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효조/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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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아마추어 시절
3. 삼성 라이온즈 시절 (1983~1988)
4. 롯데 자이언츠 시절 (1989~1992)
5. 연도별 주요 성적



1. 개요[편집]


장효조의 야구 선수 시절을 다룬 문서.


2. 아마추어 시절[편집]




아마추어 시절부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강타자였다. 원래대로라면 한국프로야구가 출범한 1982년 시즌부터 뛰어야 됐지만, 하필이면 그 시기에 경리단 야구단에서 군복무 중이어서 프로 데뷔가 한 해 미루어지게 됐다.[2]

아마추어 시절에 알루미늄 배트 덕분에 장타력도 출중했다. 아직도 명 승부로 기억되고 있는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 대회 결승전의 4번타자는 바로 장효조였다. 본인 말로는 대학 때는 야구공에 그려진 마크가 보일 정도로 타격감이 좋았다고 한다. #


3. 삼성 라이온즈 시절 (1983~1988)[편집]


알루미늄 배트에서 나무 배트로 바뀌면서 장타력은 줄었지만, 1983년 데뷔 첫 시즌부터 타율 1위에 안타를 117개나 쳐내는 등[3] 기록을 쏟아냈으나, 이미 성인무대에서 어느 정도 활약을 한 상태에서 입단했으므로 신인으로 간주할 수 없다[4]는 다분히 역차별적인 이유로 신인왕을 OB박종훈한테 넘겨줘야 했다.[5][6] 훗날 1991년에 벌어진 한일 슈퍼게임에서 선수소개 때 가장 큰 환호와 박수를 받았던 건 선동열도, 이만수도, 장종훈도 아닌 바로 장효조였다. 일본의 올드 팬들이 그때까지 장효조를 기억하고 있을 정도로 아마추어 시절에 장효조가 얼마나 대단한 활약을 했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

데뷔시즌의 장효조가 얼마나 어마무시한 기록을 남겼냐하면 타율이 0.369에 홈런도 18개다. 양적 기록을 토대로 한 평가로도 흠잡을 데 없는 타격이었으나, 질적 평가에서는 더욱 그의 재능이 돋보인다. 출루율이 0.475, 장타율이 0.618, OPS는 무려 1.093, RC/27[7]의 경우는 99이승엽, 03심정수, 94이종범과 동급이다. 비록 당시의 게임수가 100경기에 불과하여 통산 기록은 손해를 본 편이지만, 질적 평가에서는 단연 사상 최고로 평가받는다. 그리고 간과하기 쉬운 사실이 있는데, 장효조의 전성기는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손꼽히는 투고타저 시절이다. 무엇보다도 그의 시즌 조정 OPS가 역대 최고라는 점에서 장효조의 위대함이 단적으로 나타난다.

이후에는 타율이 3할 이상에 오르며 4차례나 타격왕에 오르는 등. 안타 제조기, 타격의 달인, 타격의 마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오죽하면 "장효조가 치지 않으면 볼이다." 라는 말도 있었으니......다만 수비는 정말 좋지 않았다. 홈런을 제외하면 타율은 1987년 0.387[8], 안타수는 1985년에 기록한 129개[9]가 개인 최고기록. 경기수 출장은 롯데 시절인 122경기로 한해 최다 출장을 기록했다.

프로 생활 10년동안 통산타율이 무려 0.330에 이르는데 이는 3천 타수를 넘긴 모든 KBO 리그 선수들 중 두번째로 높은 기록이다. 통산 OPS는 0.886. 특히 선구안이 매우 좋아 통산 BB/K는 1.75, 출루율은 0.427에 달한다. 남들 평생에 한번 하기도 힘든 3할7푼대에 육박하는 타율을 무려 3번이나 기록했다.[10]또한 당대 최고의 투수인 최동원에게 70타수 27안타 1홈런 0.386로 굉장히 강한 면모를 보였다.

