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시모토 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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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破壊王>
橋本 真也(はしもと しん や / Shinya Hashimoto


파일:하시모토신야.png
본명
하시모토 신야
橋本 真也(はしもと しん や
출생
1965년 7월 3일
일본파일:일본 국기.svg 기후현 토키시(土岐市(と き し)
사망
2005. 7. 11 (향년 40세)
요코하마시 미나미구
요코하마시립대학부속 시민종합의료센터
신장
183cm
체중
135kg
가족 관계
장남 하시모토 다이치(橋本 大地(はしもと だい ち)[1]
유형
브롤러 + 스트롱 스타일
시그니쳐 무브
케사기리 찹
각종 킥
잇뽄제오이(一本背負(いっぽん ぜ おい)[2]
피셔맨 버스터
DDT, 점핑 DDT
우라(裏) DDT
다이빙 엘보 드롭
십자굳히기(十字固(じゅうじがため)
피니쉬 무브
수직낙하식 DDT[3]
별명
투혼전승(闘魂伝承(とうこんでんしょう)
파괴왕(破壊王(は かいおう)
테마곡
[ruby(闘魂伝承, ruby=とうこんでんしょう)] (1997)[4]
[ruby(爆勝宣言, ruby=ばくしょうせんげん)] (1989 - 1996, 1998 - 2005)[5]
데뷔
1984년 9월 1일 도쿄도 네리마구 네리마 남부구장 특설 링
신일본 블러디 파이트 시리즈 9일차
vs 고토 타츠토시[6]
마지막 경기
2004년 8월 31일 이와테현 모리오카시 이와테현영체육관
ZERO-ONE Determination
vs 오오타니 신지로 & 오오모리 타카오[7]
(w/후지와라 요시아키)

1. 개요
2. 경력
3. 여담
3.1. 장난의 화신
4. 출연 작품
4.1. 영화
5. 둘러보기



1. 개요[편집]


"(とき(た!それだけだ。"[8]


(때는 왔다! 그것 뿐이다.)

일본의 프로레슬러.

동기 무토 케이지, 쵸노 마사히로와 함께 투혼 삼총사로 신일본에서 인상깊은 활약을 보여줬으나, 믿어왔던 스승 안토니오 이노키와 평생을 몸담아왔던 신일본에게 버림받고 자신이 세운 단체에서도 불명예스럽게 쫓겨난 후, 40세의 젊은 나이에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비운의 선수이다.


2. 경력[편집]


학창 시절에 유도를 하다가 안토니오 이노키를 동경해 신일본 프로레슬링에 입단했다. 투혼삼총사 가운데 한 명으로, 무토 케이지쵸노 마사히로와는 동기다.

무토 케이지가 '천재'로 불리는 프로레슬링 센스를, 쵸노 마사히로가 '검은 카리스마'로 관객들에게 어필했다면 하시모토 신야는 파괴적인 파이팅 스타일로 1990년대 신일본 프로레슬링의 대표적인 프로레슬러로 활동했다. 하지만 하시모토 신야의 스타일이 라이트팬에겐 좀 어필이 안 되었는지, 셋의 매치업은 무토 케이지 vs 쵸노 마사히로 쪽이 더 인기를 끌었다.

1996년 4월 29일에 타카다 노부히코와의 최종전에서 이기고 IWGP 헤비웨이트 챔피언십을 차지하며 UWF 인터내셔널과의 항쟁에서 신일본 프로레슬링에게 승리를 안겨준다. 1998년 8월 1일엔 G1 클라이막스 8에서 텐류 겐이치로와 정면 승부를 가져 데이브 멜처에게 4.75성을 받는 명경기를 만들어서, 본인 커리어 사상 최고 평점을 받았다.

1997년에 올림픽 은메달리스트인 오가와 나오야(小川直也)가 프로레슬러로 데뷔했을 때 대립한다. 두 사람의 대립은 전형적인 입식타격 vs 유술의 이종격투기 양상으로 흘렀다. 첫 싸움에서 하시모토 신야는 포지션과 거리 조절에 실패해서 입식타격이 서브미션에 밀리는 전형적인 패턴으로 패했고(...), 리벤지 매치에서는 반대로 유술가의 취약한 가드를 찌른 로우킥 & 미들킥 콤비네이션으로 기권승을 거뒀다.

