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명부/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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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삼미 슈퍼스타즈의 영원한 에이스 장명부.jpg

1. 개요
3. KBO 리그 시절
3.1. 1983년: 불멸의 시즌 30승
3.2. 대기록의 씁쓸한 내막
3.3. 1983년 이후: 추락과 은퇴



1. 개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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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가 최훈이 김형준 칼럼에 투고한 일러스트
장명부의 선수 경력을 서술한 문서.


2. 일본프로야구 시절[편집]



히로시마 도요 카프 시절 긴테츠 버팔로즈와 대결한 일본시리즈 당시 투구 모습.[1]

돗토리현립 돗토리니시 고등학교 졸업 후 당시 외국 국적의 선수는 드래프트 참가 대상에서 제외하는 일본프로야구의 규정[2]에 의해 1968년 지명 외 선수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하였다. 1970년 1군 승격 후 카와카미 테츠하루 감독의 기대를 많이 받았지만 입단 후 3년 간 고작 18시합에 등판해 승리기록 없이 3패만 쌓았고, 1973년 토미타 마사루와의 트레이드로 야마우치 신이치와 함께 난카이 호크스로 이적하였다. 그 해, 노무라 카츠야의 밑에서 선발로 뛰면서 7승을 올리면서 그 해 난카이의 퍼시픽리그 전기 우승에 공헌하였다. 이후 난카이 호크스 최후의 리그 우승을 결정지은 플레이오프 2, 4차전에서 패전처리 투수로 등판했고, 데뷔팀 요미우리와의 일본시리즈에서도 3차전 선발 투수로 등판하였으나 5이닝 3실점으로 패전투수가 되면서 자신의 첫 가을야구를 마무리지었다. 난카이 이적 시기부터 실력이 만개하면서 트레이드 동기인 야마우치 신이치, 에모토 타케노리 등과 함께 난카이의 주전 선발 투수로 활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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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투수진 보강을 꾀했던 히로시마 코바 타케시 감독에 의해 김기태(가네시로 모토야스)와의 트레이드를 통하여 히로시마 도요 카프로 이적하게 된다. 히로시마에서도 선발 투수로 활약하면서 1978년, 1980년 시즌에 15승을 올리고 1980년엔 리그 최고승률을 기록하는 등 좋은 성적을 거두었고 1979년과 1980년 히로시마의 일본시리즈 2연패 달성에 공을 세우며 히로시마 황금시대의 주역이 되었다.[3] 그 후로도 투수진의 중심 멤버로 활약했지만 1982년 3승에 그치며 구단에서 연봉 대삭감을 통보하자 이를 현역 은퇴 선언으로 맞받아치며 일본에서의 선수 생활을 마무리 짓게 된다.[4]

당시 뒷이야기로 1982년 시즌 종료 후 선배인 장훈에게 한국프로야구에서 뛰어볼 생각이 없냐고 권유를 받은 장명부는, 고민 끝에 한국행을 결정했다. 그리고는 스승인 고바 타케시에게 한국으로 가고 싶다고 털어놓자 고바는 처음엔 강력히 만류하였으나 아버지의 나라에서 마지막으로 봉사하고 싶다는 장명부의 의지를 이해했고, 결국 "알았다, 한국으로 가거라. 그 대신 키야마 에이큐(이영구)도 같이 데려가라"면서 승락했다고 한다. 이영구는 재일교포 2군 내야수로 평소 장명부가 동생처럼 아끼던 선수였고, 고바는 내친 김에 히로시마 구단에서 자리가 마땅치 않던 이영구까지 배려해 준 것이었다. 또한 장명부가 대한민국으로 간다는 사실을 숨기고 연봉 협상 테이블에 나섰을 때 코바는 모른 척 하고 장명부가 하고 싶은대로 하도록 묵인해 주었다.[5][6]


3. KBO 리그 시절[편집]



3.1. 1983년: 불멸의 시즌 30승[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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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프로야구 히로시마 주전투수

재일동포 장명부 모국서 뛰고 싶다.


