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판 반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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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SBandera.jpg

스테판 안드리요비치 반데라 (Степан Андрійович Бандера)
1909년 1월 1일 ~ 1959년 10월 15일

1. 개요
2. 생애
3. 반데라와 나치의 관계에 대한 논쟁
4. 우크라이나 분열의 상징
5. 러시아의 프로파간다에 활용
6. 평가
6.1.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평가


1. 개요[편집]


빵과 자유 중에서 빵을 고른다면 나중에는 빵과 자유를 모두 잃는다. 하지만 자유를 고른다면 빵을 직접 만들어 뺏기지 않는다.

우크라이나의 극우 민족주의 성향 독립운동가, 정치인이자 제노사이드를 계획하고 주도한 전쟁범죄자다.


2. 생애[편집]


1909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에서 태어났다. 학창 시절 폴란드 내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청소년 조직에 영향을 받으면서 1929년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단(Організація Украінських Націоналістів, Organization of Ukrainian Nationalists, OUN)에 가입했다. 이후 조직 내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면서 두각을 드러냈고, 1933년에 집행관이 되어 그 당시 폴란드 제2공화국에서 계몽 활동, 반우크라이나 정책 항의 시위 등을 주도하다가 1934년 폴란드 당국에 의해 종신형을 선고받고 투옥된다. 이 극우민족주의 조직인 OUN은 퇴역군인과 가난한 농민, 폴란드에서 일자리를 찾지 못한 교육받은 우크라이나의 젊은이들이 가담했는데, 의회민주제도를 불신하는 대학생과 고등학생들이 지하 OUN 조직의 선봉이 되었다고 한다. 이들은 동족에 대한 테러행위도 서슴지 않았는데, 대표적으로 1934년 내무장관 브로니스와프 피에라츠키(Bronisław Pieracki)를 암살하고, 학생들의 OUN 가입을 금지시켰다는 이유로 존경받는 고등학교 교장 '이반 바비(Іван Бабій)'를 살해하기도 했다.[1][2]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반데라는 감옥에서 풀려나 당시 독일의 점령 아래 있던 크라쿠프로 이동했고, 그 곳에서 조직을 이끌던 안드리 멜니크(Андрій Атанасович Мельник, 1890–1964)[3]와 재회한다. 하지만 온건한 방식으로 독립운동을 이끌길 원했던 멜니크와 갈등을 빚으면서, 반데라는 자신을 지지하는 조직원을 데리고 우크라이나 혁명 민족주의자 조직(OUNR, 통칭 OUN-B)을 설립한다. 그러던 중 1941년 독일군이 소련 침공을 준비하면서 아프베어(Abwehr)에서 소련 내 공작을 위해 반데라와 접촉했고, 1941년 6월 30일 독일군이 키이우를 점령하자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선포하기도 했는데 독립을 선포하여 설립된 정부가 바로 우크라이나 국가정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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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여름 리보프(르비우)에 걸려있던 플래카드[4]

나치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서부 우크라이나의 상당한 지역이 나치 독일 점령 하에 들어갔으나, 적잖은 우크라이나인들이 독일군을 해방자로 받아들였다. 반데라를 비롯한 서부 우크라이나 측의 협력으로 SS 갈리시아 부대 등이 창설되었는데, 이 군대의 규모가 대략 80,000명 정도 되었다. 이 과정에서 적잖은 폴란드인, 유대인 그리고 러시아인들이 큰 피해를 보았고 학살까지 당했다. 특히 앞서 설명한 SS 갈리시아의 경우 대다수 인원들의 출신이 스테판 반데라가 창설한 OUN이었다. 1929년에 창설된 이 조직은 인종적으로 우크라이나인 위주의 우크라이나 독립 국가를 창설하는 것이 목표였다. 물론 당시의 우크라이나인 민족 개념에는 유대인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으며, 우크라이나 유대인도 우크라이나인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한 것은 니키타 흐루쇼프 시대부터였다.[5] 스웨덴 출신 홀로코스트 사학자인 페르 안데시 루들링(Per Anders Rudling)에 따르면 당시 OUN과 그 동조자들은 우크라이나 서부에서 적어도 140건의 포그롬을 일으켜 13,000~35,000명을 학살했다.[6] OUN 민병대는 직접 학살을 저질렀을 뿐만 아니라 나치 독일에 협력하여 유대인을 색출하거나 이송하는데 인력을 지원하여 홀로코스트에 간접적으로 가담했다.

