랴오닝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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랴오닝성은 중국의 성으로, 중국 둥베이 지역의 만주 일대에 위치한다. 성도는 선양시다. 행정상 간칭은 랴오(辽 )다.
인구는 4,390만 명, 면적은 14만 5,900㎢이다. 서쪽은 허베이성, 북쪽은 내몽골 자치구, 동쪽으로는 지린성, 남쪽으로는 압록강을 경계로 북한과 접한다. 서남쪽으로는 황해, 보하이 만 과 접한다.
전통적으로는 요동과 요서 지방을 합쳐서 랴오닝이라 한다. 랴오허가 성 중심부를 관통하며 랴오허를 기준으로 서쪽을 랴오시(辽西)라 부르고 동쪽을 랴오둥(辽东)이라 부른다. 랴오허 하구에 위치해있다 보니 광활한 평야를 지니고 있는데, 이 지역은 개발되기 이전까지만 해도 요택(遼澤)이라 불리는 거대한 늪지였다. 고구려가 정복했던 땅이기도 하다.
대도시도 엄청나게 많다. 이 성의 인구만 4,000만 명이 넘는다. 그러나 인구가 많다고는 하지만 2000년대 이후로부터는 출산율이 매우 낮아져서 1,000명당 출생률은 6명대이고 출생아수는 27만 명대에 머물고있다. 인구도 매년 유출되는 중. 이건 지린성이나 헤이룽장성도 비슷하게 겪는 문제이다. 주요 도시로는 서부에 위치한 진저우시, 중부에 위치한 선양시, 다롄시, 잉커우시, 안산시, 동부의 단둥시 등이 있다.
인구의 84%가 한족이고, 만주족은 인구의 13%에 달한다. 동북 3성 중에는 만주족이 많은 편이다.[2] 그 외에 몽골족이 2%, 조선족과 후이족은 각각 0.6%이다. 옆 지린성에 비하면 조선족 인구는 적은 편. 특히 만주족 비율은 랴오닝성 동부 산지 쪽에서 높게 나타나며, 랴오닝성 동부에 6개 자치현이 있다. 특히 선양의 둥링구(东陵区)에 만주족의 비율이 높다.
랴오닝성의 남부 쪽은 지린성, 러시아 프리모리예 지방처럼 여행에선 유의해야 한다. 여행 유의 지역은 아니지만 북한과의 접경지대이기 때문. 이곳은 북한인들이 많이 돌아다니는 지역으로 납북의 위험성이 있다는 이유에서 지정되었다. 설마 그럴 일이 있겠느냐 생각할 수 있고 실제로도 일반적인 관광객이 납북당할 가능성은 거의 없긴 하지만 성 전체에 북한 공작원들이 파견되어 있는 것은 명백하므로 주의해야 하는 게 사실이며, 특히 중국을 기점으로 북한 선교활동을 하던 선교사들은 대개 여기서 납북당했다.[3] 물론 선양에서는 그런 일이 없고 한국인들이 많이 산다.
특히 단둥시는 북한 국경지대로 신의주시와의 접경이기 때문에 한국인 관광객이 많이 찾는 곳이다. 북한인이 많아서 위험하다는 설이 있지만 실제로 이곳은 국경지대이기 때문에 중국 공안들이 많아서 치안은 좋은 편이다. 다만 한국인이 탈북자를 돕거나 도우려고 단동에 가는 경우 북한 공작원들의 표적이 될 뿐만 아니라, 중국 공안에도 체포될 수 있다.
지형은 대체로 동고서저형. 서부는 얕은 구릉지, 중부는 평원, 동부는 험한 산지로 구분된다. 큰 도시는 주로 중부에 집중되었고 동부는 거의 불모지이다.
내몽골 자치구와 인접한 북쪽 일부 지역인 시라무렌 일대에는 건조 기후도 나타난다.
기후는 연교차가 매우 큰 냉대 대륙성 기후를 나타낸다. 겨울에 영하 20°C를 찍는 건 예삿일이고 발해만에는 유빙이 언다. 그렇다고 해서 여름이 시원한 건 결코 아니다. 한반도 북부 지역들과 비슷하거나 그 이상이다. 특히 차오양 시의 경우 여름철 낮 최고기온이 35°C를 넘는 경우가 잦고 최고 43.3°C까지 오른 적도 있다. 이러한 기후는 한반도 북부지방인 평안도, 황해도 정도 수준으로 한반도 중남부는 겨울에 그렇게까지 춥진 않은 편으로 인천광역시나 경기도 안산시 등 황해 연안지역은 상대적으로 내륙보다 따뜻한 편이며 저 정도 온도는 강원도 영서지방인 홍천군, 춘천시, 철원군 정도다. 그리고 매우 건조해서 사실상 스텝기후에 가까운 모습으로 눈이 통 내리지 않으며 대기가 아주 건조하다.
