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교황)/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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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마르틴 루터와 종교개혁 칭송 논란
3. 성직자들의 범죄에 대한 미온적 대응 및 은폐 가담 의혹
4. 킴 데이비스 격려 방문 결정 과정 의혹
5. 중국과의 무리한 타협
5.1. 반박
6.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관련
7. 동성 커플 축복 논란



1. 개요[편집]


이 문서는 프란치스코 교황에 대해 제기되는 논란을 다룬다. 교황으로서 가톨릭의 전통/교리를 부정/왜곡한다고 보일 수 있는 발언, 사제들의 범죄 덮어주기 의혹, 국제 정체와 관련된 것으로 분류할 수 있다.


2. 마르틴 루터와 종교개혁 칭송 논란[편집]


2016년 10월 13일, 프란치스코 교황은 바티칸 바오로 6세홀에서 루터교 신자 방문자들을 만나 마르틴 루터의 상과, 루터교 1517년 독일 비텐베르크 모든 성인 성당의 문 앞에 붙인 가톨릭을 비판한 95개조 반박문의 사본을 선물로 받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6년 10월 31일 스웨덴 룬드에서 열린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예배에 세계루터교연맹 지도자들과 함께 참석했다. 이는 역대 교황 중 처음으로 종교개혁을 이끈 마르틴 루터 기념 행사에 참석한 것이다. 이날 예배는 루터가 1517년 95개조 반박문을 붙여 종교개혁의 불을 붙인 일을 기념하는 것이다. 교황은 이날 예배에서 "우리(가톨릭과 개신교)는 과거의 잘못을 인식하고 사죄를 구해야 한다. 하느님만이 유일한 판정자"라며 "서로를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되는 논쟁과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됐다"고 말했다. 교황은 루터에 대해서도 성서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해 준 인물이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런데 마르틴 루터는 공식적으로 1521년 교황 레오 10세에 의해 파문되어 이단자로 사망했으며, 가톨릭은 지금도 루터를 기독교 분열을 일으킨 인물로 인식하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행보에 대해 교황청 신앙교리성 장관을 지낸 독일의 게르하르트 뮐러 추기경은 "가톨릭 교회는 서방 교회 분열의 시발점이 된 '1517년 10월 31일'을 기념할 이유가 없다"고 밝혔다. 뮐러 추기경은 "하느님의 계시가 성경과 성전(聖傳)을 통해 신앙 교리, 성사, 그리고 하느님의 권한으로 수립된 교계제도 안에 온전하게 보존되었다고 확신한다면 우리는 교회에서 떨어져 나가야 하는 충분한 이유가 존재한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 이는 신앙의 근본적 문제가 아니라 부차적 문제로 교회 분열을 초래한 루터의 개혁 사상에 동의할 수 없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뮐러 추기경은 또 "교회일치운동의 최대 걸림돌은 상대주의와 현대 이데올로기의 무비판적 적용"이라고 말했다.#


3. 성직자들의 범죄에 대한 미온적 대응 및 은폐 가담 의혹[편집]


영화 스포트라이트를 통해 대중들에게도 잘 알려진 2002년 미국 보스턴대교구 사제들의 상습적 아동 성폭행과 은폐 사건 폭로 이후에도 끊임없이 이어지는 가톨릭의 성폭행과 학대 비리에 대한 폭로에도 "교황의 대응이 느리고 불충분하다"며 불만이 높아지고 있다. 사건에 관련된 사제들 가운데 자신의 심복으로 알려진 사람들에 대한 관용에 이어 본인도 은폐에 가담했다는 폭로, 그리고 이에 책임을 지고 교황직을 사임하라는 요구로 인해 2018년~2019년 서구 가톨릭계가 매우 시끄러워졌다.

  • 미국 보스턴대교구 은폐 사건의 주도자로 알려진 로(Law) 전직 추기경의 장례식에 참석하였다. 로 추기경이 성폭행 사제 은폐로 인하여 불명예스럽게 퇴직한 것을 알고 있음에도 장례식을 치르게 하고, 교황이 참석한 것을 보고 보스턴 성폭행 피해자는 "로 추기경은 지옥으로 가야 할 사람"이라고 힐난했다.

  • 2015년 교회 회의에 교황은 은퇴한 벨기에의 고드프리드 다니엘스 추기경을 초대하였는데, 사제에 의해 성폭행 당한 피해자에게 외부에 발설하지 말 것을 종용하는 발언의 녹음이 공개되어 크게 비웃음을 샀던 인물이다. 피해자는 가해자였던 로제르 방헬루에 신부의 조카였다고 한다.

