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니치 드래곤즈 (r20220720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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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의 프로야구단. 연고지는 아이치현 나고야시. 소유주는 주니치 신문사 (中日新聞社 )[2] , 홈구장은 나고야 돔.
1936년 일본프로야구 원년부터 지금까지 존속하고 있는 4개 팀[3] 중 하나로 주부 지방을 대표하는 센트럴리그의 강호이자 인기 팀이었고, 한때 리그에서 요미우리와 더불어 유이하게 비밀번호를 기록하지 않은 팀이었지만, 세대교체에 실패한 2010년대 중반부터는 요코하마와 히로시마로부터 센트럴 리그 공식 최약체를 물러받은 팀으로 침체기에 빠져있다.
원래 팀 컬러는 일명 '공룡타선' 이라고 불리던, 나고야돔에 비해 작은 구장인 나고야 구장에서 홈런을 양산하는 스타일이었다. 당장에 구단 레전드만 보더라도 에토 신이치, 오시마 야스노리, 야자와 켄이치, 우노 마사루, 오치아이 히로미츠, 타이호 야스아키 등 강타자들이 다수 떠오를 정도. 그러나, 1997년에 현재의 홈 구장인 무식하게 넓은 나고야 돔[4] 을 홈 구장으로 쓰기 시작하면서 이후 1년의 조정기간을 거친 뒤 팀을 순식간에 수비적인 투수중심으로 재편하였다. 현재는 일본프로야구 12구단 중 가장 수비적인 야구를 하는 팀이 되었으며, 이러한 수비적인 팀 컬러는 호시노 센이치 감독이 정립한 이래 오치아이 히로미츠 감독을 거쳐 완성되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상술했듯 팀 컬러부터가 수비를 매우 중시하는 스타일이며, 홈 구장인 나고야돔의 그라운드 크기가 잠실야구장보다 약간 작게 나오니 안 그래도 점수가 적게 나오는 편인 일본프로야구 구단들 중에서도 점수가 적은 경기가 자주 나오며, 이러한 이유 때문에 국내에서는 간간히 FC 주니치라는 별명으로도 불리고 있다.[5]
이러한 수비적 팀 컬러의 영향으로 2000년대 중반, 오치아이 감독이 집권하던 시기에는 투수진의 경우 다른 팀에 갈 경우 당장 에이스에서 못해도 2, 3선발쯤은 할 것 같은 선수들이 중계 혹은 2군 대기 중일 수준으로 탄탄하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야수진은 전 포지션이 골든글러브 후보로 꼽힐 정도로 야수진 또한 막강했다. 하지만 현재는 그 당시의 중심선수들의 대체자원을 구하지 못하며 세대교체에 완전히 실패했고, 그로 인해 2010년대 중반에는 과거에 압살했던 히로시마 도요 카프나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에게도 밀리는 약팀의 자리에 머물게 되었다.
참고로 1990년대 한국인들에게 가장 친근한 일본프로야구 구단이였다. 이유는 선동열, 이상훈, 이병규, 이종범 등 많은 한국인 선수가 이 팀을 거쳐갔기 때문. 그리고 1982년, 한국에서 MBC 청룡이 창단하자 같은 '드래곤팀' 이라는 이유로 서로 자매구단 결연을 맺기도 했으며, 이는 MBC가 LG가 된 이후에도 계속해서 인연이 유지되고 있는 중이다. 또한, 1987년부터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와도 제휴 중. 당장 본 문서에 나와있는 주니치 드래곤즈의 로고도 다저스의 로고와 같은 영어 폰트로 만들어져 있는 것이다.
1936년 일본프로야구 원년부터 지금까지 존속하고 있는 4개 팀[3] 중 하나로 주부 지방을 대표하는 센트럴리그의 강호이자 인기 팀이었고, 한때 리그에서 요미우리와 더불어 유이하게 비밀번호를 기록하지 않은 팀이었지만, 세대교체에 실패한 2010년대 중반부터는 요코하마와 히로시마로부터 센트럴 리그 공식 최약체를 물러받은 팀으로 침체기에 빠져있다.