1999년 1월 4일에 도쿄돔에서 가진 세 번째 시합에서 오가와 나오야가 지금껏 입던 유도복 대신 이종격투기 선수의 복장인 오픈 핑거 글러브와 팬츠, 슈즈 차림으로 나섰다. 그리고 유도를 베이스로 한 지난 시합과는 다른 격투가의 시합을 펼치서 하시모토 신야는 압도당한다. 경기 양상이 과열되면서 양측 세컨드끼리 패싸움이 터지며 시합은 무효로 끝났지만 사실상 하시모토 신야의 패배였다. 백마운트, 사커킥, 스톰핑까지 당하면서 전혀 대응을 못하고 링 밖으로 나가떨어졌다.

오가와 나오야와의 세번째 시합은 시멘트 매치였다. 시합 전에 합을 맞추기 위해 미팅을 가졌으나 오가와 나오야가 불참했고, 시멘트 매치임을 직감한 하시모토 신야는 온몸에 오일을 바르고 경기에 임했다. 하지만 유도를 베이스로 하는 입장에서 유도 올림픽 메달리스트인 오가와 나오야에게 실전에서 이길 수가 없는 싸움이었다. 경기를 보면 오가와 나오야의 펀치와 킥이 프로레슬링 식이 아닌 이종격투기 식으로 들어간다. 이는 안토니오 이노키의 지시라는 설이 정론이며 단순히 이노키의 단독 지시가 아니라 당시 하시모토 신야를 탐탁치 않게 여기던 신일본 프로레슬링의 현장 감독 쵸슈 리키의 묵인 하에 펼쳐졌다는 설도 있다.

신일본 프로레슬링의 사장에 취임한 후지나미 타츠미는 흥행을 위해서, 하시모토 신야를 설득해 복귀시키며 오가와 나오야와의 대전을 잡았다. 네번째 시합도 패배한 하시모토 신야는 2000년 4월 7일에 도쿄돔에서 열린 다섯번째 시합에서 '패하면 은퇴한다'라는 조건까지 걸고 결전에 임했으나 끝내 오가와 나오야에게 패했는데, 시청률이 15%가 나오며 흥행했다. 당시 후지나미 타츠미는 하시모토 신야를 은퇴시킬 생각이 없었지만 TV 아사히의 갑질이 있었다.

이후 복귀를 바라던 어린이팬들이 100만마리 종이학을 접어 보내줬고, 이를 계기로 다시 마음을 다잡고 8월에 프로레슬러로 복귀한다. 이 무렵 일본 프로레슬링계는 미묘한 세대교체 시기를 맞고 있었는데, 자이언트 바바가 사망하면서 사실상 링의 헤게모니는 전일본 프로레슬링의 사천왕이나 신일본 프로레슬링의 투혼삼총사 세대가 쥐어야했다. 그러나 신일본 프로레슬링에선 안토니오 이노키가 아예 흑막처럼 똬리를 트고 있고, 쵸슈 리키나 텐류 겐이치로 등 바로 윗세대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신일본 프로레슬링의 상부층은 전일본 프로레슬링과 교류해야 한다고 판단했지만, 하시모토 신야는 전일본 선수 이탈사건 이후 탄생한 프로레슬링 NOAH와 교류해야 한다고 봤다. 이런 시각 차이 때문에 결국은 그토록 동경했던 안토니오 이노키와 사이가 틀어지고, 하시모토 신야는 11월에 신일본 프로레슬링을 나온다.

2001년 1월에 하시모토 신야는 자신의 단체인 제로원(ZERO-ONE)을 설립하고, 3월 2일에 첫 흥행을 연다. 제로원의 특징은 사실상의 풀컨택트 타격으로, 부상을 방지하기 위해 타격기를 소리만 날 정도로 때리고 피폭자가 오버해서 맞아주는 기존의 프로레슬링에 비해 리얼함을 강조한 것이었다. 하지만 K-1 참전 여부를 물어보는 기자에게 그곳에서 자신의 킥은 통하지 않는다고 답하며 프로레슬링과 격투기는 명백히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이노키즘하고는 선을 그었다.

ZERO-ONE 출범 당시 첫 메인 이벤트가 하시모토 신야 & 나가타 유지 vs 미사와 미츠하루 & 아키야마 준의 태그 매치였다. 신일본 프로레슬링과 전일본 프로레슬링에서 톱스타였던 수퍼스타와 차세대 수퍼스타가 한 팀을 이룬,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매치업이었다. 흥행의 보증수표나 다름없는 네 사람이 보여준 기량은 훌륭했고, 단체 대항전의 분위기 속에서 가진 팽팽한 신경전과 자존심 싸움 또한 일품이었다. 이를 계기로 일본 프로레슬링 계에서 단체간 진입 장벽이 낮아져 일본 내 단체들끼리 교류하게 된다.

