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다 이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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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다 이시로
(ほん( (((ろう | Ishirō Honda


출생
1911년 5월 7일
일본 제국 야마가타현 히가시타가와군 아사히촌
사망
1993년 2월 28일 (향년 81세)
일본 도쿄도 세타가야구
국적
[[일본|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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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학력
니혼대학 예술학부 영화학과 (졸업)
직업
영화감독
소속
토호(1933 ~ 1971)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공식 홈페이지
서명

1. 개요
2. 생애
2.1. 감독 데뷔 이전
2.2. 50년대
2.3. 60년대부터 토호 퇴사까지
2.4. 80년대 이후
3. 평가
4. 주요 작품
4.1. 영화
4.2. TV 드라마



1. 개요[편집]


일본의 영화 감독. 초대 <고지라(1954)>의 감독으로 유명하다. 특수촬영 감독인 츠부라야 에이지, 제작자인 다나카 토모유키와 함께 흔히 고지라의 아버지로 불린다. 쇼와 시대 고지라 시리즈와 여러 토호 특촬 영화를 연출했다.

고지라 시리즈 외에 <하늘의 대괴수 라돈(1956)>, <지구방위군(地球防衛軍, 1957)>, <모스라(1961)>, <킹콩 대 고지라(1962)>, <해저군함(1963)> 등 다수의 히트작을 내면서 토호 특촬영화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토호를 퇴사한 후에는 간간히 TV 특촬물의 에피소드들을 연출하다가, 친구인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부탁으로 <카게무샤(1980)>의 제작에 "연출부 수석"이란 직함으로 참여하면서 고희를 바라보는 나이에 영화계에 복귀한다. 이후 노환으로 사망하기 직전까지 쿠로사와가 감독한 4편의 영화에 더 참여했다.


2. 생애[편집]



2.1. 감독 데뷔 이전[편집]


혼다 이시로는 1911년에 진언종 계열 종파의 대처승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치과의사인 형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과학 잡지 등을 선물 받아 읽으면서 SF에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학창시절부터 영화에 빠져들어, 1931년에 마침 새로 생긴 니혼대학의 영화학과에 1기생으로 입학한다. 이 때 학과에 출강하던 "P.C.L.영화제작소"의 창립 멤버 모리 이와오(森岩雄)의 눈에 띄게 되어,[1]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인 1933년 P.C.L.에 입사한다. P.C.L.은 이후 1937년에 다른 영화사 및 배급사와 합병해서 오늘날 우리가 아는 토호 영화사가 된다.

1935년에 처음 육군에 징집되어 보병 제1연대에 배치되는데, 하필 이 때 터진 2.26 사건에 직속 상관인 구리하라 야스히데(栗原安秀) 중위가 주동자로 가담하면서 군 생활이 단단히 꼬이기 시작한다. 쿠데타가 불발된 뒤, 부대 전체가 괘씸죄로 도쿄에서 만주로 쫓겨가서 복무기한을 넘겨 2년 이상 군 생활을 한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고, 이 때의 연좌제가 계속 따라다녀서 이후 1939년과 1944년에 두 번이나 다시 징집되어 도합 8년이나 중일전선에서 싸우게 된다. 게다가 종전 후에도 반년 가까이 중국에서 포로 생활을 하느라 1946년에야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재징집과 소집해제를 반복하는 동안 혼다 이시로는 1936년에 P.C.L.에 입사한 구로사와 아키라와 회사 기숙사의 방을 같이 쓰면서 절친한 사이가 된다. 둘은 함께 야마모토 카지로(山本嘉次郞) 감독의 문하에서 조감독 경험을 쌓는다. 같은 시기에 나루세 미키오 감독의 조감독을 맡은 적도 있지만, 혼다와 구로사와는 둘다 이후 회고에서 야마모토 카지로 감독을 자신들의 스승으로 꼽는다.

혼다 이시로는 1939년에 직장이던 토호에서 만난 야마자키 키미(山崎きみ)와 연애결혼을 해서 자녀가 두 명이나 있었는데, 그럼에도 재징집되서 가족들과 생이별을 해야했다. 게다가 입사 동기들이 모두 감독으로 입봉하는 동안 혼자 전쟁터에서 굴러야했던 자신의 처지에 크게 괴로워했다고 한다. 참고로 이 시기에 구로사와 아키라는 육군 장교였던 아버지 덕분에 징병 검사에서 복무 부적합 판정을 받고 군대를 빠질 수 있었다.

