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훈(야구선수)

덤프버전 :

장훈의 틀
<bgcolor=#ffffff,#19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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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민훈장 수훈자
파일:국민훈장.png
연도
2007년
이름
장훈
분야
스포츠
사유
재외동포 사회 발전 기여
국민훈장무궁화장(1등급)

대한민국 체육훈장 수훈자
파일:체육훈장.png
연도
1980년
이름
장훈
분야
스포츠
사유
재일대한민국거류민단
체육훈장맹호장(2등급)

장훈의 수상 경력 / 보유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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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東映フライヤーズ .png
NPB 일본시리즈
우승 반지

1962

파일:NPB 로고.svg 일본 야구 전당 헌액자
파일:はりもと いさお.png
하리모토 이사오
헌액 연도
1990년
헌액 방식
경기자 표창

파일:日本プロ野球名球会.png
일본 프로야구 명구회
등록명
기록
가입자격 획득일자
가입자격 획득당시 연령
비고
하리모토 이사오
3085안타[1]
1972년 8월 19일
32세 2개월
최초 발족 멤버 18인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1959년 일본프로야구 퍼시픽 리그 신인왕
스기우라 타다시
(난카이 호크스)

장훈
(도에이 플라이어스)


수상자 없음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1962년 일본프로야구 퍼시픽 리그 최우수 선수(MVP)
노무라 카츠야
(난카이 호크스)

장훈
(도에이 플라이어스)


노무라 카츠야
(난카이 호크스)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1961년, 1967~1970년, 1972년, 1974년 일본프로야구 퍼시픽 리그 수위타자




보유 기록
통산 최다 안타
3,085안타
통산 최다 맹타상
251회
최연소 2,000안타
만 32세 2개월
최소경기 2,500안타
2185경기
시즌 타율 3할대 이상
16회[2]
시즌 타율 3할 3푼 이상
11회[3]
연속 시즌 타율 3할대 이상
9시즌[4]
연속 시즌 타격 10위권 진입
15시즌[5]
연속 시즌 100안타 이상
20시즌[6]
시즌 타율 3할 5푼 이상을 양대 리그에서 기록
1970년, 1972년 (도에이)
1976년 (요미우리)
타격 10위권 진입
17회[7]
연속 타수 안타
9타수[8]
연속 경기 안타
30경기[9]
연속 타석 출루
13타석[10]
연속 시즌 두 자릿수 도루
16시즌[11]
한 이닝 2개의 2루타
1961년 5월 6일[12]
}}} ||

장훈의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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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에이/닛타쿠홈 플라이어즈-닛폰햄 파이터즈 등번호 10번


장훈
(1959~1975)



{{{#fd5a1e [[요미우리 자이언츠|요미우리 자이언츠]] 등번호 10번}}}


장훈
(1976~1979)


코마다 노리히로
(1988~1993)
{{{#fff [[치바 롯데 마린즈|롯데 오리온즈]] 등번호 10번}}}


장훈
(1980~1981)







장훈
張勳 / Jang Hun

통명
하리모토 이사오 / 張本勲
출생
1940년 6월 19일 (83세)
히로시마현 히로시마시 미나미구
국적

본관
인동 장씨
신체
181cm / 85kg
가족
아버지 장상정, 어머니 박순분,
큰누나 장점자, 작은누나 장정자, 형 장세열
아내[1], 슬하 2녀
학력
히로시마 시립 히지야마 초등학교 (졸업)
히로시마 시립 단바라 중학교 (졸업)
히로시마현 마츠모토 상업 고등학교[2] (전학)
나니와 상업 고등학교[3] (졸업)
포지션
좌익수
투타
좌투좌타
프로입단
1959년 아마추어 자유계약 (토에이)
소속팀
토에이-닛타쿠홈 플라이어즈-닛폰햄 파이터즈 (1959~1975)
요미우리 자이언츠 (1976~1979)
롯데 오리온즈 (1980~1981)
지도자
닛타쿠홈 플라이어즈 1군 수석・타격코치[4] (1973)
방송경력
TBS 텔레비전 야구 해설위원 (1982~2006)
역임직책
한국야구위원회 총재 특별보좌 (1982~2005)
상훈
체육훈장 맹호장
국민훈장 무궁화장
1. 개요
2. 상세
4.1. 연도별 기록
4.2. 각종 기록 및 타이틀(NPB)
4.2.1. 타이틀
4.2.2. 주요 기록
4.3. 상징적인 등번호 10번
5. 은퇴 이후
8. 어록
9.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前 야구선수. 재일 한국인 신분으로 가장 큰 성공을 거둔[5] 방송인이기도 하다.

현역 시절에는 도에이/닛타쿠홈 플라이어즈-닛폰햄 파이터즈, 요미우리 자이언츠, 롯데 오리온즈 소속 야구선수였으며, 포지션은 좌익수였다.

현역 은퇴 후에는 닛타쿠홈 플라이어즈, OB 베어스, 삼성 라이온즈, 빙그레 이글스, 쌍방울 레이더스, 주니치 드래곤즈, 요미우리 자이언츠, LG 트윈스에서 타격 인스트럭터를 역임했고, 1982년부터 TBS 테레비 소속 해설위원으로 활동하다가 2006년 프리랜서로 전향했다. 또한 동기간에 한국야구위원회 총재 특별보좌도 병행했다.

일본프로야구 역사상 손에 꼽을 정도로 위대한 야수 중 한 명으로 1960~1970년대에 전성기를 구가했던 선수로, 국내에서도 꾸준히 언급되며 야구팬들에게는 물론 사회적으로도 알려진 인물이었지만, 2010년대 중반부터 국내에서 언급되는 빈도가 급격히 줄어들며 이 시기부터 야구를 보기 시작한 야구팬들부터 활약상과 위상에 비해 인지도가 다소 낮아졌다. 그러나 KBO 리그보다 수준이 높은 리그에서 역대급 레전드로 남은 유일무이한 한국 국적의 선수이며[6] 한국 야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으로 반드시 꼽힌다.[7]

2. 상세[편집]


파일:attachment/장훈(야구선수)/JangHoon_TokyoDome.jpg
1990년 일본야구전당에 헌액된 장훈의 동판[8]

"내가 한국에 처음 온 건 (한국인이라) 고시엔대회에 나가지 못하고 한·일 친선 고교야구에 출전했을 때야. 공항에 도착하니 사람들이 아리랑을 부르는데 가슴이 찡하더라고. 조국에 대해 자긍심을 갖고 있어. 국적은 종이 하나로 바꾸는 것이 가능하지만, 민족의 피는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니깐."