요동 반도 또한 랴오닝성에 포함되어 있다.
청나라 말부터 공업화되기 시작하여, 만주국까지는 중국에서 가장 선진적인 공업지역이었다. 이후 소련군정시절에 약탈당하고 중화인민공화국 시절에 제사해운동과 문화대혁명의 직격탄을 맞이하면서 쇠퇴하였다. 하지만 개화기부터 중공업을 중심으로 발전한 지역이라서 그 공업역량 자체는 보존했고 지금도 중화학 공업으로 유명한 지역이다.
하지만 개혁개방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난 탓에 신기술 도입이나 자본투입의 시점이 늦었고, 하필 국경을 맞댄 나라가 북한인지라 무역이 발전하지도 못하여, 성장이 지리멸렬하다. 중국 정부도 시진핑시대에 이르러 투자를 많이 하고 있긴 하지만 워낙 추운 지역이라 첨단산업 등의 새로운 산업을 유치해내지 못하고 있다. 중공업에서 첨단산업으로 중심산업을 옮기는 중국의 사정상 공업자체가 축소되고 있기도 한데, 이 때문에 오히려 GDP가 감소하기도 하여 2017년에는 그 전년도 대비 GDP가 23%나 감소하기도 했다.[4]
만주벌판 덕에 공업뿐만 아니라 농업이 발달한 지역이기도 하다. 주로 논농사보다는 밭농사가 주로 성행한다. 재배하는 품목은 옥수수, 밀, 콩 등의 식량작물이다. 조선족들은 밭농사보다 논농사를 주로 하여, 벼를 기른다고 한다. 북방지역임에도 한반도처럼 여름에는 매우 습도가 높으면서도 덥기 때문에 생각보다 벼농사가 잘된다고 한다.
베이징과 한반도를 잇는 철도가 통과해 교통상 매우 중요하다. 북쪽 김씨 왕들이 중국을 방문할 때 항상 이 곳을 지나갔다. 앞으로 남북통일이 되면 그 중요성은 가히 메가톤급[5] . 이곳을 통과해 러시아 치타에서 러시아 철도와 연결되며, 이후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통하여 유럽까지 철도로 연결된다.
대한민국 인천항에서 랴오닝성의 잉커우시, 다롄시, 단둥시 등으로 가는 배편도 있다.
랴오닝성은 랴오허(요하) 유역을 중심으로 서쪽은 요서, 동쪽은 요동으로 나뉜다. 랴오닝은 선사시대까지는 한민족의 중심지였다. 단군조선의 영역이 정확히 어디서부터 어디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대릉하, 요하 유역부터 대동강 유역까지는 한민족의 영역이었다는 사실이 정설이다. 이러한 상황은 기원전 281년쯤에 연나라의 진개가 단군조선을 침략하여 약 2,000리를 강탈했다고 나오는데[6] , 이때에 랴오닝 일대가 한민족의 통치에서 처음 벗어나서 한족의 통치로 들어갔다.
이후, 춘추전국시대부터 한나라가 건국할 때까지 요하강은 한민족 문명권의 영역과 한족 문명권 영역의 경계선 역할을 했고, 조선과 연나라의 국력이 비등했기 때문에, 한무제가 등장할 때까지, 한민족과 한족의 영역변동은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조선의 정권이 단군조선에서 위만조선이 되고 중국이 통일된 뒤에 한(漢)제국이 성립되자, 한민족의 국가와 한족의 국가의 국력차이가 극심하게 되었고, 결국 한무제가 위만조선을 침략하여 멸망시키고 그 자리에 한사군을 설치함으로서 랴오닝 일대는 온전하게 한족의 통치에 들어가게 되었다.(기원전 108년)
하지만 요하 유역 동쪽에는 아직도 한민족계 인구가 많았다. 기원전 37년에 건국된 한민족계 국가인 고구려(기원전 37년)가 성장하면서 이 인구를 바탕으로 이 지역을 석권할 수 있었고, 요하 동쪽은 다시 한민족의 영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요하 유역을 다시 한나라가 온전하게 지배하게 되는 것은 668년에 당나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킨 이후였다. 당나라는 조선 유민들이 고구려가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였던 것을 기억했고, 고구려 멸망 이후 고구려의 유민들을 대규모로 타지로 이동시켰다. 따라서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에 만주전역을 포함해서 요하 동쪽에 한민족계 인구는 매우 크게 줄어들었다. 이후 고구려 유민들은 말갈과 연합해 한민족계 국가인 발해를 세우고 요동까지 진출한다.