원래 팀 컬러는 일명 '공룡타선' 이라고 불리던, 나고야돔에 비해 작은 구장인 나고야 구장에서 홈런을 양산하는 스타일이었다. 당장에 구단 레전드만 보더라도 에토 신이치, 오시마 야스노리, 야자와 켄이치, 우노 마사루, 오치아이 히로미츠, 타이호 야스아키 등 강타자들이 다수 떠오를 정도. 그러나, 1997년에 현재의 홈 구장인 무식하게 넓은 나고야 돔[4] 을 홈 구장으로 쓰기 시작하면서 이후 1년의 조정기간을 거친 뒤 팀을 순식간에 수비적인 투수중심으로 재편하였다. 현재는 일본프로야구 12구단 중 가장 수비적인 야구를 하는 팀이 되었으며, 이러한 수비적인 팀 컬러는 호시노 센이치 감독이 정립한 이래 오치아이 히로미츠 감독을 거쳐 완성되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상술했듯 팀 컬러부터가 수비를 매우 중시하는 스타일이며, 홈 구장인 나고야돔의 그라운드 크기가 잠실야구장보다 약간 작게 나오니 안 그래도 점수가 적게 나오는 편인 일본프로야구 구단들 중에서도 점수가 적은 경기가 자주 나오며, 이러한 이유 때문에 국내에서는 간간히 FC 주니치라는 별명으로도 불리고 있다.[5]
이러한 수비적 팀 컬러의 영향으로 2000년대 중반, 오치아이 감독이 집권하던 시기에는 투수진의 경우 다른 팀에 갈 경우 당장 에이스에서 못해도 2, 3선발쯤은 할 것 같은 선수들이 중계 혹은 2군 대기 중일 수준으로 탄탄하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야수진은 전 포지션이 골든글러브 후보로 꼽힐 정도로 야수진 또한 막강했다. 하지만 현재는 그 당시의 중심선수들의 대체자원을 구하지 못하며 세대교체에 완전히 실패했고, 그로 인해 2010년대 중반에는 과거에 압살했던 히로시마 도요 카프나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에게도 밀리는 약팀의 자리에 머물게 되었다.
참고로 1990년대 한국인들에게 가장 친근한 일본프로야구 구단이였다. 이유는 선동열, 이상훈, 이병규, 이종범 등 많은 한국인 선수가 이 팀을 거쳐갔기 때문. 그리고 1982년, 한국에서 MBC 청룡이 창단하자 같은 '드래곤팀' 이라는 이유로 서로 자매구단 결연을 맺기도 했으며, 이는 MBC가 LG가 된 이후에도 계속해서 인연이 유지되고 있는 중이다. 또한, 1987년부터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와도 제휴 중. 당장 본 문서에 나와있는 주니치 드래곤즈의 로고도 다저스의 로고와 같은 영어 폰트로 만들어져 있는 것이다.
2. 구단 역사[편집]
3. 관중수 추이[편집]
주부 지방을 대표하는 야구팀답게, 팀이 암흑기에 빠져도 2만 7~8천명대의 평관을 유지하는 반면, 팀이 방어율왕 오노 유다이를 배출하고 시즌 후반부까지 3위 싸움을 벌이며 비밀번호를 탈출하느냐 마느냐로 팬들을 들었다놨다 했던 2019시즌도 3만1천명대로 크게 관중이 늘지 않는다.
