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군 전쟁/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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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3. 제1차 십자군 원정 (1096 ~ 1099년)
3.1. 롬바르디아 십자군 (1101년)
3.2. 노르웨이 십자군 (1107 ~ 1110년)
3.3. 베네치아 십자군 (1122년)
4. 제2차 십자군 원정 (1145 ~ 1149년)
5. 제3차 십자군 원정 (1189 ~ 1192년)
5.1. 독일 십자군 (1197년)
6. 제4차 십자군 원정 (1202 ~ 1204년)
7. 제5차 십자군 원정 (1217 ~ 1221년)
8. 제6차 십자군 원정 (1227 ~ 1229년)
8.1. 귀족 십자군 (1239 ~ 1241년)
9. 제7차 십자군 원정 (1248 ~ 1254년)
10. 제8차 십자군 원정 (1270년)
11. 제9차 십자군 원정 (1271 ~ 1272년)
12. 아크레 함락과 종결(1291년 5월 18일)


1. 개요[편집]


은자 피에르가 이끈 민중 십자군부터 마지막 십자군의 원정인 9차까지, 십자군 전쟁의 역사를 다루는 문서이다. 연표의 경우 십자군 전쟁/연표 문서를 참조.

2. 제0차 십자군 원정 (민중 십자군)[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제0차 십자군 원정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 제1차 십자군 원정 (1096 ~ 1099년)[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제1차 십자군 원정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1. 롬바르디아 십자군 (1101년)[편집]


예루살렘을 정복한 후에 사정상 예루살렘 원정에 참여하지 못했던 자들과 1차 십자군 원정에 참여했다가 다시 원정한 자들로 구성된 십자군. 당시 십자군 본대에 참여하지 못했던 피사 공화국베네치아 공화국은 아예 정부가 직접 돈을 투자하여 십자군 지원을 위한 원정대를 조직한 상황이었는데, 1098년 피사가 120척의 함대를 발진시켰고 1099년 7월에 베네치아도 200척의 함대를 발진시켰다. 덕분에 쪼그라들었던 예루살렘의 십자군은 10배로 늘어날 수 있었다. 이들 베네치아 십자군은 하이파를 점령한 다음에 귀국했다.

이렇게 예루살렘의 정복과 베네치아 십자군의 성공에 망설이던 예비 십자군들이 곳곳에서 조직되었다. 블루아의 에티엔도 그 중 하나였다. 에티엔은 귀국하여 비겁자라고 엄청난 비난에 시달렸고 심지어 그의 부인조차 그를 경멸했다. 교황은 그에게 순례를 완수하란 명령을 내렸고 에티엔은 하는 수 없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떠나야 했다. 안티오키아 공략 직후 회군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머물렀던 베르망두아의 위그도 귀국했다가 다시 프랑스에서 합류해왔다. 예루살렘 공략 이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귀환했던 레몽 백작도 있었다. 그들 말고도 밀라노 대주교가 지휘하는 롬바르디아 십자군이 1100년에 출발했다(그 외에도 부르고뉴, 느베르, 아키텐, 바이에른 등지에서 참여했다). 1차 십자군만큼 크지도, 정예하지도 않은 롬바르디아 십자군은 니코메디아에서 부르고뉴 십자군 및 잔여 1차 십자군과 합류했다. 알렉시오스 황제가 지원한 병력까지 받은 십자군은 레몽 백작을 총지휘관으로 하여 1101년 5월에 출발했다. 1차 십자군의 행군로를 따라 도릴레온을 지나 앙카라에 이른 십자군은 안티오키아 공작 보에몽 1세다니슈멘드에게 잡혀갔단 소식을 듣고 그를 구출하려 했다. 마침 원정기간은 여름이었는데, 건조한 아나톨리아의 무더위에 노출된 십자군은 곧 지쳐버렸다. 파플라고니아의 강그라(Gangra)를 지나 카스타모뉘(Kastamonu)를 공격하던 십자군은 룸 술탄 클르츠 아르슬란의 공격을 받았다. 덥고 지친 차에 보급도 어렵고 끊임없이 공격을 받던 십자군은 1101년 8월에 메르시반(Mersivan)에서 룸군, 다니슈멘드군 등 튀르크 연합군에게 공격당해 궤멸되었고, 레몽, 에티엔 등 고위층 일부만 살아남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귀환했다.