그리고 이 날 경기장에 오가와 나오야가 모습을 드러낸다. 2002년에 오가와 나오야는 안토니오 이노키와 견해 차이를 보이다 신일본 프로레슬링을 떠났고, 제로원에서 하시모토 신야와 태그팀 OH포를 결성했다. 안토니오 이노키 때문에 프로레슬링에 뛰어든 두 사람이 숙적이 되어 싸우고, 끝내 이노키와 결별하곤 동반자가 되었다는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설경구가 주연으로 참여한 영화 '역도산'에서 후나키 마사카츠, 무토 케이지와 함께 출연했다. 하시모토 신야는 스모계 밑바닥에서 뼈를 깎는 고생을 하던 역도산이 동경하는 요코즈나인 '아즈마나미' 역을 맡아서, 스모 선수 출신의 프로레슬러 역할을 훌륭히 소화해내며 '파괴왕'이라는 별명답게 화끈한 모습을 선보였다.

그러나 ZERO-ONE은 꾸준히 경영난에 시달렸고, 결국 2004년 11월에 ZERO-ONE 붕괴를 선언하는데 문제는 이 과정에서 하시모토가 공금을 횡령한 사실이 적발된 것이었다. 결국 하시모토의 선언과 달리 ZERO-ONE은 ZERO-ONE MAX로 이름을 바꾸고 계속 존속했으며[9], 불법을 저지른 하시모토만 사장 자리에서 물러나 자숙 겸 고질적인 어깨부상을 치료하고자 긴 재활에 들어갔다. 그리고 2005년 7월 11일, 갑작스런 뇌출혈로 40세의 나이에 사망했다. 투혼삼총사를 비롯해서 1만명을 넘는 사람들이 장례식에 참여해 하시모토 신야의 죽음을 슬퍼했다.

하시모토 신야의 아들 하시모토 다이치가 '파괴왕자'라는 별칭을 가지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프로레슬러가 되었으며, 하시모토 신야의 오랜 벗인 쵸노 마사히로와 오오타니 신지로가 육성 책임을 맡고 블로그를 개설한다.

호쾌함과 카리스마는 여느 신일본 프로레슬링의 메인 이벤터들에 뒤지지않는 명 프로레슬러였지만, 명성에 걸맞지 않게 접수에서 혹평을 받기도 한다. 타격기를 맞는 것을 두려워하는 게 경기마다 눈에 띄는 수준이었다. 일본 프로레슬링의 타격기 접수는 일단 제대로 맞아주고 약간 텀을 주면서 고통을 참는 듯한 묘사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하시모토 신야는 노골적으로 안 아프게 맞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듯한 모양새였고, 이후에는 이게 맞은 건지 어떤 건지 전혀 반응이 없었다. 정리하자면 맞는 것을 상당히 두려워했다. 헌데 그러면서 때리는 기술은 매번 무지막지하게 해대서 같은 투혼 삼총사이자 절친인 무토 케이지조차도 그렇게 세게 때리는 놈이 될 줄 몰랐다며 혀를 찰 정도. 커리어 내내 상대선수에게 배려심 없게 기술을 세게 넣어서 동시기 활동했던 동료 레슬러들은 학을 뗐다고 한다. 어느 정도였냐 하면 WWE 내에서 기술 세게 걸고 배려심 없다고 악명이 높은 3인방인 존 브래드쇼 레이필드 & 하드코어 할리 & 버버레이 더들리 이 셋조차도 하시모토가 때리는 거에 비하면 양반으로 보일 정도. 즉 그냥 내가 세게 팰테니 알아서 버티라는 식...그야말로 내로남불이자 이율배반적 행태로 팬들이 생각할 정도. 이런 점이 같은 투혼 삼총사 중에서도 무토나 쵸노에게 밀린 이유일지도 모른다.