- 2018년 조선일보 인터뷰 中 #

이름은 장훈(張勳)이며 일본 이름은 하리모토 이사오(張本勲). 애칭은 '하리상(張さん)' 또는 '하리(張, ハリー)'. 일본 히로시마현 히로시마시에서 태어난 대한민국 국적의 前 야구선수.

데뷔 시즌인 1959 시즌에 신인왕을 수상하고 1962 시즌에는 일본시리즈 우승[9]퍼시픽 리그 MVP를 수상했으며 통산 2,752경기 출장, 통산 타율 .319, 3,085안타, 504홈런, 1,676타점, 319도루, 수위타자 7회, 최고출루율 9회, 베스트나인 16회의 활약을 하며 '안타 제조기'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더욱 대단한 것은 화상으로 인한 오른손 장애[10]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피폭[11]을 극복하고 이러한 타격 실력을 보여줬다. 이러한 맹활약으로 현역 말엽인 1978년 7월 24일 명구회 발족 멤버가 됐고 1990년에 일본야구전당에 헌액되었다.

1981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한 후에는 모국인 대한민국의 프로야구 리그 출범에 큰 도움을 줬으며 TBS 테레비 등에서 해설자와 평론가를 맡아 야구계에 대한 조언이나 쓴소리를 자주 한다. 장훈을 잘 모르는 젊은 팬들 중 일부는 한물간 노인이 무슨 자격으로 쓴소리를 하느냐고 비판하기도 하지만 정작 일본 야구 선수들은 그의 쓴소리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듣는 편이다. 그가 선수 시절 세운 기록이 워낙 넘사벽인데다 도덕적으로도 흠결이 없는 슈퍼스타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 야구 선수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는[12] 어른 중 한 명이 장훈이다.

일본에서 태어나 선수 생활을 일본에서만 했고 이후에도 일본을 주 활동 무대로 하고 있지만 끝까지 대한민국 국적을 바꾸지 않고 활약한 위대한 한국인이다. 더구나 그가 활동하던 시절에는 한국인에 대한 일본인들의 멸시가 극에 달했던 시기였으나 스스로 일본인들의 멸시와 차별, 질투와 시기를 이겨냈고[13] 일본 구단 측의 끈질긴 귀화 요청도 거부한 끝에 한국인 선수로서 일본프로야구 최고의 타자로 우뚝 서면서 한국인으로서의 위상을 드높였다. 그 덕에 1980년에는 체육훈장 맹호장을 수훈했고, 2007년에는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훈했다.

3. 유소년기[편집]





4. 선수 경력[편집]



파일:npb3000hit.jpg

장훈의 선수 경력



4.1. 연도별 기록[편집]


파일:NPB 로고.svg 장훈의 역대 NPB 기록
연도
소속
경기
타석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볼넷
장타율
출루율
OPS
1959
도에이
125
454
.275
115
18
5
13
57
48
10
29
.435
.328
.765
1960
106
414
.302[14]
116
25
3
16
56
49
15
26
.508
.351
.859
1961
129
526
.326
159
31
10
24
95
77
18
46
.596
.401
.997
1962
133
528
.333
157
24
4
31
99
89
23
86
.597
.440
1.037
1963
150
626
.280
148
16
7
33
96
90
41
92
.524
.389
.913
1964
129
547
.328
151
21
6
21
72
85
31
78
.536
.426
.962
1965
132
538
.292
133
13
3
23
88
61
29
72
.486
.394
.879
1966
122
493
.330[15]
146
13
2
28
90
67
10
43
.558
.391
.949
1967
120
499
.336
139
18
3
28
88
72
18
66
.597
.439
1.035
1968
114
432
.336
122
12
2
24
65
70
13
61
.579
.437
1.015
1969
129
557
.333
160
27
1
20
67
77
20
71
.519
.421
.940
1970
125
537
.383
176
16
2
34
100
92
16
64
.649
.467
1.116
1971
128
546
.313
150
21
3
26
78
73
18
59
.531
.390
.921
1972
127
548
.358
169
25
4
31
89
93
10
69
.625
.443
1.068
연도
소속
경기
타석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볼넷
장타율
출루율
OPS
1973
닛타쿠홈
128
550
.324
143
18
0
33
93
77
12
93
.590
.448
1.038
연도
소속
경기
타석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볼넷
장타율
출루율
OPS
1974
닛폰햄
120
491
.340
138
20
3
14
62
64
14
82
.507
.452
.959
1975
119
473
.276
113
12
2
15
46
45
6
58
.424
.367
.791
연도
소속
경기
타석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볼넷
장타율
출루율
OPS
1976
요미우리
130
574
.355[16]
182
35
5
22
93
89
8
51
.571
.417
.998
1977
122
493
.348[17]
153
16
6
24
82
67
3
40
.575
.409
.984
1978
115
456
.309
131
17
1
21
73
53
1
27
.502
.353
.854
1979
77
255
.263
60
7
0
8
32
26
1
23
.399
.333
.732
연도
소속
경기
타석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볼넷
장타율
출루율
OPS
1980
롯데
102
370
.261
89
9
0
12
39
50
0
26
.393
.317
.710
1981
70
175
.219
35
6
0
3
16
9
2
12
.313
.273
.586
NPB 통산
(23시즌)

2752
11122
.319
3085
420
72
504
1676
1523
319
1274
.534
.399
.933

  • 파란색 굵은 글씨는 해당연도 1위 기록, 붉은색 굵은 글씨역대 일본 프로야구 최고기록


4.2. 각종 기록 및 타이틀(NPB)[편집]