  • 칠레의 악명높은 성폭행범 사제인 페르난도 카라디마(Fernando Karadima) 신부를 옹호하고 함께 성폭행에 가담했다는 의심을 사던 후안 바로스(Juan Barros) 신부를 주교로 임명하였다. 2018년 칠레 방문시 바로스의 신부의 면직을 요구하던 피해자에게는 '명예 훼손'이라고 공격하며 "증거를 대라. 본인은 2번이나 사의를 표했지만, 그를 믿고 내가 반려했다."고 답했다.
    • 하지만 비판이 일어나자 이후 프란치스코 교황은 해당 발언에 대해 사과하고 칠레에 교황특사 찰스 시클루나(Charles Scicluna) 대주교를 파견한다. 사실로 밝혀지자 사과하였다. 찰스 시클루나 대주교 파견 후 작성한 보고서에 따라 "진실하고 균형 잡힌 정보의 부족"#을 시인하고 피해자들에게 사과했으며 그해 4월 말에는 카라디마 사건 피해자들을 교황청으로 초대해 직접 면담했다. 뿐만 아니라 이번 칠레 가톨릭교회 성직자 성범죄 전수 조사로 칠레 주교들은 전원 사임 서한을 제출했으며, 논란의 중심에 있던 후안 바로스 주교의 사임이 수리되었다. 2018년 9월 28일에는 페르난도 카라디마의 성직을 박탈했다.

  • 뿌리깊은 가톨릭 국가였던 아일랜드에서 가톨릭 사제의 성폭행과 학교에서의 아동 학대, 미혼모 자녀들의 강제 입양, 유아 집단 매장으로 가톨릭에 대한 반감이 매우 높은 가운데 2018년 8월에 국빈 방문하였다. 방문 전 성폭행 피해자들의 면담 요청에 교황청이 "바빠서 시간이 없다"고 했다가 거센 비판을 받고 번복하였다.

  • 아일랜드에서 20명이 넘는 아동을 성폭행하여 실형을 산 유진 그린(Eugene Greene) 신부가 현직이던 시절 그를 상급자로서 파문하기를 거부한 필립 보이스 주교(Bishop Philip Boyce)를, 사건이 일어난 곳 이웃 교구장으로 2018년에 임명하였다.

  • 11세 남자 아동과 젊은 사제, 남자 신자들을 성폭행한 혐의로 정직되어 재판을 받고 있는 미국의 시오도어 맥캐릭(Theodore McCarrick) 추기경의 비위 사실을 알고도 수년간 은폐하였다는 전 주미교황대사 비가노 대주교의 폭로가 이어졌으나 비가노 대주교가 교황이 사건을 은폐하였다는 근거로 든 맥캐릭 전 추기경에 대한 '처벌'(sanction)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언론들을 통해 밝혀졌으며#, 심지어 전 교황대사가 2차로 공개한 서한에서는 말을 바꾸어 '처벌'이라는 것이 없었다고 시인하고 말았다. 결국 미국 가톨릭교회에서는 맥캐릭의 추문이 어느 정도 알려졌으나 이것이 교황에게까지 전달되지 않고 중간에서 가로막혔다고 보는 것이 중론이다. 실제 교황청 조사가 이뤄진 것은 지난 6월이며, 7월 말 추기경직 사임이 곧바로 수리되었다.#

이에 대해 프란치스코 교황은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 기자들이 알아서 판단하라"고 발언하였는데, 그렇다면 기자들이 판단할 수 있도록 '관련 기록을 다 공개하라'는 요구가 나오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우호적인 측에서는, 해당 발언은 애초에 기자들에게 "스스로의 취재 본분을 다하라"는 의미로 발언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한편 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개인 비서는 비가노 대주교의 폭로를 '가짜뉴스'라고 주장했다.#


  • 현재 비가노 대주교의 폭로로 인해 주목받는 또다른 쟁점은 미국 시카고 대교구장 블레이스 수피치(Blase Cupich) 추기경인데, 그는 "친동성애 이데올로기"#를 가졌다고 세간의 비판을 받고 있다.[1] 비가노 대주교 측과 이에 동조하는 사목자들은 맥캐릭 사태가 이런 '친동성애자'들의 네트워크 때문에 일어났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다만 비가노 대주교의 주장에도 의구심이 드는 구석은 있는데, 본인 주장에 따르면 이미 미국 주교들이 맥캐릭의 비행에 대해 다 알고 있었음에도, 본인이 주미교황대사로 재직했을 당시에는 왜 신고하지 않았느냐는 지적이 있다.