3. 여담[편집]


  • 데뷔 초 '세계의 사나운 독수리' 사카구치 세이지의 심부름꾼 시절, 사카구치의 비싼 무좀약 병을 깨뜨리고 한 병에 5천엔짜리 고가의 영양제는 자기가 먹어버렸으며, 한번은 흥행 수익이 들어있는 케이스를 여관에 놓고 오고선 찾은 후에 그 케이스를 밖에서 여는 바람에 돈뭉치가 날라가버리는 대사건을 저질러 보다 못한 사카구치 세이지가 노가미 아키라(AKIRA)를 '심부름꾼의 심부름꾼'으로 붙인 적이 있다.

  • 겉보기와는 다르게 요리에 조예가 상당히 깊었으며, 특히 요리 재료에 집착해서 돈을 아끼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수신 선더 라이거의 증언으로는 어느날 '두부를 만들겠다'라고 하더니 간수와 콩까지 직접 사러가는 등 지나치게 열정을 쏟은 바람에 만들어낸 두부 한 모 원가가 1만엔에 달했다고(...). 후술할 텐잔에게 속여서 먹인 참새도 본인이 직접 손질했다고 한다.

  • 자신의 심부름꾼은 꽤 잘 챙겨서 원정 때 심부름꾼의 식비까지 자기가 계산하고 다 먹은 후에 편의점에서만 몇만엔어치의 군것질거리까지 사주어 원없이 먹였으며, 초슈 리키 테마곡을 개사한 노래를 초슈 몰래 함께 부르기도 했다.

  • 긴자의 한 클럽에 무토 케이지와 함께 가서 각자 자기 스타일의 호스티스를 지명하여 몇 시간 동안 멘트 날리며 작업했는데 보기좋게 차였고, 하필 돌아가는 길에 우산도 없는데 비가 와서 둘이서 비맞으며 쓸쓸히 돌아간 적이 있다고 한다(...).

  • 안토니오 이노키가 던진 빨간 수건을 잡은 관객이 좋아하고 있었는데 하시모토가 그 관객에게 다가갔다. 관객이 '아...돌려줘야 되는건가...' 하며 내밀었더니 하시모토가 "이렇게 안 하면 다른 사람이 훔쳐갑니다"라고 하며 자상하게 수건을 관객의 손에 묶어주었다고 한다.

  • 2002년에 편의점 도시락을 프로듀스한 적이 있다. 이름은 '파괴왕의 스테미너 도시락(破壊王のスタミナ弁当)'과 '파괴왕의 카츠(이긴다)[10]카레(破壊王の勝カレー)'으로 구성이 죄다 튀김류라 각각 580엔, 550엔의 가격에 1300~1400칼로리에 육박하는 초고열량 도시락이었으며, 어마어마한 열량에 비해 가격이 제법 괜찮아 노동자들에게 인기를 끌어서 대히트를 쳤다고 한다. 발매 전에 "다 큰 어른이 칼로리 계산따위를 해선 안된다! 사나이는 열심히 일하고, 많이 먹으면 되는 것이다!"(大の大人がカロリー計算なんかしていたらダメだ!男は一生懸命働いて、たくさん喰えばいいんだ!)라는 명언을 남겼다. 그래놓고 한 팬이랑 만났을 때 그 팬이 "저 그 도시락 먹었어요!"라고 하자 "그런거 계속 먹으면 병걸린다고"라고 말했다.

  • 2005년 4월 경 이혼한 후 이미 고인이 된 후유키 고도(冬木弘道)[11]의 미망인과 약혼하고 교제하고 있었으나[12] 이혼 불과 3개월 뒤 하시모토가 사망하자 임종은 악혼녀가 지켰으며 전처가 장례식장을 지켰다. 이혼 3개월 뒤에 사망하였기 때문에 자녀도 전처와의 자녀 1남 2녀가 전부.

  • 사망 이후 5일장을 치루고 7월 16일에 화장되었는데, 화장할 때 충격적이게도 시신의 얼굴이 검게 변색되고 악취가 나는 사태가 벌어졌다. 애초에 드라이아이스 등으로 시신을 제대로 보존했으면 부패할 일 자체가 없었거니와 부패가 진행됨이 판명되었을 때 방취제 사용, 시신용 파운데이션 사용 등으로 부패 진행을 막을 수 있었음에도 장의사가 초짜인지는 몰라도 이같은 조치를 전혀 취하지 않았다는 의혹이 강력하게 제기되어 전처를 비롯한 유족들이 장의사의 과실을 성토했다.