일본프로야구 창단부터 주부의 나고야에서 연고지를 한 번도 옮기지 않은 데다가 스폰서도 나고야 지방지인 주니치 신문으로 지역색이 굉장히 강한 팀이라, 아무리 팀이 못 해도 지역을 베이스로 한 콘크리트가 워낙 튼튼해서 관중수가 크게 줄어들지 않는 반면 반대로 아무리 잘 해도 나고야 이외에는 팬이 생기기 힘든 구조로 되어 있어 크게 늘어나지 않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비슷하게 세리그 지방연고팀인 한신은 훨씬 인구가 많은 간사이권 전지역+안티 교진 성향의 팬들을 팬베이스 삼고 있어서 밥그릇 자체가 훨씬 큰데다가 확장성까지 있고, 히로시마 카프나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같은 경우 인터넷이나 방송 등을 통한 적극적인 마케팅으로 지역을 넘어 팬덤을 확장시켰으며, 파리그는 아예 리그가 단체로 뭉쳐 합심해 팬덤을 확장하는 식으로 나가는데 주니치는 경영이 일본에서 가장 보수적인 팀 중 하나로 저렇게 언제나 크게 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줄지도 않는 팬덤 숫자를 유지하고 있다. 근데 그렇게 운영해도 아이치를 꽉 쥐고 있어[6] 평관수는 일본프로야구 상위권이라 밥그릇 걱정이 없으니 더더욱 보수적인 경영 일변도로 일관하는 구단. 덕분에 일본내에서 주니치 응원하는 사람=100% 나고야 출신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4. 홈 구장[편집]
5. 유니폼[편집]
6. 응원[편집]
7. 마스코트[편집]

이 팀의 마스코트인 코알라 도아라가 서브컬쳐계에서 컬트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 pixiv에서도 도아라의 팬아트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으며 심지어 figma브랜드의 액션피규어로 출시되기까지 했다. 말 못하는 마스코트가 TV, 라디오에 나오고.. 광고는 물론 책에 음반까지 냈다. 관련상품 중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전 구단 통틀어서 상위권의 인기 캐릭터.[7] 4차원적인 행동 등으로 이상하지만 귀엽긴 하다 라는 반응이 대다수. 하지만 그 역시 2013년 오프시즌의 연봉삭감 바람을 피할 수는 없었다. 시즌 도중 왼손 중지가 골절되는 바람에 퍼포먼스를 할 수 없게 되어 연봉이 식빵 1kg에서 750g으로(...) 25% 삭감되었다고 한다.기자회견 기사
DJ 도아라라는 명의로 음반도 냈는데... 곡조가 너무 노골적이라 "설마 걔가 만든거 아님??" 생각했고 그 분의 새 앨범에 수록이 되어서 빼도 박도 못하게 이 분 제대로 확정.
인터리그 기간 동안에는 도아라가 퍼시픽리그 팀 상징 동물들을 약올리는 광고를 내기도 한다.
야쿠르트 스왈로즈 마스코트인 츠바쿠로 에이전트(...)이기도 하다.
얘 말고도 샤오롱과 파오롱[9] 이라는 용에서 모티브를 따온 애들도 있다.
8. 이모저모[편집]
8.1. 일본프로야구 대표 콩라인[편집]
일본에서 주니치의 이미지는 만년 2위팀.
이는 통계로도 증명되는데, 이 팀은 창단 이후 전체 역사에서 2위만 26번, 1950년에 일본프로야구가 양대(2)리그제가 된 이후의 기간만 따지면 센트럴리그 2위만 무려 24번 을 해먹었다. 이는 12개 구단 중 최다 2위 기록. 하지만 의외로 20세기 전체 승률은 놀랍게도일본시리즈 우승도 한 번밖에 못한한신 타이거스에 밀려서 3위이다. 1위야 요미우리 자이언츠다.
사실 세리그 전통의 강호이지만. 맨날 중요할 때 2위만 해대는 통에 리그 우승 경험도 강호의 이미지에 비해서는 매우 적다. 그것이 실제로 실현된 건 오치아이 히로미츠 감독 아래 4번 리그 우승을 하기 이전까지 1954년, 1974년, 1982년, 1988년, 1999년의 단 다섯 번 뿐. 숙명의 라이벌 요미우리 자이언츠에게 홈에서 리그 우승을 내준 뼈아픈 기억도 자주 있다.(...). 1994년의 10.8 결전이나, 1996년 10월 6일 나고야 구장 최종전에서 패배하며 요미우리에게 11.5게임차를 뒤집는 역전 우승[10] 을 확정지어주는 등 통한의 순간들이 적잖이 있었다.[11]
거기다 중요한 게임에 상당히 약해서, 일본시리즈 진출 횟수는 10번인데 우승 횟수는 고작 2번 뿐이다. 그나마도 두 번째로 우승했던 2007년 시즌[12] 의 경우 1위로 진출한 것도 아니고 2위로 리그를 끝낸 뒤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 1위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발라버리고 올라간 것이 일본시리즈 우승까지 연결된 것[13] . 만년 2위 팀의 명성에 걸맞는 행보였다(...). 팀 첫 번째 일본시리즈 우승이 1954년이었으니 다음 우승까지 53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그러나 이런 얘기도 다 잘나가던 예전에 하던 배부른 소리. 2010년대 들어와서는 콩라인은 커녕 A클래스 꼴찌선인 리그 3위도 힘겨울 정도로 침체기를 겪고 있다.