더구나 프로 입단은 27세(...)였다. 즉, 대한민국 나이로 28세 때부터 프로에서 뛰었다는 것. 크게 이상할 것이 없는데, 왜냐하면 대한민국은 프로야구 출범을 1982년에 했기에 그 이전에는 실업야구 팀이나 일본에서 뛰던 선수들이 프로에 입단해 뛰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장효조처럼 20대 후반의 선수는 물론이고 30대가 넘은 선수들도 대한민국에서의 프로경기는 처음이었다.

1988년 12월, 선수협 파동 직후 좌완투수 장태수와 함께 롯데의 내야수인 김용철, 투수 이문한을 상대로 롯데 자이언츠트레이드됐다. 초창기 한국프로야구에서 구단의 횡포에 의한 보복성 트레이드의 피해자인 셈이다.[11] 장효조는 생전 인터뷰서 삼성을 떠나야 했던 이유로 “연봉 협상 문제로 구단과 자주 이견을 보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 실제로 매년 겨울 장효조와 구단간의 연봉 협상 과정에서의 잡음이 언론에까지 보도되기도 했다. 이와 더불어 한국시리즈에서 몇차례의 중요한 실책을 저질렀는데 이 실책들이 시리즈의 패인으로 지목될 정도로 데미지가 큰 것이었기 때문에 이것도 트레이드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장효조와 삼성 구단과의 관계는 이후에도 별로 좋지 않았던 듯 하다. 1992년 장효조가 은퇴한 후 삼성에서는 2000년에야 코치로 영입했는데, 이것은 레전드로 대우하여 영입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1년간 임시직으로 기용한 다소 굴욕적인 조치였다. 당시 삼성 구단은 해태 김응용 감독을 영입하기 위해 수년간 노력해왔는데 2000년 마침내 성사되는 듯 하다가 다시 1년 후로 연기된 바 있었다. 이에 삼성 구단은 1년간 김응용을 대신할 임시 감독으로 김용희를 감독으로 선임했는데 이때 김용희와 함께 장효조가 삼성 코치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김용희와 장효조는 롯데에서 5년이나 감독과 타격 코치로서 동고동락한 사이였다. 롯데 시절 타격 코치로서 장효조의 평가는 그리 좋지 않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용희는 장효조를 끝까지 신임했고 결국 1998년 동시에 경질되고 말았다. 장효조가 삼성 코치가 된 것도 김용희와의 인연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많은 사람들은 보고 있다. 1년 후 김응용 감독이 삼성으로 오게 되면서 예정된 수순처럼 김용희와 함께 장효조도 팀을 떠나게 된 것이다. 이후 장효조는 10년간이나 현장을 떠나 있다가 2010년에야 삼성 2군 코치로 지도자로 복귀하게 된다.


4. 롯데 자이언츠 시절 (1989~1992)[편집]


롯데로 트레이드된 후에는 주로 지명타자로 기용되었다. 홀수해(1989, 1991)에만 3할대 타율을 기록하는 '격년제 징크스'를 기록했다. 이 시기에 롯데는 최하위권을 맴도는 부진을 겪었고, 이런 상황과 맞물려 일부 팬들은 "팀 공헌도는 적으면서 타율 관리에만 신경쓴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이는 삼성 시절 타격 1위를 밥먹듯이 했던 임팩트로 인해 장효조에 대한 부산팬들의 기대가 워낙 컸기 때문이기도 했고, 김용철이라는 간판 타자와 맞트레이드되었다는 점도 일조했다.

그래도 1991년에는 이정훈, 장종훈과 함께 시즌이 끝날 때까지 타격왕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여 최종적으로 2위를 기록하여 건재를 과시하기도 했다. 그리고 같은 해에 출루율 1위를 기록하였는데, 이는 장효조가 프로 선수로서 수상한 생애 마지막 개인 타이틀이었다.

