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r20220720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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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th(이순신)]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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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
삼도수군통제사 · 선무공신
가족
장남 이회

맏형 이희신의 아들 이완 · 딸의 시아버지 홍가신

먼 친척 형 이광 · 19촌 이이

후손 (이봉상 · 그 외 후손)
관련 인물
친구 류성룡 · 친구 류성룡의 제자 허균

육군 동료 (신립 · 권율 · 이경록)

해군 동료, 부하 (이억기 · 권준 · 김돌손 · 김완 · 김억추 · 나대용 · 무의공 이순신 · 배흥립 · 안위 · 오계적 · 이영남 · 이운룡 · 정운 · 준사 · 최호 · 송희립 · 우치적 · 어영담 · 신호 · 이일 · 원균 · 배설)

주군 (선조 · 선조비 의인왕후 · 분조 광해군)
관련 장소
이순신이 태어난 곳 한양 건천동 · 이순신 일가의 생가 아산

이순신의 묘소 장군묘 · 이순신의 사당 현충사

명량해전이 벌어진 곳 명량수도 · 노량해전이 벌어진 곳 이순신대교
관련 사건
탄신일 · 니탕개의 난 · 녹둔도 전투 · 이몽학의 난 · 백의종군

임진왜란, 정유재란 해전 (옥포 해전 · 합포 해전/적진포 해전 · 사천 해전 · 당포 해전 · 당항포 해전 · 율포 해전 · 한산도 대첩 · 안골포 해전 · 장림포 해전 · 절영도 해전 · 초량목 해전 · 부산포 해전 · 웅포 해전 · 장문포 해전 · 명량 해전 · 절이도 해전 · 왜교성 전투 · 노량 해전)
관련 물건
쌍룡검 · 백원 주화
작품
장계별책 · 난중일기 · 이충무공전서
기록에서의
모습 및 행적

용모 · 창작물
평가
관련 기록 · 평가 · 의문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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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李舜臣 | Yi Sun-sin
[1]


파일:이순신.jpg
이순신 표준영정[2]

[ 다른 초상화 펼치기 • 접기 ]
파일:이순신초상화.jpg조선시대에 그려진 이순신의 영정
파일:external/img.khan.co.kr/20130924_1044_A66a.jpg증정중등조선역사에 수록된 초상화를 찍은 사진

국적
파일:조선 어기.svg 조선
시호
충무(忠武)
군호
덕풍부원군(德豐府院君)

(李)
본관
덕수(德水, 12대손)

순신(舜臣)

여해(汝諧)[3]

기계(器溪), 덕암(德巖)
출생
1545년 4월 28일[4]
(인종 원년, 음력 3월 8일)
조선 한성부 건천동
(現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18길 19(인현동1가)[5])
사망
1598년 12월 16일
(선조 31년, 음력 11월 19일)
(향년 53년 7개월 18일 / 19,590일)
조선 경상도 남해현 노량해협[6]
(現 경상남도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하동군 금남면 노량리)
전사(흉부 유탄 피격)
묘소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 고룡산로 12-37(충무공 이순신 장군묘)
사당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현충사)

[ 상세정보 펼치기 · 접기 ]
신장
187.2cm(추정)[1]
소속
[2]
종교
유교(성리학)
직업
군인
최종
관등

의정부 영의정(議政府領議政)[3]
공훈
효충장의적의협력 선무공신(孝忠仗義迪毅協力宣武功臣, 1604)
학력
무과 식년시 병과 급제 (1576년 4월 30일)[4]
경력
한성부 훈련원봉사 권지[5] (1576)
함경도 동구비보 권관 (1576)
전라도 고흥 발포 수군만호 (1581)
함경도 건원보 권관 (1583)
한성부 훈련원 참군 (1583)
사복시 주부 (1586)
함경도 조산보 만호 (1586)
전라도 조방장 (1589)
한성부 선전관 (1589)
전라도 정읍현 현감 (1589)
전라도 강진현 가리포진 수군첨절제사 (1591)
수군절도사 전라좌도수사 (1591)
삼도수군통제사 (1593, 1597)
재임
기간

전라도 정읍현 현감
1590년 1월 6일 ~ 1591년 2월 24일
(음력 1589년 12월 1일 ~ 1591년 2월 1일)[6]
수군절도사 전라좌도수사
1591년 3월 8일 ~ 1597년 4월 12일
(음력 1591년 2월 13일 ~ 1597년 2월 26일)
1597년 9월 4일 ~ 1598년 12월 16일
(음력 1597년 7월 23일 ~ 1598년 11월 19일)
삼도수군통제사
1593년 8월 26일 ~ 1597년 4월 12일
(음력 1593년 8월 1일 ~ 1597년 2월 26일)
1597년 9월 4일 ~ 1598년 12월 16일
(음력 1597년 7월 23일 ~ 1598년 11월 19일)
저서
난중일기(亂中日記)》
충무공이순신전서(忠武公李舜臣全書)》
《임진장초(壬辰狀草)》
부모
부: 덕연부원군 이정 (李貞, 1511 - 1583)
모: 초계 변씨 (草溪 卞氏, 1515 - 1597)
형제
자매

첫째 형: 이희신 (李羲臣, 1535 - 1587)
둘째 형: 이요신 (李堯臣, 1542 - 1580)
막냇동생: 이우신 (李禹臣, ? - ?)
배우자
본처: 정경부인 상주 방씨 (尙州 方氏, ? - ?)

해주 오씨 (海州 吳氏)
부안댁
자녀
적장남: 이회 (李薈, 1567 - 1625)
적차남: 이예[7](李䓲, ? - ?)
적삼남: 이면 (李葂, 1577 - 1597)
적장녀: 덕수 이씨 (? - ?)
서장남: 이훈 (李薰, ? - ?)
서차남: 이신 (李藎, ? - ?)
서장녀: 덕수 이씨 (? - ?)
서차녀: 덕수 이씨 (? - ?)[8]
서명
파일:이순신 수결.svg


[ 언어별 명칭 ]
한국어
이순신
영어
Yi Sunsin
러시아어
Ли Сунсин
중국어
李舜臣
일본어
イ・スンシン


1. 개요
2. 묘소
3. 역임 관작
4. 유명 어록 및 장계
6. 생애
6.1. 태어나기 이전
6.2. 임진왜란 전야까지
6.3. 임진년의 맹활약
6.4. 계사년 이후
6.5. 파직
6.7. 전설이 되다
8. 전투 관련
8.1. 참전 목록
8.2. 전술
9. 가족
10. 후손
11. 인간 관계
11.1. 권율과의 관계
11.2. 원균과의 관계
11.3. 류성룡과의 관계
11.4. 선조와의 관계
11.5. 이광과의 관계
11.6. 김완과의 관계
11.7. 이운룡와의 관계
11.8. 이억기와의 관계
11.9. 이일과의 관계
11.10. 이경록과의 관계
11.11. 허균과의 관계
14. 관련 다큐
15. 관련 단체
16. 관련 문서
17. 이순신 연표
18. 여담
18.1. 이순신 장검(長劍)에 얽힌 이야기
18.2. 화폐 인물
18.3. 엄격한 직장 상사
18.4. 공정함과 애민(愛民)
18.5. 사람을 보는 눈과 다루는 법
18.6. 취미 생활




1. 개요[편집]


16세기 조선무신으로, 일본이 조선을 침공하여 일어난 전쟁인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을 통솔했던 제독이자 구국영웅이다.

침략군과 교전하여 천재적인 활약상을 펼치고 중앙 지원 없이 자급자족을 해낸 군 지휘관이자, 휘하 장병들에게 원리원칙 엄수를 요구했지만 높은 승률과 넉넉한 처우를 보장한 상관, 지방관 시절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고 전시에도 그들을 위무하고 구제한 목민관, 고위 관료와 접선 및 축재를 거부하고 공정과 절제를 중시한 인격자, 자신이 관할한 지역의 백성과 병사에게 각종 사업[7]을 장려하여 많은 수효를 얻어낸 행정가, 그리고 을 위시한 조정의 핍박으로 해임되어 사형수가 되거나 후임자의 실책으로 군사·군선들을 거의 상실하거나 어머니와 아들을 잃는 등 많은 수난을 겪고도 굴하지 않은 철인의 면모까지 갖춰 조선 중기의 명장을 넘어 세계사에서 주목할만한 한국사 최고 위인의 반열까지 오른 인물이다.[8]

생전부터 그를 사적으로 알고 있던 인근 백성이나 군졸, 일부 장수와 재상들에게 뛰어난 인물로 평가받았고 그렇지 않더라도 명성이 제법 있었으며, 전사 소식에 많은 이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크게 슬퍼했다고 전해진다. 사후 조정은 관직을 추증했고 선비들은 찬양시(詩)를 지었으며 백성들은 추모비를 세우는 등, 이순신은 오래도록 많은 추앙을 받아왔다. 이는 일제강점기를 거쳐 현대에도 마찬가지로, 이순신은 대한민국 국민들이 가장 존경하는 위인 중 한 명으로 꼽히며 현대 한국에서 성웅이라는 최상급 수사가 이름 앞에 붙어도 어떤 이의도 제기받지 않는,[9] 세종과 함께 한국인에게 가장 사랑받는 조선사 양대 위인이다. 가장 존경하는 위인을 묻는 설문조사에서도 세종대왕과 1, 2위를 다투며[10] 충무공이라는 시호도 실제로는 김시민과 같은 여러 장수들이 받은 시호이지만 현대 한국인들은 이순신 전용 시호로 인식한다.

1545년 한성부 건천동에서 태어나 1576년 무과에 급제하여 그해 함경도 동구비보 권관이 되었고, 1579년에는 훈련원 봉사가 되었다. 1580년에 전라도 발포 수군 만호, 1581년에 경차관 서익에 의해[11] 파직되었다가 1582년에 다시 훈련원 봉사로 복직되었고 1583년 함경남도 병마절도사 군관, 함경도 건원보 권관을 지내다가 3년간 부친상을 치르고 1586년 함경도 조산보 만호에 임명되었으며 1587년 함경도 녹둔도 둔전관을 겸임했다. 이 해 여진족의 기습을 받아 일부 백성이 납치되고 반격으로 녹둔도 전투를 치르는 등의 일이 있었다. 이때 북병사 이일이 이순신과 이경록에게 경비 소홀의 책임으로 조정에 참수형을 청했고[12] 이는 면했으나 다시 파직 및 백의종군 처분을 받았다. 그리고 1588년 시전부락 전투에서의 군공으로 복직되었다.

1589년에 전라 감사의 군관이 되었고 정읍 현감에 제수되어 백성을 다스리는 경험을 하게 되었으며 태인 현감도 겸했다. 그리고 진도 군수, 배포 첨사 임명장을 받고 1591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임명된다. 일찍이 일본의 침공을 예상하고 전함 건조, 무기와 군비 확충, 군사훈련 등에 힘썼다. 1592년에 일본군의 침공이 시작되었고, 옥포 해전과 합포 해전, 적진포 해전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2차 출병 때는 사천 해전과 당포 해전, 당항포 해전, 율포 해전에서 승리했다. 이후 한산도 해전에 크게 승리하고 안골포 해전에서 승리했다. 두 달여 뒤에 재출병해서 부산포 해전에서 승리했다. 1593년 웅포 해전에서 승리하고 본영을 여수에서 한산도로 옮겼으며 삼도 수군 통제사로 선임되었고, 이 시기에 조총을 모방해서 총을 제조해 보기도 했다. 1594년 당항포 해전에서 승리했고 윤두수가 건의한 수륙 합동작전에 참여해서 영등포, 장문포를 쳤지만 강화 협상 중이라 일본군이 대응하지 않아서 별 성과는 없었다. 1595년에는 우수영과 둔전을 시찰하고 백성을 모아 소금을 굽고 둔전을 통한 곡식을 확보하는 등 생업에 종사했고 1596년 전염병으로 죽은 병사들을 위해 여제를 지냈다. 1597년에 원균에게 인계하고 체포되어 상경한 후 투옥되었고, 선조가 사형을 제의했으나[13] 정탁이 변호하면서 출옥하고 두 번째 백의종군 처분을 받는다. 이후 모친상을 겪었으며 원균이 출전한 칠천량 해전에서 그간 육성해온 군과 자산을 거의 궤멸당했으나 통제사에 재임명된 후 소수 병력으로 출전한 명량 해전에서 승리했다. 이후 셋째 아들 이면이 전사했고, 1598년 조선에서 철군하는 일본군을 추격하여 노량 해전을 치르던 중 총탄에 맞아 전사했다. 죽음을 함구하고 전투를 지속하라는 말을 남겼고 그가 죽은 뒤에 전투는 승리로 끝났으며 일본-조선-명 간의 전쟁도 종언을 고했다.

몇몇 전투는 너무나 비현실적인 공적을 세워 어떻게 이뤄낸 건지 아직도 학설이 분분할 정도이다.[14] 가령 명량 해전의 초반부에서 물살이 바뀌기 전까지 약 2시간가량을 이순신은 대장선 1척으로 일본 측 함선 133척과 정면으로 붙어 하나하나 박살내고 있었다.[15] 분명히 조선 측과 일본 측의 풍부한 사료로 교차검증이 가능한 기록임에도 너무 믿어지지 않아서 사람들이 오히려 왜곡된 유사역사학자의 주장을 믿고 마는 것이다.

이처럼 도저히 말이 안 되는 전투 수행 능력이 익히 알려져 있지만 기록을 보면 전략적인 식견이 그보다 압도적으로 뛰어난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 당시 이순신의 지휘를 받는 조선 수군의 총 전력은 일본군보다 열세였지만 대부분의 전투를 수적 우위를 점한 채로 압승을 거두며 심할 때는 이러한 각개 격파가 하루 동안 5~6번이 일어나 그 전투들만으로 출정한 조선 수군의 전력을 넘어서는 일본군을 수장해버리는 일도 있었다. 기본적으로 연합 함대를 중시하여 항상 만전의 화력을 갖추고 싸우는 이순신 휘하의 조선 수군이 적보다 열세인 상황에서 전투를 벌인 때는 전력의 열세를 극복할만한 완벽한 함정을 팠거나(한산도 대첩),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정치적 이유로 출정해야 했거나(장문포 해전), 그 이상 전투를 피하면 나라가 망하는 때(명량 대첩)뿐이었다.

이순신은 함대 설계 및 훈련, 운영에도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전 국토가 전쟁의 화마로 털리는 바람에 교지를 쓰거나 기록을 남길 종이마저 부족했던 중앙 정부에게 종이를 바치기도 했다. 남해안 여러 섬에 둔전(屯田)을 만들어 식량을 자급자족했으며 어로 활동으로 군량과 군비를 충당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기피 대상이었던 수군의 병력 유지를 위해 직접 발벗고 뛰어다닌 결과 1만 명 이상의 병력을 중앙 정부의 지원없이 유지했다. 이순신이 중앙 정부에 무언가를 요구했던 것은 역병으로 병사들이 죽어나갈 때 의원을 보내달라는 것과 화포를 만들 철이 부족하여 조정에 철을 조달해 줄 수 없는지에 대해서 장계를 올린 것 정도다. 원균이 5천명의 병력을 지원받고도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한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특히 자기 휘하로 피난 온 백성들을 잘 보살피고 다스려 칭송을 받으며 목민관으로서도 훌륭한 면모를 보였다. 다방면으로 뛰어난 업적과 충성심 덕에 적국이었던 일본조차 사후 연구 대상으로 삼기도 하였다.[16]

이 밖에도 독보적인 정직함과 청렴함[17]과 공정함도 현대 한국인들에게 매우 존경받는 이유 중 하나다. 이순신은 장수이자 목민관으로서 그야말로 공명정대하였는데, 백성들과 일개 병졸부터 시작해서 승려노비까지 하나 하나 그들의 이름과 그들이 이룩한 공을 빠짐없이 세세히 적어 장계를 올려 포상을 받게 했으며, 여차할 땐 자신의 공적을 부하들에게 돌려주는 경우도 허다했다.[18] 허나 자기 휘하 사람들을 마냥 너그럽게 대했냐고 했다면 그것도 아닌데, 훈련을 게을리 하거나 군법을 어기는 병사들을 매우 엄히 다스렸기에 조선 수군이 제일 무서워하는 것은 왜군이 아닌 이순신[19]이었다는 평가도 있을 정도다. 고로 이순신은 당근과 채찍을 정확히 다루어 부하들을 부렸다고 할 수 있겠다.

이렇듯 이순신을 뜯어 보자면 '존경하지 않을 이유를 찾는 게 더 어렵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이순신은 완벽한 인물이었고[20][21], 이러한 덕에 40여년 가까이 한국인이 존경하는 인물 순위에서 부동의 1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2. 묘소[편집]


파일:사적112호아산이충무공묘전경.jpg

파일:사적112호아산이충무공묘좌측전경.jpg


3. 역임 관작[편집]


  • 사후 추증된 관작
    • [22]명 수군 도독 조선국 증[23] 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24]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덕풍부원군 시[25] 충무공
(有明 水軍 都督 朝鮮國 贈 效忠杖義迪毅協力宣武功臣 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 領議政 兼 領經筵 弘文館 藝文館 春秋館 觀象監事 德豐府院君 諡 忠武公)

  • 해석:
    • 명 직위: 수군 도독[논란]
    • 공신호: 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공신[26]
    • 품계: 대광보국숭록대부[27]
    • 조선 직위: 의정부 영의정[28]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29]
    • 군호: 덕풍부원군[30]
    • 시호[31]: 충무공

  • 생전(전사 직전)의 관작
    • [32] 정헌대부 전라좌도수군절도사 겸 삼도수군통제사
(行 正憲大夫 全羅左道 水軍節度使 兼 三道水軍統制使)

  • 해석:
    • 품계: 정헌대부[33]
    • 직위: 전라좌도수군절도사 겸 삼도수군통제사[34]


상기된 80여 자의 기나긴 직위명들을 현대식으로 풀이하자면, 이 충무공은 생전에 대한민국 해군참모총장으로서 장관급의 명예직에 상당하는 의전 예우를 받은 뒤[35], 해군작전사령관함대사령관을 겸직하고, 미국 대통령으로부터도 미 해군 원수직을 수여받은 셈이 된다. 나아가 사후에는 대한민국장과 태극무공훈장을 수여받았고, 총리급의 명예직과 예우를 수여받은 것이 된다. 훈장의 경우에는 다소 애매한 비유이지만[36], 수여된 관직들의 경우 일반인들이 쉽게 인식하는 현재의 관제로 비교하자면 위와 같은 셈이다.

여기에 덧붙이자면, 미 해군 대원수직[37]을 동시에 받은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즉 군사적 업적을 인정 받아 예우에서 밀리지만 미국에서 명예 원수로 대우하는 셈이고, 죽은 뒤 200년 가까이 되어서 국무총리를 부여받은 격이다.[38]

생전에 이순신이 계급이 낮을 때 장군이라고 불린 적은 있었겠지만, 이순신이 수군을 지휘하던 시절이나 최종 계급을 생각하면 장군이라고 부르는 것은 분명히 틀린 호칭이다. 상기된 직책들 가운데 가장 품계가 낮은 직책이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인데, 수군절도사면 절충장군 품계로 장군이라는 글자가 들어가는 품계 중 최상의 품계이며, 또한 당상관에 해당되었다. 당연히 조선시대에 정3품 당상관 이상의 관리에게, 통제사또영감이라고 부르지, 장군이라는 호칭을 쓰는 일은 없었다.[39] 게다가 삼도수군통제사 자리는 종2품 직으로 가의/가선대부 품계가 필요했는데 이는 엄연히 영감이라고 불리는 문반 품계였으니 장군이라고 부르면 모욕이었다[40]. 그러나 현대의 통상적인 장군이라는 호칭이 대중들에게 좀 더 익숙하게 다가오는 말이었고, 여러 미디어에서 대중들에게 익숙한 장군이라는 호칭을 쓰면서 이순신 장군이라는 칭호가 굳어지게 되었다. 대한민국 해군이나 관련 관계자들은 현대에 육군 계열의 칭호로 쓰이는 장군 칭호를 기피하고 대신 해군이 사용하는 칭호인 제독을 붙여서 이순신 제독이라고 부르는 편이다. 현대 대한민국 국군에서 육군 장성은 장군, 해군 장성은 제독 칭호를 쓰기 때문이다.[41]

시대적으로도 장군이라는 명칭은 맞지 않고, 현대 기준에서는 제독 혹은 원수라고 부르거나, 당시 기준으로 정3품부터는 군대를 전역하고 문관으로서 올라가야 했기에 더이상 장군이 아니라 사또나 영감 그리고 정2품부터는 대감이라고 불러야 한다. 따라서 수사또, 수사 영감, 통제 사또, 통제사 영감, 통상 대감(정헌대부 시절), 종3품 이하일 땐 전부 나리(나으리) 등으로 부르는 게 올바른 역사적 고증이다. 이순신/평가 문서로. 외국에서도 이순신 같은 해군 지휘관은 철저히 Admiral이라고 붙여 부른다.[42] 당시 조선군의 육해군 구별이 유별하지 않아서 장군으로 불러도 문제없다는 주장도 있는데, 그 논리가 성립하려면 이순신이 오늘날의 장성급 지휘관에 해당하는 보직을 육군에서 맡았던 적이 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순신의 최종 육상 보직은 조산보 만호(혹은 정읍 현감. 정읍에는 해안선이 없다.)이고, 병마 절도사나 관찰사처럼 오늘날의 ‘장군’에 해당하는 직책을 맡지 않았다. 즉슨 그의 최종 관직을 일일히 붙여서 호칭하는 게 아닌 이상 국제적인 관례대로 제독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다.

다만 현대에는 장군이란 단어가 남북한을 통틀어 무(武)의 최고봉격인 인물에게 흔히 사용되는 호칭이고[43][44], 당장 충무공을 이순신 '장군' 대신 이순신 '제독'이라 호칭하는 경우를 상상해본다면 일반 언중들이 받아들이기에 어색함을 느낄 것이다. 따라서 엄격히 충무공의 호칭을 구별짓는 것이 아닌 이상[45] 이순신을 장군이라 칭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4. 유명 어록 및 장계[편집]


'(전라)좌우도의 전선은 본시 있던 것과 새로 만든 것을 물론하고 먼저 집합한 것이 110척이요, 사후선도 110척이라 사부, 격군을 합해서 무려 1만 7,000여 명이나 됩니다. 1명당 아침, 저녁으로 각각 5홉씩 나누어준다면 하루 먹을 것이 적어도 100여 석이요, 1달에 드는 것이 3,400여 석 입니다. 경상우도는 벌써 바닥이 나서 식량을 각출할 도리가 없고, 전라도 열 고을만 쳐다보는데, 열 고을에서도 남아 있는 군량에서 백성들을 구제할 식량을 제하고 나면 수군들 먹을 군량은 겨우 앞으로 2달 남짓, 5월 보름께 밖에 더 계속되지 못할 실정입니다.'

《청조획군량장》 갑오년 3월 10일 中 군량미를 걱정하는 이순신 장군


'수전과 육전의 어렵고 쉬운 점, 그리고 지금의 급한 일들을 들어가며 다음과 같이 망령되이 진술하는 바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십중팔구는 겁쟁이이고, 용감한 자는 열에 한둘밖에 없습니다. 평상시에는 분간되지 않고 서로 섞여 있지만 일단 소문만 들리면 그저 도망갈 생각만 하고 놀라서 달아나는데.....[생략] ...... 수전의 경우에는 수많은 군사들이 모두 다 같은 배 안에 있으므로 적선을 바라보고 비록 도망치고 싶어도 도망갈 수가 없으며 노질을 재촉하는 북소리가 울리면, 그 뒤를 군법이 따르니 모두 전력을 내어 싸우게 됩니다. 이것은 수전의 쉬운 점입니다.'

선조실록 계사년 9월 10일》 中 - 이순신 장군이 바라본 육군과 수군의 통솔 차이


수사가 수군의 대장으로서 호령을 내리더라도 각 고을의 수령 등은 자신의 소관 사항이 아니라고 핑계대면서 전혀 시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심지어 군사상 중대한 일까지도 내버려두거나 등한시하는 일이 많아서 매사가 이완되고 있으므로 이런 큰 사변을 당하여 도저히 일을 처리해 나갈 수 없습니다. 반드시 감사와 병사의 예에 따라서 고을의 수령들까지 수사의 지휘를 받도록 해 주시기 바랍니다.

《선조실록 계사년 9월 10일》 中 - 이순신 장군이 바라본 전시행정


三尺誓天(삼척서천 山河動色(산하동색

一揮掃蕩(일휘소탕 血染山河(혈염산하

석 자 칼에 맹세하니 산과 강이 떨고

한 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이도다

이순신의 장검 2자루에 새겨져 있는 문구이며, 해당 문구는 이순신의 친필이다.[46]


鑄得雙龍劍(주득쌍룡검 千秋氣尙雄(천추기상웅

盟山誓海意(맹산서해의 忠憤古今同(충분고금동

쌍룡검을 만드니 천추에 기상이 웅장하도다

산과 바다에 맹세한 뜻이 있으니 충성스런 의분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같도다

쌍룡검에 새겨져 있는 문구


閑山島月明夜上戍樓(한산도월명야상수루 撫大刀深愁時(무대도심수시 何處一聲羌笛更添愁(하처일성강적경첨수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던 차에

어디서 일성 호가[47]

는 남의 애를 끊나니

이순신의 시조 ‘한산섬 달 밝은 밤에’


勿令妄動(물령망동 靜重如山(정중여산

망령되이 움직이지 말라! 산처럼 무거이 침착하라!

옥포 해전을 개시하면서


今臣戰船(금신전선 尙有十二(상유십이

戰船雖寡(전선수과 微臣不死則(미신불사즉 不敢侮我矣(불감모아의

지금 신에게 아직 12척 전선이 있사옵니다.

전선이 비록 적으나 미천한 신이 죽지 않았으므로 적들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48]

『이충무공전서』, 이분, 「행록」에 실려있는 명량 해전에 앞서 올린 장계.


必死則生(필사즉생 必生則死(필생즉사

죽고자 하면 살 것이고,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49]

난중일기[50]


此讎若除(차수약제 死即無憾(사즉무감

이 원수를 갚을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나이다.

이충무공행록에 기록된 노량 해전을 앞두고 한 맹세


今日固决死(금일고결사 願天必殲此賊(원천필섬차적

오늘 진실로 죽음을 각오하오니, 하늘에 바라옵건대 반드시 이 적을 섬멸하게 하여 주소서.

백사집에 기록된 노량 해전을 앞두고 한 맹세


戰方急(전방급 愼勿言我死(신물언아사

싸움이 급하다. 부디 내 죽음을 말하지 말라.

노량 해전에서 전사하면서 남긴 유언[51]

- 이분[52]의 충무공행록



임진장초 및 난중일기 원문 번역 사이트들[53]##임진장초 원문

自壬辰至于 五六年間 賊不敢直突於兩湖者 以舟師之拒其路也 今臣戰船 尙有十二 出死力拒戰則猶可爲也 今若全廢舟師 是賊所以爲幸而由 湖右達於漢水 此臣之所恐也 戰船雖寡 微臣不死 則不敢侮我矣

임진년부터 5·6년 간 이 감히 호서호남으로 직공하지 못한 것은 수군이 그 길을 누르고 있어서입니다. 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전선이 있사오니 죽을 힘을 내어 맞아 싸우면 이길 수 있습니다. 지금 만약 수군을 모두 폐한다면 이는 적들이 다행으로 여기는 바로서, 말미암아 호서를 거쳐 한강에 다다를 것이니 소신이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전선이 비록 적으나, 미천한 신은 아직 죽지 아니하였으니, 적들이[54]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 『이충무공전서』, 이분, 「행록」

명량 해전 이전, 조정에서 '수군을 해산하고 육군에 합류하라'라는 명령을 내리자 이를 반박하며 수군을 끝까지 지휘하겠다는 주장이다.

招集諸將約束曰 '兵法云, 必死則生, 必生則死。又曰, 一夫當逕, 足懼千夫, 今我之謂矣。爾各諸將, 勿以生爲心, 小有違令, 卽當軍律。'再三嚴約。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 약속하되, "병법에 이르기를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반드시 살려고 하면 죽는다.'고 하였고,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고 했는데 이는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너희 여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기는 일이 있다면 즉시 군율을 적용하여 조금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고 재삼 엄중히 약속했다.

난중일기, 정유년 9월 15일(명량 해전 전날)

'죽고자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을 것이다'라는 발언은 흔히 이순신이 직접 한 말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난중일기에서도 언급했듯이 병법, 정확히는 오자병법의 내용을 인용한 것이다. 그리고 이를 '무조건 죽을 각오로 옥쇄해라'라고 잘못 해석하기도 하나, 사실이 아니다. 이에 대한 정확한 해석은 필사즉생행생즉사 문서로.

日本之人, 變詐萬端, 自古未聞守信之義也。兇狡之徒, 尙不斂惡。

왜적은 간사스럽기 짝이 없어, 예로부터 신의를 지켰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교활하고 흉악하여, 그 악랄함을 감추질 않습니다.

답담도사금토패문(答譚都司禁討牌文, 담종인에게 보내는 답장 중에서.-이충무공전서 1권 잡저中)

강화 협상을 하며 전쟁이 소강 상태가 된 1594년, 명나라 칙사인 담종인이 '함부로 왜군과 교전하지 말고 자리를 지킬 것'이란 내용의 통보인 금토패문(禁討牌文)을 보내자, '답담도사금토패문'이라는 이를 반박하는 글을 올렸다. 현대에는 이 중 '저 왜적은 간사스럽기 짝이 없어, 예로부터 신의를 지켰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라는 구절이 특히 유명하다. 2010년대 이후 한일관계가 크게 나빠지고 한국 내 반일감정이 더 강해지면서, 저 문구를 인용하는 사례가 크게 늘었다.


5. 용모[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이순신/용모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파일:external/upload2.inven.co.kr/i10700173128.jpg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해군사관학교에 세워진 이순신 동상 (광화문광장에 있는 충무공 이순신 동상보다 더 실제에 가깝다는 평가가 많다.)


6. 생애[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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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태어나기 이전[편집]


본관은 덕수 이씨로서, 고려 때의 중랑장 이돈수(李敦守)의 12세손이자 조선 초의 영중추부사였던 이변(李邊)의 후손이다. 아버지 이정(李貞)은 부인 초계 변씨와의 사이에서 4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신(臣)을 돌림자로 중국 고대의 성인인 복희, 제요, 제순, 대우 임금의 이름을 차례대로 붙여 희신(羲臣), 요신(堯臣)[55], 순신(舜臣), 우신(禹臣)이라 지었다. 할아버지 이백록이 태몽에 나타나 이름을 '순'이라 지으라고 했다는 설화도 있지만, 이러한 견지에서 보면 설화가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높다.[56] 그럴만도 한 것이 조부보다는 연산군의 동궁시절 스승 노릇을 했던 증조부 이거가 나와 점지하는 것이 더 권위가 높음에도 굳이 한 것은 다른 설화가 섞인 것이 아닌가란 추측도 생긴다.

임진왜란 전까지만 해도 덕수 이씨는 문반에 가까웠는데, 할아버지가 기묘사화역적으로 몰려 처형당하고[57] 집안이 무반으로 전환하게 되었다는 낭설이 퍼져 있지만, 기록으로 보나 상식적으로 보나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58] 사실 덕수 이씨는 오늘날 한국 기준 인구 4만 명 정도의 적은 성씨치고는 파가 굉장히 많고 저마다 특색이 달랐다. 그 점을 무시하고 이이나 이식 같은 유명 인사 몇 명만 떠올리고 멋대로 문반 명문으로 결론짓고 상상의 나래를 편 것일 뿐이다.

기록상 이순신의 할아버지인 이백록(李百祿)은 사림파에 속하기는 했지만 기묘사화에 연루되지 않았으며 그 이후 기록에도 등장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백록은 기묘사화 이후에 관직에 진출했다. 1522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어느 순간부터 평시서 봉사를 역임하다가 시정잡배들과 어울리고 다닌다고 파직되었다거나, 중종의 국상 기간에 눈치 없이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벌였다는 기록도 있지만 당연히 그것으로 사형당하지는 않았다. 명종 3년에는 아들을 혼인시키기는 했지만 잔치를 벌였다는 것은 이백록이 아닌 이준으로 이백록은 무고하다는 탄원이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심지어 이순신의 아버지 이정은 과거도 안 치르고 음서로 관직에 진출했다. 역적의 후손이 시험도 없이 음서의 혜택으로 관직에 진출할 수 있겠는가? 음서의 혜택을 받을 정도면 양반 중에서도 명문가이다.

이러한 까닭에 집안 자체도 역적으로 몰리지 않았으며, 역적 집안 출신이면 무과고 잡과고 간에 과거 응시를 못하고 음서로 관직에 진출하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다. 대표적인 사례가 사육신의 한 명인 박팽년의 가문인데, 박팽년의 손자 박일산은 당시 멸문지화를 간신히 면해 후에 성종 때에 가문의 죄에 연좌되는 것을 면하고 이름까지 받았으나, 이후로도 박팽년의 자손들은 조상이 뒤집어쓴 역적의 오명을 벗기 전까진 과거 응시를 할 수 없어서 꽤 근래까지도 곤궁하게 살아야 했다.

또한 기묘사화에 연루됐던 사람들은 선조 1년에 신원[59]되어, 오히려 기묘사화에 연루되었던 이들은 기묘제현(己卯諸賢)이라고 높임을 받았다. 조광조와 같이 사사되었던 김식의 증손자 김육(金堉)은 조정에서는 대신이요 왕실에서는 인척[60]이 되었음에도 조정에 출사하지 않는다는 명분을 가지는 산림과 대등한 인물로 존중받았다. 그전부터 사림들은 기묘사화에 연루된 사람들을 동정적으로 보았고, 훈구 권신들에게 청렴한 선비들이 억울하게 희생된 것으로 여기는 여론이 강했으니 일이 이렇게 풀린 것이다. 위의 김육이 기묘사화와 관련된 선비들의 전기를 집성한 기묘록(己卯錄)에는 이백록도 들어가 있기는 하지만 본편도 아닌 속집에, 그것도 별과에 천거된 사람의 하나로 이름만 올리고 있을 뿐이다.

그런고로 흔히 알려진 '칭기즈 칸 어록'[61]을 본따 창작된 이순신의 어록 중에서 "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마라. 나는 몰락한 역적의 가문에서 태어나 가난 때문에 외갓집에서 자라났다."는 대목은 엄연히 존재하는 기록을 무시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순신의 아버지 이정은 시험도 안 보고 음서로 관직에 진출했다. 그리고, 이정에게 조부인 이순신의 증조부 이거는 연산군의 동궁시절 스승 노릇을 했다.