허승철 교수에 따르면 나치 독일의 점령 기간 동안 희생된 우크라이나 유대인의 수는 최소 140만명에서 150만명으로 추산된다고 하며, 이런 주된 원인은 나치와 이에 협력한 민족주의 조직 및 우크라이나 주민들의 협조로 인해 일어난 것이라고 한다.[7] 나치의 우크라이나 지역 유대인 대학살의 숫자는 소련이 해체되기 이전까지는 대략 90만 명 정도로 파악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소련 해체 이후 소위 문서고 개방을 통해 소련측 문서들이 발굴되면서 실제 희생자가 90만명보다 더 많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독일의 역사학자 디터 폴(Dieter Pohl)은 1990년대 발굴된 문서를 포함한 자료들을 종합해 대략 120만 명에서 160만 명의 유대인이 SS와 아인자츠그루펜 그외의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그룹 등의 학살로 희생되었다고 주장했다.[8]

그러나 나치 독일은 우크라이나 독립에는 관심이 없었다. 우크라이나인들을 열등인종으로 본 나치 국가판무관 코흐는 반데라의 이런 행위를 두고 보지 않았고, 1941년 9월 15일 반데라와 OUN-B의 주요 간부들을 체포해 부헨발트(Buchenbald) 수용소로 보냈다. 이후 지도부를 잃은 OUN-B는 극단주의적으로 치달아 독일군과 소련군 모두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OUN-B는 1942년 새로운 지도자 미콜라 레비드(Микола Кирилович Лебідь)가 이끌게 되었다. 미콜라 레비드는 OUN-B의 테러 전담 별동대인 우크라이나 봉기군(Українська повстанська армія, Ukrainian Insurgent Army, UIA)을 조직했으며, 봉기군은 나치 협력자를 포함해 우크라이나인 극우 국수주의자들로 구성됐다.[9] 이들은 무장투쟁 전개 과정에서 루치크 학살, 볼린 학살 등을 자행하여 5만~12만명에 이르는 폴란드인을 학살하고, 수십만 명을 추방했다.[10] 또한 1944년 소련 장군이었던 니콜라이 바투틴을 암살하는 등 우크라이나 내 극우 성향의 파르티잔 반소투쟁의 한 축을 담당했다.

하지만 1944년부터 1945년, 그러니까 스탈린그라드 전투쿠르스크 전투 이후 소련이 전쟁에서 승기를 잡으면서 이들의 운명도 비관적으로 전개됐다. 이에 따라 한때 나치에 협력했던 이들은 나치와 소련군 둘다 대항해 싸우기도 했으나, 1944년 겨울부터 1945년까지 소련군은 서부 우크라이나 농촌 산악 지역을 대대적으로 수색하며 저항군을 소탕해 나갔다. 1944년부터 1945년까지 소련군은 대력 91,615명의 우크라이나 극우 민족주의 게릴라들을 사살했고, 비슷한 숫자인 96,466명을 체포했다고 한다.[11] 전쟁이 끝난 이후 일부 잔존 세력들은 우크라이나에 남아 소련군에 맞서 저항을 벌였다. 이러던 와중에 미국과 소련의 냉전이 시작됐고, 이들은 또 다른 동맹세력을 찾게 되는데, 그게 바로 미국 CIA였다.

OUN의 지도자 스테판 반데라는 냉전 초기 미국과 손을 잡았고, 앞서 설명한 미콜라 레비드의 경우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로마로 탈출해 서방 연합국과 접촉했으며, 미군 방첩대는 1947년 레비드와 손을 잡은 뒤 그를 뮌헨으로 빼돌렸다.[12][13] 미국 CIA는 반데라를 포함하여 소련을 피해 도망친 우크라이나 극우 민족주의자들의 서유럽이나 미국 이주를 도왔다. 우크라이나 지역에 남아있던 일부 잔존세력들은 미국의 지원을 받아가며 1946년과 1947년에 여러 작전들을 개시했다. 벨라도나 작전(Operation Belladonna 1946), 스라소니 작전(Operation Lynx, 1946), 그리고 삼지창 작전(Operation Trident, 1947) 등이 있다. 1948년 말 서독 뮌헨에 정착한 반데라와 미국 CIA는 일부 OUN 출신 대원들을 훈련시켜 반소작전을 위해 우크라이나로 침투시킬 계획을 세웠다. 이들의 계획은 1949년 9월 5일에 시작됐으며, 이런 공작은 이오시프 스탈린 사망 이후인 1954년까지 지속적으로 전개됐다. 이런 작전의 목적은 소련의 동유럽 지배력을 약화시키려는 차원의 목적이 강했으나, 소련은 침투자 대부분을 신속히 처리했다.[14]

