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선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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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약력
3. 한국에서의 활동
3.1. 'GEN' 운동 전개
3.2. 음악가
4. 아프리카에서의 활동 (1982년 이후)
4.1. 케냐에서 2년, 그리고 다시 수단 공화국(Sudan)으로
4.1.1. '100개 마을학교 건립 운동' 전개
4.1.1.1. 2012년 5월 방한
4.1.1.2. 2014년 방한
4.1.1.3. 2019년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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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이탈리아 출신 살레시오 수도회 수사신부.[1] 세례명은 빈첸시오, 이탈리아 이름은 빈첸초 도나티(Vincenzo Donati).

2. 약력[편집]




3. 한국에서의 활동[편집]


원선오 신부는 1928년 이탈리아 중부 파노에서 출생하여 살레시오 수도회에 입회, 1944년 첫 서원을 하고, 1950년 일본 선교사로 파견되었다. 이후 1954년 일본 도쿄에서 사제서품을 받았다.

또한 1962.3.30. 35세에 일본 관구에서 한국에 지원 입국한 이후,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대림동 살레시오 수도회 한국관구 본원의 1년 생활을 제외한 19년 동안 광주광역시 북구 중흥동 371번지에 있던 당시 살레시오중학교살레시오고등학교[2]에서 교감과 성무감(교목: 학생 생활지도 및 상담)으로 재임하며 학생들을 지도하였다. 아코디언을 능숙하게 즐겨 연주하던 원선오 신부는 재학생들에게 성경 공부를 지도하는 중에 틈틈이 <나는 포도나무요> 등의 수 많은 성가를 직접 작곡하여 재학생들을 대상으로 가르쳤다.

재임기간에는 세계 132국에 '살레시오(SALESIO)'란 같은 이름으로 있는 세계 살레시오 학교의 동창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한국 살레시오 동창회 창립에 헌신적으로 노력하며 동창회지 <벗>을 직접 창간하여 한국 살레시오중고등학교 동창회 조직의 기틀을 만들었다.

원선오 신부는 19년 동안 한국에서의 활동을 마치고 55세인 1982년에 아프리카 케냐 선교사로 한국을 떠나게 되었다. 떠나시며 정든 한국을 뒤로 하면서 김포공항에서 눈물을 흘리셨다고 한다. 6.25 전쟁을 겪으며 어려움을 겪었던 한국은 이제 안정을 찾았다고 보고, 자신을 더욱 더 필요로 하는 곳은 열악한 아프리카라고 판단하였다고 한다.

요즘 감각으로 보면 그때 아프리카로 간 것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인가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다. 요즘 55세이면 중년의 한창 나이라 어디 가서 나이 들먹일 수 없지만, 1980년대 초반 대한민국은 평균수명이 60대 초반 정도라서 환갑 잔치(우리 나이로 61세)를 크게 치루던 시기였다. 55살이면 노년기에 진입했고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 밑천 삼아 여생을 편하게 지내겠다고 하여 특별히 비난 받을 시절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원선호 신부는 더 어려운 친구를 찾아 개나리 봇짐 [3] 지고 아프리카로 떠났다.

살레시오 중고등학교 출신의 졸업생 수천 명이 기억하는 원 신부는, 학교 정문 앞의 사비오상 앞에서 오직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아침에 등교하는 학생들을 기다리며 서 있는 인자한 모습으로 각인되어 있다. 아침 교정에 등교하는 그 많은 전교생들의 이름을 하나씩 외워 일일이 이름을는 친근하게 불러대며 눈 인사나 악수, 그리고 따뜻한 말로 맞이하였던 것이다. 이런 추억을 갖은 졸업생들은 졸업 이후로도 잊지 못하고 가족들에게 원선오 신부기 얘기했던 것이다.

이전 다니던 다른 학교에서는 경험해 보지 못했던 이런 ‘교문 앞 사랑’을 살레시오 출신 동문들은 잊지 못한다. 동문들은 현재 원 신부가 활동하고 있는 아프리카 수단 공화국을 돕는데 누구보다 앞장 서고 있다.