한민족이 점진적으로 사라지기 시작한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한 민족은 거란족, 몽골족과 말갈족 같은 북방 유목민족이었다. 가장 먼저 차지한 민족은 거란족이었는데, 거란족계 국가들은 한민족계 인구를 줄이려고 많은 노력을 들였다. 제노사이드가 있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발해 멸망 이후 만주에서 한반도로 대규모 인구 이동이 있었다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몽골제국이 요나라를 정복한 이후에는 심양지역을 중심으로 다시 고려계 인구가 크게 늘었고 요동지역을 통치하는 상징적인 군주로 심양왕을 봉했는데 이러한 사정이 고려되어 고려왕이 겸하거나 고려왕족이 맡았다. 훗날 우왕시기에 요동정벌을 계획할 때에도 역사적 연원뿐만 아니라 실제 요동지역의 주민구성도 정벌 동기가 되었을 것으로 보여지며 조선 초까지도 이 지역 주민들이 조선인들과 말이 다 통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차츰 명나라에 동화되어 가다가 청나라 말기 만주에 대한 봉금정책 해제 후 밀려드는 한족에 뒤섞여 자취를 감춘 것으로 보인다. 최근까지도 실제 고구려 장수왕의 후손을 주장하는 요양 고씨 등 족보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도 미미하지만 존재한다.
이후 거란족 또한 몽골족에 의해서 사라졌고, 그 자리를 채운 민족은 여진족이었다. 여진족은 점진적으로 서진했는데, 적어도 여말에는 아무르강지역부터 요하 동쪽까지를 차지했다. 물론 몽골제국이 멸망한 이후, 요동지역을 통치하는 나라는 한족의 명나라였지만 요동지역의 한족인구는 절반을 넘지 못했다. [7] 이 여진족이 통일된 이후에 만주족이 되었고 만주족은 17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온전하게 요하 유역을 통치했으며, 적어도 19세기 중반까지 요동지역은 만주족과 한족의 땅이었다.
이 인구비율이 깨지기 시작한 것은 청나라가 멸망한 직후였다. 가장 먼저 들어온 민족은 청나라가 대륙을 통일한 시점부터 슬금슬금 만주로 재진출하기 시작한 조선인이었다. 조선계 인구증가가 지리멸렬한 가운데 만주족을 제치고 이 지역을 석권한 민족은 한족이었다. 군벌시대로 혼란스러워진 대륙을 피하여 비교적 안정적이었던 만주로 이주하게 되었고, 만주 전체에서 꾸준하게 한족인구가 늘어났다. 만주국이 멸망하고 중화민국이 다시 요동-만주를 반환받을 때쯤엔 이미 한족인구가 대부분이 되었다. 지금도 한족의 인구비율은 계속 늘어나고 있으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지금 이 지역은 북한과 접경한 지역이며, 한국이나 해외에서 북한선교에 나서는 선교사들이 거점으로 삼고 있다.
한편 랴오닝성은 처음부터 랴오닝성으로 불렸던 것은 아니었다. 1644년 청나라는 중원 정복 이후, 중원 지역에 대해서는 '행성제(行省制)'를 적용했지만 만주 지역에 대해서는 장군부(將軍府)를 두어 통치하게 하는 '군부제(軍府制)'를 채택했다. 그리하여 1644년(순치 1) 청나라 군대가 산해관에 입성한 직후, 순치제는 본래 수도였던 성경(盛京)을 유도(留都)로 삼은 뒤 내대신(內大臣) 1명을 유수(留守)에 제수하여 유도를 다스리게 했다. 이 유수 벼슬은 1646년(순치 3) '앙방장경(昻邦章京)'으로 개칭된다.
1662년(강희 1) 성경에 있던 주둔지가 랴오둥으로 옮겨지게 되었고, 벼슬 이름 또한 '진수요동등처장군(鎭守遼東等處將軍)'으로 개칭되었다. 1665년에는 이름이 다시 '진수봉천등처장군(鎭守奉天等處將軍, 약칭 봉천장군)'으로 개칭되었고, 1747년(건륭 12) 주둔지가 다시 성경으로 옮겨지면서 '진수성경등처장군(鎭守盛京等處將軍, 약칭 성경장군)'으로 개칭되었다. 이는 현재의 랴오닝성의 전신이 된다. 그러다가 신해혁명 발발하기 4년 전인 1907년(광서 33) 관제 개편 시에 성급행정기구로서 봉천행성공서(奉天行省公署)가 설치되어 봉천성이 정식으로 설립되었고, 봉천성이라는 명칭은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망하고 중화민국이 수립된 후에도 한동안 유지되었다.