이는 통계로도 증명되는데, 이 팀은 창단 이후 전체 역사에서 2위만 26번, 1950년에 일본프로야구가 양대(2)리그제가 된 이후의 기간만 따지면 센트럴리그 2위만 무려 24번 을 해먹었다. 이는 12개 구단 중 최다 2위 기록. 하지만 의외로 20세기 전체 승률은 놀랍게도
사실 세리그 전통의 강호이지만. 맨날 중요할 때 2위만 해대는 통에 리그 우승 경험도 강호의 이미지에 비해서는 매우 적다. 그것이 실제로 실현된 건 오치아이 히로미츠 감독 아래 4번 리그 우승을 하기 이전까지 1954년, 1974년, 1982년, 1988년, 1999년의 단 다섯 번 뿐. 숙명의 라이벌 요미우리 자이언츠에게 홈에서 리그 우승을 내준 뼈아픈 기억도 자주 있다.(...). 1994년의 10.8 결전이나, 1996년 10월 6일 나고야 구장 최종전에서 패배하며 요미우리에게 11.5게임차를 뒤집는 역전 우승[10] 을 확정지어주는 등 통한의 순간들이 적잖이 있었다.[11]
거기다 중요한 게임에 상당히 약해서, 일본시리즈 진출 횟수는 10번인데 우승 횟수는 고작 2번 뿐이다. 그나마도 두 번째로 우승했던 2007년 시즌[12] 의 경우 1위로 진출한 것도 아니고 2위로 리그를 끝낸 뒤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 1위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발라버리고 올라간 것이 일본시리즈 우승까지 연결된 것[13] . 만년 2위 팀의 명성에 걸맞는 행보였다(...). 팀 첫 번째 일본시리즈 우승이 1954년이었으니 다음 우승까지 53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그러나 이런 얘기도 다 잘나가던 예전에 하던 배부른 소리. 2010년대 들어와서는 콩라인은 커녕 A클래스 꼴찌선인 리그 3위도 힘겨울 정도로 침체기를 겪고 있다.
8.2. 한국인 선수와의 인연[편집]
1996년 선동열이 입단한 뒤로 지속적으로 한국인 선수들과 인연을 맺어왔다. 선동열은 1년의 적응기간을 거치긴 했지만 다카쓰 신고, 사사키 카즈히로와 맞먹는 리그 정상급 마무리 투수로 활약하며 말년을 불태웠고, 그의 뒤를 따라 해태 타이거즈 후배 이종범과 LG 트윈스의 좌완 에이스 야생마 이상훈도 주니치에서 함께 뛰게 되었다. 일본프로야구의 외국인 선수 1군 출전제한이 4명인 것을 감안할 때 꽤 파격적인 선택이었고, 선동열을 제외하면 사실 완전히 기대에 부응한 것만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성적이 훌륭하다까진 아니어도 나쁘지 않은 정도였고 1999년 나고야 돔으로 옮긴 뒤 첫 리그 우승을 하는 등 당시 팀 성적과 분위기가 꽤 좋았기에 한국 삼총사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사랑받았다.
2007년부터 2009년까지 이병규 선수가 소속했다. 그러나 주니치 역대 최고의 외야수 중 하나였던 후쿠도메 고스케의 포지션을 차지한데다가, 고액을 받는 외국인 선수 치고는 성적이 신통치 않아 언론과 팬들에게 자주 까였다. 그래도 그럴 때마다 뜬금포를 날려대는 통에 참 대놓고 까기는 뭐한 미묘한 상태였다. 그래도 2007년 일본시리즈 우승에 나름 공헌하는 활약을 했고 선수들과 잘 어울리는 모습을 보이며 일부 팬들 사이에서 컬트적인 인기를 얻기도. 그러나 2009년에는 완전히 말아먹었고, 본인은 주니치와 재계약을 원한다고 했으나 결국 팀은 시즌 종료 후 재계약을 요청하지 않으며 LG 트윈스로 돌아오게 되었다.[16] 여담으로 라뱅쓰리런 드립 역시 주니치 시절에 생긴 것이다.(...)
한국 고교야구 선수인 송상훈이 2012년 일본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에서 이 팀에 6순위로 지명되어, 한국 고교야구에서 드래프트로 일본프로야구에 진출한 최초의 선수가 되었다. 그러나 입단 1년만에 육성선수로 신분이 바뀌었으며 2014 시즌 종료 후 방출되었다. 이후 한국 선수와의 인연은 끊어진 상황.