  • 미국의 대주교 2인이 이 사태와 관련된 의혹을 조사해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요구하였다. 또 많은 평신도들과 사제들도 이에 동참하였다.


4. 킴 데이비스 격려 방문 결정 과정 의혹[편집]


2015년 미국 방문시, 동성 커플의 혼인신고서를 받아주지 않아 법 위반 혐의로 투옥되었던 미국의 킴 데이비스를 만나 격려한 사실이 알려진 뒤 논란이 일자 교황청은 "당시 주미바티칸대사인 비가노 대주교가 예고 없이 데리고 와 만나게 되었다. 의도한 바 없다."고 주장하였지만, 비가노 대주교는 "킴 데이비스를 만나는 일정에 대해서는 이미 프란치스코 교황과 최측근들이 합의했던 일이었다"고 폭로하면서 진위공방 논란이 일고 있다.


5. 중국과의 무리한 타협[편집]


중화인민공화국은 건국 이래로 종교의 자유를 탄압해 왔으며, 바티칸의 수위권을 따르는 일반적인 천주교와 달리 중국공산당의 지휘를 받는 '중국천주교애국회(中国天主教爱国会)'라는 조직을 1957년 수립하고 모든 신부와 신자들이 이 단체에 소속될 것을 강요하고 있다.[2] 심지어 주교 서임도 교황이 아니라 중국공산당이 서임하고 있었다.(...) 그동안 바티칸은 중국공산당이 서임한 주교를 인정하지 않았고 이 문제로 바티칸과 중국은 수교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공산당의 정책에 반발하여, 교황의 수위권을 따르는 중국가톨릭 신자들은 중국천주교애국회 교회에는 나가지 않고 지하에서 자체적으로 종교활동이나 모임을 가지고 있다. 이런 지하교회는 중국 정부의 탄압의 대상이며, 적발될 경우 바로 감옥행이다. 또한 18세 이하의 청소년은 성당을 방문하는 것이 법으로 금지되어 있는 등, 여러 직/간접적 종교 박해를 일삼고 있다. 시진핑의 일인독재체제 강화 이후에는 이런 박해가 가톨릭과 중국 내 다른 종교들인 개신교, 이슬람교 등을 가리지 않고 심각해지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8년 9월 중국 정부와의 협상을 통해 주교 임명권을 중국 정부에 양보하고 중국이 자체적으로 임명한 주교 7명을 정식 주교로 승인, 중국 주교단의 세계주교시노드 참석도 승인했다.# 또한 앞으로도 중국애국회가 주교 후보자를 지명하면 교황청이 이를 승인하는 것으로 중국과 합의되었다고 알려졌다.

그동안 온갖 탄압 아래에서도 순교하며 신앙을 지켜온 중국 지하 정통교회 신자들의 믿음을 배반하고, 중국이라는 세속 권력과 타협하는 행동이라는 비판이 가톨릭교회 내부에서도 나오고 있는 상황. # 애국회가 중국의 정통교회로 공인되게 되면 그동안 탄압받으면서도 교황청의 지도를 받으며 일치해왔던 지하 가톨릭교회 신자들이 오히려 교회 일치를 깨는 자들로 몰리게 되고, 중국 정부의 탄압 명분이 더욱 강화되어 버릴 것이다. 물론 교황은 지하 정통교회에 대한 탄압 중지를 중국 정부에 협상조건으로 내놓았다지만, 이건 그간의 중국 정부의 박해 행태를 볼때 전혀 지켜질 것으로 기대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실제로 중국 정부는 정통 지하교회를 인정하는 제스처를 보이면서도 교황이 정식 임명했던 지하교회 주교들을 한단계 강등한 보좌주교로 만들고 이제 애국회가 정통교회라고 주장하며 지하교회의 자택미사를 금지하는 등 정통 지하교회에 대한 사실상의 탄압을 지속하고 있다. # 또한, 교황은 북한을 방문하겠다고 하면서도, 중국 정부의 분노를 의식하여 차이잉원 대만 총통이 공식적으로 요청한 대만 방문 초청을 거절하는 친중적인 행보를 보여 논란이 되었다. # 이런 교황의 행보가 대만의 천주교 신자들에게 실망감을 안겨주기도 하였다.