이후 느베르, 바이에른, 아키텐 그리고 베르망두아의 위그가 이끄는 십자군이 니코메디아에 도착했다. 이들은 선발대를 따라가거나, 해로를 택하거나, 1차 십자군의 행군로를 따라가는 등 다 따로노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당연히(...) 클르츠 아르슬란의 룸군에 의해 죄다 각개격파 당하고 아키텐군 일부만이 레반트 지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베르망두아의 위그는 콘야 동쪽에 있는 헤라클레아 키비스트라(Heraclea Cybistra)에서 부상을 입었고, 이로 인해 그해 10월 타르소스에서 사망했다.


3.2. 노르웨이 십자군 (1107 ~ 1110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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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십자군이 끝난 직후 노르웨이 국왕 시구르 1세가 일으킨 1107~1110년까지의 장거리 원정이다. 자그마치 노르웨이에서 중동 팔레스타인까지 원정을 했는데 바이킹의 원정에 버금가는 대원정이었다. 또한 시구르 1세는 십자군 전쟁에 참가한 최초의 국왕급 인물이기도 하다. [1]

1107년 노르웨이 국왕 시구르 1세는 5,000명의 병력과 60척의 갤리를 타고 노르웨이를 출발하여 잉글랜드 국왕 헨리 1세의 환대 속에 겨울을 보내고 이베리아 반도를 거쳐 시칠리아로 가게 된다. 와중에 해적의 습격을 격퇴하고 오히려 해적들을 약탈하는가 하면 이베리아 반도에 있던 주변의 이슬람 소국들을 습격하고 발레아레스 제도를 점령한 뒤 보물들을 약탈하고 개종하지 않는 무슬림들을 학살했다.

노르웨이 군은 1109년 시칠리아에 도착해서 국왕 루지에로 2세의 환대를 받은 뒤 키프로스를 거쳐 1110년 마침내 예루살렘 왕국에 도착하였다. 거기서 예루살렘 국왕 보두앵 1세의 따듯한 환대를 받은 뒤 예루살렘 왕국군과 합세하여 시돈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성 십자가의 파편을 받는 등 많은 선물과 보물을 받았다. 이후 육로로 귀환을 선택, 동로마 제국으로 가서 황제 알렉시오스 1세와 면회했다. 이때 많은 부하들이 바랑인 친위대로 복무하길 원해 남겨졌고 해군과 보물들을 황제에게 바친 대가로 튼튼한 말을 얻어 불가리아-헝가리-오스트리아-독일을 주유하며 육로로 북상했다. 그 와중에 시구르 1세는 후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되는 로타르 3세와 면회하기도 하였고, 이후 덴마크에 도착해서 국왕 닐스의 도움을 얻어 배를 빌려 1113년, 6년 만에 노르웨이로 귀환했다. 여담으로 시구르 1세는 출발 당시 고작 18세였으니 이고깽에 가까운 경험이었던 셈이었다.


3.3. 베네치아 십자군 (1122년)[편집]


안티오키아의 섭정 루지에로는 1119년 6월 27일에 알레포를 공격했다가 참패했고, 엄청난 병력 손실 때문에 안티오키아와 에데사가 동시에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결국 이 사태를 수습한 보두앵 2세가 안티오키아의 섭정이 되었다.

1122년에는 알레포의 발라크가 에데사를 공격하여 조슬랭을 포로로 잡았는데, 보두앵 2세는 그를 구하기 위해 1123년 4월에 알레포를 공격했다가 도리어 포로가 되고 말았다.

한편 교황 칼리스토 2세는 성직 서임권 논쟁에 바빠서 예루살렘의 구원 요청을 베네치아에 위임한 상황이었다. 베네치아는 120척의 함대와 1만 5천의 군대를 파견했다. 1122년 8월 8일에 출발한 베네치아 십자군은 동로마 제국의 황제 요안니스 2세가 부황 알렉시오스 1세가 부여했던 무역 혜택을 연장하지 않자 자신들의 손으로 탈환하여 동로마에 양도한 바가 있는 코르푸 섬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보두앵 2세가 포로로 잡혔단 소식에 그들은 공성을 포기하고 레반트로 향해 5월에 이집트의 대함대를 격멸시켰다. 1124년 7월 7일 그들은 아스칼론과 더불어 예루살렘 왕국에 속하지 않은 유일한 팔레스타인 도시인 티레를 함락시켰다. 보두앵 2세는 발라크가 죽고 나서야 석방되었다.


