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우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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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우갑
鮮于甲


출생
1893년
평안도 평양부 (현 북한 평양시)
사망
몰년 미상
본관
태원 선우씨
직업
고등계 형사, 공작원, 언론인
가족관계
선우순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일제강점기 시절 경찰 출신 친일반민족행위자. 내선일체를 주장했던 친일파 선우순의 동생이다.


2. 생애[편집]


1893년 평양에서 태어났고 성장 과정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다만 형 선우순과 함께 악명높은 밀정으로 활동한 친일반민족행위자로서 악명을 높았었다. 다만 그는 형과 다르게 일본, 상해, 북경, 미국 등을 종횡하던 이동형 밀정이였다. 고등계 형사로 근무하던 선우갑은 1919년 2.8 독립 선언 당시에 일본 도쿄로 건너가 유학생들을 감시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도쿄 YMCA 본부 급습을 지휘한 그는 송계백, 최팔용을 비롯한 사건의 주동자들을 밀고하여 체포하는 데에 기여했다.

그러면서 일본 경시청 경부보로 재직할 당시에는 1919년 중국 상하이에서안창호를 비롯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핵심 인물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고, 1920년에는 미국에서 활동 중이던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행적을 보였다. 그는 외국에서 기자로 활동하게 되었는데 이후 각지에 파견되어 재외 독립운동을 감시하는 일을 담당하고 국제 여론을 조선 독립에 부정적인 입장으로 기울게 만드는 활동과 같은 적극적인 친일 활동을 앞장섰다.

고등정탐, 혹은 그냥 형사로 우리 독립운동의 비밀을 적에게 밀고하거나 우리 지사를 체포하며 동포를 구타하는 추류(추잡한 무리)들이니 선우갑, 김태석, 김극일과 같은 흉적이라

- <독립신문> "칠가살(七可殺)", 1920년 2월 15일 1면 -


상해 임시정부는 1920년 2월 15일에 독립신문을 통해 “마땅히 죽여야 할 일곱 가지 대상”이라는 뜻의 '칠가살(七可殺)'[1]을 공표하였는데 이때 그는 같은 친일 경찰인 김극일, 김태석과 같이 예시로 글에 쓰인 일화가 있다.

경무국장 시절 고등정탐꾼 선우갑(鮮于甲)을 유인하여 포박·신문한 일이 있었다. 그는 죽을죄를 지었음을 시인하고 스스로 사형 집행을 원하였지만, 나는 뉘우치는 것을 보고 “살려줄 터이니 큰 공을 세워 속죄할 것이냐?”고 물었다. 그가 소원이라 하기로 결박을 풀어 보내주었더니, 그는 상해에서 정탐한 문건을 임시정부에 바치겠다는 뜻을 밝혔다. 나는 시간을 약속하고, 그를 만나기 위해 김보연·손두환 등을 왜놈의 승전여관(勝田旅館)으로 보냈다. 과연 그는 왜놈에게 고발하지 않았고, 내가 전화로 호출하면 시간을 어기지 않고 즉시 대기하였다. 그러다가 4일 후 몰래 도망하여 본국에 돌아가서, 임시정부의 덕을 칭송하고 다닌다는 소문을 들었다.

백범일지


1925년 그는 그 와중에도 중화민국 봉천성 안동현(安東縣)[2] 지역에서 헌병대 밀정으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9월에는 차하얼특별구(察哈爾特別區) 장가구시(張家口市)[3]에 있는 중국 군벌들에게 대아시아주의를 선전하는 활동을 주도한다. 김구의 《백범일지》에 의하면 상하이에서 선우갑을 생포하였으나 그가 장공속죄(將功贖罪)를 약속하여 풀어주었더니 곧바로 도주했다고 한다. 이후 선우갑의 행적은 밝혀져 있지 않다.

이후 그는 친일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발표한 명단과 친일인명사전 명단에 형과 같이 이름이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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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번째는 일본인, 2번째는 매국적, 3번째는 고등경찰·형사·밀고자, 4번째는 친일부호, 5번째는 적의 관리, 6번째는 불량배, 7번째는 배반자였다.[2]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성 단둥시.[3] 현 중화인민공화국 허베이성(河北省) 장자커우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