다만 요다 츠요시 감독이 2019시즌 종료 후 '과거 주니치는 한국 선수들이 도왔다'면서 한국야구에서 새 전력을 찾아보겠다고 언급. 11월에 개최될 프리미어12에서 한국을 시찰하겠다는 뜻을 내비치기도 했다. 뒤이어 주니치에서 선수생활을 했던 이종범이 주니치에 2군 코치연수를 가게 되면서 인연이 다시 이어지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8.3. 기타 이야깃거리[편집]
[17]
- 구단의 대표적인 응원가로 "燃えよドラゴンズ"(타올라라 드래곤즈)'가 있다.
그래서인지 실제로 홈구장이 불타 없어졌다.(...) 자세한건 주니치 스타디움참고.주니치가 교진군의 센트럴리그 - 일본시리즈 10연패를 저지한 1974년 나고야 지역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처음 만들어진 것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지금까지도 즐겨 불러지는 응원가로 자리잡았다. 제목은 당시 일본에 개봉해 인기를 끌던 이소룡 주연의 영화 용쟁호투가 일본에서 '불타라 드래곤' 으로 소개된 것에서 따온 것이다. 주니치에도 정식 구단가는 있지만[18] 타올라라 드래곤즈의 인기 때문에 구단가는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수준.
- 원본인 74년판 이외에도 거의 해마다 새로 녹음되었을 정도로 버전이 많은데, 선동열-이상훈-이종범 한국인 3총사를 데리고 리그 우승을 한 1999년판 중에는 한국삼총사 헌정 버전도 찾아볼 수 있다.# 여담으로 이 곡을 작곡한 야마모토 마사유키(山本正之)라는 사람은 첫 작곡이었던 이 곡이 인기를 얻은 후, 타임보칸의 주제가를 작곡하는 등 애니송 작곡가로서 경력을 이어나갔다. 그래서인지 애니송 가수가 맡는 일이 많아 1987년에는 타이라 이사오(#)가, 2002년 이후로는 미즈키 이치로가 보컬을 담당하고 있다. 한편 실제 구장에서 트는 구장합창편에서는 2, 3절에 타팀을 약하게 조롱하는 가사가 들어가 있다. 잘 들으면 상대 팀명이 우회적으로 들어가 있다.[19] 이 때문에 원정경기에서 트는 버전은 1절에서 중간을 싹 건너뛰고 곧바로 마지막 절로 건너뛴다.
- 등번호 관련해서 재미있는 점이 있는데, 보통 일본 야구계에서 투수 에이스의 등번호가 18번[20] 인데 비해 이 팀은 20번이 에이스 번호로 여겨진다.
그러니 맨날 2위지스기시타 시게루, 곤도 히로시, 호시노 센이치, 고마츠 다츠오 등이 달았고 선동열도 주니치에서 현역시기에 20번을 달고 활동했을 정도. 게다가 보통 에이스 넘버인 18번의 취급이 매우 안습인데, 역대 투수들 중 18번을 달고 제대로 활약한 사람이 매우 드물다. 그래서 다른 팀에서 트레이드된 선수나 드래프트 하위 순위에 입단한 신인한테 18번을 냅다 던져준다. 오죽하면 '실력은 없는데 18번을 달고 싶으면 주니치로 가라'는 농담 아닌 농담이 있을 정도. 2019년까지는 마쓰자카 다이스케가이름값으로달고 있다가 현재는 결번.
- 톰 셀렉, 타카쿠라 켄이 주연한 영화 '미스터 베이스볼'의 소재로 다뤄졌다. 톰 셀렉이 분한 강타자가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서 활약하다 일본프로야구에서 뛰게 된다는 스포츠 영화인데, 영화에서 셀렉이 소속해 뛰는 팀이 주니치. 타카쿠라 켄은 감독 역으로 분한다. 여담으로 영화에서 뉴욕 양키스의 주전 1루수이던 셀렉을 일본으로 밀어낸 신인 거포 역으로 출연한 배우가 바로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레전드 프랭크 토마스.
어라 양키스래매...
9. 선수단[편집]
10. 역대 선수[편집]
11. 역대 감독[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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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마치 슌이치 (1949 - 1951, 1954, 1957 - 1960)
1954년 팀 사상 최초의 일본시리즈 우승 당시 감독.