그러나 봉천(奉天)이라는 이름은 '하늘의 뜻을 받들어 운명을 이어 받는다'는 뜻의 '봉천승운(奉天承運)[8] '에서 유래한 것으로, 1929년 동북역치로 중화민국 국민정부가 수립된 뒤 봉천이라는 명칭이 중화민국의 정체성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논의가 있었고 결국 제18차 국무회의의 결정에 따라 1929년 1월 28일 랴오닝성으로 개칭되었다. 의미는 '요수 유역이여, 오래도록 평안하라.'는 의미의 요수유역영구안녕(遼水流域永久安寧)이라는 구절에서 遼와 寧을 딴 것이다.
2차대전 종전 후 1946년에 중화민국이 동북지방의 행정구역을 동북 9성으로 정비하면서[9] 영역이 축소된 형태로 재설치되었으나, 1949년에 성립된 중화인민공화국이 동북지방의 행정구역을 5개 성과 기타 직할시로 재편하면서 잠시 폐지되었다. 대신 지금의 랴오닝성 일대에 랴오둥성, 랴오시성과 함께 선양, 뤼다, 안산, 푸순, 번스 5개의 직할시가 설치되었다. 1954년에 이들을 통합해 랴오닝성을 다시 만들었고, 이듬해에 러허성(중국어 정체자: 熱河省)이 폐지되면서 그 북동부를 편입하였다. 문화대혁명 시기 동안 랴오닝 성은 네이멍구 자치구의 일부를 편입하기도 하였지만 후에 복구되었다.
||1. 개요[편집]
랴오닝성은 중국의 성으로, 중국 둥베이 지역의 만주 일대에 위치한다. 성도는 선양시다. 행정상 간칭은 랴오(
인구는 4,390만 명, 면적은 14만 5,900㎢이다. 서쪽은 허베이성, 북쪽은 내몽골 자치구, 동쪽으로는 지린성, 남쪽으로는 압록강을 경계로 북한과 접한다. 서남쪽으로는 황해, 보하이 만 과 접한다.
2. 인문[편집]
전통적으로는 요동과 요서 지방을 합쳐서 랴오닝이라 한다. 랴오허가 성 중심부를 관통하며 랴오허를 기준으로 서쪽을 랴오시(辽西)라 부르고 동쪽을 랴오둥(辽东)이라 부른다. 랴오허 하구에 위치해있다 보니 광활한 평야를 지니고 있는데, 이 지역은 개발되기 이전까지만 해도 요택(遼澤)이라 불리는 거대한 늪지였다. 고구려가 정복했던 땅이기도 하다.
대도시도 엄청나게 많다. 이 성의 인구만 4,000만 명이 넘는다. 그러나 인구가 많다고는 하지만 2000년대 이후로부터는 출산율이 매우 낮아져서 1,000명당 출생률은 6명대이고 출생아수는 27만 명대에 머물고있다. 인구도 매년 유출되는 중. 이건 지린성이나 헤이룽장성도 비슷하게 겪는 문제이다. 주요 도시로는 서부에 위치한 진저우시, 중부에 위치한 선양시, 다롄시, 잉커우시, 안산시, 동부의 단둥시 등이 있다.
인구의 84%가 한족이고, 만주족은 인구의 13%에 달한다. 동북 3성 중에는 만주족이 많은 편이다.[2] 그 외에 몽골족이 2%, 조선족과 후이족은 각각 0.6%이다. 옆 지린성에 비하면 조선족 인구는 적은 편. 특히 만주족 비율은 랴오닝성 동부 산지 쪽에서 높게 나타나며, 랴오닝성 동부에 6개 자치현이 있다. 특히 선양의 둥링구(东陵区)에 만주족의 비율이 높다.
랴오닝성의 남부 쪽은 지린성, 러시아 프리모리예 지방처럼 여행에선 유의해야 한다. 여행 유의 지역은 아니지만 북한과의 접경지대이기 때문. 이곳은 북한인들이 많이 돌아다니는 지역으로 납북의 위험성이 있다는 이유에서 지정되었다. 설마 그럴 일이 있겠느냐 생각할 수 있고 실제로도 일반적인 관광객이 납북당할 가능성은 거의 없긴 하지만 성 전체에 북한 공작원들이 파견되어 있는 것은 명백하므로 주의해야 하는 게 사실이며, 특히 중국을 기점으로 북한 선교활동을 하던 선교사들은 대개 여기서 납북당했다.[3] 물론 선양에서는 그런 일이 없고 한국인들이 많이 산다.
특히 단둥시는 북한 국경지대로 신의주시와의 접경이기 때문에 한국인 관광객이 많이 찾는 곳이다. 북한인이 많아서 위험하다는 설이 있지만 실제로 이곳은 국경지대이기 때문에 중국 공안들이 많아서 치안은 좋은 편이다. 다만 한국인이 탈북자를 돕거나 도우려고 단동에 가는 경우 북한 공작원들의 표적이 될 뿐만 아니라, 중국 공안에도 체포될 수 있다.
