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지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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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지월
尹芝月 | Yun JiWol


본명
윤지월(尹芝月)
본관
파평 윤씨 (坡平 尹氏)
출생
1917년 1월 6일
실종
1942년 (향년 24세)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종교
기독교
직업
시인
대표작
『말하지 않은 것 들』 (1937)
『말할수 없었던 것 들』[1](1938)
『감추어진 존재의 이름』(1939)
『수와 여성』[2](1939)
1. 개요
2. 생애
2.1. 삶의 정서와 고독감
2.2. 실종
3. 작품
3.1. 작품의의
4. 여담



1. 개요[편집]


존재한다는 것을 말하지 않음으로써

"존재"를 더 크게 말하는 것 들이 있었다.

《감추어진 존재의 이름》 (1939)


일제강점기시인, 일반인 , 여성

윤지월(尹芝月)은 1917년 1월 6일 서울에서 태어난 여성 시인이다. 그녀는 근대적인 수학문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건축, 우주, 미술, 조각, 역사, 그리고 여성으로서의 삶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삶은 한국의 전통과 근대의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여성 지식인으로서의 도전과 한계를 경험했다.

윤지월(尹芝月)은 서울에서 태어나서 여성을 위한 학교에서 근대식 고등교육을 받은 것으로 보이나 기록이 없어서 알수 있는 방법이 없다. 하지만 윤지월이 쓴 시를 보면 꽤나 수준 높은 교육을 받고, 사유할수 있는 충분한 시간[3]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아마도 여유있는 집[4]의 딸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이 가능하다.

윤지월(尹芝月)은 1934년 조선중앙일보에 연재된 이상(李箱)의 오감도(烏瞰圖)를 보고 크게 영감을 얻었으며, 자신도 그 와 같이 숫자와 글의 관계로 시와 글을 써내려가는 문학가가 되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이상(李箱)의 오감도(烏瞰圖)가 독자들의 항의[5]로 끝까지 연재 되지 못하자 윤지월은 크게 상심했다고 한다.

생전에도 그다지 유명하지 않았고,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여성이라 실종후 현재까지도 유명하지 않다. 다만 아는 사람[6]만 알고 있었지만, 2023년 뒤늦게 오프라인에서 윤지월을 알게 된 사람들이 함께 정보를 나누며 윤지월의 시를 읽기 시작했다. 윤지월의 는 오늘날 문학사와 역사에 남은 유명인사가 아니어도, 당시를 살았던 개개인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고민하고 자신의 삶을 열망[7]했는지를 알아볼수 있는 소중한 자료들이다.

윤지월은 그녀의 작품에서 사회적, 철학적, 수학적 개념을 시적 언어로 탐구했다. 그녀의 시는 존재와 부재, 말과 침묵, 가치의미 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탐구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관점은 그녀가 학문적으로 탐구한 문학, 종교학, 수학적 개념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시에서 숫자기호를 통해 숨겨진 의미와 연결을 탐색한다.

그녀의 대표적인 시 "감추어진 존재의 이름"은 존재와 이름, 그리고 그 사이의 관계에 대해 표현했다. 이 시는 보이지 않는 진리은유적인 표현을 통해 독자에게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제공한다. 시는 가나안땅의 '야훼' 와 같은 문화적 참조를 사용하여 이름과 존재 사이의 관계를 탐구한다.

윤지월은 시대적인 관계에서도 독특한 위치를 차지했다. 그녀는 여성으로서의 경험과 시대적 한계를 극복하려는 시도 속에서 고뇌갈등을 겪었다. 이러한 경험은 그녀의 작품과 가치관영향을 미쳤으며, 그녀는 자신의 삶과 학문을 통해 여성의 삶과 지식인으로서의 역할에 대해 깊이 고민했다.

1942년경 실종된 윤지월은 그녀의 삶과 작품을 통해 불멸의 존재로 남았으며, 그녀의 시와 사상은 후세에 작은[8] 영향을 끼쳤다. 그녀는 대중적으로는 유명하지 않았지만 한국 문학과 여성의 역사에 유명하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도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며, 그녀의 시는 현재 종종 사람들에게 영감을 준다.


2. 생애[편집]


윤지월은 1930년대 일제강점기의 한국에서 활동한 여성 시인이다. 그녀는 억압적인 시대 상황 속에서도 뛰어난 지성과 창의력으로 동시대 지식인들의 관심을 잠시 받았다고 한다.

