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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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군의 보유 기록 / 수상 경력 / 역임 직책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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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유 기록
연속경기 완봉승
3경기 연속

파일:Eagles_Champion_v1.png
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반지

1999



빙그레 / 한화 이글스 등번호 18번
팀 창단

이상군
(1985~1996)


이성갑
(1997~1998)
이성갑
(1997~1998)

이상군
(1999~2001)


조규수
(2002)
한화 이글스 등번호 78번
박상현
(1992~1994)

이상군
(2007~2009)


하나마스
(2010~2012)
하나마스
(2010~2012)

이상군
(2013~2017)


전상렬
(2018~2023)




파일:킹상군감독님.jpg

북일고등학교 야구부 No.78
이상군
李相君 | Sang-Koon Lee

출생
1962년 4월 21일 (62세)
충청북도 괴산군 증평읍[1][2]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학력
청주우암초 - 청주중 - 북일고 -한양대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85년 1차 지명 (빙그레)
소속팀
빙그레-한화 이글스 (1985~1996, 1999~2001)[3][4]
지도자
멤피스 칙스[5] 연수코치 (1997)
한화 이글스 1군 투수코치 (1998~2003)[6]
LG 트윈스 1군 투수코치 (2004~2005)
한화 이글스 재활군 코치 (2007)[7]
한화 이글스 1군 투수코치 (2007~2009)[8]
한화 이글스 2군 투수코치 (2009)[9]
한화 이글스 2군 재활코치 (2010)
한화 이글스 3군 감독 (2012)[10]
한화 이글스 3군 투수코치 (2013)
한화 이글스 육성군 총괄·투수코치 (2014)
한화 이글스 육성군 총괄코치 (2015)[11]
한화 이글스 1군 불펜코치 (2015~2016)[12]
한화 이글스 1군 투수코치 (2016)[13]
한화 이글스 1군 불펜코치 (2016)[14]
한화 이글스 1군 투수코치 (2016~2017)[15]
한화 이글스 감독대행 (2017)[16]
북일고등학교 야구부 감독 (2020~)
프런트
한화 이글스 스카우트 (2009)[17]
한화 이글스 운영팀장 (2011~2012)[18]
한화 이글스 기술자문위원 (2018)
한화 이글스 스카우트 총괄 (2019~2020)
경력
KBO 육성위원 (2006)
병역
예술체육요원[19]

1. 개요
2. 선수 경력
3. 피칭 스타일
5. 프런트 경력
5.1. 운영팀장 경력
5.2. 기술자문위원 경력
5.3. 스카우트 총괄 경력
6. 연도별 주요 성적
7.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빙그레-한화 이글스 소속 우완 투수, 투수코치, 감독 대행.

아마 시절부터 전국구로 유명세를 보였으며 이글스의 창단 멤버이다. 이글스 입단 후 한용덕의 각성 이전까지 한희민과 더불어 에이스로 활약한 프랜차이즈 스타.

현재는 모교인 북일고등학교 야구부 감독을 맡고 있다. 현역 시절의 등번호는 18번.


2. 선수 경력[편집]



파일:external/photo.isportskorea.com/20010321185906572G.jpg

파일:빙그레 이글스 엠블럼.svg 빙그레 이글스 선수시절


파일:external/photo.isportskorea.com/20010323144807787G.jpg

파일:한화 이글스 엠블럼(1994~2006).svg 한화 이글스 초기 선수시절 [20]


파일:external/www.donga.com/200907170241.jpg

파일:한화 이글스 엠블럼(1994~2006).svg 한화 이글스 후기 선수시절



파일:빙그레 이글스 엠블럼.svg 빙그레 이글스 선수시절 투구폼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의 부친인 김종희천안 북일고에 야구부를 만든 후 에이스를 찾다가 청주중학교에서 두각을 드러내던 이상군을 발견, 이상군을 북일고로 데려올 것을 직접 지시하고 상당한 돈과 노력을 쏟아 북일고로 스카우트해왔다. 엄청난 자금을 투자한 것 뿐만 아니라 형들의 직장까지 책임지는 조건으로 스카우트하였다 한다.