  • 하마오카 켄지의 만화 괴짜가족에서도 등장, 이 만화에서도 유명 프로레슬러이지만 만화 장르가 장르다보니 사정없이 망가진다. 실사 드라마에서도 등장하는데, 이미 고인이 된 하시모토 신야 본인을 대신해 아들인 하시모토 다이치가 대역으로 출연하였다.

  • 아들 하시모토 다이치(1992~) 역시 프로레슬러이다. 키 180cm에 아버지를 닮은 외형이지만 체격은 아버지보다 아주 약간 작다.

3.1. 장난의 화신[편집]


일본 프로레슬링계를 통틀어 독보적인 장난의 화신이여서 장난기에 대한 에피소드가 상당하다. 7년 후배인 '싸우는 철학자' 니시무라 오사무가 가장 큰 공범이었으며, 주 피해자는 순진함의 극치로 유명한 후배 텐잔 히로요시였다.

  • 코지마 사토시가 벌레를 무서워한다는 것을 알고 공원에서 매미를 손수 100마리를 잡아서 코지마의 방에 풀어놓은 적이 있다. 코지마 몰래 매미를 방에 풀어놓을 기회를 얻기 위해서 일부러 화난 척을 해서 코지마에게 일을 시키고 방에서 내쫓은 다음 매미를 풀어놓았고, 코지마가 돌아오자 화난척 "할 얘기가 있으니까 너부터 방에 들어가라!"라며 코지마를 방에 들여놓고 문을 닫는 치밀함을 보여줬다. 당연히 코지마는 아무것도 모른체 방에 들어갔다가 비명을 지르며 뛰쳐나왔고(...) 결국 옆방에 있던 나카니시 마나부에게 대신 매미 좀 잡아달라고 부탁해서 마나부가 매미를 다 잡을때까지 방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한다.

  • 텐잔이 심부름꾼이었던 시절, 공기총으로 참새를 사냥한 다음 텐잔을 속여서 먹인 적이 있다. 텐잔은 이후 몸무게가 10kg이나 빠져 두려워진 나머지 보건소에 전화를 걸어 "전염병 같은 거 걸린거 아닌가요..."라고 물어봤다고.

  • 텐잔에게 옷을 다 벗고 길거리 자판기에서 음료를 사오라고 했는데 텐잔이 주저하자, 자신이 직접 시범을 보였다고 한다.(...)

  • 또 또 텐잔이 심부름꾼이었던 시절 텐잔의 고간에 캔을 씌워 놓고 개조한 비비탄 총으로 쐈다고...여태까지는 친한 동기 수신 선더 라이거가 한 걸로 알려져있었으나 수신이 자신의 유튜브에서 직접 '옆에서 보기는 했지만 내가 아니라 하시모토가 했다'라며 열변을 토했다.

  • 크리스 벤와가 신일본에서 활동하던 때 훈련이 끝난 후 모기향 위에 폭죽을 올려놓고 시한폭탄을 만드는 법을 가르쳐주었다고 한다.

  • 테마곡을 개사해서 남을 놀려먹는 경우도 있었는데, 대표적 피해자는 동기 무토 케이지와 악연인 선배 초슈 리키. 무토의 탈모가 심해지자 HOLD OUT 처음의 '레 도 시 라 라시파' 부분에 맞춰 "武藤ちゃんがハゲる~(무토짱가 하게루; 무토 머리가 벗겨져~)"라고 하도 놀려대서 짜증난 무토가 테마곡을 바꾼 것은 유명한 이야기.[13] 초슈 리키의 경우에는 아예 1절 전체를 개사해서
長州力〜〜 足が短い 長州力〜〜 腕が短い - 초슈 리키~ 아시가 미지카이 초슈 리키~ 우데가 미지카이
(초슈 리키~ 다리가 짧다네 초슈 리키~ 팔도 짧다네)
長州力〜〜 胴が短い 長州力〜〜 全部短い - 초슈 리키~ 도-가 미지카이 초슈 리키~ 젠-부 미지카이
(초슈 리키~ 몸통도 짧다네 초슈 리키~ 전부 짧다네)
チャラララ チャラララ・・・・・ - 챠라라라라 챠라라라라~
로 바꿔 불렀다(...).