프로 원년 시즌이 끝난 후 1982년 12월, KBO가 전력 보강과 프로야구 활성화의 일환으로 추진한 재일동포선수 영입 계획에 의하여 삼미 슈퍼스타즈에 입단하게 된다.[7] 발표내용은 계약금 4000만원, 연봉 4천만원이라고 했지만[8] , 실제 계약금 1,500만 엔(약 4,500만 원), 연봉 2,500만 엔(약 7,500만 원)에 부대 비용(세금, 아파트, 승용차 제공) 6,000만 원 등 토탈 1억 8,000만원의 금액을 받는 조건이었다. 주요기업 대졸자 월급 초봉이 20-30만 원대에 한달 10만원 이하의 돈으로 생계를 꾸려나가는 노동자들도 아직 많았고, 당시 국내 최고 연봉 선수이던 OB박철순이 2,400만 원을 받고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엄청난 거액이었다. 당시 국산차 중 최고가던 포드 그라나다의 풀옵션 가격이 2천만 원이 안 되었고 강남은 60평대 아파트가 5천만 원을 하던 시절이다. 거기에다가 금리도 20%대에 달했기에 억대의 돈이라고 하면 정말 이자수익만으로도 상당히 호사스러운 생활을 할수있는 수준의 거금이었다.

또한 이러한 급여가 한국에서만 거액이었던 게 아니라, 일본프로야구 기준으로도 고액이었다. 1983년 일본프로야구 선수들의 연봉과 비교해 봐도 일본 프로야구 선수회에서 발표한 평균연봉은 733만엔이 였으며, 당시 일본인 최고연봉 선수였던 에나츠 유타카(닛폰햄 파이터즈)의 연봉이 7,800만엔이었으며 히로시마 도요 카프 선수단 내에서는 투수진 중에선 키타벳푸 마나부(3,300만 엔) 단 1명만 장명부보다 더 많은 연봉을 받았으며 야수진에서도 장명부보다 연봉이 많았던 선수는 야마모토 코지(6,500만 엔), 카토 히데지(4,000만 엔), 키누가사 사치오(3,200만 엔)의 단 3명뿐이었다. 앞에서 서술한 선수들은 전부 MVP 수상 경력[9]과 더불어 통산 200승, 2천안타 등 여러 타이틀을 기록한 당대의 대선수들이었고, 특히나 야마모토와 키누가사는 히로시마에서 영구결번[10] 프랜차이즈 스타였다. 이런 스타들과 같은 대우를 한국 데뷔 첫 해부터 받은 셈. 게다가 한국에서 계약금을 따로 받고 소득세를 구단이 대납해주며 아파트와 자동차를 제공 받았다는 걸 생각하면, 더더욱 후한 대우였다.

입단 계약은 1983년 1월 18일에 마쳤고, 장명부는 1983 시즌부터 삼미 유니폼을 입고 마운드에 올랐다.

그리고 그 해 장명부는 전설을 써 낸다.#

장명부는 1983년 시즌 시범 경기에 두 차례 등판했다. 한국 프로 무대 데뷔 전이라 할 수 있는 3월 19일 롯데 자이언츠와의 구덕 경기에 5회말 무사 만루 상황에서 임호균을 구원하여 첫 선을 보인 그는 일단 5회 말은 1실점으로 막아냈지만, 이후 2이닝을 던지며 롯데 타선에 4안타 3사사구로 3실점을 허용했고, 무엇보다 일본프로야구의 베테랑이란 얘기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그냥 설렁설렁 던지는 피칭이 야구팬들의 의구심을 살 정도로 형편없는 피칭이었다. 그리고 3월 22일 MBC 청룡과의 인천 시범 경기에 선발로 등판했는데, 경기 전 김진영 감독으로부터 "오늘은 최선을 다해 던져보라"고 주문을 받았지만 변함없이 성의 없는 투구로 일관하며 13안타를 두들겨 맞은 끝에 9대 7로 간신히 승리를 따냈다. 시범경기 동안 2게임 등판에 11이닝을 던져 17피안타 11실점이란 기록으로 매 이닝 1점을 내준, 누가 보아도 형편없는 투수로 보기에 충분했다.

