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 타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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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타티의 주요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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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장편영화상
제30회
(1958년)


제31회
(1959년)


제32회
(1960년)

페데리코 펠리니
카비리아의 밤
(이탈리아)

자크 타티
나의 삼촌
(프랑스)


마르셀 카뮈
흑인 오르페
(프랑스)


역대 칸 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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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심사위원상
제10회
(1957년)


제11회
(1958년)


제12회
(1959년)

잉마르 베리만
(제7의 봉인)
안제이 바이다
(카날)

자크 타티
(나의 삼촌)


콘라트 볼프
(다윗의 별)




파일:jacques-tati.jpg
1967년 플레이타임 촬영 당시

1. 개요
2. 약력
2.1. 고난
3. 작풍
4. 기타


1. 개요[편집]


Jacques Tati

1907년 10월 9일 ~ 1982년 11월 4일

프랑스마임 연기자, 코미디언, 영화 감독. 프랑스 코미디계의 거장으로 불린다. 본명은 자크 타티셰프 Jacques Tatischeff.


2. 약력[편집]


파리 근교 르페크에서 태어났다. 이탈리아계-러시아계 프랑스인으로, 친가 쪽은 류리크 왕조 출신 러시아 귀족 가문이다. 친할아버지 드미트리 타티셰프는 러시아 육군 장군이었다.[1] 원래 성인 타티셰프 Tatischeff를 보면 알겠지만 러시아 냄새를 진하게 풍긴다. 러시아 쪽 기록에 따르면 친할머니는 서커스 공연자이었다.[2] 외가쪽은 이탈리아-네덜란드 혈통으로 액자 제작에 종사했다고 한다. 때문에 금수저는 아니더라도 은수저 정도의 중산층 생활을 했다고 알려져있다.

어린 시절엔 공부엔 관심 없어서 학교를 중퇴하고 외할아버지에게서 액자 제작술을 훈련받았다. 군대 제대 후 영국 체류하는 동안 럭비에 관심을 가져 한동안 준프로 럭비 선수를 했다. 그러던 중 남들을 웃기는데 재능이 있다는 걸 깨닫고 마임을 배우기 시작해 마임 연기자가 되었다.

초창기엔 마임 연기자로 유명했으며 영국, 독일을 돌아다니면서 공연을 했다. 1930년대에는 단편 영화를 만들면서 영화계에 발을 들였다. 이때 르네 클레망의 단편 영화에 출연해 주목받기도 했다. 하지만 2차 세계 대전이 터지고 징집돼서 참전하는 등 여러 사정으로 본격적인 장편 영화를 만들지 못했다. 비시 정부 시절엔 카바레 연기자로 일했다. 이때 오스트리아 합병으로 망명한 오스트리아-체코계 댄서 헤르타 시엘과 연인관계였으나 헤어졌다. 둘 사이엔 딸이 있었으나 [3] 자크의 누나가 반대해 [4] 재결합하진 않았다. 직후 미셸린이라는 여자를 만나 결혼했다.

종전 후에야 독립 제작사인 캔디 필름을 설립해 본격적으로 영화 제작을 시작했다. 첫 영화를 만들고 윌로 씨 Monsieur Hulot라는 중절모를 쓴 구부정하고 어수룩한 신사 캐릭터를 창안해 페르소나 삼았는데, 첫 영화와 마지막 영화를 제외하고는 타티의 상징으로 남았다.

이후 우체부 학교로 장편 영화 감독 데뷔해 축제일로 상업적 성공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타티식 코미디가 완성된 윌로 씨의 휴가와 4년만에 첫 컬러 영화인 나의 삼촌으로 프랑스 내에서 비평적 격찬과 동시에 인기를 얻었다. 윌로 씨의 어수룩함과 슬랩스틱을 내세워 전후 프랑스인들의 삶을 경쾌하게 풍자한 두 영화는 아직도 타티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2.1. 고난[편집]


이때까지만 하더라도도 타티는 과작이긴 해도 비평과 흥행을 동시에 잡는 감독이었다. 하지만 타티는 비슷한 윌로 씨 영화를 찍을 생각은 없었다. 타티는 대도시를 배경으로 한 코미디 영화를 만들고자 했고, 9년동안 타티빌을 세우고 플레이타임 제작에 매달렸다. 그렇게 만든 1967년작 플레이타임은 기존 윌로 씨 영화하고는 너무나도 다른 영화였다. 65mm 필름이라는 대형 필름으로 유머러스하게 르 코르뷔지에가 구상했던 현대 대도시의 삶을 담은 플레이타임은 평단에게서는 전작들의 성취를 발전시킨 걸작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윌로 씨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은데다 인기작이었던 전작에서 세월이 너무 오래 흘렀다는 점이 겹쳐져 흥행은 실패했다. 결국 타티는 빚더미에 앉게 된다.