한편 반데라는 나치 독일이 패망한 이후 소련을 피해 서독에 남았으며, 우크라이나 독립운동 등을 전개하다가 1959년 뮌헨에서 KGB 요원인 보흐단 스타신스키에 의해 암살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보흐단 스타신스키 역시 르비우 출신의 우크라이나인이었고, 부모들은 반데라주의자였다. 그는 1961년에 할 거 다 해먹은 후에 소련에서 서독으로 망명했다. 1931년생으로 현재도 살아있다고 한다. 1984년 아내와 함께 새 신분이 주어져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이주했다. 그는 현재 우크라이나 극우파들의 테러나 암살을 피해 철저하게 숨어 살고 있다.

3. 반데라와 나치의 관계에 대한 논쟁[편집]


스테판 반데라를 추종하는 우크라이나인들의 말을 들어보면 나치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이 주장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우크라이나 민족주의단이 학살한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너무 명확히 행해진 일이기 때문).

1941년 11월 25일자의 나치 문서에

"... 반데라는 궁극적인 목표로 독일 제국 의회에서 독립 우크라이나를 수립하려는 반란을 준비하고 있으며, 간부들을 즉시 체포하고 철저한 심문을 거쳐 청산해야 합니다..."

라는 글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1941년 7월 5일 반데라는 체포되어 베를린으로 이송되었다. 7월 14일 구금에서 풀려났지만 베를린에 남아 있어야 했고, 1941년 9월 15일 반데라와 주요 OUN 회원들은 게슈타포에 의해 체포되어 1942년 1월 반데라는 작센의 정치범 수용소에 갇히게 되었다.

우크라이나 국민 정부는 나치의 꼭두각시로 변해 유대인 학살에 동조했다. 결과적으로 반데라는 1942년 1월부터 1944년까지 정치범 수용소에 갇혀 있었다. 우크라이나에서 반데라가 폴란드 및 유대인 학살에 실질적으로 동조하지 않았다는 주장의 근거가 여기서 나온다. 반데라가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전국에서 독일군이 <반데라>라는 이름으로 모스크바, 폴란드, 헝가리, 유대인의 파괴를 요구하는 전단지를 뿌렸다. 반데라가 독일군에 협력하는 동안 우크라이나 국가정부는 반유대활동에 참여했다.

반데라는 1944년 석방된 이후 바로 독일군과 맞서 싸우며, 이 당시 유대인을 보호했고, 유대인을 군대에 받아들였으며, 독일의 인종차별적 개념과 관행을 청산할 것을 촉구했다는 논리다. 1942년까지 나치 관리들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이 유대인들에게 무관심하며, 민족주의적 대의에 도움이 된다면 유대인을 돕거나 죽일 의향이 있다고 평가했다. 게슈타포의 보고서에 따르면 반데라는 자신의 부하뿐 아니라 운동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유대인들에게도 위조 여권을 제공했다고 주장했다.

이런 사실과 논리로 우크라이나에서는 스테판 반데라는 나치가 아니라는 식의 의견이 존재한다. 그러나, 실제로 반데라가 초기에 그 목적이 무엇이었든 간에' 나치와 협력했고, 반유대주의에 동조했으며 학살에 동참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특히 반데라파가 UPA의 지원 하에 폴란드 민족 학살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등 보위인(볼히니아) 학살에서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다.(Motyka 2008) 또한 최측근인 야로슬라프 스테츠코가 유대인 제거를 위한 민병대를 만들고 있다고 반데라에게 제출한 보고서가 발견되어 학살 책임에서 빠져나가기 힘들어졌다. 또한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반데라가 진짜로 지시하였든 아니든간에, 전쟁 전부터 OUN과 나치 독일의 협력을 추구하고 나치 독일의 사상에 감화되어 학살을 자행하게 만든 책임이 매우 크다. 전후 행적도 깔끔하지 못하다.