  • 통산 출장경기 : 2752경기 (역대 3위)
  • 통산 타율 : 0.31915 (역대 4위)[18]
  • 통산 안타 : 3085개 (역대 1위)
  • 통산 홈런 : 504개 (역대 7위)
  • 통산 타점 : 1676 타점 (역대 4위)
  • 통산 도루 : 319 도루 (역대 20위)
  • 통산 희생번트 : 4개
  • 통산 희생플라이 : 90개 (역대 5위)
  • 통산 사사구 : 1274개 (역대 3위)
  • 통산 사구 : 78개
  • 통산 고의사구 : 228개 (역대 2위)[19]
  • 통산 삼진 : 815 삼진
  • 통산 병살타 : 145개


4.2.1. 타이틀[편집]


  • 신인왕 (1959)
  • MVP - 1회 (1962)
  • 수위타자 - 7회 (1961, 1967~1970, 1972, 1974) ※일본 타이 기록[20]
  • 최고출루율 - 9회 (1962, 1964, 1967~1970, 1972~1974)
  • 최다안타 - 3회 (1970년, 1972년, 1976년) - 당시는 타이틀이 아님[21]
  • 베스트 나인 - 16회 (1960~1970, 1972~1974, 1976~1977)
  • 올스타전 - 18회 (1960~1964, 1966~1978)
  • 올스타전 MVP - 3회 (1960년 제3차전, 1962년 제2차전, 1974년 제3차전)
  • 사이클 히트 1회 (1961.5. 7)
  • 일본시리즈 타격상 - 1회 (1977)
  • 일본 프로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 (1990)


4.2.2. 주요 기록[편집]


  • 시즌 타율 : .3834 (1970년) ※역대 4위, 달성 당시에는 일본 기록.[22]
  • 4년 연속 수위타자 (1967~1970) ※역대 2위[23]
  • 시즌 타율 3할 5푼 이상을 양대 리그에서 기록 (도에이 : 1970년, 1972년 / 요미우리 : 1976년) ※일본 유일 기록
  • 시즌 타율 3할 이상 : 16회 (1960년 ~ 1962년, 1964년, 1966년 ~ 1974년, 1976년 ~ 1978년) ※일본 기록.
  • 시즌 타율 3할 3푼 이상 : 11회 (1961년, 1962년, 1966년 ~ 1970년, 1972년, 1974년, 1976년, 1977년) ※일본 기록.
  • 9년 연속 시즌 타율 3할대 이상 (1966년 ~ 1974년) ※일본 기록.
  • 시즌 150안타 이상 : 9회 (1961년, 1962년, 1964년, 1969년 ~ 1972년, 1976년, 1977년) ※역대 2위 타이.
  • 시즌 100안타 이상 : 20회 (1959년 ~ 1978년) ※역대 2위.
  • 시즌 20홈런 이상 : 16회 (1961년 ~ 1973년, 1976년 ~ 1978년) ※역대 3위 타이.
  • 타격 10위권 진입 : 17회 (1960년 ~ 1974년, 1976년, 1977년) ※일본 타이 기록.
  • 타격 10위권 15년 연속 진입 (1960년 ~ 1974년) ※퍼시픽 리그 기록.
  • 20년 연속 시즌 100안타 이상 (1959년 ~ 1978년)[24]
  • 20년 연속 시즌 두 자릿수 홈런 (1959년 ~ 1978년) ※역대 4위 타이.
  • 13년 연속 시즌 20홈런 이상 (1961년 ~ 1973년) ※역대 3위 타이.
  • 16년 연속 시즌 두 자릿수 도루 (1959년 ~ 1974년)
  • 9타수 연속 안타 (1974년 5월 23일 ~ 5월 26일)
  • 30경기 연속 안타 (1976년 5월 13일 ~ 6월 20일)
  • 13타석 연속 출루 (1974년 5월 23일 ~ 5월 26일)
  • 1이닝 2개의 2루타 (1961년 5월 6일) ※일본 타이 기록.
  • 만 32세 2개월 만에 통산 2000안타 달성 (1972년 8월 19일) ※최연소 기록이자 역대 2위.
  • 1733경기 만에 통산 2000안타 달성 (1972년 8월 19일) ※역대 3위.
  • 2185경기 만에 2500안타 달성 (1976년 6월 10일)
  • 일본 시리즈 통산 타율 : .370 (73타수 27안타) ※70타수 이상에서는 역대 1위
  • 통산 타율 3할대·500홈런·300도루 ※사상 유일


4.3. 상징적인 등번호 10번[편집]


데뷔 첫 해부터 은퇴할 때까지 3팀에서 썼던 등번호 '10번'은 영구결번은 아니지만 그 뒤 여러 야구 후배들에게 좌타자의 상징적인 번호가 되었다.

  • 장효조는 롤모델인 장훈의 등번호 10번을 삼성에서 달고 싶었으나, 선배 허규옥이 차지하고 있어서 사용하지 못했다. 결국 사정사정하여 허규옥이 등번호를 14번으로 변경하고, 장효조가 10번을 차지한다.
  • 양준혁장효조와 장훈을 본받는 좌타자가 되고 싶다며 삼성 데뷔 시절부터 10번을 사용했고 영구결번의 영예를 안았다.
  • 김기태도 장훈을 롤모델로 삼아 아마추어 시절부터 등번호 10번을 사용했고, 쌍방울 레이더스에 입단하고[25] 1994년부터는 등번호 10번을 사용했다. 10번을 달기 시작한 1994년에는 커리어 사상 첫 홈런왕에 오르기도 했다. 장훈과 김기태는 한일 슈퍼게임과 쌍방울의 일본 스프링캠프 타격지도 등으로 여러 번 만난적이 있다.

그 외에도 이정훈, 이숭용, 김민호 등 리그에서 이름을 떨쳤던 왼손타자들은 장훈의 영향을 받아 '10번'을 선호했다. 2023년 기준 NC 다이노스박세혁LG 트윈스오지환[26] 등이 10번을 달고 있다.