이후 이상군은 천안북일고를 전국대회 우승[21]으로 이끌어 기대에 보답했고, 김종희가 사망한 뒤 아들인 김승연이 이어서 대학을 졸업한 이상군을 빙그레 이글스의 창단멤버로 불러들였다. 이때 맺은 인연으로 지금도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과 상당히 친하며, 김 회장의 술친구라고 한다. 게다가 김종희 문서에도 나오지면 김종희가 사망했을 때 관 운구까지 했다고.[22]

이상군은 바로 두각을 드러내 팀의 에이스로 등극한다. 즉 이글스의 초대 에이스이다. '컴퓨터 제구'라 불릴 만큼 정교한 제구력이 특징[23]이었다. 1986년에는 3경기 연속 완봉승과 '48⅓이닝 연속 무사사구' 기록을, 1987년에는 7경기 무사사구 경기 기록을 세웠을 정도였다. 이러하듯 제구 만큼은 정말 빼어났기에 프로야구가 시작된 지 어느덧 40여 년이 흐른 지금도 KBO 리그 마운드에서 한 번이라도 공을 던진 투수들 중 다른 것은 몰라도 제구는 이상군을 앞설 투수가 없다는 말도 있다.

하지만 빙그레는 신생구단으로 약체일 수밖에 없었고 팀 내에 쓸 만한 투수는 이상군-한희민 뿐이었다. 게다가 한희민은 언더핸드라는 약점이 있었고[24][25] 이는 이상군에게 더 많은 부담이 가는 결과를 초래했다. 때문에 데뷔 시즌부터 2년동안 490이닝을 던졌고, 1988년은 마무리로 규정 이닝을 넘겼다. 이 3년 동안 당한 혹사로 인해 안타깝게도 빨리 진 비운의 투수.

1989년부터는 본인의 부상과 맞물려 에이스 자리를 송진우에게 내줄 수밖에 없었다. 이후 에이스의 계보는 송진우-정민철-구대성-류현진 순으로 이어진다. 1990년에는 19경기 밖에 못 나왔고, 1991년에는 아예 불만 질렀다. 1992년에는 다시 부활해서 29경기에 등판하여 10승 2패를 거두지만, 평균자책점은 3.82(....) 물론 송진우 - 한용덕 - 정민철로 이어지는 선발진이 있던 터라 이상군은 4~5 선발로서 나름 적절한 성적을 거둔 셈이다. 1993년에는 29경기에 올라 7승 7패 3세이브를 거뒀는데 평균자책점이 2.52로 다시 살아나는 듯 싶은 성적이었다.

그러나 김영덕 감독이 계약 만료로 물러나고 1994년부터 젊은 선수를 선호하던 강병철이 새 한화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이상군의 활용도는 줄어들기 시작했다. 게다가 신인 때부터 혹사 당한 몸도 예전 같지 않았다. 그래서 1994~1995년에는 각 21경기에 올라 4점대 평균자책점을 거뒀고, 이닝 역시 줄었다. 1996년은 겨우 9경기에 올라 3패만 거두면서, '이상군은 끝났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부진했다. 결국 은퇴를 선언하고 1997년 3월부터 미국으로 연수를 갔다.

1998년부터 돌아와서 1군 투수코치를 맡고 있었으나, 선수 개인의 현역 의지가 컸고 1999년 3월에 다시 선수로 복귀한다. 그리고 한용덕, 김해님, 구대성과 함께 불펜진의 한 축을 맡았다. 당시 성적은 30경기 등판, 5승 5패 1세이브, 평균자책점 4.42로 당시 제대로 된 중간계투 투수가 없던 한화에게 도움이 되었다.[26][27] 그리하여 빙그레 시절 못했던 우승의 기쁨을 함께했다.[28] 이후 2000년 4월 30일 감격스러운 100승을 달성하였다.

