 한걸로 보인다. 즉 병사들 사기 높이려고 한 사마의와 신비의 짜고 치는 고스톱일 가능성도 있다.[5] 사마의가 촉군의 퇴각 이후 수많은 양곡을 노획했다는 기록이 있다.[6] 혹자는 이때 제갈량이 수명이 다해 자연사했기 때문에 이겼을 뿐이라고 사마의의 방어를 폄훼하기도 하지만, 그렇게 볼만한 근거는 많지 않다. 촉군이 장기간 공세를 지속할 보급 능력이 부실함은 이미 이전의 북벌들에서도 여러차례 증명된 사실이다.[7] 촉한의 황제인 유선이 의전 업무를 제외하면 태업하면서 제갈량에게 모든 권한을 위임했기 때문에, 제갈량은 황제나 다름없는 권한으로 자신이 원하는 정책들을 100% 뜻대로 펼칠 수 있었다.[8] 옛 회남지역도 포함되어 있다.[9] 각각 <상림전>, <왕준전>.[10] 즉, 단순히 누가 정치력이 뛰어난가의 비교는 무의미하며, 둘 다 뛰어난 정치력의 소유자였지만 성향의 차이로 인해 능력의 발현 방식이 완전히 달랐다고 보는게 타당하다. 제갈량은 정치라는 단어의 의미 그대로 바르게 다스리는 정치에서 뛰어난 역량을 보였다면, 사마의는 권력 투쟁으로서의 정치의 달인이었다.[11] 황권[12] 사마휘 문하에서 같이 공부한 동문[13] 옛 주군인 조조 역시도 이와 비슷하다. 하지만 조조는 황제의 아이를 회임 중이던 후궁, 황제와 20년 이상 동고동락한 황후, 그 황후가 낳은 황자들과 두 여성의 친정 일가붙이들까지 살해한 전과가 분명히 있고 사실상 조조 대에 동한은 멸망하고 조위가 세워졌기 때문에 권신 시절의 조조를 충신으로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그런데 사마의는 그것도 아니고 진짜로 스스로는 최고의 충신이라고 여겼다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사마의가 집권했다고 해서 아직 조위가 멸망한 것도 아니었고, 아무리 권신이었다지만 사실상 황제나 다름없을 정도의 권위를 누리고 간 것도 아니었다. 해석들 가운데는 확실히 역신이라고 할 수 있는 큰 아들 사마사에게 이용당했다는 해석도 있을 정도, 하지만 전근대 시기에 신하의 몸으로 황제 몰래 정변을 일으키기 위해 수도 인근에 3천 명이나 되는 사병을 모으고 정권을 탈취한 후 정적들에게 투항하면 살려주겠다고 거짓말한 다음 그들의 일족을 멸했으니 이게 또 애매하다.[14] 2쌍의 황제/신하의 나이나 즉위 시점도 비슷했다. 유선은 조예보다 2~3살 어리고 3년 일찍 즉위했고, 제갈량은 사마의보다 2살 어리다.[15] 사마의는 전형적인 명문호족이라 기득권에 왔다갔다 하는 권신이 될 수 밖에 없다는 평가도 있다. 그와 사마부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호족사회의 부조리와 영향력을 제한하려는 관료세력들을 견제, 압박한건 사서에도 드러난다. 사마의가 조위의 견제를 받은건 기껏해야 조상집권기 정도고 그나마도 장남 사마사에게 호의를 비치는 등 유화적인 면이 있었다.[16] 將帥之才(장수지재 : 장수의 재목을 타고 났으나) 奸雄之志(간웅지지 : 간웅의 뜻을 품어서) 得傳政權(득전정권 : 정권을 오로지 할 수 있게 되자) 見利忘義(견리망의 : 이익을 바라보고 의를 잊었다), 이러한 표현은 삼국지 연의에서 부정적으로 묘사되었던 조조의 인물상과도 일치할 정도로 한마디로 후세에 사마의의 충의에 대해서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부정적인 측면에서) 조조와 동급으로 봤다는 얘기도 된다.[17] 멀리 갈 것 없이 아주 가까운 성공 사례가 있으니, 바로 조선을 세운 이성계다. 군벌 출신으로서 한때 구국의 명장이었으나, 명백히 야심을 드러내며 공민왕 이후의 모든 왕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하여 조조+사마의와 비견될 모습을 보여주었다. 차이점이 있다면 그의 후계자들은 서진과 다르게 국가의 기틀을 제대로 세웠기에 왕조가 오래가는 원동력이 되었다는 것.[18] 조선의 경우 사마의는 망탁조의의 또 다른 표현인 '망조의온(莽操懿溫)' 중의 하나로서 김자점급의 인물로 취급받았으며, 정후겸을 처리할때도 사마의의 예를 들었다.[19] 실제로 서진 왕조의 구축을 이끈 인사 상당수는 과거 청류파 인사들의 후손들이 많았다.[20] 문제 조비, 명제 조예, 제왕 조방[21] 忍死之託-차마 죽지못하고 오기를 기다렸다 부탁함. 명제가 죽을 때의 일을 가리킴[22] 동오는 강동십이호신, 촉한은 사방장군이 있다.[23] 삼국전투기의 작가가 이를 바탕으로 만화를 그렸다. 물론 작가의 판단이다.[24] 연의에서 등장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25] 235~239년 사이로 추정.[26] 활용이야 물론 뽕을 뽑고도 남을 정도로 했다.[27] 이건 연의가 군담인 이유도 있다.[28] 출처 진서 선제기, 자치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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