- 요나미네 카나메 (1972 - 1977)
- 다카기 모리미치 (1992 - 1995, 2012 - 2013)
주니치의 명선수였으나 감독으로선 별로 좋은 성적을 남기지 못했다. 특히 2번째 임기에서는 4456555라는 암흑기를 오픈하는 데 공헌했다...
- 호시노 센이치 (1987 - 1991, 1996 - 2001)
주니치의 에이스. 감독직을 맡으면서 2번의 리그 우승을 거두었지만 정작 일본시리즈에선(...)
- 야마다 히사시 (2002 - 2003)
한큐 브레이브스의 레전드. 호시노가 물러가면서 감독이 되었으나 2003년 성적 부진으로 시즌 도중 해임당했다.
- 오치아이 히로미츠 (2004 - 2011)
요코하마에서 이적한 이후 쭉 주니치의 안방마님이었지만 감독으로서는 B클래스를 전전하더니 19년만의 최하위를 기록했다. 참고로 주니치 역사상 최초로 A클래스에 간 적이 없는 감독이란 아름다운 기록을 남기셨다.
- 모리 시게카즈 (2016 ‐ 2018)
위의 다니시게 모토노부가 사실상 해임된 16시즌 후반부터 감독 대행을 맡았으나 팀의 최하위 추락을 저지하지 못했고, 2017 시즌엔 정식 감독이 됐으나 2017, 2018 시즌 모두 5위에 그쳤다.
- 요다 츠요시 (2019 - 2021)
2020년에 겨우겨우 3위를 기록하며 4456555로 이어지던 비밀번호를 멈췄으나 바로 다음 시즌 다시 5위로 되돌아갔다.
12. 역대 성적[편집]
12.1. 단일리그 시대[편집]
12.2. 양대리그 분리 이후[편집]
[1] 1951 시즌 중반 공식 홈구장인 주니치 구장(나고야 구장)이 불타 없어졌다.[2] 일본의 지방 신문사이지만 2013년 기준 일 평균 250만부 이상을 발행하는 신문이고 여러 지방 TV 방송국 및 라디오 방송국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방송계의 큰손이기도 하다. 특히 후지 TV 계열국 주식을 많이 보유하고 있어서, 네트워크 내에서도 산케이 못지 않은 영향력을 보유 중. 산케이 신문보다 발행부수가 많고 도쿄와 오사카에 있는 신문사 이외에는 가장 규모가 크기 때문에 전국지에 필적하는 영향력을 갖는다. 논조는 일본에서도 비교적 진보 성향. 하지만 나고야에 공장이 있는 토요타에는 따뜻하겠지 주니치 신문사의 소유 구단이기 때문에 주니치 계열 방송사인 THK, CBC, TVA가 홈 경기 중계권을 보유하고 있다. 나머지 NBN, CTV는 자체제작 중계가 아닌 키국 중계를 사용해 원정 경기를 방송한다. 라디오는 CBC, 도카이라디오가 중계권을 보유하는 중. 지상파가 아닌 위성방송(CS)에서는 J스포츠가 중계를 맡고 있다.[3] 나머지는 요미우리 자이언츠, 한신 타이거스, 오릭스 버팔로즈.[4] 좌우 100m, 가운데 122m, 펜스높이 4.8m[5] 그리나 비밀번호를 찍기 시작하고 있는 최근 시점에선 홈에서도 요미우리, 히로시마, 요코하마, 세이부, 소프트뱅크같이 핸드볼 야구를 하는 팀들에게도 밥먹듯이 10실점 이상을 내주는 경기가 속출하고 있다.[6] 주니치의 팬베이스인 아이치현 + 주변지방(기후현, 미에현, 시즈오카현 서부)을 더하면 대략 경상도 인구수 전체와 비슷하다. 한국은 경상도를 3개 구단이 나눠먹으면서도 개중 가장 큰 롯데가 빅마켓 소리를 듣는 것을 생각하면 주니치가 얼마나 큰 마켓을 독점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7] 요즘은 오릭스 버팔로스가 위협하고 있다.[8] 언급된 Second Heaven도 소프트뱅크의 패배에 아쉬워서 만든 곡이다.