6.2. 임진왜란 전야까지[편집]


1545년 봄에 서울 건천동 부근에서 태어났다. 이곳은 지금의 서울특별시 중구 인현동 일대이며, 때문에 이 근처에 충무로라는 이름을 붙였다. 소년 시절에 충남 아산으로 거주를 옮겼는데, 참외를 주지 않았다고 말을 몰아 참외밭을 짓밟았고, 맹인인 친구를 속여서 바로 그 친구네 집 동아를 서리하게 하는 등의 일화로 보아 어려서는 상당한 악동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다가 성장하며 철이 난 후 공이 20세 되던 1565년에는 무관 출신으로 보성군수[62]를 지냈던 방진(方辰)[63]의 딸 방수진(方守震)과 혼인하였고[64], 22세 즈음에 처음으로 무예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28세에 무과 별시(알성시)에 응시하여 승마 도중에 갑자기 말이 넘어져 낙방했는데, 전하는 이야기에 따라서는 빈혈이었다고도 하고 이때 발목을 다쳤다거나 다리가 부러졌다고도 한다. 위인전에는 낙마한 직후 시험장 안에서 자란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그 껍질로 다리를 동여매고[65] 시험을 속개했으나 결국 탈락했다고 묘사되어 있다. 다시 이로부터 4년이 지나 32세가 되던 1576년 4월 20일[66]이 되어서야 식년 무과에 급제하여[67] 12월에 함경도 동구비보에 종9품 권관으로 부임했다. 이렇게 이순신은 국경을 수비하는 야전에서 육군 초급 장교로 처음 공직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함경도 국경에서 근무하던 초급 장교 시절 <함경도일기>라는 진중 일기를 남겼다는 소문이 돈 적이 있는데, 사실은 이미 이 일기(단 하루치 뿐이었다)가 일반인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2000년대 중반부터 실은 위조품이 아닐까 하는 의혹을 받고 있었다. 다만 발견자인 노산 이은상, 그리고 이순신의 일기로 고증한 서지연구가 이종학 등이 워낙 쟁쟁한 인물이라 고민하고 있었던 것인데, 결국 몇몇 연구자들이 김성일의 유고집인 학봉전집에 실린 1579년 여행기 북정일록의 글자 몇 개를 바꾸고 날짜와 간지를 고증에 맞게 수정한 정교한 위조품임을 밝혀냈다. 이순신이 그 시기에 실제로 일기를 썼는지 안 썼는지를 단언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현재 발견된 실제 일기는 없다.

동구비보의 권관으로 3년을 근무한 이순신은 중앙직인 훈련원 봉사로 배속되었다. 종8품의 낮은 품계였으나 이순신은 병조정랑인 서익이 가까운 사람을 특진시키려 하자 반대했고, 이 때문인지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8개월 만에 충청도 절도사의 군관이 되었다.[68] 일단은 좌천이라 할 수 있으나 이 일로 그는 이름을 알리게 됐다.

일본에 이상 징후가 포착되자 선조는 능력있는 장군들을 특진시켜 배치하게 되는데 이순신도 그 중 하나로 36살에 전라도 고흥 발포진의 수군 만호(종4품)로 부임해서 최초의 수군 근무를 시작한다. 기록상으로 보아 발포는 판옥선 2척, 사후선 2척의 소형 수군 기지로 파악된다. 무과 병과 급제자는 종9품으로 시작하여 450일을 근속해야 자급이 올라가는데, 이순신의 급제 시기를 감안하면 만호 벼슬을 받기 충분한 품계에 오르지는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이는 선조의 결단 덕분이기도 하고, 이순신이 중앙조정에서 이름이 오르내릴 정도였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여기에서도 적지 않은 일화를 남겼는데, 당시 이순신의 직속상관이라 할 수 있는 전라좌수사 성박이 발포진 관사에 있는 오래된 오동나무를 베어 거문고를 만드려고 했으나, 이순신이 "관사의 오동나무 또한 국가의 물건이니 사사로이 베어갈 수 없습니다"라고 제지한 일이 있었다. 그 후임으로 온 전라좌수사 이용이 전임자의 말만 듣고 이순신을 해코지하려고 하다가 당시 전라감영의 도사(都事) 직을 수행하고 있던 조헌이 이순신의 근무 평점을 타 진포와 비교해 따져서 이순신에 대한 부당한 평가를 고쳐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그러나 군기 경차관[69]으로 기어이 이순신과 맞닥뜨린 서익이 조정에 근무 태만이라고 거짓 상소를 올리는 바람에 1581년 2년 전 재직한 훈련원 봉사로 강등되었다.

이후 1583년 10월, 병마 절도사 발포 만호 시절 성박의 일로 이순신을 부당하게 괴롭혔던 전라 좌수사 이용이[70] 함경도로 전근가면서 마침 모함을 받아 파직돼 있던 이순신을 일부러 지목해서 자기 종사관으로 삼아 함경도의 권관이 되었다. 다만 이는 이순신을 일부러 괴롭히려던 건 아니고, 이용이 잘못을 뉘우치고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이때 이순신은 여진족의 족장 울지내를 유인 작전으로 생포했다. 다만 상관인 김우서가 이순신의 전공을 시기하여 보고 없이 행동했다고 억지를 부려 전공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래도 그 이후 동년 11월엔 훈련원 참군(종7품)이 되었다. 그러나 그 직후 아버지가 죽었는데, 당시 북방 최전방에 있다가 귀경하고 있던 이순신이었기에 이 소식은 이듬해 1월에서야 이순신에게 전해졌다. 당시의 풍습에 따라 3년상을 지낸 이순신은 사복시 주부(종6품)로 복직되었다.[71]

1586년, 42세에 함경도 조산보 만호로 임명되었고, 1년 반 뒤에는 녹둔도의 둔전관을 겸했다. 이때 함경도 국경에서 근무 당시 북병사 이일에게 밉보여 녹둔도 전투[72] 이후 군관 이운룡, 경흥부사 이경록과 함께 자신의 첫 번째 백의종군을 시작하게 된다. 보통 1,000명 이상의 기마병에게 기습당한 상황에서 불과 수십 명으로 방어에 성공하고 반격까지 감행, 절반 이상의 포로를 구출해 피해를 최소화한 전투를 패전이라고 하진 않는다. 아군 피해도 방어가 취약하니 병력을 지원해 달라는 이순신의 요청을 북병사 이일이 거부해서 생긴 일이었으며 조정에도 대략적인 전말이 알려진 것으로 보인다.[73] 선조는 이일의 장계를 받고도 일반적으로 패배한 것과는 다르다고 구분을 짓고 장형을 친 후 백의종군으로 마무리지었다.[74] 아래는 관련 기록이다.

이경록(李慶祿)과 이순신(李舜臣) 등을 잡아올 것에 대한 비변사의 공사(公事)를 입계하자, 전교하였다.

“전쟁에서 패배한 사람과는 차이가 있다. 병사(兵使)로 하여금 장형(杖刑)을 집행하게 한 다음 백의 종군(白衣從軍)으로 공을 세우게 하라.”

조선왕조실록선조실록, 선조 20년 10일 16일자'


녹둔도 전투는 조정에 이순신의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백의종군 석 달만에 이일이 이끄는 400여 명의 여진족 토벌군에 합류해 선조 21년인 1588년 1월에 일명 '신전부락 전투'로 불리는 대대적인 여진족 토벌전[75]에서 추장인 우을기내(于乙其乃)를 생포하는 공을 세우고 백의종군을 끝낸 후 아산으로 가서 가족들과 함께 지냈다.

1589년 12월에 류성룡이 천거하여 전라도 정읍 현감이 되었다. 정읍이 독립된 현으로 만들어진 후 최초로 부임한 현감이 이순신이다. 이순신은 임지에서 선정을 베풀어 칭찬이 자자하였다. 1590년 8월 선조는 종3품의 직책인 고사리진과 만포진의 첨사[76]로 거듭 삼으려 했으나, 한 번에 종6품에서 종3품(10급 승진)까지 진급할 수 없다고 논핵되어 개정되었다.

1590년부터 1591년까지 이순신의 인사 발령은 급속하게 진행되었다. 고을 현감, 육해군 절제사의 직책의 발령이 계속되었다. 이런 혼란스러울 정도로 급속한 인사 발령 및 승진은 당시 조선의 급박한 전쟁 준비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유능하고 실전 경험 있는 장수를 최전선에 배치하기 위한 특례였다. 또한 이는 이미 이순신이 이때부터 조정에 유망한 장수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간관들이 이순신이 관례에 어긋날 정도로 승진이 너무 빠르다고 말할 정도였다.

【사간원의 이순신의 승진 재검토 요청 1】

사간원이 아뢰기를,

"전라 좌수사 이순신(李舜臣)은 현감으로서 아직 군수에 부임하지도 않았는데 좌수사에 초수(招授)하시니 그것이 인재가 모자란 탓이긴 하지만 관작의 남용이 이보다 심할 수 없습니다. 체차시키소서."

하니, (선조가) 답하기를,

"이순신의 일이 그러한 것은 나도 안다. 다만 지금은 상규에 구애될 수 없다. 인재가 모자라 그렇게 하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사람(이순신)이면 충분히 감당할 터이니 관작의 고하를 따질 필요가 없다. 다시 논하여 그의 마음을 동요시키지 말라." 하였다.

선조 25권, 24년(1591년 신묘 / 명 만력(萬曆) 19년) 2월 16일(계미) 2번째 기사


【사간원의 이순신의 승진 재검토 요청 2】

사간원이 아뢰기를,

"이순신은 경력이 매우 얕으므로 중망(衆望)에 흡족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인재가 부족하다고 하지만 어떻게 현령을 갑자기 수사(水使)에 승임시킬 수 있겠습니까. 요행의 문이 한번 열리면 뒤 폐단을 막기 어려우니 빨리 체차시키소서."

하니, (선조가) 답하기를,

"이순신에 대한 일은, 개정하는 것이 옳다면 어찌 개정하지 않겠는가. 개정할 수 없다."하였다.>선조 25권, 24년(1591년 신묘 / 명 만력(萬曆) 19년) 2월 18일(을유) 1번째 기사



이는 불차채용이라는 방식으로 비변사가 처음 선조에게 올린 불차채용 대상자 명단에는 이순신의 이름이 없었다.[77] 그러나 선조가 따로 몇몇 장수를 거론하여 추가시켰는데, 여기에 이순신이 포함되어 있었다. 1591년 2월에 선조는 이전의 논핵을 피하기 위해 벼슬의 각 단계마다 임명하여 제수하고 승진시키는 방법으로 정읍 현감에서 진도 군수로 승진시키고, 부임하기도 전에 가리포첨절제사로 전임하고, 곧바로 이번에도 부임하기도 전에 다시 전라 좌수사로 임명했다. 이 때 간관들이 승진이 너무 빠르다며 간하자 선조는 다른 사람의 승진은 좀 늦출 수도 있다고 하면서도 이순신의 전라 좌수사 발탁은 끝까지 고집했고 결과적으로 이것이 조선을 구하는 신의 한 수가 되었다.

드디어 1591년 47세로 정3품인 전라 좌도 수군 절도사에 임명되었다. 2년 만에 종6품에서 정3품이 된 것인데 이는 조선왕조에서 빠른 속도의 승진으로 이름난 조광조와 비슷한 속도였다. 조광조는 2년 4개월 만에 종6품인 사간원 정언에서 정3품인 홍문관 부제학이 된다.[78]. 여기에서 유성룡과 선조가 얼마나 다급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는 전쟁을 확신하지 않았다면 절대로 둘 수 없는 무리수였다.[79]

전라 좌수영은 5관 5포, 즉 5개 고을[80]과 5개 전문 수군 기지[81] 소속 병력을 지휘하에 두고 있었으며, 이순신은 이들의 전력 강화에 주력했다. 유명한 거북선의 건조도 이때부터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순신은 전란에 대비해서 실전과 완벽하게 동일한 수준의 훈련을 꾸준히 실행했다. 이순신은 자신의 휘하 군관들의 순번을 정해서 차례대로 가왜장(假倭將)으로 임명했고 이 가왜장이 이끄는 함선이 가왜장선이 되었다. 오늘날로 따지면 대항군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순신은 이마저도 엄격하게 진행했으며 제대로 된 격식을 갖춰서 가왜장으로 임명된 군관에게는 직접 가왜장 임명서를 발급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이순신의 철두철미한 상무정신과 전투 준비는 이후 벌어진 7년간의 전란의 판도를 뒤집는 중요한 근간이 될 수 있었다.


6.3. 임진년의 맹활약[편집]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발발했고 이순신은 이틀 뒤에 이 사실을 고지받았다. 5월 4일 최초의 출격 작전(일명 1차 출전)으로 옥포만에서 도도 다카토라가 이끄는 적선 26척을 전멸시켜 임진왜란 최초로 승리를 거뒀다.[82] 옥포 해전은 임진년에 벌어진 여러 해전의 전형적인 모델을 이룬다. 수색 섬멸전[83]은 이순신이 임진년 당시 사용했던 기본 전략이었다. 이 전투에서의 조선 수군 피해는 부상자 3명.[84] 옥포 이후 적진포와 합포에서 각각 5척과 15척을 추가로 격침하고 여수 전라 좌수영으로 귀환했다. 선조는 이 싸움의 공으로 이순신을 가선대부로 봉한다.

5월 29일에 이순신은 노량에 적선들이 왔다는 정보를 듣고 2차 출전을 시작, 처음으로 거북선을 출전시켜 사천에서 적선 12척을 격멸한다.[85] 6월 2일에는 당포로 향해 21척을 모두 전멸시키고 지휘관 도쿠이 미치유키를 죽였다. 6월 4일에 이억기가 지휘하는 전라 우수영의 군대와 합류한 뒤 6월 5일, 당항포에서 26척을 격파한다. 6월 7일에 근처에서 부산으로 달아나는 일본군을 발견하여 율포만으로 몰아넣어 3척을 격파하고 4척을 빼앗아 복귀했다. 2차 출정에서 조선 수군 총 전사자는 11명. 이 공으로 8월 16일 자헌대부 승자를 받는다.

7월 4일에 가덕도와 거제도 등지에 왜선 40여 척이 출몰했다는 정보를 들은 이순신은 3차 출전을 감행, 7월 6일 한산도 해전에서 승리한다. 이는 대첩이라 부를 만큼 세계 해전사에서 의미 깊은 전투였다. 이때 사용한 전술은 거짓 후퇴로 인한 유인 후 함대 반전 및 포위 섬멸인데 이토록 복잡한 함대 운용을 보여준 해전은 거의 없다. 굳이 예를 들자면 일전에 펠로폰네소스 전쟁알키비아데스가 이끄는 아테네 해군이 스파르타의 해군을 상대로 쓴 적이 있었다. 여기로. 이런 전술을 실전에서 육지에서라도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은 충분히 명장의 반열에 들어설 수 있을 정도다. 이순신은 항구에 틀어박힌 적의 주력을 한산도 앞바다까지 유인해서 격파했다.

여기서 흔히 세간에서 이순신의 장기로 인식되는 학익진이 처음으로 구사되었다. 학익진은 본디 단순한 포위 섬멸용 진형이나, 이순신은 이것을 거짓 도주하다가 돌연 180도 선회하면서 양쪽으로 날개를 펼쳐 적을 포위, 섬멸하는 전술로 개량하였다. 성능이 우수한 전함, 강도 높은 군사 훈련과 지휘관의 대담성만이 학익진 성공을 담보할 수 있었다. 거짓 후퇴 전술은 자칫 진짜 패퇴가 될 수 있는 매우 어려운 전술임을 생각해본다면 이순신의 역량을 짐작할 수 있다.

한산도 대첩에서 조선이 승리하면서 적들은 남해안의 제해권을 조선에 넘겨주어야만 했다. 적의 보급로가 끊겼으며 조선은 전라도, 충청도, 황해도 등 주요 곡창 지대를 지켜냈다. 임진왜란에서 조선군과 의병들이 끈질기게 저항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곡창 지대가 온전히 남아 있었기에 가능했다. 조선군은 반격의 교두보를 확보했고, 지휘 계통 또한 회복되었다. 또한 한산도 대첩의 소식이 퍼지자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기면서 의병 활동이 매우 활성화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한산도 대첩 문서로.

대승을 거둔 조선 수군은 가덕도로 향하려다가 안골포에 적선 40여 척이 있다는 보고를 받고 7월 10일 안골포에 도착하여 구키 요시타카, 가토 요시아키 등이 이끄는 왜선 40여 척을 추가로 박살내고 여수로 귀환한다. 총 전사자는 19명. 이제까지보다는 조금 많은 편이지만 그래도 새발의 피 수준이다. 이 공으로 이순신은 정헌대부 승자를 받는다.

3차 출전에서 왜군의 가뜩이나 모자란 화약화포를 포함한 수많은 물자와 인력이 바다에 수장되자 경악한 도요토미 히데요시해전 금지령까지 내리고 만다.

일각에서는 이순신의 성과를 단순히 보급 차단 수준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으나 실제로는 일선의 적들을 고사시키기에 적 섬멸 이상의 가치를 지녔다고 봐야 한다. 몇 백 년 뒤, 독일군북아프리카 전선 붕괴나 미국무기대여법 같이 해상 보급로는 그 유지에 따라 전선은 물론 전쟁의 흐름까지도 결정짓게 된다.

일본의 보급은 부산항으로 하역된 물자가 육로로 이송되었으며,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기본 계획은 접수한 정복지에서의 현지 조달이었다는 의견도 있지만, 이것은 가다노 쓰기오나 기타지마 만지, 사토 가즈오 등 일본 측 역사학자들도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고 있다. 일본의 역사학자 기타지마 만지 교수는 당시 제대로 된 육로가 닦여 있지 않아 수레를 운용할 수도 없는 조선[86]에서 육로를 통한 보급은 불가능에 가까우며, 억지로라도 부산에서 조선의 각 전략적 요충지 및 주둔지까지 육로로 식량을 조달할 경우 이를 수송할 인원과 호위할 인원들이 대거 필요하고, 이들이 목적지까지 가면서 수송할 군량을 먹어 치우고 빈손으로 목적지에 도달하여 되려 본진에 돌아가야 하니 식량을 달라고 했을 상황이 발생했을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87]

게다가 보급 물품에는 군량 등 식량만 있는 것이 아니다. 조총의 탄환 및 조총의 부속품과 화약, 일본식 활의 화살 및 활대와 각종 병장기 관련 소모성 물품들이 필요하다. 현지 조달을 통해 식량을 그럭저럭 구했다 해도 이러한 것들은 현지 조달로 구할 수 없으며, 당연한 말이지만 장비 보급이 안 되면 제대로 싸울 수 있을 리가 없다. 또한 손실된 병력의 보충 역시 수로를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미 한양을 넘어 진격하느라 병력 손실을 입은 일본 육군이 더 이상 병력 충원을 하기 어려워진 것이다. 일본군은 훗날 2차 세계대전에서도 스스로도 보급에 대하여 경시를 하다시피 한 데다, 가토급 잠수함을 비롯한 미 해군의 통상 파괴 작전으로 그나마 유지하던 해상 보급로마저 차단당하면서 태평양 전쟁에서도 애를 먹어야 했다.

따라서 이순신의 공로는 적의 해상 작전 전체의 봉쇄이자 보급로 차단이었다.

8월 8일에 왜군이 김해양산 등지로 도주하려 한다는 정보를 받자, 이순신은 아예 적의 본거지가 돼버린 부산을 직접 공격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8월 24일에 4차 출전에 나섰다. 부산으로 향하는 길에 왜군이 5번이나 소규모 기습을 가하나 죄다 바닷속에 쓸어넣고 부산 앞바다에 나타나 대포로 포격을 퍼부어 왜선 100여 척을 죄다 가라앉힌다. 이때 전사자는 6명에 불과했다. 이렇듯 피해가 적었던 것은 거듭된 패전으로 조선 수군만 보면 학을 떼게 된 일본 수군이 조선군의 출현 직후 배를 버리고 죄다 육지로 도주해 버린 까닭도 있다. 덕분에 손쉽게 적의 배를 싹쓸이했지만 이순신이 신임하던 녹도 만호 정운이 전사해서 대승을 거두고도 이순신은 침울한 귀환을 했다.

부산포 해전의 결과로 본진마저 두들겨맞자 왜군은 더욱 조선 수군을 기피하게 된다.

부산포 해전은 전략적으로 볼 때는 빈 배 100척을 불태우고도 종전보다는 피해를 많이 입었기 때문에 한산 해전과 같은 대접을 받지 못한다. 다만 그 이후로 왜군은 각지에 왜성을 쌓고 촘촘히 함선을 배치해서 종전처럼 조선 수군이 부산포를 공격하기 어려운 상황을 만들었고 그 결과 조선 수군은 한산도에 주력을 전개하고 제해권을 완전 장악한다.

임진년의 이순신의 공적은 첫째 우선 해상에서 승전을 통해서 백성들에게 큰 희망을 주었고 의병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다시 말하면 해상에서의 승전이 없었다면 한 방에 밀릴 뻔한 상황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왜군의 침공에 왕과 양반, 무장, 평민, 노비 가릴 것 없이 도망가기에 정신없었던 상황이었는데 해상에서의 승전은 민족의 자긍심을 높여서 왜군의 침공에 저항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둘째 왜군의 주력은 육군이 아닌 수군으로서, 수군을 제압함으로써 전쟁 수행에 막대한 차질을 빚었다. 당초 왜군의 전략은 알려졌다시피 수륙병진이었고 해상에서의 승리는 따놓은 것처럼 왜군 지도부는 생각하고 있을 정도였다. 수군의 패배는 필연적으로 보급로의 단절로 이어졌고 진군한 육군은 고립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쉬운 예를 들자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군이 중국에서 전선을 유지하기 급급한 상황에 비견될 만하다. 수군이 패함으로써 왜군은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만들었다. 셋째 호남 지역을 수호함으로써 조선군의 보급선을 확보했다는 점이다. 유일하게 호남이 온전하게 보존되어서 추후 명군의 파병과 전쟁 수행을 가능하게 할 수 있었다. 특히 이순신은 전력을 유지하면서도 둔전에 힘쓰고 백성들을 보호해서 인심을 얻었다.[88]


6.4. 계사년 이후[편집]


계사년(1593년) 2월 6일에 조선 수군은 5차 출전을 하여 웅포에서 왜군을 7차례 공격해 왜선들을 격멸했으나 육지에서 왜성을 쌓고 버티는 전략으로 대응 방침을 트는 바람에 작년에 비해서는 큰 전과를 올리지 못했다.

7월 15일에는 전라 좌수영 본영을 한산도로 이주하고 돌산도에 피난민들을 위한 터전을 개간했다.

8월 15일 이순신은 삼도 수군 통제사에 임명되었다. 삼도 수군 통제사는 경국대전에 없는 별정직으로 전라 좌수영, 전라 우수영, 경상 우수영, 충청 수영으로 구성된 조선 수군 전체가 각 지휘관들의 갈등 없이 통제사 하나의 지휘를 따를 수 있는 직위였다. 현재로 치자면 해군 삼남 작전 사령관이나 해군 작전 사령관 급이라고 봐도 될 위치이다.

1594년에 6차 출전으로 당항포에서 다시 한 번 왜선 30여 척을 분멸하나, 담종인의 금토패문을 받고 병중인데도 불구하고 항의의 서한을 올린다.[89]

이때 《난중일기》서 본격적으로 원균에 대한 혐오와 경멸이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1595년에는 아예 "원균을 조선 수군에 두지 말아주소서"라고 상소까지 올려 보낼 정도로 둘의 사이는 험악해진다. 이 개놈이 나중에 조선 수군 장병들을 상대로 저지를 일을 생각해 본다면, 이순신의 사람 보는 눈이 참 탁월하다고 하겠다. 단 이순신은 자신을 비호한 류성룡, 이원익과 시시콜콜한 요구에도 모두 응한 충직한 부하들 및 자기만 안 좋게 고 타인에게는 문제 일으키는 것이 없는 이들을 제외하면 다른 대신들이나 무장들 또한 제법 거리를 두고 묘사했고, 구면일 경우엔 경멸감도 나타냈다는 면에서, 그 연장선으로 볼 수도 있다. 특히 그는 장수 평가 기준도 몹시 까다로워서 이순신에게 높은 평가를 받은 무장은 별로 없다.[90] 개중에는 나름 능력있는 장수도 있었지만 비교 대상이 이순신이었다. 대신 그는 남에게 엄격한 만큼 자신에게는 배로 엄격했다. 또한 명이나 왜의 장수들에 대해서는 경멸감을 감추지 않았는데, 조선의 장군이 침략군의 장군에게 증오를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명나라 장수들이 조선에서 보여준 각종 범죄는 비난받기에 충분했다. 아무튼 둘 사이의 영향인지 원균은 충청병사로 전직된다.

전쟁이 소강 상태에 들어가자 이번엔 기근과 전염병이 조선 수군을 괴롭혔다. 전쟁으로 인한 인명 피해, 대규모 징발, 토지 유실은 농업 생산량의 급격한 감소를 불러왔고 이는 3년에 걸친 지독한 흉년으로 이어져 보급과 병력 유지에 치명타를 입혔다. 여기에다 가공할 역병까지 겹쳐 수천의 장졸들이 역병으로 떼죽음을 당했으며, 이때문에 탈영병도 속출했다. 이순신은 1594년 4월 20일에 작성한 장계에서는 삼도 수군 17,000여 명 中 사망자 1,904명, 감염자 3,759명. 도합 5,663명의 비전투 손실을 입었음을 밝혀 당시의 처참한 상황을 전하고 있다.

이순신은 탈영병을 처벌하고 어떻게든 병역 자원 유지를 위해 애쓰는 한편 피난민, 유민들을 수습하고 둔전을 경작해서 보급을 자급자족하였다.


6.5. 파직[편집]


"만약 이순신을 병신년정유년 연간에 통제사에서 체직시키지 않았더라면, 어찌 한산(閑山)의 패전을 가져왔겠으며 양호(兩湖)가 왜적의 소굴이 되겠는가. 아, 애석하다."

ㅡ<선조 실록> 선조 31년(1598년) 11월 27일, 사관의 논평


정유년(1597년)이 밝아오자 이순신에게 2가지 사건이 발생했다.

첫 번째는 부산 왜영 방화 사건. 이순신이 자신의 부하들인 안위와 김난서 등이 부산 왜영에 숨어들어서 적의 배와 장비들을 불태웠다는 내용의 보고를 올렸는데, 이 보고 이후 이조좌랑이던 김신국이 이순신의 보고를 허위 보고라고 올린 사건이다. 이원익의 추가 보고와 의금부의 조사 결과, 이순신의 보고는 아래 부하들이 허위로 이순신에게 보고를 올림으로써 이순신이 왕에게 보고를 허위로 하게 되었다는 내용인데, 이게 이후에 이순신이 파직되는 이유 중 하나가 된다. 다만 의금부의 조사 결과와 이원익의 추가 보고만으로 이순신이 거짓으로 조정에 보고를 올렸다고 하기에는 무리인 부분이 많은데, 조정에서도 분명 이순신의 부하가 이순신에게 허위 보고를 올려서 이를 그대로 알리다 보니 졸지에 거짓 보고를 하게 된 것이지 이순신이 의도적으로 허위 보고를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파악하고 있었다.

더 웃긴 것은 허위 보고를 올린 관계자들이 조사를 받았지만 막상 한양에 압송된 사람은 이순신밖에 없다. 정말 허위 보고를 추궁하고자 했다면 안위나 김난서까지 같이 압송되었어야 하는데 이들은 압송은 커녕 파직도 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이순신의 파직이 결정됐을 때 선조는 자기 입으로 직접 부산 방화 사건은 안위와 김난서가 행한 일인데 이순신이 공을 가로챈 것이다(?)라고 언급함으로써 이순신의 부하들이 한 행동임은 인정하지만 은근슬쩍 이순신 잘못으로 몰아갔으니 사실상 허위보고 사건은 그냥 이순신을 떨어트리려는 명분에 불과하다.

2번째는 가토의 도해. 얼마 전 일본의 이중간첩인 요시라로부터 "가토 기요마사가 바다를 건너올 것"이라는 정보가 입수되었는데, 이 정보가 조정에 보고된 것이 1597년 1월 1일이다.[91] 조정에서는 즉각 비변사에서 회의를 거쳐 이순신에게 출격 명령을 내렸는데, 이순신이 1월 6일부터 남해현에 공무차 들어갔다가 풍랑에 갇혀서 빠져나오지 못하던 상태였기 때문에 시간을 잡아먹다 보니 가토가 진작 바다를 건너서 부산에 도착해버렸다.[92] 조정에서도 이를 파악하여 가토를 잡을 수 없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혹시 추가로 있을 상륙 부대에게 압박을 주기 위하여 부산포로 출격을 명했고, 이순신은 69척의 함대로 부산포를 두들기며 명령을 충실히 이행했다. 통념처럼 무작정 출전 거부만 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순신이 가토를 잡지 못했다고 책망하면서 "저라면 잡을 수 있습니다"라고 한 원균의 장계가 조정으로 올라오고, 이와 더불어 이순신을 숙청하려고 이미 혈안이 되어 있던 선조에 의해서 싸우라는 명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1597년 2월 26일에 이순신을 파직 및 압송하고 그 후임으로 원균을 임명한다.[93]

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이순신이 금부에 투옥된 후 한 차례의 고신을 받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실록에 기록된 선조의 언행을 보면, 선조는 이순신을 두고 참으로 역적이다. 이제 가등청정의 목을 들고 온다고 해도 절대 용서할 수 없다, 임금과 조정을 기망했다, 반드시 죽여야 한다., 형을 끝까지 시행하여 그 죄를 캐야 한다.고 언급할 만큼 그 분노가 컸기 때문에 고신의 강도 또한 가볍지는 않았으리라 추정된다. 이 당시 이순신에게 어떤 고문이 가해졌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정탁의 신구차에는 '이순신에 대한 한 차례의 추죄가 있었고 또다시 형을 가하면 자칫 죽을 수도 있다'는 언급이 있으며, 이덕형의 한음문고에서는 '이순신이 고신으로 거의 죽게 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불멸의 이순신처럼 이순신을 역도로 몰아 가혹한 고문[94]으로 거의 죽여놓다시피 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사극이야 자극적인 장면이 있으면 아무래도 좋으니 그런 것이니 그렇다 치고, 난중일기에 의하면 출옥한 4월 1일에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술을 마신 다음, 이틀 뒤인 4월 3일에 말을 타고 출발해 다음 날인 4일에 수원, 다다음 날인 5일 아침에 아산에 도착한다. 도성에서 아산까지는 직선 거리로도 90km 가까이 되고 길을 따라갔다면 못해도 이틀간은 110km는 말타고 달렸다는 말인데, 심한 고문을 받았으면 이는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 죄인을 추국할 때는 집행자 마음대로 이리저리 뚜까패는 것이 아니고, 고신 과정이 잘 드러나 있는 남이의 옥사처럼 취조 과정에서 제대로 된 답변이나 자복을 하지 않을 시 장을 일정 횟수만큼 때리는 방식으로 진행이 되었다.[95] 역모 사건 정도는 되어야 하위 절차를 거쳐 압슬 등의 강한 고문이 가해지기 때문에 전후 사정을 감안하면 이순신 역시 사실 관계를 우선적으로 밝히는 양상으로 추국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도 고신의 목적은 죄인의 자복을 받아내는 것이지 죽이는 것이 아니다.

물론 난중일기에 따르면 백의종군 직후 앓아누운 횟수가 늘어났기 때문에 몸이 안 망가졌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오로지 고문으로 몸이 망가졌다기 보다는 나이 50에 격무로 장기간 스트레스에 시달려 온 사람이 투옥과 고문까지 더해지며 건강에 큰 타격을 받았다고 보는 것이 맞다. 게다가 중근세의 감옥은 인간이 버티기 힘들 정도로 비위생적이고 비인간적인 환경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96] 비위생적인 환경에서의 감염이 죽음을 의미하는 시대이기도 했고, 재소자의 생명을 지켜주는 난방 따위는 당연히 존재하지도 않는 구조였기에 투옥되자마자 심신이 급격하게 무너져 옥사하는 경우도 실록에 적지 않게 나올 정도로 극한의 환경인 경우가 많았다. 또한 목숨을 바쳐 왜적을 5년 동안 한 번의 패배 없이 막았음에도 적의 반간계에 넘어가 파직으로 화답한 선조에게 심한 배신감을 느꼈을 수도 있고, 이로 인한 정신적 고통 역시 어마어마했을 것이다.[97]

내 안에서 칼이 울었다.
노엽지 않은가? 그대를 조선군의 수괴라 부르는 적보다
역도라 칭한 군왕이 더 노엽지 않은가?
그 불의에 맞서지 못하고, 그대의 함대를
사지에 이끌고자 하는 세상의 비겁이 노엽지 않은가?
칼은 살뜰하게 내게 보챘다.
적의 피로 물든 칼을 동족의 심장에 겨누지 마라.
그 무슨 가당찮은 오만인가?

어찌하여 노여움을 참고 있는가?
이 바다에서 수많은 적에게 겨눴던 그 칼을
그대의 노여움에 겨눠라.
'내가 진정 베어야 할 것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내 자신'이라
칼을 달래고자 했으나 그 울음을 잠재울 수 없었다.
하여, 차라리 육신이 죽어주었으면 했다.
그러나, 이 내 몸은 죽어지지 않았다.

ㅡ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91화 中[98]


파직만 당하고 나중에 재조사로 사건의 전말과 원균의 실태를 알고 나서 전력이 붕괴되기 전에 원상 복귀 시켜주었으면 그냥 재수없는 일이 생겼다고 넘어갈 수도 있었을 테지만, 이순신은 목숨만 건졌지 나머지는 다 잃었다. 출옥한 다음 몇 개월동안 백의종군을 했고, 거기에 기껏 만들어놓은 함대는 원균이 칠천량 해전에서 죄다 꼴아박았다. 선조는 운이 없어서 졌다고 정신승리나 하다가 자신을 모함한 대신들을 처벌하지도 않고 품계는 떨어뜨린 채 복직만 떨렁 시켜놓더니 바로 전장으로 내몰았다. 이정도면 이순신이 길길이 날뛰어도 이상하지 않다.

한편 파직과 백의종군 외에도 이순신을 괴롭히는 것이 있었으니, 아들이 잡혀갔다는 소식을 듣고 80대의 노구임에도 한양으로 올라오던 이순신의 모친 변씨가 병으로 배에서 객사한 것이다. 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지극했던 이순신은 엎어져 몸부림을 칠 정도로 슬퍼한다.[99]

무고한 사람을 잡아다 가둔 실로 어이없는 사례지만, 웃기게도 이순신과 조선은 동아시아 역사에서 운이 좋은 편에 속한다. 똑같이 조국을 멸망의 수렁에서 겨우 건져내고 있었던 이목, 악비, 원숭환은 결국 내부의 적이나 외부의 반간계에 휘말려 처형당했고, 그렇게 나라의 버팀목이 사라지자 나라도 망했는데 다행히 이순신은 그 정도는 아니었다. '왕권을 견제하는 신권'이라는 조선 특유의 정치체제가 빛을 발휘한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6.6. 명량 해전[편집]


7월 16일 원균의 지휘 아래 출격에 나선 조선 수군은 칠천량 해전에서 소멸했다.

이순신이 힘겹게 모아놓은 300여 척[100]의 함대가 고스란히 사라졌고 이는 다시 말해 조선 수군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닌 전력이었다.[101] 단 한 번의 전투로 조선 수군의 전력 전체가 소멸한 것. 그나마 배설이 전함 12척을 수습해 장흥으로 퇴각했다.

당황한 조정은 7월 23일 모친상을 당한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했다. 이때 선조는 과인이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라는 교서를 내릴 정도로 저자세로 굴면서도 실제 품계는 원래보다 4품계 강등된 정3품 절충장군 품계를 주어 뒤통수를 쳤다.[102] 지금으로 치면 대장 계급의 해군참모총장이[103] 억울하게 누명쓰고 해임되었는데, 정작 같은 직책으로 복귀할 땐 소장이 된 셈이다. 이렇게 될 경우 이순신은 다른 수군 절도사와 같은 품계 즉 계급이 되기에 지휘에 문제가 생길 수 있었지만, 실제로 일어나지는 않았다.[104] 그러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이순신이 지휘할 수군이 남아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통제할 수군이 없는 수군 통제사였다.

다행히 배설이 칠천량 전장에서 미리 빼놓은 12척의 전선이 남아 있었다. 이순신은 다시 통제사로 제수되자마자 배설을 추궁해 배설이 숨겨놓은 함대의 위치를 알아내 함대를 인수하러 출발한다. 이때 곧바로 남해안으로 가지 않고 초계 → 하동 → 구례 → 곡성 → 순천 → 보성 순으로 전라도 일대를 돌아다니며 병사를 모집하고 물자를 다 긁어가서 일본군의 수중에 떨어지는 것을 방지했다. 웃긴 건 저 지역들은 이미 일본군이 점령해 놓은 곳이었는데 그걸 다 피하면서 싹싹 긁어모으는 데 성공했다는 거.