즉, 중국과 바티칸의 주교 서품 협정을 맺으면서 국가 무신론을 고수하고 있는 중국에 가톨릭교회의 수장인 교황이 고개를 숙였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 일단, 현재 가톨릭이 중국과의 국교 정상화에 큰 공을 들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서구는 신자 수의 증가가 정체상태에 빠진데 비해 중국은 신자들이 급격하게 늘고 있는 점도 있다. 교회 내 보수주의자들이 이런 지하교회를 무시하는 것으로 비추어지는 현 상황을 기회로 프란치스코 교황의 사임 분위기를 조장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결론적으로 공산당의 심각한 간섭 아래 있는 교회(애국교회)와 타협을 하느라 정작 교황을 온전히 따르는 중국 및 대만의 정통교회 신자들이 내몰리는 양상이 된 현 상황을 프란치스코 교황이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 지가 난제로 남게 되었다.

2019년 홍콩 민주화 운동에 대해서도 프란치스코 교황은 "평화를 바란다"는 입장만 밝혔을 뿐 별다른 입장이 없다. 그나마도 교황의 공식 입장은 11월 11일 사이완호역에서 홍콩 경찰이 비무장 시위대를 권총으로 실탄 사격해 중상을 입힌 직후에야 나왔다. 바티칸의 미온적인 태도 때문에 홍콩 가톨릭 내부에서는 바티칸이 홍콩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 지 알 수가 없어, 홍콩 가톨릭교회 내부의 분열상이 외부로 표출되고 말았다. 홍콩의 젊은 가톨릭 사제들과 신자들은 교황이 중국 눈치만 본다며 대놓고 비판한다. 홍콩에서 민주화 운동을 하는 것은 전통적으로 가톨릭개신교, 정교회, 성공회를 포괄하는 범 기독교계이다. 홍콩 민주화 인사 중에 범 기독교계가 아닌 인사가 없다. 홍콩에서는 주말 시위를 일요일 오후에 한다. 시위를 토요일이 아니라 일요일에 하는 이유 자체가 교회성당에 갔다가 예배/미사를 드리고 나오는 길에 시위에 참가하는 것이다. 그 정도로 홍콩 민주화에서는 기독교의 영향이 절대적이다. 그런데 범 기독교계의 한 축을 담당한다 할 수 있는 교황이 홍콩 문제에 대해 함구하는 듯한 행보를 보이고 있으니 홍콩 기독교계에 대한 비판까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홍콩의 젊은 사제들과 가톨릭 신자들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중국 당국의 눈치를 보지 말고, 요한 바오로 2세가 조국 폴란드에 대해 민주화 운동을 정면으로 지원했고 그 결과 폴란드가 1989년 민주화된 것처럼, 홍콩 민주화를 지지해주기를 바라고 있다.

홍콩 국가보안법을 언급하려고 했다가 철회하기도 했다. # 신간 '렛 어스 드림'(Let Us Dream: The Path to A Better)에서 "나는 자주 로힝야족과 위구르족, 야지디족 등 박해받는 사람들을 생각한다"고 말하는 등 아예 외면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 때문에 과거에 호르헤 비델라 군사독재에 대한 침묵이 다시 불거지는 상황이다.


5.1. 반박[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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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회 주교들을 교황과의 친교로 끌어안는다는 노선은 프란치스코 교황 때 갑자기 시작된 노선이 아니며, 그 이전부터 장기간 진행되어온 바티칸의 노선이다. 가령 베네딕토 16세 교황 시절이던 2007년 기준으로, '일부 극소수'[3] 주교를 제외하고는 애국회 주교들은 교황과 친교를 누리던 상태였다.

이는 베네딕토 16세 교황의 서한에서도 밝히고 있는 바이다.

일부 주교들은[4]

교회 생활에 대한 부당한 통제에 굴복하지 않고 베드로의 후계자와 가톨릭 교리에 온전히 충실하려는 열망에서 비밀리에 축성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비밀스러운 상황은 교회 생활의 정상적인 특징이 아니며, 역사가 보여 주듯이, 목자들과 신자들이 이러한 방법에 의존해 온 것은 오로지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신앙을 온전하게 보존하고, 교회 생활에 밀접하게 관련되는 문제들에서 국가 기관의 간섭에 저항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교황청은 이러한 합법적인 목자들이 필요하다면 사회적 효력을 위해서도 정부 당국의 인정을 받고, 모든 신자가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 환경 안에서 신앙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특수한 상황의 압력 아래 놓인 다른 목자들은[5]