2000년에 10경기에 올라 4점대 평균자책점을 거뒀다. 당시 한화 이글스의 투수진은 좋지 못 했는데 1999년에는 이 투수진을 가지고 타선의 힘을 가지고 우승을 했지만, 자연스럽게 투수진이 붕괴되면서 2000년에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 했다. 심지어 이상군, 한용덕 2명을 빼면 전부 4점대 이상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고, LG에서 영입한 FA 송유석[29]이 그나마 버텼지만 5점대 평균자책점(....)에 과거부터 누적된 혹사의 여파로 시원찮은 성적이었다. 선수로서는 적당히 밥 값을 했지만, 코치로서는 이 때부터 문제가 드러났다.

2001년에 10경기에 올라왔지만, 불만 지르고 5월에 끝내 은퇴를 선언한다. SK에서 동년배인 김정수를 영입하고, 2년 전에 뽑아놓은 특급 유망주 박정진이 대두했지만, 부족한 투수진을 생각하면 아쉬운 부분.[30] 그다지 주목 받지 못하는 부분이지만, 은퇴 시점에서 이상군은 이글스 최후의 창단 멤버이다. 다만 플레잉코치 기록을 제외하면 1997년 은퇴한 이강돈이 최후의 창단 멤버가 된다.

역대 KBO 최다패 공동 8위이다. 그런데 이때 평균자책점이 2.63. 86년에 기록했는데 평균자책점이 저 정도면 당시 강팀에 있었다면 15승도 가능할 수치였다. 86년의 빙그레는 창단팀으로 최약체였기 때문에 패전이 많았던 것. 2할대 승률을 찍으면서 무난히 당시 꼴찌였던 7위를 했다.

심판들이 스프링캠프를 차려서 스트라이크-볼 판정 훈련을 할 때 이상군을 불러 미리 약속한 로케이션으로 공을 던지게 하고 그 판정기록을 가지고 심판들을 훈련시킨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하일성이 그에게 붙인 별명은 심판 훈련용 선수. 이런 일화는 송진우에게도 있다.

창단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아직 약체팀이었던 빙그레의 마운드를 지탱한 선수였으며, 86년 같이 데뷔한 동갑내기[31] 한희민과 함께 원투펀치를 이뤄 마운드에서 버텨주면서 빙그레 이글스라는 팀은 빠른 시간 내에 강팀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만큼 선수 이상군은 이글스의 역사에서 손꼽히는 투수이다. 통산 기록으로 봐도 15시즌[32] 동안 320경기 출장 1411⅔이닝 평균자책점 3.30 100승 77패 30세이브 62완투[33] 10완봉으로 대단한 투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본인이 제구만 중시하다 결국 효과를 내지 못하고 부활하지 못했듯이, 제구 위주 코칭은 코칭받은 선수들도 효과를 내지 못했다.[34] 물론 한화 프런트가 유망주 육성에 인색한 점도 문제기는 했지만 이상군이 투수코치를 하던 시절, 한화는 우수한 선발진과 처참한 계투 요원이라는 조합을 선보였다. 이 덕에 이상군은 프로야구 최악의 투수코치로 명성을 날리게 된다.

3. 피칭 스타일[편집]


KBO 리그를 대표하는 피네스 피처 중 하나. 그의 전성기인 1980년대 후반 당시 구속과 구위는 평균적[35]이었지만 매우 좋은 제구력으로 맞춰잡는 투수였다. 그러나 전성기 이후 혹사로 구위는 리그 평균 수준 아래로 크게 떨어졌다.