4. 제2차 십자군 원정 (1145 ~ 1149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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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십자군의 이집트 원정 (1163 ~1169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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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살라딘의 예루살렘 원정 (1187년)[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살라흐 앗 딘 유수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제3차 십자군 원정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트리폴리, 티레, 안티오키아를 제외한 모든 영토가 살라딘의 손에 떨어진다. 영화 킹덤 오브 헤븐이 이 시기를 그린다.


5. 제3차 십자군 원정 (1189 ~ 1192년)[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제3차 십자군 원정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1. 독일 십자군 (1197년)[편집]


3차 십자군을 이끌다 터키에서 익사한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하인리히 6세가 제창하였다. 1191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즉위한 그는 1193 ~ 1194년 귀국하던 리처드 1세를 감금한 후 충성 서약을 받고 나서야 풀어주기도 하였고 1194년에는 아내 콩스탕스의 권리를 주장하며 시칠리아 왕국을 정복하였다. 그리고 교황에게 남부 이탈리아의 점유를 인정받기 위해 부황이 이루다 못한 십자군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이미 살라딘은 1193년에 죽었고 그의 사후 아들들이 제위 계승 분쟁을 일으키며 시리아는 혼란에 빠져 있었다. 그러던 1195년 라믈라 평화 협정에 명시된 십자군과 아이유브 왕조 간의 휴전이 끝나자 하인리히 6세는 그해 부활절, 이탈리아의 바리에서 첼레스티노 교황에게 십자군 종군을 서약하였다.

하인리히 6세는 우선 자금 마련을 위해 막 쿠데타를 통해 즉위한 동로마 제국의 알렉시오스 3세를 협박, 5천 파운드의 금을 얻어내었고 키프로스 왕국 및 킬리키아의 아르메니아 왕국과 동맹을 맺은 후 군대 편성을 위해 1195년 여름 독일로 향하였다. 12월 보름스 제국 의회 등의 소집령에 3차 십자군 때 활약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 하던 많은 귀족들이 호응하였다. 마인츠 대주교, 브레멘 대주교를 시작으로 브라반트 공 하인리히, 오스트리아 공 프리드리히, 튀링겐 변경백 헤르만 등이 종군을 선언하며 당초 하인리히의 목표였던 1천 5백의 기사와 3천의 용병을 뛰어넘는 4천의 기사와 1만 2천의 병사들이 소집되었다. 1196년 3월 뷔르츠부르크 제국 회의에서 하인리히가 제안한 황제위 세습안 (Erbreichsplan)[2]이 부결되며[3] 출정은 연기되었다.

1196년 7월, 하인리히는 이탈리아로 향하여 이 문제에 대해 교황과 협상하려 하였으나 역시 결렬되었고 그해 10월 에르푸르트 제국회의에서 대다수의 제후들이 황제 세습안을 거부하였다. 하인리히는 십자군의 출정일로 정해진 크리스마스에야 아들 프리드리히를 독일 왕으로 선출하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남부 이탈리아의 카푸아에서 겨울을 보낸 하이리히는 1197년 3월, 하인리히 6세는 시칠리아의 메시나에 도착하여 십자군을 준비하였다. 하지만 하인리히의 중앙집권화에 반대한 시칠리아 왕국의 노르만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비록 카타니아의 반군은 독일군에 의해 잔혹히 진압되었지만 남편의 무관심에 시달리던 황후 콩스탕스가 반란군에 가담하자 규모가 확대되어 하인리히를 포위하기까지 하였다.

조약을 맺고 겨우 이를 진정시킨 하인리히는 다시 십자군 원정을 준비하던 중 1197년 8월, 메시나 인근에서 사냥을 하던 중 감기에 걸린 후 29일 병사하였다. 항간에는 콩스탕스가 그를 독살한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이번에도 황제가 성지에 가기도 전에 사망하였지만 이미 대부분의 십자군은 마인츠 대주교의 인솔 하에 메시나를 출항한 상태였다. 독일 십자군은 9월 22일 아크레에 닻을 내렸고, 곧 브라반트 공작 하인리히를 대장으로 삼아 진군하였다. 그들은 어렵지 않게 시돈을 점령하였고 10월 24일 베이루트에 입성하였다. 이듬해 초 키프로스의 왕 아말릭은 예루살렘 왕국의 이사벨 여왕과 결혼한 후 예루살렘의 왕 아말릭 2세로 등극하였다.