이후 네덜란드에서 투자를 받아 초기작에 가까운 트래픽이라는 영화를 찍었다. 하지만 이 영화 역시 흥행엔 별 도움이 되지 못했고 결국 스웨덴 쪽 자본의 투자를 받아 TV영화 퍼레이드를 끝으로 타티는 반은퇴 상태에 빠진다. 그러다가 폐색전증으로 1983년 사망한다. 퍼레이드 이후에도 록밴드 스파크스랑 같이 구상한, 윌로 씨를 내세운 마지막 영화 혼란이나 [5] 훗날 실뱅 쇼메가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일루셔니스트를 구상하고 있었지만 모두 미완성으로 남았다.

3. 작풍[편집]


찰리 채플린이나 버스터 키튼 같은 무성영화 코미디나 프랑스 마임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화면과 음향 연출에서 혁신적이었다. 그의 연출론은 "프레임 내에서 모든 요소들을 평등하게 보여준다" 로 요약할 수 있는데 이 때문에 그는 화면 크기와 구성에 강박적으로 매달렸다. 타티의 실험은 처음엔 환영받지 못했지만 현대 영화의 다양한 실험에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를 받는다. 플레이타임은 영화사 최고의 걸작 리스트에 언급될 정도.

또한 주제 면에서는 윌로 씨로 대표되는 어수룩하고 순박한 구시대의 프랑스 문화와 세련된 첨단 현대문명 간의 충돌 혹은 어색한 공존을 비범한 통찰력으로 유머러스하면서 따뜻하게 표현해냈다.

같은 프랑스 감독인 로베르 브레송과 함께 영화 역사상 영화속에서 각종 소리들을 가장 독창적이면서 인상적으로 쓴 음향 연출대가로도 평가받는다.

4. 기타[편집]


실제 성격은 윌로 씨나 영화 성격이랑 달랐다고 한다. 좀 더 엄숙하고 무뚝뚝하면서, 기인스러운 구석이 있었다고. 카바레에서 일할 당시에도 동료들하고 잘 못 어울렸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헤르타랑 헤어질 당시 깔끔하게 헤어지지 못해서 같이 일했던 동료들한테 평판이 안 좋아졌다고 한다. [6]

미셸린과 낳은 두 아들딸은 영화계에 종사했으며 장 피에르 멜빌형사 스태프로 일한 바 있다. 이 둘은 아버지의 영화 판권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던 걸로 유명하다. 다만 둘 다 이른 나이에 타계해 고인이다.

장신으로도 유명했다. 191cm로, 지금 기준으로도 상당한 수준. 때문에 대중적으로는 큰 키에 구부정한 이미지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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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작 자크의 아버지인 조르쥬는 좀 고생을 한 편이다. 조르쥬 탄생 직후 드미트리가 의심쩍은 상황 속에서 사망하고 살기 위해 러시아로 도망갔다는 기록이 있다.[2] 다만 러시아 쪽 기록에서 결혼하지 않았다고 나와있는데, 결혼했다는 프랑스 기록하고는 상충되는 상황. 당시 프랑스법에 따르면 아버지만 확실하면 출생신고가 가능했고 사실혼으로 인정했기 때문.[3] 이 딸은 2000년대 초 일루셔니스트이 애니메이션화 되던 도중, 그 각본은 자신을 버린 아버지 자크 타티의 죄책감이 반영된 각본이라면서 크레딧을 요구한 적이 있다.[4] 나의 삼촌에서 윌로 씨 누나가 무신경하고 우스꽝스럽게 나오는데, 헤르타 시엘 손자가 서운함의 표출이라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5] 충격적이게도 이 영화의 결말에서 윌로 씨는 사망할 예정이었다. 낙천적이었던 타티 영화에서는 보기 드문 전개였지만 이미 노년인데다 재정난에 허덕였던걸 보면 납득할 구석은 있다.[6] 훗날 일루셔니스트 분쟁 당시 헤르타 시엘 쪽 손자가 밝히길 타티가 일루셔니스트 제작 시도 당시, 주인공으로 피에르 에텍스를 캐스팅하려고 했다가 이 사실을 알고 있던 에텍스가 도의적인 문제가 있다고 타티에게 이의를 제기했고 이로 인해 에탁스 및 에탁스의 각본가 동료였던 장클로드 카리에와 자크 타티의 사이가 나빠졌다고 한다. 다만 에텍스는 타티 사후 앙금을 풀었는지, 생전 타티 영화 복원 크레딧에 감사의 말로 올리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