원선오 신부의 ‘교문 앞 사랑’은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살레시오 학교들[4]살레시오 수녀회가 운영하는 유치원에서는 아침이면 살레시오회 신부와 수녀는 학생들과 유아들을 기다리며 정문에 서 있다.

그 외에도 천주교 서울대교구 구로3동 성당의 필립보 신부와 루시아 수녀도 매일 아침 8시 30분이면 성당 정문 앞에 서 있다. 두 사람은 성당 바로 옆 구로남초등학교 아이들과 디지털단지로 바삐 출근하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서다. “안녕”, “안녕하십니까.”, “좋은 하루 되세요.”


3.1. 'GEN' 운동 전개[편집]


'GEN'이란 「묵은 사람」을 「새사람」으로 만들어 보자는 운동으로 새 세대 운동을 일으키자는 정신적인 혁명운동이다. 영어로는 'New Generation'이라 하며, 약자로 'GEN'이라 부른다.

젠 운동은 이탈리아 북부 드리에스테 시에 살았던 ‘카라’라는 여성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녀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사람들이 서로 미워하고, 사랑을 나누지 못하고, 이웃과 형제, 자매, 동료, 나라와 나라 사이에 그칠 줄 모르는 분노와 질투로 가득찬 것을 보고, 보다 나은 사회를 건설하기 위하여는 젊은 세대가 먼저 앞장 서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젊은 세대들이 그리스도교 정신에 입각하여 암흑을 헤쳐 나가자는 정신적인 혁명운동을 일으킨 것이 그 시발점이다. 이 운동을 원선오 신부는 광주 YMCA 발표회 등으로 전개했다.


3.2. 음악가[편집]


한국에서 생활한 20년 동안 작곡한 500여곡의 성가는 한결같이 한국인의 정서와 잘 통했으며, 가톨릭 성가 416번 <좋기도 좋을시고>는 우리 가락을 적극 활용한 성가로 꼽힌다. 현재 가톨릭 성가집에 수록된 원 신부 성가 목록은 아래와 같다.

35 나는 포도나무요
414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415 사랑이 없으면
416 좋기도 좋을시고
417 주여 영광과 찬미를
418 새로운 노래를 불러
419 밀알 하나가
420 주님을 항상 내 앞에 모시오니
421 나는 세상의 빛입니다
422 당신을 애틋이 찾나이다
423 천년도 당신 눈에는
424 주님을 찬양하라 예루살렘아
425 만군의 주님이여
426 주님의 집에 가자 할 때
428 무엇을 먹을까
429 알렐루야
461 엠마우스
504 우리와 함께 주여
516 주여 당신 얼굴을
518 선한 사람 아흔 아홉

4. 아프리카에서의 활동 (1982년 이후)[편집]


이제는 한국도 어느 정도 안정되었으니, 더 어려운 이웃을 찾아 떠난다.

원선오 신부는 1982년 당시 살레시오 수도회 총장 신부였던 돈 비가노 신부의 아프리카 프로젝트에 대한 호소를 듣고, 홀연히 아프리카 케냐로 떠났다. 그 때 원 신부의 나이 55세,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에는 이미 나이가 너무 많을 것이라는 주위 사람들의 염려와는 달리, 정작 자신은 별 걱정을 하지 않고 "일단 가고 보자!!"는 생각으로 출발했다. 케냐에 도착하자마자 그 곳에서도 자기가 해야 할 일이 매우 많다는 것을 알고 만족할 수 있었다.

4.1. 케냐에서 2년, 그리고 다시 수단 공화국(Sudan)으로[편집]


원 신부는 ‘편하게 머무르고 싶다’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질법한 생각까지도 배제한 체 주님이 이끄시는 대로 보다 험하고 어려운 상황을 기꺼이 받아들인 것이다.


4.1.1. '100개 마을학교 건립 운동' 전개[편집]


원선오 신부는 2011년부터 수단 공화국에서 학교 짓기 운동을 벌이고 있다. 2015년 8월 16일 소속 수도회인 살레시오회를 창립한 돈 보스코 성인 탄생 200주년을 기념해 100개의 수단 마을학교 목록을 봉헌하는 것이 그의 꿈이다.

