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클레이턴 포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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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Seal_of_an_Embassy_of_the_United_States_of_America.png 주한 미국 공사
초대 공사

대리공사

공사
루시어스 푸트
조지 클레이턴 포크
휴 딘스모어

미합중국 주한 미국 대리공사
조지 클레이턴 포크
George Clayton Foulk


파일:조지 클레이턴 포크.jpg

이름
George Clayton Foulk
한문 이름: 복구(福久)
출생
1856년 10월 30일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마리에타
사망
1893년
교토부
국적
[[미국|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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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학력
애나폴리스 해군사관학교
직업
군인, 외교관
종교
개신교
주요 경력
주한미국공사관 공사대리
1. 개요
2. 생애
3. 기타



1. 개요[편집]


해군 무관 출신 조선 주재 미국 대리공사. 조선을 그저 아둔하고 더러운 국가로만 보았던 다른 서양인들과는 달리, 그 어느 나라보다 조선을 흥미로운 국가로 바라보면서 죽기 직전이었던 1893년까지 조선을 서양에 소개했던 인물이다.


2. 생애[편집]


1859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마리에타에서 태어났으며, 미국 애나폴리스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직후인 1876년에 당시 아시아 분함대 소속 앨럿 호를 타고 뉴욕에서 출발하여 대서양지중해, 수에즈 운하를 거쳐 인도양에서 일본까지 항해를 하는 등 외지에 파견되어 타국 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은 인물이었다. 그는 1877년에 미군 소위로 임관되었다가 1882년까지 미국 파견 아시아 분함대에서 근무를 하는 등 군인으로써 생활하기도 하였는데, 이후 임무를 마치고서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러던 1882년 6월에 귀국 항해길 도중에 조선의 부산원산을 방문했고, 이를 계기로 미국으로 돌아간 후에 중국어일본어는 물론 조선어까지 공부하는 등 동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관심을 보였다. 후에 이러한 유창한 한국어 실력은 미국에서 그를 조선에 파견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기도 했다.

미국에서 근무하던 중인 1884년에 포크는 자신이 공부하며 배웠던 유창한 조선어 덕분에 민영익과 같이 파견된 보빙사의 미국 통역관으로 선발되었다. 이어서 포크는 그 당시 보빙사가 활동했던 미국 일정은 물론, 민영익과 함께 유럽 일대의 순방에도 동참했으며, 1884년 5월에 보빙사 일행이 귀국할 때 마침내 체스터 아서 당시 미 대통령에게 주한미국공사관 해군무관으로 임명받아 인천도호부에 위치한 제물포를 통해 2번째로 조선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 당시 포크가 맡았던 주요 임무는 정세 보고로, 당시 외국에서 주재하고 있던 미국 무관들의 대표적인 임무 중 하나였다. (이 당시 미국은 이제 막 조선과의 공식 수교를 했기 때문에, 다른 국가(일본,청 등)들과의 조선지역 탐사 및 측량 경쟁에서 뒤쳐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포크 또한 1884년 9월과 12월 두 차례에 걸쳐 가마를 타고 조선의 주요 지방들을 시찰하면서 수도권의 군사요새와 지역민심 등 한반도 정세를 상세하게 파악해 해군장관 및 해군정보국에 보고했다. 이와 같은 정보수집 덕분에 CIA는 포크 공사를 `인적 네트워크를 통한 정보 수집의 선구자'로 높이 평가했으며, 이를 계기로 해외공관에 무관파견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그리고 그는 조선의 문화에도 관심이 많아서 여러 물품들을 수집하였는데, 지방을 시찰할 당시 포크가 입수하여 소장했던 대동여지도는 현재 미국 위스콘신주립대학교 도서관에서 보관하고 있으며, 그가 조선에서 활동하는 동안 알게된 이순신과 '거북선'을 유럽과 미국 등에 외국인으로써는 최초로 알리기도 했다.

그리고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 전야 포크는 이미 정변을 눈치채고 휘말리지 않으려 지방 출타 중이었다. 갑신정변이 터지고 진압이 되자 한양에서는 일본인과 서양인을 살해하는 폭동이 터졌고 푸트 공사는 그길로 제물포로 달려가 출국 해버렸다. 공사 자리가 비자 해군 소위에 불과한 포크는 대리로 임명받았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는데, 당시 푸트 공사가 사임한것은 갑신정변의 영향도 있지만 미국 의회에서 조선 같은 지역에 공사관을 둘 이유가 없다며 납세자의 세금을 조선공사관 같은 불필요한 곳에 쓸 수 없다고 예산을 전액 삭감하여 총영사직으로 강등당한데다가 미국공사관은 푸트 공사의 사비 구입했는데 역시 정부에서 상환을 해주지 않아 여러 사정 끝에 푸트 공사는 한국을 떠난 것이다. 그런데 당시 포크는 푸트 공사보다 한참 적은 해군 소위 연봉으로 푸트가 받던 월급에 비하면 5분의 1에 불과했기 때문에 극심한 경제난을 겪어야 했다. 그러한 상황을 아래와 같이 편지를 써서 표현했다.