3. 지형(지리)과 기후[편집]
지형은 대체로 동고서저형. 서부는 얕은 구릉지, 중부는 평원, 동부는 험한 산지로 구분된다. 큰 도시는 주로 중부에 집중되었고 동부는 거의 불모지이다.
내몽골 자치구와 인접한 북쪽 일부 지역인 시라무렌 일대에는 건조 기후도 나타난다.
기후는 연교차가 매우 큰 냉대 대륙성 기후를 나타낸다. 겨울에 영하 20°C를 찍는 건 예삿일이고 발해만에는 유빙이 언다. 그렇다고 해서 여름이 시원한 건 결코 아니다. 한반도 북부 지역들과 비슷하거나 그 이상이다. 특히 차오양 시의 경우 여름철 낮 최고기온이 35°C를 넘는 경우가 잦고 최고 43.3°C까지 오른 적도 있다. 이러한 기후는 한반도 북부지방인 평안도, 황해도 정도 수준으로 한반도 중남부는 겨울에 그렇게까지 춥진 않은 편으로 인천광역시나 경기도 안산시 등 황해 연안지역은 상대적으로 내륙보다 따뜻한 편이며 저 정도 온도는 강원도 영서지방인 홍천군, 춘천시, 철원군 정도다. 그리고 매우 건조해서 사실상 스텝기후에 가까운 모습으로 눈이 통 내리지 않으며 대기가 아주 건조하다.
요동 반도 또한 랴오닝성에 포함되어 있다.
4. 산업[편집]
청나라 말부터 공업화되기 시작하여, 만주국까지는 중국에서 가장 선진적인 공업지역이었다. 이후 소련군정시절에 약탈당하고 중화인민공화국 시절에 제사해운동과 문화대혁명의 직격탄을 맞이하면서 쇠퇴하였다. 하지만 개화기부터 중공업을 중심으로 발전한 지역이라서 그 공업역량 자체는 보존했고 지금도 중화학 공업으로 유명한 지역이다.
하지만 개혁개방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난 탓에 신기술 도입이나 자본투입의 시점이 늦었고, 하필 국경을 맞댄 나라가 북한인지라 무역이 발전하지도 못하여, 성장이 지리멸렬하다. 중국 정부도 시진핑시대에 이르러 투자를 많이 하고 있긴 하지만 워낙 추운 지역이라 첨단산업 등의 새로운 산업을 유치해내지 못하고 있다. 중공업에서 첨단산업으로 중심산업을 옮기는 중국의 사정상 공업자체가 축소되고 있기도 한데, 이 때문에 오히려 GDP가 감소하기도 하여 2017년에는 그 전년도 대비 GDP가 23%나 감소하기도 했다.[4]
만주벌판 덕에 공업뿐만 아니라 농업이 발달한 지역이기도 하다. 주로 논농사보다는 밭농사가 주로 성행한다. 재배하는 품목은 옥수수, 밀, 콩 등의 식량작물이다. 조선족들은 밭농사보다 논농사를 주로 하여, 벼를 기른다고 한다. 북방지역임에도 한반도처럼 여름에는 매우 습도가 높으면서도 덥기 때문에 생각보다 벼농사가 잘된다고 한다.
5. 교통[편집]
베이징과 한반도를 잇는 철도가 통과해 교통상 매우 중요하다. 북쪽 김씨 왕들이 중국을 방문할 때 항상 이 곳을 지나갔다. 앞으로 남북통일이 되면 그 중요성은 가히 메가톤급[5] . 이곳을 통과해 러시아 치타에서 러시아 철도와 연결되며, 이후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통하여 유럽까지 철도로 연결된다.
대한민국 인천항에서 랴오닝성의 잉커우시, 다롄시, 단둥시 등으로 가는 배편도 있다.
6. 역사[편집]
랴오닝성은 랴오허(요하) 유역을 중심으로 서쪽은 요서, 동쪽은 요동으로 나뉜다. 랴오닝은 선사시대까지는 한민족의 중심지였다. 단군조선의 영역이 정확히 어디서부터 어디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대릉하, 요하 유역부터 대동강 유역까지는 한민족의 영역이었다는 사실이 정설이다. 이러한 상황은 기원전 281년쯤에 연나라의 진개가 단군조선을 침략하여 약 2,000리를 강탈했다고 나오는데[6] , 이때에 랴오닝 일대가 한민족의 통치에서 처음 벗어나서 한족의 통치로 들어갔다.