5. 은퇴 이후[편집]


파일:external/7e9c12403e7bd3bffe499c30072200b297e863d2c92edb9783e554231c92e21f.jpg

네놈에게
떽!


은퇴 후 줄곧 해설가 및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고, TV방송에서 연예인 못지 않는 입담을 과시하고 있다. 아래의 예를 보자면 그의 기믹은 호통치는 거성의 이미지인 듯.[27] 그래서, 은퇴 이후 플레잉 코치로 잠깐 있었던 것을 제외하면 현재까지 지도자로 일을 한 적은 없었다.

TBS 테레비계 선데이 모닝의 코너 '주간 고견코너'에 오사와 케이지와 함께 고정출연하고 있다. 내용은 아무래도 야구 중심이지만, 방송 초기부터 인기를 얻고 있어 방송 분량을 많이 뽑아내고 있다. 오사와 케이지는 2010년 10월 7일 향년 78세로 사망했다. 이후 장훈 옹의 파트너는 주로 일본프로야구 OB들이 게스트 형식으로 출연하여 매주 바뀌고 있다.

떽! 이라며 꾸짖는 모습은 프로그램의 명물이 되었다. 원래는 불교식 호통소리인 ([28]), 일본어로는 가츠. 닛폰햄 직속 후배인 신조 츠요시에게는 항상 엄하게 대하는데 닛폰햄의 캠프에 갔을 때에는 백네트 뒤에 있던 신조로부터 반대로 "떽!" 소리를 듣기도 했다. 하지만 실제로 장훈은 신조를 꽤 높게 평가하는데, 신조가 2006년을 마지고 은퇴를 발표했을 때에는, "곤혹스럽네요"고 이야기하며 그때만큼은 "떽" 하지 않았다. 그 흔한 타격 타이틀 한 번도 차지한 적이 없는 기요하라 가즈히로에게 "말도 안 되네요"라고 폄하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일본 프로야구를 빛낸 후배이니 최근에는 이에 대해 특별히 언급하지는 않고 있다.

2008 베이징 올림픽 당시 일본 야구 대표팀이 한국과 미국에 패배해 메달 획득에 실패하자, 엄청난 독설을 퍼부었다. 호시노 센이치 감독은 물론, 같이 따라갔던 다부치 코이치, 야마모토 코지 코치, 심지어 일본프로야구연맹도 같이 박살이 났다. 얼마나 "떽!"을 퍼부었는지 옆에 있던 오사와 케이지가 "어유 오늘 무섭군요"라고 한마디 보탰을 정도.

마스터즈 토너먼트 리그(OB리그)에서 삼진을 당하면 거꾸로 팬으로부터 "떽!"이라 야유를 받는다. 그리고 그 장면이 TV에 나오곤 하면 스스로 "떽!" 하며 꾸짖는다. 2005년에는 마스터즈 토너먼트 리그에 참가한지 5년 만에 첫 안타를 때렸다. 본인은 "투수인 호시노 노부유키가 적당히 던진 공을 쳤을 뿐"이라며 겸손하게 말했다.

보수적이고 완고한 성격 때문인지 남자 선수가 우승을 하거나 은퇴를 할 때 감정에 복받쳐 우는 장면이 나오면 불쾌하다는 듯 "남자가 사람들 앞에서 훌쩍훌쩍 울면 못쓴다! 떽이다!!"라고 하는 투의 코멘트를 날린다. 이런 투의 발언은 장훈 옹의 유행어 내지는 트레이드 마크로 정착된 듯 한데, 이 얘기를 할 때 다른 해설자나 사회자는 킥킥대곤 한다. 한편, 여성에게는 "떽!" 대지는 않지만 가끔 부진을 보이는 선수에게는 "떽!" 대곤 한다. 한 예로, 부진을 거듭하고 있던 프로골퍼 미야자토 아이에게 "떽!" 하고 일갈했다. 2005년 NHK배 국제 피겨 스케이팅 대회에서 우승을 하고 감격에 겨워 통곡하던 오다 노부나리에게는 "반(半) 떽이다!"라고 호통을 쳤다. 사회자인 세키구치 히로시를 비롯해 다른 해설자는 장훈의 "떽!"에 실소했으며, 오사와는 반대로 "오오오! 멋진데!" 하고 격찬(?)했다. 요코하마 디엔에이 베이스타즈이시이 타쿠로가 2006년 5월 11일 대 라쿠텐 전에서 통산 2000안타를 기록하고 경기 후 인터뷰에서 눈물을 흘리며 이야기를 했을 때는 정말 드물게 "훌륭하다(天晴)!"라고 말했다. 뒤이어 "자연스럽게 흘린 눈물이니까. 게다가 눈물을 흘리면서도 제대로 인터뷰하고 있지 않는가" 하고 격찬했다. 참고로 이시이 타쿠로는 투수로서 승리를 기록하고[29] 이후 타자로 전향한 선수 중에서 2번째로 2000안타를 기록했다. 첫 번째는 카와카미 테츠하루 전 요미우리 감독.