그의 제구력은 KBO 역사상 최고수준으로 회자된다. 전성기(1986~88) BB/9가 1.69로 동시기 1위이며, 통산으로만 봐도 2.43으로 1000이닝 이상 던진 투수들 중 역대 13위이다.[36]

피네스 피처답게 맞춰잡는 기질이 극심했다. BB/9가 저렇게 낮음에도 K/9 또한 86~89년 3.65에 통산 3.97로 낮으며, 제구력을 이용해 삼진을 잡는 게 아니라 범타를 유도하는 방식이었다. 즉 피네스 피처 중에서도 좋은 제구력으로 변화구가 주무기가 아님에도 심리전으로 맞춰잡는 타입의, 가장 정석적인 피네스 피처의 정의에 부합하는 선수였다고 할 수 있다.

피네스 피처였고 상당히 뛰어난 전성기를 보냈지만 혹사로 공의 위력이 지나치게 낮아지며 롱런에는 실패했다. 1988년 이후 혹사 누적으로 인한 부상 때문에 공의 위력이 많이 줄어들어 뛰어난 제구력을 갖고도 하락세가 오게 된다. 보통 뛰어난 제구력을 가진 선수는 선수생활을 오래 한다는 인식이 있지만, 공의 파워가 감소해서 전성기가 끝나는 경우는 제구파 투수들에게서도 꽤 흔한 사례다. 공을 스트라이크존 경계에 넣든 존 구석에 걸쳐 넣든 원하는 위치에 넣어봤자 타자가 칠 수 있으면 끝이니까. 그나마 구위가 떨어진다고 제구력이 떨어지는 건 아니니까 제구파 투수들이 프로에서 좀 더 오래 버틸 수 있는 거고, 이상군도 그랬던 경우다.[37]

전성기에는 강철체력을 가졌던 투수로 1986~87년 선발로써 기록한 성적이 68경기 57선발 43완투 490이닝으로 선발등판 및 완투는 동시기 1위, 이닝은 2위인데 1위인 최동원과 1이닝 차이밖에 안 난다. 1988년에는 마무리로 규정이닝을 채웠다. 다만 1989년부터 부상에 시달리며 강철체력은 사라지게 된다. 여튼 덕분에 전성기에는 고무팔이라는 별명도 있었다.


4. 지도자 경력[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이상군/지도자 경력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프런트 경력[편집]



5.1. 운영팀장 경력[편집]


2001년 이후로 한화의 스카우터진을 진두지휘하면서 신인을 적게 뽑아서 유망주 팜 박살에 일조한 김정무 운영팀장이 2011년을 끝으로 사직하고, 그 후임으로 부임. 이제 단장까지 얼마 안 남았다

운영팀장으로 부임한 이후, LG에서 완전히 마음이 떠난 송신영을 공들여 영입하면서 그나마 코칭스텝만 아니면 된다는 말도 있었지만, 송신영의 먹튀화와 그의 손을 거친 것으로 알려진 용병 투수들이 모두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스카우트로서의 자질 역시 최악임이 입증되었다. 한화의 장점이라고 하는 레전드에 대한 대우의 어두운 면을 잘 드러내는 사례.[38][39]

전체적으로 본다면 정말 사람은 참 좋으신 분(...)인데 지도자로서는 빵점이라는게 중론. 이상군 본인의 성격은 온화하고 주변의 평가도 좋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성격 때문에 코칭에서도 선수에게 터치를 안해서 코치로서의 역할이 거의 없다는 게 문제라는 이야기가 많다. 과거 빙그레-한화의 대투수로 명성을 날렸음에도 다른 야구선수들의 항목이 많이 작성된 이후에야 항목이 작성된 것만 봐도, 코치가 된 후의 그의 실적과 그로 인해 자신의 위상이 얼마나 추락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5.2. 기술자문위원 경력[편집]


2017년 한국시리즈가 끝나고 이글스의 새 감독으로 한용덕 전 두산 수석코치가 부임하였고 이상군 전 감독대행은 충청-대전 지역 고등학교 야구부를 순회하면서 아마야구 선수들을 코칭한다고 한다. 이른바 '기술자문위원'이라는 명예직이다.