이후, 춘추전국시대부터 한나라가 건국할 때까지 요하강은 한민족 문명권의 영역과 한족 문명권 영역의 경계선 역할을 했고, 조선과 연나라의 국력이 비등했기 때문에, 한무제가 등장할 때까지, 한민족과 한족의 영역변동은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조선의 정권이 단군조선에서 위만조선이 되고 중국이 통일된 뒤에 한(漢)제국이 성립되자, 한민족의 국가와 한족의 국가의 국력차이가 극심하게 되었고, 결국 한무제가 위만조선을 침략하여 멸망시키고 그 자리에 한사군을 설치함으로서 랴오닝 일대는 온전하게 한족의 통치에 들어가게 되었다.(기원전 108년)
하지만 요하 유역 동쪽에는 아직도 한민족계 인구가 많았다. 기원전 37년에 건국된 한민족계 국가인 고구려(기원전 37년)가 성장하면서 이 인구를 바탕으로 이 지역을 석권할 수 있었고, 요하 동쪽은 다시 한민족의 영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요하 유역을 다시 한나라가 온전하게 지배하게 되는 것은 668년에 당나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킨 이후였다. 당나라는 조선 유민들이 고구려가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였던 것을 기억했고, 고구려 멸망 이후 고구려의 유민들을 대규모로 타지로 이동시켰다. 따라서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에 만주전역을 포함해서 요하 동쪽에 한민족계 인구는 매우 크게 줄어들었다. 이후 고구려 유민들은 말갈과 연합해 한민족계 국가인 발해를 세우고 요동까지 진출한다.
한민족이 점진적으로 사라지기 시작한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한 민족은 거란족, 몽골족과 말갈족 같은 북방 유목민족이었다. 가장 먼저 차지한 민족은 거란족이었는데, 거란족계 국가들은 한민족계 인구를 줄이려고 많은 노력을 들였다. 제노사이드가 있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발해 멸망 이후 만주에서 한반도로 대규모 인구 이동이 있었다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몽골제국이 요나라를 정복한 이후에는 심양지역을 중심으로 다시 고려계 인구가 크게 늘었고 요동지역을 통치하는 상징적인 군주로 심양왕을 봉했는데 이러한 사정이 고려되어 고려왕이 겸하거나 고려왕족이 맡았다. 훗날 우왕시기에 요동정벌을 계획할 때에도 역사적 연원뿐만 아니라 실제 요동지역의 주민구성도 정벌 동기가 되었을 것으로 보여지며 조선 초까지도 이 지역 주민들이 조선인들과 말이 다 통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차츰 명나라에 동화되어 가다가 청나라 말기 만주에 대한 봉금정책 해제 후 밀려드는 한족에 뒤섞여 자취를 감춘 것으로 보인다. 최근까지도 실제 고구려 장수왕의 후손을 주장하는 요양 고씨 등 족보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도 미미하지만 존재한다.
이후 거란족 또한 몽골족에 의해서 사라졌고, 그 자리를 채운 민족은 여진족이었다. 여진족은 점진적으로 서진했는데, 적어도 여말에는 아무르강지역부터 요하 동쪽까지를 차지했다. 물론 몽골제국이 멸망한 이후, 요동지역을 통치하는 나라는 한족의 명나라였지만 요동지역의 한족인구는 절반을 넘지 못했다. [7] 이 여진족이 통일된 이후에 만주족이 되었고 만주족은 17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온전하게 요하 유역을 통치했으며, 적어도 19세기 중반까지 요동지역은 만주족과 한족의 땅이었다.
이 인구비율이 깨지기 시작한 것은 청나라가 멸망한 직후였다. 가장 먼저 들어온 민족은 청나라가 대륙을 통일한 시점부터 슬금슬금 만주로 재진출하기 시작한 조선인이었다. 조선계 인구증가가 지리멸렬한 가운데 만주족을 제치고 이 지역을 석권한 민족은 한족이었다. 군벌시대로 혼란스러워진 대륙을 피하여 비교적 안정적이었던 만주로 이주하게 되었고, 만주 전체에서 꾸준하게 한족인구가 늘어났다. 만주국이 멸망하고 중화민국이 다시 요동-만주를 반환받을 때쯤엔 이미 한족인구가 대부분이 되었다. 지금도 한족의 인구비율은 계속 늘어나고 있으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지금 이 지역은 북한과 접경한 지역이며, 한국이나 해외에서 북한선교에 나서는 선교사들이 거점으로 삼고 있다.
한편 랴오닝성은 처음부터 랴오닝성으로 불렸던 것은 아니었다. 1644년 청나라는 중원 정복 이후, 중원 지역에 대해서는 '행성제(行省制)'를 적용했지만 만주 지역에 대해서는 장군부(將軍府)를 두어 통치하게 하는 '군부제(軍府制)'를 채택했다. 그리하여 1644년(순치 1) 청나라 군대가 산해관에 입성한 직후, 순치제는 본래 수도였던 성경(盛京)을 유도(留都)로 삼은 뒤 내대신(內大臣) 1명을 유수(留守)에 제수하여 유도를 다스리게 했다. 이 유수 벼슬은 1646년(순치 3) '앙방장경(昻邦章京)'으로 개칭된다.