1198년 3월, 독일 십자군은 비블로스를 점령하여 예루살렘 왕국과 트리폴리 백국 간의 육상 통로를 확보하였다. 이때 1190년 설립된 튜튼 기사단이 정식 기사단으로 승격되었다. 이후 자신감이 생긴 십자군은 다마스쿠스로 진격하기 위해 티레에서 그 방향에 위치한 토론 (테브닌)을 포위, 알 아딜의 간담을 서늘케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때 하인리히 6세의 부고가 독일 십자군에게 전해졌고 1198년 7월까지 대부분의 제후들은 새 황제에게서 영지의 승인을 받기 위해 귀국을 택하였다. 그리고 그해 6월, 알 아딜은 십자군과 평화 조약을 체결하여 그들이 취득한 영토의 점유를 인정하였다. 한편 아말릭 2세는 발리앙의 아들 장 드 이벨린에게 베이루트를 맡겼다.


6. 제4차 십자군 원정 (1202 ~ 1204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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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제5차 십자군 원정 (1217 ~ 1221년)[편집]


파일:Friezen_vallen_de_toren_van_Damiate_aan.jpg
다미에타 공방전

1차 이집트 원정이라고도 한다.[4]

원정기간은 1217년에서 1221년의 4년간. 가라는 성지는 안 가고 엉뚱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략한 제후들의 4차 십자군에 실망한 교황 인노첸시오 3세 자신이 직접 주도하여 일으킨 십자군이다. 하지만 준비 와중에 인노첸시오 3세가 죽으면서 새로운 교황 호노리오 3세가 본격적으로 원정을 준비해 각국의 지원을 받아 1217년 원정군을 출발시켰다.

이에 헝가리 왕 언드라시 2세,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드 6세, 키프로스 왕 위그, 안티오키아 공작 보에몽이 참가했다. 당시 독일 왕으로 몇 년 후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되는 프리드리히 2세는 참가를 수차례 재촉 받았으나 장기간의 해외 원정을 꺼려 직접 참가하지는 않았다.

교황은 명목상 예루살렘 왕국의 왕이었던 장 드 브리엔[5]을 사령관으로 삼아 시리아를 공격하게 했으나 원정은 지지부진하여 별다른 성과를 보지 못했다. 다만 예루살렘의 성벽은 파괴되었는데, 이슬람 측이 미리 겁 먹고 도시를 비우고 허물어버린 탓이었다. 아이유브 왕조의 설레발이긴 했지만, 십자군 역시 성벽 없는 예루살렘을 차지해서 방어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1218년 이에 실망한 제후와 왕들이 하나둘씩 귀환해버렸고, 이에 제노바 함대의 제안으로 아이유브 왕조가 다스리는 이집트의 항구 도시, 다미에타를 공략하기로 하였다. 십자군은 술탄 알 카밀의 반격을 격퇴하고 2년간의 장기간의 포위 공격에 다미에타를 함락시키는 데는 성공했으나 이미 전력 소모가 심해 더 이상 공세로 전환하기는 어려웠다.

결국 이들은 1221년까지 다미에타에서 웅거하면서 프리드리히 2세의 지원을 기다렸으나 휘하의 바이에른 공작 루트비히 1세의 지원군만이 왔다. 십자군은 그래도 지원군에 힘입어 공세로 전환하여 카이로로 진격하였으나, 나일강이 범람하는 우기에 공격을 고집한 교황 사절인 페라기우스의 실책으로 대패하여 원정군은 괴멸했다. 이후 포로들은 다미에타를 반환하는 조건으로 석방되고 5차 십자군도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다.

이 시점쯤에는 동방의 수수께끼의 기독교 왕국인 '사제왕 요한의 왕국'이 십자군을 도운다는 전설이 퍼져있었으나 그 정체는 사실 몽골군이었다.


8. 제6차 십자군 원정 (1227 ~ 1229년)[편집]


파일:frederick 1.jpg

원정 기간은 1227년부터 1229년까지 약 2년 동안. '원정'이라고는 하지만 실상은 협상단 겸 상단이었다.

