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키 마사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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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키 마사히로의 수상 경력 / 보유 기록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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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07주니치.png
NPB 일본시리즈
우승반지

2007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2007년 센트럴리그 최다 도루
2006년
아오키 노리치카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
41도루

아라키 마사히로
(주니치 드래곤즈)
31도루

2008~2009년
후쿠치 카즈키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
42도루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2004~2006 NPB 센트럴 리그 2루수 부문 베스트나인

{{{#fff [[주니치 드래곤즈|주니치 드래곤즈]] 등번호 2번}}}
야노 아키히로
(1991~1995)

아라키 마사히로
(1996~2018)


이시카와 타카야
(2020~)
{{{#fff [[주니치 드래곤즈|주니치 드래곤즈]] 등번호 88번}}}
미야코 유우지로
(2018)

아라키 마사히로
(2019~2021)


카토오카 아츠시
(2022~)
{{{#fff [[주니치 드래곤즈|주니치 드래곤즈]] 등번호 71번}}}
하루 토시오
(2014~2021)

아라키 마사히로
(2022~2023)


도노우에 나오미치
(2024~)




파일:230615 아라키 마사히로.jpg

아라키 마사히로
荒木雅博 | Araki Masahiro

출생
1977년 9월 13일 (46세)
구마모토현 키쿠치 군 키쿠요 정
국적
[[일본|

일본
display: none; display: 일본"
행정구
]]

포지션'
2루수, 유격수, 외야수
투타
우투우타
학력
구마모토 공업 고등학교[1]
프로입단
1995년 드래프트 1위
소속팀
주니치 드래곤즈 (1996~2018)
지도자
주니치 드래곤즈 내야 수비 겸 주루 코치 (2018)[2]
주니치 드래곤즈 2군 내야수비·주루코치 (2019)
주니치 드래곤즈 1군 내야수비·주루코치 (2020~2023)
수상경력
센트럴리그 2루수 부문 베스트나인 3회(2004~2006)[3]
2007년 일본시리즈 우수선수상


1. 개요
2. 프로 데뷔 이전
3. 프로 데뷔 이후
4. 지도자 시절
5.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일본프로야구 선수이자 주니치 드래곤즈프랜차이즈 스타.

뛰어난 수비주루를 주무기로 주니치의 2000년대 황금기를 이끈 주전 2루수였으며, 유격수 이바타 히로카즈와 찰떡궁합을 이뤘던 키스톤 콤비는 둘의 성씨를 따 '아라이바'라 불리며 현재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2. 프로 데뷔 이전[편집]


구마모토 공업 고등학교 시절엔 춘계 코시엔 2차례 출장한 바 있지만 하계 코시엔 출장경험은 없었다. 3학년 땐 아쉽게도 현 대회 준결승에서 패하면서 진출이 좌절되었다.

이후 1995년 드래프트 4위로 주니치 드래곤즈에 입단할 예정이었으나, 2번 연속으로 1위 지명에서 물을 먹은[4][5] 호시노 센이치 감독이 빡쳐서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3번째 1위 지명에서 아라키를 선택하면서 우여곡절 끝에(?) 주니치 드래곤즈에 드래프트 1위로 지명받아 프로 데뷔를 이룬다.[6]


3. 프로 데뷔 이후[편집]


프로 첫 해인 1996년엔 1군 출장 없이 2군에만 머물렀고, 이듬해인 1997년 1군 데뷔에 성공하지만 이후 2000년까진 1군에서 출장기회를 거의 잡지 못했다.

프로 5년차인 2001년부터 타격이 급성장하면서 주전으로 자리잡았고, 그 해 여름부턴 1번 타자로 자리잡으며 타율 .338(다만 규정타석엔 미달)을 기록. 주니치의 새로운 주전선수로 주목받았다.

이후 2002년 처음으로 규정타석을 만족하는데 성공, 오치아이 히로미츠감독에 취임한 2004년엔 유격수 이바타 히로카즈와 함께 테이블 세터, 키스톤 콤비를 구축, 빠른 발과 뛰어난 수비 실력을 선보이며 39도루 등을 기록, 팀을 5년만의 센트럴리그 우승으로 이끌고 처음으로 골든글러브베스트나인[7]을 수상한다.