야구에 대한 생각은 꽤 보수적이다. 특히 일본프로야구 정상급 선수들의 미국 메이저리그 진출에 대해 우려하고 있는 전문가 중 한 명인데 "일본야구에 신세를 졌는데 감사하는 마음이 없다."라고 호통치기도 했다. 그 때문에 메이저리그일본인 메이저리거에 대한 얘기는 별로 하지 않는다. 심지어 미국에서 일본프로야구로 복귀하는 선수에 대해서는 1년 간의 출장금지 페널티를 주자는 의견을 서슴없이 내기도. 이러한 입장은 2012년 현재도 마찬가지여서 이 선수, 저 선수, 그 선수 등이 메이저리그 진출을 선언한데 대해 가차없이 떽!을 날렸다. 2012년 말 오타니 쇼헤이가 메이저리그 진출과 일본 잔류를 두고 갈등을 할 때도 대놓고 반대한 것까지는 아니지만 "좀더 힘을 길러서 가는 것이 좋다"는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다.[30] 또한 2013년 WBC 3회 대회에 일본프로야구 노조가 참가 거부를 밝히자 "그동안 노조가 하는 짓이 맘에 안 들었는데[31], 처음으로 노조의 행동이 맘에 든다."라고 이야기까지 했다. 이쯤되면 장훈 옹의 메이저리그에 대한 시각이 그리 좋지 않음을 알 수 있다.[32] 비슷한 생각으로 2013년 7월에는 토론토 블루제이스에서 부진한 모습을 보였지만 클럽하우스의 분위기메이커 노릇을 하던 가와사키 무네노리를 두고 "타율 2할 2푼을 못치는게 선수냐?"는 말을 방송에서 했다가 다르빗슈 유가 트위터로 "가와사키는 팀에 꼭 필요한 선수다. 그 방송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것인가. 선수를 헐뜯기 위해서?"라며 일갈을 하기도 했다. 이에 일본 언론과 팬들은 다르빗슈가 친정팀 대선배를 대놓고 비판한 것을 두고 갑론을박을 벌였다.

일본프로야구에 대단한 긍지와 자부심, 그리고 애정을 가지고 있으며, 미국야구 같은건 보고 싶지 않다고 하였다. https://www.youtube.com/watch?v=AM2VI99yWow MLB가 보고싶은 이유는 오타니 선수의 연이은 대활약을 보려고라고 말할 정도로 NPB 출신 선수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엄청남과 동시에, 미국 메이저리그에 대한 시각이 좋지 않다.

이렇듯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일본인 선수에 비판적인 장훈도 우에하라 고지만큼은 칭찬해 줬는데...문제는 그 발언 수위가 높다는 것. “우에하라 공은 美 애송이들이 칠 수 없다"[33]는 명언을 남겼다. 다만 이점과 위의 메이저리그에 대한 보수적인 시각은 그가 어릴 적 미국의 핵공격에 의해 큰누나를 비롯한 주변인을 잃었다는 점이 작용했을 수도 있다. 물론 일본이 자초한 전쟁이라지만 일본인도 아닌 본인이 실제로 피해를 입은 당사자이니 개인감정적으로는 미국에 반감을 가질 수 있고 실제로 본인 자서전에서 미국에 대한 증오심을 피력하기도 했다.

어릴 때부터 교진군에 대한 강한 동경과 애정이 있었다. 그 때문에 마쓰이 히데키가 교진군을 뛰쳐나와 뉴욕 양키스에 입단했을 때나 카와이 마사히로[34]가 은퇴를 철회하고 주니치 드래곤즈로 이적했을 때에는 맹렬한 비난을 퍼부었다.

한민족이라는 같은 피가 흘러서 그런지 이승엽에게는 절대로 "떽!" 대며 일갈하지 않았다. 이승엽치바 롯데 마린즈(2004~2005) 시절, 바비 발렌타인 감독의 2군행의 지시에 대해서는 "승엽이가 컨디션을 되찾으면 수십 승을 하는 데 원동력이 될 수 있는데, 발렌타인은 눈앞의 승리에 안달났다."라고 비판했다. 이 때부터 장훈은 "승엽이가 도움을 요청해오면 언제라도 힘이 되고 싶다"라고 이야기하며 옆에서 많이 격려를 해줬으며, 특히 2006년 교진으로 이적하고 맹활약을 펼쳤을 때 2007 시즌을 앞두고 트리플크라운도 가능하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2010년 이승엽의 연봉이 6억엔(약 84억원)에서 5,000만엔(약 7억원)으로 대폭 삭감에 그칠 것이라는 이야기가 돌 때, 장훈은 '그런 대접을 받고 일본에 (이승엽이) 있을 필요는 없다'며 '협상 과정에서 연봉이 올라갈 수는 있겠지만, 일본에 남는 것보다 빨리 돌아와 한국 야구 발전을 이끌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35]

2015년 4월 중순에 자신이 출연하는 코너에서 이번에는 현역 최고령 축구선수인 미우라 카즈요시를 저격하했는데, J2리그는 야구로 말하면 2군이니까 화제성이 없다, 나이 먹었으면 은퇴하고 지도자에 도전하라는 발언으로 논란이 되었다. 사실 이는 장훈이 2부 리그의 개념 자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36] 장훈의 발언으로 인해 일본 축구계는 격분했다. 이 발언은 축구를 넘어, 일본 프로스포츠의 살아있는 전설 그 자체를 말도 안되는 논리로 비난한 것이며, 일본프로축구의 수준을 폄하한 것이기 때문. 나아가 일본 프로스포츠계 전체를 통틀어서도 "너무한 것 아니냐" "당장 발언 취소하고 사과하라"는 격한 반응이 일고 있다. 평소 J리그를 달가워하지 않는 국내 축구팬들도 "장훈이 도대체 누군데 망언을 하냐"며 미우라를 옹호했다.[37] 하지만 정작 미우라 본인은 장훈같은 사람이 자신을 알아준다는 것 자체가 영광이다, 더 열심히 하란 소리로 알겠다며 센스있게 받아쳤다. 덕분에 수위 높은 발언을 한 장훈만 뻘쭘해졌다. 참고로 미우라는 오랜 요미우리 팬[38]이라고 한다.[39]

KBS에서 장훈의 다큐를 제작했는데, 이때 모교 후배들이 달려와 자신들에게 "떽!"을 외쳐달라고 했으나 '떽(喝)'의 일본 발음인 '카츠'가 승리(勝)의 일본 발음과 유사해서 KBS 방송 자막엔 '떽'이 아닌 '승리'라는 오역 자막이 나왔다. 한편 이 방송에서 장훈의 능숙한 한국어를 들을 수 있는데 일본에서 평생을 살아온 재일교포임에도 한국어 발음이 비교적 좋은 편이다.# 그리고, 형과 어머니의 묘에 성묘하면서 본인은 '인동 장씨'임을 밝혔다.