그녀는 서양과 동양의 문학, 철학, 역사에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이를 시에 접목시켜 독특한 작품 세계를 구축했다.

윤지월은 당시의 여성으로서 겪는 시대적 한계와 사회적 억압에 대한 문제를 시를 통해 간접적[9]으로 표현했다.

그녀의 시는 상징주의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았다. 그녀의 작품은 현실 세계와 내면 세계 사이의 관계, 숨겨진 진실과 사회적 질서에 대한 탐구를 담고 있다.

윤지월은 자연과 우주, 인간 존재본질에 대한 물음을 시적 언어로 표현했다. 그녀의 작품은 감성적이고 서정적이며, 때로는 철학적 깊이를 지녔다.

윤지월은 일제강점기의 한국 문화에서 윤심덕과 더불어 일제시대 여성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인물이다. 그녀는 여성의 권리와 지위 향상을 주장했을 것으로 보이며, 그녀의 작품은 후대 여성 작가들에게 영감을 주었을 수도 있다.

그녀의 시는 동시대 지식인들에게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이며, 그녀는 한국 문학사에서 당대를 살았던 일반인으로서의 시대를 바라보는 관점을 전하는 역할을 한다. 그녀의 작품은 일제강점기 한국의 문화와 정체성 탐구에 중요한 역할을 할수도 있다.

윤지월은 1942년경 실종되었으며, 그녀의 갑작스러운 사라짐은 오늘날까지도 몇몇 사람에게 추측과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녀의 작품과 삶은 한국 문학과 역사에 발자취를 남겼다.


2.1. 삶의 정서와 고독감[편집]


윤지월 시인의 시 "감추어진 존재의 이름"을 통해 그녀의 삶과 정서, 그리고 고독과 그녀의 지식세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추측 해볼수 있다.

윤지월의 시는 깊은 사색과 내면의 탐구를 반영한다. 그녀는 존재와 부재, 이름과 의미 사이의 복잡한 관계에 대해 고민하며, 이러한 탐구는 그녀가 겪었을 사회적 억압과 내면의 갈등을 반영할 수 있다. 그녀의 시는 1930년대 일제강점기 한국이라는 어려운 시대적 배경 속에서 여성으로서 겪었던 한계와 도전을 드러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윤지월이 시에서 탐구하는 깊은 주제들은 그녀가 경험했을 고독감을 반영할 수 있다. 그녀는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완전히 이해하고 공감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주변에 많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고독은 그녀가 더욱 깊은 사색과 창작에 몰두하게 만들었을 수 있다.

윤지월의 시는 상당한 지적 깊이와 창의성을 보여준다. 그녀는 복잡한 철학적 개념을 시적 언어로 전환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높은 지적 능력과 교양의 증거이다. 그녀는 다양한 학문적 분야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시를 창작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추측을 통해 윤지월 시인은 시대를 앞서간 천재적인 여성으로서의 삶을 살았을 것이며, 그녀의 창작 과정은 그녀의 삶의 경험, 정서, 그리고 지적 탐구에서 크게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그녀의 작품은 그녀의 개인적인 감정, 사회적 현실, 그리고 철학적 사유가 결합된 결과물로 해석될 수 있다.


2.2. 실종[편집]


1942년은 일제 강점기 종반으로, 이 시기는 제2차 세계대전 중이기도 했으며, 일본은 한국 사회의 여러 영역에 걸쳐 군사적, 문화적 동화 정책을 강화하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윤지월 시인의 실종 이유를 추측해볼수 있다.

일제는 한국의 전통 문화와 언어를 억압하고, 일본 문화의 동화를 강요했다. 윤지월이 한국 문화와 언어의 보존을 위한 비밀 모임이나 저항 활동에 참여하고 있었다면, 이것이 그녀의 실종에 연관되었을 수 있다.

전쟁 중 일본은 한국인들을 강제로 노동과 군사지원을 위해 동원했다. 윤지월이 이러한 강제 동원으로 인해 다른 지역으로 이송되었거나, 이에 반항하다가 사라졌을 가능성이 있다.

일제는 비판적인 지식인문인들을 감시하고 때로는 체포하거나 사라지게 만들었다. 윤지월이 그녀의 작품이나 활동으로 인해 일제의 감시 대상이 되었을 수 있으며, 이로 인해 강제로 끌려가거나 은밀하게 실종되었을 수 있다.