김진영 감독으로선 "저 놈을 도대체 왜 데려온 거야?!" 라고 땅을 칠 만 했지만, 장명부는 MBC와의 시범경기 후 그의 부진에 속을 끓이던 김진영 감독에게 "감독님, 오늘은 저 쪽(MBC) 전력 파악하려고 직구만 던진 겁니다. 그리고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시범경기에서 이긴 건 일본야구까지 통틀어 8년 만에 처음입니다. 제가 마음만 먹으면 별거 아니거든요?" 라면서 오히려 김진영을 달랬다고 한다. 이 말에 김진영은 속으로 '이런 너구리 같은 놈!!'이라 감탄했다고.[11]

그의 꾀돌이 작전은 시범경기에서만 있었던 것도 아니었는데, 삼미와 입단 계약조건을 조율하던 도중에 삼성 라이온즈의 훈련 캠프를 찾아가 조감독이자 같은 재일교포인 이충남에게 "내가 뛰게 될 삼미라는 팀이 작년에 그렇게 시망이었다며? 가고 싶지 않다."라고 투덜거리고는 "여기서 몸도 풀 겸 연습이나 하고 가겠다"라면서 삼성 타자들에게 직접 배팅볼을 던져주기도 했는데, 이충남은 '혹시 얘가 삼성으로 오려고 이러나?'라면서 일말의 희망을 품었지만 알고 봤더니 삼성 타자들을 분석하려고 페이크를 썼다. 결국 그 해 삼성은 장명부에게 철저히 농락당했고, 특히 그 해 데뷔 첫해부터 타격왕을 차지하며 맹활약했던 장효조는 유독 장명부에게는 약세를 면치 못하였다.[12]

장명부의 진가는 삼미의 시즌 개막전이자 장명부의 공식 경기 데뷔전이었던 4월 3일 롯데 자이언츠와의 구덕 경기[13]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그날 장명부는 7이닝 동안 29타자들을 상대로 삼진 7개를 잡아내었고 6안타 4볼넷으로 1실점, 10-4로 첫 승리를 이끌었다. 평소엔 설렁 설렁 던지는 듯하다 위기다 싶으면 전력을 다 하여 투구했고, 사이드 암과 스리 쿼터 형의 투구 스타일을 변칙적으로 사용하며 당시 최고 수준인 145km의 강속구와 낙차가 큰 커브, 특히 능수능란한 완급 조절로 상대 타자들을 압도했다. 그 날 김진영 감독이 장명부의 호투에 무릎을 탁 치며 "그래! 바로 그거야!!" 라고 환호한 건 당연지사.

그날 한국 무대 첫 승을 거둔 장명부는 대 번에 언론과 팬들로부터 너구리라는 별명을 선물받았다. 어느 날은 홈 경기가 끝난 후 한 팬에게 농심 너구리 한 박스를 선물로 받았다는 일화까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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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에도 그는 닥치는 대로 등판하여 닥치는 대로 던졌고, 그야말로 한국 모든 선수들의 머리 꼭대기에서 노는 투수임을 보여줬다. 한국 최초로 빈볼로 타자들을 견제했고, 벤치 클리어링을 한국에 도입한 선구자이기도 하며, 빈볼을 던진 다음엔 특유의 썩은 미소로 타자들의 속을 뒤집어 놓는 심리전에도 능했다. 비록 전성기가 지나서 온 탓에 당시 국내 투수 쌍두마차였던 최동원이나 김시진에 비해 구속이나 구위는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제구력과 완급조절은 당시 기준으로 적수가 없었다고 전해진다. 특히 패스트볼 타이밍에 변화구를 던지는 등 상대 노림수를 간파하거나, 견제 타이밍이 아닌데 견제를 하고, 느닷없이 빈볼을 던지는 등 타자와 주자의 심리싸움에선 예측이 상당히 어려웠던 투수.