2015 WBSC 프리미어 12 준결승 때 선발 오타니 쇼헤이를 7이닝만 쓰고 내린 고쿠보 히로키 일본 대표팀 감독에게는 너무 안이한 생각을 했다며 맹독설을 퍼부었다. 오히려 오타니 쇼헤이를 더 길게 가져가야 했어야 한다고.

2019년 7월 28일의 고견 코너에서는, 163km를 던지는 유망주 사사키 로키가 혹사 우려 때문에 코시엔 이와테현 대회 결승전에 등판하지 않아 결국 팀이 패배한 일을 두고 감독과 선수를 맹비난해 논란이 되었다. 고령에 보수적인 야구관이야 익히 알려져 있지만, 이날 한 발언들인 "4번 등판에 450개밖에 안 던졌다" "부상이 두려우면 스포츠를 그만둬야 한다" "감독이 미국물이 들었다. 미국에서는 투수를 소모품이라 생각하지만, 동양인은 던지고 또 던져서 성장한다" 를 보면 현재의 야구 상식과는 동떨어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위의 가와사키 건으로 장훈을 비판한 적이 있던 다르빗슈 유는 본인 트위터에서 "신룡에게 소원을 빌 수 있다면 이 코너를 폐지해달라고 하고 싶다" 라고 재차 비판했다. 이후 사사키 로키가 프로에 진출한 뒤로도 소속팀인 치바 롯데 마린즈는 이런 장훈의 의견과는 정반대로 특별 대우라는 비판이 나올 정도로 장기간에 걸쳐 선수를 매우 세심하게 관리 및 육성했고 결국 2022시즌 퍼펙트 게임이란 대기록으로 보답을 받았다.

2020 도쿄 올림픽에서는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의 금메달을 예상했고, 그렇게 되었다. 이어서 일본 여자 복싱 금메달리스트인 이리에 세나에 대해 "결혼도 안 한 아가씨가 얼굴을 때린다니. 이런 경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구나"라고 말해 한일 양국 모두 성차별 및 시대착오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일본복싱연맹은 이 발언이 나왔던 TBS 방송사에 항의했고 장훈은 이에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2021년 11월, 2021년을 끝으로 개인 사정으로 선데이 모닝에서 하차한다는 뜻을 밝혔다. 2022년부터는 선데이 모닝에 부정기 게스트로 출연할 예정이다.

한 분야의 레전드이자 대선배지만 완고하고 거칠며 구설수에 오를 말을 많이 한다는 점, 그리고 재일교포 출신이란 점에서 와다 아키코와 비슷하단 의견도 가끔 보인다.[40] 실제로 와다 아키코가 후배인 야스다 미사코를 상대로 실언을 해서 욕 먹을 때 장훈과 비슷하게 쓸데없는 말만 한다는 의견이 인터넷에 있었다(...).

6. 재일 한국인으로서[편집]


국적은 종이 하나로 바꾸는 것이 가능하지만, 민족의 피라는 것은 그럴 수 없죠.

ㅡ KBS와의 인터뷰에서,#


지금은 한류 붐 등으로 한국인이란 사실을 공공연히 밝히는 재일교포도 많아지고 있지만, 장훈이 현역으로 뛰던 시절에는 애초부터 국적을 밝힌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일본에 건너온 후, 죽기 전까지 일본어를 배우려고 하지 않았던 완고한 모친의 영향이 컸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장훈은 2023년 현재까지도 일본으로 귀화를 선택하지 않고 여전히 대한민국 시민권을 유지하고 있다.

그 한편으로는, 태어나서 자라고 입지를 세운 일본에 대한 생각도 깊어, 2004 아테네 올림픽에 출장하는 일본 야구 국가대표 선수들에게 "일본의 국위를 짊어지고 있다고 생각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민족 교육은 받지 않았지만, 가정 내에서는 어릴 적부터 한국어로 말하며 자란 관계로 지금도 한국어는 능통하다. 1991년에 일본에서 개최된 제 1회 한일 야구 슈퍼게임의 중계에서는, 대한민국 TV 방송 측의 야구 해설자로서 출연해, 막힘없는 해설로 한국의 야구팬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블라디미르 발렌틴이 왕정치의 단일시즌 홈런 신기록 55개에 근접했을때는 '정정당당하게 승부하라'고 조언했다.

위에 언급했지만 고교시절에는 재일 한국인 선발팀에 선정되어 한국으로 원정을 가서 고국의 야구팬들에게 대 환영을 받았다고 한다. 동대문야구장이 철거될 무렵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내가 옛날 여기서 엿장수한테 엿도 사먹고 그랬는데.."라고 그 시절을 회고했다.

같은 재일교포인 프로레슬러 역도산과도 친분이 깊었다. 둘 다 천성이 거칠었던 탓에 술자리에서는 여러 가지 사건이 있었던 듯 하다. 어느 날은 장훈이 역도산에게 "한국인이라는 것을 밝히는 게 어떻겠는가?"라고 제의하자 역도산은 분개하며 "너는 내가 당한 차별을 알고서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이냐?"라며 호통을 쳤다고 한다. 사실 역도산은 스모 리키시 시절 차별을 받았던 트라우마 탓에 일상 생활에서도 한국어를 전혀 쓰지 않았고[41], 역도산야쿠자에게 피살당할 때까지 그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대다수였고 실제로 일본인들 중 아직도 모르는 사람은 많다.

당시 일본프로야구계에서는 웨이트 트레이닝의 중요성을 간과하여 야구선수가 배트보다 무거운 것을 드는 걸 금기시 하던 시기였는데 장훈은 '체력'을 강조하는 역도산의 권유를 받아 역도산의 레슬링 도장에서 본격적인 웨이트 트레이닝을 받았다.

그가 현역에서 은퇴한 이듬해인 1982년 한국프로야구 출범 이후 2005년까지 한국야구위원회(KBO) 총재 특별 보좌관직을 맡았다. KBO 창설 당시 많은 도움을 줬다고 한다. 그래서 그 당시 큰 경기나 행사가 있을 땐 나가시마 시게오와 스승 미즈하라 시게루를 함께 초청하여 모셨을 정도.[42][43] 특히 일본에서 전성기를 지났거나 여러 차별로 별 활약을 못한 재일 한국인 선수들을 한국프로야구에 뛰게 추천한 이도 바로 장훈 옹이다.(대표적인 사례가 송재박이다.) 일본의 스포츠 선수 출신으로서 대한민국 문화 훈장을 받은 유일한 인물이다.