교황 그레고리오 9세(재위 1227~1241)는 십자군 파병을 조건으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프리드리히 2세(1220~1250)를 밀어줬다. 교황은 프리드리히 2세에게 원정을 재촉했으나, 실리주의자였던 황제는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따르려고 하지 않았다. 프리드리히 2세는 가는 길도 멀면서 무려 5회나 파병했으면서도 한 번 빼고 시원찮은 결과 혹은 안 간 것만 못한 결과만 내는 십자군 원정에 자신의 물자와 군사들을 희생시킬 마음이 전혀 없었다. 물론 졸지에 뒤통수를 맞은 교황은 분노하여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이는 황제를 파문했다. 사실 프리드리히 2세는 파문당하기 전에 이미 원정에 나섰으나, 항해 도중 병에 걸려 일시 귀국하자 파문을 당한 것이었다.

프리드리히 2세는 두 번이나 파문되고 나서야 굉장히 의욕없는 태도로 십자군을 일으켰으며, 미리 건조했던 함선들을 이끌고 어찌저찌 무슬림 권에 도착했다. 거기서 그는 본인과 똑같이 싸울 마음이 없었던 아이유브 왕조의 술탄 알 카밀 무함마드 빈 알 아딘(살라딘의 조카)과 여러 번 교섭하여 마침내 예루살렘 일부의 통치권을 양도받는 성과를 이룬다. 간단히 말해서 예루살렘을 돈 주고 산 것이다. 예루살렘에 있는 모스크는 철거하지 않고 여전히 무슬림의 관리하에 두고, 예루살렘에 군대를 상주시키지 않는다는 조건이었다. 피를 보지 않고도 성과를 낸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결정이었으나, 황제가 예루살렘을 완전 탈환할 것을 요구했던 교황이 이에 납득할 리는 없었고, 마찬가지로 술탄 알 카밀도 성지를 이교도들에게 팔아넘겼다는 이유로 이슬람권에서 거센 비난을 받았다.

이미 알 카밀에 대항해 시리아에서 반란을 일으킨 형제 알 아시라프는 물론, 이슬람권 내에서도 이를 '굴욕'으로 간주해 큰 저항이 일었으며, 그레고리오 9세를 비롯한 교황측에서도 프리드리히에게 크게 분노했다. 당시 교황측은 이슬람 쪽이 약세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전투를 하면 옛 예루살렘 왕국령 전역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도 있었기 때문이다. 또 협정 조건에서 이미 성벽이 존재하지 않던 예루살렘에 새로 축성하지 않는다는 조약도 있었기 때문에 도시를 탈환해봤자 지키기 어렵다는 비판도 있었다.

프리드리히는 이내 교황 측 군대에게 공격[6]을 받았지만 돌아와서 이를 간단히 격퇴한다. 결국 교황은 다시 한번 제후들을 선동해서 십자군을 재파병했다. 나바라 왕국 국왕 테오발트 1세, 잉글랜드 왕국의 국왕 헨리 3세의 남동생 콘월 백작 리처드 등이 이에 호응해서 갔으나, 재원정군은 소규모였다. 그들이 도착했던 시기는 프리드리히 2세와 아이유브 왕조 간 휴전 협정 기간이었기 때문에, 제대로 전투는 하지 않았고 여느 십자군이 그랬듯이 성지 순례와 아스칼론 쪽에 축성만 하고 다시 돌아왔다.

결국 그레고리오 9세는 프리드리히 2세의 파문을 취소하였으며, 조약이 만료된 1239년까지 이후에도 5년간(즉, 1244년까지) 예루살렘은 기독교 세력의 영향권에 드는 등, 이 6차 원정은 십자군 중 2번째(평화적으로 첫째)이자 마지막 성공한 사례가 되었다.


8.1. 귀족 십자군 (1239 ~ 1241년)[편집]


3년간 이루어졌으며, 시몽 드 몽포르도 참전하였다. 아스칼론과 예루살렘 인근 내륙을 점령하여 1187년 이후 최대 영토를 확보하였다. 비록 1244년에 예루살렘을 빼앗기고 재차 쇠퇴하지만, 짧은 중흥기로 평가받는다.


9. 제7차 십자군 원정 (1248 ~ 1254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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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미에타 공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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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왕 루이의 진군로 (다미에타 ~ 파리스쿠르 ~ 만수라)

파일:알만수라.png
만수라 전투

제2차 이집트 원정이라고도 부른다.

원정 기간은 1248년부터 1254년까지 약 6년간으로서 프랑스루이 9세가 주도하여 일으킨 십자군이다.