히스토리 27 '너구리' 장명부는 어떻게 30승을 했나
결국 장명부는 1983년 한해 60경기 등판, 44경기 선발, 427.1이닝, 30승(28선발승), 36완투, 26완투승, 6완봉승, 8경기 연속 완투승이라는 전후후무한 기록을 세우고 말았다.[14][15][16] 1983년 삼미 슈퍼스타즈는 52승을 올렸다. 장명부가 선발이었던 경기에서 삼미의 승률은 0.636이지만 장명부가 선발이 아닌 경기의 승률은 고작 0.429. 이는 정말 이게 인간이야라고 의심하게 만들 정도의 기록임에 틀림 없었다.[17] 다승 1위, 탈삼진 1위, 평균자책점 2위로 MVP를 다툴 자격은 충분했지만 홈런 1위, 타점 1위 이만수에게 밀려서 수상하지 못했다. 당시 동아일보에서는 매너 등 이유로 점수가 깎였다고 서술했는데, 이를 해석하면 기자들과 사이에 상당히 좋지 않았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 다음해인 1984년에는 4관왕 트리플 크라운 이만수가 다승 1위 탈삼진 1위로 2관왕인 최동원에게 MVP를 내준 걸 감안하면, 장명부가 받아도 이상할 게 없었다. 또한 MVP는 정규 시즌 성적만 보고 뽑는 만큼 최동원의 한국 시리즈 4승은 해당되지 않는다.

3.2. 대기록의 씁쓸한 내막[편집]


사실 그가 이러한 무시무시하다 못해 나와서는 안될 기록을 세운 것은 시즌 전 삼미의 허형 사장이 장명부와의 저녁 식사 자리에서[18] 30승을 하면 보너스 1억 원을 주겠다. 그리고 연봉도 두배로 인상시켜 주겠다.고 구두로 약속한 것을 곧이곧대로 믿었기 때문.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이 자리에서 허 사장은 "당신 일본에서 잘했다면서? 그 정도면 한국에서도 시즌 20승은 문제 없겠고, 그래도 30승은 힘들겠지?"라고 가볍게 한마디 했던 것에서 비롯되었다. 그런데 허 사장의 말을 의외로 진지하게 받아들인 장명부가 "만약에 30승을 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라고 질문했고, 허 사장은 "좋다. 30승을 하면 보너스로 1억원을 주겠다."고 답했던 것.[19][20] 요컨대 허 사장은 시즌 30승이 가능할 리 없다는 생각으로 그저 농담삼아 툭 던졌던 얘기였지만, 장명부는 이를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여 시즌 30승을 지상 목표로 삼아 전력투구에 나섰던 것이다.

결국 이런 비현실적인 옵션이 설마설마 하다가 그게 진짜로 현실이 되어버렸고, 허 사장은 처음에는 약속대로 지급하려 했으나, 자신이 보고 받은 계약 규모가 다운 계약인 것을 알고[21], 그런 약속 안했다며 오리발을 내밀었다. 어차피 계약서에 명기된 내용도 아니라서 구단 운영비에서 이를 충당할 수도 없는 일이었고, 결국은 허사장의 사비를 털어 일부 지급해야 했다.

하지만 이미 이 일로 장명부는 삼미에 오만 정이 떨어져 버렸고, 장명부는 아무리 한국 야구판이 후지다고 해도 어떻게 사장까지 선수를 속이냐고 분개하며 이듬해부터는 고의 태업을 일삼기 시작한다. 그런데 삼미는 장명부와 관련해 장명부도 속이고, 기자들도 속이고, 모그룹인 삼미그룹까지도 속였다. 자세한 내용은 링크 참조. 한편 허형 사장은 1984 시즌 종료 후 사임했다.

다만 링크 내용에서 계약잡음이 터진 이후 장명부가 고의태업을 했다고 쓰여지기는 했지만, 사실 따져보면 한 시즌에 400이닝을 던지고[22] 그 당시에는 컨디션 체크나 페이스 조절 같은 선수보호 관리가 전혀 없던 상황에서 몸이 아무렇지 않을 수가 없다. 거기다가 몸도 상했는데 마음까지 상하는 과정에서 허탈감에 빠져드는 일종의 번아웃 증후군이 생겼고 이 증상이 겉에서 보기에는 태업으로 비춰졌을 것이다. 결국 몸이 아파서 훈련을 소화 못하고 쉬는 모습이 자주 비춰졌거나 몸이 나았더라도 그 과정에서 생긴 번아웃 증후군을 극복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박철순은 장명부를 다룬 다큐멘터리에서 "장명부가 아무리 철인이라고 해도 그 상태로 마운드에서 공을 던졌을 때 상당히 몸에 무리가 갔을 것이다." 라고 자신의 견해를 드러냈다.