7. 여담[편집]





8. 어록[편집]


"현역 시절 3,085개의 안타를 쳤지만 단 한번도 즐거웠던 적이 없습니다. 필사적으로 쳤지요. 다시 태어나도 두 번 다시 야구 선수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 되돌아보면 잘 해도 70~80%는 실패했으니까요. 23년간 괴로웠습니다."#

- 2017년 중앙일보 인터뷰 中


타격은 여자의 마음과 같다. 오늘 잘 맞다가 다음 날에 맞지 않는다.


2할 9푼을 치는 타자와 3할 타자의 차이는 단순하다. 2할 9푼 타자는 4타수 2안타에 만족을 하지만, 3할 타자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4타수 3안타 또는 4타수 4안타를 치기 위해 타석에 들어선다.



9. 둘러보기[편집]



[1] 아내도 재일교포다.[2] 현) 히로시마현 세토우치 고등학교[3] 현) 오사카 체육대학 나미쇼 중・고등학교[4] 플레잉 코치[5] 과거부터 현재까지도 일본 국적으로 귀화하지 않았다. 장훈이 야구계 후배들과 연예계에서 크게 존경을 받는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6] 추신수는 올스타급까지 찍었고, 누적 역시 준수하지만 텍사스 시절 먹튀 때문에 명전은 불가능한 성적이다. 과거 박찬호를 포함해서 김하성과 강정호, 류현진은 솔리드 스타터급이지만 장훈은 NPB 역사상 손에 꼽는 레전드이다. 당장 통산기록만 보아도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마일스톤인 3000안타와 500홈런을 NPB에서 모두 달성했다. 물론 선술한 네 명은 메이저 선수이지만 장훈이 뛰던 시절에는 장훈보다 커리어가 아래였던 백인천조차 40 먹고 4할을 칠 정도로 한국 야구와 일본 야구의 격차는 극단적이었다. 물론 1970년대 당시에는 메이저와 NPB의 격차도 그만큼 컸기에 장훈이 MLB에서 주전급 외야수로 10년을 넘게 버틴 추신수, 그리고 류현진이나 박찬호 등보다 높게 평가받지는 못한다.[7] 이후 강정호의 MLB 활약으로 추강대엽이라는 한국 야구 타자 본좌 라인과 관련한 논쟁이 촉발되었는데, 본래 거론되던 (혹은 추승호)에 한국인으로 확장한다면 장훈이 들어가야된다는 이야기가 있어왔다. 다만 강정호의 활약이 진행되던 시점(2015년 말~2016년)이라 추강대엽으로 이야기되어 오다가, 강정호가 음주운전 사건을 일으켜 커리어가 끝나버린 이후론 추장대엽으로 의견이 굳어지고 있다.[8] 동판 속 장훈은 역대 소속됐던 도에이 플라이어즈-닛폰햄 파이터즈/요미우리 자이언츠/롯데 오리온즈 중에서 요미우리의 모자를 썼는데 아마도 요미우리 시절 커리어 사상 단일 시즌 최다안타(1976년 시즌 182안타)를 기록했던 것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9] 이 우승이 장훈의 처음이자 마지막 일본시리즈 우승이다.[10] 엄지가 바깥쪽으로 휘어졌고, 넷째 손가락새끼손가락이 붙어있다. 이 사고로 인해 원래 오른손잡이지만 야구를 하기 위해 왼손잡이로 전향했다.[11] 피폭을 숨기고 있다가 환갑이 넘어서야 사실을 밝혔다. #기사[12] 스즈키 이치로가 가장 존경하는 스타이자 롤모델이 바로 장훈이다.[13] 장훈과 동시대에 도에이와 롯데에서 현역 생활을 같이 했던 후배 백인천이 회상한 바에 따르면 당시 내야 관중석에 앉아있던 상대팀 극성 팬들이 외야 관중석으로 넘어와서 장훈과 백인천을 향해 "야! 조센징!"이라고 부르면서 욕설과 조롱을 시전했다고 한다. 이 욕설과 조롱은 두 사람이 출장하는 거의 매 경기마다 이어졌다. 게다가 팬들은 물론 같은 선수들끼리도 멸시와 조롱은 극심했다. 그가 타석에 들어설 때 옆에 있던 상대팀 포수가 욕을 하는 것은 예사였고 심지어 같은 팀의 일본인 선수들까지도 장훈을 향해 "조센징!"이라고 부르며 욕을 했다고 한다. 물론 장훈이 본인의 실력을 제대로 보여준 후에는 누구도 장훈을 향해 욕을 하지 못했다.[14] 타율 4위[15] 타율 2위[16] 타율 2위 - 1위와 단 1모 차이[17] 타율 2위 - 1위와 1푼 차이[18] 1위는 아오키 노리치카, 2위는 레론 리, 3위는 와카마츠 츠토무. 단 1위인 아오키는 2018년 기준으로 현역이므로 순위가 변동될 가능성이 있다.[19] 1위는 427개의 오 사다하루.[20] 7년 연속 수위타자 기록을 가진 스즈키 이치로가 공동 보유하고 있다. 이치로가 타이기록을 달성한 후에 MLB에 진출하였고, NPB 복귀 없이 은퇴하면서 기록 갱신은 하지 못하였다.[21] 1994년부터 시상되었다.[22] 역대 1위는 랜디 바스(1986년)의 0.389, 역대 2위는 스즈키 이치로(2000년)의 0.387, 역대 3위는 스즈키 이치로(1994년)의 0.385이다.[23] 역대 1위는 스즈키 이치로의 7년 연속 타격왕 기록(1994~2000)이다.[24] 20년 이상 연속으로 시즌 100안타를 기록한 것은 오 사다하루와 장훈 뿐이며, 입단 1년차부터 한정하면 장훈이 유일.[25] 1991년 입단 당시부터 1993년까지는 선배 김호근에 밀려 3번을 달았다.[26] 경기고 시절에 10번을 달아서 2019년부터 10번을 달고 있다.[27] 하지만 박명수는 철저히 예능형에 가깝다. 