게다가 1944년 9월에 감금돼있던 OUN-B지도부와 함께 반데라와 스테치코가 풀려났는데[15] 반데라는 독일과 다시 협상, 결국은 나치 독일과 다시 손을 잡는다. 그 결과 1945년 3월17일 우크라이나민족위원회가 설립되고, 이 위원회의 지휘를 받는 우크라이나군대도 창설된다. 이후 나치 독일이 패퇴하자 OUN들은 해외로 망명했다.[16]

4. 우크라이나 분열의 상징[편집]


반데라는 우크라이나에서 지속적으로 분열을 야기하는 인물로 전체적으로 스탈린, 고르바초프와 함께 가장 부정적으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가 주로 활동했던 서부에서는 긍정적인 의견이 많으며 특히 르비우 주가 심하다. 우크라이나 전체의 6%가 매우 긍정적, 8%가 대체로 긍정적, 23%는 중립, 15%가 부정적, 30%가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지역별로 살펴보면, 수도 키이우가 있는 중부에서는 3%가 긍정적으로 평가했고, 10%가 대체로 긍정적, 24%가 중립, 17%가 대체로 부정적, 21%가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했다(나머지 미응답).

동부 우크라이나에서는 3%가 매우 긍정적, 10%가 대체로 긍정적, 24%가 중립, 17%가 대체로 부정적, 21%가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크름 반도를 포함하는 남부 우크라이나에서는 1%만이 각각 긍정적 평가를 내렸고, 13%가 중립, 26%가 매우 부정적을 기록했다. 서부에서는 37%가 매우 긍정적으로 보고, 26%가 대체로 긍정적, 20%가 중립적, 6%가 부정적 및 매우 부정적을 기록하였다. 서부에서 이와 같은 평가는 대체로 주 활동 무대기이도 했지만 전후 소련에서 가장 심하게 숙청당한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여론차는 우크라이나의 언어 분포와 관련되어 있는데, 동부 사람들은 주로 러시아어를 사용하고, 러시아 미디어에 많이 노출되어 부정적인 인식이 확산되기 때문이다.

2010년 친서방 우크라이나 대통령 유셴코는 스테판 반데라에게 우크라이나 영웅 칭호를 수여하였다. 이는 우크라이나 전역에서 매우 큰 논란을 촉발했고, EU와 러시아 모두 이 같은 결정에 비판하였다. 유셴코는 이 일을 포함한 다른 여러 문제로 지지율을 크게 잃어 다음 선거에서 낙선하게 된다.

후계자인 야누코비치는 친러 성향의 정치인이었으며, 스테판 반데라 및 동료 민족주의자에 내린 영웅 칭호를 폐기하기로 결정하였다. 2010년 4월 2일 도네츠크 지방 행정법원은 영웅 칭호를 내린 대통령령이 불법이라고 판결하였다. 2014년 유로마이단 혁명 이후 포로센코 정권은 2018년 12월 영웅 칭호를 내리기로 하였지만 젤렌스키 정권은 2019년 8월에 반데라에게 영웅 칭호를 주는 것을 거부하였다.

5. 러시아의 프로파간다에 활용[편집]


러시아 당국은 반데라의 사진이 유로마이단 사태에 사용된 것을 가지고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하는데 사용하였다. 정작 러시아내에서 극우정당인 자유민주당이 원내 3당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그저 내로남불이기는 하다. 실제로 그를 추종하는 우크라이나인들은 나치를 추종하는 것이 아니며 반데라가 감옥에 갇혀 있었기에 나치가 아니였다고 믿는 경향이 심하다. 푸틴은 크름 반도 합병을 환영하며 히틀러의 공범인 반데라를 추종하는 우크라이나 지도자로부터 크림 반도를 구했다고 주장하였다. 사실 2000년대 후반부터 유로마이단을 전후한 시기에 서부지역을 중심으로 자유당(우크라이나)과 프라비 섹트로라는 반데라주의자들이 세를 한창 떨치던 때가 있었으며 이들은 친서방 자유주의 정당들이 2008년 금융위기와 분열로 지리멸렬했을 때 상당한 득표율을 기록한적이 있었지만, 이후 반데라주의자들이 우크라이나 국영방송사 사장을 폭행하거나 동부지역에게 자치권을 주는 것을 반대한다면서 폭력을 행사하는 등 정치적으로 자폭을 거듭하며 현재는 우크라이나 의회에 의석을 1석 정도 차지할 정도로 몰락해버렸다.