3.3. 1983년 이후: 추락과 은퇴[편집]


게다가 장명부는 한국에 오기 전부터 허리 부상으로 고생 중이었다. 거기다 1983년 시즌의 혹사까지 겹쳐 급속도로 구위가 추락하며 1984년 13승 20패로 전년 보다 부진한 성적을 남겼고[23][24], 이듬해인 1985년에는 한 시즌 최다패 기록(25패, 11승)을 세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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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상가상으로 그는 1983년 시즌 후 보너스 문제로 매년 삼미 측과 갈등을 빚었고, 팀이 청보에 넘어간 이듬해인 1986년에 청보 핀토스의 감독을 맡은 허구연이 선수단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방출되어 빙그레 이글스로 이적했다.[25] KBS N SPORTS에서 방영했던 프로야구 다큐멘터리인 '더 레전드'에 당시 빙그레 이글스 배성서 감독과의 인터뷰가 나왔는데, 그는 "그런 선수보다는 어린 선수들을 키우자"라며 구단이 장명부를 빙그레로 데려오는 것을 반대했다고 말했다. 홍순일 前 주간야구 편집장의 인터뷰에 따르면 노진호 단장이 장명부를 영입했으며, 노 단장이 자신에게 노장 장명부를 써먹을 수 있겠냐고 묻자 아직 장명부는 쓸만한 선수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빙그레로 이적한 1986년에 1승 18패의 처참한 성적을 내고 만다. 평균자책점은 4.98로 에이스급들은 2점대, 3점대 성적을 기록하던 것에 비추어보면 좋다고 말할 수 없었지만, 이 해 1군 참가를 시작한 신생 팀이던 빙그레는 에이스 이상군조차 2.63의 평균자책점으로 12승 17패를 안겨주는 물타선이었고 폼이 떨어질 만큼 떨어진 그 해의 장명부만큼도 못해주는 투수들밖에 없었을 정도로 팀이 부실했었다. 그렇게 나가는 족족 지면서도 그해 100이닝이나 책임졌다. 참조[26] 그리고 7월 26일 MBC 청룡전에서 한국프로야구 사상 최초의 끝내기 보크를 범하기도 했다.

이 때 빙그레와의 입단 계약 당시 2년치 연봉 1억 5천만 원을 한꺼번에 받아내는 수완을 발휘했지만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 해 세상에서 가장 비싼 1승을 거두었고, 빙그레는 장명부를 방출하며 나머지 연봉 7천 5백만 원은 토해놓고 가라고 했지만 장명부는 "나를 스카우트한 당신들도 책임은 있지 않은가?"라고 맞대응하기도 했다. 결국 빙그레 구단주인 김승연 회장의 조치로 탕감되었다고 한다. 당시 노진호 단장의 관련 인터뷰가 정말 압권이다. "장명부가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아무리 한 물 간 투수라 해도 최소한 10승쯤은 올리지 않을까? 크게 기대를 했었다. 그런데 1승이라니…, 내가 창피해서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빙그레 이글스 입장에서는 구단 역사 초창기의 대표적인 선택 실패였다.

장명부가 망한 이유는 1983년 시즌의 유례없는 혹사 이외에도, 이후 기록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장명부는 1983년 이후로도 계속 혹사당해야 했는데, 1984년 45경기 25선발 15완투 261.2이닝을 기록했으며 1985년에는 45경기 35선발 10완투 246.0이닝을 기록했다. 유례없을 정도로 혹사당한 투수를 쉬지 않고 2년이나 더 굴린 데에는 잘하는 선수가 거의 없는 삼미/청보의 팀 사정으로부터 기인했다. 그나마 1983년 장명부 다음으로 믿을 만했던 임호균은 장명부 자신이 구단 상부에 찔러 1984년 롯데 자이언츠로 트레이드로 쫒아 버렸기 때문에 다른 대안도 없었다. 결국은 다 못 해서 던질 사람이 없으니 계속해서 200이닝을 넘겨야 할 정도로 혹사당한 것이다.