2005년엔 개인 최다인 42도루를 기록했고, 2006년엔 프로 인생에서 사실상 유일한(2001년은 규정타석 미달이었으니) 타율 3할을 기록했다. 이 기간 동안 골든글러브베스트나인을 독차지한 건 덤.

하지만 2007년엔 31도루를 기록하여 구단 사상 21년 만의 도루왕을 수상했지만 심한 타격 부진과 더불어 주특기였던 수비도 입스로 인해 일시적으로 부진을 겪어 한때 2군으로 떨어지는 등 성적 부진에 시달렸고, 2007년 일본시리즈에서 활약하여 팀을 무려 53년 만의 일본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지만 결국 시즌 때의 성적 부진 탓에 연봉이 깎이는(...) 불운을 겪었다. 2008년에도 사상 250번째 1000안타를 달성했지만 더더욱 타격 부진에 시달렸다. 다만 이 기간 중에도 수비는 괜찮은 평가를 받아 골든글러브를 2년 연속 수상한다.

2009년부턴 다시 타격을 회복하여 골든글러브 6년 연속 수상에 성공하는 등 팀의 중추로써 맹활약했고, 2010~2011년 구단 사상 첫 리그 연패에 공헌했으며 2011년엔 개인 통산 300도루를 기록했다.

2013년부턴 슬슬 노쇠화로 인해 주전 자리에서 밀려났지만, 팀에 몇 안 되는 베테랑 겸 정신적 지주+빈약해진 선수진(...) 등을 이유로 현재까지도 여전히 1군 시합에 꾸준히 출장하고 있다.

2014년엔 통산 350도루, 2016년엔 구단 통산도루 1위에 올랐고, 2017년엔 드디어 개인 통산 2000안타를 달성하여 명구회에 입성했다. 참고로 2000안타 달성 시점에서 기록한 33홈런은 2000안타 달성자 중 역대 최저이며[8], 2000안타 달성자 중 유일하게 시즌 두자릿수 홈런[9], 50타점 이상[10]을 기록한 적이 없다.

2018시즌 들어서는 플레잉 코치를 역임할 계획이었으나, 벤치에 들어갈 수 있는 코치 수의 제한 탓에 취소되었다. 다만 코치 명함만 떼었을 뿐 팀내 역할은 그대로였고, 타카하시 슈헤이의 붙박이 2루 전향 방침상 많은 기회를 부여받지는 못했지만 2시즌만의 홈런포를 쏘아올리는 등 간간히 출전해 베테랑의 품격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시즌 종료 후 이와세 히토키, 아사오 타쿠야와 더불어 은퇴하며 선수생활을 마쳤다.

통산성적은 2220시합 출장, 8416타수 2045안타[11] 34홈런 468타점 378도루, 284희생타 26희생플라이, 467사사구 1043삼진, 타율 .268/출루율 .309/장타율 .324/OPS .623 이다. 상술했듯 공격력보다는 수비력과 주루 능력으로 오랜 선수생활을 해 안타를 적립한 타입인만큼, 출루율/장타율/OPS 모두 NPB 2000안타 달성자 중 가장 낮다.[12]


4. 지도자 시절[편집]


은퇴 후 바로 코치로 전임해 2019년부터 주니치의 2군 내야수비 겸 주루코치를 맡았고 2020년부터 1군 내야수비 겸 주루코치를 맡고 있다. 2023년을 끝으로 퇴단하였다.