당시 아이유브 왕조는 '시리아 아이유브'와 '이집트 아이유브'로 분열되어 있었다. 1244년, 예루살렘은 '이집트 아이유브 왕조'와 동맹을 맺은 '호라즘 용병들'의 군대에 점령당했고, 이에 맞서기 위해 '시리아의 아이유브 왕조'와 동맹을 맺은 '십자군'은 라 포르비에(La Forbie) 전투에서 이집트와 호라즘 연합군에게 포위섬멸 당한다. 라 포르비에 전투하틴의 뿔 전투 이후 팔레스타인 지역의 (즉 유럽에서의 원정군이 아닌) 십자군이 대규모 전투를 벌인 유일한 사례였으며 최후의 사례이기도 하다.

이렇게 아이유브 왕조의 살라딘 2세가 이끄는 이슬람 세력에 예루살렘이 넘어가자 이에 자극을 받은 프랑스 왕 루이 9세(1226~1270)는 친동생들인 앙주 백작 샤를, 아르투아 백작 로베르, 푸아투 백작 알퐁스, 성전 기사단 등과 함께 제7차 십자군을 일으킨다. 하지만 교황 인노첸시오 4세가 출발을 연기하려고 했다. 프레드리히 2세와의 대립이 이유였다.루이 9세는 꿈에서 신의 계시를 받았다며 출발한다.

1248년 가을, 3만 6천 십자군은 키프로스 섬에 도착하여 겨울을 보낸다. 그동안 이란과 몽골에 사절을 보내 합동 전쟁을 논의하나 진전되지 않았다. 겨울을 보내고, 태풍을 보내고, 1249년 6월 나일강 하구 항구도시 다미에타를 점령한다.

오랜 기간 대비했던 아이유브 왕조는 충격에 빠졌고 카이로까지 점령당할까봐 두려움에 떤다. 알 살리흐는 투병 중인 몸을 이끌고, 민심을 잡기 위해 다미에타 방어에 책임이 있는 장교 50명을 처형하고, 다미에타 함락 4일 만에 만수라(Mansura)로 군선을 타고 출정했다. 그리고 십자군에 전갈을 보내어 5차 십자군 전쟁 때와 마찬가지로 예루살렘과 다미에타의 교환을 제안했으나 거절당한다.

루이 9세는 나일강의 범람기에 공격했다가 참패한 5차 십자군전쟁을 생각하여, 다미에타에서 주둔했다가 1249년 11월 20일 카이로를 향해 진군한다. 그리고 2일 뒤, 11월 22일 알 살리흐가 오랜 병으로 병사한다. 알 살리흐의 임종을 지켜본 왕비 샤쟈르 알 두르는 사령관 파크루딘과 술탄의 죽음을 숨기기로 하고, 영토의 북방을 통치하고 있던 후계자 투란샤를 불러들인다.

십자군은 3개월에 걸쳐 천천히 진군하여 만수라와 운하를 사이에 두고 포진하였다. 이윽고 1250년 2월 8일 이른 아침, 운하의 얕은 지역을 건넌 로베르 백작의 290기 정예 기마부대가 아이유브군을 기습했고, 아침에 목욕하다 갑옷도 입지 못하고 말에 올라타 뛰쳐나온 사령관 파크루딘을 죽이는 데 성공한다. (알 만수라 전투 그림의 1)

루이 9세는 운하 건너편에서, 기습의 성공을 보고 로베르에게 철수 명령을 내린다. 그러나 로베르는 단숨에 적진을 돌파해 열려있는 만수라의 성문으로 들어갔다. (알 만수라 전투 그림의 2)

만수라 시내로 돌입한 기마대는 술탄이 위치한 궁으로 돌격했다. 하지만 궁 근처에서 바이바르스(Baibars)의 술탄친위대가 사방에서 공격해오면서 퇴각하려했으나 로베르 백작은 전사하고 돌입한 290기 기마부대 중 5기만 탈출했다. (알 만수라 전투 그림의 3)

바르바로사의 술탄친위대는 그대로 아이유브군으로 달려가면서 로베르 백작이 루이 9세의 동생이었고, 왕가의 문장을 붙이고 있었기에 "프랑스 왕을 죽였다"는 소리쳤고(알 만수라전투 그림의 4) 운하를 건너 전면전을 걸어온 루이9세의 군을 격파했다.(알 만수라 전투 그림의 5)

공격 실패로 동생을 잃은 루이 9세의 프랑스 군은 다시 아이유브군과 대치상태가 되었는데, 북방을 지키던 투랸샤가 도착하면서 다미에타와 만수라 사이의 프랑스군 나일강 보급로를 끊어버린다. 보급도 끊기고 설상가상으로 전염병까지 돌아 십자군은 퇴각하는데, 아이유브군의 추격에 이기지 못하고 1250년 4월 다미에타에서 약 20km 떨어진 파리스쿠스에서 루이 9세가 항복한다.