이듬해인 1992시즌에는 삼성에서 하지 못했던 한국시리즈 우승도 경험했다. 그러나 그 해 그의 기량은 크게 하강 곡선을 그리며 시즌 타율 0.265, 54안타라는 프로 데뷔 이래 최저의 성적을 기록했다. 평소에 "절정일 때 옷을 벗자"라고 생각해온 장효조는 1992시즌이 끝나자 미련없이 현역 은퇴를 택했다. 1992년 당시 롯데에는 남두오성으로 불린 3할 타자들이 즐비했고, 2할대 후반의 백업 타자들도 많았기 때문에 지명타자였던 그로서는 안타깝지만 현실적인 판단이기도 했다. 물론 야구계에서는 그가 아직 충분히 더 뛸 수 있었다고 봤기에 아쉬워하는 이들이 많았다.[12] 사실 당시 롯데 타선이 백업까지 상당히 좋은 편이어서 장효조가 선수생활을 계속 이어갔더라도 많은 기회를 받기 어려웠을 수 있지만, 다른 팀으로 이적했다면 충분히 몇 년은 쏠쏠하게 더 활약했을 수 있다.

은퇴한지 11년이 지난 후 인터뷰에서 장효조는 "너무 일찍 은퇴해서 아쉬움이 많다. 조금만 더 열심히 했으면 3~4년은 더 야구를 할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면서 아쉬움을 피력하기도 했다. #


5. 연도별 주요 성적[편집]


  • 붉은 글씨는 리그 1위 기록. 진한 글씨는 리그 5위 내 기록. 푸른 글씨는 KBO 리그 역대 최고 성적.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83
삼성
92
317
.369
(1위)
117
(1위)
19
3
18
(3위)
62
(3위)
61
(2위)
22
(4위)
64
(1위)
.618
(1위)
.469
(1위)
1984
89
309
.324
(4위)
100
19
(4위)
7
(2위)
7
44
56
(4위)
8
54
(공동 3위)
.498
(5위)
.424
(1위)
1985
107
346
.370
(1위)
128
(2위)
23
(2위)
1
11
65
(3위)
66
(2위)
17
61
(2위)
.538
(3위)
.464
(1위)
1986
95
304
.329
(1위)
100
20
2
6
41
55
16
60
(1위)
.467
(4위)
.436
(1위)
1987
88
284
.387
(1위)
110
16
4
2
58
51
7
44
.493
(4위)
.461
(1위)
1988
96
283
.314
89
12
2
4
35
41
5
51
(공동 5위)
.413
.419
(4위)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89
롯데
94
333
.303
(5위)
101
8
3
1
31
40
12
59
.354
.407
(3위)
1990
96
324
.275
89
13
4
1
22
36
8
36
.349
.347
1991
122
346
.347
(2위)
120
17
10
(2위)
4
54
45
11
70
(5위)
.488
.452
(1위)
1992
82
204
.265
54
9
0
0
25
23
3
34
.309
.365
KBO 리그 통산
(10시즌)
961
3050
.330
(2위)
1008
156
36
54
437
485
109
533
.458
.427
(1위)