"저는 자주 생각합니다. 차라리 죽으면 해방이 될 것이라고. 제가 처해 있는 이 무서운 수렁으로부터 죽어야 벗어날 것이라고."

1886년 9월 10일 포크가 부모님에게 보내는 편지 속 내용 중 일부

포크는 1885년 1월부터 1886년 6월까지 임시 대리공사를 또다시 역임했다. 이후 정식 공사로 윌리엄 하워 파커가 부임했으나 알코올 중독으로 고종 앞에서 술주정을 추태를 부려 3개월 만에 해임당하자 1886년 9월부터 12월까지 다시 임시 대리 공사로 임명받았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포크는 1885년 1월부터 1886년 6월까지, 1886년 9월부터 1886년 12월까지 대리공사를 무려 2번 역임한 것이다. 당시 포크는 29 ~ 30세의 젊은 무관이었는데, 이런 그에게 두 번씩이나 대리공사를 맡겼다는 대목에서 당시 조선에 대한 미국의 평가가 얼마나 낮았는지 알 수 있다. 이 당시 미국에서 바라본 조선은 말 그대로 통상할만한 가치도 없는 후진국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1885년 포크는 본국 정부로부터 1866년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평양부에서 통상을 요구하다가 침몰당한 미 상선 제너럴 셔먼호 사건과 관련해 조선 정부에 피해보상을 요구하라는 훈령을 받고 고민하게 된다. 하지만 포크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답변서를 본국으로 보내 정부의 지시에 저항한다.

"셔먼호 도착 시기는 대원군의 전제적 권력 행사가 최고조에 이르고 있던 때였습니다. 기독교인이 박해의 표적이 됐습니다. 프랑스의 예수회 신부들을 포함한 많은 기독교인들이 처형됐습니다. 또한 수천 명의 비 기독교인들도 기독교인으로 의심을 받아 처형당했습니다.

평양 일대에서 박해는 특히 심했기에 지역 전체가 흥분공포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프랑스 신부들의 죽음, 그리고 기독교 박해를 보복하기 위해 외국인들이 쳐들어올 거라는 불안감이 전국적으로 퍼져 있던 상황이기도 했습니다.

사정이 그러하다 보니, 셔먼호가 접근해 올 때 사람들은 한결같이 복수하러 온 것이라고 여겼으며 온갖 억측과 공포가 퍼졌습니다. 외국인에 대한 혐오감이 없는 사람들조차도 자기가 방관하고 있으면 외국인과 내통한 자로 지목돼 목이 달아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공격에 가담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조선인들은 그러한 공포와 흥분에 사로잡혔기 때문에 너나없이 셔먼호 파괴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1885년, 조지 클레이턴 포크가 미국 정부제너럴 셔먼호 사건의 조사보고서와 같이 올렸던 답변서의 내용 중 일부

포크는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 있은지 불과 20년이 지난 직후에 조선으로 파견되었기 때문에 그 누구보다 당시 조선의 상황을 잘 알 수 있었다. 그러한 근거로 조선인들을 변호하면서 배상 청구의 부당성을 논리적으로 반박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당시 외국과의 교류를 펼치던 고종의 전폭적인 신임을 얻은 포크는 청나라위안스카이와도 강력히 맞섰으나, 청나라와의 관계 유지 및 셔먼호 배상 문제 저항에 내심 거부감을 갖고 있던 미국 정부에서는 포크에게 해임 통보를 하고 조선에서의 모든 직책과 권한을 행사할 수 없게 했다.

1887년 6월 29일에 결국 포크는 조선을 떠나 일본 나가사키로 떠난다. 일본으로 건너간 포크는 일본인 부인과 결혼해 무역회사 경영과 대학교수로 활동하다가 1893년에 37살이라는 이른 나이에 유명을 달리 했다.


3. 기타[편집]


포크의 일화는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의 미군 장교 역 모티브로 한때 세간의 화제가 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드라마 내용과는 달리 일본으로 건너가 평범하게 살다 요절했다는 점이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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