결국 루이 9세는 포로가 되어 발을 사슬에 묶인 채 만수라로 옮겨진 뒤, 유폐되었다가 배상금을 지불하고 석방된다. 여담이지만 루이 9세는 만일 이집트를 정복하는 데 성공하면 로베르를 이집트 왕으로 옹립하려 했었다고 한다.

여하간 석방된 루이 9세는 남은 원정군의 몸값을 지불하느라고 꼬박 4년 동안이나 중동에 머물렀고, 이 일이 끝난 뒤에야 겨우 프랑스로 귀국했다. 물론 잡병들은 어림도 없었고 노예가 되느냐 이슬람으로 개종하느냐의 선택을 강요받았다. 하지만 승리자 아이유브 왕조의 끝 역시 불행했다.

그해(1250) 5월 2일는 술탄에 즉위한 지 2개월 만에 알 투랸샤가 바이바르스의 맘루크군에 살해당하고, 아이바크(Aybak)가 맘루크 왕조(1250~1517)를 열었으며[7] 알 만수라 전투를 지휘하고 군대의 지지를 얻은 바이바르스는 10년 후에 술탄이 된다.


10. 제8차 십자군 원정 (1270년)[편집]


파일:Siege_of_Tunis_1270.jpg
튀니스 공방전

13세기는 몽골 제국의 시대였고, 호라즘 왕조부터 룸 술탄국, 아바스 왕조를 줄줄이 박살내며 달려오는 몽골 제국은 유럽 세력에게 큰 기대를 안겨주었다. 안티오키아 공국은 1260년 몽골군이 쳐들어 왔을 때 몽골 편을 들어 이슬람 세력의 팽창을 저지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술탄 바이바르스에 의해 몽골군이 패배하고 물러나자 완전히 궁지에 몰렸고, 바이바르스는 1268년 자신에게 반기를 든 대가로 안티오키아를 함락시킨 뒤 대학살과 파괴를 자행하여 도시를 폐허로 만들었다. 헬레니즘 시대부터 중동의 대도시였고, 아시아(중동) 교회의 중심이었던 안티오키아는 가뜩이나 십자군에게 점령되던 순간부터 꾸준한 하락세였다가 이때 결정타를 입어 지금까지 시골도시 수준에 머물러 있다.

이에 자극 받은 루이 9세는 1270년 다시 십자군을 결성하여 자신의 아들 필리프 3세와 함께 동생인 시칠리아 왕 샤를(카를로 1세, 앙주의 샤를)의 제안을 쫓아 북아프리카 튀니지를 공격한다. 지원군으로 샤를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합류하였고, 사위인 나바라 왕국의 국왕 테오발트 2세의 군대 등이 합세하였으나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고 식수 부족과 진중에 전염병이 돌아 루이 9세는 튀니스에서 병사한다.

이처럼 2차례나 십자군 원정에 직접 가담하고, 2번째 원정에서는 왕 자신이 병사까지 했기 때문에 교회에서 즉각적인 보답을 하여 루이 9세는 성인으로 시성되었으며, 이에 따라 루이 9세는 '성왕(聖王)'이라는 별칭을 얻게 된다. 한편 진중에서 필리프 3세는 왕위를 이어받고 대관식을 위해 프랑스로 돌아가게 되고, 또 나바라 왕 테오발트 2세도 귀국한 후 이내 병으로 사망했다. 남겨진 샤를은 튀니지와 그리스도인의 보호와 무역재개, 배상금 지불 등의 조건으로 화친하고 뒤늦게 지원군으로 온 에드워드 1세와 아크레로 향했다.


11. 제9차 십자군 원정 (1271 ~ 1272년)[편집]


루이 9세가 튀니스 공격에 실패하고 병사하자, 지원군으로 오고 있었던 잉글랜드 왕국의 에드워드 왕자[8]는 뒷북을 친 격이 되었다. 늦게 도착한 이들 지원군들은 남겨진 시칠리아 왕 샤를과 함께 십자군의 마지막 거점인 아크레(아콘/아코)로 진군하였고, 키프로스 왕 위그 3세가 해군 지원을 해주었다. 이들은 또한 일 칸국에 원군을 요청하여 기병대를 지원받는다.