8월 15일, 선전관 박천봉이 찾아와 선조의 뜻을 알리는데, 이는 수군을 폐하고 충청도로 올라와 미래를 대비하는 것이 어떠느냐고 물어본 것이다. 하지만 이순신은 이를 거부하고 싸우기를 결심하는 장계를 올리는데, 이 장계가 바로 그 유명한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있나이다(今臣戰船 尙有十二, 금신전선 상유십이)'란[105] 전설의 대사로 대표되는 '상유십이' 장계. 남해와 서해 남쪽을 완전히 내주더라도 어떻게든 훗날을 도모해보자고 정부에서 권하는 암울한 상황에서도 이순신은 싸우기를 결심한다.[106] 그 와중에 배설은 다시 탈영하여 종적을 감춘다.

9월 16일 이순신은 수습한 전함 13척(이후 1척이 더 보강되었다)과 어선 일부를 대동하고 명량에 출격했다. 이때 초반에 전투에 나선(이순신이 난중일기에서 가늠했던) 왜군 함선만도 133척에 달할 만큼 절망적인 전투였으나, 이순신은 수많은 왜선을 격침하고 결국 승리하여 왜군이 제해권을 잃게 한다. 경과나 분석에 대해서는 명량 해전 참조.

이순신 본인도 난중일기에서 "실로 천행이다(此實天幸)"라고 표현했을 정도로 힘든 싸움이었으나, 어쨌든 명량 해전의 승리로 인해 조선은 남부 제해권을 다시 회복했고 왜군의 서해 우회는 좌절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전라도 진출을 완전히 좌절시켰던 철벽 방어선 진주성은 제2차 진주성 전투로 초토화되었기 때문에 정유재란 초반 일본군은 영남 남부 지방의 통로를 무인지경으로 통과해 호남을 싹쓸이했으나, 직산에서 명군의 빠른 진군과 완강한 저항에 직면해 패퇴한 후 충청도 일대에서 퇴각하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명량에서 이순신의 경이적인 승전보는 일본군의 뇌리에 서해를 장악당함으로써 보급을 차단당했던 임진년의 악몽을 되살리게 했고 일본군의 북진 의지는 완전히 꺾인 채 남해안으로 후퇴하여 겨울철임에도 왜성들을 쌓는 등 수성에만 주력하게 되었다. 이후 노량 해전이 벌어질 때까지의 2년간 해전은 3회. 일본 수군은 철저하게 이순신을 피하려고 했다.


6.7. 전설이 되다[편집]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을 막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났다가 임진왜란이 평정되니

성스러운 자태를 감추어 바람같이 스러진 것이었다.

박종화 作 《임진왜란》 中



비록 명량 해전에서 대승을 거뒀으나 일본군의 함대는 여전히 백 단위를 헤아렸기에 전투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이순신은 과감하게 함대를 물려 서해안을 거슬러 오르며 퇴각길에 오른다. 그러나 몇 달 안 되어 이순신은 서해안에서 일본군을 전부 몰아내고[107] 고금도에 통제영을 설치해 수군 재건에 주력했다. 다행히 명량 직후에 승전 소식을 들은 칠천량의 패잔병과 피난민들, 흩어진 전선들이 고금도의 새 통제영에 속속들이 합류하여 얼마 안 가 본래의 위용을 되찾는 데에 성공했다.[108] 패잔병 및 전선의 합류를 통해 칠천량 해전 당시의 결과를 유추할 수 있다. 칠천량 해전 당시 통념처럼 조선 수군의 상당수가 칠천량 및 춘원포에서 말 그대로 궤멸된 게 아니라, 의외로 적지 않은 함선 및 병력이 지휘 통제를 상실하고 뿔뿔히 흩어진 상태임을 알 수 있다는 뜻.

그 뒤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이 합류하였는데, 그는 능력은 있으나 탐욕스런 인물이었다.[109] 이순신은 명 수군이 조선 백성들을 상대로 약탈 등을 자행하자 백성들과 함께 이삿짐을 싸고 떠나는 시늉을 했고, 다시는 그런 행패를 부리지 못하게 할 테니 가지 말라면서 찾아온 진린에게 귀국 군사들이 또 행패를 부린다면 직접 그들을 다스릴 수 있게 해달라는 요청을 하고 승낙받아 명 수군의 지휘권까지 일부 얻어냈다. 이후 진린에게 자신의 공로를 기탄없이 그냥 넘겨주는 식의[110] '채찍과 당근'을 병용하여 그를 진심으로 감복하게 하였다.

실제로 진린은 옆에서 지켜보면서 이순신의 성품과 능력에 감복하여 "이순신은 경천위지(經天緯地)의 재주[111]와 보천욕일(補天浴日)의 공로[112]가 있는 사람이다."라는 최고의 찬사를 하는가 하면, 걸핏하면 조선인을 깔보기 일쑤인 중국의 고관대작이 자신보다 나이가 2살 어린 통제사 이순신을 '통상대인'이나 '이 대인'이라는 호칭도 아니고 노야(老爺) 또는 이야(李爺)라는 존칭으로 불렀으며, 자신이 탄 가마가 감히 이순신이 탄 가마보다 먼저 나가는 일이 없도록 했을 정도이다.[113] 이에 그치지 않고 진린은 이순신에게 자신과 함께 명나라로 가서 살자고 조르기도 했으니, 그야말로 이순신에게 푹 빠져있던 명나라 사람 중 하나였다.[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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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한 뒤 일본군은 철수를 결정했다. 이순신의 함대는 명 함대와 합류해 왜교성 전투를 펼치지만, 함대는 여러대 파괴하였으나 성은 점령하는데 실패하는 패배를 맛보게 된다. 이후 철수하는 적 주력과 노량 앞바다에서 충돌하였으니, 뒤로는 조정과, 앞으로는 일본군과 싸워야 했던 고독한 영웅은 이 전투에서 마지막까지 적과 싸우다 전사했다. 적선 200여 척이 격침되고 50여 척만이 도주했다. 역설적으로 충무공이 쓰러진 이 전투는 충무공의 모든 전적에서 최고 규모의 전과를 낸 전투였다.

노량 해전이야말로 이순신의 인간적인 면모가 돋보이는 해전이다. 종전까지는 이순신이 철저한 계획과 철두철미한 전략으로 완승을 거두었지만, 노량 해전은 그럴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진린과 유정은 서로 내 손에 피를 안 묻히고 고향으로 돌아가자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116]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4개로에 있던 왜군은 철병을 결정했고 이에 대응해서 조명 연합군이 추격을 했는데 유일하게 승리를 거둔 곳이 바로 노량 해전이다. 다른 곳에서는 일본군을 추격하는 둥 마는 둥 하거나 어설프게 공격하다가 반격당해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117]

고니시는 진린과 협상하여 무사히 퇴각하려 했으나 장군의 반대 때문에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래서 1척만 포위망을 통과하게 해달라고 진린을 꼬여서 구원군 요청을 보냈고 왜군은 500여척에 달하는 원병을 파병하게 된다. 조선군과 명군 다 합쳐도 130여척에 불과한 전력인 데다가 명군의 함선은 왜선보다 작은 상황, 진린도 조선 판옥선을 타고 있었을 정도니...[118] 조명 연합군은 이제 여수와 사천 양쪽의 왜 수군에게 포위를 당하게 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물론 진린은 그 상황을 회피하고 도망가려고 했겠지만 이순신이 단호하게 죽음을 각오하고 진린과 한 판 붙은 끝에 노량에서 최후의 결전을 벌인다. 노량 해전은 쉽지 않은 해전이었다. 야간 해전에다 이미 전략적으로 역으로 포위당해 불리한 상황이었고 함선도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전장은 좁아서 백병전을 하는, 지금까지 볼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것은 이순신이 결코 의도한 상황이 아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잘 훈련된 조선 수군과 명의 연합군은 치열한 전투를 벌여서 기어코 승리를 이루어냈다. 노량 해전은 워낙 치열해서 대장선에 탄 진린과 이순신이 위급할 때 서로 구원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접전 끝에 결국 조명 연합군은 승리하고 이순신은 전사했으며 전쟁이 끝났다.

임진왜란 내내 이순신이 보여준 전략, 전술, 판단력, 철천지 원수 왜군에 대한 단호한 복수심, 민중을 사랑하는 애민정신, 사람들을 이끄는 통솔력, 그 어느 것도 모범이 되지 않은 것이 없다. 물론 시대와 상황이 만든 영웅이라 할 수 있겠으나 이것은 이순신이 평소에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의 철저한 준비와 비관적으로 느낄 만큼 현실적인 판단력이 합쳐진 결과였다. 진정한 영웅이란 무엇인지 보여주는 마음가짐이다.

도독(진린)은 공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는 3번씩이나 배에 엎어지면서 "함께 일할 만한 사람이 없어졌구나!"라고 하였다. 남도 백성들은 공의 죽음을 듣고 분주히 길거리에서 통곡하였고 시장에 있던 사람들은 술을 마시지 않았다. 그 후 가족이 고향으로 반장(返葬)할 때 남중의 선비들이 제문을 지어 와 제사하였고 노약자들은 길을 가로막고 통곡하여 고을 경계까지 통곡의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이항복, <백사집>


이순신의 죽음은 전투가 끝난 뒤에 알려졌고, 통곡이 바다를 덮었다고 전해진다. 그와 만나기 이전엔 부패했고 조선군 때리기도 주저하지 않으며 성질 포악한 명나라 도독이었던 진린은 이순신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엉덩방아를 찧으며 "나는 노야(老爺)께서 살아 와서 나를 구원한 것으로 생각했는데, 어찌하여 돌아가셨는가?” 하고 통곡했고, 그의 아들을 보고는 말에서 내려 손을 부여잡고 애통해 하였다. 이순신의 지휘를 받으며 다른 명군과 달리 꽤나 엄한 군율 때문에 곤욕을 치렀던 명나라 수군 장졸들도 눈물을 흘렸다. 이순신의 유해가 실린 운구가 아산까지 올라가는 길엔 여기저기서 백성들이 너도나도 운구를 붙들고 "공이 실로 우리를 살렸는데, 공은 이제 우릴 버리고 어디를 가시오..." 하고 통곡하여, 운구를 옮기는 데 매우 애를 먹었을 정도였다고 전한다.


7. 의문점[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이순신/의문점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이순신의 사망과 관련된 여러 설들과 각종 음모론을 모아놓은 문서. 검증되지 않은 집단 연구 내용을 포함하고 있으니 이를 감안해서 읽어야 한다.

이순신이라는 인물 자체의 논란 내지 의문점이 아닌, 그의 사망 등에 관한 의문점을 서술한다. 이순신은 그 명성 만큼이나 지금까지도 엄청난 학자들의 집중적인 연구가 이뤄지고 있음에도 흠이 밝혀지지 않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8. 전투 관련[편집]



8.1. 참전 목록[편집]


출전
연도
날짜
(음력)
해전
아군 피해
성과
1차 출전
1592년
(선조 25년)[119]
5월 7일
옥포 해전
(玉浦海戰)
1명 부상[120]
적선 26척 격침
합포 해전
(合浦海戰)
피해 없음
적선 5척 격침 및 전멸
5월 8일
적진포 해전
(赤珍浦海戰)
피해 없음
적선 11척 격침 및 전멸
­
­
2차 출전
5월 29일
사천 해전
(泗川海戰)
2명 부상[121]
적선 13척 격침 및 전멸
6월 2일
당포 해전
(唐浦海戰)
피해 없음
적선 21척 격침 및 전멸
구루시마 미치유키 전사
6월 5일
제1차 당항포 해전
(唐項浦海戰)
알 수 없음
적선 26척 격침
적 지휘관 전멸
6월 7일
율포 해전
(栗浦海戰)
알 수 없음[122]
적선 3척 격침,
4척 포획
­
­
3차 출전[123]
7월 8일
한산도 해전
(閑山島大捷)
19명 전사,
116명 부상
적선 59척 격침,
14척 나포,
와키자카 사베에,
와타나베 시치에몬 전사,
마나베 사마노조 사망[124]
7월 10일
안골포 해전
(安骨浦海戰)
피해 없음
적선 42척 격침 및 전멸,
3,960여 명 전사
­
­
4차 출전[125]
8월 29일
장림포 해전
(長林浦海戰)
피해 없음
적선 6척 격침
9월 1일
화준구미 해전
(花樽龜尾海戰)
피해 없음
적선 5척 격침
다대포 해전
(多大浦海戰)
피해 없음
적선 5척 격침
서평포 해전
(西平浦海戰)
피해 없음
적선 8척 격침
절영도 해전
(絶影島海戰)
피해 없음
적선 9척 격침
초량목 해전
피해 없음
적선 4척 격침
부산포 해전
(釜山浦海戰)
6명 전사,[126]
25명 부상,
일부 전선 파손
적선 128척 격침,
3,800여 명 전사[127]
­
­
5차 출전
1593년
(선조 26년)
2월 10일 ~ 3월 6일
웅포 해전
(熊浦海戰)[128]
협선 4척 전복
적선 51척 격침,
구와나 지카카쓰 전사,
2,500명 전사
­
­
6차 출전
5월 2일
2차 웅포 해전
(熊浦海戰)[129]
피해 없음

­
1594년
(선조 27년)
­
7차 출전
3월 4일
2차 당항포 해전
(唐項浦海戰)
피해 없음
적선 31척 격침 및 전멸
­
­
8차 출전
9월 29일
1차 장문포 해전
(長門浦海戰)
피해 없음
적선 2척 격침
10월 1일
영등포 해전
(永登浦海戰)
피해 없음
피해 없음
10월 4일
2차 장문포 해전
(長門浦海戰)
피해 없음
피해 없음
­
­
9차 출전
1597년
(선조 30년)
2월 10일
2차 부산포 해전
(釜山浦海戰)
피해 없음
알 수 없음
­
­
10차 출전
8월 27일
어란포 해전
(於蘭浦海戰)
불명
불명[130]
9월 16일
벽파진 해전
(碧波津海戰)
피해 없음
알 수 없음
9월 16일
명량 해전
(鳴梁海戰)
2명 전사로 기록
나머지 불명
적선 31척 격침,
도도 다카토라 부상,
구루시마 미치후사,
하타 노부토키 전사,
전사자 불명
­
­
11차 출전
1598년
(선조 31년)
7월 19일
절이도 해전
(折爾島海戰)
30여 명 추정[131]
적선 50여 척 격침[132]
9월 20일 ~ 10월 7일
장도 해전 / 왜교성 전투
(獐島海戰/倭橋城 戰鬪)[133]
조선 수군 130여 명 사상,[134]
명나라 전선 30여 척 침몰 및 파손,
명 수군 2천여 명 전사
적선 30여 척 격침,
11척 나포,
3천여 명 사상
11월 19일
노량 해전
(露梁海戰)
조선 수군 10명 전사,[135]
300여 명 부상
명 수군 500여 명 사상
적선 200여 척 격침,
100여 척 나포,
150여 척 반파,[136]
사상자 2만 ~ 3만 명(추정치)

아군 피해와 성과를 보면 그 많은 전투에서의 전사자를 다 합쳐도 단 200명 정도에서 그쳤고[137], 격침시킨 적선이 800척에 가깝다. 이는 전사자 1명이 적선 4척을 격침한 격이다. 또한 병사들의 손실에 비해 지휘관과 부관의 손실률이 굉장히 높은 것도 특기할 만한 사항.

반대로 일본군은 병사들의 손실에 비해 지휘관의 손실률이 대단히 낮다. 이는 대체로 일본군 지휘관들이 후방에 위치하던 것과는 다르게 조선군 지휘관들은 전면으로 나섰음을 보여준다.


8.2. 전술[편집]


  • 빠른 기동과 화포를 이용한 근대적 함대전 사상
그 당시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포격 위주의 전술을 구사하며 일시 집중타로 벽력같이 적선을 분멸하는 전략을 사용하곤 했다. 조선 수군은 당시 아시아에서 널리 쓰이던 해전 전술[138]보다 한 단계 이상 발전한 전술을 통해 일본군을 압도했는데, 여기에는 이순신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고 보아야 타당하다. 그 이전의 해전 전술 관련 기록들에서는 이처럼 화력을 중시한 경향은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드물잖게 제기되곤 하는 정자전술(丁字戰術)과 학익진의 연관성은 사실무근이다. 이는 해군 전술과 무기 체계의 변화에 대한 역사적 이해가 부족해서 발생한 착각이다. 이순신의 함대 전술이 그 시대로부터 수백 년 앞선 것은 사실이었으나, 정자 전술과 연계시킬 이유와 근거는 전혀 없다. 당시 조선 수군 수준의 함포 사거리 가지고 정자 전술을 시도한다면 트라팔가 해전에서 딱 둘로 쪼개졌던 프랑스스페인 연합 해군 꼴이 날 수도 있다.[139]당시에도 횡대로 늘어선 프랑스 연합함대를 영국 해군이 종대로 들이쳤다. 정자 전술에 의미가 생긴 것은 함포 사거리가 5km를 넘어선 시대, 즉 19세기 후반 이후였다.

수색 정찰과 첩보의 중요성은 동서고금의 병법상 진리이지만, 병사들과 지휘관 본인에게 일정 수준의 피로를 상시 강요하기 때문에 의외로 게을리하게 되는 요소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순신은 철저한 정보 수집을 바탕으로 "피해를 최소한으로 하고, 이길 수 있는 작전과 전장만을 택해, 아군의 피해를 최대한 줄이고, 적의 피해를 높이며, 이겼을 때 가장 큰 파급력을 발휘할 수 있는" 전투만을 벌였다. 그 덕에 전략적으로는 해로를 차단하여 왜 선봉군 병참에 심대한 타격을 주어 진격을 멈추게 하고, 결과적으로 왜군이 육로로 이어진 보급로에만 의존하게 되어 각지의 산발적 의병 활동이 효과적으로 왜군 보급에 타격을 줄 수 있는 바탕을 제공하였으며, 결과적으로 육지에서 싸우는 모든 왜군의 전쟁 수행 능력과 의지를 꺾을 수 있었다. 이순신의 공로가 바다에서만 이기고 그친 게 아니라 그로 인해서 조선이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100% 승리의 확신이 없었던 전장(부산포)에서 선조가 요구한 대로 무리하게 싸웠다면 이와 같은 결과는 나오기 힘들었을 것이다.
또한 정보 수집을 통해 단 한 번도 왜군에게 기습을 당하지 않았고, 징비록에서는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나서 기습이 있을 것 같으니 준비해라"라고 하자 얼마 안 있어 진짜로 왔다는 일화까지 있다. 휘하 장수들은 이순신이 귀신이 아닌가 했다지만, 실제로는 왜군의 성향과 일기 등을 판단해 미리 대비했던 것.
김탁환을 비롯한 기괴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이길 수 있는 전장만을 택했다"라는 이유로 이순신을 까곤 한다. 하지만 이길 수 있는 전장을 택하는 것은 지휘관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이므로, 이 말은 지휘관에게 있어 최고의 칭찬이 될 것이다. 무식함 때문에 까려다 도리어 칭찬을 하게 된 꼴. 전장은 지리와 기상 등 수많은 변수 덕분에 유불리가 시시각각 바뀌는 곳이고, 완벽히 유리한 장소가 있다 하더라도 적장이 지도도 볼 줄 모르는 바보가 아닌 이상 그런 곳에 가 줄 이유가 없다. 일본 지휘관들은 센코쿠 시대 동안 무수한 전투를 경험했고 수십년간 해적질도 해 온 베테랑들이다. 이런 장수들을 상대로 "이길 수 있는 전장만을 택하는 것" 자체가 이순신의 지휘관으로서의 역량을 입증하는 것이다. 만일 "이길 수 없는 전장에서 싸움을 택했다면" 이기더라도 그 손해가 막심했을 것이고, 설사 승리한다고 하더라도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손자병법에서 싸우기 전에 이기는 것이 제일이라고 강조하고 한 편을 통째로 써서 다루는 것이나, 천시(天時)-지리(地利)-인화(人和)를 강조한 맹자[140]만 생각해도 답은 나온다.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명량 해전이 저 주장을 반박한다. 명량 해전은 객관적으로 봤을때 이길 가능성이 있는 전투가 아니었으며, 순전히 전략적 판단에 따라 이길 수 없더라도 싸워야만 하는 상황이었기에 그 상황에서 그나마 가장 도박을 걸어볼만 한 울돌목을 전장으로 택한 것이다. 울돌목은 지형이 좁고 조류가 거칠지만 열세인 조선군이 포위를 피하고 조류를 활용할 수 있는 요충지였다. 일본군이 이순신을 무시하고 지나가기에는 역시 무리가 있었다. 울돌목은 통과하면 바로 서해이므로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게다가 명량 해전에 참전한 구루시마 미치후사의 출신지인 구루시마 해협은 울돌목처럼 조류가 빨랐고, 일본군도 전투 초반에 조류를 타고 올라오는 등 나름의 전술적 판단 하에서 울돌목에 진입했다.
다만 가끔씩은 이런 것이 아닌 본인의 감에도 의존한 듯하다. 징비록에서는 갑자기 이순신이 "왜놈들이 평소엔 달이 없을 때 기습했는데, 내가 생각해보니 이번에는 달이 있을 때 공격할 것 같으니 대비해야 한다."고 했는데 정말로 그렇게 되었다. 이렇게 이순신이 미리 앞을 내다보고 준비했기에 일본군은 소득없이 물러나야 했다.[141]

  • 규정에 입각한 엄격한 군율, 솔선수범과 공정함을 바탕으로 한 신뢰, 실전을 가장한 철저한 훈련
또한 이순신 휘하의 조선 수군은 유독 엄격한 군율을 가진 걸로도 유명했다. 어느 정도냐면 조선 수군은 일본 수군보다 이순신을 더 두려워했으며 전사자보다 군율에 의한 처형자 숫자가 더 많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 결과 이순신이 지휘한 전투에서 침몰선은 0척, 사상자(死傷者)를 합하여 100여 명밖에 안 되고, 군율에 의한 처형자는 몰라도 역병으로 죽은 병사자보다 전사자가 적다.[142] 아무리 좋은 계획과 기민한 판단력이 있다 하더라도 휘하 병력을 자기 손발처럼 부리지 못한다면 아무리 유리한 전장에서도 패하는 게 당연한 것이다. 그러니 엄격한 군율을 거듭해 쌓인 신뢰와 전술 수행 능력이 전장에서 깃발만으로 수십~백여 척의 함대를 일사분란하게 움직일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
다만 이 군율은 단순한 똥군기가 아니었다. 이순신이 평소 사익을 챙기거나,[143] 승리를 위해 희생을 강요하거나, 부하들을 도구로 여기거나, 편의에 따라 원칙을 곡해하는 상관이었다면 그가 명량 해전처럼 누가 보아도 도박과도 같은 무모해 보이는 승부수를 띄웠을 때 부하들은 '일본군에게 죽으나 이순신에게 죽으나 마찬가지'라 생각하고 기꺼이 그를 버리고 달아났을 것이다. 당시 조선 수군은 폐지령이 고려되었고, 수군 장수들은 합류는커녕 은둔해 있었으며, 병력 차이는 1:10인 상황이었다. 그러나 병사들은 그런 상황에서 이순신의 돌격 명령을 충실히[144] 수행했다. 이런 미친 명령을 받아들인 병사들이 그만큼 이순신을 존경하고 믿었다는 것밖에는 해석할 방법이 없다. 이순신이 그저 혹독한 군율만 강조했다면 장비처럼 부하에게 목이 따이거나, 루쿨루스처럼 병사들이 싸우길 거부했을 것이다. 사실 이 쪽이 평범한 거고, 오히려 이순신의 사례가 동서고금의 전쟁사를 통틀어 꽤 드문 경우다.
이순신의 엄격한 군율은 명나라 군사들한테도 적용되었다. 특히 이순신은 군율을 어긴 명군을 직접 처벌할 수 있는 권한을 진린에게 위임받았는데[145] 이 때문에 진린의 명나라 수군만큼은 다른 명군에 비해 철저히 군율을 지키게 된다. 하지만 이순신은 그에 못지 않은 신망 역시 얻었다. 노량 해전에서 전사 소식이 알려지자 진린은 물론이고 타국인 명나라 수군 장수들과 병졸들까지 통곡하는 것을 보면 이순신 장군의 인품이 외국인들까지 감명시킨 것.
이러한 신뢰와 군율이야말로 선진적인 화포 및 조선 기술과 함께 조선 수군의 승리를 보장한 가장 큰 원인으로 작용했다. 용인 전투칠천량 해전에서 보듯이 조선군은 사기가 낮아서 뛰어난 지휘관에 의한 엄격한 통제가 있지 않으면 이길 만한 싸움에서도 셀프 멘붕해서 부대가 와해되고 마는 고질적 문제를 갖고 있었는데 이순신에 대한 신뢰와 엄정한 군율로 이것이 방지되었기 때문이다.[146][147]

즉 이순신은 위대한 지휘관, 위대한 전술가로서 가져야만 하는 모든 덕목을 다 갖추고 있었다. 우월한 정보력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서 싸웠다. 일단 전투에 들어서면 아군의 장점을 극대화하고, 적의 장점은 무력화시키는 전술[148]로 적의 피해를 극대화했다. 명장들이 종종 보이곤 하는 호전성이나 아집, 전공 욕심도[149] 없어 항상 아군의 피해는 거의 없었다. 또한 이런 전략전술을 실제로 실행한 조선 수군은 이순신이 직접 만들어내다시피한 군대였다. 그 외에도 원하는 전장으로 적을 유인할 때까지의 계략, 육지에서도 하기 힘든 전술 기동을 바다 위에서 완벽하게 해내는 기동 능력, 전투 개시의 시점, 전황에 따라 적을 이길 수 있는 포진, 특히 압도적인 수적 열세 상황에서 발휘된 뛰어난 통솔 능력, 전쟁 내내 발목을 잡았던 원균과 조정의 트롤링, 오만불손했던 명나라 장수를 적절한 밀당으로 감화시킬 정도의 매력, 숙적인 일본도 칭찬해 마다않는 인품[150], 무엇보다 전투에 집중하기도 버거운 군대가 군수품을 자급자족하는 것도 모자라 일부 품목을 정부에 진상했다는 것까지 고려한다면, 그야말로 인류 역사상 최고의 수군 지휘관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만약 이순신이 경상 우수사로 미리 부임해 있었다면 임진왜란이 임진왜변으로 기록되었으리라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로 그의 전투 지휘 능력, 전략 / 전술은 압도적이었다. 비록 여러가지 이유로 욕을 먹는 선조이지만 적어도 북방 수비를 맡던 이순신을 반대를 무릅쓰고 파격적으로 승진시켜 수군의 중책을 맡긴 전쟁 초기 인사 행정만큼은 정말로 현명한 판단이었음을 부정하기 힘들다.

물론 센코쿠 시대의 일본의 주요 전장이 육상이었고 돈이 많이 드는 해군 전력을 체계적으로 육성하지 못해서, 왜군은 육전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해전에는 어려움이 있기는 했다. 물론 왜군 쪽도 바보가 아니라서 해전에는 왜구 출신이거나 나름대로 정예 해상전력을 보냈지만 이전까지 통일된 체계를 갖춘 수군을 운영한 경험이 부족해서 손발이 안맞는 문제가 있었고 판옥선과 달리 순수한 싸움배가 제대로 준비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정예 해상전력은 빠른 배와 항해에 능숙한 선원들과 도선 및 백병전을 장기로 하는 전투병력을 갖췄기에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고 왜군도 이순신한테 처맞으면서 조선 수군에 대한 대응법을 발전시켰다.[151] 다만 이는 일반적인 다이묘들의 경우이고, 모리 가문과 제휴했던 무리카미 수군이라든지, 구루지마 수군 같은 수군 세력은 전국 시대에도 존재했다. 주로 세토 내해를 지나다니는 상업 세력들을 삥뜯어먹고 사는 해적에 가까운 세력이기는 했으나, 이츠쿠시마 전투 등 대규모 중요 전투에 참전하는 등의 경험은 있었다. 수군의 체계적인 육성이 부족했다기 보다는, 화포의 화력 부족이 더 결정적인 원인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일본군의 전술인 도선 접전 또는 등선 육박전은 보편적인 수상전의 형태였고 조류와 바람을 타고 빠르게 기동하는 부분에서 왜군이 뛰어난 실력을 보인건 사실이다. 이순신 장군은 그 문제를 파훼하고자 기동을 기동으로 대응하지 않고 '등선' 자체를 거부하는 형태로 전투선을 개량하고 화포를 탑재한 것이고 우선 화포와 궁시를 이용한 원거리 전투로 왜군의 전력을 깎은 다음 근접전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152] 하지만 근접전에 들어가기 전에 충분한 타격을 주지 못했다면 왜 수군은 빠르게 접근하여 붙은 다음 마치 적성에 오르듯 판옥선을 기어 올라가 접전을 벌였고 이억기, 최호의 함대와 김완의 함선도 그렇게 불타버렸다.

또한 전술했듯 일본군도 이순신에게 처맞아가면서 조선 수군에 대한 대응수단을 발전시켰고 조선 수군 또한 이를 인지하고 있었다. 문제는 이런 상황에서 이순신이 파직되고, 원균이 그 자리를 빼앗아 무리하게 공격에 나섰고 그동안 일본군이 더 발전시킨 등선백병전과 포위협격술에 제대로 당하면서 칠천량에서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으며 이억기최호 등이 휘하 판옥선들을 부려 진형을 짜고 대응하였으나 상황이 너무 나빠서 왜군에게 당하고 말았다. 병력의 피로가 극에 달한 상황에서 일본군이 야간에 기습해서 근접전으로 들어가기 전에 원거리 전투로 적을 충분히 줄이지 못했다. 조선군이 자신들의 장점을 전혀 발휘하지 못하고 왜군이 자신들의 장점을 원없이 발휘하는 데다 조선군은 제대로 쉬지도 못한 이런 상황에서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

또한 전근대 해전에서는 함선의 체급이 크다고 무조건 유리한 것도 아니었다. 판옥선은 세키부네보다 체급이 컸지만 그만큼 기동성이 낮았다. 오히려 숫적 우위를 활용하여 빠르게 접근해 포위하고 도선하려면 세키부네가 더 적합하였다. 그렇다고 함선의 체급을 무시할 수는 없는 게 세키부네를 주력으로 굴린 왜군도 조선 측 판옥선을 복제해보거나 덩치를 키운 안택선을 건조해서 대응했다. 여하튼 함선의 경우 조선 측이 무조건 유리했다기보다는 판옥선과 세키부네/안택선의 장단점이 갈리는 것에 가깝고 이순신은 판옥선의 장점을 극대화할 수 있는 전술을 잘 활용해서 기적같은 성과를 이뤄낸 것이다. 잘 보면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내내 철저하게 왜군의 등선할 기회를 주지 않도록 전투를 지휘했다. 병법상 아군의 이점을 극대화하고 약점을 최대한 감추는 것은 말은 쉽지만 실제로 실천하는 것은 어려운데, 이순신은 그렇게 했다. 거기에 더하여 이순신은 중과부적의 왜군을 맞아 포격전과 함께 등선하는 왜군과 난전까지 벌였다.(정확하게는 기록상 안위의 배에 왜군이 다수 올라갔고, 다수가 전사하여 상황이 위급해지자 이순신이 적선 3척을 부수고 구원했다고 되어 있다.) 이순신은 멀찍이 뒷걸음질친 10척의 전선은 내버려두고 응전하여 온 안위와 김응함까지 해서 고작 세 척의 판옥선으로 역류하는 물살을 견디며 몇 시간 동안 수십 척의 세키부네를 막았다. 최대한 적의 등선을 허용하지 않으려 했던 이순신이 왜군에게 유리한 해류 상황에서 격군들이 빠르게 지쳐 기동성이 저하되었을 것인데도 부순 적선만 31척이라고 장계에 올렸다. 그렇다고 조선 수군이 백병전을 무작정 기피한 건 이니다. 근거리에서 조란환과 화살을 퍼부어서 왜군의 숫자를 줄인 다음 그대로 왜선에 등선해서 포로를 구출하거나 중요한 물품을 노획하는 등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등선백병전을 수행했다.

이순신의 전공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그 모든 전공이 전례 없었다는 것이다. 당시 조선군 전체는 물론이고 이순신 개인이 겪은 이전의 전쟁 경험은 모두 여진족이나 왜구와 맞붙는 소규모 비대칭 전투 형태였지 국가 간 전면전이 아니었다.[153] 게다가 이순신은 처음부터 수군에서의 경험 자체가 많지 않았다. 전라 좌수사에 임명되기 전에 이순신이 수군에서 복무한 시기는 36살(1580년) 때 전라도의 발포 만호로 1년 6개월 남짓 복무한 게 사실상 전부였다. 그 외에는 함경도 동구비보 권관, 조산 만호 등 육군에서 주로 활동했다.

또한 동아시아에서 본격적으로 제해권을 놓고 해전이 벌어진 것은 임진왜란이 처음이었기에 제해권의 중요도를 인식하고 있는 인물이 양군 수뇌부를 통틀어 거의 없었다.[154] 이순신 덕에 계속 이겨왔던 조선조차 명량 해전 승리 이전까지 수군 폐지령을 내리려 했을 정도로 제해권과 그로 얻는 이득에 무지했다. 그럼에도 이순신이 칠천량 해전이라는 초대형 참사를 겪고 난 이후에도 제해권을 지키기 위해 단 1척의 전선으로 홀로 끝까지 싸우려 했던 것은, 단지 용기와 결단력의 문제가 아니라 전황의 본질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순신은 병력의 질은 나름 좋지만 병력의 양은 절대적으로 부족하단 점을 매우 잘 알고있어서 일본군을 잘 회피하고 조선 함대가 건재하단 것 자체를 리스크 삼게하여 보급로를 틀어막아 육군이 무언가 할때까지 전력을 보존하는 현존함대전략과 유사한 전략을 사용하였는데 현대전에나 쓸법한 교리가 없던 시절에 그런걸 자연스럽게 생각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명장'이라 하면 보통 거듭되는 전란을 겪으며 수많은 전투 경험이 쌓이고, 그렇게 축적된 경험을 토대로 중요한 전투에서 모범답안을 들고 나와 대승을 거두는 식으로 배출되곤 했는데, 200년간의 평화기를 겪은 조선에서 단지 소규모 교전만을 겪어 보고 그 이외엔 병법서를 탐독하며 독자적으로 전략 전술을 연구했을 뿐인 이순신이 첫 해전부터 마지막 해전까지 사소한 실책조차 보기 힘들었다는 것은, 이순신은 단순히 모범적인 군인이 아니라 그야말로 천재적인 명장이었다는 것을 입증한다.[155]

1. 대전략적 구도부터 통찰하고, 그로써 제해권 개념을 인지하고 수뇌부에 강조한 점, 그리고 무엇보다 수뇌부에게 온갖 음해와 견제를 받았어도 조국과 백성(국민)에 대한 충절을 다하며 휘하 장졸에게 불변의 사회적 자본으로 기능한 점.

2. 전략 고찰로 군사 운용의 기초를 잡고 소모전에 휘말리지 않으며 지속적인 작전을 위해 민심을 얻고, 전쟁 초기의 수세에서 현존함대전략의 요소를 활용하고 이후 한산도로 통제영을 이동시켜 견내량 이서 지역의 해상요새화로 전략적 변모를 꾀하며, 수급보다도 적선 완파를 통한 적 전력의 효율적 감쇄를 이룩한 점.

3. 작전적 운용을 극대화하여 아군의 능력을 극대화해서 유지하고 적의 장점을 거부한 점(기습, 정찰 중시, 화포 운용 적극성, 전장 선택, 정찰강화 및 아군 전투 전력 보존 등).