한 시즌 400이닝이나 굴려졌으니 공이 약해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장명부가 불과 몇년만에 못하는 투수로 전락한 건 아니었다. 1984년 최다패를 하긴 했으나 팀내 종합 WAR는 1위였고, 10승을 거뒀다. 1985년은 투수진 WAR 4위를 기록했는데 최다패를 경신하는 와중에도 WAR 수치가 플러스(0에 가깝긴 하지만)를 찍었다. 가장 성적이 나빴던 1986년은 평균자책점 4.98에 ERA+는 63에 불과했다. 이 당시가 투고타저였음을 감안해 본다면 5점대에 육박하는 평균자책점은 매우 못한 것이 맞긴 하지만 1승밖에 못 한 데에는 타선과 구원투수진의 지원이 거의 없다시피 했던 게 컸다.

정확히는 1984년까지는 잘하는 투수였다고 볼 수 있으며, 혹사로 인해 나머지 2년은 보통 투수로 전락했다고 보는 게 옳다. 기록상으로는 못하는 투수로 보이긴 했어도 그의 소속팀이 다 하나같이 최약체였기에 그런 기록이 나온 것일 뿐, 실제로 못했다고 받아들이는 것은 일종의 오류인 것이다. 하기야 당시에는 삼진/볼넷비율, 뜬공/땅볼비율, 피장타율, 피출루율, 수비 무관 평균자책점 등의 투수 관련 세부지표 분석이 메이저리그에서도 잘 쓰이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그의 가장 큰 불운은 늘 하위 팀 소속으로 뛰었다는 점일 것이다. 충분히 성적이 나오는 상위권 팀에서 뛰었다면 유례없는 혹사도 없었을 것이고, 몇 년 더 리그를 호령할 수 있었거나 평균 이상의 성적으로 좀 더 오래 선수생활을 하고서 팬들의 축복 속에서 은퇴했을 것이다.
[1] 패스트볼의 최고 구속이 무려 149km/h이다. 참고로 1979년 저 정도 패스트볼 구속은 메이저리그에서도 20-80 스케일에서 65 가까이 받을 수 있는 우수한 패스트볼이다. 1980년 무렵 메이저리그의 평균구속은 80마일대 중후반, 즉 약 140km 정도였다. [2] 이 규정은 같은 해에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함께 영입한 김일융이 다니던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입단한 것이 논란을 일으키게 되면서 이를 계기로 일본에서 교육을 받은 선수는 국적을 막론하고 모두 드래프트에 참가 대상에 포함되는 것으로 개정되었다.[3] 한편 히로시마에 패한 난카이는 뒤늦게 "장명부를 괜히 저쪽 팀으로 트레이드했다." 라고 한탄하며 땅을 치고 만다.[4] 히로시마 도요 카프 측에서는 이것이 상당한 충격이었는데, 비록 82년 3승밖에 못 올렸다고는 하나 장명부는 소속팀의 명실상부한 에이스였고, 절대로 포기하고 싶지 않은 보물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히로시마 구단은 초상집 분위기였다.[5] 장명부가 빙그레 이글스에서 방출되고 야인으로 지내던 중 1987년 요코하마 다이요 훼일즈 감독으로 취임한 고바가 투수코치 직을 제의하며 일본으로 돌아오라고 했지만 장명부는 이를 정중하게 사양했다. 거지꼴이나 다름없는 지금 모습으로 스승을 볼 면목이 없었기 때문이었다.[6] 당초 고바가 장명부의 한국행을 강하게 말렸던 이유는, 섣불리 한국으로 가서 선수로 활동해 봤자 인정받지도 못하고 반쪽바리 취급이나 받으며 경멸당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7] 허나 이것은 일본 프로야구협회의 관계자 및 일본 구단들의 1차 지명안의 비협조로 삼미가 우선권을 획득한 것이다. 당시 1차 지명이 성공했었으면 장명부는 OB 베어스로 배정되었고 삼미로 가는 사람은 김일융이었을 것이다.[8] 훗날 프런트측에서 한물간 투수에게 엄청난 금액을 안겨줬다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서 선수와 상호 합의하에 실제금액보다 낮게 발표했다고 한다.