교황의 위임 없이 주교품을 받는 데에 동의하였으나, 곧이어 베드로의 후계자와 다른 형제 주교들과 이루는 친교 안에 받아들여지기를 요청하였습니다. 교황은 그들의 성실한 마음과 복잡한 상황을 고려하고 이웃 주교들의 견해를 참작하여, 그들이 주교 재치권을 온전하고 합법적으로 수행하도록 교회의 보편 목자의 고유한 책임으로 허락하였습니다. 교황의 이러한 결정은 그들 축성의 특수 상황에 대한 이해와 완전한 친교를 재건하려는 깊은 사목적 관심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경우에 사제와 신자들은 자신의 주교가 합법적으로 인정받았다는 것을 충분히 알지 못한 까닭에 여러 가지 심각한 양심의 문제가 생겨났습니다. 더욱이 인정받은 주교들 가운데 일부는 그들의 합법성을 입증할 분명한 표지를 제시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해당 교구 공동체의 영적 선익을 위하여, 일단 그러한 인정을 받았으면 되도록 빨리 공개되어야 하고, 인정받은 주교들은 베드로의 후계자와 이루는 온전한 친교의 확실한 표지를 점점 더 제시하여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일부 극소수 주교들은[6]

교황의 위임 없이 서품을 받았고 필요한 법적 허가를 요청하지 않았거나 아직 받지 못하였습니다. 가톨릭 교회의 교리에 따라 이들은 합법적이지 않다고 여겨져야 하지만, 유효하게 서품된 주교들에게 성품을 받았고 가톨릭 주교 서품 예식이 존중된 것이 확실하다면 유효하게 서품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교황과 친교를 이루지는 않지만 성사 집전으로 비록 합법적이지는 않다 하여도 그들의 직무를 유효하게 수행합니다. 필요한 조건들이 성립되어 이러한 목자들도 베드로의 후계자와 모든 가톨릭 주교와 친교를 이룬다면 중국 교회가 얼마나 더 영적으로 풍요로워지겠습니까! 그러면 그들의 주교 직무가 합법화될 뿐만 아니라, 그들은 중국 교회가 로마 주교와 전 세계 다른 모든 개별 교회와 결합된 가톨릭 교회의 일부라고 생각하는 사제와 신자들과도 더욱 풍요로운 친교를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중화인민공화국 가톨릭 교회의 주교와 신부, 봉헌된 이들과 평신도들에게 보내는 베네딕토 16세 교황 성하의 서한」

즉 베네딕토 16세의 이 서한이 있었던 시기를 기준으로 할 때, 극소수를 제외하면 중국인 주교들은, 지하교회에서 활동하든 애국회에서 활동하든, 교회법상 합법적으로 인정받은 주교였으며 재치권을 온전히 허락받았으며 교황과 친교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애국회 소속이라고 한들 교회법적 합법 주교와 함께하는 가톨릭 신자는 분명하게 가톨릭 신자이며, 이들이 믿고 있는 건 가톨릭 신앙이지 무슨 사이비 종교 같은 게 아니다. 국가 무신론을 밀어주는 중국에서 '굳이' 종교를, 그것도 공산국가들이 가장 혐오하고 경계하는 종교인 가톨릭을 믿겠다는 것부터가 서방 국가보다 훨씬 큰 각오를 요구하는 것이며, 서방 국가에서 태어났으면 안전하게 가톨릭 믿었을 사람들이 단지 중국에서 태어났다는 불행 때문에 애국회에서 감시를 당하는 것이다. 따라서 애국회의 사람들을 모조리 '가톨릭 신자가 아니다'라고 취급해버리는 것은 가톨릭 입장에서도 옳지 않다. 이 단체의 구성원들을 교회법적 합법으로 끌어안는 것은 바티칸이든 중국 공산당이든 오래 전부터 원하고 있는 바이며, 서로 동의한다. 그리고 동의해야 마땅하다.

다만 대화가 막히는 주제는 2가지로, '주교 서품권'과 '바티칸-중화민국(대만) 관계'이다. 이러한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몇몇 언론들이 관영 단체에 대한 바티칸의 호의적 태도를 마치 교황청이 굴복한 것처럼 간주하면서 오해를 낳고는 하는데, 교황청은 주교 서품권을 포기한다고도 중화민국(대만)과 단교한다고도 발표한 적이 없다. 이미 공산 국가인 베트남에서도 바티칸과 베트남 공산당 양측이 동의하는 주교들이 당당히 활동하고 있기에, 바티칸과 공산당 양측의 동의를 얻는 주교라는 개념은 전례 없는 일이 아니다. (참조 기사번역)

In mainland China, there are also some bishops of the clandestine churches not yet recognized by the government. Some may still be living in situations deprived of freedom and are unable to exercise their episcopal ministry. Consequently, a future bishops’ conference in China would have to include all the legitimate bishops of the open Church as well as the clandestine bishops.To strive for and protect the legitimate authority of the bishops of the clandestine churches in China, Rome should also conduct a dialogue in order that these bishops be recognized by the government as legitimate. Some people are worried that the illegitimate bishops are being treated with excessive leniency in Sino-Vatican negotiations puts the principles of faith and communion of the church in second place. Such worries are unnecessary.If the Holy See has any intention of forsaking the principles of faith and communion of the church, there would actually be no need for it to dialogue and negotiate with the Chinese government. The unceasing dialogue actually represents the unwavering stance of the Holy See towards this question.