북일고로 가서 신경현의 아들로 유명한 신지후를 만난 사진이 공개되자 팬들은 "제발 제구 잡는다고 구속까지 잡아주지 말고 가만히 지켜봐주세요"라며 간절히 부탁하는 중.

한 편 이 시기에 가진 인터뷰에서 감독대행 임기 중에 김원석에게 원색적으로 비난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김원석을 걱정하는 대인배스러운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5.3. 스카우트 총괄 경력[편집]


2019년부터 이정훈과 자리를 바꿔 스카우트 총괄로 임명되었다.# 이 소식이 처음 들려왔을때만 하더라도 스카우터로 성과를 인정받던 이정훈과 보직을 맞바꾼 탓에 한화 팬들은 걱정을 했었다. 먹튀가 된 송신영을 운영팀장 시절에 모셔오다시피 영입했던 당사자가 이 사람인지라. 처음으로 맡은 드래프트에서 4라운더 강재민을 픽하여 대졸 지명을 해야 하는 신설 규정을 채웠음에도 5라운더에 다시 대졸 장웅정을 픽하였고, 팬들이 싫어하는 대졸 선수를 뽑아서 우려도 많았다.

신경현 아들이라고 호들갑 떨며 대놓고 밀어주기 하던 신지후는 부상과 심각한 제구력 난조를 드러내며 장기 육성 대상자로 빠졌다. 다른 상위 라운더 투수인 남지민, 한승주도 마찬가지 부상으로 장기 육성 대상자로 빠졌다.

어깨 좋고 타격 자질 있다며 기꺼워하던 3라운더 임종찬과 프로 1년차에 3할 9푼의 고타율로 2군을 평정했다는 6라운더 최인호는 루키시즌에는 1군에 올라와서도 가능성을 충분히 보여줬지만, 임종찬은 2021 시즌에는 시즌 개막부터 많은 기회를 받았지만 공수 모두 처참한 모습이다. 최인호는 21시즌 들어서 전반기 막판부터 1군경기에 나섰기 때문에 표본은 적지만 일단은 장타 부분에서 발전이 된 모습을 보였다.

21시즌 전반기부터 100타석 넘게 기회를 부여받은 임종찬과 박정현은 시즌 개막부터 많은 기회를 받았지만 그 기회를 살리지 못했다. 박정현의 경우 20시즌 후반기에 나름대로 가능성을 보였고, 시범경기부터 뜨거운 타격감을 보이며 기대를 받았으나, 그 타격감이 정규시즌까지 유지되지는 못했고, 임종찬의 경우 위에도 서술한대로 타격에서 굉장히 처참한 모습이었고 수비마저도 실수가 심심찮게 나왔다.

5라운더 투수 장웅정은 2군에서 괜찮은 모습을 보였지만, 1군에 올라와서는 데뷔 첫 선발등판 때 나름대로 인상적이긴 했지만 그 외에는 그다지 좋지는 않았다. 강재민은 대학무대에선 첫째, 둘째로 꼽히는 사이드암으로 주목받던 선수였지만 장웅정은 무명이었다. 장웅정을 장기적으로 육성한다라고 선언하긴 했는데 서비스 타임이 짧은 대졸선수를 장기적으로 육성하겠다는 건지 의문.

하지만 드래프트 외로 데려온 윤대경의 경우, 직접 일본까지 찾아가 몸 상태를 확인하고 데려왔다. 20, 21시즌에는 불펜과 임시 선발로 한화 투수진 전면 붕괴를 막았으나 선발로 전업한 22시즌에는 처참하게 무너져내렸다.

22시즌 강재민까지 살이 찌며 본래의 스터프를 완전히 잃어버려 22시즌 기준으로 이상군 픽 중에 제 몫하는 선수는 없다.