1271년 연합군은 몇몇 소규모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긴 했지만 바이바르스가 키프로스 본토를 공격하자 키프로스 해군이 철수하게 되고 에드워드의 군대는 아크레에 고립되고 만다. 여기에 더해 술탄은 자객을 보내 에드워드를 습격하기도 했는데, 에드워드는 암살자를 죽이는데 성공하지만 그 역시 작은 부상을 당하게 된다. 결국 갖가지 악전고투속에 에드워드와 샤를은 바이바르스와 10년간의 휴전 협정을 맺고 1272년 철수하고 만다.


12. 아크레 함락과 종결(1291년 5월 18일)[편집]


파일:siegeacre14.jpg
파일:1460px-Map_of_Acre_in_1291.svg.png
1291년 아크레 공방전에서 아크레가 무슬림 제국에게 함락당하며 십자군 전쟁이 막을 내렸다.

이후 십자군은 맘루크 술탄국의 거듭된 공격으로 토르토사, 트리폴리 등을 잃었다(1289년). 십자군을 지원한 일 칸국몽골군은 아파미아, 알레포 등을 함락시키며 서남쪽 방향으로 진격, 많은 무슬림들을 학살했으나 술탄 사이프 앗 딘 칼라운이 반격을 개시하여 몽골군을 몰살시킨다. 결국 1291년, 예루살렘 왕국은 쿠칸에 이어 5월 18일에 아크레가 살라흐 앗 딘 칼릴에 의해 함락당하면서 멸망하였고 8월 14일에 토르토사가 함락되어 트리폴리 백국도 멸망하였다. 이후 잠시 동안(1299년 ~ 1301년) 일 칸국의 도움과 키프로스 왕국의 활약으로 일부 해안 도시들을 되찾기는 하지만 맘루크 왕조가 이내 수복하였고, 1302년에는 최후의 거점인 루아드 섬이 함락되며 200년에 걸친 십자군 전쟁은 막을 내리게 된다.


13. 기타 십자군[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십자군 전쟁/기타 십자군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 이복형과 공동왕 체제였는데 사이가 괜찮았고 서로 가겠다고 다투다가 해외경험이 더 많았던 시구르가 가기로 했다고 한다.[2] 세속 제후들도 남성 직계가 끊기면 황제에게 영지가 넘어가는 것 대신 모계로도 세습이 가능하게 하며, 성직자 제후들의 임명권을 포기하고 그자리가 공석일 때 그 세금을 황제가 챙기는 것도 중지하겠다는 타협적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3] 쾰른 대주교 아돌프가 아예 제국의회에 참석조차 하지 않았다..[4] 다만 12세기 말에도 예루살렘 왕국이 이집트 몇 번 침공한 적이 있어서 잘 쓰이진 않는다[5] 이 사람은 프랑스 출신 기사로, 예루살렘 왕 콘라드의 딸 마리와 결혼한 부마였다. 사실 이미 몰락 테크를 타고 있던 예루살렘 왕국의 왕좌에 아무도 앉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교황과 프랑스 왕이 억지로 임명하여 보낸 인물이었다. 결국 예루살렘 탈환에 실패한 후에 라틴 제국으로 가서 섭정이 된다.[6] 교황이 무슨 공격을 감행하는지 의아할 수도 있지만, 1870년까지 약 천 년 동안 교황은 이탈리아 중부의 영토를 다스리는 군주이기도 했다. 당연히 주민을 징발하고 물자를 모아 군대를 조직할 수 있다. 교황의 아들 체사레 보르자가 그 힘으로 유명세를 떨친 것이다. 참고로 교황뿐 아니라 주교신부를 비롯한 성직자들 또한 중세에는 실질적으로 영주이자 기사인 경우가 많았다.[7] 1대 술탄을 알 살라흐의 아내, 샤쟈르 알 두르(Shajar al-Durr)로 보는 견해도 있다. 80일간이지만 맘루크들의 추천을 받아 술탄의 지위에 올랐으나 여성이 술탄이 오른 경우는 역사상 전무후무해서 초대 군주로 넣을 것인가, 역사상 유일한 여성 술탄으로 인정할 것인가 의견이 분분하다.[8] 훗날의 에드워드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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