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요한 베르나도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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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스웨덴 구스타프 6세 아돌프와 코넛의 마거릿 공녀의 4남이자 막내.
구스타프 아돌프 왕자와 덴마크의 잉리드 왕비의 동생으로, 스웨덴 국왕 칼 16세 구스타프의 작은아버지이자 덴마크 여왕 마르그레테 2세의 외숙부이다.
2. 생애[편집]
1916년 10월 31일 스톡홀름에서 당시 왕세자였던 구스타프 6세 아돌프와 왕세자비 코넛의 마거릿 공녀의 4남으로 태어나 달라르나 공작위를 받았다. 4살 때 어머니가 사망해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었으며, 형제들 중 가장 새어머니 루이즈 마운트배튼을 따랐다고 한다.
다른 왕족들처럼 군복무를 하면서 대학을 다녔다. 기갑연대에 배치되어 '갑옷 왕자님'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1945에서 1948년까지는 예비군으로 복무하면서 동시에 외무부에서 일했다.
1939년 언론인이자 잡지 편집자인 셔스틴 비크마크라는 이혼녀와 만났다. 할아버지 구스타프 5세에게 그녀와 결혼하고 싶다고 말했지만 단칼에 거절당했다. 1945년 5월 칼 요한은 허락없이 언론에 약혼 사실을 알렸고 셔스틴 비크마크는 중상과 괴롭힘의 대상이 되었다. 비크마크는 이렇게 썼다. '하룻밤 사이에 나는 스웨덴에서 가장 미움받는 사람이 되었다.' 두 사람은 뉴욕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미국으로 이주할 계획을 세웠다. 왕실에서는 비스마크의 비자를 차단해버렸고 화가 난 칼 요한은 할아버지의 동성애 성향[1] 을 비롯해 왕실의 비밀 몇 가지를 알고 있고 신문에 알릴 수도 있다고 응수했다. 결국 약혼녀의 입국 허가를 얻어 1946년 2월 19일에 미국 뉴욕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왕실에서는 아무도 결혼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고,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결혼 3일 후 스웨덴 왕위 계승 서열과 왕족으로의 지위, 작위를 잃고 1951년에 룩셈부르크 대공가로부터 비스보리 백작위를 받기 전까지 칼 요한 베르나도테라고 불렸다.
부부는 뉴욕에 정착해 살면서 두 아이를 입양했다.[2] 칼 요한은 무역 회사에서 일했고, 셔스틴은 글을 쓰며 돈벌이를 했다. 시간이 흘러 왕실과의 사이는 점점 개선되었다. 부부는 1952년 스웨덴으로 돌아왔고 1987년에 투병 끝에 셔스틴이 숨을 거두었다. 칼 요한은 형처럼 왕자 지위를 되찾으려고 하지 않았다. '엎질러진 우유에 울지 마세요. 특히 본인이 엎질렀다면요.'
1988년에 소꿉친구의 동생이자 백작의 딸인 귄닐라 바크트메이스터와 재혼했다.[3] 부부는 금슬이 좋았으며, 자주 왕실 행사에 참석했다.
2012년 5월 5일에 스웨덴 엥엘홀름의 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는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증손주들 중 가장 마지막까지 살아있었던 인물이었다. 매우 장수해 모든 형제들의 사망과 조카 칼 16세 구스타프의 환갑, 외종증손녀 에스텔 공주까지 보고 사망했다.
3. 가족관계[편집]
3.1. 조상[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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