다만, 이 것을 스카우트 총괄인 이상군의 무능으로만 치부하기 어려운 것이 선수 육성은 2군, 육성군의 몫이고 이 들을 잘 활용할 수 있는 점은 1군 코칭스태프의 역량과도 연관이 있다. 앞으로 이 선수들이 조규수, 김창훈, 윤근영, 유원상처럼 그저 그런 모습만 보이다가 사라질지, 아니면 1군에 안착해서 좋은 모습을 보일지는 더 두고 봐야 할 것이다.

6. 연도별 주요 성적[편집]


역대 기록
연도
소속
경기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86
빙그레-한화
35
243⅓
(3위)
12
17
1
-
0.414
2.63
216
17
54
104
(5위)
88
71
1.064
1987
33
(4위)
246⅔
(1위)
18
(2위)
11
2
-
0.621
2.55
(5위)
233
13
62
85
(5위)
83
70
1.155
1988
38
(2위)
135
10
3
16
(1위)
-
0.769
(2위)
2.40
(4위)
120
7
25
47
38
36
1.052
1989
27
140⅓
16
(3위)
5
3
-
0.762
(3위)
2.57
138
9
38
74
45
40
1.240
1990
19
86⅓
6
4
0
-
0.600
3.13
91
5
25
30
35
30
1.332
1991
9
12⅓
3
2
0
-
0.600
13.86
36
2
21
20
25
19
4.459
1992
29
96⅔
10
2
2
-
0.833
(2위)
3.82
89
12
40
55
46
41
1.252
1993
29
128⅓
7
7
3
-
0.500
2.52
115
5
49
51
41
36
1.223
1994
21
107⅔
6
7
1
-
0.462
4.26
116
4
39
46
59
51
1.375
1995
21
97
6
8
1
-
0.429
4.73
106
11
43
43
56
51
1.485
1996
9
23⅔
0
3
0
-
0.000
8.75
35
5
15
11
26
23
2.028
1999
30
57
5
5
1
-
0.500
4.42
59
6
16
38
34
28
1.281
2000
10
30⅓
1
2
3
0
0.333
4.75
32
6
8
15
19
16
1.253
2001
10
7
0
1
0
1
0.000
7.71
10
2
8
3
6
6
2.571
KBO 통산
(14시즌)
320
1411⅔
100
77
30
1
0.565
3.30
1396
104
443
622
601
518
1.259

완투, 완봉 기록
연도
완투
완봉
1986년
19완투
(1위)
4완봉
(3위)
1987년
24완투
(1위)
3완봉
(3위)
1988년
3완투
1완봉
(8위)
1989년
7완투
1완봉
1993년
5완투
1완봉
1994년
3완투
0완봉
1995년
1완투
0완봉
통산
62완투
(10위)
10완봉


7. 관련 문서[편집]




