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시정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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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시정위원회
平壤施政委員會
Pyongyang Municipal Administrative Committee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설립일
1950년 10월 19일
해산일
1950년 12월 6일
점령국
미국
시장
임정득

1. 개요
2. 상세
2.2. 시정위원회의 설치
3. 이후



1. 개요[편집]


6.25 전쟁 당시 평양을 탈환한 후 유엔군(사실상 미국)이 설치한 평양 통치 기구.


2. 상세[편집]



2.1. 평양 탈환[편집]


한국군유엔군인천 상륙작전의 여세를 몰아 9월 28일 서울수복하였고, 이에 따라 북한군남한 지역에서 대대적인 후퇴를 하기 시작한다. 이어 10월 1일 한국군은 38선을 돌파하였고, 뒤이어 10월 7일에는 유엔군도 38선을 넘어 북진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북한은 모든 정부 기관과 북한군 부대를 평양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한국군과 유엔군이 평양으로 빠르게 진격해 오자 김일성10월 12일 평양을 떠나 강계피난하였고, 북한도 모든 정부 기관과 북한군 부대를 평양에서 철수시켜 강계에 들어갔다. 한편 10월 9일부터 평양으로 출발한 한국군과 유엔군은 열흘 동안에 평양을 탈환하는데 성공한다.(10월 19일)


2.2. 시정위원회의 설치[편집]


시장
임정득
부시장
우제순
오진환

부장
경찰부장
소방부장
보건부장
후생부장
사회부장
김영일
이룡적
선우요
이황식
안병섭
교통부장
재정부장
농무부장
법무부장
문교부장
김흥찬
윤도성
이학천
배치엽


대한민국이승만 정부미국은 평양의 통치권을 두고 갈등이 있었다. 이승만 정부는 대한민국 헌법상 평양도 대한민국 영토이므로 대한민국이 통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미국은 평양이 분단 이후 대한민국의 영토가 된 적이 없으므로 대한민국의 지배권이 38선 이남에만 한정된다고 보고[1] 평양에 미치지 않는다고 보았다. 이에 따라 미국은 10월 21일 평양에 평양 시정위원회를 설치하였고 이후 약 두 달 동안 유엔군이 평양을 통치하였다.

유엔군 점령하의 평양의 광경을 묘사한 당시 신문기사의 내용.


3. 이후[편집]


평양 탈환 후 북진을 계속한 한국군과 유엔군은 여세를 몰아 10월 후순에는 마침내 한-중 국경선에 이르러 통일을 코앞에 두게 되었다. 그러나 반격도 하지 못할 엄청난 규모중공군이 전쟁에 개입하면서 전세는 단숨에 역전되었고 이에 따라 한국군과 유엔군은 통일을 코앞에 둔 채 후퇴를 하게 되었다. 서부전선에서 청천강 전투에서 유엔군이 참패하고 동부전선에도 공산군들에게 포위당하자 월튼 워커맥아더평양 철수를 제안하였고 맥아더는 곧바로 수락했다. 이에 따라 한국군과 유엔군은 12월 4일 약 두 달 만에 평양을 철수하였고, 미국은 평양에 두었던 평양 시정위원회를 철수하였다. 이틀 후인 12월 6일 평양은 다시 북한에 점령됐다. 이때 북한에 넘어간 평양은 지금까지 북한 지배하에 있으며 미군한국군은 다시는 평양에 가지 못하고 있다. 이후 임진강한탄강에서 겨우 방어선이 형성되는듯 했지만 얼마 못 가 서울을 다시 빼앗기고 결국 오산시 까지 밀려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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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래서 현재 수복지구에 대한민국의 주권이 있는지에 대해 논란이 있다. 수복지구 문서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