4. 전술적으로 기본적인 틀은 있으나 상황에 맞게 운용하면서 항상 솔선수범한 점(일자진, 학익진, 장사진으로 순환타격 등 진법의 다채로운 구현, 수급에 연연하지 않으나 사기 고취를 위해서는 활용하기도 한 점, 진두지휘로 조직력 강화 밑 통솔 극대화, 시간적-공간적 이점을 순간적으로 활용하는 즉각대처능력 등).

이 점 모두가 임금 선조의 질시와 말 안 듣는 장수 원균이란 희대의 트롤을 끼고 이룩한 가시적인 성과이다.

전쟁 초기에 많은 조선군은 장군과 사졸 가릴 것 없이 도망치느라 바빴다. 반면 평소부터 역량을 갈고닦았던 성웅은 때가 되자 그 면모를 전장에 드러내며, 150여년에 가까운 전란을 경험한 일본군에게 지옥을 선보였다. 돕기는커녕 녹둔도 전투처럼 실상은 인맥을 통해 전문가로 포장된 비전문가들한테 시달렸어도 기적적인 승리를 거두고, 노량 해전을 마쳤을 때 전쟁이 끝났다고 생각될 정도로 그 존재는 실로 절대적이었다. 게다가 수백년 전 성웅은 그 치명적인 트롤링을 아군한테 당하면서도[156] 천재라는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그 역량을 펼쳐 주었고, 오늘날 후손들은 그런 역량을 발휘한 성웅께 경의를 드리고 있다.


9. 가족[편집]


아버지 이정(1511~1583), 어머니 변씨 부인(1515~1597) 슬하 3남으로 보성군수를 지낸 방진(方震)의 딸 방수진을 아내로 들였고 병마사 오수억(吳壽億)의 서녀인 첩 해주 오씨가 있었다.

방수진과의 사이에 장남 이회, 차남 이예(李䓲)[157], 3남 이면[158]과 딸 하나를 두었는데, 장녀는 홍가신의 아들 홍비와 혼인했다. 해주 오씨와의 사이에서 서자 이훈(李薰)을 두었고, 오씨 소생인지 아니면 또 다른 첩 소생인지 알 수 없는 서자 이신(李藎)과 서녀 2명이 있었다.

오씨외에 이순신에게 '부안댁'이라는 첩이 있었고 이신과 두 서녀가 그녀 소생이라는 주장이 있는데 이건 전적으로 난중일기의 번역자들의 창조번역이다.

1594년 8월 2일. 꿈을 꾸었는데, 부안 사람(扶安人)이 아들을 낳았다. 달수를 계산했더니, 태어날 달이 아니었다. 꿈이었지만 쫓아 보냈다.


1594년 11월 13일. 저녁에 윤련이 왔다. 그의 누이 편지를 갖고 왔다. 헛된 말이 많았다. 우스운 일이다. 버리고 싶어도 버릴 수 없는 사람이 있다. 이는 곧 남은 어린 세 자식이 끝내 돌아가 의지할 곳이 없기 때문이구나.


1597년 10월 25일. 몸이 몹시 불편했다. 윤련(尹連)이 부안에서 왔다.


난중일기 원문에는 그냥 부안사람이라는 뜻의 부안인(扶安人)이라고만 적혀 있었는데 난중일기를 번역한 홍기문, 이은상 등은 아무런 문헌근거도 없이 부안댁이라는 첩이 있다는 사족을 붙였고 윤련이 누이 편지를 갖고 왔다, 윤련이 부안에서 왔다는 기술을 근거로 윤련이 이순신 첩 부안 윤씨의 오라비라 주장했다. 근거는 전혀 없다. 부안인, 윤씨는 덕수 이씨 족보에 나오지 않는다. 난중일기 원문에는 그저 부안사람과 윤련의 누이로 적혀 있다. 아무 근거 없이 부안사람 혹은 윤련의 누이를 '이순신의 첩'으로 사족달아 번역하는 것은 과잉 번역이다.

이순신의 서녀 중 1명은 윤효전(1563~1619)의 첩이 되었는데, 윤효전은 바로 현종~숙종 연간 남인의 중심 인물이었던 윤휴의 아버지다. 다만 윤휴는 이순신 서녀의 소생이 아니라 윤효전의 적자고, 윤효전과 이순신의 서녀 사이에 태어난 사람은 윤영(1611~1691)으로 그가 윤휴의 이복 형이다.

이순신의 부친 이정은 음서로 벼슬에 올라[159] 최종 직위는 종5품 창신 교위에 이르렀으나 실무를 맡은 게 아니었고 일종의 임시직이나 명예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160] 1583년 11월 15일 타계했는데, 고향의 소식이 늦어 이순신은 부친의 부고를 50일이나 지난 후에야 접하고 뒤늦게 달려가 3년상을 치렀다. 사후 1604년에 아들 이순신의 막대한 훈공으로 좌의정에 추증되고 덕연부원군에 추봉되었다.

전라 좌수사에 취임한 직후 어머니 변씨를 여수의 고움내(현대의 여수시 웅천 지역)라는 곳에 모시고 봉양했는데, 현대에도 여수에는 '이순신 자당기거지'[161]라고 해서 변씨가 살던 집이 남아 있다. 어머니도 상당히 강직한 여성이었는데, 《난중일기》를 보면 문안 인사를 하고 떠나는 아들 이순신에게 "가거라. 부디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어라."고 격려한 기록도 남아 있다. 이때 이순신은 어머니의 모습을 "두세 번 타이르시고 조금도 헤어지는 마음으로 탄식한 빛이 없으셨다"라고 묘사했다.[162] 1597년 이순신이 파직당하고 백의종군을 떠날 때, 변씨가 아들을 만나기 위해 배를 을 싣고 오다가 병사했는데, 이순신은 어머니의 임종조차 지키지 못하고 소식을 듣고 달려온 것도 모자라, 임지로 떠나는 길이라 장례식도 치르지 못하고 바로 떠나야 했다. 참으로 기가 막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때의 이순신이 느낀 애통함은 난중일기에 잘 나타나 있다.

"어머니를 마중하려고 나가는 중에 아들 울이 종을 보내 "아직 배 소식이 없다."하였다. (중략) 조금 있으니 종 순화가 와서 어머니의 부고를 알렸다. 뛰쳐나가 가슴을 두들기고 발을 동동 굴렀다. 하늘이 캄캄하다. 즉시 갯바위로 달려나가니 이미 배가 와 있었다. 이 애통함을 글로 다 적을 수가 없다."

정유년 4월 13일(1597년 5월 28일) 《난중일기》


竭忠於國而罪已至

나라에 충성을 다하고자 하였으나 죄가 이미 미쳤고

欲孝於親而親亦亡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고자 하였으나 부모마저 돌아가셨네.

天地安如吾之事乎

세상에 어찌 나같은 사람이 있으랴?

不如 早死也

속히 죽느니만 못하다.

정유년 4월 19일(1597년 6월 3일) 《난중일기》


더 기가 막힌 것은 모친의 본관이 초계이다. 다름아닌 이순신의 귀양지다. 이후 이순신은 상주(喪主)의 의무를 지키기 위해 고기를 먹지 않았는데, 선조가 이 소식을 듣고 그에게 고기를 하사한 적이 있다. 다른 인물이라면 순수하게 이순신의 건강을 걱정해서 고기를 먹고 몸을 추스르라고 볼 수도 있지만 하필 이순신을 불행하게 만든 그 선조인데다, 《난중일기》의 기록도 "주상께서 고기를 하사하니 비통하고, 또 비통하다"고 나와 있다(정유년 12월 5일). 따라서 이 일에 대해 선조가 이순신을 진심으로 위로하는 게 아니라 일종의 충성심 테스트를 했고, 이를 눈치 챈 이순신이 복잡한 감정을 일기에 쓴 것이다. 더구나 정유년 12월 5일이면 어머니에 이어 셋째 아들 이면이 일본군에 의해 살해된 뒤이기도 하다. 어머니와 아들을 한 해에 다 잃고 비통해하는 장수, 그것도 상주에게 국왕이 고기를 내려준 것이다. 이는 선조가 이순신에 대해서 악감정을 가지고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백의종군시키고 어머니와 아들을 잃어 비통에 빠진 신하에게 고기를 즐기라고 내어주는 행동은 조선을 지배하던 유교적 도리를 서로 상충되게 하여 신하를 곤란하게 만든 것인데[163], 이 행동을 선조의 잔머리와 졸렬함으로 설명하지 않는다면 선조는 매우 어리석고 멍청하기 그지 없었다는 얘기가 된다. 그리고 어머니의 죽음에는 선조도 일정부분 기여한 공이 있다. 아들이 의금부에 잡혀갔다는 소식에 놀란 어머니가 연로한 나이에다 건강도 나쁜 몸인데도 아들을 보기 위해 아산까지 직접 오기로 했고 결국 아산에 오기 전 건강이 악화되어 배 위에서 숨을 거둔 것이다.

이순신의 아내인 방수진(方守震)은 무관 출신으로 보성 군수를 역임한 방진의 딸인데, 대단한 여장부 기질이 있었던 모양. 어린 시절 방씨 집에 도적들이 쳐들어오자 방진이 활을 쏘며 저항했다. 화살이 다 떨어지자, 방수진이 베틀에 쓰는 대나무 가지더미를 바닥에 쏟아 요란한 소리를 내며 "아버지!! 여기 화살들이 있습니다!!"라고 소리쳐 화살이 많이 남아 있다고 속여서 도적들이 도망갔다는 야사가 있다. 또한 류성룡의 글[164]에 따르면, 사위인 홍비가 체구가 작아서 마음에 차지 않다며 집에도 들이지 못하게 하고, 집안 노비들을 거느리고 직접 농사를 지어서 집안을 유지하며, 대단히 성격이 강해서 집안 사람들 중 아무도 그녀의 말을 거역하지 못한다고 나온다. 이에 대해 류성룡은 "참으로 장수(將帥)의 집안에는 장수의 아내가 있다"며 감탄했다. 방씨가 사위를 박대한 이유로 단순히 사위의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상대 집안에 대한 항의라는 해석도 있다. 이 사위의 아버지는 이순신의 친구인 홍가신이다.[165] 그런데 홍비는 이 결혼이 재혼이었다. 홍비의 첫 번째 부인이 일찍 죽어서 이순신의 딸과 재혼한 것. 첩으로 들인 것이 아니라 재혼한 것이므로 딱히 문제될 것은 없어 보이지만, 조선 시대에 재취로 딸을 시집보내는 것은 그다지 반기지 않는 게 당시 풍습이었다. 이를 불편하게 여긴 방수진이 사위를 박대함으로써 홍가신 집안에게 항의 표시를 했다는 해석이다.

방수진의 본명은 오랫동안 알려져 있지 않아 후세에 와서는 그냥 '방씨', 혹은 본관을 붙여 '상주 방씨'라고 불려졌다. 일부 야사 및 창작물에서 '연화', '태평'' 등의 이름이 나오긴 했지만 이를 증명할 근거는 등장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난중일기, 임진장초와 함께 국보 76호로 지정된 서간첩[166]을 연구한 결과 본명이 '수진'임이 밝혀졌다. 다만 이에 대해선 '수진'은 방씨의 이름이 아니라 이순신의 장인인 방진을 지칭하는 것이라는 반박도 있다. 허나, 위 기사 속 반박은 시대상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의견이라 아쉽다. 이순신이 부계 쪽인 살던 서울에서 출생하여, 모계쪽이 있던 아산으로 온 것이나 자신의 사후부터 장인으로부터 받은 현중사가 자신의 부계로 이어진 것을 생각하면, 타당성도 있을 것이다. 난중일기에는 그녀도 병을 앓아서 전란 중에 사경을 헤맸다는 기록도 있는데, 아들 이회가 1603년 어머니의 병환 때문에 사직하는 상소를 올린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이순신의 전사 후인 1603년까지는 생존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류성룡은 저서인 《징비록》의 평가에서, 모두가 이순신 장군을 영웅적이고 위엄 있는 인물이고 장수로 생각하지만, 장수로서 위엄 있는 외모와는 거리가 멀었으며, 글을 읽는 단아한 선비 같다고 하였다.

가족에 대해 자상한 부친의 모습을 보여주는 일화가 몇 있다. 이순신의 두 형 이희신과 이요신은 각각 4명과 2명의 자식을 남기고 비교적 일찍 죽었는데, 이순신은 이 6명의 조카를 친자식 못지 않게 잘 키워냈다. 특히 정읍 현감으로 부임할 당시에 이들 조카들을 데려가면 파직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낳기도 했다. 조선은 유교 사상 덕에, 기본적으로 세금 = 백성의 부담으로 보고, 최대한 세금을 적게 걷어 필요한 데만 쓰는 식의 굉장한 긴축 재정을 강요받는 행정 체제를 가지고 있어서, 행정관이 가솔들을 데려와 먹여 살리는 것은 충분히 탄핵의 대상이 될 만한 일이다. 이른바 남솔(濫率)이라고 해서, 지방관이 가솔을 제한 이상으로 데리고 다니는 것이 당대의 문제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조카들이 부모가 모두 죽어 천애고아라 의지할 곳이 나뿐인데, 어찌 두고 가는가? 차라리 파직당할지언정 조카들을 버릴 수 없다!"라고 말하면서 눈치 안 보고 조카들을 다 부임지로 데려갔다. 하지만 그가 정읍 현감으로 있는 동안 가족들이 보여준 처신은 정읍 백성들에게 칭찬을 받을 만큼 대단했다고 한다. 이 조카들의 혼례를 다 치러낸 후에야 자신의 친자식의 혼례를 했을 정도.

晨昏戀慟淚凝成血

조석으로 그립고 애통하여 눈물이 엉겨 피가 되어 흐르거늘

天胡漠漠不我燭兮

하늘은 어찌 무심하게도 나를 굽어살피지 않으시던가?

何不速我死也

어찌 속히 죽이지 않으시나?

정유년 5월 6일(1597년 6월 20일), 《난중일기》, 꿈 속에서 죽은 두 형을 만난 후[167]


아들 사랑 또한 지극하기 이를 데 없었는데, 셋째 아들 이면이 아산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은 날의 《난중일기》는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의, 심금을 울리는 애틋한 문장으로 가득하다.

"새벽 2시쯤 꿈에서 내가 말을 타고 언덕을 달릴 때 말이 실족하여 내가 물에 빠졌다. 그런데 쓰러지지는 않았으므로 보니 면이 나를 끌어안고 있는 듯 했다. 이것이 무슨 징조인지 알 수가 없다. (중략) 천안에서 사람이 와서 집 편지를 전했는데, 겉봉을 뜯기도 전에 눈앞이 아찔하고 골육이 진동했다. 대충 뜯고 겉을 보니 '통곡'이란 두 글자가 써 있어 면이 전사했음을 알았다. 통곡하고 또 통곡하도다! 하늘이 어찌 이렇게 어질지 못하실 수가 있는가.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게 올바른 이치인데 네가 죽고 내가 사는 것은 무슨 괴상한 이치란 말인가. 온 세상이 깜깜하고 해조차 색이 바래보인다. 슬프다 내 작은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네가 유독 출중하고 영민하여 하늘이 세상에 남겨두지를 않으시는 것이냐, 나의 죄가 네게 화를 미쳤느냐. 나는 세상에 살아있지만 장차 어디에 의지하랴. 함께 죽어 너와 지하에서 지내며 울고 싶으나 네 형, 누나, 어미가 의지할 곳이 없어질 것이니 참고 연명하겠다만 혼은 죽고 가죽만 남아 부르짖고 서글피 울 뿐이다. 하룻밤을 넘기기가 한 해와 같도다."

정유년 10월 14일(1597년 11월 22일) 《난중일기》


"나는 내일이 막내 아들(이면)의 죽음을 들은 지 나흘이 되는 날인데도, 마음 놓고 울어보지도 못했다."

정유년 10월 16일(1597년 11월 24일) 《난중일기》


"새벽나절에 꿈 속에서 고향의 종자 진(辰)이 찾아왔기에 면이 생각나 통곡하였다."

(중략)

"한밤에 생각하자니 눈물이 흐르는데, 어찌 다 말하겠는가. 기어이 내 불효함이 예까지 이를 줄 누가 알았으랴.
가슴이 찢어지는 듯 하니 이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다."

정유년 10월 19일(1597년 11월 27일) 《난중일기》


이순신은 이 때 부하들이 있는 곳에서는 울지 않았는데, 이를 두고 《난중일기》에서는 종 강막지(姜莫只)의 소금 창고에 "숨어서 울었다."고 나와 있다. 이분의 《이충무공행록(李忠武公行錄)》에 보면 "공이 이로 인해 정신이 쇠약해졌다"라고 하는데, 이순신이 그리도 슬퍼했던 이유는 물론 자식을 잃은 아비의 슬픔과 이면이 자신을 많이 닮아서 유독 귀여워하던 자식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면은 명량 해전 직후 이뤄진 보복성 침략 때문에 죽었으므로 비록 전투는 이겼으나 자신 때문에 자식이 죽었으니 그 자책감은 이루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셋째 아들 이면에 대해서는 후에 야사가 하나 전해 내려오는데, 죽은 면이 꿈 속에 다시 나타나 울며 "소자를 죽인 자가 근처에 있나이다."하고 사라졌다. 이순신이 꿈에서 깨고는 이상히 여겨 한참을 생각하다가 문득 아산에서 전투를 벌였던 일본군 포로들을 끌어와 심문하니 과연 그 중에 면을 죽인 자가 있어 즉시 그를 베어버렸다고 한다. #

그럼에도 공사 구분은 융통성이 없는 수준으로 엄격해서 아무리 상관이나 친인척이라도 예외가 없었다. 35세에 종8품 훈련원 봉사 시절에는 병조 정랑 서익이 원칙에 어긋나는 인사를 지시하자 칼같이 거절했다가[168] 이듬해 종4품 수군 만호로 재직 중, 병조 정랑이었던 서익이 군기 경차관으로 와서 감찰로 트집을 잡아 파직되기도 했다. 같은 덕수 이씨였던 율곡 이이[169]가 이순신이 초급 군관 시절 한 번 만나보고 싶어했는데, 당시 이율곡은 지금의 행정부 장관에 해당하는 이조판서로 지낼 무렵이었다(1년 뒤 국방부 장관급인 병조판서가 됨). 당시 이런 장관급이 호의를 보인다면 출세길 열렸다며 튀어가고 현대에도 이런 고위 인사를 등에 업고 각종 청탁이나 비리를 저지르는 경우가 비일비재한데, 이순신은 "(율곡께서) 이조 판서로 있으신 동안은 인사권이 있으시니, 저는 만날 수 없습니다."라며 딱 잘라 거절했다. 물론 그 외에도 크고 작은 '로비' 권고에도 절대 흔들리지 않았는데 병조 판서 김귀영이 자신의 서녀를 첩으로 주고 싶어 매파를 띄웠으나 단칼에 거절하기도 했다.

이같은 엄격함은 자신의 친인척들에게도 마찬가지여서 이순신의 장남인 이회와 조카 이분, 이완, 이봉[170]은 전쟁 내내 별다른 무관 관직조차 없이 일개 의병 신분으로 참전했다. 조선 시대에는 부정부패를 막기 위해서 친인척끼리는 같은 임지에서 관직을 하지 못하도록 규정하는 상피제가 있었는데 이를 충실하게 지킨 것이다.

이완은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야 무과에 급제하고 본격적으로 무관의 길을 걸었으며, 후에 정묘호란이 발생하자 의주성에서 후금군을 상대로 분전하다가 종제 이훈과 함께 전사한다. 서자 이훈과 이신은 무과에 급제했는데 이신은 이괄의 난때 격전지였던 안현 전투에 참전했다 전사하고, 이훈은 정묘호란때 이완과 함께 의주를 지키다 전사했다. 두 사람 모두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해 무덤을 만들지 못했다. 정유년에 아산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한 삼남 이면까지 포함하면 다섯 아들 중 4명과 조카 3명이 아버지와 숙부를 따라 전장에서 분골쇄신했다. 집안의 이단아(?) 차남 이예[171]는 순수 문관으로 형조정랑을 역임했으며 사후 좌승지에 증직되었다.

덕수 이씨는 이순신 사후 조선 유수의 무반 명가로 자리하는데 무과 합격자 명단인 무과방목에선 78명의 덕수 이씨 합격자가 확인되며 이중 75명이 이순신 사후 나온 합격자다. 75명이 적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현존하는 무과방목(합격자 명단)은 조선시대 실시된 총 무과 횟수의 20%가 채 안된다. 70명 이상의 합격자를 배출한 가문은 전체 2,513 성관에서 덕수 이씨 포함 74개에 불과하다.

또한 덕수 이씨 세보를 참고하면 숫자가 아득히 늘어나는데 이순신 아래로 무과 급제자가 무려 267명이다.


10. 후손[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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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의 활약으로 인해 그의 본관인 덕수 이씨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 무반 가문으로 손꼽히게 된다. 무과 급제가 무려 267명이나 되는데 문과 급제는 단 1명[172]에 불과한 엄청난 밸런스 붕괴. 이순신의 조상대에선 성균관 대제학을 역임하거나(이변) 병조참의로 재직하며 세자의 스승 노릇을 하였고(이거), 할아버지 이백록과 아버지 이정도 미관말직이나마 지낸 적이 있는 전통적인 문반 가문이었는데 이순신을 기점으로 무반 가문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173]

이렇듯 그의 후손들은 충무공의 후예라는 이유 때문에 진로선택 시 무반을 강요당한 정황이 보이는데, 정작 실록에 기록될 때는 충무공에 비해서 뭐뭐가 부족하다는 식으로 맨날 조상이랑 비교당하며 까였다. 조상을 잘 만난 건지, 잘못 만난 건지...그래도 종묘사직을 지켜낸 사람의 후손이라 조선 시대 내내 특별대우를 받았다.

5대손 이봉상(李鳳祥, 1676~1728)은 심각하게 무능했던 사람으로, 오죽하면 잘못한 것도 없는데 그냥 무능하다는 이유만으로 탄핵 상소까지 올라왔다가 기각됐을 정도였다.[174] 충청병사로 재임하던 시절 이인좌의 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사로잡히기는 했으나 투항을 거부하여 피살되었는데, 이 때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바로 "너는 충무공 집안에 충의가 서로 전해져 오고 있음을 듣지 못했느냐? 왜 빨리 나를 죽이지 않느냐?"였다. 능력은 없을지언정 충무공 이순신의 후예라는 자부심은 상당했던 모양이다. 결국 이 점을 높이 사 사후에 충민공(忠愍公)[175]으로 추존되고 조상인 이순신과 함께 현충사에도 배향되었다.

이외에도 정조 시기에는 이인수, 이승권 등이 있었다고 하며 근대 시기에는 독립운동가를 여럿 배출하면서 독립유공자 집안이 되었다. 대표적으로 12, 13, 14대 종손인 이세영, 이종옥, 이응렬이 있다. 이순신 장군 후손, 일제강점기 3대 걸쳐 항일독립운동 투신, 이순신 장군 13대 종손도 항일무장투쟁 첫 확인. 9대 종손 이필희, 10대 종손 이규풍, 이규갑, 이규현, 11대 종손 이민호, 이민화, 12대 종손 이길영, 이일영도 독립운동가다. 다만 모두 그런 것은 아니고 부계 후손은 아니지만 친일파권중현도 있다.[176] 집안의 수치

현대에는 방송인 이종환, 배우 이미숙이 있다.


11. 인간 관계[편집]



11.1. 권율과의 관계[편집]


어렸을 때부터 친근하게 지낸 류성룡을 통해 권율과 처음 만났으며 이후에도 계속 서신을 주고 받으며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이순신이 빌려준 함포는 권율이 행주산성에서 왜군을 격파하는 데 큰 도움[177]이 되었고, 후에 권율은 이순신이 참수당할 위기에 처했을 때 정탁, 이원익과 함께 이순신을 구해내고 자신의 밑에서 백의종군하라는 명이 내려지자 이순신을 자신의 군사참모로 두며 보호했다.

또한 권율의 사위 이항복 (후에 93대, 95대 영의정)은 최측근인 무관 안위를 보내 이순신을 돕게 했는데, 안위는 이순신의 오른팔 격의 인물이 되어 명량 해전에 큰 공을 세워 승리에 기여하고 이때의 공으로 전라우수사로 승진하여 이순신과 함께 한다.

하지만 난중일기를 보면 1594년 ~ 1595년(선조 27년 ~ 28년)에는 공무 및 인원 차출 등의 여러 정황에 대해 충돌하여 잠시 권율에 불만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재밌게도 1595년 8월 17일에 적은 일기(일미일기)를 보면 권율이 원균을 질책하자 원균이 고개도 들지 못하는 모습을 보며 우스워했다고 적혀 있다. 나중에 권율은 원균을 두들겨 팬다.[178][179]

행정 관계로는 조선군 내에서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 권율은 도원수였다. 삼도 수군 통제사는 오늘날의 해군참모총장에 상응하는 직위[180]이고 도원수는 합동참모의장에 상응하는 직위이다.

권율의 행주대첩은 권율과 육군만의 힘으로 이루어낸 것이 아니라, 이순신의 휘하 장수 (참모격) "정걸"이 육군의 군수물자를 수군으로 운송하고 배급했기에 가능했다. 그렇기에 상대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었던 권율도, 자신보다 지위가 아래인 이순신을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181]


11.2. 원균과의 관계[편집]


이순신은 원균을 "원흉(元凶)"이라고 부를 만큼 극도로 싫어했다. 이는 난중일기에서 찾을 수 있는 원균에 대한 언급으로 확인할 수 있다.

경상우수사 원균이 와서 보았다. 그 음흉함을 이를 길이 없다.

《계사년 2월 23일》


경상우수사 원균이 왔다. 그 술주정이 심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 망령된 짓을 차마 입에 올릴 수 없다.

《계사년 5월 14일》


경상우수사 원균이 '웅천의 적이 감동포로 들어갈지도 모른다'면서 들어가서 치자는 공문을 보내왔다. 그 흉계가 참으로 가소롭다.

《계사년 6월 5일》


경상우수사 원균이 정걸 충청수사와 함께 도착하여 적을 토벌할 일을 의논하는데, 원 수사가 하는 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극도로 흉측한 속임수들이었다. 이런 사람과 같이 일을 하고도 후환이 없을까?

《계사년 7월 21일》


경상우수사 원균이 와서 영등으로 출정을 나가자고 독촉하는 데 음흉하기 짝이 없다. 자기가 거느린 배 25척은 모두 보내고 오직 7, 8척만 가지고 와서 이런 말을 하니 그 마음을 쓰고 일하는 것이 모두 이런 식이다.

《계사년 8월 30일》


이순신과 원균의 첫 번째 합동 작전이었던 옥포 해전때, 전공과 관련된 행동과 장계 문제로 갈등을 빚기 시작하다가 결국 전란 2년째인 1593년부터 난중일기에 그에 대한 악평이 나오기 시작한다. 허위 공문을 올리거나, 적의 수급을 탐내며 전투 중에도 아군의 피해는 아랑곳하지 않거나, 함대 요청을 했음에도 이순신을 은근히 무시하며 늦게 오거나 한두 척만 가지고 참여하는 등등... 별별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이순신의 뒷목을 잡게 만들었다.

이렇게 이순신과의 갈등이 지속되자 조정에서는 1595년에 원균을 형식상으로 승진시켜 충청 병사에 임명한다.[182][183] 이 틈을 이용하여 이순신과 정면 대결을 꺼린 일본은 계략을 사용한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전략적 정보유출 작전에 속은 선조는 이순신에게 부산진을 공격하라 명령한다. 이순신은 무리한 명령을 거부하여 명령 불복종으로 백의종군에 처해진다. 그리고 이후 원균이 이끈 정예 조선수군은 칠천량에서 깡그리 전멸한다. 칠천량 해전 이후에는 난중일기에서의 언급은 없는데 이미 죽은 사람을 언급하긴 꺼린 듯하다.


11.3. 류성룡과의 관계[편집]


명재상 류성룡과 이순신의 관계는 유명한 사실이다. 어린 시절 한양에서 친분을 다진 이후 평생의 절친이자 서로의 조력자가 된다. 임진왜란 이전에는 일개 무명의 무관이었던 이순신을 선조에게 적극적으로 천거한 인물이 류성룡이었다.[184]

둘은 각자의 저작인 《난중일기》와 《징비록》에서도 서로에 관해 자주 언급한다. 《난중일기》에서 류성룡과 서신 교환을 했다는 기록이 나오며, 이순신의 꿈에서까지 류성룡이 자주 나타나는 사실을 보면 각별한 사이였음을 알 수 있다. 이순신은 성격이 대쪽같아 일기에서 지적하지 않은 사람을 찾기 힘들 정도다. 권율마저도 지적한 이순신에게 지적되지 않은 두 인물이 선조와 류성룡이었으니 말 다했다.[185]

한 번은 충무공에게 류성룡이 사망했다는 오보가 전해진 일이 있다. 이때 이순신은 "이건 잘못된 소문이다. 그럴 리가 없다… 근데 만약 류 정승이 돌아가셨다면 어떡하지? 점을 쳐볼까?"로 요약할 수 있다. 실제로 이날 이순신은 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급기야 점까지 쳐보며 류성룡의 안위를 걱정한다.

류성룡은 임진왜란 직전 이순신에게 《증손전수방략》이라는 병법서를 보내주었다. 그 책을 읽고 나서 이순신이 책을 높이 평가하는 장면도 있다.

하지만 류성룡은 선조가 이순신에게 대노하였을 때 소극적인 태도를 취했다. 류성룡이 적극적으로 이순신을 변호할 경우, 이순신과 친밀한 류성룡이 나설 경우 상황히 악화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적으로는 친구이나 공적으로는 재상이기에, 자칫 선조의 오해를 사서 두 사람 모두 숙청될 수 있었다.

그러나 밑의 김완이나 이운룡 사례를 본다면, 위선이라 볼 지경이었다. 이순신이 좋게 본 것은 자기를 빼고서 공공적 문제를 일으켰던 것이 없으니 , 부정적으로 볼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기록은 상호 검증 및 많은 교차 검증이 필요한 예시로 들 수 있다.


11.4. 선조와의 관계[편집]


전라좌수사 시절까지만 해도 이순신과 조선군에게 선조는 은인이었다. 선조는 의외로 국방 및 군사 분야에 관심이 많았고 관련지식도 제법 갖춘 임금이었다. 우선 '북쪽 변방에서 오랑캐가 중요한 농토를 점령하고 주민들을 포로로 잡아갔으니 해당 책임자인 경흥부사 이경록과 조산만호 이순신을 징계할 것을 요청한다'는 것을 골자로 하는 탄원서가 두 사람의 상관이었던 이일에 의해 올라온 데 대해 다음과 같이 전교했다.

"전쟁에서 패배한 사람과는 차이가 있다. 병사(兵使)로 하여금 장형(杖刑, 곤장)을 집행하게 한 다음 백의종군(白衣從軍)으로 공을 세우게 하라."

ㅡ 선조실록, 20년 10월 16일자


이는 이전에 여진족 침입 당시 전장에서 도주한 죄목에 대해 현장에서 참수하라는 왕명이 내려졌고 그 사례의 예에 해당하지 않으니 사형은 안된다는 말이었다. 그렇게 이순신이경록은 삭직 및 백의종군 처분에 처해졌다. 이후 1589년에 하삼도 병사 및 수사 선발에 대해 비변사에서 올라온 목록에서도 확인된다.

"아뢴 대로 하라. 서득운을 전라 병사로, 이혼을 우수사로, 신할을 경상 좌수사로, 조경을 제주 목사로 삼고자 한다. 이옥과 이경은 본처(本處)를 고수해야 하고 이빈은 범한 죄가 가볍지 않으니 경솔히 수용(收用)할 수 없다. 또 이경록(李慶祿)·이순신(李舜臣) 등도 채용하려 하니, 아울러 참작해서 의계(議啓)하라."

ㅡ 선조실록, 22년 7월 28일자


전라좌수사 임명엔 당시 진급이 지나치게 빠르다는 이유로 사간원에서 체차(遞差)[186]를 청하자 감싸주기도 했다.

이순신은 선조의 신하로서 그에게 충성했다. 1591년 류성룡은 이순신을 천거하였다. 파격적인 내용에 많은 반대가 있었지만, 선조는 이순신을 전라좌수사로 임명한다. 임진왜란이 터지기 1년 전이었다.

선조는 평화 시기에 큰 실책을 범하지 않았다고 주장되는 군주였다. 다만 그의 전란 대처능력은 그의 평가를 반박하기도 힘들게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선조가 임명한 장수들은 연이어 일본군에 패퇴한다. 급기야 조선 건국이래 최초로 수도를 함락당한다. 종묘사직을 최우선으로 여기던 유교 국가에서 이러한 행동은 씻을 수 없는 치욕이었다. 선조가 계속해서 개성, 평양, 의주로 피난하는 모습에 민심은 요동쳤다.

선조의 평가가 나락으로 떨어질 때, 이순신은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이 승리는 조선에게 희망이었지만, 선조의 권력에는 크나큰 위기였다. 선조는 이순신을 크게 의식하였고, 이는 이순신을 끌어내리는 원인이 된다. 결국 이는 현재 선조의 평가를 깎아내리는 가장 큰 원인이 되어 돌아온다.

이것은 비단 선조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187], 고대나 지금이나 당장 국가존립이 위태로운 상황은 반정이 일어나기 가장 좋은 상황이다. 당장 멀리 갈 필요도 없이 조선이 이성계의 반정으로 우왕최영을 몰아내고 만든 국가란 점에서[188] 선조는 이순신을 보며 이성계를 투영했을 가능성도 높다. 문제는 그나마 최영이라도 있어 이성계를 견제할 수단이라도 있던 우왕과 다르게 이순신을 견제할 수 있을만한 해군 장수가 선조에겐 없었으니 그 당시 이성계를 두려워한 우왕보다 더 이순신을 두려워했을 가능성도 있다.

한마디로 선조에게 있어 이순신은 전쟁 종결에 반드시 필요한 신하이지만 그만큼 정치적으로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결국 선조는 장계보고에서 이순신과 비슷하거나 더 높은 공적을 쌓은데 비해 충성심이 높아 자기가 다루기 쉬울 것으로 판단한[189] 원균을 밀어주며 이순신을 견제하고 찍어눌렀으나, 전황이 아닌 공적 수집에만 몰두하여 공적 자체는 비등했었을 수 있으나, 실제 재능은 이순신에 한참 미치지 못했던 원균이었던지라 결국 칠천량 해전에서 일본군에게 졸전에 가까운 꼬라박을 시전해 조선 수군을 궤멸시켜버리며 끝내 자기자신도 해당 전투 이후 영영 실종됐고, 결국 선조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순신을 기용할 수 밖에 없었다.

요약하자면 옥사 이전까지의 이순신은 선조에 대한 충심은 물론 은혜에 보답하려는 마음도 있었을 것이며, 선조도 최소한 통제사 자리를 내릴 때까지는 이순신에게 신뢰를 보냈지만, 선조의 지나찬 권력욕 탓에 이 좋았던 군신관계는 파탄나고 말았다. 실제 이순신은 옥사 전까지만 해도 선조를 깍듯이 모시는 듯 했으나[190] 옥사 이후에는 선조에게 실망하거나 삐진 듯한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191]

다만 이순신이 끝내 선조에 대한 충심을 완전히 버렸는지는 의문이다. 물론 기껏 자신이 어마어마한 노력을 가해 강군으로 키운 수군을 의도하진 않았다지만 멸망하게 만든 장본인이었으니 옥사 이후론 좋은 감정을 가지진 못했을거라 짐작하는 사람이 많다.[192] 즉, 옥사 이전에는 선조라는 개인에게 충심을 보였다면, 옥사 이후에는 왕이라는 '지위'에만 충성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11.5. 이광과의 관계[편집]


생전에 그를 어머니 다음으로 아낀 사람은 같은 덕수 이씨 가문의 사람이자 먼 친척 형인 이광이었다. 이광은 가문에서도 촉망받는 인재였던 친척동생이 파직을 당하자 안타까워 했고[193] 마침 자신이 전라도 군대의 총사령관인 전라감사에 있었기 때문에 친척동생인 충무공을 종사관으로 삼거나 조방장으로 삼는 등 자신의 곁에 두었다.