2차대전 당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가 나치와 협력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현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마저 나치에 연루시켜(네오나치 세력 제외) 프로파간다에 써먹는 것 또한 그렇게 좋은 일은 아니다.[17] 러시아는 '러시아민족전선'이라는 네오나치 그룹을 2014년 분리주의 운동을 돕기 위해 도네츠크에 파견하였다. 크름 반도 및 도네츠크, 루간스크 공화국은 다원주의라고 평가받지 못하고 있으며 네오나치 협력자들의 논란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예를 들어 소위 돈바스 인민군의 대표인 파벨 구바레프는 돈바스 전쟁 전, 네오나치 단체인 러시아 국가단결당(Русское национальное единство) 준군사조직에 가담한 바 있다.


6. 평가[편집]


반데라는 폴란드 시절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조직을 조직하고, 우크라이나 독립운동을 이끌어 우크라이나의 국가 정체성 수립에 크게 기여했다. 하지만 나치와 협력하여 상당한 규모의 제노사이드를 주도한 행적으로 인해 우크라이나 내부에서도 도저히 옹호하기 어려운 인물이기도 하다. 우크라이나 정부의 공식 입장은 그의 공적을 일부 인정하긴 하나 국가적 영웅으로 기념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소련 시절 그의 조직원이었던 "반데라당원"(Бандеровці)은 소련 내 분리주의자의 대명사로 통하면서 철저히 탄압당했으나 1991년 소련 해체 이후 독립 투쟁을 이끈 면모가 발굴되면서 독립운동가로 재조명받기 시작했다. 특히 그가 몸을 담았던 OUN은 이후 미국, 서유럽 등지에 거주하던 우크라이나인들을 중심으로 명맥을 이어갔고, 소련이 무너질 때까지 독립시키려는 노력을 이어가 우크라이나 독립 이후 오늘날 우크라이나 정치를 이루는 세력의 한 축으로 성장했다.

우크라이나 내부에서 그의 평가는 극단적으로 엇갈려서, 비교적 러시아의 영향을 덜 받고 독립 의지가 강했던 서부에서는 독립영웅으로서 높이 평가된다. 특히 르비우 등 서부 우크라이나 도시들에는 반데라 동상과 반데라 거리가 여러 군데 있고, 도시들마다 반데라를 명예시민으로 추대할 정도이다. 하지만 나치와의 협력 문제가 있고 특히 그의 조직원들이 유대인(우크라이나 유대인 포함), 폴란드인 학살[18]을 주도했다는 점에서 그는 소련인들은 물론이고, 유대인들, 폴란드인들 입장에서도 나치 부역자들의 상징이나 다름없다. 특히 폴란드인들 입장에서는 800년에 가까운 역사에 걸쳐 폴란드인들이 살고 있던 르부프갈리치아, 볼린 지방의 폴란드인들을 학살했던 만큼 오늘날까지도 우크라이나 정부에 지속적으로 사죄를 요구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폴란드 의회는 2016년 7월 22일 볼린 학살을 제노사이드로 인정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19][20]

그러나 2009년 여론조사에 따르면, 반데라가 이끌던 OUN-B에 대해 긍정적이라고 응답한 우크라이나인은 14%인 반면 부정적이라고 응답한 우크라이나인은 45%로, 부정적으로 평가한 사람의 비율이 더 높았다. 서부 갈리치아(긍정 63% : 부정 12%) 지역에서는 OUN-B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비율이 높았으나, 도네츠크를 포함한 동부(긍정 2% : 부정 59%)나 오데사를 포함한 남부(긍정 2% : 부정 79%)의 경우, 압도적으로 부정적인 평가가 많았다. 키이우를 위시한 중부 지역은 동·남부 지방과 달리 역대 선거 결과 등을 보면 친서방 성향이 강한 편이었으나, OUN-B에 대한 평가는 부정적인 편이었다(긍정 13% : 부정 38%). # 이러한 면모 때문에 우크라이나에서도 프라비 섹토르를 비롯한 노골적인 극우민족주의를 표방하는 집단에서는 공개적으로 영웅시하고 있으나, 사회적으로 보았을 때 반데라는 독립운동학살 조장 또는 방조자라는 공과 실이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에 단정지어 평가를 내리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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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데라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우크라이나 정부에서 발행한 우표(출처: 위키피디아)