5.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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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카와카미 테츠하루, 마에다 토모노리 등 유명 프로야구 선수들을 많이 배출한 학교다.[2] 시즌 개시 전 벤치에 들어갈 수 있는 코치 수 제한 문제로 코치직 역임 계획이 취소되었다. 다만 팀내 역할은 그대로라고.[3] 2004년은 히로시마 도요 카프그렉 라로카와 공동수상. 참고로 외야수 부문을 제외한 베스트나인 유일의 공동수상이다. 자세한 사정은 하술.[4] 일본프로야구 드래프트는 전구단이 1순위에서 동시 지명을 진행하며, 복수 구단에 지명된 선수가 나올 경우 지명 구단들이 제비뽑기를 해서 당첨제비를 뽑은 구단이 교섭권을 갖게 된다. 제비뽑기에서 꽝을 뽑은 구단들은 다시 해당 순위의 지명선수를 뽑고 한 구단에서만 지명된 선수는 바로 지명한 구단 측에서 지명권 획득, 또다시 복수 구단에 지명된 선수가 나오면 앞의 과정을 반복하며 드래프트가 끝날 때까지 이런 식으로 선수들을 지명한다.[5] 1번째 1위 지명에선 후쿠도메 코스케를 지명했지만 무려 7구단과의 경합 끝에 킨테츠 버팔로즈에 교섭권을 빼앗겼고(근데 정작 후쿠도메는 입단을 거부하고 사회인 야구로 진출했다가 2년 뒤 다시 드래프트에 참가해 주니치에 1위 지명으로 입단한다.) 2번째 1위 지명에선 고졸 포수 하라 슌스케를 지명했으나 이마저도 호시노의 웬쑤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경합에서 지는 바람에 요미우리에게 교섭권을 내줬다.(하지만 정작 하라는 프로 입단 후 11년간 20안타도 못치고 은퇴하면서 먹튀가 되었다.)[6] 아라키가 1위로 지명을 받으며 비게 된 4위 지명 자리엔 미쓰비시 자동차 사회인야구팀에서 뛰던 와타나베 히로유키가 지명되었다. 와타나베는 데뷔 후 2007년까지 주니치에서 유틸리티 플레이어로 뛰며 1루수 골든글러브도 한 차례 수상하는 등의 쏠쏠한 활약을 펼쳤다.[7] 베스트나인은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거포 2루수 그렉 라로카와 공동 수상. 참고로 순수 타격성적만 비교할 시(짙은 글씨 : 리그 최고 기록) 라로카는 122경기 타율 .328/출루율 .425/장타율 .677/OPS 1.102에 40홈런 101타점 11도루(7도루자), 아라키는 138경기(전 경기 출장) 타율 .292/출루율 .322/장타율 .349 OPS .671 3홈런 44타점 39도루(9도루자)로 타고투저이던 당시 리그 환경이나 히로시마 시민 구장의 타자친화적 성격을 감안하더라도 넘사벽의 차이가 있다. 덤으로 전해인 2003년 타격왕을 차지하고 한신 타이거스기나긴 암흑기의 종식을 알리는 18년 만의 리그 우승을 이끌며 2루수 베스트나인을 2년 연속(02, 03) 수상했던 한신의 이마오카 마코토138경기 타율 .306/출루율 .361/장타율 .504 OPS .865 28홈런 83타점의 뛰어난 성적을 기록하고도 위 둘에 밀려 무관에 그쳤다. 이 해는 리그 전체적으로 타고투저의 경향이 강한 가운데 넓은 홈구장에서 수비적인 야구를 한 주니치가 센트럴 리그 우승을 달성하면서 그 영향으로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에서 뛰며 2년 연속으로 홈런왕을 차지한 타이론 우즈가 수상한 1루수 부문을 제외한 내야 전 포지션의 베스트나인을 주니치가 가져갔는데 그 결과 5홈런을 친 타츠나미 카즈요시가 40홈런을 친 야쿠르트의 이와무라 아키노리, 요미우리의 고쿠보 히로키를 제치고 3루수 베스트나인을 가져가는 등 논란이 될 수상들이 꽤 있었다. 참고로 그 1루수 부문마저도 주니치에서 역사상 첫 규정타석 미달 수상 기록(물론 1루수 부문 얘기다)을 만들면서까지 골든글러브를 가져갔는데 그 주인공이 바로 위의 각주에 나오는 아라키 대신 4위에 지명된 와타나베 히로유키.[8] 이전 기록은 미야모토 신야의 59홈런, 참고로 미야모토는 2000안타 달성 이후 3홈런을 추가해 통산 62홈런을 기록한 후 은퇴했다.[9] 5홈런조차도 친 적이 없다. 홈런 커리어하이는 2001, 2008년의 각 4홈런.[10] 커리어하이는 2004년의 44타점.[11] 2루타 275개, 3루타 27개 포함[12] 2000안타 달성자 중 타율 최하위는 오랜 기간 아라키와 팀메이트였던 포수 타니시게 모토노부.240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