또는 윤지월의 실종은 전쟁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이 아닌 개인적인 이유로 인한 것일 수도 있다. 가족과의 분쟁, 개인적 위기, 또는 다른 사적인 이유가 그녀가 자발적으로 사라지게 만들었을 수 있다.

한반도 최초의 공식적인 여성 성악가이자 소프라노 가수였던 윤심덕사의찬미로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던 중, 1926년 극작가 김우진과 함께 대한해협을 지나는 위에서 실종된것으로 알려졌으나, 승객명부를 조사해보니 김우진과 윤심덕이 없었다는 의혹도 있다. 유언장이 발견되거나 바다로 뛰어내린 것을 본 목격자도 없으나, 당시 워낙 유명한 사건이라 언론들이 최초 사건을 접하자 마자 두사람이 껴안고 바다에 뛰어 내렸다고 단정적으로 보도했다. 그리고 일본 음반협회의 타살로 보는 시선도 있다.관련 기사 만약 두 사람이 신분을 바꾸어서 내렸다면 실종처리 된 채로 조용히 다른 이름으로 살아갔을수도 있다. [10] 일본으로 출항할때 경성역에서 배웅하며 나눈 대화가 의미심장하다.

이러한 추측들은 1942년 당시의 복잡한 사회적, 역사적 맥락을 바탕으로 해본다. 당시의 서울은 긴장과 불안, 억압의 분위기 속에서도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저항의 불씨가 여전히 살아있는 곳이었다. 윤지월의 실종은 이러한 다양한 외부적, 내부적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일 가능성이 높다.


3. 작품[편집]


<감추어진 존재이름> (1939년 작)

존재하지만 말할수 없는 것들이 있었다.

존재한다는 것을 말하지 않음으로써

“존재”를 더 크게 말하는 것들이 있었다.

저 먼 가나안땅에서 “야훼”가 그랬고

왕의 이름을 말하지 않던 ”피휘[11]

“가 그랬다.

역사적으로 호랑이도 그냥 “산군[12]

”이었다.

존귀하거나, 공포스러워서

우리는 감히 그 존재를 부를 수 없었다.

존재의 “이름[13]

” 을 말하지 않음으로써

이름의 “존재“ 가 더욱 드러나고 있었다.

입에 담아서는 안될 그 “이름”대신

가치를 담아내는 글자를 끊임없이 만들어 왔었다.

그렇게 가치를 넣고, 가치를 빼는 역사가

켜켜이 쌓이고 쌓여

“이름”을 말하지 않고도 가치를 전달하려 만들어진 글자에

가득 넘쳐 흐르도록 수사어를 바르는 것이 예의가 된 어느날,

글자가 오히려 본질을 가리고 있다는 것을

그 누군가는 깨우쳤었나 보다.

그래서 그 누군가는 세상에

<수학>이라는 이름글자를 내놓았었나 보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탐구하는 이었다.

말할수 없었던 가치를 드러내는 수단이었다.

숫자들 사이에 숨겨진 의미는 광활하고 무한했으며,

숫자와 규칙이 나타내는 것은

끝없는 가능성과 드넓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었다.

그 어떤 “이름”을 호명하지 않아도,

이 세상 모든 가치를 감추어도,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드러남을

<수학>을 만든 이는 알았나 보다.

한 숫자 뒤에 무수한 영원이 숨어 있음을

우리에게 말하고 싶었나 보다.

크기와 행동만 남은 숫자와 기호 속에서

존재하지만 말할수 없었던,

질서와 아름다움을 발견하라고

그렇게나 “이름“을 숨겼나 보다.

밤하늘이 그저 검은색으로 보여도

태양보다 찬란한 별들이

밤하늘을 가득히 메우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고

그렇게나 “이름”을 숨겼나 보다.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보이지 않는 진리를 드러내는 것이었나 보다.


3.1. 작품의의[편집]


이 시는 강력한 상징주의를 사용하여 깊은 의미를 전달한다. '가나안', '야훼', '피휘', '산군' 등의 상징적인 언급은 보이지 않는 진리와 존재의 본질에 대한 탐구를 나타낸다.

시에는 존재, 이름, 가치에 대한 철학적 고찰이 담겨 있으며, 이는 독자로 하여금 심오한 사색을 자아내게 한다. 특히 '수학'을 통한 진리 탐구의 언급은 독창적인 접근이다.