[9] 정확히는 장명부가 한국으로 떠날 당시엔 에나츠, 야마모토, 카토만 MVP 수상 경력이 있었고 키누가사는 장명부의 한국 2년차였던 1984년 MVP를 수상했다.[10] 키타벳푸도 영구결번이 아닐 뿐이지 그가 선수시절에 단 20번은 어지간한 선수들에게 절대 달아주지 않는 명예번호 취급하고 있다. 현재 카프의 20번은 카프의 마무리 투수인 쿠리바야시 료지가 달고 있다.[11] 시범경기는 단어 그대로 시범적인/테스트경기인데, 굳이 최선을 다해 경기에 임했던 당시 국내 야구계의 인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하기야 1983년이면 프로야구가 이제 겨우 2번째 시즌이었고, 시범경기는 아예 처음이었으니 정규시즌 경기와의 차이를 애써 느끼지도 않았을 공산이 크다. 여기에 당시로서는 거의 백지나 마찬가지였을 '전력 분석'에 대한 노하우를 잘 활용한 장명부 본인의 능력도 큰 역할을 했다.[12] 당시의 한국 선수들은(투수, 타자 포함) 장명부를 굉장히 수를 잘 읽고 영리한 선수라고 평가하였으며, 삼성 라이온즈의 코치였던 박영길은 검술에 정검과 사검이 있듯이 장명부는 사검의 고수라는 평을 남겼다.[13] 이 경기는 최동원의 프로 첫 등판 경기(구원)이기도 했다.[14] 2008년에서 12년까지 5시즌 동안 류현진이 15완투 6완봉을 기록했다.[15] 참고로 MLB의 마지막 400이닝 투수는 1908년 에드 월시, NPB는 1962년의 곤도 히로시이다.[16] WAR 13.63으로, 역대 KBO 리그 단일시즌 2위 기록. 1위는 WAR 14.89의 86 선동열.[17] 그 해 롯데 자이언츠에만 2완봉승을 거두었는데, 일본 난카이 호크스 시절이던 1975년에는 롯데 오리온즈 상대로 3완봉승을 기록하기도 했다[18] 이 자리에는 당시 KBO 사무차장이자 한국 야구 초창기의 유명 해설자였던 이호헌 씨도 동석했다.[19] 당시 장명부가 "정말 30승 하면 1억을 주는 건가?"라고 재차 묻자, 허 사장은 "각서로 약속해주면 믿겠는가?"라고 응수하였고, 이건 장명부가 굳이 고수하지 않아서 이루어지지 않았다. (출처: 이종남의 <사람 좋으면 꼴찌>(1992).[20] 나중에 인터뷰에서 홍순일 전 주간야구 편집장은 장명부가 진작에 계약서를 받던지 아니면 30승 달성시에 정확히 보너스 지급 각서를 받던지 그랬어야 했는데 그렇지 않았다고 하며 이 부분에 대해서 부정적인 견해를 드러냈다.[21] 허사장은 장명부의 연봉이 4천만원으로 알고 있었으나 실제는 7500만원이었다.[22] 83장명부 이외에는 KBO에 한시즌 400이닝은 커녕 300이닝 이상 던진 투수가 없다.[23] 이 시즌의 war 5.79 리그 3위로 사실 지금 기준에서 보자면 압도적이었던 전 시즌보다는 초라하지만 충분히 좋은 기록이다.[24] 여기서도 장명부의 너구리적 면모가 드러나는데, 실질적 승패는 공식으로는 13승 20패지만 7세이브가 있어서 15승을 넘긴게 된다. 이유가 뭔가 하면 3세이브를 2승으로 간주한다라는 계약서의 효력이 그때 발휘하는데 합산을 해보면 17승 20패가 되기 때문이다. 물론 20승 미만이었으므로 벌금을 토해내기는 했지만.[25] 다름아닌 아버지의 고향인 충청 연고 팀이다. 본래는 OB 베어스였으나 서울로 올라갔다.[26] 장명부가 유니폼을 벗은 후 한 TV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그 해 20승 정도만 했으면 아무 일 없었을 텐데 괜한 욕심내 가지고 30승을 거두는 바람에 망했다고 후회하면서 눈물을 흘린 장면은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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