비단 민간인들 뿐만이 아니라 정부 차원에서, 특히 유로마이단 사태 이후 태어난 신생 우크라이나 정부에게 있어서 그는 홀로도모르와 더불어 우크라이나 현대사의 가장 민감한 부분 중 하나로, 2010년 당시 우크라이나 대통령이었던 빅토르 유셴코가 우크라이나 영웅(Герой України) 훈장을 추서했다가 다른 유럽 국가들에게 비판받은 사례가 있었고,[21] 결국 이듬해 친러 성향의 빅토르 야누코비치로 정권이 바뀌면서 서훈이 취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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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월 키이우 유로마이단 시위본부에 내걸린 반데라 초상화 (출처: 위키피디아)

2014년 유로마이단에 참여했던 극우 성향 자유당원들이 반데라를 영웅시하는데, 사실 이 조직이 OUN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우크라이나 극우 민족주의자들의 사상적 선배라고 할 수 있다. 2014년부터 진행된 돈바스 전쟁과 2022년의 우크라이나 전쟁에 참여하는 우크라이나군 특수부대[22] 아조프 연대가 이 쪽으로 유명하다. 러시아와 친러 진영은 우크라이나의 친서방 진영을 극우 네오 나치라고 주장하는데, 물론 틀린 말이지만 그런 주장에 악용될 소지를 만든 것은 사실이다.

러시아 영화 브라뜨에서도 주인공 다닐라 바그로프의 형 빅토르가 우크라이나 갱단한테 시비를 털 때 반데라 개새끼 해봐라며 도발하는데 뭔 말을 해도 요지부동이었던 갱들이 바로 화를 낸다. 그만큼 주변 타 국가에서는 평판이 극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공격하는 주요 명분중 하나가 이 반데라주의자들의 나치즘이다. 심지어 젤렌스키 대통령조차 친러 노선을 배격한다는 이유로 네오 나치라고 주장할 정도.[23]

2016년 개봉한 폴란드 영화 증오에도 반데라를 추종하는 반데라주의자들이 등장한다. 폴란드계 주민과 우크라이나계 주민의 뿌리깊은 갈등을 보여준다. 독일인과 폴란드인들이 우크라이나의 EU 가입에 반대했던 것도 반데라주의자들을 옹호하는 목소리가 아직 남아 있다는 이유에서였다.[24]

2021년 우크라이나 지방의회 건물에 붉은 바탕에 검은 글씨와 함께 반데라의 초상화가 걸렸다. 러시아 외교부는 나치즘을 영웅화하지 말라며 반발하였다.

2022년 1월 1일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이 반데라의 생일을 기념하여 키이우에서 행진했다.#

2022년 7월 안드리히 멜니크 주독 우크라이나 대사는 반데라가 유대인과 폴란드인을 대량 학살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반박했다.# 해당 인물은 과거 2015년에도 반데라는 우크라이나의 영웅# 이라고 칭송했다.

6.1.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평가[편집]


"이의의 여지가 없는 영웅이 있습니다. 스테판 반데라는 우크라이나인들에게 특정 부분에는 영웅이고 이것은 정상적이고 멋진 일입니다. 그는 우크라이나의 자유를 수호한 사람 중 한명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많은 거리와 교량의 이름을 지을 때 그와 같은 이름을 짓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There are indisputable heroes. Stepan Bandera is a hero for a certain part of Ukrainians, and this is a normal and cool thing. He was one of those who defended the freedom of Ukraine. But I think that when we name so many streets, bridges by the same name, this is not quite right,"

"그나저나, 이것은 스테반 반데라에만 한정되는 게 것이 아닙니다. 나는 타라스 셰우첸코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하겠습니다. 나는 그분의 엄청난 업적을 매우 존경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현대의 영웅, 예술의 영웅, 문학의 영웅, 우크라이나의 모든 영웅을 기억해야 합니다. 왜 거리의 이름을 오늘날 우크라이나를 하나로 묶는 영웅들의 이름으로 짓지 않습니까? 우크라이나를 통합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조치를 취하게 하는 사회의 긴장이 있습니다. 한번은 안드리 셰브첸코(우크라이나의 축구 스타)의 이름을 딴 거리 이름이 없는 이유에 대해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는 나에게 영웅입니다. 저는 정말 그렇게 생각합니다."