[1] 청주시 출신으로 알려져 있지만 송진우2009년 은퇴 당시 매거진 S의 박동희와의 인터뷰에서 '그즈음 같은 증평 출신인 이상군(당시 한화 2군 코치) 선배가 시쳇말로 ‘날아다니던 때’였다'라고 인터뷰한 바가 있다. 따라서 이상군 코치는 송진우와 같은 증평 출신이다.[2] 다만 이상군이 태어난 해인 1962년에는 행정구역상 괴산군 증평읍이었다. 증평군이 괴산군으로부터 별도의 군으로 독립한 건 2003년에야 이루어졌다.[3] 1985 시즌에는 빙그레가 정식으로 창단하지 않고, 법인만 창설하여 2군 리그에서만 뛰었다.[4] 1996년 은퇴했다가 1999년 다시 플레잉코치로 복귀했다.[5] 시애틀 매리너스 산하 더블A[6] 1999~2001년은 플레잉 코치[7] ~8월 21일[8] 2007년 8월 22일~2009년 6월 21일[9] 6월 22일~[10] 8월 29일~[11] ~7월 31일[12] 2015년 8월 1일~2016년 7월 1일[13] 7월 2일~8월 12일[14] 8월 13일~8월 17일[15] 2016년 8월 13일~2017년 5월 22일[16] 5월 23일~10월 3일[17] 10월~[18] ~8월 28일[19] 1978년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 대회 준우승#. 고교 1년생으로 청소년 대표팀에 합류했다. 당시 고3 투수는 이상윤, 양상문, 장호연, 신계석 등.[20] 유니폼 오른쪽 소매에 주황색 H자, 한화그룹의 로고와 로고 밑에 영문으로 'HANHWA'라고 써진 것으로 보아 1995년~1996년에 찍은 사진으로 보인다. 참고로 1994년 빙그레에서 한화로 바뀐 첫 시즌에 오른쪽 소매에는 한화그룹이라고 써져 있었다.[21] 1980년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 준결승전에서 광주상고와 맞붙었다. 광주상고 포수였던 장채근이 훗날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술회하기를 천안북일고 2루주자의 3루 스틸을 허용한 것이 패인이었다고 했다.[22] 다만 관을 운구한 것은 맞지만 그것을 개인적 친분 관계로 생각하는 것은 과하다. 김종희는 여느 재벌 회장과 다르게 북일학원에 대한 애착이 매우 컸다. 뒤에 건강에 이상이 생기기 전까지 개교 초기에는 주말을 이용해 북일학원에 자주 들렀다. 이상군이 한양대 1학년에 입학했던 81년 여름 김종희의 장례식이 있었다. 서울을 출발한 장례 차량이 북일학원을 들러 별도의 영결식을 갖고 공주 선영에 엄수되었다. 이 때 야구부원들이 운구 요원을 담당하였다. 이상군은 한양대 1학년으로, 고교 1년 선배 동아대 김진욱 등과 고교 재학생 후배들과 함께 운구에 참여한 것이다.[23] 천하무적 야구단에서 일구회와 치른 경기에서도 등판했었는데, 선수에서 은퇴한 후에도 여전히 칼 같은 제구를 구사하여 많은 사람들이 놀라워하였다. 전성기에는 홈플레이트에 10원짜리 동전을 놓고 그것을 맞혔다는데 이건 믿거나 말거나 수준인 듯하다.[24] 언더핸드는 좌타자 입장에서 공이 잘 보이기에 좌타자들을 상대하기 불리하다는 한계가 있고, 필연적으로 장타 허용률이 높다. 때문에 한희민은 이강철 등장 전까지만 해도 홈런 공장장이라는 달갑지 않은 별명이 따라다녔다.[25] 무엇보다 1986년 시즌 피홈런 1위가 한희민, 2위가 이상군인데 한희민은 이상군보다 68이닝을 덜 던졌으면서 홈런은 1개 더 맞았다.[26] 진짜 한화 상황이 그 정도로 암담하기는 했다. 마무리 투수는 그 구대성이 있었기 때문에 문제가 없었지만, 정민철 - 송진우 - 이상목으로 이어지던 화려한 선발진과 구대성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할 선수가 없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구대성은 마무리 투수로 뛰면서 119 1/3 이닝을 소화했고(...) 