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튀니지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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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적 관계
2.1. 고대
2.2. 중세
2.3. 19세기
2.4. 20세기
2.5. 21세기
3.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이탈리아튀니지의 관계에 대한 문서이다. 양국은 여러교류와 협력이 활발하다.


2. 역사적 관계[편집]



2.1. 고대[편집]


고대 로마가 이탈리아 반도에서 자리를 잡을 무렵 튀니지 일대는 오늘날 레바논 해안지대에서 이주해온 페니키아인들이 고대 카르타고 공화국을 세웠다. 카르타고 공화국은 북아프리카 각지를 기반으로 삼아 시케리아(시칠리아), 사르데냐이베리아 반도의 해안지대를 차례차례 지배했다. 고대 로마가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한 이후 카르타고와 로마 공화정은 시칠리아의 메세니아 문제로 제1차 포에니 전쟁을 치렀다. 1차 포에니 전쟁 전후로 시칠리아와 사르데냐는 고대 로마의 영토로 편입되는데, 해당 섬들은 오늘날 이탈리아의 영토이기도 하다. 이후 로마 공화정은 한니발 바르카의 카르타고 군대가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직접 남하해오면서, 이른바 한니발 전쟁이라고 불리는 제2차 포에니 전쟁을 치루었다. 제2차 포에니 전쟁은 로마 공화정 역사에 가장 심대한 영향을 미친 사건 중 하나로 자세한 내용은 고대 로마, 한니발 문서 등으로 참조가 가능하다. 제3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 공화국이 패한 뒤, 튀니지 일대는 로마의 아프리카 속주로 편입되었다.

로마 제국의 지배하에서 카르타고 주민들은 라틴어를 받아들이고 로마화되면서 로마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서기 4세기 이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하고 테오도시우스 대제가 기독교를 국교화하는 과정에서 튀니지 일대도 기독교가 급속히 보급되었다. 그러나 아프리카 속주 일대의 소작농들 사이에서는 도나투스파 신학이 퍼지면서 카르타고나 렙티스 마그나, 카이사레아 등등 대도시의 지주층들이 믿는 여타 기독교 교파와 대립하였고, 이로 인한 사회 갈등이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로마 제국이 동로마 제국서로마 제국으로 나뉘어지면서 튀니지 일대는 서로마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서로마 제국 최후의 곡창지대였던 아프리카 속주는 명장 보니파키우스가 방어하면서 수도 로마의 식량을 책임지고 있었으나 갈라 플라키디아의 오판으로 아에티우스과 보니파키우스가 서로 전쟁을 벌이고 보니파키우스가 제거되면서 겉잡을 수 없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베르베르인들의 침공에 조금씩 무너지던 아프리카 속주는 반달족들이 침공에 순식간에 무력하게 무너졌는데, 자세한 기록 정황은 남아있지 않으나 도나투스파를 믿는 소작농들이 기득권층에 맞서 반달족 침략군들을 지지하면서 아프리카 속주가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고 무너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반달족들은 비옥한 카르타고와 그 주변 지역을 중심으로 반달 왕국을 세웠다.


2.2. 중세[편집]


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반달 왕국은 튀니지 일대를 지배하면서 시칠리아, 사르데냐, 이탈리아 남부 일대를 지배했다. 동로마 제국은 영토회복을 실시하면서 반달 왕국을 침공하였으나 한 차례 실패하였고, 이후 벨리사리우스를 보내 반달 왕국을 멸망시키고 수복하는데 성공하였다. 벨리사리우스는 반달 왕국을 멸망시킨 이후 시칠리아를 거쳐 이탈리아 반도로 북상하여 동고트 왕국과 전쟁을 치루고,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시대 다시금 이탈리아 반도와 튀니지 일대가 로마 제국의 영토로 묶이게 되었다. 동로마 제국 최고의 장군 중 하나로 꼽히는 이라클리오스가 바로 아프리카 속주 출신이다.

동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던 7세기 이후부터 우마이야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그리고 튀니지 일대의 주민들이 이슬람교로 대거 개종하고 아랍어를 받아들이면서 이탈리아 반도일대와 튀니지 일대는 정체성에서 차이점이 많이 생겼다. 이탈리아 반도 역시 롬바르드족들이 쳐들어오면서 동로마 제국의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튀니지와 알제리에 기반을 잡은 이른바 사라센 해적들은 이탈리아 해안 지대 각지를 약탈하기 시작하는데 이 와중에 당시 방어를 위해 뭉친 어민들이 모이는 과정에서 중세 이탈리아의 교역도시 아말피 공화국이 건설되었다.

시칠리아, 사르데냐는 튀니지 일대와 함께 아랍문화권에 잠시 속했다. 이에 시칠리아에는 시칠리아 토후국이 세워졌다가 노르만족들에 의해 멸망하고 시칠리아 왕국이 세워졌다.


2.3. 19세기[편집]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오스만 제국이 쇠퇴하면서 튀니지 지역은 수많은 프랑스인, 이탈리아인들이 이주 및 정착했다. 튀니지는 근대화정책을 실시했지만, 19세기말부터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다. 프랑스의 지배당시에 이탈리아인들이 튀니지에 많이 정착했다.


2.4. 20세기[편집]


튀니지는 20세기 중반까지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다가 독립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이탈리아가 1942년 11월부터 1943년 5월까지 아주 잠시 동안 튀니지를 지배하기도 했다. 독립 이후, 튀니지는 친서방정책을 실시했고 이탈리아와도 수교했다. 튀니지의 독립 이후, 대부분의 이탈리아인들이 이탈리아로 돌아갔다. 1980년대에는 로마 시장튀니스 시장이 제3차 포에니 전쟁을 끝내기로 합의했다.[1]

2.5. 21세기[편집]


양국은 여러차례 교류가 활발하다. 튀니지는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이탈리아와의 교류, 협력이 활발한 편이며 튀니지 관광지에는 수많은 이탈리아인들이 관광하러 오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러다보니 이탈리아어는 튀니지에서 프랑스어와 함께 주요외국어로 지정되어 있다.

이탈리아 문화는 튀니지에서 프랑스 문화와 함께 인기가 많은 편이다. 그리고 이탈리아 요리를 판매하는 식당이 튀니지에 많이 존재한다.

양국간에 교류, 협력이 활발하기 때문에 이탈리아내에는 수많은 튀니지인들이 거주하고 있다.


3.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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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실질적으로는 카르타고로마에 의해 멸망하면서 종식된지 2,000년이 훨씬 지난데다, 해당 전쟁이 일어난 기원전 2세기에는 종전 협정을 맺어야 전쟁이 끝난다는 개념 자체가 없었지만, 이탈리아와 튀니지의 우호관계를 증진하기 위한 이벤트로 해당 합의를 맺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