1662년(강희 1) 성경에 있던 주둔지가 랴오둥으로 옮겨지게 되었고, 벼슬 이름 또한 '진수요동등처장군(鎭守遼東等處將軍)'으로 개칭되었다. 1665년에는 이름이 다시 '진수봉천등처장군(鎭守奉天等處將軍, 약칭 봉천장군)'으로 개칭되었고, 1747년(건륭 12) 주둔지가 다시 성경으로 옮겨지면서 '진수성경등처장군(鎭守盛京等處將軍, 약칭 성경장군)'으로 개칭되었다. 이는 현재의 랴오닝성의 전신이 된다. 그러다가 신해혁명 발발하기 4년 전인 1907년(광서 33) 관제 개편 시에 성급행정기구로서 봉천행성공서(奉天行省公署)가 설치되어 봉천성이 정식으로 설립되었고, 봉천성이라는 명칭은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망하고 중화민국이 수립된 후에도 한동안 유지되었다.
그러나 봉천(奉天)이라는 이름은 '하늘의 뜻을 받들어 운명을 이어 받는다'는 뜻의 '봉천승운(奉天承運)[8] '에서 유래한 것으로, 1929년 동북역치로 중화민국 국민정부가 수립된 뒤 봉천이라는 명칭이 중화민국의 정체성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논의가 있었고 결국 제18차 국무회의의 결정에 따라 1929년 1월 28일 랴오닝성으로 개칭되었다. 의미는 '요수 유역이여, 오래도록 평안하라.'는 의미의 요수유역영구안녕(遼水流域永久安寧)이라는 구절에서 遼와 寧을 딴 것이다.
2차대전 종전 후 1946년에 중화민국이 동북지방의 행정구역을 동북 9성으로 정비하면서[9] 영역이 축소된 형태로 재설치되었으나, 1949년에 성립된 중화인민공화국이 동북지방의 행정구역을 5개 성과 기타 직할시로 재편하면서 잠시 폐지되었다. 대신 지금의 랴오닝성 일대에 랴오둥성, 랴오시성과 함께 선양, 뤼다, 안산, 푸순, 번스 5개의 직할시가 설치되었다. 1954년에 이들을 통합해 랴오닝성을 다시 만들었고, 이듬해에 러허성(중국어 정체자: 熱河省)이 폐지되면서 그 북동부를 편입하였다. 문화대혁명 시기 동안 랴오닝 성은 네이멍구 자치구의 일부를 편입하기도 하였지만 후에 복구되었다.
7. 역대 영도인[편집]
8. 관내 주요 도시[편집]

- 선양시: 만주어로는 묵던(Mukden). 한자로는 봉천(奉天, 펑톈)이라 쓰기도 한다. 사실 랴오닝성의 과거 지명(1907~1929년, 1932~1945년)이 봉천성이었다.
- 다롄시 - 뤼순커우구
- 단둥시
- 안산시
- 진저우시
- 랴오양시
- 번시
9. 출신 인물[편집]
- 온조왕 - 백제의 시조이다. 동명성왕의 아들로 졸본성 출신인데, 이곳은 랴오닝성 번시시라고 추정된다.
- 허서리 소닌
- 허서리 송고투
- 공리
- 이연걸
- 쑹웨이룽
- 뇌가음: 안산 출신이다.
- 디에잇: 안산 하이청현 출신이다.
- 우효광
- 둥팡줘
- 쑨지하이
- 왕심린: 다롄 출신이다.
- 정즈
- 장위안: 안산 출신이다.
- 장쭤린: 안산부 하이청현 출신이다.
- 장슈아이보
- 장쉐량
- 장쉐밍
- 장쉐쓰
- 장징후이
- 장더장
- 짱스이
- 한톈위
- 펑더린
- 성스차이
- 아이신기오로 시치아
- 탕위린
- 오삼계
- 이여송
- 고우영: 태어났을 당시의 지명은 만주국 번시후. 현 지명은 랴오닝성 번시 시이다. 번시는 선양 바로 근처이다.
- 문용린
- 샤오제
- 웅재기: 톄링시 출신이다.
- 원진: 푸순 출신
- 리취안저: 둥베이 출신
- 우징롄
- 후지타 토시코: 다롄 출신이다.
- 리원량
- 마룽: 탁구선수
- 콩샤오인
- 장쟈위엔: 창조영 2021 프로젝트 그룹 INTO1의 멤버, 잉커우 출신
- 송계양: 단둥시 출신이다.