[9] 처음에는 샤오롱의 여동생이라는 설정이었으나 나중에 샤오롱이 파오롱을 '여동생이 아니라 그냥 친구 관계'라고 표현하기도 했고, 현재는 샤오롱과 '남매로도, 친구로도 불려질 수 있는 이상한 관계'(兄妹とも友達とも言われている不思議な関係)라는 설정으로 바뀌었다. 현재 샤오롱과 파오롱은 현재 공식 설정에서 성별 불명이라고 나와있다.[10] 이는 '메이크 드라마'라고 불리며 요미우리 팬들에게 역사적인 시즌으로 남았다. 다만 일본시리즈 우승기는 오기 아키라 감독이 이끌고 스즈키 이치로 등이 날뛰던 오릭스 블루웨이브에게 내주었다.[11] 공교롭게도 이 두 경기 모두에서 당시 요미우리의 중심선수이던 오치아이 히로미츠가 활약했다. 오치아이가 끝내 감독으로서 주니치의 콩라인 탈출을 이끌어낸 걸 생각하면 아이러니.[12] 일본시리즈 타이틀을 확정짓는 경기에서 일본프로야구 사상 초유의 합작 퍼펙트 게임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선발 야마이 다이스케가 8회까지 무안타 무사사구 무실점을 기록하며 퍼펙트게임 직전까지 던졌지만 오치아이 히로미츠 감독은 9회에 야마이를 내리고 마무리 이와세 히토키를 올렸는데, 이는 일본 내에서도 논란이 많았다.[13] 참고로 이 당시 이승엽과 이병규의 맞대결이란 구도까지 생겼던 것으로 유명했다.[14] 99년 세리그 우승 당시 선동열,이종범,이상훈에게 헌정된 한국 삼총사ver. 타올라라 드래곤즈. 초반에 라인업이 소개된 후, 다른 노래와 달리 세 선수의 모습을 묘사하는 가사가 등장한다.[15] 구단으로서는 53년만의 우승이었고, 본인도 프로 커리어 첫 우승이었다. 그리고 크보에서는 우승을 못 했다[16] 이병규 선수 본인도 한국 복귀시 '방출당한 게 아니라 그냥 재계약을 하지 않은 것 뿐이다.'라고 웃으면서 얘기했다고.[17] 처음 곡인 74년도판. 부른 사람은 밑에도 나오지만 주니치 드래곤즈의 에이스 투수로 활약했고 지금은 예능인으로 활발히 활동 중인 반도 에이지.[18] 현재 사용중인 세번째 구단가는 2015년에 발표된 昇竜 -いざゆけ ドラゴンズ-(승룡 -나아가자 드래곤즈-, 노래는 마츠다이라 켄)이다. 한편 초대 구단가 '드래곤즈의 노래'(1950~1977)는 한신 타이거스의 구단가 롯코오로시,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1-3대 구단가 거인군의 노래와 투혼을 담아서를 작곡하기도 한 고세키 유지의 작품이다.[19] 2절은 센트럴 리그 팀들 호랑이를 쓰러뜨리고(虎を倒して) 잉어를 낚고(鯉を釣って) 하마의 별자리에 먹구름을 끼게만들고(浜の星座に雲をかけ) 제비를 떨어뜨려(燕落として) 큰 남자의 숨통을 끊어 이겨나간다 (大男息の根とめて勝ち進め) 3절은 퍼시픽리그 팀들 사자를 붙잡고(獅子を捕まえ) 매를 잡아(鷹を狩り) 성난 소들을 길들여(猛牛馴らして) 바다를 건너(海を越え) 북쪽의 전사도 (北の闘士も) 독수리도 (犬鷲も) 용이 제압해 굴복시켜 이겨나간다(竜がねじ伏せ勝ち進め)[20] 사실 이것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시작된 관습이다.[21] 2014,2015시즌은 선수 겸임. 2016부터 감독 전임이 되지만 도중 해임.[22] 볼드체는 일본시리즈 우승[23] 3개의 리그로 나누어 열었고 일부 팀들의 미국 원정 및 중도 하차로 우승팀 없음.[24] 3개의 토너먼트로 나누어 열었고 도쿄 대회에서 우승해 승점을 따냈으나 우승팀을 결정할 플레이오프의 경기장을 구하지 못해 우승팀 없음.[25] 리그 도쿄 대회 오사카 타이거스와 공동 우승. 승점 0.5점으로 연도 우승 결정전 진출 실패.[26] 연도 우승 결정전 진출 실패로 최종 순위 없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