그 후 충무공이 전라좌수사로 부임해오자 매우 반가워했고 웬만하면 충무공이 부탁하는 것은 자신의 재량을 이용해 모조리 들어줬다. 그리고 선조가 충무공을 의심하자 선조에게 좌수사는 절대로 그럴 인물이 아니라며 열심히 친척동생의 변호를 해주었다.


11.6. 김완과의 관계[편집]


현장에서는 좋지 못할 법적으로는 용인될 일이 잦아 처음부터 처벌 대상으로 기록되었지만, 그 다음부터는 동일한 현장에서는 해서는 안 될 일을 하지 않아 신용받는 수하이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후에 포로로 잡혔다가 탈출한 뒤, 이균으로부터 해동소무란 칭호를 받았고, 그와 연관되는 사마천이 고자가 된 이유처럼 역사에 기록된 잘못된 점인 원균 등용을 신랄하게 비판하다가 좌천되는 것을 감내했다.

후에 그 후손들은 김완이 남긴 기록을 1908년에 모아 해동소무를 줄인 해소실기를 평찬했는데, 김완이 바란 진실을 향한 기득권에 굽히지 않겠다는 의지를 계승했다라 할 수 있다.


11.7. 이운룡와의 관계[편집]


녹둔도에서 같이 백의종군을 하게 된 인물이며, 동시에 이순신과 비슷한 궤적을 거쳐갔다. 그래서 그런지, 이순신이 많은 신뢰를 하는 인물 중 하나이다.

전후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직할 때에 이순신을 기리기 위해 통영에 충렬사를 세운다..


11.8. 이억기와의 관계[편집]


방계 왕족이자 21살에 무과에 장원급제한 유능한 귀공자였던 이억기는 종9품이었던 이순신과 달리 종3품이라는 높은 관직이었지만 이억기는 이순신을 높이 평가하여 이순신이 녹둔도 전투로 처형당할 뻔하자 이순신을 옹호하여 처형당하지 않게 하였다. 이순신이 보유한 23척의 함대보다 많은 40여척의 함대를 살려둬서 100여척을 다 불살라먹고 겨우 3척만 남긴 원균에 비해서는 비교불가 수준으로 이순신을 도왔다만 제찰사 이정형는 선조앞에서 그는 원균만 못 합니다 라는 심히 충격적인 평가를 했다. 철저한 원칙주의자였던 이순신과 병력 동원 문제로 싸워 그를 애송이 취급했지만 이후 술친구 사이가 되어 친하게 된다. 이후 가톨릭 다이묘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의 불화로 기밀이 유출되자 이들을 공격하라는 선조의 명령을 적의 속임수라며 씹어 이순신이 한양으로 압송되고 이순신을 살리려 갖은 노력을 했다만 칠천량 전투에서 최후까지 싸우다 다른 장병들과 함께 갈려버렸고 이걸 듣고 풀려난 이순신은 통곡한다.


11.9. 이일과의 관계[편집]


녹둔도 둔전관 시절 상관이다. 녹둔도 전투 이후 패전 책임을 물어 심문할 때 이순신이 공개적으로 이일의 잘못을 지적한 것을 보면 사이가 좋지는 않았던 듯 하다.

다행이 이일이 이걸 가지고 뒤끝있게 행동한다거나 하지는 않았고 시전부락을 침공할 때 아래의 이경록과 함께 공을 세울 기회를 줘 백의종군을 끝내게 했다. 이후 집필한 제승방략에서 이순신의 녹둔도 전투와 그 분전을 상세히 기록했다.

원래대로라면 일본의 침공이 임박했을 때 이순신과 함께 남쪽으로 내려왔어야 했으나 여진족을 더 경계했던 병조판서 홍여순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11.10. 이경록과의 관계[편집]


이순신과 비슷한 시기에 과거 급제한 임관 동기이다. 둘이 같이 이일의 부하로 있었으나 전술한 이일의 병력지원 거절과 무함으로 인해 이순신과 같이 삭탈관직을 당하고 백의종군했다. 이후 이순신이 전라좌수사로 진급할 때 이경록은 제주목사로 진급했는데 둘은 그 이후에도 계속 서신을 주고 받았으며 이경록은 제주도에서 나오는 물자를 이순신에게 계속 조달해줬다. 여러모로 이순신에게는 매우 든든한 아군인데 임관 동기인 데다가 이순신에게 계속 물자를 대줬으니 이순신과 친분이 깊을 수밖에 없다.


11.11. 허균과의 관계[편집]


홍길동전의 저자로 유명한 허균이 이순신의 친구 류성룡의 제자였으며 이순신을 존경했다. 그리고 류성룡은 허균의 동복 형 허봉의 친구였으므로 허균을 알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

허균의 친가이자 부친 허엽의 집이 있는 한성부 건천동에 이순신의 생가가 있었으므로 어렸을 때부터 이순신을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스승 류성룡이 이순신을 등용했을 때 이순신을 "나라를 중흥시킨 큰 기틀"이라고 불렀다. # 그리고 1605년 음력 7월 실지 이춘영(李春英)을 대신해서 이순신의 공신록권(功臣錄券)을 쓴 적이 있다. #


12. 평가[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이순신/평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후대의 평가와 각국의 평가를 모아놓은 문서. 일본 웹에서의 왜곡도 포함되어 있다.


13. 대중매체에서[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이순신/창작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4. 관련 다큐[편집]






15. 관련 단체[편집]


  • 충무공이순신기념사업회
  • 한국서화교육협회 성웅이순신연구회
  • 여수지구이충무공유적영구보존회
  • 순천지구이충무공유적영구보존회


16. 관련 문서[편집]





17. 이순신 연표[편집]


모든 날짜는 음력으로, 이순신의 나이는 세는나이로 기재하였다. 서기와 함께 조선 국왕의 재위년도를 표시하였다.

  • 1545년(1세) 인종 1년
    • 3월8일: 서울 건천동에서 이정의 셋째 아들로 태어남.

  • 1565년(21세) 명종 20년
    • 이즈음에 방진의 딸인 방수진과 결혼. 그 전년도였을 수도 있다.

  • 1573년(29세) 선조 6년
    • 훈련원 별과에 응시, 낙마(落馬)해서 탈락하다.

  • 1576년(32세) 선조 9년
    • 2월: 식년시 무과에 급제.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練院奉事)로 첫 관직 생활을 시작하다.[194]
    • 12월: 종9품 함경도 동구비보권관(董仇非堡權管)으로 부임하다.

  • 1579년(35세) 선조 12년
    • 2월: 종8품 한성훈련원 봉사로 재직.
    • 10월: 충청도 병마 절도사 군관이 되어 충청도 해미 병영으로 가다.

  • 1580년(36세) 선조 13년
    • 둘째 형 이요신이 죽다.
    • 7월: 전라 좌수영 관내 발포 종4품 수군만호(水軍萬戶)[195]로 전근, 서익이 불러 부당 인사를 제안하나 일언지하에 거절함.

  • 1582년(38세) 선조 15년
    • 1월: 군기경차관[196]으로 온 서익이 과거의 일에 대한 보복으로 근무 태만이라 거짓 보고를 올려 발포 수군 만호 직에서 파직되다.
    • 5월: 종8품 훈련원 봉사로 복직되다.

  • 1583년(39세) 선조 16년
    • 7월: 함경도 남병사 이용이 이순신을 자신의 군관으로 삼다.
    • 8월: 여진족 토벌의 공을 세워 종7품 훈련원 참군으로 승진하다.
    • 10월: 경원 고을 건원보의 권관으로 자리를 옮기다.
    • 11월 15일: 부친 이정이 74세의 나이로 별세하다.

  • 1584년(40세) 선조 17년
    • 1월: 아버지의 별세 소식을 접하고, 잠시 벼슬을 떠나 삼년상을 치른다.

  • 1586년(42세) 선조 19년
    • 1월: 복직하여 사복시 주부(종6품)가 되다.
    • 2월: 종4품(중령) 조산보 만호(造山堡萬戶)(종4품 이상의 장군직)로 임명되다.

  • 1587년(43세) 선조 20년
    • 1월: 맏형이었던 이희신이 사망하다.
    • 8월: 정언신의 추천으로 녹도 둔전사의(鹿島 屯田事宜)도 겸직하다.
    • 10월: 녹둔도 전투 발발. 이순신이 이일 측에 지원 병력을 요청했으나 거절, 그럼에도 이경록과 둘이 전투를 치뤄 승리하다. 그리고 전투 후 북병사 이일의 모함으로 1차 백의종군(보직해임) 처벌이 내려지다.

  • 1588년(44세) 선조 21년
    • 1월: 여진족 시전부락 공격에 참가, 공을 세워 사면되어 백의종군 해제.
    • 6월: 아산으로 내려가다.

  • 1589년(45세) 선조 22년
    • 1월: 비변사에서 불차채용[197]을 하게 되자 이산해와 정언신의 추천을 받다.
    • 2월: 이광의 추천으로 전라도 감사 휘하 조방장에 임명되다.
    • 11월: 선전관으로 임명되어 서울로 올라가다.
    • 12월: 류성룡의 천거로 전라도 정읍현감(종6품)이 되다.[198]

  • 1590년(46세) 선조 23년
    • 7월: 류성룡이 고사리진 병마첨절제사(종3품)로 천거했으나 사간원의 반대[199]로 개정되다.
    • 8월: 평안도 만포진 병마첨절제사[200]로 천거되었으나, 역시 사간원에서 지나치게 진급이 빠르다는 이유로 개정되다.

  • 1591년(47세) 선조 24년
    • 2월 13일: 이억기, 이천, 양응지와 함께 이순신을 남해 요해지로 임명하여 공을 세우게 하라는 선조의 전교를 받았고, 이전처럼 진급이 빠르다는 이유로 거절당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종6품 정읍현감에서 종4품 진도군수(珍島郡守)로 승진시킨 후, 부임하기도 전에 종3품 가리포진 수군첨절제사(加里浦僉節制使)로 전임시켰으며, 이 또한 부임하기 전에 정3품(소장)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초수(超授)하다.




  • 1597년(53세) 선조 30년
    • 2월 6일: 선조가 이순신의 파직을 명하다.
    • 2월 10일: 부산포로 출정해 무력 시위를 벌이고 돌아오다.
    • 2월 25일: 통제사 직에서 해임되다.
    • 2월 26일: 후임 삼도수군통제사인 원균에게 인계 후 서울로 압송당하다.
    • 3월 4일: 감옥에 갇히다.
    • 4월 1일: 옥중 생활을 마치고 나오다.[203]
    • 4월 2일: 류성룡을 만난 후, 권율 휘하에서 백의종군을 지시 받고 내려가던 도중 아산에 들러 잠시 머물다.
    • 4월 11일: 어머니가 사망하다.
    • 4월 13일: 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접하다.[204]
    • 7월 23일: 이조판서 이항복, 경림군 김명원의 건의로 이순신이 종2품 삼도수군통제사에 복직하다.
    • 8월 15일: 선전관 박천봉이 찾아와 수군을 폐하라는 지시를 전하다. 이순신은 "신에게는 아직 배 12척이 남아있나이다."라는 장계를 올리며 수군의 폐지를 반대하다.
    • 8월 18일: 경상우수사 배설로부터 전선 12척을 인계받다.
    • 8월 28일: 어란진에서 왜선 8척과 조우, 교전 끝에 승리를 거두다.
    • 8월 29일: 진도 벽파진으로 진을 옮기다.
    • 9월 2일: 배설이 도주하다.
    • 9월 16일: 전선 13척과 피난선에 힘입어 명량(鳴梁)입구인 임하도의 좁은 목(우수영 앞바다)을 이용하여 일본군 133척과 맞서 싸워 승리하다.
    • 10월 14일: 셋째 아들 이면의 전사 소식을 듣다.[205]
    • 10월 29일: 고하도로 진을 옮기다.


  • 1604년 선조 37년
    • 덕풍부원군으로 추봉되었으며 이후 좌의정에 추증되다.

  • 1643년 인조 21년
    • 충무라는 시호를 받다.

  • 1706년 숙종 32년
    • 충청도 유생들의 상소로 사당 건립을 윤허받다.

  • 1707년 숙종 33년
    • 숙종이 친히 현충사(顯忠祠)라는 현판을 하사하다.



18. 여담[편집]


  • 동시기 같은 덕수 이씨 인물로 율곡 이이이광이 있었다. 이들의 존재로 이순신이 역적의 가문에서 태어났다는 루머를 반박할 수 있다. 이순신의 덕수 이씨 가문이 정말로 역적의 가문이었다면 (이들과의 관계를 논외로 하더라도) 같은 가문인 이이와 이광도 역적의 가문에서 태어났다는 논리가 된다.[206] 그야말로 이순신에 대한 쓸데없는 루머가 이순신 본인은 물론이고 여러 사람들에게까지 피해를 끼치는 셈이다.

  • 이순신의 필체가 담긴 친필 편지 원본이 발견되었다.관련 기사

  • 이순신에 대한 기록이 남은 문헌은 《난중일기(亂中日記)》, 《충무공전서(忠武公全書)》, 《난중잡록(亂中雜錄)》, 《충무공행록(忠武公行錄)》, 《통제사이충무공유사(統制使李忠武公遺事)》, 《충무공행장(忠武公行狀)》, 《충무공시장(忠武公諡狀)》, 《명량대첩비(鳴梁大捷碑)》 등을 비롯한 수많은 문헌이 있다.

  • 2009년 《난중일기》와 당시 사료를 바탕으로 철저한 고증을 거쳐 이순신과 조선 수군의 평소 식단이 재현되었다. 한국어 위키백과 이순신 밥상 문서재현된 밥상 사진 국내 기사
    • 평소 좋아하던 식단: 장국밥[207], 어육각색간랍[208], 멸치젓, 장김치
    • 백의종군 때 식단: 연포탕[209], 과동침채, 고사리나물
    • 아플때 식단: 앱쌀죽밥, 수포탕[210], 더덕 좌반, 과동침채(동치미)
    • 수군에 있을때 평상시 식단: 쌀밥, 홍합 미역국, 봉총찜[211], 산갓침채
    • 수군 훈련시 식단: 보리밥, 와각탕[212], 과동과, 청어 구이
    • 전투시 식단: 통영 비빔밥, 산나물밥, 주먹밥
    • 수군 전투 승리 후 식단: 석화죽(굴죽), 숭어전, 노루고기 포, 설하멱[213], 술, 참외, 약과.


  • 조선정벌기에서는 이통제라는 인물로 등장하는듯 하나 명나라 장군을 구하려다 고니시에게 전사하는 별볼일없는 역할로 등장한다. 일반적으로 일본에서 이순신이 각인되기 시작했을때는 징비록이 일본에게 전해졌을때이다.

  • 한국전쟁 도중인 1952년경, 해군의 충무공 동상 제작에 참여한 어느 할아버지의 사례가 소개되었다. 전쟁이 빨리 끝나길 바라는 마음에서 제작하였다고 한다.#

  • 러시아에서 활동한 고려인인 인노켄치 이바노비치 황이 생전에 러시아어로 번역한 충무공 이순신 '장계'가 사후 32년만인 2017년 여름에 발간되었다.#

  • 광화문 광장이 생기기 전에는 도로 한가운데에 이순신 동상이 있어서, 전역한 해병대원들이 밤에 술먹고 전역 신고를 한다고 동상 앞에 가는 일이 잦았다. 당연히 항상 상주하는 경찰들이 잡으러 가는데, 해병대를 갓 전역한 병사들이라 이순신 동상을 빙글빙글 돌면서 경찰한테 도망다니며 전역 신고 다 외치고 호로록 도주해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 한국 인터넷을 중심으로 "일본 측 군사 기록에는 구루시마 미치후사가 이순신이 입에서 뿜은 번개를 맞고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는 루머가 알게 모르게 퍼져있다. 이른 바 이순신 번숨설. 그러나 이것은 디시인사이드의 유머성 글이 시초로, 실제로는 일본측 기록에도, 조선군 기록에도 "이순신이 입에서 번개를 뿜었다"와 같은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임진왜란 당시의 군사 기록은 군사 부대의 수를 늘리거나 줄이는 등의 과장은 있었어도 "입에서 나온 번개를 맞고 죽었다"와 같은 낭설을 기록할 만큼 허술하지는 않았다. 초기에는 분명 농담성의 밈으로 시작했으나, 이러한 맥락을 제거한 채 번숨설만이 널리 퍼져 이제는 "이순신 번숨설"을 진지하게 믿는 네티즌이라고 쓰고 바보인 커뮤 이용자라고 읽는다도 늘어나고 있다.

  • 이순신의 전투 스타일은 이길 자리를 찾아가는 스타일이다. 즉, 어떤 전투에서 어떻게 싸울지 판을 짜 놓고 무조건 이길 수 있는 전술로 이겼다. 이 때문에 몇몇 판옥선을 정해 가왜장선을 만들어서 실전과 유사한 훈련을 여러가지 방법으로 했으며 거기서 찾아낸 최선책으로 전투에 임했다. 그랬기에 녹둔도에서의 전투나 명량에서의 전투 등 매우 불리해서 승산이 없어 보이는 전투들도 전부 이겼다.

  • 이순신의 관직 자력표는 상당히 꼬여 있다. 만호 → 보직해임(백의종군) → 정읍현감 → 전라좌수사 → 삼도수군통제사 → 보직해임(백의종군) → 삼도수군 통제사 → 영의정(사후 추증)인데 정읍현감에서 전라좌수사로 진급한 것은 이순신이 낙하산 인사라서 파격적인 진급을 했다고 보긴 어려우며 되려 47살임에도 불구하고 정읍현감이라는 낮은 사또직에 종사하고 있는 게 이상한 것인데 이는 이일에게 무고를 당해서 백의종군한 탓에 진급을 못하고 있다가 밀린 진급을 한방에 몰아서 받은 것이다. 오늘날로 따지자면 대위로만 20년으로 있다가 대위 21년차에 영관급 장교준장까지 모조리 건너뛰고 바로 소장으로 진급한 꼴이다. 당시 선조신립의 눈치를 심하게 보고 있었으며 이일은 그런 신립과 친분이 매우 깊었다. 그랬기에 이순신은 적과 싸워 이긴 죄로 보직해임을 당하는 정말 어이 날아가는 꼴을 당한 것이다. 이일만 없었더라면 이순신은 훨씬 젊은 나이에 전라좌수사가 되었을 것이다.

  •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됐을 때 일화가 있는데, 원균에게 인수인계를 하고 금부도사의 체포를 받아들였을 때 군사들이 달려나와 울면서 앞길을 막자 이순신은 "나는 죄가 없기에 가서 조사를 받고 증명하면 풀려날 것이다. 그러나 너희들은 전하의 명을 어기고 금부도사의 일을 방해하고 있어 그 죄가 매우 크니 어서 비켜라."고 그들을 꾸짖었다. 겨우 군사들을 지나치자 이번에는 백성들이 몰려나와 이순신을 부르짖고 금부도사 일행을 비난하면서 분위기가 험악해졌는데 금부도사 일행이 겁에 질려 갈팡질팡할 정도였다. 이순신은 금부도사에게 잠시만 자신을 풀어 달라 하여 함거에서 나와 백성들을 주목시켰고, 잠시 한양에 갔다가 곧 돌아올 테니 걱정 말고 기다리라고 차분하게 타일렀고 그제서야 백성들은 통곡하면서 길을 열어 주었다고 한다.

  • 충무공의 사당인 현충사가 있는 충청남도 아산시에서 만들어 배포한 서체. 난중일기의 서체를 분석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서체의 유래가 유래라 그런지 무엇을 쓰든 비장함이 넘쳐흐르는 서체로, 현대적인 개념을 접목시켜 트위터 등지에서 많은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다운로드 사이트 종류로는 이순신체와 이순신 돋움체가 있으며 이순신체는 이순신Bold, 이순신Regular이 있고, 이순신 돋움체는 Bold, 이순신 돋움체Medium, 이순신 돋움체Light가 있다. 한컴 오피스 한글에서 이순신Bold가 '댛' 글자가 보이지 않는 오류가 있는데, 완성형 한글 2,350자 내에 들어가지 않는 문자이므로 만들어지지 않은 것이다. 모바일 게임 제5인격의 한글판 공식 글씨체가 이순신Bold이다. 다키스트 던전의 공식 한글 번역 역시 이순신체로 되었다고 한다. 다만 Bold인지 Regular인지 판별은 힘든 것 같다.

  • 2015년 8월에 이순신과 관련된 고서 중 하나가 문제가 되고 있는데, 해당 고서가 소실된 장계별책인지 다른 책인지 논란이 되고 있다. 장계별책을 도둑질한 범인과 같은 교회에 다니는 지인인 덕수 이씨 15대 종부[214]인 최순선은 이미 2009년에 사기 혐의로 구속된 경력이 있고 같은 해에 사채업자 전씨에게 현충사 소장 유물을 팔아넘기려다 사채업자가 거부해버리는 사상 초유의 사태를 벌인 전력도 있는 데다[215], 양자와 유산 문제로 법정 다툼을 벌이는 등[216] 여러모로 유명하다. 그 외에도 한 때 충무공 고택 터가 경매에 나가기도 했지만 다행히 후손들이 되찾았다.[217] 일이 이렇게 된 이유는 종부 최순선이 충무공의 유물과 종가 재산을 담보로 사업을 벌였기 때문이다.

  • 어릴 적부터 이어진 형 이요신의 친구 류성룡과의 우정[218]이 유명하며[219] 그 탓에 정치적으로는 어디에도 쏠리지 않은 중립이었음에도 동인 중에서도 남인 계열로 여겨졌다. 단, 남인 계열로 여겨지기 시작한건 전라 좌수사가 되고 임진왜란 때의 전투로 주목받은 이후이다.[220]

  • 사적인 일에는 융통성이 있었지만 공적인 일에는 일체의 부정을 허락하지 않는 철저한 FM으로 임했다. 아부를 하는 성격이 아니고 우직한 편이기 때문에 군인으로서 안 당해도 될 불이익을 꽤 당했다. 녹둔도 시절에는 군공을 세우고도 되려 처벌을 받았고 임진년부터 쌓인 눈부신 전공과 민심 이반으로 이순신을 경계하여 싫어한 선조에 의해 파직당하고 고문당하며 백의종군까지 했다. 그러나 선조는 원균이 조선 수군을 싸그리 말아먹고 나서야 결국 이순신을 재차 통제사에 임명하는 등 이순신은 군인으로서 우여곡절이 많았다. 이순신은 윗사람에게 손을 비비며 입신양명하려는 스타일이 아니었으며 매사에 현재 일어난 상황 그대로 판단하고 설명하는 성격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이순신보다 품계가 높은 윗사람(특히 국왕 선조)의 심기를 상하게 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 한마디로 이순신은 완벽주의적인 비관파였는데 완벽주의는 이루어질 수 없기에 비관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철저히 준비했고 군율을 엄격히 적용했으며 임진왜란 당시의 어떠한 상황에서도 장군은 이를 극복하고 전투에서는 항상 승리로 이끌었다. 대단히 현실적이지만 백성들에 대한 사랑이 있었으며 아마 본인이 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가득했던 걸로 보아 가족 관계가 대단히 돈독했던 것 같다. 그래서 백성들에 대해서도 어버이같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던 걸로 보인다.[221]

  • 사소한 것까지 철저히 신경 썼던 완벽주의자였던 까닭인지 자주 아팠던 것으로 추정된다. 《난중일기》에 "아파서 배에서 "웅크리고(縮) 있었다"거나 "밤새 토사곽란으로 고생했다", "혼절해 있었다" 등의 서술이 많다. 실제로 《난중일기》 중에 "아팠다"는 기록만 찾아도 수십 차례가 넘는다. 심지어 하루에 10여 회 이상을 연거푸 토했다는 일기도 있을 지경. 이는 정유년 삭탈관직 당시 받은 고문의 후유증, 사천 해전에서 입었던 부상의 후유증, 전쟁 때문에 제대로 된 식사와 휴식이나 치료가 없었던 점, 과로와 스트레스를 잦은 음주로 해결한 점 등의 영향으로 추측된다. 다른 병세로는 특히 식은땀이 계속 흐른다는 내용이 매우 많은데, 현대의 학자들은 이를 스트레스성 질환인 만성 위염 또는 위궤양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이순신은 정실 부인 및 들에게도 충실한 남편이었다. <난중일기>를 보면 부하나 친지의 여성 가족들이 와서 잤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당시 사회상의 배경 지식 없이 <난중일기>를 읽은 사람들은 이를 보고 당황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성관계를 했다는 내용은 당연히 아니고, 이순신 휘하에서 복무중이던 가족을 찾아 왔다가 그냥 그 집에서 하룻밤 머물고 갔다는, 말 그대로 '숙박'을 의미한다. 실제로 단순히 숙박만을 뜻한다는게 전문 연구가들의 견해이다. 이는 전술하였듯 당대 사회상을 이해할 필요가 있는 문제로, 통념과는 달리 조선시대에는 공공 숙박업이란 개념이 조선 후기까지는 존재하지 않았는데, 이유는 애초에 일반인들이 긴 여정을 갈 일 자체가 전혀 없었고, 그나마 여행이라는걸 하는 사람들조차 이미 정해진 장소에 위탁해서 숙박을 해결하는 상황[222]이라 공공 숙박업이 발달할 환경이 아니였기 때문에, 어쩌다 여행을 가게 된다면 목적지에서 숙박을 해결하는 방도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223]

그 외에는 특별한 날 부하들과 연회에 참석하거나 조정 인사들을 맞이하는 행사에 기생들이 동행했다거나 '여진'이라는 하녀와 성관계를 했다는 내용이 몇 번 나온다. 다만 기생들이 동행하는 것은 당시 기준으로 마냥 문란한 것은 아니고 단순한 의전에 가까웠다.[224] 그나마도 전문가들의 주장에 의하면 여진이라는 하녀는 명백한 오역이라고 한다. '여진'은 하녀가 아닌데 여성이 아니라 ‘여진(余陣)’으로 ‘내 진영(陣營)’이다. 다만 이러한 역사적 사실과는 별개로 성웅도 여색과 무관하지 않았다는 점이 상당히 매력적인 소재로 작용하는지 현대의 이순신과 임진왜란을 소재로 한 대중매체 중에는 이런 식으로 이순신의 여자 관계를 창작해서 넣은 작품들이 제법 있다. 김훈의 <칼의 노래>에서도 '여진'이 중요한 인물로 등장한다.[225]

  • 이순신은 처음부터 관직을 순수 무인으로 시작했으므로 유학자나 문인으로서의 이미지는 사실상 전무하다. 물론 조선시대의 무관 또한 엄연히 유학을 배운 사대부로서의 교양을 갖춰야 했고 이순신 역시 그러한 교양은 당연히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고려조선의 경우 무인에게 기대하는 것은 글을 쓰는게 아니라 신립, 이일 등 당대 이름을 날린 장수들처럼 얼마나 용맹하게 나가 싸우냐가 좋은 무인이라는 평가 기준이었다. 매일 일기를 쓰고 시를 남긴 이순신이 이 시기 다른 무인들에 비하면 특이한 편이었으며 이순신은 무관으로서 관직 생활을 하면서 전방의 야전 지휘관 자리를 전전했고 특히 전라좌수사에 임명된 뒤에는 철저하게 전쟁 준비 및 수행에 임하였으므로 학문을 연구하거나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등의 예술 활동은 거의 하지 않았고 그럴 여유도 없었다. 다만 <난중일기>와 친지들에게 보낸 편지글 등을 통해 이순신의 학문 수준 및 문학의 소양을 짐작할 수는 있다. 굳이 이순신의 예술을 꼽자면 서예 유묵이나 전쟁을 수행하는 자신의 처지와 감정을 표현한 시조가 몇몇 있는데 대표적으로 '한산도가(閑山島歌)'가 있으며 '한산섬 달 밝은 밤에'로 시작한다. 무인인 본인의 임무와 연관된 병법(군사학) 부분에서도 이순신이 직접 이를 정리해서 집필한 서적은 없지만 <난중일기> 및 기타 관련 기록에서 어떤 사상을 바탕으로 작전을 구상하고 이를 시행했는지에 대해 상세하게 나와 있으므로 이를 통해 유추할 수 있다. 이순신의 군사학 사상은 철저한 원칙주의에 입각한 정통파에 가깝다.

  • 도전 골든벨 부산 학산여자고등학교 편에서 골든벨 문제로 출제되었다.

  • 위의 평가 항목에도 나왔듯이 이순신에 대한 글은 거의 대부분이 칭찬 일색이나 이런 평가와는 별개로 어느 누구도 이순신과 거의 비슷한 행적을 보였던 100년전의 인물인 잔 다르크와 비교한 글이나 영상은 거의 찾아볼수없다. 흥미롭게도 잔 다르크의 주군인 샤를 7세와 이순신의 주군인 선조 모두 정치적 면에서는 유능했지만 의심이 많아 자주 신하들을 숙청했다. 또한 숙청대상 중 하나가 현재 자기 나라의 구국영웅으로 추앙받는 바람에 암군 수준으로 기억되다가 재평가되고 있는 점도 공통점. 거기다가 자식문제를 겪인 것도 똑같다. 특히 자기 후계자와 사이가 나빴다.

18.1. 이순신 장검(長劍)에 얽힌 이야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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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검 - 보물 제326호
이순신의 검은 현충사에 소장되어 있다. 약 2m에 가까운 크고 아름다운 길이 때문에 오래 전부터 이순신의 키는 2m 50cm 내외가 될 것이라는 말이 퍼지기도 했다. 그러나 2009년에 동래성에서 출토된 조선 갑옷을 통한 추정과 이사벨라 버드 비숍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조선 남성의 평균적인 키가 164cm라는 결론이 나와 실제로 키가 그렇게까지 컸을 가능성은 그다지 크지 않다. 하지만 키가 컸다는 이야기와 6척[226]이라는 기록으로 보아 당시로서는 장신이었던 걸로 보인다. 더욱이 이순신의 장검은 쌍수도이며 그 태생은 척계광에 의해 중국에서 도입된 칼로, 그 뿌리는 왜구들이 쓰던 오오타치이다. 조선인보다 머리 하나는 더 작았다는 일본인들도 잘만 쓰던 칼인지라 이 검을 사용했다고 해서 거인일 리는 없다. 키에 비례해서 검의 길이를 정하는 것은 현대 검도에서 초급자에게 권장하는 사항일 뿐이고 옛날 전장에서 키에 따라 무기를 정했을리는 만무해 키가 작은 사람도 4~5m 짜리 장창을 잘만 사용할 정도로 키와 무기 길이는 효율에 별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당장에 무기 길이가 승패를 가르는 요소인 만큼, 키가 작다고 작은 무기를 드는 건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는 행동일 정도이다. 물론 이순신이 수군 전체를 총괄하는 지휘관의 신분이었던 만큼 직접 일선에서 교전할 일이 없어 이 장검이 실전에서 사용했을 가능성은 별로 없을 뿐 이 장검이 실전에서 사용 못할 무기는 전혀 아니다. 추가로 검날의 홈에 칠해진 붉은색이 이순신 사후 누군가에 의해 칠해진 페인트라는 게 밝혀져 대한민국의 역사학계가 발칵 뒤집혔다. 지금은 복원 작업을 통해 페인트를 지웠지만, 이미 대중들에겐 충무공 환도는 붉은색이라고 각인되었으니 늦어도 한참 늦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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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에 촬영된 쌍용검이라 추정되는 도검[227]

그리고 이순신이 사용한 또다른 칼이라는 쌍룡검의 행방은 며느리도 모른다고 하며, 근 100년이 되었다. 그저 일제강점기 시절 어느 일본인이 가져갔다는 추정만 할뿐. 이 쌍룡검이 실제로는 이순신의 검이 아니라 후대에 만들어졌다는 주장도 있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로.

현충사에 소장된 이순신의 장검을 실전에서 사용한 검으로 착각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는데, 조선은 화약 병기나 원거리 병기에는 많은 투자가 이뤄진 반면,(세종, 문종 문서로.) 검 문화가 덜 발달한 국가다. 조선의 병과상 검을 사용하는 병과는 팽배수, 도수(조선 전기)나 등패수(조선 후기), 조총병(조총 + 쌍수도 / 장도 또는 요도)로 한정되어 있었고[228], 전반적으로 보병은 창으로 상대를 막으려 했지만 이게 제대로 안되어서 무너졌고 기병에서도 가장 선호되는 무장은 마편곤(馬鞭棍) 같은 기병용 타격 병기였다. 검 자체에 대한 대우나 일반적인 인식도 《무예도보통지》에서 나오듯이 썩 좋지 않다. 조선의 검 문화에 대해 쉽게 알 수 있는 것이 성호 이익의 《성호사설(星湖僿說)》인데, 성호사설에서 이익은, "우리나라 병사들은 일본도를 얻으면 경사면을 갈아내는데, 이 경사면이 있어야 칼의 날이 손상당해도 쉽게 갈아서 쓸 수 있지만, 그걸 모르고 칼날의 경사면을 갈아내 버린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외에도 조선 초기 《문종실록》에서도, 병사들이 임의로 칼날을 분질러 길이를 줄이고, 불편하다는 이유로 검신을 아예 없애버리는 상황도 벌어져, 문종이 도검의 길이를 법적으로 정하는 사태가 벌어졌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또한 이순신 본인부터가 검에 대한 인식이 마뜩찮다. 일반적으로 왜검을 손에 넣으면 소유하거나 진상하는데, 이순신은 죄다 녹여서 물자로 전환시켰다. 이순신 본인은 검법이 맞지 않다고 했으나, 황진이 통신사를 수행하고 오면서 왜검을 사왔던 점, 조선이든 명이든 쌍수도를 적극 장려하려고 한 적이 있었던 점을 고려하면 어디까지나 핑계였다고 볼 수밖에 없다. 또한 승산이 충분함에도 근접전에 들어가면 순식간에 패주하는 일이 많았던, 다시 말해 근접전 자체가 익숙지 않았던 조선군의 현황 속에서 일본도는 가지고 있어봤자 제대로 써먹기 힘들었다. 다만 이순신의 함대 내에 항왜(降倭) 출신 병사가 존재했음이 확인되므로, 이들은 자신의 일본도를 가지고 싸웠을 것이다. 그러나 1596년 1월 1일자 난중일기에 환도와 함께 왜검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어 일본도 양식의 검을 활용했을 가능성도 있다.

현충사에 전시된 검에 대해서도, 왕권을 상징하는 태아검(太阿劍)처럼 장식용 및 군기 확립을 위한 장식이라고 설명되어 있으므로 요주의.[229] 또한 《난중일기》에 이순신이 새로 검을 만든 것이 편하게 쓰였다는 말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는데, 이 장검은 태구련 등 대장장이들이 자신들이 대장장이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만든 장식용 검으로, 갑오년에 만든 물건이고, 이순신이 새로 만든 검은 그 뒤인 정유년 이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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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사 장검 날 옆면 홈 안에 칠해진 빨간 줄은 만들 때부터 있던 게 아니라, 누군가가 공업용 페인트로 칠을 해놓은 것이다. 언제 누가 무슨 이유로 칠했는지는 밝혀진 게 없으며, 페인트칠이란 사실이 2014년 8월 하순에서야 밝혀지면서 문화재청에서 이 페인트칠을 벗기기로 결정했다. 현재는 벗겨진 상태라고 한다.