"By the way, this is not about Stepan Bandera. I would say the same about Taras Shevchenko. I respect his tremendous work a lot. But we should remember modern day heroes, the heroes of art, the heroes of literature, all heroes of Ukraine. Why aren't we naming [streets] by their names – the heroes who unite Ukraine today? There is such a tension in society that we must do everything possible to unite Ukraine. I was once asked why wasn't any street named after Andriy Shevchenko [Ukrainian football star]? He is a hero for me, I really think so,"

https://www.unian.info/politics/10521105-zelensky-on-bandera-ukrainians-should-also-praise-modern-day-heroes.html

맥락을 읽어보면 반데라를 미화하는 게 아니라 우크라이나엔 반데라를 대체할 만한 건전한 영웅들이 많다는 걸 돌려서 발언한 것이다. 정상적인 영웅에 대한 이야기라면 '나에겐 축구스타도 영웅이다'같은 발언을 굳이 꺼내지 않는다. 우크라이나인들에게 반데라가 특정 부분에서 영웅인 점까지는 인정하지만 타라스 셰우첸코나 축구스타 안드리 셰브첸코처럼 대체할 영웅이 많으며 반데라 같은 인물의 이름을 거리나 교량의 이름으로 사용하는 것을 비판하고 있다.

[1] 《우크라이나의 역사》(허승철 교수 저) p.175[2] 골때리는 사실은 바비가 1차대전 직후 발발한 폴란드-우크라이나 전쟁과 소비에트-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우크라이나군을 지휘한 민족영웅이었다는 것이다.[3] 이 사람도 우크라이나 독립에 기여했으나, 여타 극단적 민족주의자들과는 다르게 타 민족 학살에 반대한 온건파였다. 이 사람은 2차 대전이 끝나고 캐나다룩셈부르크를 오가며 살았다.[4] 플래카드에 쓰인 문구는 '히틀러 만세! 반데라 만세!', '우크라이나 독립국이여 영원하라! 반데라여 영원하라!'로, 이 당시 우크라이나인들이 독일편에 붙어 무엇을 기대한건지 단적으로 드러낸다.[5] 비교하자면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반 미국으로 이주한 유대인들은 포그롬을 피해서 미국으로 이민한 경우라서 자신들이 이른바 우크라이나 민족이라는 생각은 갖지 않았다. 반면 소련 해체 이후 우크라이나에서 미국이나 이스라엘로 이주한 유대인들의 경우 우크라이나에 대한 애국심이 적지 않은 편이다. 우크라이나 유대인과 비유대인 사이의 갈등과 이질감이 봉합된 것은 흐루쇼프, 브레즈네프 시대 이후이다.[6] Per Anders Rudling: “The Return of the Ukrainian Far Right. The Case of VO Svoboda,” in: Ruth Wodak, John E. Richardson (ed.): Analyzing Fascist Discourse: European Fascism in Talk and Text, London 2013, pp. 228-255. 올리버 스톤의 다큐멘터리 Ukraine On Fire(2016)에는 1941년에만 20만 이상의 유대인이 OUN에 학살당했다고 주장하나 신빙성이 떨어진다.[7] 《우크라이나의 역사》(허승철 교수 저) p.183[8] 참고자료 https://en.wikipedia.org/wiki/The_Holocaust_in_Ukraine[9]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 p.363[10] 일부 폴란드 역사학자들은 1943년과 1944년 사이에 최소 15만에서 최대 20만의 폴란드인 희생자를 주장하나 신빙성이 떨어진다. 오늘날 역사학자들은 UIA의 학살로 인해 5만에서 12만 명의 폴란드인이, 그리고 폴란드인의 보복학살로 인해 1만에서 2만의 우크라이나인이 학살되었다고 보고 있다. 극소수지만 폴란드계로 의심받은 체코계 주민도 340명이 학살되었다. 