박명수는 완고한 스타일이라기 보단 오히려 출연자들에게 독설을 퍼부은 만큼 역관광당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장훈은 뚝심있게 호통을 이어가는 스타일.[28] 한국에선 꾸짖을 갈로 더 유명한 한자다.[29] 투수로서 통산 1승 4패 기록.[30] 장훈 옹은 오타니가 투타겸업을 선언하자 그의 트리플 크라운급 타격재능에 흠뻑 반하여 160km/h를 던지는 투수로서의 자질도 좋지만 타격에 집중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피력하기도 한 몇 안 되는 전문가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 사실상 오타니라는 선수 자체에 흠뻑 빠져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31] 2004년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의 해체로 일본프로야구 재편문제가 있었을 때, 요미우리 자이언츠 등을 중심으로 10개구단 단일 리그로 환원하자는 구상이 거론되었다. 이에 후루타 아츠야 선수회장과 긴테쓰의 이와쿠마 히사시 등 선수들을 중심으로 거센 반발이 있었고, 선수회가 파업까지 불사하며 격렬히 반대한 것을 의미한다. 장훈 옹은 이 구상을 지지하는 입장에 있었다.[32] 그런데 1960~70년대에 MLB-NPB의 친선경기를 하면 MLB 측에서 MLB에서 당장 통할 선수로 장훈 옹을 꼽았다는 건 아이러니한 사실이다.[33] 이 기사에 대해 "일본 기사 번역 과정에 문제가 있던거 아닌가, 기자가 방송을 곡해한 것 아닌가"라는 반응도 있었는데 그렇지 않다. 장훈은 같은 방송 패널인 가네다 마사이치와 함께 "메이저 타자들은 'ヘボ(일본어 "下手"와 비슷한 뉘앙스라고 보면 된다. 서투르다, 어설프다 등의 의미. 젊은이들은 잘 쓰지 않는다.)'" "메이저 타자들은 떨어지는 공 던지면 그냥 아웃"라는 발언을 다르빗슈가 메이저에서 활약한 2012년부터 자주 해 왔다. 한국에서야 저 기사로 처음 알려져서 화제가 되었지, 오히려 기사에 나온 해당 일자 방송은 일본에서는 그다지 화제도 되지 않았다. 장훈이 한두번 저런 발언을 한것도 아니고 해서.[34] 전 요미우리 유격수, 선수회장 역임, 번트의 달인.[35] 다만, 이승엽은 2010년 한국 복귀 인터뷰에서 장훈의 5,000만엔 발언이 싫었다고 말하였다.[36] 축구에서 2부 리그 소속 클럽들은 각자 팀 내 최정예 선수들을 구성하여 1부 리그 승격을 위해 사활을 건다. 그리고 이런 2부 리그 클럽들도 2군 팀은 따로 갖고 있다. 당장 대한민국 프로축구 2부 리그인 K리그 챌린지 소속 클럽들도 1부 리그 클럽들과는 별개로 2군 팀과 유스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이는 J2리그도 마찬가지. 유럽으로 확대해보자면 잉글랜드 4부 리그 프로 클럽들도 각자 2군 팀을 보유하고 있다.[37] 사실 국내 축구팬들은 예전부터 일본인 선수더라도 미우라에겐 존경을 표해왔다. 1967년생으로 2015년 기준으로 40대 후반이니 선수는 커녕 축구 감독으로서도 마냥 젊기만 하진 않은 나이에 프로 축구 선수로서 조커로라도 활약할 정도로 자기관리가 된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것이기 때문. 나카타 히데토시, 혼다 케이스케와 더불어 일본 선수임에도 국내 축구팬들에게 크게 지지받는 선수다.[38] 미우라가 J리그에서 데뷔했을 당시 소속팀인 베르디는 요미우리-니혼테레비 미디어그룹에서 소유하고 있었다.[39] 이걸 비유하자면 김응용이나 김성근이 김병지나 이동국보고 은퇴하라고 쓴소리하는거랑 같다. 하지만 우리나라 어떤 스포츠 원로들도 타종목 선수에게 일갈하진 않는다. 일종의 불문율. 그랬다간 그 종목 팬들로부터 어마어마한 폭격을 맞을 것이다.[40] 단 와다는 일본 국적으로 귀화했다.[41] 어느 날 역도산이 수제자 김일과 잡담을 하던 중 기쿄(桔梗, 도라지)라는 단어를 꺼냈는데, 김일이 기쿄의 뜻을 모르는 눈치를 보이자 역도산은 김일에게 "기쿄를 모르나? 도라지라는 뜻이다"라고 일러준 적은 있었다. 김일이 그에게서 들은 유일한 한국어가 "도라지"라는 단어였다고 한다. 방한했을 때도, 높으신 분들과의 대담에서 한국어를 다 잊어버린 척 했다고 한다.[42] 미즈하라는 한국프로야구 출범 전 한국을 방문하여 강연회를 개최하기도 했지만, 하필 출범 개막전 전날인 1982년 3월 26일 세상을 떠나 개막전에 초대될 수 없었다.[43] 여담으로 1982년 몬트리올에서 열린 메이저리그 올스타전에 13개국 야구인들을 시구자로 초청했는데, 한국 야구인 대표로 초청되어 일본 야구인 대표로 초청된 나가시마 시게오와 함께 시구를 하기도 했다. 다만, 이미 1960년대부터 메이저리그 측에서 통명으로 알려졌던지라, 당시 중계방송을 보면 국적은 대한민국이지만 이름은 하리모토 이사오로 소개된다. 참고로 시구 행사에는 요기 베라, 듀크 스나이더(이상 미국), 미니 미뇨소(쿠바), 후안 마리샬(도미니카공화국), 올란도 세페다(푸에르토리코) 등도 함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