중국 본토에는 정부에 의해 아직 인정받지 못한 비밀 교회들에 속한 주교들도 있다. 일부는 아직도 자유를 빼앗긴 상태에 살고 있을 수 있으며, 자신들의 주교 직무를 실행할 수 없다. 그 결과, 장래의 중국 주교회의는 공식교회의 모든 합법 주교는 물론 이들 지하교회 주교들도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편집자 주[7]

- 공식교회의 상당수 주교는 주교 서품 전후에 교황청과 의사소통을 통해 합법 주교로 인정받은 상태이다.)

중국에 있는 지하교회 주교들의 합법적 권한을 추구하고 보호하기 위해, 로마는 이들이 정부에 의해 합법으로 인정받도록 하는 대화를 실행해야 한다. 일부 사람들은 이들 합법 주교가 중국과의 대화 속에서 (교황청이) 너무 양보함으로써 교회의 일치와 신앙이라는 원칙들이 뒤로 밀리는 가운데 처리되고 있다고 걱정한다. 그런 염려는 불필요하다.

만약 교황청이 교회의 일치와 신앙의 원칙들을 내버릴 생각이 있다면 중국 정부와 대화하고 협상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끊임없이 대화를 해왔다는 것 자체가 이런 물음에 대한 교황청의 확고한 입장을 대변한다.

통혼 추기경, 홍콩

원문번역

또한 지하교회가 처한 어려움은 당면한 현실이며, 이들에게 '이대로가 좋으니 그대로만 있어다오'라고 생각하는 것은 가톨릭적 관점에서 옳다고 단언하기도 어렵다. 따라서 바티칸 입장에서는 하루 빨리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교황청과 중국 당국의 대화는 오랫동안 이루어지고 있으며, 베트남 등 여러 특수한 사례들을 참조하여 주교 서품이 논의되고 있다.


6.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관련[편집]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서 프란치스코는 러시아에 우호적인 견해를 여러 차례 표명하고 전쟁의 책임이 서방에 있다고 말하여 논란이 되었다.

2022년 3월 유럽안보협력기구(OSCE)가 러시아의 전쟁범죄 조사를 개시하기 위한 투표를 했을 때 교황청이 기권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며 세계 여론의 비판을 받았다.

2022년 4월 민간인들이 잔혹하게 살해된 부차 학살과 마리우폴의 참상으로 러시아의 '제노사이드(집단학살)'가 국제적으로 비난을 받고 있지만, 프란치스코는 그 책임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 있음을 한번도 명시적으로 지적하지 않아 빈축을 샀다.

이처럼 교황이 중립을 구실로 러시아에 대한 비판을 피하자 많은 서방 정부 관계자들이 겉으로 표현은 하고 있지 않지만 크게 실망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

2022년 5월 3일 프란치스코는 이탈리아 언론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NATO가 도발한 것이라는 발언을 하여 논란이 되었다. 그는 "러시아 문 앞에서 NATO가 짖은 게 푸틴의 행동을 축발했을 수 있다."고 말하여 논란이 되었다. 여러 서방 언론들은 프란치스코의 발언에 우려 혹은 비난을 표명했다.

2022년 6월 15일에도 프란치스코는 또다시 나토 책임론을 거론하여 논란이 되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 푸틴을 만났는데, 푸틴이 나토의 움직임에 크게 걱정하고 있었다고 벌언했다. "그들(나토)가 러시아 문 앞에서 짖고 있다. 나토는 러시아가 제국이며 외세가 가까이 접하는 걸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푸틴의 발언을 전하며 푸틴을 옹호하고 서방을 비판했다. 프란치스코 본인도 이같은 비판이 있을 것을 의식해서인지 발언 말미에 "이 시점에서 누군가가 나에게 '당신은 푸틴을 지지한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다. 지나치게 단순화해 그렇게 말하면 틀린 것. 어떤 문제의 매우 복잡한 뿌리와 이해관계를 제대로 생각하지 않고 단순히 선과 악의 구별로 바꿔놓는 것에 반대한다"고 셀프 해명했다. 프란치스코의 이같은 발언은 서방은 제국주의적이라 비판하면서 러시아의 제국주의는 당연한 것이라며 옹호하는 정치적 이중잣대라는 비판을 받는다.