사업 초기 원선오 신부와 공민호 야고보 수사[5]의 고향인 이탈리아가 많은 도움을 주었지만, 유럽의 경제 사정이 나빠지면서 지금은 거의 한국에 의존하고 있는 상황이다. 특히 원 신부가 20년 동안 머물며 가르쳤던 광주광역시 살레시오중학교살레시오고등학교 제자들과 뜻있는 한국 인사들이 나서고 있다.

2012년 12월 '스텔라 김연아 학교(STELLA YUNA KIM SCHOOL)', 2014년 5월 '김태희 베르다 학교(KIM TAEHEE VERDA SCHOOL)' 등으로 이미 절반 이상을 달성하였다.

학교 건립 운동을 추진하시는 까닭은, 지구상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의 60%를 갖고 있는데도 정작 그곳 사람들은 굶어 죽는 현실에 처한 아프리카의 절대적인 빈곤과 혼란 속에 시달리는 그들의 미래를 개선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로지 교육이라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남수단의 마을학교를 마친 졸업생들이 농업학교에서 실제로 배우고 익힌 영농기술로 곡식을 수확해 낸다면, 그곳 아프리카 주민들에게 많은 식량을 공급하게 되어 고질적인 영양 결핍과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날 것이라 확신하였기 때문이다.


4.1.1.1. 2012년 5월 방한[편집]

광주광역시 살레시오고등학교 21회 동문회 초청으로 방한 당시 살레시오고등학교 동문들이 아프리카 남수단 청소년들을 위한 학교 건립 기금 5천만 원을 내놓았다.

살레시오총동문회는 광주 살레시오고등학교 대강당에서 남수단에서 선교활동을 하다 일시 방한한 원선오 신부에게 학교 건립 기금 5천만 원을 전달했다.

특히 원 신부가 방한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성금이 답지하기 시작해 불과 20여 일 만에 1억 5천만 원을 모금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살아있는 聖者' 원선오 신부 30년 만에 귀국
아프리카 남수단 학교건립기금 전달

한편 원 신부는 마음에 두고 있던 몇몇 인사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 중 하나가 김연아였다. 가톨릭 신자인 김연아는 원 신부의 뜻에 동감했고, 그 자리에서 학교 1개를 세우는데 필요한 7,000만 원을 내놓았다.

김연아, 편지 1통에 거금 7,000만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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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김연아 스텔라, 원선오 신부, 공민호 수사

4.1.1.2. 2014년 방한[편집]

원 선오 신부는 2014년 방한 (9월 22일 ~ 11월 11일) 때 광주 살레시오고등학교 동창인 국회의원들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 국회를 찾았다.

국회 찾은 수단에서 온 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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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부터 우윤근 의원[6], 원선오 신부, 정의화 국회의장, 공민호 수사, 당시 여당 최고위원, 안내 담당 한국 살레시오 수도회 선교국장이자 현재 살레시오고 이사장(당시 교장) 장동현 미카엘 신부


4.1.1.3. 2019년 현황[편집]

건강때문에 수단 공화국을 떠나서 케냐 나이로비에 있는 살레시오회에 계신다고 한다.


5. 함께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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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직수사, 수도사제라고도 한다. 흔히 볼 수 있는 교구 소속 사제가 아니라 수도회 소속 수도자로 성품성사를 받고 성직자로서 소임을 하는 사제[2] 예전에는 '사레지오'라고 했다.[3] 수도자들은 사유 재산이 없기에 이삿짐도 단출하다. [4] 살레시오초등학교, 살레시오중학교, 살레시오고등학교, 살레시오여자중학교, 살레시오여자고등학교[5] 공민호 야고보 수사(Br.Giacomo Comino, 1939년생)는 이태석 (세례자 요한) 신부의 생애를 조명한 다큐멘터리 울지마 톤즈에도 잠깐 볼 수 있었던 살레시오 수도회 수도자이며, 직업학교 세팅 전문가로 유명하다. 1992년 이후 아프리카에서 생활하고 있다.[6] 2017년 당시 국회 사무총장. 역시 천주교 신자이며 세례명은 스테파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