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히 코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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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국가판무관
오스트란트 국가판무관
에리히 코흐
Erich Ko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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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96년 6월 19일
독일 제국 엘버펠트
사망
1986년 11월 12일 (향년 90세)
폴란드 인민공화국 바르체보
정당


최종 계급
슈투름압타일룽 대장 (상급집단지도자)
1. 개요
2. 생애
3. 여담



1. 개요[편집]


나치 독일정치인. 독소전쟁 시기 우크라이나 국가판무관부의 국가판무관으로 임명되어 점령지에서 가혹한 통치를 일삼았다.


2. 생애[편집]


1896년 독일 제국 엘버펠트에서 출생하였다. 1922년에 나치당에 가입하였으며, 그레고어 슈트라서가 이끄는 분파의 조직원이었다. 하지만 이 이력 때문에 직장을 잃게 되었고, 나치당 활동에 더욱 전념하여 1928년에는 동프로이센의 대관구지휘자(Gauleiter)가 되었다.[1] 동프로이센 대관구지휘자 시기 동안 집단농장 정책을 시행하였으며 실제로는 농민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나 실업률을 낮추는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동프로이센에서 이러한 정책을 전면적으로 시행하면서 정책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탄압하였다. 이 시기에 코흐는 요제프 괴벨스가 사람들의 짜내는 방법과 다루는 방법을 안다고 평가하기도 하는 등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농업정책의 급진적 시행 과정에서 당 내 여러 인물들과 갈등[2]이 많았지만 점차 명성을 쌓아올렸으며, 제2차 세계 대전 동안에는 동프로이센의 지방 장관에까지 올랐다.

1939년에는 단치히-서프로이센 지방장관으로 발령되었으며, 1941년에는 우크라이나 국가판무관부의 국가판무관으로 부임하여 질서경찰, 게슈타포를 동원하여 가혹한 통치를 일삼았다. 특히 특히 독일인이 우크라이나에서의 지배 종족임을 강조하면서 우크라이나에서의 정책들이 그들의 안정이나 발전을 위한 것이 아닌 독일의 對소련 전쟁을 위한 기반이 되어야함을 강조하였다.

때문에 우크라이나 지역의 대학수립이나 농지개혁 등의 온건한 방식의 통치를 주장하였던 알프레트 로젠베르크와 대립하였다. 이와 반대였던 코흐는 아돌프 히틀러의 지지를 받았고 있었으며, 우크라이나 국가판무관으로 부임하자마자 우크라이나의 교육시설을 모두 폐지하고 독일인에 의한 경찰통치를 시행하였다. 알베르트 슈페어 또한 코흐의 정책이 우크라이나인들의 반발을 이끌어내어 파르티잔 활동을 증가시켰다고 보았으며, 실제로도 점령 초기까지만 하더라도 독일군을 해방자 정도로 이해했던 사람들도 많았다.

1944년, 쿠르스크 전투에서의 패배 이후 우크라이나를 상실하게되면서 우크라이나 국가판무관부와 코흐의 통치는 끝나게 되었고 오스트란트 국가판무관부 국가판무관을 맡았다가 이후 동프로이센 지방장관으로 돌아갔다. 전후 연합군을 피해다니면서 잠수정을 타고 남미로 도주하려고 하였으나 1949년 함부르크에서 체포되었다. 소련으로 송환되지 않고 단치히-서프로이센 지방 장관시절의 72,000명을 처형하고 20만명을 강제수용소로 보낸 혐의[3]폴란드 인민공화국으로 인도되었으며, 1959년 사형을 선고 받았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수백만명의 폴란드, 우크라이나인을 학살한 것에 반해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는 점으로 인해서 예카테리나 궁전호박방에 대한 정보를 비롯하여 나치가 약탈한 문화재에 대한 정보를 갖고 있기 때문이라는 소문도 무성하였다. 하지만 1984년의 인터뷰에서 사실이 아니라고 밝히기도 했다.

폴란드 바르체보의 감옥에서 1986년에 90세로 옥사하였다.

현대까지 오래 살아있었던 탓에 유튜브에 관련 인터뷰 영상이 많다.




3. 여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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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진의 칼라장이 대관구지휘자의 칼라장이다.[2] 돌격대 소속이었기 때문에 힘러와도 갈등이 있었다.[3] 우크라이나에서의 학살 혐의는 기소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