일각에서 전쟁의 피해를 입고 있는 우크라이나에 교황이 방문할 것은 청원했다. 우크라이나 정부 역시 교황을 키이우로 초청했다. 하지만 이러한 요청에 대해 프란치스코는 특사를 파견하긴 했지만 본인의 우크라이나 방문 요청은 계속해서 거절해왔다.

게다가 프린치스코는 러시아의 잔악 행위에 대해서 "선과 악이라는 흑백 논리는 위험하다."고 발언했다. 그는 러시아의 잔혹 행위보다 더 중요한 문제들이 있다며 애써 러시아의 잔혹 행위의 중요성을 줄이려는 것처럼 보이는 발언을 여러차례했다. 심지어 프란치스코는 러시아의 잔악 행위보다 이번 전쟁을 유발한 근본 문제점을 잊어서는 안된다며 서방 측에 원인을 돌리는 듯한 발언을 했다. 나아가 프란치스코는 뒤에서 전쟁을 조장한 세력을 있을 수도 있다며 음모론성 발언까지 하였다.

2022년 8월 24일 우크라이나 독립기념일에 프란치스코는 폭탄 테러로 사망한 알렉산드르 두긴의 딸을 "전쟁의 광기로 희생된 무고한 희생자"라고 언급하여 빈축을 샀다. 프란치스코는 "모스크바에서 그 불쌍한 여성이 카시트 밑에 설치된 폭탄에 의해 공중으로 날아갔다. 전쟁의 대가를 치르는 건 무고한 사람들"이라고 발언했다. 이 전쟁의 직접적인 발단이 된 두긴의 딸을 무고한 희생자로 칭하자 우크라이나는 반발했다. 우크라이나의 주교황청 대사 안드리 유라쉬는 "교황의 말은 실망스러웠다. 어떻게 러시아 제국주의 사상가 중 한 명을 무고한 희생가로 언급하는 것이 가능한가"라고 통탄했다. 우크라이나 외무부는 주 우크라이나 교황청 특사를 초치했다. 주 바티칸 대사의 공개 비판에 대해 교황청은 아무런 응답을 내놓지 않았다. 파문이 확산되자 일주일 후 교황청은 성명을 내고 "교황의 말씀은 정치적 입장이 아니라 인간의 생명과 관련된 가치를 옹호하기 위해 낸 목소리로 읽혀야 한다."며 사태를 수습하려 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발발한 이후 프란치스코는 매주 이 전쟁에 대해서 언급했다. 하지만 전쟁 발발 이후 반년 동안 프란치스코는 NATO가 전쟁의 원인이라는 발언을 두 차례 이상했지만, 그러는 동안 한번도 러시아를 비난하지 않았다. 프란치스코는 여러 번 "선과 악이라는 흑백 논리는 안된다"고 말하며 서방과 우크라이나도 잘못이 있다는 인상을 주는 발언을 했다.

이처럼 그는 교황으로서 선을 넘는 발언들을 여러차례했다. 이러한 일련의 발언들은 서방 세계에 논란을 일으켰었고, 성향이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실망감을 주었다. 프란치스코는 이전에도 전임 교황들은 논란이 있어왔지만, 수많은 사상자가 나오는 우크라이나 러시아 전쟁에서까지 이같은 발언을 이어가자 적지 않은 비판이 나오고 있으며, 주요 언론들은 아예 교황의 발언에 대한 보도를 줄이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시간이 흘러 전쟁이 장기화되고 세계 여론이 러시아에 부정적인 쪽으로 흘러가자 프란치스코 교황은 러시아에 대한 비판 발언을 높이고 있다. 프란치스코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지 반년도 더 지난 2022년 8월 30일에야 러시아를 직접 비판했다. 그는 "러시아는 침략자"라고 처음으로 언급하였고 이어 "야만스럽고 분별 없으며 혐오스럽고 신성모독적"이라며 수위 높은 비판을 가했다. 전쟁이 발발한 후 교황이 러시아를 명시적으로 비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NYT가 보도했다. # 또 전쟁을 나치의 학살과 비견하는 발언도 하였다.# 우크라이나를 발언하며 눈물을 보이거나 크리스마스 선물을 살 돈을 줄이고 우크라이나를 돕자고 호소하는 등# 명백하게 러시아 측에 전쟁의 책임을 돌리고 우크라이나를 피해자로 여기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또한 러시아 정교회의 수장 키릴 총대주교에게는 푸틴의 복사 노릇하며 우크라이나 침공을 정당화하지 말라고 말했다.# 시기적으로는 러시아 정교회 대표단과 회담을 나눈 직후에 나온 발언인데, 이 때문에 직접 면대면으로 말을 섞어보고서야 말이 안통하는 극단적인 성향을 체감한 게 아니냐는 얘기가 나오기도 한다. 해당 전쟁 외에 집권기간동안 교황이 유일하게 무력사용을 긍정한 사례가 바로 ISIS.

