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하지야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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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3. 전쟁
4. 결말
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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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조지아압하지야 독립 세력 사이에서 1년간 일어난 내전. 조지아 내전의 일부다.

2. 배경[편집]


아직 소련 붕괴 전인 1989년 11월 23일 즈비아드 감사후르디아는 남오세티야 자치주의 주도인 츠힌발리에서 일어날 조지아인들의 반소련, 민족주의적 성격의 시위를 조직했다. 그러나 당시 남오세티아 자치주 주민의 다수를 차지한 친소 성향의 오세트인들은 여기에 협조하지 않고 이것을 막았다. 이때부터 조지아인과 오세트인 사이에서 격렬한 충돌이 일어나 여러 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이후 몇 달 동안 오세트인들은 무장하기 시작했다.

1991년 말 소련 붕괴와 함께 조지아는 당시 최고 의원회 의장이었던 즈비아드 감사후르디아가 초대 대통령이 되면서 다시 독립국이 되었다. 감사후르디아는 탈소련 정책을 펼치면서 남오세티야압하지야의 분리주의자들을 폭도와 테러리스트로 간주하여 이들을 학살하는 등의 인권유린을 자행했고 러시아군의 철수를 요구했지만 러시아군 철수 요구는 기각되고 인권 유린 문제는 국제적으로 지탄받았다.

이미 1991년 초부터 감사후르디아가 조지아와 남오세티야 간의 전쟁을 일으켰고 이에 반발한 조지아 내의 군부와 반정부 세력들도 감사후르디아 정부에 반대하는 시위를 했으나 감사후르디아 정부가 무자비하게 진압하자 반정부 세력이 결집하였으며 마침내 1991년 12월에 반정부 세력이 조지아 쿠데타를 일으켜서 감사후르디아와 정부 주요 인사들을 추방시켰다.

조지아 쿠데타 이후 압하지야의 분리주의자들도 남오세티야의 세력처럼 러시아의 지원을 받고 무장 투쟁을 시작하여 1992년 8월 14일에 전쟁이 일어났다.

3. 전쟁[편집]


개전 이후 조지아는 경찰과 국가근위대 병력, 일부 죄수들을 석방 조건으로 입대시켜 압하지야로 파견했고 일개 반군 세력에 불과하던 압하지야 수뇌부는 조지아군에게 밀려 전쟁이 시작된지 고작 나흘밖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수후미에서 구다우타로 피신해야 했다. 이때 구다우타를 제외한 거의 모든 압하지야 땅은 다시 조지아의 통제 하에 들어갔고 수후미를 포함한 압하지야 도시와 마을에선 비조지아인을 표적으로 한 살인과 폭행, 약탈 등이 조지아군에 의해 이루어졌다. 1992년 9월 3일 모스크바에서 양측의 합의하에 휴전 협정이 체결되면서 조지아는 협정에 따라 흑해 지역에 위치한 압하지야 도시 가그라에서 우선 철수했다.

이러한 기회를 놓치지 않은 압하지야측은 협정을 깨고 러시아로부터 T-72 전차, BM-21 다연장로켓, Su-25를 포함한 각종 군수물자들을 지원받아 무방비 상태에 놓인 가그라를 공격하였고 거기에 북캅카스의 КГНК(캅카스 산악민족연합), 카자크 의용군, 아르메니아인 의용군[1]들까지 주축이 되어 합세하면서 조지아의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러시아와 북캅카스 출신 의용군의 지원에 힘을 입은 압하지야는 기세를 몰아 조지아가 차지했던 가그라와 구다우타, 더 나아가 수후미까지 점령하면서 조지아는 압하지야에 대한 통제권을 사실상 잃어버렸고 1993년 9월 27일 전쟁은 압하지야의 승리로 끝났다.

3.1. 전쟁범죄[편집]



3.1.1. 조지아[편집]


비록 전쟁범죄의 스케일은 압하지야 측이 훨씬 크게 벌였지만, 적어도 조지아에 우세하던 전쟁 초기에는 조지아 측의 전쟁범죄도 심각했다.[2] 조지아군은 압하지야 영역으로 진군하여 점령지 내의 비조지아인들에게 잔혹행위를 벌였으며 이는 당초 중립을 유지하고자 했던 비압하스계 주민들마저 반군에 가담케 할 정도였다.