18.2. 화폐 인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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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정권이 퇴출되자 500원권의 인물로 선정되었다. 100원이 지폐이던 시절에는 500원권 지폐의 인물로, 100원이 동전이 된 현재에는 100원 동전에 그의 초상화가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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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원 동전에도 삽입되어 있는데 구 100원 동전에 있는 이순신은 구 500원권에 삽입된 이순신과 오묘하게 거의 비슷하다.


18.3. 엄격한 직장 상사[편집]


그가 남긴 기록이나 여러 문헌에 의하면 굉장히 깐깐한 인물이었으리라 생각된다. 또한 《충무공유사》의 기록을 해석한 결과, 원균을 가리켜 원흉(元兇)이라 부르며 싫어한 것이 밝혀져 충무공과 원균의 사이가 얼마나 나빴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난중일기를 보면 원균의 행패가 그나마 점잖으면 원균의 인 평중을 붙여 "원평중", 또는 "원수사"라고 불렀지만[230], 행동이 도가 지나치면 가차없이 원흉이라 언급한다. 원균 역시 이순신이 지나칠 정도로 융통성 없다고 까대며 싫어했다. 결과적으로 보면 이순신다운 현안이었다.[231]

小有違令(소유위령 卽當軍律(즉당군율

조금이라도 군령을 어긴다면 즉각 군법으로 다스리겠다.

명량 해전을 앞두고.

부하들에게 굉장히 엄격한 상관이었다. 《난중일기》를 보면, "부하 ○○가 기강이 태만하므로 베었다, 곤장을 때렸다' 등으로 가득 차 있다(예를 들어 김완이나 황옥현 등). 특히 많이 처벌받았던 자들이 관할 지역의 아전들이었다. 고려시대에 지방의 지배계층이었던 향리들은 조선 건국 후 중앙 집권화 과정에서 수령에게 무보수로 봉사, 보좌하는 아전으로 굴러 떨어졌고, 이에 살 길이 어려워진[232] 아전들은 중간에서 갖은 비리를 저질렀는데, 이는 조선 시대 내내 큰 사회 문제였다. 이순신의 처지에선 나라의 존망이 걸려 목숨을 걸고 싸우는 판에, 그들의 비리나 과실을 눈감아 줄 리 만무했을 것이다. 이러한 모습을 보여서 존경할 만하지만, 상관으로 모시기엔 힘든 인물이라는 평이 나오기도 한다.# 능력이 엄친아급이니 보통 사람은 절대 따라해선 안 되는 인간의 표본이라고 평하는 사람도 있다. #

  • 대표적으로 《난중일기》 기사에, 첫 출진인 옥포 해전 출진 하루 전에 군졸인 황옥현(黃玉玄)이 군영을 탈영해 도주하는 것을 붙잡았는데, 이순신은 이 황옥현을 그대로 참수형에 처했다. 사실 조선군은 군졸 뿐만 아니라 장수들도 많이 도주한 사례가 있어서,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군기를 잡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당장 이순신의 옛 직속상관이던 이일부터 임진왜란 기간 내내 도주로 일관했다.

  • 《난중일기》에 소개된 또 다른 일화로는, 아전 한명이 소를 데리고 군량을 가지고 오던 중, 강가에서 밥을 먹다가 잠시 술을 반주로 걸쳐 먹었는데, 그 사이에 소가 멋대로 움직이다 강에 빠져 죽었고 소에 실었던 군량도 같이 빠져버리는 사고가 나버렸다. 그러자 이순신은 그 아전을 관리 소홀의 책임으로 참수형에 처했다. 언뜻 보기엔 잔인한 처사로 보이지만 이순신의 수군은 기본적으로 모든 군량을 쪄서 가지고 다녔기 때문에, 물을 먹으면 아예 쓸 수가 없게 되어버린 상황이었다. 이때 죽은 소는 그날 병사들의 저녁 식사로 제공되었다. 해당 상황은 현대에 비유해도 수송 차량을 모는 공무를 집행하는 도중 음주운전을 하다가 차가 폐차되고 수송 물자가 몽땅 손망실되는 큰 사고를 낸 것과 같아서굉장히 가혹한 징계를 받을 상황이다.

  • 명량 해전이 발발하기 전에 이순신은 수군을 수습하러 다녔는데, 이때 훔친 소를 끌고 가던 절도범들이 주변을 혼란에 빠뜨리려는 목적으로 왜적이 온다고 떠벌리고 다니자 이들의 목을 베었다.[233] 오늘날에도 국가가 제대로 운영된다면 처벌이 되는 것이 당연하다.[234][235] 신립의 경우 적이 온다고 보고한 부관을 죽인 것은 지휘관과 참모들에게만 보고한 것으로 백성들에게 혼란을 일으킬 이유가 없는데 지휘관이 보고자를 죽인 것이므로 명백한 직권 남용이자 살인죄로 비난받아야 하지만, 이순신의 경우는 엄연히 다른 일이다. 게다가 조선 시대에는 소 절도범은 중죄인으로 간주했고, 당시의 소 1마리의 가치는 오늘날의 집 1채의 가치에 맞먹을 정도였다.[236] 이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농경 사회에서 소는 생산 수단 그 자체다. 오늘날로 치자면 전쟁 중이라 정신 없는 시기인데, 공습 시작됐다는 거짓말을 해서 사람들이 대피한 사이 엄연한 전략 물자인 휘발유, 경유 등을 털어갔다는 수준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불시에 병영을 순시해 무장과 병력 상태를 점검하는 일이 잦았는데, 무기에 털끝만한 녹이라도 슬어있으면 기본이 곤장으로 줄빳다 80대였다. 다만 곤장을 맞고 죽은 경우는 없고, 휘하 병력들이 평시에 잘 관리하면서 할 거 다 한 후에 시간이 남아 놀고 있는 모습을 보면 오히려 상을 주기도 하는 등 신상필벌을 엄격하게 적용한, 그야말로 완벽한 원리•원칙주의자의 모습이다.

또한 완벽주의자로 가차 없이 백성들을 징집해 수군으로 훈련시켰으며, 전함 건조 등의 일도 철저하게 했다. 당시 조선 수군은 칠반천역(七般賤役) 중 하나로 여겨졌는데, 한번 입대하면 빠져나오기도 힘든데다 후손에게도 피해가 미치기에 탈영하는 사람이 많았고, 그로 인해 탈영자의 친족을 수군으로 강제 징발하는 법도 있었다. 이때문에 그 법이 너무하다 하여 이 법을 폐지하자는 주장도 있었으나, 이순신은 장계를 2차례나 올려 그 일을 반대했다.[237] 그런데 백성들 처지에서 보면 육군보다는 믿음직하고 부유한 충무공 휘하의 수군이 복무하기 더 편했을지도 모른다.[238] 게다가 수군과 그 군영 근처에 있으면 힘들어도 굶을 일은 없었다. 특히 임진왜란은 조선의 곡창지대인 삼남이 전쟁터였기 때문에 전국 각지에서 굶는 자가 속출했고 이는 임금인 선조나 조정 대신들도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이런 판국에 밥을 안 굶는다는 것 자체가 장수들과 병사들, 일반 백성들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천국인 셈이다. 이는 이순신이 섬에 둔전을 둬서 군량 확보에 신경을 써왔기 때문이다. 정유재란 이후에는 해로 통행첩을 만들어 백성들에게 통행을 허가하는 대가로 쌀을 걷었는데, 며칠 안 가서 쌀 수천 석이 쌓였다. 이로써 군량 확보, 간첩선 방지, 백성들의 자유로운 통행이 보장되었다.

철저한 엄벌주의자로 수많은 부하들에게 형벌을 집행해서 어떻게든 수군에서 벗어나려 용쓰던 수졸들은 그를 무척 두려워했다. 그러나 최고 지휘관으로서 군대의 규율을 잡는 것은 원래부터 당연한 일이었고 탈영, 물자 횡령, 적전(敵前) 도주는 현대에서도 최대 사형까지 당할 수 있는 중죄이다.

때문에 후대의 역덕후, 밀덕후들은 이렇게 엄정한 이순신의 군기 확립을 두고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의 사망 원인 2위 = 이순신"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1위는 전염병이며, 0위는 원흉이다.

정리하자면, 이순신은 마냥 엄격하기만 한 것이 아니고 타인은 물론 자신에게도 관대하지 않고 철저히 원리 원칙에 따른 삶을 살아가며, 부하들에게 항상 최고인가, 최선인가 물으며 개인의 잠재력과 능력을 극한까지 뽑아내어 부려먹고, 부려먹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잘 한 것은 큰 상을 주고 벌 역시 너도 나도 공평하게 받으며, 때에 따라서는 할 일을 하고 한없이 풀어줘서 소탈한 모습으로 부하들과 스스럼 없이 어울리니 뒷담을 하기도 어렵고, 종래에는 본인이 직접 진두지휘하며 최후의 전장에서 적을 분멸하다 장렬히 전사하는, 군인으로서 첨언할 수 없을 만큼 충정한 삶을 살다 떠난 사람이었다. 이러니 평범한 능력을 가진 부하들에게는 일은 더럽게 힘들지만 다른 졸장 아래로 들어갔다 죽는 것보다는 나으니 절대 욕 할 수는 없는 그야말로 참 답답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18.4. 공정함과 애민(愛民)[편집]


상벌에는 항상 공정했으며, 백성들과 병사들의 식량 공급[239]과 생계, 부정부패의 절대 엄금 등 민생에도 진심으로 최대한 신경 쓰는 등, 장군이자 목민관으로서도 병사들을 포함한 백성들을 진심으로 돌보고 보살펴 주었기에, 덕장(德將)의 면모도 있었다. 대표적인 예로 이순신이 정읍 현감으로 일할 때 인근 태인현의 현감이 공석이라 태인 현감까지 겸임하게 된다. 그간 현감이 없어서 밀렸던 일들을 이순신이 바로 그 자리에서 신속하고 공명정대하게 처리하는 모습을 보고 태인현의 백성들이 현감으로 임명해달라고 청할 정도로 사무 능력은 물론이고 목민관으로서도 훌륭했던 점을 알 수 있다.

개요에서 앞서 말했지만 이순신은 승첩 장계를 적을 때 계급을 막론하고 일반 병졸이건, 승려이건, 노비이건 가리지 않고 일일이 그들의 소속, 계급, 이름을 빼먹지 않고 적어 그들이 이룩한 전공을 기록하였으며, 사망자, 전사자 역시 신분을 가리지 않고 장계에 이름을 올려 적절한 보상을 받도록 해주었다. 따라서 백성과 병사들은 이순신을 매우 두려워하면서도 진심으로 존경하며 반기를 들 생각을 품지 않았다. 그리고 많은 문건에서 이순신이 벌하거나 벌하려 했던 죄인들이 한 행동들은 군기 위반, 탈영, 군용 물자 유용 및 횡령, 군무 이탈이나 군무 회피 알선, 유언비어 유포 등 현대 기준으로 봐도 전시엔 사형이나 중형을 피하기 힘든 중범죄였다. 한마디로 정상적인 원리 원칙을 집행하는 이순신의 처분이었기에 엄격했지만 가혹하지 않았다.[240] 애당초 가혹하기만 했다면, 수많은 백성들이 이순신의 통제영으로 피난 오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통제영 자체가 일본 수군과 싸우기 위한 전진 기지인 만큼 전쟁터와 가장 가까운데도 말이다.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이 조선 수군을 완전히 전멸하게 만들고 백성들도 대부분 비참하게 죽어가게 된 상황에서, 이순신이 돌아오자 백성들은 울며 절하고 진심으로 기뻐했다고 한다. 이순신이 돌아오자 "원균의 살점을 강제로 뜯어서라도 먹고 싶다"고 하는 등 원균을 철저하게 증오하며, "장군께서 오셨으니 우리는 살았다"는 식으로 이순신의 귀환을 진심으로 반겼다(《난중일기》 1597년 8월 6일).

  • 청성잡기에 따르면 충무공이 처음 호남 좌수사에 제수되었을 때 왜적이 침입한다는 경보가 다급했다. 왜적을 막는 것은 바다에 달려 있었으나 공은 바다를 방비하는 요해처를 알지 못했고 한다. 그래서 충무공은 날마다 포구의 남녀 백성들을 좌수영 뜰에 모아놓고 저녁부터 새벽까지 짚신도 삼고 길쌈도 하는 등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하면서 밤만 되면 술과 음식으로 대접하였다고 한다. 충무공은 평복 차림으로 그들과 격의없이 즐기면서 대화를 유도하였다. 포구의 백성들이 처음에는 매우 두려워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친숙해져 함께 웃으면서 농담까지 하게 되었는데, 그들의 대화 내용은 모두 고기 잡고 조개 캐면서 지나다닌 곳에 관한 것들이었다. '어느 항구는 물이 소용돌이쳐서 들어가면 반드시 배가 뒤집힌다', '어느 여울은 암초가 숨어 있어 그쪽으로 가면 반드시 배가 부서진다.'라고 하면, 공이 일일이 기억했다가 다음 날 아침 몸소 나가 살폈으며 거리가 먼 곳은 휘하 장수를 보내 살펴보게 하였는데 과연 그러하였다. 급기야 왜군과 전투를 하게 되어서는 번번이 배를 끌고 후퇴하여 적들을 험지로 유인해 들였는데, 그때마다 왜선이 여지없이 부서져 힘들여 싸우지 않고도 승리하였다고 한다.

송시열이 예전에 그의 손님에게 이 이야기를 해 주면서 "장수만 그래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재상 역시 그처럼 해야 한다."고 했다고 한다.[241]
정약용목민심서에 기록된 야사에 따르면 "이순신이 장인을 시켜 이나 인두, 가위 등을 만들어 조정에 자주 바쳤다"고 한다.[242] 이순신은 청렴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은 조정에 뇌물을 바쳐 스스로의 안위를 보전하는 듯한 문구로 볼수도 있는데 이 행위는 당시 의심이 많던 조정에 물자를 바쳐 적대감을 줄여, 마음놓고 전투에 임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바친 내용물은 뇌물로 오해받기 쉬운 사치품이 아니라 무기와 도구 등 전투물자였고, 이후에도 공무에 필요한 종이, 둔전에서 생산한 곡식 등 공공성이 강한 물품이 주된 대상이었다. 이에 만성적인 물자 부족에 시달리던 조정은 이순신에게 더욱 바치도록 닦달했다.


18.5. 사람을 보는 눈과 다루는 법[편집]


이순신은 사람을 평가하는 안목이 대단히 엄격했다. 난중일기를 보면 원균을 비롯해 자신이 만나거나 문서를 통해 알게 된 사람에 대한 장단점을 매우 상세하게 지적한다. 그 만큼 자기 자신에 대한 평가는 더더욱 엄격했다.[243]

"The person most critical of Admiral Yi... was Admiral Yi."

이순신 장군에게 가장 비판적인 사람은... 이순신 장군이었어요.

Extra Credits. 한국의 성웅: 이순신 편 中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는 제가 처음 본 소감으로는 '자신의 일기가 아니라 변명록이다' 라고 했을 정도로 소상하고 객관적이며, 마치 누가 나중에 보고 검토할 것을 예측했던 듯 깔끔하게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난중일기는 원래 개인일기이므로 사료로서의 가치를 그냥 인정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장군의 이 일기는 무서우리만큼 객관적이고 정확하게 매사를 기록하여 빈틈이 없기에, 개인의 기록임에도 사료적인 가치를 인정받는 것입니다.

이우혁. 슬픈 시각으로 보는 원균명장론


이순신에게 가장 비판적인 기록은 난중일기였다는 말도 있을 지경이다. 한 마디로 이순신에게 가장 비판적인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는 말이다.

이랬기에 사람을 다루는 재주도 상당해서, 명량 해전 이후 명나라 도독첨사였던 진린과 연합할 때도, 상대가 영의정인 류성룡이 최악의 연합이라 평가할 정도로 성질이 포악하고 조선인 때리기를 주저않는 그 진린이었는데도, 이순신과 함께 여러 전투를 겪으면서 나으리라고 존대할 정도였다. 이순신은 자신이 확보한 수급을 진린에게 양보해 공을 돌리기도 하고 명 수군의 행패를 이유로 병력 철수를 하려 해서 진린한테 명 수군의 기강을 잡을수 있는 권한을 위임받는 등 완급 조절을 통해 진린을 잘 주물렀다. 이러한 점이 유명 수군 도독이 부여된 여러 정황 중 하나가 아닌가란 말도 있다. 그러나 명량 해전을 다루는 기록과 기타 여러 군데에서 보이는 이순신의 행적은, 그가 상대방을 대할 때 지위의 높고 낮음을 떠나 사람 대 사람으로서 예의를 갖추고 대했다는 담백한 증거이다. 태생적으로 완벽하지 않은 사람이란 생명체들이 서로 어울려 살아가는 사회의 디딤돌이라 할 수 있는 사람 간의 예의를 무시한 결과가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빈번히 보이는 인적 자원 관리 문제라는 씁쓸한 지적을, 400여 년 전의 성웅이 몸소 그 역량을 보여 방증한 셈이다.


18.6. 취미 생활[편집]


이순신의 취미라고 할 만한 것은 활쏘기, 음주, 독서였다. 특히 음주를 매우 좋아했는데 의외로 《난중일기》에서 자신에게 찾아오면 술을 먹여 보냈다거나, 밤새 같이 술을 마셨다는 기록이 정말로 많이 나온다. 부하나 동료 아무개가 이순신과 같이 술 먹다 뻗어서 인사불성이 됐다는 기록도 많은 것을 보니 음주 스타일만큼은 두주불사에 엄청난 주당이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조선시대판 인생게임이라 할 수 있는 승경도 놀이를 즐겼다. 《난중일기》를 보면 의외로 부하 장수들과 함께 승경도 놀이를 즐기는 기록도 제법 자주 나타난다. 현대로 치면 4성 장군이 휘하 참모들과 보드 게임을 즐겼다는 건데, 이순신이 마냥 무섭고 엄한 사람이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244] 또 전란 중이지만 추석이 되면 여러 장수들과 모여 술과 반찬을 같이 나눠먹기도 했다. 또 항왜 출신 부하들이 축제를 하게 해달라고 조르자 마지못해 허락하고는 광대로 분장한 항왜들의 놀음을 구경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이 역시 이순신이 엄격해도 풀어줄 땐 풀어주는 융통성을 갖춘 인물이었음을 보여주는 일화.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당대의 무인답게 활쏘기를 즐겼다. 《난중일기》에는 대개 15발 중 10발 ~ 11발 정도 명중했다고 한다. 《퇴마록》의 저자 이우혁은 후속작 《왜란종결자》에서 이 기록을 근거로, 이순신 개인의 무예는 그렇게까지 뛰어나진 않았다고 보았다. 하지만 장수로서 모자라다 싶을 정도로 못쏜다고 보기는 어려운데, 그에 대해서는 이러한 근거를 통해 이해할 수 있다. 정리해보자면, "장수들이 모여서 대결을 해보면, 대충 40발 초반이 꼴찌를 기록했는데 이순신이 (특별히 잘 맞혀서) 기록해 놓은 것이 43발이었다." 잘 쐈다 못쐈다는 게 보통 10여 발까지 차이는 나지 않고, 당시의 평균 수명과 나이를 생각할 때, 엄청나게 못쏘는 수준까지는 아니었고, 장수들 평균에서 조금 떨어지는 수준으로 보인다.[245] 한때 32살이라는 나이에 무과 시험에 합격을 했고, 합격 성적 역시 중간 성적으로 합격했기 때문에 무예 실력은 뛰어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이우혁이 쓴 왜란종결자에서도 이러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이 합격한 식년 무과는 별시가 아닌 4년에 1번 열리는 정시로 총 합격 인원은 29명인데, 이는 문관을 뽑는 과거 시험보다 합격자 수가 더 적다. 게다가 이순신이 응시한 식년 무과의 합격자 평균 연령은 34세로 당시 32세였던 충무공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은 17명이며, 최연소 합격자는 23세, 최고령 합격자는 52세였다. 이를 볼 때 이순신의 합격 나이는 결코 늦은 것이 아니며 합격 성적 역시 29명 가운데 병과 4등으로 12등을 했다. 여기서 유의할 점은 합격자 대부분이 현직 군관들 즉, 직업 군인들이었으며 이순신과 같은 일반 보인 출신은 단 4명에 불과했다. 이미 정식 무과 시험에 현역 군인들과 같이 합격했다는 것 자체부터가 뛰어난 무예를 지녔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엄청난 명궁의 실력은 아니지만 장수로서 갖춰야 할 기본 실력으로는 충분한 수준이라는 뜻.

다만 위의 기록을 조심해서 접근해야하는데, 난중일기에서 이순신이 활 쏘기에 대한 기록. 즉 15발 중 10발~11발을 맞추는 것은 사천해전 이후에 등장하는 대목이다. 문제는 이순신은 사천해전 당시 조총에 맞아 왼쪽 어깨를 다쳤고, 그 때문에 평생 고생했다.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역설적으로 이순신의 활솜씨는 단순히 평균 수준이 아니라 상당한 기량을 자랑했었다.라고도 볼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즉 사천해전 당시 입은 부상 탓에 평균 수준으로 떨어졌다고도 볼 수 있는 셈.

독서도 좋아했는데, 특히 삼국지연의를 좋아하며 즐겨 읽었다. 이충무공전서에 따르면 대략 임진왜란 7년 전쟁 막바지였던 무술년에 명나라 수군 도독인 진린이 조선 수군의 수영에 온 뒤, 이순신의 인품에 감화된 일화 중 하나가 전해진다. 어느 날 진린이 천문을 봤는데 장군성이 흔들리니 이것을 이순신의 별이 흔들리는 것으로 보아, 이를 두고 다가올 전쟁에서 이순신이 크게 다치거나 전사할 조짐이니 이순신에게 제갈무후의 고사를 들며[246] 이순신에게 기도할 것을 건의했으나, 이순신은 자신의 능력과 업적은 무후만도 못할진데 어찌 감히 무후처럼 기도를 올리겠냐며 정중히 사양하는 일화가 전해진다.[247] 2013년에 《난중일기》에서 《삼국지연의》를 인용한 부분이 발견되었다.##