4. 출연 작품[편집]



4.1. 영화[편집]


연도
제목
배역
비고
관객수
흥행
2004
역도산
아즈마나미



5. 둘러보기[편집]


파일:신일본 프로레슬링 로고.svg 역대 G1 클라이맥스 우승자
1997

1998

1999
사사키 켄스케

하시모토 신야

나카니시 마나부

파일:신일본 프로레슬링 로고.svg 역대 월드 태그 리그 우승자
1991

1992

1993,1994
후지나미 타츠미 & 빅 밴 베이더

하시모토 신야 & 초슈 리키

하세 히로시 & 무토 케이지
1995

1996

1997
쵸텐
쵸노 마사히로 & 텐잔 히로요시

하시모토 신야 & 스캇 노튼

nWo JAPAN
쵸노 마사히로 & 무토 케이지

파일:NWA 명예의 전당.jpg
2010년 NWA 명예의 전당 헌액자

파일:프로레슬링 옵저버 로고.png
2000년 레슬링 옵저버 명예의 전당 헌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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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본의 프로레슬러. 1992년생으로 하시모토와 전처 사이의 1남 2녀 중 첫째이다. 하시모토 신야의 사망 이후 프로레슬러를 지망하여 2011년에 데뷔했으며 카나가와현 기반의 인디단체 대일본 프로레슬링 소속으로 챔피언 전선에서 활약하고 있다.[2] 한판 업어치기. 원래는 유도 기술로, 유도 경력이 있는 하시모토가 애용한 기술.[3] 이름은 DDT인데 아무리 봐도 수직낙하식 브레인버스터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기술이었다. 정작 본인은 "스텝 밟는 게 DDT식이니까 이건 DDT가 맞다!"며 죽는 날까지 DDT라고 고집했다고 한다.[4] 투혼전승. 1997년 잠깐 쓰다가 오가와 나오야와의 리벤지전 때 다시 폭승선언으로 테마를 바꿔버렸기 때문에 하시모토 팬들 사이에서는 '환상의 테마'로 불리우고 있다. 이 노래는 하시모토 신야 사망 이후 2011년에 데뷔한 아들 하시모토 다이치가 물려받아 다시 사용하기 시작했다.[5] 폭승선언. 하시모토 신야를 상징하는 테마곡.[6] '미스터 백드롭'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선수. '북두의 유성' 하세 히로시에게 백드롭을 시전했다가 하세가 심장마비를 일으켜 진짜로 죽다 살아났을 정도의 강렬한 백드롭으로 유명했다. '광견' 오하라 미치요시와의 광견 태그로도 유명했는데, 그에 걸맞는 지랄맞은 술버릇으로도 유명했다.[7] 이 경기 이후 11월 제로원이 붕괴하며 미뤄왔던 오른쪽 어깨 수술을 받고 재활에 들어갔다가 복귀가 예상되던 시점에 급사하여 이 경기가 생전 마지막 경기가 되었다.[8] 하시모토 신야를 대표하는 명언.# 1990년 2월 10일, 안토니오 이노키 & 사카구치 세이지 VS 하시모토 신야 & 쵸노 마사히로의 태그팀 경기 전에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당시 양쪽 대기실이 모두 굉장히 험악한 분위기인 가운데 쵸노가 "똑바로 봐둬라 자식아!! 박살내줄테니까!"라며 과격한 코멘트를 한 직후에 하시모토가 뜬금없이 이런 오글거리며 짧고 굵은 코멘트를 담담하게 질렀고, 옆에서 듣던 쵸노는 그 온도차에 어처구니가 없었는지 웃음이 터졌고, 실제로 웃음을 억지로 참는 듯한 모습이 카메라에 잡혀버렸다.[9] 이후 인디단체로 그럭저럭 운영되었으며, 몇 년 후에는 다시 원래 이름을 되찾기도 했으나 결국 해산했다.[10] 일본어로 돈카츠의 '카츠'와 이긴다라는 뜻의 '카츠(勝つ)'가 발음이 같다.[11] 본명은 한자는 동일하고 읽는 법만 다른 후유키 히로미치. 일본 프로레슬링 역사상 최고의 악역 중 한명으로 꼽히는 선수. '프로레슬링은 엔터테인먼트다'라는 개념을 실전뽕에 미쳐있던 시절에 일찍이 깨달은 선구자였으며 자도&게도가 그의 제자로 신일본 프로레슬링의 브레인으로 재직하며 성공적인 엔터테인먼트 단체로 신일본을 이끌었다.[12] 시기를 보아 사실상 하시모토의 불륜이었다는 것이 기정사실로 여겨지고 있다.[13] 이것 때문에 이 곡의 작곡가인 스즈키 오사무가 하시모토에게 직접 항의를 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