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솔왕

덤프버전 :



[ 펼치기 · 접기 ]
진한 6부 촌장 | 개국공신
문열왕
고허촌 촌장
은열왕
양산촌 촌장
감문왕
진지촌 촌장
문의왕
대수촌 촌장
장무왕
고야촌 촌장
장렬왕
가리촌 촌장

갈문왕
사요 갈문왕
허루 갈문왕
마제 갈문왕
일지 갈문왕
지소례 갈문왕
아도 갈문왕
세신 갈문왕
구도 갈문왕
이칠 갈문왕
내음 갈문왕
파호 갈문왕
습보 갈문왕
지도로 갈문왕
국왕 즉위
입종 갈문왕
복승 갈문왕
음갈문왕
선덕여왕 국서
진정 갈문왕
국반 갈문왕
만천 갈문왕

추존 국왕
세조왕
태조 성한왕
문헌상 언급
문흥왕
문흥 갈문왕
흥무왕
비 왕족
개성왕
현성왕
신영왕
흥평왕
명덕왕
혜충왕
태자
익성왕
선강왕
태자 / 갈문왕
혜강왕
성덕왕
의공왕
혜성왕
진성여왕 국서
선성왕
흥렴왕
성무왕
성희왕
의흥왕
신흥왕


왕태자
우로태자
동륜태자
동륜왕
효상태자
헌평태자
태자
헌덕왕의 아들
태자
문성왕의 아들
마의태자
제후 및 비정통 국왕
김인문
괴뢰왕
김주원
명주군왕
김헌창
장안국왕
박언창
후사벌왕








眞率王
생몰년도 미상

1. 개요
2. 정체


1. 개요[편집]


고려 후기의 승려인 무외국통 정오(丁午: ? ~ 1318년)가 지은 고석정기(孤石亭記)에만 등장하는 신라의 왕. 정오는 1288년 철원의 고석정(孤石亭)을 방문했는데, 여기서 신라비를 발견했다고 한다.

철원군에서 남쪽으로 만여 보를 가면 신선의 구역이 하나 있는데, 서로 전하기를, ‘고석정’이라 한다. 그 정자에는 큰 바위가 우뚝 솟아나 높이가 300척 가량 되고 둘레는 10여 장(丈)쯤 된다. 바위를 타고 올라가면 구멍 하나가 있어서 기어 들어가면 집같이 생긴 층대가 있는데, 10명쯤 앉을 수 있다. 옆에 돌비가 세워져 있는데, 신라 진솔왕(眞率王)이 놀러 와서 세운 비이다.(이하 중략)

동문선에 수록된 고석정기(孤石亭記)의 내용 中



2. 정체[편집]


아쉽게도 고석정비는 현존하지 않지만[1], 조선 중기의 문인 구사맹은 자신의 저서인 팔곡집에서 진평왕이 철원 고석정비를 새겼다고 언급하였다.

진평왕이 세운 비석이 맞다면 진평왕이 친정했던 603년 북한산성 전투 이후에 세웠을 것이라는 설[2]과 598년 ~ 614년 고구려-수 전쟁 때 신라가 고구려 영토를 뺏은 뒤 세웠다는 설[3]이 제기되었다. 平과 率의 자형이 비슷하므로, 이와 같은 오류는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다만 여러 곳에 진흥왕 순수비를 세우고 국토를 유람했던 진흥왕일 가능성도 있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18 02:27:33에 나무위키 진솔왕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16세기 말에 부서졌다가 17세기 초 이후에는 완전히 실전되었다고 한다.#[2] 황보경, 603년 北漢山城 전투 고찰, 2015.[3] 김진한, 鐵原 孤石亭 新羅碑와 新羅의 鐵原 進出, 2018.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