또한 《청성잡기(靑城雜記)》에서는 "충무공에게는 세상을 피해 은거한 도우(道友, 도 닦는 벗)가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몰랐지만 충무공만은 그를 알고 있어서, 큰 일이 있을 때면 매번 그와 상의하였다. 왜구가 침입하자 공은 사자를 통해 편지를 전하여 나랏일을 함께 도모하자고 부탁했다. 그는 늙은 부모가 있어 갈 수 없으니, 다만 나관중삼국지연의를 공에게 보내면서, “이 책을 숙독하면 일을 충분히 이룰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공은 여기에서 효험을 얻은 것이 많았다."는 글귀가 발견되었다.[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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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로마자로 표기할 시 현행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을 따르면 'I Sunsin', 매큔-라이샤워 표기법을 따르면 'I(Yi) Sun-sin'이다. 관습을 고려해 일반적으로 성씨는 Yi로 표기한다.[2] 장우성 화백의 1953년작 조복좌상 영정으로, 현충사에 소장되어 있다. 1973년 정부에서 표준영정으로 지정하였다. 이순신의 얼굴을 직접 보고 그린 것이 확실한 초상화는 현재 없기에 현재 전하는 초상화나 동상에 묘사된 이순신의 얼굴은 전부 상상한 것이다. 이 영정은 류성룡징비록에서 이순신을 일컬어 '용모가 단아하고 정갈하였다(容貌雅飭)'고 묘사한 것에 근거하여 그린 것이지만, 복장이 19세기의 것으로 고증오류가 있으며 작가의 친일논란도 있어 표준영정 해제가 추진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이순신/용모' 문서의 표준영정 논란 단락에 나온다.[3] <서경書經>에서 순 임금이 우 임금을 지목하며, "오직 너(汝)여야 (세상을) 화평(諧)케 하리라"(제왈무帝曰毋 유여해汝諧)고 말한 대목에서 추려 따왔다. 성웅의 휘가 "순(舜)임금 같은 성군을 모시는 신하(臣)", 또는 "신하로서 순임금처럼 영걸"이라는 점에서 이름자와 상보적이며, 이는 조선 시대에선 보편적인 작명법이었다. 또한, 이순신 장군의 행장으로 봐도 매우 알맞다고 할 만하다. 공의 어머니 초계 변씨가 지어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관련 내용[4] 당시 유럽에서 사용하던 율리우스력으로는 4월 18일. 그레고리력은 교황 그레고리오 13세가 1582년에 개력했으므로 이순신이 태어날 당시에도 아직 그레고리우스력(그레고리력)이 존재하지 않았다.[5] 인현동1가 31-2번지.[6] 1596년 경상좌도와 경상우도가 경상도로 합쳐졌다.[7] 둔전을 통해 얻은 작물, 수산물, 소금, 질그릇, 종이 등을 생산해서 팔았고 자신이 직접 농사나 미역 채취에 함께하기도 했다 한다. 그리하여 수개월 만에 군량을 비축하고, 옷감 등의 제작을 위해 목화나 삼을 사들이기도 했다. #[8] 역경과 시련을 극복하여 위인의 반열에 오른 인물들이 많으나, 이순신과 같이 전방위적으로 수많은 어려움을 당하면서도 이를 이겨내고 업적을 이룬 위인은 이순신 외에는 고려 현종 정도가 아니면 매우 찾기 어렵고, 없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독보적인 인물이다. 그렇기에 내적, 외적인 열세와 끝없는 고난을 극복하고 대업을 이뤄낸 이순신은 그 어느 위인들보다 더 그 존재가 돋보인다.[9] 애초에 한국에서 이 수사는 이순신만을 위해서 사용된다. 이해가 안간다면 한국 사람들이 이순신 말고 다른 위인을 성웅이라고 부르는 적이 있는가 생각해보자.[10] 위의 한국갤럽 조사만 보아도 이순신과 세종대왕이 각각 1, 2위를 차지하고 있다. 물론 세종이 1위를 차지한 다른 설문조사들도 많고 확실한 건 둘 중 누구도 3위로 떨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둘 모두 성이 씨이고 서울에서 태어났다.[11] 봉사 시절에 서익이 병조정랑이었는데 그가 친구를 훈련원 참군에 추천했다가 거절하면서 미움을 샀다.[12] 일찍이 이순신이 병력 증원을 요청했다가 자신이 거절했던 건이 들통날까 두려워서였다고도 한다.[13] 선조는 도덕성이 부족했지만 머리는 비상했던 인물이었고 전쟁 전까지 이순신을 고속승진시킨 장본인이었던데다 개전 이후 이순신의 활동상도 모르지 않았을 터인데 이때 이순신에게 죽임이라는 생각 짧은 처분을 밀어붙였다는 것은 뜻밖의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핍박은 둘째쳐도 이 정도의 능력자는 죽이기는 아깝다는 생각을 못 했다는 것.[14] 김유신 문서에도 서술되어 있듯이, 김유신도 뛰어난 영웅인데도 사람을 초월한 행적을 보여온 이순신과 비교하면 현실적인 영웅이라는 서술이 있을 정도이다. 그리고 김유신에 관한 유일한 기록인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은 삼국사기의 저자인 김부식이 열전을 쓰기 위해 참고할 삼국시대 당시의 기록이 부족했던 탓에 김유신의 후손이 쓴 김유신 행장록 원본 총 10권 중에서 내용을 추려서 옮긴 것이다. 그 때문에 실제 역사와 교차검증을 하게 되면 맞지 않는 경우도 발생한다. 김유신 열전에서는 김유신이 전투에 나갔다 하면 매번 승리를 거두고 돌아왔다고 묘사되지만 실제 당시의 신라는 오히려 수도 서라벌까지 적국에 위협을 당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순신의 경우에는 비교적 근대의 일이고 조선왕조실록, 난중일기 같은 풍부한 조선 측 기록과 일본 측 기록들을 통해 교차검증이 된 것도 많아서 사실로 인정된다.[15] 물론 울돌목은 좁았기에 병목 현상이 발생해 133척 전부가 싸울 수 있던 건 아니다. 문제는 그렇다고 해도 울돌목이 배가 1척씩만 드나들 수 있는 구역인 것도 아니었고 설령 그렇다고 해도 기술이나 화력이 압도적인 격차를 보인 것도 아닌데 대장선 1척이 적군을 죄다 두들겨 팬 건 보기 드문 일이다.[16] 현재 일본에서는 당연히 이순신을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 게다가 2012년 아베 신조 정권이 장기 집권하면서 일본 사회에서 혐한이 점차 강해지자 이순신을 무슨 전쟁 범죄자 취급하는 몰지각한 일본인들도 늘어나고 있다. 한 예로 한국 해군이 수자기를 달자 자위대에서 "이순신을 연상시킨다"며 항의한 일이나 2018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이순신의 초상이 들어간 헬멧을 쓴 아이스하키 선수한테 항의하여 쓰지 못하게 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17] 아무리 찾아도 부정축재 기록은 전혀 없다.[18] 대표적으로 명량 대첩 때 자신의 공로를 안위에게 몰아준 것이 있는데 그 덕에 안위는 초고속 승진을 하게 된다.[19] 실제로 이순신이 지휘하던 조선 수군은 전투 중 사상자보다 군율 위반으로 인한 처형자가 더 많았다.[20] 다만 일선 장수가 아닌 장군으로 보면 지나치게 올곧은 성격 탓에 정치 감각이 떨어지고, 자기 휘하의 과거시험은 자기가 치르겠다는 등 인사권에 욕심을 냈다고 의심을 살 수 있는 행동을 한 부분이 있다. 하지만 본인의 아들들이 무과 등과할 성적이 되었음에도 합격하지 못했다(조선 시대엔 상피제도가 있었다). 헌데 그 인사권이 구별되지 않은 조선 시대에서는 그거야말로 억지일 따름이다. 그리고 이순신이 명군 장수들을 어떻게 상대했는지를 보면 알겠지만 조정과 조율할 능력이 없었다기 보다는 안 했다는 것에 가깝다는 말이 있는데, 그 명나라 군대보다도 현실성이 떨어지는 조선 조정이 이순신의 제의를 대놓고 무시한 것이 더 크다. 집중적으로 전선만 생각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이순신을 보호해주고 밀어주었다는 선조 입장이란 변명으로 쓴다면, 의심과 배신감이란 주제넘는 망상이 선조의 정신을 장악했을 것이며, 정부 행정력 확보 측면에서는 능력도 없는 주제에 부정적인 영향을 준 사항이라 망상하며 억지를 부리는 것이다.[21] 징비록에 기록된 어린 시절 중에 "자기 뜻에 맞지 않는 자가 있으면 그 눈을 쏘려고 하여"라는 대목 정도?[22] 한자는 '있을 유' 이지만 옛 한자 문법으로 말을 시작할 때 관용적으로 붙이는 글자로 영어로 치면 'the' 정도에 해당한다. 단순 문법으로 중국만 쓰라는 법은 없고 '有朝鮮' 등으로 쓸 수 있으며, 고려가 금석문에 '有高麗'를 많이 썼다.[23] 추증받은 품계와 직위. 이순신에 대한 추증은 하도 여러 번 이루어져, 최종판이라 볼 수 있는 충무공 묘표를 따른다.[24] 직위가 아니라 말 그대로 직위들을 겸했다는 뜻으로 사용된다.[25] 시호란 뜻이다.[논란] 최초 기록은 실록이다. 정조 38권, 17년 7월 21일(임자) 첫 번째 기사. 명나라에서 도독 벼슬은 '정1품'이다. 다만, 이와 관련하여 실제로는 명 도독직이 수여된 것이 아니라는 논란이 있는데, 정작 수여를 한 명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명사(明史)와 명실록(明實錄)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충렬사에 소장된 도독인(印)의 글씨체도 다른 명나라 도독인의 글씨체와 전혀 다르다.연구 결과 현대 학자들도 여러 의견이 상충되고 있으며, 명확한 진실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보통 벼슬을 제수할 때는 현재의 계급과 보직에 해당하는 산직과 실직이 주어지게 되는데, 이 '수군 도독'이라는 벼슬은 보직에만 해당하고 '대광보국숭록대부'나 '특진보국삼중대광'과 같은 산계 즉 계급이 없다. 산직이 없이 실직만 가지고 있는 벼슬아치는 없기 때문에, 즉 계급장 없이 군단장을 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기 때문에... 무튼 해당 사항에 대해서는 이순신/논란 문서로.[26] 선무공신은 임진왜란에서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내려졌는데, 그중 1등급이 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공신이다. 한 등급이 낮아지면 두 글자씩 뺀다. 1등 공신을 받은 사람은 딱 3명인데, 이순신, 권율 그리고 원균이다. 심지어 선조는 조정 신료들이 탐탁지 않게 여김에도 불구하고 아득바득 우겨서 원균을 상기 등급에 봉한 반면, 이순신을 최고 등급 공신으로 봉하는 것에 대해서는 굉장히 껄끄러워 하는 기색을 보였다. 하지만 이미 공이 천하를 덮었고, 아무리 가리려 해도 가릴 수 없었기에 당연히 공신에 책봉되고 그것도 으뜸인 원훈으로 봉해진다. 공신 책봉 과정에서 선조가 보여준 모습은 이순신 장군에 대한 질투와 공포가 얼마나 막장까지 치달아 있었는지 잘 알 수 있는 부분이다.[27] 정1품의 품계. 그것도 같은 정1품인 보국숭록대부보다 상위 품계이다. 조선에서는 삼정승 및 각부 영사만 이 품계를 가지고 있었다.[28] 임진왜란 종전 직후에는 우의정, 그 후에 선무공신에 봉하며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영의정으로는 정조 때 가증. 이때 정조가 말하길, "충무공이 돌아가신 이래로 아직까지 영의정에 봉하지 않은 것은 잘못된 일이다." 과연 조선 시대 충무공 1등 팬이라고 할 만하다.[29] 풀어쓰면 영견연, 영홍문관사, 영예문관사, 영춘추관사, 영관상감사이다. 영의정이 당연직으로 겸직하는 관직들이라 여기 같이 붙었다. 영의정이 겸직하는 관직 중에 세자시강원의 세자사(世子師)도 있지만 무관인지라 빠진 듯하다. 같은 품계를 추증받은 권율은 문관 출신이라 그런지 세자사가 같이 추증되었다. 이순신이 사후 받은 현대식 정의의 직위는 수군 도독, 영의정, 2가지다. 다른 영경연, 영홍문관사, 영예문관사, 영춘추관사, 영관상감사는 영의정이 오르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명예직들이다.[30] 덕풍 지역의 가신(家臣), 즉 부원군으로 봉해진 것.[31] 역대 임금이나 공신들에게 내리는 이름이다. 문반은 '文', 무반은 '忠'으로 시작하는 시호가 가장 격이 높다.[32] 행수법(行守法)에 따라 붙은 것이 아니고, 사후 증직이 되었을 경우 살아 있을 때 지냈던 관작 앞에 붙인다. 행수법을 쓸 경우 품계가 아니라 실무직 앞에 붙어 '정헌대부 행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야 한다.[33] 정2품의 품계로, 고려와 마찬가지로 조선문반우대를 보여준 예시로서 고위직을 문반이 장악하고 통제하기에 용이하고 군사 분야에서도 군 고위직에 문반들을 임명하는 것에 이상이 없게 하기 위한 장치다. 무반도 병마절도사가 되려면 종2품 가의대부 / 가선대부를 받아야만 한다. 무반 품계는 정3품 당상관인 절충장군이 최고이고, 그 이상으로 가려면 문반 테크를 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순신이 정유년 파직되기 전 품계는 정2품 상계인 정헌대부였다. 그러나 이후 이순신이 다시 복직될 때 품계는 정3품 절충장군인데 이는 선조가 "내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라며 겉으로는 사과를 하면서도, 한편으론 이순신에게 엿을 선사한 것이다. 오늘날 육군으로 치면 대장(진) 군사령관에게 반란죄 누명을 씌워 남영동 분실로 끌고가 물 고문하고 이등병으로 강등시킨 뒤 상황이 급해지니깐 다시 군사령관으로 복직시키면서 계급은 투스타로 준 격이다. 명량 해전의 기적 같은 대첩 이후에도 선조는 이순신의 품계를 올려주는 것을 꺼렸다. 1년 전만 해도 정헌대부의 품계를 받은 분이었기 때문에 그냥 기존의 품계를 돌려주면 되지만 선조는 끝까지 버틴다. 결국 명나라 경리 양호나 군문 형개 등이 끈질기게 선조를 압박하며 "이순신 장군의 벼슬을 올려주라"고 조르자 그제서야 정헌대부의 품계를 돌려주는 천하제일의 찌질함을 선보인다.[34] 이순신이 생전 받은 직위를 현대식으로 옮겨보면 직속 함대사령관해군작전사령관해군참모총장이라고 할 수 있다. 삼도수군통제사가 현대의 해군참모총장 개념이 아니라는 주장이 있는데 사실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긴 하다. 당시 편제를 봐도 각 함대의 사령(경상 좌/우수사, 전라 좌/우수사, 충청수사)이 각각 따로 있는 상태에서 5명의 수사(水使)의 총사령을 맡는 직책이며(이외 다른 수영은 삼도수군통어사가 지휘한다.) 수사가 삼도수군통제사보다 한 직급 아래(수사는 정3품, 삼도수군통제사는 종2품)라는 걸 감안하면 더욱더 해군참모총장보다는 해군작전사령관에 비유하는 게 맞는다. 현대 대한민국 해군해군본부가 아닌 해군작전사령부에 각 함대사령부와 작전전단의 지휘권이 있다. 다만 삼도수군통제사는 현대로 비유하면 군령권(작전권)과 군정권(작전 이외 교육, 인사, 기술행정)을 모두 가지고 있으므로 군정권을 가지는 해군참모총장이 군령권을 담당하는 해군작전사령관까지 겸임하는 경우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35] 실제로 대한민국의 해군참모총장은 대장 계급으로 장관급의 의전을 받는다. 그런데 조선 후기의 관직 체계상 통제사는 종2품직으로 차관급이며, 이순신이 칠전량 패전 이후 복귀할 때에는 정3품직으로 어쩔수 없는 전시 상황에 발탁된 것이지, 잘못된 모함에 대한 해결을 받지 못한 채 있었다. 다만, 삼도수군통제사 직이 만들어 졌을 때, 이미 이순신은 국방부장관이라 할 수 있는, 병조판서와 동급인 정2품 상계 정헌대부의 품계였고, 또한 일시 파직으로 인해 몰수된 정2품 품계를 명량 해전 이후 명나라 경리 양호의 압박 때문에 선조가 돌려 주었으므로, 현대에 빗대봤을 때, 대장 계급으로 해군참모총장을 역임했다 봐도 무리는 없다. 게다가 현재 국군을 기준으로 봐도 비록 장관급 대우를 받긴 하지만 해군참모총장은 엄연히 장관인 국방부장관 아래다. 삼도수군통제사가 국방부장관 격인 병조판서의 바로 아래인 종2품이라는 걸 감안하면 종2품이더라도 현대의 해군참모총장으로 봐도 별 무리가 없다.[36] 애초에 조선시대와 현대의 관직과 사후 추증을 정확히 대응하여 논할 수는 없다. 하지만 충무공의 사후 당시 충무공에 대한 위상이나 현재 대한민국에서 이순신에 대한 국민감정을 모두 고려해도 이러한 훈장이 무리라고 볼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사후에 어떠한 대접으로도 이순신의 업적과 희생을 온전히 아우르긴 힘들다고 보는 편이 적절하다.[37] 친왕급으로서 당시 선조와 동일한 품계다. 다만 실제 의전에서 황제의 친족인 친왕이나 제제후국왕 중 제일인 조선국왕과는 비교할 수 없다. 과거에는 친왕급이라는 데 착안하여 미 부통령직이라고 써놨는데 명 관직 체계에서 부통령에 비견할 만한 관직은 없으며 친왕 역시 부통령과는 다르다.[38] 다만 동양 관직에서 최고직은 실제로는 비워 놓은 적도 있었던 점, 영의정이 아니더라도 좌의정만 있어도 의정부 운영이 가능한 점을 생각해보면 국무총리=영의정은 아니다. 삼정승이 합의해 국무총리직을 수행한 셈이다.[39] 오늘날로 치면 국방부 장차관을 장교라고 부르는 꼴이다.[40]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초기에 통제사영감으로 불리다가 이후 임진왜란이 전개되면서 장군으로 호칭히 바뀐다.[41] 서애 류성룡함의 함명 결정 문제만 보면 '해군의 자존심 문제'라는 건 농담만은 아니다.[42] e.g. Admiral Nelson(넬슨 제독).[43] 예) 저 아이 힘이 좋은 게 장군감이다. 또한 반쯤 조롱격이지만 미국 총기난사의 범인인 조승희를 장군이라 칭하기도 한다.[44] 북한에서도 그들의 영도자를 무어라 호칭하는지 생각해보라.[45] 전근대 시기의 인물에게 근현대 해군의 직함 'admiral'의 일본식 한자어인 제독이라 칭하는 것도 어색하다.[46] 해당 검은 현재 현충사에 보관되어 있다.#[47] 한 곡조의 풀잎피리 소리라는 설과, 일본 피리 소리라는 설이 있다.[48] 원문: "임진년부터 5~6년간 적이 감히 호서호남으로 직공하지 못한 것은 수군이 그 길을 누르고 있어서입니다. 지금 신에게 아직 12척 전선이 있사오니(尙有十二 상유십이) 죽을 힘을 내어 막아 싸우면 이길 수 있습니다. 지금 만약 수군을 모두 폐한다면 이는 적들이 다행으로 여기는 바로서, 이로 말미암아 호서를 거쳐 한강에 다다를 것이니 소신이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전선이 비록 적으나, 미천한 신이 아직 죽지 않았으니(微臣不死 미신불사) 적들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죽을 힘을 다해 적을 막겠다는 필승의 신념과 함께, 수군을 폐하면 적이 즉시 서울까지 갈 수 있다고 선조의 경각심을 일깨우고 있다. 이 문구는 대한민국 해군의 큰 가치로서 지금 이 순간에도 대한민국 해군의 가슴속에 살아있으며, 대한민국 해군 신병교육소에도 적혀있다.[49] 이순신 만화를 그리고 있는 미국인 만화가 온리 콤판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이순신의 명대사로 이걸 꼽았다.[50] 명량 해전 전날인 1597년 9월 15일.[51] 많은 사람들이 흔히 "적에게 알리지 말라"라고 알고 있지만, 이는 틀린 것이다. 보다시피 이 유언 중에 "적에게"라는 말은 한글이든 한자든 단 한 글자도 적혀 있지 않으며, 후세 사람들이 전쟁의 분위기에 맞추어 추가한 것으로 보인다. 전장에서 적에게 아군 지휘관의 죽음을 알리면 안 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며, 꼭 지휘관뿐만 아니더라도 부상자 발생, 포탄 및 보급품 잔여량 등등 아군의 정보는 그 중요성을 떠나서 당연히 적에게 알리면 안 된다. 다만, 내용 자체는 적에게 알리지 마라는 내용이 맞다. 자신의 죽음이 알려짐 = 아군 수군들의 사기가 하락함 = 적이 자신의 죽음을 눈치채고 사기가 증가할 수 있으니 아군에게(=적에게) 죽음을 알리지 마라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내 죽음은 승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니 적을 물리치는 데 집중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어 "적에게"란 표현이 빠진 원문이 더 비장하다고 느끼기도 한다.[52] 이순신 장군의 조카.[53] 정조 때 편찬된 이충무공전서 원문이 많고, 초고본은 원문은 매우 드물다. 대신 초고본 한글 번역문은 꽤 많은 편.[54] 원문 상에는 도적 적자가 없지만 주어를 넣어서 의미를 이해한다. 한문에서는 주어를 자주 생략하기 때문이다.[55] 둘째 형 요신은 류성룡과 친구 사이다.[56] 추가로 "아이 나이가 50살이 지나면 북방에서 대장이 될 것이다"라는 말도 했다고 한다.[57] 더러는 스스로 관직을 버렸다는 묘사도 있다.[58] 이와 함께 이순신이 중인 출신임에도 삼도수군통제사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라는 낭설도 같이 퍼졌는데 이순신의 본가인 덕수 이씨는 엄연한 양반 가문이다. 그러므로 이순신 역시 양반이 맞다.[59] 누명을 벗고 명예를 회복하는 것.[60] 김육은 현종비 명성왕후 김씨의 친할아버지이다.[61] 김종래라는 작가가 쓴 『칭기스칸의 리더십 혁명』이라는 책의 서문에 나오는 내용이다. 근데 이 내용은 실제 칭기즈 칸이 한 말이 아니라, "칭기즈 칸이 이랬으니 절망하지 말아라"라는 의도로 작가가 만든 저술한 내용이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실제 그렇게 말한 것처럼 되었고, 김종래 작가도 나중에 이게 돌고 돌아서 누가 실제 어록이라며 소개해주는 바람에 황당해했다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칭기즈 칸 문서로.[62] 민선6기 보성군수가 보성과 이순신이 연관이 많다면서 이순신을 밀어주기 시작했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이것이다. 근데 정작 조선 시대에는 고을 지방관을 반드시 그 고을 사람이 아닌 외지인으로 임명하는 상피제를 실시했기 때문에 방진이 보성 사람일 리가 없다.[63] 당시 병조판서였던 이준경이 예전에 자신의 부하였던 방진에게 이순신을 소개해주었다라는 말이 있는데, 전혀 아니다. 같은 온양 내에 존재하던 집안들끼리 모른다는 것이 말이 된다고 보는가?[64] 방진이 사망한 다음 온양의 집과 재산은 전부 이순신이 상속받았다. 현재 충남 아산의 현충사 이순신 고택이 당시 방진의 집이었다.[65] 버드나무의 껍질이나 잎은 해열, 진통에 효능이 있다. 버드나무에서 나오는 성분으로 만들어낸 약품이 바로 그 유명한 아스피린. 다만 이건 먹었을 때 효과가 나는 것이지 몸에 닿는다고 약 성분이 흘러들어오지는 않는다. 그러니 이걸로 다리를 묶어봐야 그저 다리를 고정했을 뿐, 딱히 진통 효과는 없었을 것이다.[66] 음력 1576년 3월 22일, 출처 # [67] 병과에서 4등을 했다. 한편 이 4년간의 공백을 소재로 다룬 영화가 박중훈이 이순신 역할을 맡은 천군이다. 일각에선 시험에 늦게 합격했다고 하지만 이는 잘못된 것이다. 이때 이순신을 포함한 합격자들의 평균 연령대가 34세이고, 가장 나이가 어린 합격자는 23세, 가장 나이가 많은 합격자는 52세였으며, 이순신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 17명이었다. 따라서 그는 늦게 합격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평균 연령대보다 조금 일찍 합격한 것이 된다. 다만 여기서 감안해야 할 것은 급제한다고 관직을 얻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장원을 제외하면 실직은 인사 담당관이 뽑아줘야 얻을 수 있는데, 특히 무관의 경우 한창 나이를 지났다고 생각될 경우 급제하더라도 실직에 들어가기가 쉽지 않다. 여기에 다른 에피소드가 있는데, 무과 시험을 치를 때 <무경>(武經)을 강하다가 황석공(黃石公)이란 대목에 이르자 시험관이 이순신에게 물었다. "장량이 적송자(赤松子)를 따라 놀았다고 했는데, 과연 장량이 죽지 않았을까?" 이에 이순신은 "사람이 나면 반드시 죽는 것이 이치요, 통감강목에 유후(留侯) 장량이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어찌 신선을 따라 죽지 않았을 리가 있겠습니까? 다만 그것은 꾸며진 얘기에 지나지 않습니다."라 하였다. 당시 무인들은 학문을 소홀히 하였던 시대라 시험관들은 "무인이 어찌 그런 일까지 잘 할 수 있느냐?"라며 탄복했다고 한다.[68] 당시 근무지가 해미읍성이다.[69] 병기의 수효, 관리 상태 등을 점검하는 직위.[70] 성박에게 얘기를 듣고 이순신을 책잡으려고 했는데, 그 중 일화로는 이순신의 담당부서에서 결석자가 확인되자 조정에 근무태만으로 장계를 쓰려고 했다. 하지만 이순신의 부서가 오히려 결석자가 가장 적게 나온 것이라는 것이 뒤늦게 확인되자 얼른 장계를 철회했다는 이야기도 있다.[71]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이런 과거 시험 이후부터 여기까지의 14년의 일대기가 통편집 + 내레이션화되는 만행이 발생했다.[72] 1860년 베이징 조약 이후 러시아가 불법 점거하여 현재 러시아 영토이다. 추후 통일이 되면 영토 분쟁의 가능성이 높은 곳이다.[73] 이일이 패전한 책임을 물어 이순신을 출두시켰을 때, 이순신은 "저의 지원 요청을 거듭 묵살하신 것은 북병사 어른이 아닙니까? 또 싸우다 전사한 이는 있을지언정, 오랑캐를 물리치고 백성들도 구해내었으니, 제가 지원을 요청한 문서를 전하께 올리면 북병사께서도 문책을 면하지 못하실 것입니다."라며 논리정연하게 이일에게 항변했다.[74] 백의종군 자체는 보직해임 정도의 형벌로 장군을 병으로 강등시키는 것이 아니다. 장형을 받기는 했지만, 왕이 직접 이런 식으로 전교를 했다면 그것도 형식적인 것에 그쳤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불과 3달만에 전투에 복귀하는 것으로 보아 매를 세게 쳤을 가능성은 낮다.[75] 토벌군은 전사자 없이 여진족 전투원 380명을 죽이고 여진 가옥 200여 가구를 불태웠다.[76] 만포진의 병마첨절제사는 특별히 당상관으로 임명하는 자리이다. 이 시점에서 이미 선조는 이순신을 당상관급 장수로 임명할 생각을 굳힌 듯.[77] 선조 22년(1589년) 1월 21일(기사) 1번째 기사 "비변사에서 무인을 불차채용한다고 하자 각 신료들이 올린 명단"을 보면 이산해, 정언신이 이순신을 불차채용 대상으로 천거했다.[78] 이후의 승진 속도도 비슷하다. 조광조는 그 뒤 6개월 만에 동지성균관사였던 종2품이 되었고 종2품은 삼도수군통제사의 품제와 같았다.(이 시기에 통제사는 임시직으로 품계가 있는 직위가 아니었다.) 그 후 4개월 뒤 정2품인 사헌부 대사헌이 되는데 이순신 역시 1년 뒤인 1592년 한산도 대첩을 계기로 정2품 상계 정헌대부까지 올라간다. 하지만 직책은 여전히 전라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로 정3품직이었다.[79] 여기서 전쟁을 확신했는데 왜 그렇게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냐는 의문을 가질 수 있는데, 당시 조선 조정에서는 대규모의 전면전까지는 예상하지 못하고 그저 좀 큰 왜구 무리의 침입 수준으로 예측했기 때문이다. 즉, 이제까지 그래왔듯이 연안에서 좀 심하게 노략질을 하려는 것이겠구나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유능한 장군을 경상도 쪽으로 보내지 않고 약탈이 잦았던 전라도로 보낸 것이며, 일본이 나라 전체를 집어삼키려고 하고 있다고까지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 것이다. 설령 전면전을 예측했다고 해도 200년간 큰 전쟁 없이 살아온 조선이 상상하는 '전면전'이 센코쿠 시대를 거친 일본의 '전면전'과 같을 수도 없고 일본 또한 내부적인 교통정리가 다 끝나지 않은 상황이었다. 결과적으로 유능한 장군이 전라도로 갔고, 무능한 자가 경상도로 갔지만, 경상도는 일본의 약탈 1순위 지역으로 가장 중요한 요충지였다. 따라서 당시에는 적당히 유능하다고 평가된 자들을 전라도와 경상도 해안 방위를 담당시켰다.[80] 순천 도호부, 흥양현, 광양현, 낙안군, 보성군.[81] 사도진 - 첨사, 여도진 - 만호, 녹도진 - 만호, 방답진 - 첨사, 발포진 - 만호[82] 육군 최초의 승전은 5월 16일 신각해유령 전투이다.[83] 서치 앤 디스트로이(Search & Destroy)라 불리는 전술로, 훗날 웨스트모얼랜드가 베트남에서 사용했던 개념이다.[84] 사실 왜군에 의해 부상을 입은 병사는 단 1명 뿐이었고, 나머지 2명은 수급을 탐낸 원균이 활을 쏘아대면서까지 전공을 가로채려다 좌수영 측에 부상자를 발생시킨 것이다.[85] 이때 이순신의 배가 적진 깊숙히 침투했다가 나대용, 이설 그리고 이순신 본인까지 조총을 맞아 큰 부상을 입었다.[86] 사실 이 때문에 조선은 하다못해 세금과 진상품도 조운선을 통해 수로로 조달했다. 단 수레가 안 쓰인 것은 아니다. 실록 기록을 보면 수운에서 받은 물자를 수레로 옮기기도 하고 함경도 등지에서 자주 쓰였다. 국가에서 지속적으로 관리하기도 하였다.관련 블로그[87]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 기타지마 만지 저 / 경인문화사 / 2008년 ,『이순신과 히데요시』 가다노 쓰기오 저 / 우석출판사 / 1999년[88] 이러한 이순신의 모습에 감동한 몇몇 백성들은 해상의병이 되어 전투에 직접 참전하거나, 지형이나 바닷물의 흐름을 알려주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89] 처음엔 원균을 시켜서 글을 짓게 하나 영 글이 마땅치 않았고 결국 아픈 몸을 추스려 직접 글을 짓는데 그 글이 또한 명문이다. “(전략) ‘너희 모든 병선들은 속히 각각 제 고장으로 돌아가고 일본 진영에 가까이 하여 트집을 일으키지 말도록 하라.’고 하였는데, 왜인들이 거제, 웅천, 김해, 동래 등지에 진을 치고 있는 바, 거기가 모두 우리 땅이거늘 우리더러 일본 진영에 가까이 가지 말라 하심은 무슨 말씀이며, 또 우리더러 ‘속히 제 고장으로 돌아가라.’고 하니, 제 고장이란 또한 어디있는 것인지 알 길이 없고 또 트집을 일으킨 자는 우리가 아닙니다.(후략)”[90] 일반 대중에는 잘 알려져있지 않은 사실이지만, 난중일기에는 권율, 이억기, 권준 등과 같은 당대의 무장들에 대해서도 안좋게 평가한 부분이 상당히 많다. 예를 들어 1595년 4월 30일자 일기에는 권율에 대해 "도원수가 근거없이 망령되게 고하는 일이 많다. (중략) 그런데도 원수의 자리에 둘수 있는 것인가" 라는 엄청난 디스도 등장한다.[91] 실록 기록을 살펴보면 가토의 도해 정보는 1월 1일에 처음 입수되었고 1월 11일에는 요시라가 왜 움직이지 않냐고 채근하는 내용이다.[92] 당시 교통 사정상 서울에서 한산도까지 가는 데 적어도 1주일은 잡아먹었다.[93] 가토를 잡으라고 하기 전에도 선조는 계속 반복적으로 이순신에게 나가 싸우라고 재촉했었다. 왜냐하면 조선에게 믿을만한 전력은 오직 수군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육군은 자주 패배하지만 수군은 족족 다 이기니까. 그런데 이순신은 하면 안 되는 전투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자주 명령을 거부했다. 즉, 명령불복종이 누적되다가 가토사건으로 선조가 마침내 폭발했다고 볼 수 있다. 선조뿐만 아니라 다른 조정 대신들도 이순신이 속임수가 많은 사람이라 전진하지 않는 것이라며 비난했다. (그런데 우의정조차 변호해주기 힘들 정도로 선조의 분노가 강하기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전쟁 중 수군이 전승 무패라는 전설적인 전과를 거둔 것은 이순신이 선조의 명령을 거부했기 때문이기도 하다.[94] 역대 사극 중에서도 잔인하기로 손꼽히는 고문 씬이다. 당장 나온 것만 주리틀기와 낙형, 채찍질이 무한반복되고 옆에 세팅해놓은 것들도 하나같이 끔찍한 것들이다. 심지어 마지막에는 윤두수가 잿물을 들이부으라는 드립까지 친다.[95] 예를 들면 죄인의 자복을 받기 위해 때리는 신장은 1회에 30대까지 규정되어 있고, 한 번 집행하면 3일 내에는 집행하지 못한다. 신장은 장형의 일부로 정강이를 때리는 것이다.[96] 영국의 뉴게이트 감옥과 같은 경우 해당 감옥이 사라지는 1900년대 초반까지도 매해 옥사하는 인원이 꽤나 나왔다.[97] 이순신은 난중일기에서 1595년에 원균이 배설과 교대할 때 원균이 교서에 숙배하지 않다가 억지로 행하자 무식하다며 깔 정도로 충성심이 강했는데, 백의종군 후에는 본인도 궁궐을 향해 절하는 예절인 망궐례를 하지 않는다. 이거 들키면 바로 탄핵당할 수도 있는 시대다. 선조에 대한 서운함, 배신감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어쩌면 그가 전란 후반부에는 왕이 아니라 나라와 백성을 위해서 전장에 섰다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98] 김훈의 칼의 노래에 나오는 독백을 드라마 대사로 차용했다.[99] 이순신이 더 애석해할 만한 일이라면, 당시에도 그 이후로도 이순신은 3년상을 치를 기회를 얻을 수 없었다. 앞서 보았겠지만 이순신은 아버지의 장례는 3년상으로 지냈다. 그런데 어머니의 장례는 3년상을 지낼 수 없었으니 심통했을 것이다.[100] 주력 전선 판옥선과 소수의 거북선, 후선과 협선 및 척후선 포함.[101] 조선 수군의 주 임무는 일본의 해적을 감시하고 임진왜란의 경우와 같이 일본의 정규군에 맞서는 것이기 때문에 조선에서는 해상 전력 대부분을 충청, 전라, 경상의 세 도에 집중시켜 놓았다. 다른 지역 해상 전력의 경우 수군 절도사 직위를 해당 지역의 관찰사나 병마 절도사가 겸임할 정도로 유명무실했다. 특히 경상우수영은 조선 수군의 가장 핵심전력이었다. 왜냐하면 경상좌수영은 바로 앞에 일본과 마주하고 거의가 동해안 지역이여서 그리 클 필요가 없었고, 전라우수영은 세곡선이 지나가는 곳으로 요충지이지만 비교적 먼 곳이었다. 충청수군은 예비대에 거의 가까웠으니, 남은 곳은 전라좌수영과 경상우수영인데, 담당 구역상 전라좌도는 왜구의 노략 대상지 중 하나이기 하지만 경상우도보다는 멀고, 훨씬 좁은 지역이었다.[102] 파직되기 전 정2품 상계 정헌대부였다. 정3품 절충장군까지는 당상관에 해당한다는 것이 그나마 위안.[103] 이순신은 파직 당시 국방부장관이라 할 수 있는 병조판서와 동일한 정2품 상계 정헌대부의 품계에 있었으므로, 지금으로 치면 장관급의 의전을 받는 대장 계급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무관계 품계는 종2품인 가정대부/가선대부가 최상위이다.[104] 배설은 탈영했고, 김억추는 명량 해전 당시에도 혼자 뒤에서 멀거니 지켜만 보다가 이후 육군으로 전근을 가버렸다. 그 이후 임명된 수사들(권준, 무의공 이순신, 안위 등)은 전부터 이순신 휘하에 있던 부장들이라 지휘 체계에 큰 혼선이 오지는 않았다. 하지만 생각해본다면 평소 부하들의 세세한 전공까지 모두 상소하여 상을 받게 했을 만큼 부하들에게 인격적 으로도 확실한 신임을 얻었던 이순신 이기에 가능했던 일이지 같은 계급인 이들이 3명이나 함께했던 전투인 용인 전투가 조선군의 참패로 끝난 걸 생각해보면 선조의 무책임한 잘못이다.[105] 원문은 "今臣戰船尙有十二 出死力拒戰則猶可爲也, 戰船雖寡 微臣不死則不敢侮我矣." "지금 신에게 아직 12척의 전선이 있사오니 죽을 힘을 다해 막아 싸우면 능히 대적할 방책이 있습니다. 전선이 비록 적지만 미천한 신이 죽지 아니했으니 적이 감히 우리를 가벼이 업신여기지 못할 것이옵니다."[106] 근데 선조가 엄청난 오판을 내린 것이, 수군을 폐지하면 일본 수군이 서해를 장악해 수도인 한성으로 오는 길이 제대로 열리게 된다. 게다가 전처럼 평안도로 가서 중국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게 된다. 결국 육지에서 고립되다가 그대로 자멸하는 결과만 낳게 될 뿐이다. 사실 이순신 아니었으면 명량은 졌기 때문에, 칠천량에서 수군이 다 작살난 시점에서 조선은 이미 치명타를 먹고 망했다고 봐도 좋았다. 이 상황에서 인간이 아닌 것 같은 근성과 집념으로 수군을 긁어모아서 명량을 이긴 이순신이 비정상인 것.[107] 당시 양력으로 보면 겨울에 접어들 때라서 조선 수군을 극도로 경계하던 왜군이 못 견디고 전라남도 서해안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명량해전의 목적은 이런 상황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108] 특히 이순신은 이 때 해로 통행첩을 발급했는데 당시 이순신에게 가장 큰 문제는 병력과 피난민이 몰려드니 군량 확보가 시급했는데 이 마당에 군량을 어떻게 모을지가 문제였다. 이에 이순신은 해로 통행첩을 발급해 발급받은 배만 인정하고 발급받지 않은 배는 간첩선이나 왜선으로 간주했다. 이러니 너도나도 통행첩을 발급받으려고 몰려왔는데 통행첩을 발급하는 대신 그 대가로 쌀을 내게 했고 곧 엄청난 군량이 모였다. 징비록에서도 이를 기록하며 간첩선 방지, 군량 확보, 해로 안전 보장 3가지를 동시에 이뤘다고 말했을 정도.[109] 진린은 조선으로 오기 이전에 명나라에서 도적을 여럿 때려잡고 승진을 거듭하는 등 군사를 다루는 데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단지 탐욕이 능력을 가리고도 남는다는 것이 문제였으며, 명나라 대신들도 능력 자체는 인정했지만 조정에 천거하기를 꺼렸을 정도였다. 징비록에서도 진린에 대해서 조정 신하들이 말렸는데도 아랑곳않고 조선인을 냅다 팼고 이 때문에 유성룡은 진린이 이순신에 합류하자 "이제 글렀다. 아무리 이순신이라도 진린같은 인간 만났으니 어쩌냐"는 식으로 말했다. 유성룡이 명나라 장수들의 못난 면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까기는 했지만 진린만은 따로 언급하고 한탄했을 정도니 얼마나 인식이 나빴는지 알 수 있다.[110] 역사적으로 군공을 증명할 수 있는 가장 큰 수단이 바로 수급(머리)이었는데, 멀리 파병 온 명나라 장수들 입장에서 이 수급은 상당히 중요한 목표였다. 이 때문에 일본군이 수급을 미끼로 명군을 매수하기도 했을 정도다. 이러한 이유로 이순신은 자신이 취한 수급들을 진린에게 넘겨주면서 그의 환심을 샀다. 여담으로 이순신은 항상 부하들에게 자신이 공을 전부 조정에 잘 보고할테니 수급에 너무 연연하지 말고 싸우라고 여러차례 당부한 바 있다. 원균은 이와 정반대로 전투 시 뻘짓만 하다 전투가 끝나면 갈고리로 시체만 모으는 것도 모자라 조선 민간인들을 죽이고 왜군의 수급이라고 거짓 보고하는 천인공노할 만행을 벌였다.[111] 세상을 주무르는 재주.[112] 하늘을 메울 정도의 공로.[113] 중국어로 '노야'는 우리말로 '나으리'에 해당하는 존칭이며, 이와 비슷한 '노불야'가 황태후에게 쓰는 극존칭이다. 그러니까 천자국의 장수가 자신보다 2살 어린 제후국의 관리를 아예 자기 상관으로 대우한 것이다. 이는 조선왕조실록에 전할 정도로 유명한 이야기다.