처음에 우리는 가만히 있으려고 했지만, 조지아인이 아르메니아인을 지나치게 학대했으므로 우리는 압하스인들을 지원해야 했다. 조지아인은 집에 난입하고 도둑질하며 사람을 고문한다. 라브라(Labra)에서 그들은 구멍뚫린 의자에 부부 한 쌍을 앉히고 산채로 불태웠다. 그들은 여자를 강간했다. 중립을 유지하기는 불가능했다.

"ABKHAZIA ARMENIANS: HOLDING A HOME IN AN UNSTABLE TERRITORY". Armenian General Benevolent Union. 1 November 2004.

실제로 압하지야의 비조지아계 및 비압하스계 소수민족들은 대체로 압하지야 분리주의자들을 지지한 편이다. 예를 들어 전쟁 당시 압하지야 분리주의자의 군대의 주력 부대 중 하나인 바그라먄 대대는 아르메니아인 1,500명으로 구성되었는데 이 병력은 분리주의자 군대의 30%를 차지했다. 20명의 아르메니아인이 최고 훈격을 지닌 압하지야 영웅 훈장(Hero of Abkhazia)을 수여받았고 242명이 전사했다.

3.1.2. 압하지야[편집]


압하지야군이 어린 소녀 하나를 붙잡았는데, 얘는 살해당한 부모의 집 근처 덤불 속에 숨어있었죠.

아이는 여러 번이나 강간당하곤 군인들 중 하나에게 살해당한 다음 난도질을 당했습니다.

반으로 토막당했는데 군인들이 메세지를 남긴 거였죠. 소녀의 시체는 결코 하나가 되지 않는 것처럼 조지아와 압하지야 또한 결코 통일되지 않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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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하지야 전쟁에서 살아남은 한 조지아 노인의 증언.

전쟁 기간 동안 압하지야 곳곳에 거주하던 5,000~5,738명의 조지아인들이 살해당했고, 20~25만여 명의 실향민들이 발생했다.

가그라에선 조지아인 청소년과 어린이들이 조직적으로 살해당했고 여자들은 나이 상관없이 압하지야 무장세력에게 붙잡혀 강간고문을 당했다. 훗날 러시아에서 온갖 테러로 악명을 떨치던 테러리스트 샤밀 바사예프[3] 지휘하는 체첸인 부대는 가그라에서 승리를 거둔 이후 조지아군 포로 100명을 참수한 다음 그 머리로 공놀이를 하는 끔찍한 짓을 저질렀다.[4]

수후미에선 압하지야군과 북캅카스 의용군에 의해 1,000여 명의 조지아인들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학살당하는 참변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4. 결말[편집]


압하지야 독립세력은 남오세티야처럼 승리하여 조지아로부터 독립적인 주권을 확보하였으나 미승인국가로 남았다. 러시아는 압하지야를 조지아의 영토로 명목상 인정했으나 2008년 전쟁 이후에는 그마저 무시하고 압하지야를 주권국으로 승인했다.

5.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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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바그라먄 대대(Батальон имени Баграмяна). 압하지야는 아르메니아인이 다수 거주하는 곳으로 1989년 당시 비중이 14.6%에 달했다. 오늘날에도 압하지야인은 전체 인구의 17.4%를 차지한다.[2] 당장 조지아군 일부는 형벌부대였고 심지어 갱단이 참여한 경우도 있었다. 조지아군 사령부가 의도적으로 범죄를 계획하거나 실행하진 않았을지라도 이렇게 질 나쁜 군대를 적 영역에 들이밀었을 경우 어떤 범죄가 자행되었을지는 짐작하고도 남으리라.[3] 이후 베슬란 학교 인질사건을 일으켜 당시 독립운동으로 국외에서 이미지가 나름 괜찮았던 체첸을 피에 굶주린 미치광이 살인마 소굴로 인식을 곤두박질치게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4] 이후 조지아군들은 체첸군이 나타났다는 얘기만 들리면 싸워 보지도 않고 그대로 달아나는 모습을 보였다는 기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