하지만 이런 모습에 대해 일각에서는 과거 그의 발언으로 비추어볼 때 위선이라는 차가운 시선도 있다. 또 교황이 최근 러시아를 비판하면서도 그때마다 푸틴 언급을 피해가고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그러다가 2023년 8월 25일, 화상 연설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모인 러시아의 신자들에게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것을 잊지 마라' '여러분은 위대한 러시아의 후예' '성인들과 왕들의 위대한 러시아, 표토르 대제와 예카테리나 2세의 위대한 러시아, 위대한 러시아 제국, 많은 문화' '여러분은 위대한 어머니 러시아의 후예이며 앞으로 나아가라'는 발언을 하여 우크라이나를 비롯한 동유럽 국가들이 발칵 뒤집어졌다. 러시아 제국은 우크라이나를 처음으로 러시아 민족의 이름 하에 식민화시키고 우크라이나의 문화를 짓밟고 폭정을 일삼은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또한 블라디미르 푸틴이 우크라이나를 자국 영토로 취급하는 것에 대한 명분으로 사용하고 있다. 당연히 당사자인 우크라이나는 유감을 표했으며, 우크라이나 정교회 스뱌토슬라우 셰우추크 대주교는 성명을 내며 교황청에 해명을 요구하였다. 크렘린궁은 당연히 이번 교황의 발언에 환영했다. # 토마스 헨드릭 일베스 전 에스토니아 대통령은 트위터에서 교황의 이번 발언에 정말로 역겹다며 비난했다. # #

사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조국인 아르헨티나러시아-아르헨티나 관계 문서에서 설명하는 것처럼 친러 국가인데, 이러한 점이 프란치스코 교황 개인의 성향에도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있다.


7. 동성 커플 축복 논란[편집]


2023년 12월 중순 교황청이 동성커플 축복 가능하고 하느님은 모두를 환영한다고 공식 승인했다.
축복의 의미를 밝혀 적은 신앙교리부의 선언문 ‘간청하는 믿음’(Fiducia Supplicans)을 발표하며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를 검토·승인·서명했다고 밝혔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회는 사람들이 다가오는 것을 막거나 금지해선 안 된다"면서 동성 커플의 축복 요청 역시 거부해선 안 된다고 밝혔다. 다만, 교황청은 결혼은 ‘남녀가 맺는 평생의 결합’이라는 기존 교리를 바꾸진 않았다. 그에 따라 선언문은 교회가 행하는 혼인성사 등 예식과 동성커플에 대한 축복 행위를 연계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또 혼인성사처럼 보이는 의식 절차를 따르거나 결혼식에서 사용하는 의복을 입을 수 없게 했다. #1 #2 #3
이 외 재혼부부, 동성부부, 혼배성사를 받지 않았거나 받지 못한 부부에 대한 축복 허용이라는 입장을 냈다. 허용에 대한 배경 정리글
교리를 지키면서 전향적인 변화를 시도했으나 보수파의 반발로 교회 안팎의 갈등을 부를 거라는 일부 우려도 나오고 있다.

교황은 이미 여러차례 동성애 인정 발언을 했었다. 앞서 2023년 2월에도 동성애를 인정하는 메시지를 내놓기도 했다. 2023년 11월에는 트랜스젠더도 가톨릭 세례를 받고, 대부모·혼인의 증인이 될 수 있게 하는 신앙교리부 지침을 승인한 바 있다.

[1] 가톨릭 교리는 공식적으로 게이 문화와 동성애 문화를 지지하는 것을 금지한다. 평신도는 말할 것도 없고, 특히 성직자라면 더욱 그렇다.[2] 중국국가 무신론을 채택했지만 명목상으로나마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3]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사용한 표현이다.[4] 지하교회 주교들.[5] 애국회 소속이지만 교황과의 친교가 이루어져 교회법적 관점에서도 합법적인 주교들.[6] 애국회 소속이며 교황과의 온전한 친교가 이루어지지 않은 주교들[7] 위키의 편집자가 아니라 기사 편집자의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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