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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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3. 임인사화 연루 및 사망



1. 개요[편집]


李明佐
생몰 기간 : 1681년 2월 22일 - 1722년 8월 17일.[1]

조선왕족 출신 문신. 도정궁 제6.5대 사손이자 제7.5대 주인이다. 자는 사우(士遇). 대수의 숫자가 애매한 이유는 본문 참조.


2. 생애[편집]


1681년(숙종 7년)[2] 2월 22일에 덕흥대원군 6대 사손 이세정과 정부인 청송 심씨 사이에서 적장자로 태어났다. 감찰 박대수의 딸 상주 박씨와 혼인하였다.

31세인 1721년(경종 1년)에 식년시[3] 생원에 급제하여 진사를 지내고 그 해 아버지 이세정이 사망하자 도정궁 사손 지위를 물려받았다. 이후 노론 우6인(老論 又六人)[4]에 속해 중신으로 활약하였다.

이렇게만 본다면야 별 다른 문제없으나...


3. 임인사화 연루 및 사망[편집]


1722년(경종 2년) 3월에 일어난 임인사화소론 편에 선 지관 목호룡(睦虎龍)이 '노론의 어린 자제들, 우6인이 경종을 살해하고 세종서자 밀성군의 8대손 이이명을 옹립하려 한다'라고 고변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를 칼, 독약, 폐출(반정)의 3가지 방법을 썼다는 점에서 삼수의 옥, 혹은 삼급수(三急手)의 고변이라고 하는데 여기에 노론 3장신(三將臣)[5]의 한 사람이었던 작은할아버지 이홍술까지 여기에 엮였다.

이 때 이명좌도 체포당해 혹독한 심문을 당한다. 그 해 8월 17일 추문장에서 모진 고문을 이기지 못해 결국 왕을 죽이려 했다는 자복을 하였고, 그 날 바로 참수형을 당했다. 향년 42세. 이 때 이명좌 뿐 아니라 위에 언급한 이홍술 등 다른 덕흥대원군 후손들도 많이 엮여 죽었으며 남은 일가들은 뿔뿔히 흩어졌다. 이 때가 도정궁 종가의 최대 위기였다.

1724년(영조 즉위년) 경종이 죽고 영조가 즉위하면서 왕명으로 신원을 회복시켰다. 그러나 도정궁 사손 지위를 돌려주지는 못했고 대신 동생 이명회가 잇게 하였다. 대신 200여 년이 지난 1900년(광무 4년)에 고종의 명으로 이명좌의 넷째 동생 이명익[6]의 5대손 이재철(李載哲)에게 이명좌 개인의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이후 도정궁 가계는 이명회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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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하 날짜 표기는 모두 음력.[2] 숙종은 이명좌의 아저씨 뻘이다. 즉, 이명좌는 경종, 영조와 같은 항렬이다.[3] 式年試. 조선 시대에 3년마다 정기적으로 시행된 과거 시험.[4] 홍의인(洪義人), 홍철인(洪哲人), 이기지(李器之), 김성행(金省行), 서덕수(徐德修), 이명좌(李明佐).[5] 이홍술(李弘述), 이우항(李宇恒), 윤각(尹慤).[6] 당숙 이세희의 양자로 출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