자세한건 영어 위키백과의 관련 문서에 실린 각 학자들의 추산치를 참조.[11] 《우크라이나의 역사》(허승철 교수 저) p.187[12] 미콜라 레비드는 이후 미국으로 이주하여 CIA와 미국무부의 지원을 전폭적으로 받았고, 1990년대까지 미국 뉴욕시 퀸즈에서 살다가 편히 생을 마감했다. 이후 미국 법무부가 레비드를 미국에서 추방하려고 했으나 후일 CIA 국장이 되는 앨런 덜레스(Allen Welsh Dulles)는 “미콜라 레비드는 CIA에 엄청난 가치가 있는 인물”이라고 하며, 핵심적인 반소작전을 돕고 있다고 주장했다. 문제는 앨런 덜레스가 옹호한 인물이 최소 12만에서 수십만의 폴란드인을 인종청소한 인물이었다는 사실이다.[13]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 p.363[14] 여기 있는 전반적인 내용은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 p.363과 다큐멘터리 Ukraine On Fire(2016)를 참고함[15] 나치독일이 이들을 잡아가둬놓고 다시 풀어주고 다시 아군으로 회유한 이유는 간단한데 나치 독일이 패배하고 있었기 때문. [16] 이후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하는 1990년부터 우크라이나로 귀국하기 시작해, 1992년에 다른 조직과 함께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연합을 결성했다.[17] 애초에 현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세력은 정신적으로나 인적으로나 소련 시기 반체제 민족주의 세력인 우크라이나 인민운동(Народний Рух України, 약칭 루흐)의 후신이지, 2차대전과 소련의 토벌전으로 완전히 작살나서 미국과 캐나다 등 서방으로 쫓겨난 반데라주의 세력이 아니다. 오늘날 일어나는 문제라면 러시아라는 거대한 적수 때문에 두 세력이 전술적 제휴를 하는 것이지, 현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세력을 두고 바로 그 나치 세력이라고 주장하는 러시아의 비난은 번지수를 잘못 찾아도 한참 잘못 찾았다.[18] 영화 증오를 참고하면 반데라주의자들이 어떻게 학살을 했는지 잘 알 수 있다.[19] 출처[20] 역사적으로 폴란드와 우크라이나의 관계는 좋지 않은 편이었다. 현대 서부 우크라이나의 영유권 문제 뿐만 아니라 중동부 유럽이 전반적으로 그랬듯이 폴란드인들은 슐라흐타 지주 계층으로써 현지 사회적, 정치적 엘리트로, 정교회권 우크라이나인들은 도시 외 인구 다수를 차지하는 농민으로서 사회적, 경제적 분화와 이에 따른 갈등 또한 심했기 때문이다. 특히 러시아 제국이 무너진 뒤 폴란드와 우크라이나가 독립하자, 동부 우크라이나와 연합한 서부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ЗУНР)을 두고,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과 다투었고, 결국 전쟁에서 이긴 폴란드가 우크라이나를 소련과 분할해 소유하게 되었다. 이후 2차 세계대전 이후 '크레시'(Kresy)라고 불리는 옛 폴란드 공화국 영토가 당시 소련에 소속되어 있던 우크라이나로 양도되면서 이 지역에 거주하던 폴란드인들이 본토(주로 2차 대전 이후 새로 얻은 구 독일의 영토)로 강제 이주되어 오늘날의 폴란드와 우크라이나는 과거사 문제같은 분쟁을 제외하면 대체로 양호한 편이다.[21] 폴란드는 물론이고, 친나치 인물에 유태인을 공격한 전력도 있어 안 그래도 동유럽계 이민자가 많은 저 멀리 이스라엘의 어그로까지 끌었다.[22] 처음엔 의용군이었지만 2014년 당시 우크라이나군이 가용 병력이 부족해 정규군에 편입시켰다.[23] 젤렌스키는 반데라주의자들이 그렇게나 싫어하는 유대계 출신이다.[24] 다만 발트 3국에 대놓고 무장친위대를 찬양하는 자들이 있음에도 발트 3국의 EU 및 나토 가입을 승인한 점을 볼 때 거절 사유로 작용하지는 못한 듯하다. 오히려 우크라이나의 부실한 경제기반이 거절 사유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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