  • 수위타자 4회(1983, 1985, 1986, 1987), 최다 안타 1회(1983), 최우수 장타율 1회(1983), 최우수 출루율 6회(1983, 1984, 1985, 1986, 1987, 1991)
[1] 김시진도 니카라과 슈퍼월드컵 우승멤버이나, 마찬가지로 소급적용 전에 경리단에 입대하는 바람에 1983년에야 전역하고 프로에 진출한다.[2] 여담으로 장효조 입장에서는 자다가 이불을 걷어차도 시원찮을 에피소드가 있는데, 장효조는 1977년 니카라과 슈퍼 월드컵 야구대회에서 우승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에는 이 대회에 병역특례가 적용되지 않아 군에 입대했다. 그런데 육군 이병으로 고졸 선임들 밑에서 구르던 1981년, 전두환 정부3S 정책의 일환인지는 몰라도 뒤늦게 국제 야구대회 우승 멤버들에게 병역특례를 소급 적용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학업을 구실로 병역연기 중이던 한양대 후배 이만수, 김용남, 이상윤은 병역특례를 받은 뒤 KBO 리그 원년멤버가 됐는데, 당시만 해도 국제대회에서 우승하면 즉시 전역시키는 제도가 없었던지라 장효조는 병역특례 혜택을 받지 못하고 1983년에야 만기전역할 수 있었다.[1] 만일 장효조가 이 때 조기전역 헤택을 받았다면 어쩌면 프로야구 역사상 첫 출루의 주인공이 됐을 수도 있으나, 야구에 만약은 없으니...[3] 당시 1시즌 경기는 총 100경기였다.(원년에 80경기, 이후 100경기로 늘어났고 증감을 거쳐 2013년부턴 128경기) 교타자라는 인식이 강하지만 이 해에는 18개의 홈런을 쳐서 리그 3위를 기록,이는 1991년 쌍방울김기태가 27홈런을 기록하기 전까지 신인 좌타자 시즌 최다홈런 기록이었다. 참고로, 1983년 홈런 1위는 이만수(27개), 2위는 김봉연(22개).[4] 오마이뉴스의 김은식에 따르면 '참신성이 없다' 라고...하기야 프로 입단 이전부터 성인 야구무대인 실업 야구에서 4년이나 뛰었으니 충분히 고참급으로 분류될 수 있었다. 입단 당시 나이만 봐도 현재를 기준으로 해도 중참에서 고참으로 넘어가는 단계.[5] 이 이유에도 나름 근거는 있는게, 프로야구가 없던 시절 사실상 전신이라고 봐야하는 한국실업야구에서 충분히 활약을 한 선수를 신인이라고 인정할 수 있느냐는 건데, 종목은 다르지만 한국프로농구에서도 이상민이 실제로 현대전자에 입단한 후 거의 뛰지 않고 바로 상무 피닉스 야구단에 입대하고 프로 2년차부터 현대 다이냇 소속으로 뛰면서 MVP를 수상했음에도 불구, KBL 최우수 신인 투표에선 주희정에게 밀렸던 예가 있다. 어떻게 보면 메이저리그에서도 일본리그출신 선수들에게 신인왕 자격을 주는 것이 합당한가 하는 논란이 종종 벌어지는 것과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다.[6] 박종훈도 실업야구에서 1년간 뛰었으나 1982년 세계 야구선수권 대회 참가를 위해 그렇게 한 것이므로 기자단은 박종훈을 대졸 신인과 같이 취급했다. 박종훈 이후로는 실업야구 리그 출신 프로야구 선수가 신인왕을 수상한 사례는 없다.[7] 같은 타자를 1번부터 9번까지 도배했다는 가정하에 9이닝 당 얻을 수 있는 예상 득점을 계산하는 기록, 자세한건 야구의 기록 계산법 참고.[8] 1987년 올스타전 화면에서도 나오지만 이 해 전기리그 타율이 무려 0.419였다.[9] 한 시즌 110경기 중에 107경기에 나와서 때린 기록. 경기당 1.2개씩은 꼬박 친 셈이다. 2016년의 경기 수준으로 환산하면 약 174개에 이른다.[10] 정확히는 1983년 0.369/1985년 0.370/1987년 0.387[11] 장효조의 사망 이후 MBC 스포츠플러스에서 방송된 추모 다큐멘터리에서 박영길 당시 삼성 감독이 트레이드 발표 후 장효조가 자신의 집을 찾아왔던 당시를 회상하면서 흐느껴 우는 장면이 나왔다.[12] 심지어 마지막 시즌은 타율을 비롯한 대부분의 기록에서 데뷔 후 최저치를 기록했지만, 그의 또 다른 강점인 출루율만큼은 0.365로 여전히 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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