- 류우녕: 단둥시 출신 가수이다.(주로 OST)
- 린이
10. 기타[편집]
- 중국의 모든 외국에 대한 사건은 랴오닝성 관할이다. 중국도 한국처럼 형사사건은 장소주의를 채택한다. 범죄가 일어난 장소에서만 재판을 여는 식. 그러나 국외범 및 범죄인 인도 심사(재판)는 한국처럼(한국은 서울고등법원 관할) 범죄인 인도 및 국외범 관할 장소가 정해져 있고 그 위치가 바로 랴오닝성이다. 즉 중국의 모든 자국민 국외범 재판은 랴오닝성의 중급인민법원 및 고급인민법원에서 재판[10] 을 하게 되어 있으며, 중국에서 검거되어 외국으로 인도되는 외국인 범죄인도 랴오닝성 중급인민법원과 고급인민법원에서 범죄인 인도 재판을 받게 되며, 이후 중국 국무원의 비준을 거쳐서 해외로 인도한다.[11] 이 탓에 프로축구 선수 손준호도 랴오닝성에서 구금되었다.
- 지린성과 함께 북한과 굉장히 가까워서 탈북자를 색출하기 위해 북한군 비밀요원들이 돌아다니는 곳이다.
- 2016년에 인민대표대회 대표들이 부정선거에 연루돼 무더기로 자격 박탈된 사건이 당국의 보복성 조사로 촉발됐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 중생대 동물 화석으로도 유명하며, 1990년대부터 여러 깃털 공룡화석의 발견으로 많이 주목받는 화석지가 있기도 하다.
- 중국 최초의 항모인 랴오닝급은 이 지역에서 이름을 따왔다.
- 북한의 북극성-2형이 발사될 당시 중국 랴오닝성 다롄과 랴오둥반도가 뚜렷이 보이며 중국에 대한 경고 및 위협을 하였다.기사1기사2
- 2010년에 동아시아에서 최초로 확인된 운석 충돌구인 슈옌 충돌구가 랴오닝 성의 슈옌 만족 자치현에 위치해 있다. 약 5만 년 전에 형성된 충돌구로 직경은 약 1.8 ㎞ 정도이다. 보존 상태는 비교적 좋은 편이나, 삼림과 경작지가 들어서 있어 비슷한 시기에 형성된 베링거 충돌구만큼 보존이 잘 되어 있지는 않다.
[1] 중국은 전 지역(홍콩, 마카오, 대만 포함)이 중국 표준시를 사용한다.[2] 정작 만주족의 조상인 숙신(肅愼)이 유래한 헤이룽장성은 인구의 96%이 한족이고 다음이 몽골인이다.[3] 선교사들의 상당수는 탈북자들을 돕기 때문에 북한에서 이들을 납북하려 하는 것이다.[4] 이러한 이유로 인해 훗날 대한민국 주도 하에 남북통일이 이뤄질 경우, 가장 큰 혜택을 볼 중국 지역이 될 것이란 전망이다. 더욱이 랴오닝성 소속으로 단둥시가 있고 신의주시랑 바로 가까운 위치에 있는 지역이라서 통일 한국에서 생산되는 신상품의 대부분이 이곳으로 몰려들 것은 자명하고 무역업이 활발함으로서 이어지는 지역 개발 붐이나 부동산 가격 상승도 자연스레 이뤄질 지역이다. 당연히 중국 중앙정부의 통제를 받는 지역이라 노골적인 친한성향은 보이지 못하겠지만 통일 한국에 대한 우호적인 분위기 조성은 기대해 볼만 할 것이다.[5] 통일 한국과의 직거래뿐 아니라 중국인 인력들 역시 이곳으로 몰려들 가능성이 크고 한국에서 생산되는 신상품의 상당수는 이곳을 거쳐가게 될 것이므로 교통및 물류의 중요성으로 각광받을 지역이다.[6] 2000리는 약 785km다.[7] 명나라의 수도가 베이징에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족의 영역이 요동까지 넓어진 것은 아니었다.[8] 명·청 때 황제가 내리는 조서에는 항상 봉천승운(奉天承運)으로 시작했다고 한다. 조서 항목 참조.[9] 만주국이 설치한 행정구역을 반영하여 만주사변 이전의 3개 성에 비해 성을 대폭 증설하였다.[10] 중국은 형사사건 및 범죄인 인도 재판이 2심제도이다.[11] 랴오닝성 범죄인 인도 재판의 예시로 한국인 여성들을 상대로 마약을 운반하게 시킨 프랭크 오비하 친두가 있다. 프랭크 오비하 친두는 중국에서 검거되어 랴오닝성 고급인민법원에서 한국으로 인도하도록 판결을 받았고 한국에서 무기징역과 벌금 1억 원을 선고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