[114] 당시 명군은 조선을 속국이라 하여 신하들은 물론 왕인 선조까지 무시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하지만 이순신의 명성과 업적은 임진년부터 자자했고, 특히나 조선 수군이 궤멸된 와중에 울돌목에서 기적의 승리를 일구고 결과적으로 수많은 명군의 목숨도 구해냈으니 이순신에 대한 명나라의 평가는 칭찬 일색이었다. 경리 양호를 비롯하여 군문 형개와 같은 고위직은 물론, 진린과 같은 일선에서 싸우는 명군 장수들에게도 이순신은 누구와 달리 인정을 받았다. 적국인 일본조차 이순신을 군신이라 여기며 두려워하거나, 심지어 존경과 감탄을 하는 사무라이들이 널렸을 정도였다. 이 점이 그 높으신 분이 더더욱 이순신을 질투하고 경계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된다. 명 조정에서 알 만한 사람은 아는 사실인, 나라를 버리고 귀순해서 요동에서 살겠다는 군주패배를 기록한 적 없이 모함으로 면직되었다 다시 전장으로 나아가 기적의 승리를 일군 장수간 대접이 다른 것은 지극히 당연한 상식이다. 이는 광해군에게도 비슷하게 적용되었다. 심지어 선조가 명량 해전의 전공을 두고 이순신에게 포상을 내리기를 주저하자 보다 못한 경리 양호가 원래 품계라도 돌려 주라고 계속 압박하여 이순신이 정2품 정헌대부로 복귀(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시 원래 품계가 아닌, 정3품 절충장군으로 임명되었다.)한 일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다.[115] 노량 해전 당시 조선군은 거북선이 없었기에 저 뒤에 보이는 거북선은 고증오류다.[116] 다른 명군과 달리 이들은 이순신 옆에 붙어서 전공을 나름대로 올리고 있었기 때문에, 악착같이 덤벼드는 일본군을 본 적 없었고 일본군에게 독이 올라 있지 않았다.[117] 실제로 노량 해전에서도 진린은 전사할뻔 했으니 이순신이 없었다면 진린은 큰 어려움에 처했을 것이다.[118] 애초 명 수군 함선의 열악함 때문에 조선 수군들도 이를 한심하게 여기고 전력에 거의 도움이 안 될 거라 판단해 없는 것보단 나으니 쪽수로 밀어보자는 게 이순신과 참모들의 분위기였다. 한편으로는 그 때문에 기함으로 쓰라며 판옥선 2척을 새로이 건조해 진린에게 하달하는데, 이 부분은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도 묘사되었다.[119] 1592년 한 해 전사자는 총 39명이고 부상자 162명이다. - 1967년, 이형석자 임진전란사 부표 1701쪽 ~ 1706쪽.[120] 임진장초 만력 20년. 1592년 5월 10일 계본.[121] 전라 좌도 수군 절도사 이순신, 군관 나대용.[122] 2차 출전 모든 전투 총합해서 전사 11명, 부상 47명.[123] 7월 6일 출전.[124] 할복 자살했다.[125] 8월 24일 출전.[126] 녹도 만호 정운 포함.[127] 함선이 128척이나 날라갔음에도 불구하고 전사자 수가 의외로 적은데, 당시 일본군은 해상으로 나오지 않고, 바다가 보이는 육상 진지에서 조선 수군을 상대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이순신도 더 많은 적함을 날려버리는 데 작전 목표를 두었다.[128] 교전이 총 5번 있었는데 이를 세분화해서 나누는 경우도 있다.[129] 정작 난중일기 5월 2일자에는 전투 기사가 없다.[130] 양측 다 교전이 아닌 탐색전 형식이라 사실상 피해가 양측 다 없었다. 이 해전에서는 조선 수군 모두가 겁을 먹고 나서지 못하자, 이순신의 대장선이 직접 선두에 서서 일본군을 몰아냈다.[131] 출처는 위키피디아. 16,607명 전사라는 말이 있는데 출처를 알 수 없다. 이 정도 피해면 조명 연합군은 전멸당한 거다. 그러나 절이도 해전이 저렇게 대규모 해전이 아니라는 주장이 더 설득력 있다. 적선 50여 척을 격파했다는 기록은 《선조수정실록》에서 나오는데, 《선조수정실록》은 전쟁이 끝나고 50년 뒤에 작성되었고, 이분의 행록에서도 절이도 해전을 소규모 해전으로 설명하고 있다.[132] 舜臣自領水軍 突入賊中 發火砲 燒五十餘隻 賊逐還 이순신이 수군을 지휘하여 일본 함대 속으로 돌진, 함포를 발사함으로써 50여 척을 불태움에 적군이 쫓겨 되돌아갔다.[133] 이순신의 단독 작전이 아닌 명나라 군과의 연합 전투다.[134] 이순신이 반대했지만 명나라 수군이 무리한 단독 작전을 하다 왜군에게 쫓기자 어쩔 수 없이 도와주는 과정에서 조선군이 입은 피해다.[135]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 가리포 첨사 이영남, 낙안 군수 박동룡, 흥양 현감 고득장, 명나라 수군 부총관 등자룡 등 포함.[136] 기록들에 따라 다른데, 확실한 건 전선 300척 ~ 500여 척 중 50여 척만 살아 돌아갔다는 것이다.[137] 이중 절반 이상은 왜교성 전투 당시 명나라의 지휘관이었던 진린이 단독 행동을 하다가 위험에 처하자 구하러 가느라 발생한 것이다.[138] 당시 해전의 개념은 함대 포격전의 양상을 띄기 보다는 상대 배에 빠르게 근접하여 도선하여 백병전을 벌이는, 지상전의 연장 형태에 가까웠다. 비단 아시아 뿐만 아니라 같은 시기인 스페인의 무적함대 또한 이런 방식을 사용했다.[139] 그래서 이순신은 최대 사거리에서 포격을 가해서 전열을 흐트려 놓은 후, 판옥선과 거북선을 돌격시키면서 일본의 함선을 들이박고, 도선해서 넘어가 싸우는 전술을 자주 보여주었다. 함대 포격이라는 세계사적으로도 이전에는 극히 드물었던 새로운 개념을 적극 활용한것은 맞지만 당시 스페인의 무적함대처럼 배를 들이박고 백병전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전술도 동시에 했다는것.[140] 물론 천시-지리-인화는 단순히 전략이 아니라 인생살이와 국가적인 문제지만 전쟁도 국가대계의 일부이므로.[141] 평시 달빛이 비추는 여부, 즉 달의 위상마저 전략전술 판단에 반영되었다는 점 자체가 이 감으로 때려맞추기도 절대 100% 운에 입각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달의 위상도 세세히 살피는 장수였기 때문에 이런 감으로 때려맞추는 발상도 가능했던 것이다. 무엇보다 그 시대에 월광은 적장이 역지사지 해보아도 기습 시 필히 살펴야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고려하지 않는 게 더 이상하다.[142] 육군과 수군을 통틀어서 전사자보다 병사자가 절대적으로 많은 건 그 시대 전쟁의 특징이지만 특히 이순신의 조선 수군은 그 정도가 심했다(?). 특히나 1594년 갑오년에 퍼진 역병으로 수군의 많은 수병들이 죽어나갔고, 수군 총 병력이 만 명 이하로 떨어지고 만다. 이에 노심초사한 이순신은 전력 공백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전사자 자체가 거의 없다시피 한 판에 병사자는 만 명을 넘는 수준이다. 전사자와 병사자 비가 1:100에 가까운 군대라니 최전선의 군대가 이렇다는 걸 현대인들 중에서 믿을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143] 사익을 챙기긴 고사하고 챙길 수 있는 기회마저 차버리는 일이 잦았다. 때문에 품계도 들쭉날쭉했고 아예 한량 신세가 되어버리는 일도 생겼다. 끽해봐야 수령이 되면서 자기 가족 뿐 아니라 조카들도 챙겨 내려간 것 정도인데 당시 조카들은 부모를 잃어 이순신이 돌봐주면 안 될 처지였고 이 때문에 이순신도 이걸로 파직되어야 한다면(당시 친척까지 달고 내려가는건 일정 수준을 넘는 건 금지되어 있었다. 이는 너무 많이 달고 내려가면 친척들이 수령을 내세워 제 배를 채웠기 때문) 파직당하겠지만 조카들을 버릴 순 없다고 하기도 했다. 그리고 지방수령직도 얼마 못했다. 주로 지방의 요충지 부대지휘관이나, 중앙의 하급관이었기 때문이다.[144] 정확히는 이순신의 독려를 받고.[145] 징비록에 따르면, 진린은 성격이 워낙 지랄같아서 유성룡도 "진린과 이순신이 같이 있게 될 것"이라고 전해듣자 "우린 이제 망했다!"고 할 정도였다. 이순신의 대쪽 같은 성격에 진린 같은 장수랑 같이 있다면 불화만 일으키느라 제대로 일본군을 상대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순신은 진린을 어떻게든 회유시키려고 온화한 태도로 진린을 대했으며 전쟁터에서 얻은 수급도 상당수를 진린에게 선물로 보내는 등 진린과의 유대를 쌓아가는데 성공했고 진린은 이순신의 곧은 성품에 탄복하게 된다.[146] 심리학이나 경영 분야에서는 이것을 가장 완벽한 형태의 카리스마적 리더십으로 연결하여 설명한다.[147] 경영학에서 카리스마의 선제조건은 지휘받는 사람들의 절대적인 신뢰에 있다. 부하들은 이순신의 지시만을 따른다면 최악의 상황에서도 살아남을수 있고, 설사 살아남지 못하더라도 승리는 할 수 있어 개죽음은 되지 않는다는 신뢰가 이미 확고했기에 이순신의 명령에는 의문을 갖지 않고 따를 수 있었던 것이다.[148] 일본군은 수적인 우세와 기동력, 뛰어난 근접 전투력이 장점이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항상 적을 포위하거나 좁은 곳으로 몰아넣어 자중지란을 유도했고, 덕분에 일본 수군의 장점은 봉쇄된 반면 조선 수군의 화력과 내구성같은 장점은 극대화되었다. 사실 일본군도 정보 수집을 도외시한건 아니었는데 이미 전쟁 전부터 각지에 첩자를 보내 현지 사정 및 지도를 만드는 등의 일을 해왔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그들보다 몇 수 앞을 내다보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패할 수밖에 없었다.[149] 우리가 잘 아는 명량 해전도 그 공을 안위의 것으로 돌렸을 정도고, 안위는 이 덕에 승진했다. 사실 안위도 공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홀로 대장선을 이끌고 왜군을 상대로 무쌍을 찍었던 이순신과 비교한다면야...[150] 실제로 일본에 이순신의 사당이 있다.[151] 신기한 사실은 전쟁 전 전쟁에 대한 대응 예상은 조선이나 일본이나 똑같았다. 조선에서는 "우린 해전 못함. 육전으로 승부를 내자."(조선전기 왜란들에서 왜구들은 어려움 없이 상륙해서 해변을 약탈하면 육군이 가서 몰아냈다. 고려말에도 마찬가지로 최무선의 화약을 이용한 것을 제외하고 해전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는 편이다.)였고 일본은 "우린 육전이고 해전이고 잘한다. 조선 수군? 걔네가 뭔데?" 수준이었다. 결국 조선이나 일본이나 조선 수군은 안중에도 없었던 것. 그런데 그 양쪽 모두에서 아웃 오브 안중이던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을 때려잡은 것이다.[152] 일본군이 달라붙든, 조선군이 달라붙든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153] 비교적 큰 규모의 일본과의 전투는 삼포왜란, 을묘왜변 정도로 각각 100척, 70척 규모로 결코 작은 숫자는 아니었으나 이들 모두 각각 대마도측과 연계된 왜인, 왜구로 국가 대 국가 규모는 아니었다.[154] 일본측에서도 초창기 조선의 경상 좌수영, 우수영에서의 형편없는 모습 때문인지 조선 수군에 큰 신경을 쓰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애초 조선 수군의 첫 승인 옥포 해전도 일본군이 약탈하던걸 조선 수군이 발견하고는 박살낸거다.[155] 일례로 최후의 작전의 대가인 에리히 폰 만슈타인도 1차 대전 참전과 라팔로 조약 기간의 연습 등의 경험을 토대로 2차대전의 활약을 펼칠 수 있었으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도 사관학교와 1차 대불동맹과의 교전 등을 통해서 성장해 나갔으며, 칭기즈 칸도 초창기 시절의 군사적 패배와 경험 등으로 육지에서 승전을 이어갔다. 알렉산드로스 대왕도 부친 필리포스 2세가 이룩한 군사혁신과 유리한 정치구도를 발판으로 군사적 업적을 이루었다. 육군에서 타 군으로 이전하여 전공을 거둔 헨리 햅 아놀드나 밀히도 직전 시기의 신 병과인 공군을 직접 경험하고 공군으로 간 사람들이다.[156] 설상가상 그 중 한 명은 왕(선조)였다. 당시로썬 개인이 아무리 노력해도 도저히 맞설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157] 이열 또는 이울로 불린다.[158] 李葂, 1577 ~ 1597. 부친을 따라 종군한 형을 대신해 고향 아산에서 가족들과 살고 있었는데, 명량대첩 직후 이순신 일가를 해하려 온 일본군에 맞서다 죽었다. 아직 어려서인지 결혼하지 않아 자녀가 없었다. 난중일기에서는 이 충무공이 2번째 백의종군 중 모친의 부고와 연이어 3남의 죽음을 전해듣고 비통해한다. 아산 현충사 권역에 묘가 있다.[159] 이정의 조부인 이거(?~1502)가 정3품 당상관을 역임했다. 이순신에게 증조부가 되는 이거는 연산군의 세자 시절 스승이었고 강직한 간쟁으로 이름이 높아 '호랑이 장령'이라는 별명이 있었다고 한다.[160] 창신교위는 무관품계이다. 이는 조부 이거의 공적을 생각해서 주는 것으로 무반직을 역임한 것으로 보인다.[161] '자당'은 상대방의 어머니를 높여부르는 호칭이다. 말 그대로 이순신 어머니가 기거한 곳이라는 뜻이다.[162] 《난중일기》, 1594년 1월 12일[163] 고기 없이는 식사를 안하는 아들 세종이 상중이라 고기를 먹지 않다가 건강이 나빠진 것을 체험한 아들바라기인 태종이, 죽기전에 "주상에게 고기를 잡숩게하라"고 특별히 유명을 내린 적이 있다. 이렇게 특별한 예가 아닌 이상 유학에서 忠보다는 孝를 중시하는 구조에서 이러한 행동은 욕 먹으라고 하는 짓이었다.(忠은 孝가 커지면서 나타나는 것으로 '修身齊家治國平天下'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164] 출처: 문집인 《서애집(西厓集)》[165] 실제 살던 곳도 가까웠다. 이순신이 성장한 곳은 염치읍 백암리 현, 현충사 일대이며, 홍가신은 이웃한 염치읍 대동리였다.[166] 이순신이 친지들에게 보낸 편지들을 모은 글.[167] 두 형이 함께 손을 잡고 울면서 "네가 장례도 못 치르고 이 천리 길을 떠나와 있으니 이제 누가 모든 일을 주장하겠느냐. 통곡한들 도리가 있겠느냐"하고 슬퍼했다고 한다. 이순신은 이 다음 문장에 '형님들이 이 먼 곳까지 혼령으로서 따라와 걱정해주셨다'며 두 형을 슬피 그리워했다.[168] 병조 정랑은 품계상 정5품이지만, 그 유명한 '이조 전랑' 자리와 비슷하게 무반직 인사권을 가진 핵심보직이었다.(이조의 정랑과 좌랑을 전랑이라고 지칭하는 것처럼 병조의 정랑과 좌랑도 전랑이라고 지칭한다)[169] 단, 이이와 이순신은 19촌 관계로 당대에도 덕수 이씨라는 가문만 같지 사실상 남남이었다.[170] 이분과 이완은 큰형 희신의 이남, 삼남이고 이봉은 작은형 요신의 맏이다.[171] 이열, 이울 등 남아있는 이름이 여럿인데 덕수 이씨 세보에는 이예(李䓲)로 적고 있다.[172] 다름아닌 이순신의 친아들(차남)이다.[173] 심지어 율곡 이이도 덕수 이씨 가문이었으나 이순신에게 밀렸다. 성리학을 우선하던 조선 중후반 시기에 공자와 동급으로 올리는 문묘 배향에 종묘에도 배향된 공신인 이이가 밀린 것만 봐도 충무공을 위한 대우가 얼마나 넘사벽이었는지 알 수 있다.[174] 무능하다고 하지만 숙종 시기에 무과급제하고, 경종 시기에 포도대장, 삼도수군통제사, 총융사에 영조때는 훈련대장까지 승진을 하였다.[175] 충성 충, 애쓸 민. 나라에 대한 충심을 지켜 안타까운 최후를 맞이했기에 붙은 시호.[176] 권중현은 권율의 10대손으로 어머니가 이순신의 둘째였던 이예의 7대손인 이승권의 딸이다.[177] 망루를 세워 공격에 임했는데 이걸 함포로 박살을 내버렸다.[178] 위에 보면 알 수 있지만 윤두수 등의 서인들이 선조를 꼬셔 (선조는 깐깐한 이순신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순신을 쫓아내게 하고 낙하산으로 원균이 해군 참모 총장격인 삼도수군통제사가 된다. 그런 후 합동참모의장인 권율은 어이가 없어하다가 부산진 출정 명령을 피하자 결국 분노가 터져 곤장 40대를 친다.[179] 당시 부산진 출정 명령은 무모한 작전으로 판단되었으므로 백의종군 직전 이순신 또한 이러한 상황에 큰 부담을 내비쳤다. 원균은 이순신을 아니꼬워했지만 그의 안목은 인정했으므로, 패배를 두려워해 출정하지 않았다.[180] 당시는 군령권과 군정권을 구분하는 시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해군참모총장과 해군 작전사령관을 합친 직위에 가깝다.[181] 사실 최고위 장교들 간에는 한 쪽이 직위가 높더라도 낮은 쪽을 함부로 대하는 경우는 원래 드물다. 그렇기에 권율이 바로 아래에 나오는 모 졸장을 곤장으로 팬게 특이사례인것.[182] 경상우수사는 정3품이고, 충청병사는 종2품이다.[183] 이순신이 아군의 내분을 피하기 위해 통제사 자리를 원균에게 양보하겠다고 상소를 올렸지만 조정에서 거절하고 원균을 충청병사로 임명했다는 말이 있지만 이는 신빙성이 낮다.[184] 이때 류성룡이 천거한 세 인물이 이순신, 권율, 원균이다. 이순신은 잭팟 수준의 대박이었고 권율 역시 대성공이었지만 원균 천거는 류성룡 일생의 큰 실수로 평가받는다.[185] 선조는 이순신 입장에서야 원수같을 때도 있었겠지만 그래도 유교 국가에서 신하가 임금을 까는 것은 통념을 벗어난 일이었다. 신하로서 함부로 자신의 군주를 지적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186] 동사, 관리의 임기가 차거나 부적당할 때 다른 사람으로 바꾸다.[187] 물론 자기 후계자인 광해군의 위신을 깎겠다고 양위쇼를 하던 모습을 보면 궁극적으론 선조 개인의 권력욕이 가장 큰 원인이긴 하다. 아무리 서자라지만 자기 자식조차 견제하는 인간인데 일개 장수를 견제하는 것에 무슨 고민을 했겠는가.[188] 심지어 당시 이성계도 외세를 몰아낸 국민 영웅의 지위를 가진 장수였다는 점에서 놀라울 정도로 이순신과 유사함을 보이고 있었다. 자신이 직접 육성한 정예병들을 거느렸던 것조차도. 차이점이라면 이성계는 육전에서 두각을 드러냈고, 이순신은 해전에서 두각을 드러냈다는 것과 이성계는 지방 군벌에 가까웠던 존재인 반면, 이순신은 국가에서 내려보낸 장수라는 차이 정도이다.[189] 물론 난중일기 등의 사례를 보면 어디까지나 보이는 장소에서나 충성이 갸륵한 모습을 보였지, 실제 충심이 이순신보다 높았을 가능성은 미지수이다.[190] 물론 물리적인 거리가 멀어 직접적으로 모시진 않았지만, 관아에 종이가 모자르자 종이를 바치거나, 어마어마한 전공을 세워 국가를 수호하며, 장계에 거짓을 고하지 않는 등 본인이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론 보답한 것이 맞다. 당장 지도자에게 허위보고를 올린 탓에 전황 말아먹는 상황은 세계사에서 드물지 않고, 동시기에 원균이라는 매우 명확한 반례까지 존재하고 있다.[191] 애초에 이 파직이 원인이 되어 이순신은 어머니를 여의었다. 물론 조선시대 기준으로 80대라면 언제 돌아가셔도 이상하진 않을 수 있으나, 실상 원인은 파직으로 잡혀간 이순신을 보러 한양까지 노구의 몸을 이끌고 가려고 한 것이 원인인 만큼 효심이 지극한 이순신 입장에선 단순한 배신감 이상으로 선조에게 실망감과 배신감을 느꼈을 가능성이 크다.[192] 당장 책잡히면 군복을 벗어야할지도 모르는 망궐례를 안하는 것까지 했으니 옥사 이후엔 선조에게 크게 실망했을 가능성이 높고, 이후에는 아예 본인이 능동적으로 외국의 인물과도 사적인 인간관계를 구축하는 등 선조를 신뢰하지 않는 모습도 보였다.[193] 다만 이전에 이광이 탄원서를 제출해 백의종군에서 벗어나게 했다는 기술이 있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이순신은 녹둔도 전투의 결과로 "다시 공을 세워 속죄하라"는 선조의 뜻에 의해 백의종군 처분을 받은 뒤, 3개월 만에 여진족 토벌전에 종군해 우두머리를 생포하고 공을 세워 사면되었기 때문이다.[194] 늦은 나이에 급제하였다고 설명하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론 거의 평균적인 나이에 급제하였다.[195] 종4품 이상의 무관부터 장군.[196] 일종의 병기고 임시 검열관.[197] 순서를 따지지 않고 채용하다. 1587년에 전라도 손죽도를 왜구가 침범하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전라 좌수군은 싸울 생각을 하지 않고 피하기 바빴으며, 녹도 만호 이대원만이 장렬하게 싸우다 전사하게 되었다. 이 사건 이후 일본에서 전쟁을 준비한다는 첩보와 징후를 감지하자, 조정에서 유능한 무관들을 특채로 채용하기 위해 이러한 제도를 시행한 것이다.[198] 이순신의 일대기를 볼 때 이 정읍현감 시절이 인생에서 그나마 평온했던 시기였다 할 수 있다. 정읍현감 이전엔 파직과 강등, 백의종군을 겪어야 했고 정읍현감 이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가 되어선 전쟁을 준비하느라 분주했다. 1년 뒤 임진왜란이 발발한 다음 충무공의 삶은 그야말로 눈물이 앞을 가린다. 무엇보다 정읍현감으로 재직하던 때는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지내던 시기였다.[199] 변방 수령은 만 1년이 되지 않으면 자리를 바꿀 수 없다.[200] 만포 첨사는 특별히 정3품(소장) 당상관으로 임명하는 자리다. 성종 15년(1484년) 8월 8일(임술) 1번째 기사 경연 후 지평 한건 등과 위장 김유완의 체직·영안도의 양전 등을 논의하다. 연산 2년(1496년) 11월 13일(병진) 2번째 기사 정언 조원기가 이윤종을 만포 첨사로 제수하지 말 것을 건의하다, 연산 2년(1496년) 12월 9일(임오) 2번째 기사 가자, 김효강, 노사신 부자 등의 일로 구치곤 등이 경연에서 아뢰다, 연산 3년(1497년) 1월 22일(갑자) 4번째 기사 만포 진장에 무신으로 당상관인 재주있는 자를 보내기를 의정부가 청하다, 중종 20년(1525년) 11월 29일 갑신 4번째 기사 헌부가 김안정·서수천의 체직과 서원정 이구의 죄상에 대해 아뢰다, 명종 12년(1557년) 1월 12일(병인) 3번째 기사 조광원·이명·목첨·강섬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등의 실록 기사를 보면 만포 첨사를 당상관(정3품 上 절충 장군)으로 보임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201] 거북선에 대한 기록은 태종 때부터 있었다. 다만 태종실록에서 언급되는 귀선과 이순신이 건조했다는 귀선이 같은 종류의 배인지는 현재까지 불분명하다.[202] 합참의장) 권율이 이 계급이었으니 사성장군으로 봐도 무방하다.[203] 난중일기에 의하면, 이때 가장 먼저 찾아온 사람이 바로 무의공 이순신이라고 한다.[204] 난중일기 中: 丁酉 4월 19일: 일찍이 길을 떠나며, 어머님 영전에 하직을 고하고 목놓아 울었다. 어이할꼬, 어이할꼬. 천지 간에 나 같은 자 또 어디 있으랴. 차라리 빨리 죽느니만 못하도다.[205] 난중일기 中: 1597년 10월 14일: 저녁에 천안에서 사람이 와서 집 편지를 전하는데 겉봉을 뜯기도 전에 골육이 떨리고 심기가 혼란해졌다. 겉봉을 대강 뜯고 열의 글씨를 보니 바깥 면에 '통곡'이란 2자가 쓰여 있기로 면이 전사했음을 알고 간담이 떨어지는 것도 모르고 목놓아 통곡, 통곡하였다. 하늘이 어찌 이리 어질지 못하시더냐,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듯하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에 맞거늘 네가 죽고 내가 살아 있으니 이렇게 어긋난 이치가 어디 있으랴. 천지가 흑암에 덮이고 해조차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네가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네 재주가 뛰어나 하늘이 이 세상에 놔두지 않는 것이냐. 내 죄가 많아 네 몸에 미친 것이냐. 내 지금 세상에 살아 있으나, 이제 어디에 의지하랴. 너를 따라 죽어 지하에서 같이 울고 싶지만 네 형, 네 누이, 네 어머니가 의지할 곳이 없겠으니 아직은 참고 살겠으나 마음은 죽고 몸만 남아 통곡하고 통곡할 따름이다. 하룻밤 지내기가 1년 같도다.[206] 물론 같은 덕수 이씨라고 그렇게 보기는 어렵다. 여기서 말하는 역적의 가문은 아마도 이순신의 일가와 그 친척으로 한정한 것에 가깝다. 일례로 삼수의 옥 당시 이이명은 역모 혐의로 죽었는데 그는 전주 이씨다. 그럼 조선 왕가가 역적 집안인가?[207] 밥에 고기와 적, 나물들을 고루 얹어 장국을 부어 먹는 국밥이다.[208] 생선전과 소고기 내장 모듬전.[209] 두부를 지져 닭고기, 표고, 석이, 다시마 같은 재료들과 함께 끓여 여기에 가루즙을 풀어 넣어서 부드럽게 만든 두붓국.[210] 꿩고기를 다져 동글동글하게 빚어 쇠고기 장국에 넣어 만든 국.[211] 꿩고기의 살만 발라내어 쇠고기와 섞어 다진 것에 갖은 양념을 하여 꿩의 다리 모양으로 만든 후에 묽은 밀가루 반죽을 풀어 쪄 낸 음식.[212] 대합, 모시 조개, 재첩 등을 껍질째 씻어서 맹물에 넣고 끓인 국.[213] '눈 오는 날 찾는다'는 뜻으로 쇠고기 등심을 넓게 길게 저며 썰어서 꼬치에 꿴 후에 기름장에 양념을 발라 구운 것이다.[214] 宗婦, 가문의 종손의 부인을 일컫는 말.[215] 사채업자가 이순신에 대한 존경심이 있었다기보다는 현금화하기 어려워서 거절했을 가능성이 높다. 단순한 골동품이라면 모를까 이미 세간에 널리 알려진 문화재는 온갖 비난을 감수하고 해외로 밀반출하는 형식이 아니라면 현금화하기 어려운 재산에 속한다.[216] 2001년에 15대 종손인 이재국이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났을 때 종부가 사망신고를 늦추고 양자를 들였지만, 사후입양의 법적 효력 문제 등으로 파양하면서 문중과 분쟁이 일어났다.[217] 충무공 종가를 매입한 풍암공파는 충무공의 할아버지인 이백록의 후손이며, 충무공파는 풍암공파의 방계 후손이다.[218] 친형제도 아닌데 1살이라도 차이나면 형, 동생이 갈리는 것은 현대에 들어서다. 절친한 친구 사이로 유명한 오성과 한음도 5살이나 차이난다.[219] 류성룡은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될 때 선조에게 "이순신은 저와 동향 사람인데 강직하여 직무에 맞는 사람이라 여겼습니다"라고 하기도 했다. 그러나 저런 이미지 때문에 끝까지 이순신을 두둔했다라는 잘못된 이미지가 형성되었다. 다만 이 때는 선조의 강짜가 매우 심해 중신 중 그 누구도 입을 제대로 열지 못할 분위기인걸 감안하기는 해야 한다. 이후 전후에 저술한 <징비록>에서는 이 때 자기 모습이 부끄러웠는지 해당 부분은 쏙 빼놨다.[220] 어쩔 수 없는 것이 대척점에 있는 원균이 서인인 윤두수의 인척으로 있어서 당파 논리대로라면 이렇게 분류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선조수정실록>도 그렇고 후손인 이봉상이 노론과 소론으로 나눠진 경종영조 시기 2품관에 오른 상황을 봐서도 반드시 당파로서 구분할 수 없다.[221] 그러나 이순신의 이러한 성향은 정치적으로는 좋지 않은 결과를 나타내서 원균의 재부상을 이끌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민심이 죄다 이순신에게 쏠리고 한산도 통제영에 피난민들이 구름처럼 몰려드니 그 점이 선조의 심기를 어지럽히는 이유가 된 것이다. 애초 한 쪽이 올라가면 다른 쪽은 내려갈 수밖에 없는 양립 불가능한 파라미터의 결과이니 말이다. 어차피 원균의 재부상은 당시 왕이었던 선조의 강력한 의지가 바탕이 된 탓이 크니 어떻게 할 방도가 없었으며 그것이 전란을 승리로 이끈 제일의 영웅이라 할지라도 중앙 집권 국가에서 왕이 1번 쳐내기로 마음먹었으면 어찌할 도리가 없다. 차라리 입과 기득권으로 권력이 유지된다고 철썩 믿는 정치병 환자를 내친다는 생각을 안 했다는 것에서 안타깝다고 생각한다면 몰라도 말이다. 하지만 당시 전란으로 온 나라가 황폐해진 상황에서 선조를 뒤엎으려 군사를 일으킨다면 그야말로 온 나라가 더욱 헬게이트가 열리는 일이기에 이순신의 성품상 이런 상황으로 만들기를 원치 않았을 것이다.[222] 관직자의 경우 조선통신사 같이 멀리 이동할 일이 있다면 가다가 가까운 관아로 가서 관직자임을 밝히고 그 관아에서 숙박을 해결하였고, 상인들은 자신들만의 조합을 결성해서 조합원이 멀리 이동할 일이 생기면 가다가 가까운 다른 조합원의 집에서 숙박을 해결하였으며, 과거 시험을 보러 가는 선비는 가다가 가까운 민가에 요청해서 숙박을 해결하곤 했다. 전래동화 은혜 갚은 까치에서 까치를 잡아먹으려는 수컷 구렁이를 호신용으로 들고다니던 활로 쏘아죽여 까치를 구한 선비가 계속 길을 가다가 산속에서 밤이 되자 산속에 있던 여자(변신한 암컷 구렁이) 혼자 사는 민가에 가서 하룻밤 머물고 갈 수 있냐며 부탁하고 이에 그 여인이 허락하면서 저녁 밥상을 내주는 대목이 바로 이 시대의 여행자들이 숙박을 해결하는 보편적인 방법을 보여주는 장면인 셈. 관직자의 경우를 제외한 나머지 케이스는 당연하지만 아주 공짜는 아니고, 이 기회를 통해 다른 지역의 소식을 전달받을 정보 창구의 기능과 동시에, 미리 대상자와 연줄을 만들어두어서 나중에 유용하게 써먹으려는 목적을 띈 접대였고, 나아가 자신은 타인에게 관용을 베풀줄 알아야 한다는 유교적 가르침을 준수하고 있다는 과시적인 목적 또한 있었다. 만약 방문객이 사정이 있어서 장기간 머물러야 한다면 그 집 아이들에게 글공부를 시켜주는 개인 과외를 해주거나 집주인에게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는 식으로 은혜를 갚기도 했는데 식객이라는 단어가 바로 이런 장기 투숙객들을 일컫는 단어이다.[223] 말인즉 조선 후기를 배경으로 하지 않는데 주막이 등장한다면 고증 오류이다.[224] 통념과는 달리 기생은 성접대를 하는 매춘부가 아니라 종합 엔터테이너였다. 연회 참석자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춤과 노래를 잘하는것은 물론이거니와, 특히 높으신 분들이 지적인 대화를 나눌 때 알맞게 장단을 맞춰줘서 높으신 분들의 흥을 돋울 수 있도록 글과 문학까지 공부해야 했다. 남자여도 양반집 자제가 아니라면 글을 배우는건 쉽지 않은 당시 사회상에서 사대부 가문 출신 여성이 아닌 일반 여성의 몸으로 글을 배운다는건 엄청난 특혜로, 기생들 중 오늘날에도 유명한 황진이가 여러 시들을 남겼다는건 그만큼 일반 여성임에도 사대부 집안 남성 못지 않게 글과 문학들을 상당히 수준 높게 배웠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기생이 성접대를 일삼는 매춘부라는 이미지를 만든것은 다름아닌 일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총독부는 이들을 일본에서 비슷한 일을 하지만 성접대도 일삼는 게이샤와 같은 부류로 취급해버렸고, 기생 문화가 쇠퇴해서 사라지고 남은 빈자리에 일제가 남겨둔 잘못된 잔재만 남아서 기생을 매춘부로 취급하는 관념이 퍼져버린 것이다.[225] 근데 문제점은 여진이라는 인물과 백의종군 때 만나 같이 성관계를 맺는 대목이 있어 독자들도 당황스러울 정도. 여진은 소설에서 '명량해전이 곧 끝나고 전후 처리하던 중에 죽은 조선 여자가 있다고 해서 보았더니 여진이었다'라는 대목도 있다. 여진이 백의종군하던 이순신과 만나 "나으리, 날이 밝으면 절 죽여주십시오."라고 부탁했지만 이순신이 죽이지 않자 다시 돌아갔는데 알고보니 구루지마의 첩이 되어 성관계를 했다는 대목도 나온다. 그런데 실제 역사의 고증성에 문제도 있거니와 만화책 <칼의 노래>에서는 어린아이들에게 이런 대목을 넣기 민망한지 그냥 이순신 밑에서 일하던 여종으로 나온다. 최후는 소설과 다르게 이순신을 암살하기 위해 일본 조정에서 보낸 자객들이 작전을 시행하는 도중에 마주쳐서 자객들이 그녀를 죽이려던 찰나에 큰 소리로 "왜적이 나타났다"고 외친 덕분에 이순신의 목숨을 살렸다.[226] 현재 1척은 대략 30cm에 해당한다. 동시대에 명나라에서 1척이 현재와 비슷한 약 31.1cm인 것을 보아 31.1*6 = 187cm라는 어느 정도 설명이 가능한 신장이 나온다. 남자 키가 180이 넘으면 지금 기준으로도 장신이다.[227] 실제로 원융검기에 묘사된 쌍룡검은 길이가 1장이 넘는다는 묘사가 있을 정도로 오히려 현존하는 이순신의 장검보다 길이가 더 길었을 가능성이 높아 사진에 나온 도검은 원융검기에 나온 쌍룡검의 모습과 괴리가 심하다.[228] 하지만 등패수(籐牌手)의 경우 방패 안에 표창을 가지고 있어서, 기본적으로 이것을 투척한 후, 전방에서 아군의 진영을 보호하는 형태로 전투를 수행한다.[229] 하지만 이순신이 이 검을 전장에 가져오지 않고 장식용으로만 썼다는 명확한 기록은 없고 그저 2m에 달하는 장검을 실전에서 쓸 수 없다는 근거없는 고정관념 및 검에 사용 흔적이 없다는 점 때문에 막연히 장식용으로만 추정할 뿐이다. 이순신의 지위가 수군을 총괄하는 지위인 만큼 직접 적과 무기를 맞대며 교전한 일이 없다보니 검에 사용 흔적이 없는건 당연한 일이고 이는 이순신이 보유했다는 또 다른 짧은 도검 또한 마찬가지이다.[230] 당연하다. 옛날인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해서 자를 부르거나 그나마도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며 호를 부르기도 했다. 아니면 직책으로 부르거나.[231] 원균이 원칙도 중시하면서 조금의 융통성도 있다면 문제가 없겠는데 이 인간은 융통성 수준이 아니라 그냥 무원칙적인 말도 예의바르게 말한 것에 가까운 인두겹을 쓴 존재였다. 오히려 원균 사후 진린과의 일 등에서도 보듯 융통성이 있던 사람은 이순신이었다.[232] 조선의 중앙 집권화는 국가 경제력이 빈약한 상태에서 무리수를 두어 시행했기에 아전들에게까지 줄 재정이 없었다. 관리들의 녹봉조차 박봉이며 이것마저 줄 재정이 없어 못 주는 게 다반사였다. 그러다보니 관료들은 녹봉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고 개인 재산 축재에 힘을 쓸 수밖에 없었다. 과거 합격자들에게도 줄 녹봉이 없어 무보수로 일하거나 임용되기를 장기간 기다려야 할 정도였다.[233] 소설 칼의 노래에서도 명량 해전을 치루기 전에 한 노인이 백성들에게 헛소문을 퍼뜨려 산으로 모두 도망갔는데 이 때를 틈 타 소를 훔치려다가 이순신에게 적발되어 사형에 처했다라는 대목이 있다.[234]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도 북한에 관한 유언비어나 선동, 미화 하는 행위 등을 할 경우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처벌당할 수 있으며, 전시에는 국가비상사태인데다 국민들의 정서가 민감해져 있는 만큼 그 처벌의 수위가 심하면 더 심하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전시에는 계엄령이 선포 될 확률이 높은데, 계엄령 치하에서는 기본권 조차도 제한 될 수 있으며 이는 전 세계 어느 자유국가들도 마찬가지다.[235] 추가로 덧붙이자면, 이 시기 조선은 당연하게도 인권 개념조차 없던 시절이며 처벌의 수위가 현대의 그것과는 확연히 다르게 잔혹하던 시절이다. 이것을 이순신 개인의 문제로 끌고 가는것은 옳지 않다.[236] 당시 소 5마리 ~ 6마리의 값은 상태가 양호한 호랑이 가죽 1장과 가격이 비슷한데 호랑이 가죽이라는 물건은 명나라청나라에 진상하는 용도로만 쓸 정도로 매우 귀한 물건이었다.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된다"는 속담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237] 사실 조선만 이런 것은 아니고 옛 시절의 해군은 어디든 마찬가지였다. 나폴레옹 전쟁 시기의 영국 해군만 해도 오만 범죄자를 집어넣는 것으로도 모자라 밤에 호각을 분 순간 길거리에 있는 장정들을 닥치는 대로 징집해 끌고 간 사실은 이미 혼블로워 같은 작품들을 통해 널리 알려진 사실. Impressment, Press Gang이라 부르는데, 특히 나포한 미국 식민지 출신 선원의 강제 영국 해군 징집은 미국 식민지가 독립을 선포하는 27개 원인 중 26번째였다. 그나마 이때의 조선은 아직 연좌제가 보편적이지 않던 시절이었고, 도망간 친족을 찾아내면 나갈 수라도 있었다.[238] 아닌 게 아니라 국난이라 어쩔 수 없이 병역과 노역을 해야한다면, 싸움을 업으로 삼고 신립을 육상에서 격파한 왜구와 직접 창칼을 맞대어 죽는 것보다는 철저한 관리로 애시당초 패배할 여지를 남기지 않는 충무공 휘하에 있는 것이 복무자 입장에서는 훨씬 낫다. 난중일기와 각종 장계, 실록을 통해 비교해봐도 충무공의 완벽주의적인 성격에 걸맞게 조선 수군은 한중일 삼국이 엮인 지옥같은 전쟁에 참전하던 군대치고는 사상자도 매우 적은 편이었다.[239] 난중일기 등의 기록에서 조선 수군의 병영식으로 소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사슴고기, 개고기, 전복, 대구(어류), 청어, 숭어, 조기, - 동아, 고래고기, 꿩고기, , 국수, 약식, , 팥죽, 홍시, 곶감, 참기름, 벌꿀, , 연포(두부), 수박, 등으로 매우 다양하다. 이는 현대 해군에서 식단으로 내놔도 모자람이 없다. 당시 조선에서 소의 가치는 집 한 채보다 비쌌고, 귤은 제주 사람이 아니면 국왕만이 부족함 없이 먹을 수 있는 귀한 식품이었는데 이걸 병사들 식단에 내놓은 것이다. 특히 진린이 왔을때 진린과 명의 장병들한테 고기와 생선을 푸짐하게 대접해 칭찬을 받기도 했다. 이때 진린은 마늘을 유독 좋아해서 구운 마늘을 한줌이나 먹었다고 한다.[240] 권율은 탈영병을 즉결 처분했다 하여 일시 해임되기도 했다.[241] 그러나 충무공이 물길에 익숙했던 것은 포구의 백성에게 들어서만은 아니다. 여러 차례 해진(海鎭)의 장수를 지낸 어영담이 물길의 요해처를 잘 알았기 때문에 충무공을 도운 것이 많았으니, 견내량(見乃梁) 해전과 명량 해전은 오로지 지리를 이용해 승리를 거둔 경우라고 하였다. 거기에 조선은 수운을 해야 하는 나라이기에 송시열이나 청성잡기 저자는 현실 실무를 모른다는 비난을 듣기 좋은 소재이다.[242] 다산연구회 편역, '정선 목민심서' ,창비, 2005, 298쪽.[243] 만약 과거의 이순신 장군과 대화를 나눈다면 자신이 한 일은 그냥 군인으로서 당연히 한 일이라 했을지도 모른다.[244] 또다른 취미로는 부하장수들을 앉혀놓고 바둑 두는 것을 구경하는 것도 있었다.[245] 이순신은 《난중일기》에서 자신이 활쏘기를 얼마나 했는지를 '활 ~순(巡)을 쏘았다'라고 기록해 놓았는데, 여기서 '1순(巡)'은 한 사람이 차례대로 돌아가며 화살 다섯 개를 쏘는 것을 의미한다. '5순'을 쏘면 화살 25개를 쏜 것이고, '10순'을 쏘면 화살 50개를 쏜 것이다. 이순신은 활쏘기를 하면 대개 10순을 쏘곤 했다.[246] 짐작했듯이 연의 속 제갈량의 마지막 북벌 중 북두칠성에 수명을 연장케 기도하는 대목이다.[247] 우연이었는지 운명이었는지, 이순신이 받은 시호 '충무'는 제갈량도 받았던 시호였다(이순신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그 충무공, 제갈량은 충무후).[248] 실제로 '삼국지연의를 세 번 이상 읽은 사람은 상대하지 말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워낙 술수와 계책이 오가는 삼국지연의의 특성상 세 번 이상 읽은 사람은 그걸 토대로 교활한 지략가가 됐을 공산이 높아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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