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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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2.1. 소련 시절
2.2. 북한 시절
2.3. 말년
3. 참고문헌



1. 개요[편집]


고려인 출신의 북한의 군인, 정치인.

2. 생애[편집]



2.1. 소련 시절[편집]


1908년 8월 12일, 함흥에서 태어났으나 경술국치 이후 1916년, 부모를 따라서 연해주 포시에트 구역으로 이주하였다. 1920년에 소학교를 졸업, 노보키예프스크에서 1926년 고급중학을 졸업했다. 이후 군 공청위원회에 가입, 청년사업을 하였으나 이때까지만 해도 소련에서 농업 집단화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이라서 부농들의 농사일을 도우며 먹고 살았다. 1930년에 연해주의 농업 협동화가 시작되자 협동조합 공청위원장, 협동조합 당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30년, 블라디보스토크 고급 당학교에 진학, 1932년에 졸업하였고 포시예트 구역 지도원으로 배치되었다. 1935년 하바롭스크 공산대학에 진학하여 1936년에 졸업하였고 고려인 정시나와 결혼, 계속 구역 당 지도원으로 일하다가 1937년에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로 강제이주당했다. 거기서 군당 협동조합 당위원장으로 배치되어 1940년까지 근무했다. 그러다가 1941년 2월 15일, 국가안전위원회로부터 급히 모스크바로 호출을 받고 정찰학교에 배치되어 정찰병 교육을 받았다. 1943년, 정찰학교를 졸업하고 블라디보스토크의 태평양 함대 소속 정찰부에 배치되었다. 위험한 정찰업무를 수행하였으며 1945년 8월, 소련군이 만주에 총공세를 가하게 되자 해군 보병대와 함께 청진을 공격하였고 일본군과 교전하며 원산까지 진군했다. 1945년 9월, 김일성을 비롯한 항일 빨치산들이 귀국했을때 그들을 맞이한 것도 다름아닌 한일무였다.

2.2. 북한 시절[편집]


일본의 항복 이후 1945년 10월,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원산시당 선전선동부장에 배치되었다. 1946년 1월, 원산시 당위원장으로 승진, 8월, 북조선노동당이 창당된 1차 당대회에서 함경남도 대표로 출석,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허가이, 김열, 김찬 등과 함께 오기섭 등 국내파를 맹공격하면서 김일성의 영도권을 옹호하였으며 정확히 언제인지는 불분명하지만 김찬의 뒤를 이어 강원도 당위원장에 임명되었으며 1948년 3월, 2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재선되었다. 1948년 8월, 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및 법제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1948년 9월, 북한 초대 내각이 수립되자 민족보위성 해군 담당 부상에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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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사령관 당시의 한일무와 김일성

1949년 8월 20일, 정식으로 해군이 창설되면서 해군훈련국장에 임명, 1950년, 해군사령관에 임명되었다. 북한의 선전이나 이후 유족들의 주장에 따르면 10여척의 어뢰정으로 미군 군함을 격침시키며 분전했고 심지어 울릉도까지 점령했다고 주장하지만 개구라다. 1951년 2월, 김책 장의위원을 지냈다. 결국 유엔군이 북상하면서 어뢰정을 모조리 자침시키고 원산으로 후퇴, 고원, 회산, 만포진을 거쳐 만주까지 퇴각했다. 김일성은 쓸모없어진 해군 장교들을 모조리 소련에 보내 재교육을 시켰다. 그런데 1952년 말에 항공사령관 왕현이 김포와 연천의 유엔군 항공대와 원유창고들을 폭격시키라는 김일성의 지시를 받았는데, 비행기가 고장나서 임무를 수행할 수 없자 폭격을 안했는데 했다고 거짓보고를 올렸다. 북한은 이를 대대적으로 선전하였으나 남한의 반박선전이 있자 화난 김일성은 1953년 1월에 왕현을 잘라버리고 한일무를 새 항공사령관에 임명, 오진우를 참모장에 임명했다. 하지만 조선인민군 공군도 비행기도 제대로 없어서 연습만 하면서 남은 시간을 보냈다. 전후 공군 재건을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1956년 4월, 3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재선, 1957년 9월, 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다.

하지만 8월 종파사건 이후 김일성이 소련계들을 모조리 내쫓는 과정에서 1958년 1월, 공군사령관에서 물러나 일시적으로 민족보위성 부상에 임명되었다. 1958년 1월 21일, 리권무, 최종학, 최현, 김봉률, 류경수, 김철우, 최용진, 리림, 리방남, 지병학, 김화천, 정병갑, 전우, 김창봉, 김대홍, 유성철, 최광, 김창덕, 허봉학, 오진우, 정화준, 박창림, 전문섭과 함께 조선인민군 창건 10주년 국기훈장 1급을 수여받았다. 하지만 1958년 10월에 민족보위성 부상에서도 해임되어 10월 23일, 박광선의 뒤를 이어 주 몽골 대사로 부임하게 된다. 북한에 있던 마지막 몇년간 지독한 사상검토를 당하고 학을 뗀 한일무는 북한에 정이 완전히 다 떨어져서 1961년 10월, 몽골 대사직을 사퇴하고 김일성과 소련 대사관에 각각 청원서를 제출하여 소련으로 돌아갔다. 후임 몽골 대사로는 11월, 김관섭이 부임했다.

2.3. 말년[편집]


소련에 돌아간 한일무는 니키타 흐루쇼프에게 생활토대를 해결해줄 것을 청하였고, 소련공산당 조직부는 한일무에게 연금, 주택을 지급하고 가족들의 직장을 알선해주기로 하였다. 한일무는 모스크바 인근의 소련 산업농업전람회장 근처 알렉쳬예프카 지하철 역의 주택을 받고 연금생활을 하였다.

이후 경제적으론 부족함 없이 잘 살았으나 계속 통일되지 않는 한반도 문제에 대한 걱정을 하다가 1972년 8월 10일에 사망했다. 이후 그의 사위이며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장을 지내다가 숙청된 최종학의 아들 최 아파나시는 조국민주통일구국전선 사무총장으로 일했다.

3. 참고문헌[편집]


  • 김광운, 북한 정치사 연구 1: 건당, 건국, 건군의 역사(서울: 선인, 2003).
  • 김선호, 조선인민군: 북한 무력의 형성과 유일체제의 기원(서울: 한양대학교 출판부, 2020).
  • 서동만, 북조선사회주의체제성립사 1945~1961(서울: 도서출판선인, 2005).
  • 장학봉 외, 북조선을 만든 고려인 이야기(서울: 경인문화사,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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