1930년대 일제강점기 한국의 사회적, 역사적 상황을 반영하는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어, 당시의 문화적 맥락을 잘 드러낸다.

서정적이고 감성적인 언어 사용은 독자의 감정을 자극하며, 전반적으로 고전적인 문체와 어휘 선택은 시대적 배경을 존중한다.

그러나, 일부 현대 독자들에게는 '야훼', '피휘', '산군'과 같은 상징과 언급은 특정한 역사적, 문화적 지식을 필요로 하며, 이 지식이 없는 독자들에게는 의미 파악이 어려울 수 있다.

시의 철학적 깊이와 개념적 복잡성은 일부 독자들에게는 접근하기 어려울 수 있으며, 이해를 위해 깊은 사색과 분석이 필요하다.

전반적으로, "감추어진 존재의 이름[14]"은 문학적 가치와 깊이가 있으며, 시대적 배경과 작가의 의도를 잘 반영하는 작품이다. 그러나 그 복잡성과 상징주의는 독자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


4. 여담[편집]



워낙에 아는 사람이 없어서 잘 알려진 바가 없다.

파평 윤씨일제강점기총독부로부터 받은 작위가 없다고 한다. 이를 말미어 보면, 서울사는 있는 파평 윤씨 집안 부족하지 않은 집안 딸이지만, 시기가 시기인 만큼 여유가 있었어도 작위를 받지 않고 일본의 견제를 받았을 수도 있다. 아마도 일제 강점기에 집안이 힘들지 않았을까 예측해본다. 파평윤씨중 일제강점기 시절 인물은 윤봉길, 윤동주가 있다.

시인 윤동주와는 동갑. 그런데 거의 1년 차이 난다. 운동주는 17년 12월생, 윤지월은 17년 1월생. 참고로 여기서 말하는 17년은 2017년이 아니고 1917년이다. 윤동주는 만주 출생이라 서로 몰랐을 확률이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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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억울함이 느껴진다. 제목에서 벌써[2] 숫자라는 기호에 당시의 여성상과 윤지월이 스스로 느끼는 여성상의 대비를 표현한 시. 당시의 지식인 여성들은 전통여성상과의 가치충돌이 있을수 밖에 없었다.윤심덕, 나혜석이 유명한 사례, 윤지월 같은 경우는 24세에 실종되었지만, 당시에는 이미 결혼을 하고 자녀를 가졌을 나이라 이정도의 고등교육을 받을 정도의 집안이었다면, 분명 혼인 얘기가 오갔을 테고, 그러면 가족과 트러블이 있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지금으로치면 34살즈음 일거 같은데,지금도 결혼 안하면 꽤나 잔소리 듣는다.[3] 이시대 여성들의 삶은 불가능, 나혜석아사했다.[4] 서울사는 파평 윤씨[5] 진짜로 연재 중단했단다. 팬들이 있었는데 당시에는 연재를 중단하면 좋아하는 작가의 글을 볼수가 없었으므로 극대노 하지 않았을까 [6] 보통 후손들이 선조의 일기장이나 출판물을 가지고 뒤늦게 세상에 알리는 경우가 있다. 이익(실학자)성호사설도 후손들이 편찬하고 나서 널리 알려졌다.[7] 이점에 있어서는 지금까지 기록으로 남아서 전해지는 자료가 있다면, 평범한 사람들의 생각도 조금더 알려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8] 작은 정도가 아니고 거의 미미하게, 하지만 이 문서가 있으므로 없다는 아니고, 거의 미미하게 아주 작게 영향을 미친걸로[9] 이정도면 직접적인거 아닌가? 대놓고 적었는데??[10] 지금도 여기저기서 소설 빅픽쳐 같은 이야기는 세계 곳곳에서 보도 되고 있다.[11] 한자문화권 소속 동아시아 전역에서 있었던 관습이라는데, 말도 안되는 수준으로 모든 단어를 싸그리 없애버렸다. 예를 들면 세종대왕의 이름이 '도' 였다면, 도 라는 단어는 못쓴다. 실제로 충청도 공주의 교통통신시설인 이도역(利道驛)이 충청도관찰사상소로 이인역(利仁驛)이 됐다. [12] 호랑이형님산군도 그래서 산군이다.[13] 해리포터볼드모트도 이 경우, 볼드모트는 톰 리들, 또는 그 로 불렸다. 야훼에서 온 모티브가 아닐까? [14] 이거 자꾸 볼수록 볼트모트 아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