심지어 구대성의 과부하를 덜기 위해서 정민철, 송진우, 이상목 셋도 드물게 마무리 투수로 등판하는 막장스런 일도 일어났다.[27] 그나마 이상군이 30경기 57이닝 평균자책점 4.42, 김해님이 92경기 1/3이닝 평균자책점 4.87로 잘 버텼고 나머지 중간계투 요원들은 5점대 이상의 평균 자책점이라는 처참한 성적을 남겼다. 물론 리그 전체가 타고투저였던 만큼 한화에서 3점대 평균 자책점을 거둔 1군 투수는 구대성, 정민철 둘 밖에 없었다.[28] 사실 이 해 플레이오프와 한국시리즈는 엔트리에는 10명이 있었지만, 실제 등판한 투수는 선발투수 3명(정민철, 송진우, 이상목)과 마무리 구대성, 베테랑 이상군, 한용덕에 신예 이상열이 끝이었다. 대체로 선발투수들이 긴 이닝을 끌고 가고 불펜은 우완 베테랑 둘과 좌완 신예 1명으로 적당히 때우고 흔들린다 싶으면 구대성 한 명이 올라와서 경기를 끝냈다. 덕분에 임창식, 김경원, 홍우태 셋은 1경기도 안 올라오고 우승 반지를 얻었다.[29] LG에서 1년 5천만원에 계약 후 싸인 앤 트레이드로 이적. LG에서 전 시즌에 주장이었는데, 선수 복지 같은 것과 관련해서 프런트와 마찰이 많았었다고.[30] 그래서 한화는 이상열을 팔고 최영필김홍집을 영입한다.[31] 하지만 한희민이 1년 유급한 관계로 이상군이 한희민보다 선배이다.[32] 97, 98은 코치직 수행으로 제외라 실질제로는 13년.[33] 거의 다 86~89년에 세운 것이다.[34] 이와 반대되는 경우가 바로 정민태. 구위와 구속 위주로 코칭을 하다 보니 그가 다듬은 투수들이 공만 빠르지 제구는 아주 처참하다. 그 결과물이 싸융짱문오족까고마.[35] 구속과 구위가 안 좋다는 이미지가 있는데 그의 평균구속은 전성기 130 중반, 최고구속 140km 정도로 당시 리그 평균 수준이었다. 즉 똥볼을 제구만 잘해서 성적을 낸 선수는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2020년대 기준으로는 평균구속 142-144km 정도에 최고구속 140 후반 정도라고 보면 될 듯하다. 최근 사례로는 장원삼과 유사하다.[36] 다만 이글스 선수들 중에서는 이상목한용덕이 이상군보다 더 위에 있다.[37] 전설의 타이거즈에 출연한 최해식이 증언하기를 청주 야구장에서 펼친 맞대결에서 2회초 2사 1,3루의 위기를 맞았으나 8번 최해식에게 볼카운트가 0-3으로 몰렸고 스트라이크를 잡기 위해 무심코 한가운데 직구를 던졌으나 3점 홈런으로 이어졌다. 최해식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 당시는 '상군이 형 맛이 갈 때'였으며 코치로부터 히팅 사인이 나오자 덕아웃을 쳐다봤더니 9번타자가 송인호였다. 최해식, 송인호 모두 타격실력이 약해 최해식은 선풍기, 송인호는 에어컨이 별명이었다. 그리고 '상군이 형은 정직한 사람이라 하나-둘 타이밍을 재고 '무조건 스트라이크이당'을 외치며 뱃을 돌렸고 홈런으로 이어졌다고 한다.김응용 감독은 '최해식의 홈런은 소가 뒷걸음질 치다가 쥐 잡은 격'이라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38] 다만 송신영은 좀 미묘한게 내구성은 우수한 선수이고(매 해 50경기 이상 등판, 75이닝 내외 소화), 적당히 잘 막는 투수이지 구대성 수준의 특급 계투요원은 절대 아니었다. 2011년에 거둔 성적이 플루크에 가까웠던 것. 게다가 2012년 기준 나이는 37살로 상당히 많았다.[39] 또한 송신영은 구단 측의 미비한 지원도 한 몫을 했다. 가족을 서울에 두고 혼자 대전에 내려와 거주했는데, 소음과 침수 등으로 인해 1년에 이사만 3번을 다녔고 제대로 된 컨디션 관리를 할 수 없었다. 물론 운영팀장이 누구였는지를 생각하면, 이를 제대로 고려하지 않은 이상군도 문제는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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