혼다의 군생활은 이후 그의 인생관과 영화 세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아내의 증언에 의하면 죽을 때까지 전쟁 악몽에 시달렸다고 한다. 한 번은 전투 중에 눈 앞에 떨어진 박격포탄이 불발되는 바람에 목숨을 건진 적이 있는데, 혼다는 그 불발탄 껍데기를 챙겨와서 평생 자신의 서재에 놓아두었다. 당시 드문 대학 졸업 학력인데다 복무기간이 길었기 때문에, 본인이 원했다면 장교로 진급할 수 있었지만, 전쟁을 혐오했던 혼다는 부사관 계급에 머물기를 고집했다.

특기할 부분으로, 혼다 본인은 공개적으로 전쟁 체험을 털어놓은 적이 거의 없지만, 예외적으로 종군 위안부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1966년 <영화예술(映画芸術)>이라는 잡지에 기고한 적이 있다. 1940-41년 동안 위안부들의 건강 상태를 체크하는 행정업무를 맡으면서 이들과 직접 이야기할 기회를 가졌던 경험을 회고한 것이다. 여기에는 자신이 면담했던 여성들이 털어놓은 참담한 현실들이 건조한 필체로 묘사되어 있다. 종전 후 수십 년이 흐른 뒤에도 위안부 문제에 대한 당시 일본군의 증언 자체가 드물다는 것을 생각하면, 혼다의 회고담은 상당히 용기 있는 행동인 셈이다. 하지만 서구권에서는 이것을 두고 "고지라의 감독이 실은 전쟁 매춘부를 관리하던 포주였다"는 악의적인 왜곡 밈을 퍼뜨리는 경우도 있다.

종전 후 집에 돌아온 혼다 이시로는 다시 조감독 생활로 복귀한다. 자신의 입사동기이거나 후배인 감독들 밑에서 35세의 나이로 박봉인 조감독 생활을 다시 시작한 것이다. 이런 혼다를 딱하게 여긴 야마모토 카지로 감독이 급여가 더 나은 사무직을 제안하지만, 혼다는 창작의 꿈을 놓지 않는다. 이 시기에 혼다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들개(1949)>에 조감독으로 참여하는데, 이 영화는 훗날 구로사와의 초기 걸작으로 꼽힌다. 주인공인 신참 형사(미후네 토시로)가 범인을 찾아 전쟁으로 황폐화된 도쿄의 뒷골목을 탐문하는 장면들이 바로 혼다 이시로가 연출한 부분이다. 군대를 가지 않았던 구로사와는 이 때 이미 9편의 작품을 감독한 중견 감독이었는데, 혼다는 친구이자 입사 후배인 구로사와보다 한참 뒤쳐진 자신의 처지에도 "각자 길이 있는 법"이라며 개의치 않았다고 한다.


2.2. 50년대[편집]


혼다 이시로의 첫 감독 작품은 다큐멘터리인 <국립공원 이세시마(国立公園伊勢志摩, 1949)>이다. 지역 홍보 목적의 교육용 영상이기 때문에 장편 영화 데뷔작은 아니다. 이 영화에서 혼다 이시로는 직접 고안한 수중 카메라로[2] 이곳의 명물인 일본 해녀들이 잠수하는 모습을 찍어서 일본 최초로 수중 장면을 촬영한 영화 감독이라는 기록을 세운다.

1951년에 혼다 이시로는 마침내 자신이 직접 각본을 쓴 장편 영화 데뷔작인 <푸른 진주(青い真珠, 1951)>을 내놓는다. 혼다 이시로는 이 영화의 각본을 쓸 때 마침 다른 각본을 집필하던 구로사와 아키라와 함께 여관에서 머물며 작업을 했는데, 이 때 구로사와가 쓰던 게 바로 라쇼몽이다. 혼다의 회고에 의하면, 완성한 <푸른 진주>의 각본을 맨 먼저 보여준게 바로 구로사와였다고 한다. <푸른 진주>는 <국립공원 이세시마>의 촬영 경험을 살린, 이세 반도 해녀들의 생활을 소재로 한 멜로드라마이다. 혼다는 자신이 고안한 수중 카메라에 애착이 컸는지, 이 작품에 일본 영화에서는 최초로 수중 액션 장면들을 집어넣었다. 이 영화는 1951년도 키네마 준보 베스트에서 자국 영화 28위에 선정된다.(출처) 지금보다 훨씬 제작 편수가 많던 시절이니, 늦깍이 감독의 데뷔작으로는 꽤 후한 평가를 받은 셈이다.

이후로 혼다의 감독 생활은 순조롭게 풀려간다. 혼다는 2차대전 중 조감독 시절에 이미 츠부라야 에이지와 영화 작업을 위해 만난 적이 있는데, 이후 혼다가 자신의 영화에 특수효과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면서 둘 사이의 협업도 점점 긴밀해진다. 혼다는 <푸른 진주> 이후 재난물이나 전쟁물, 청춘물 등 다양한 장르들을 섭렵하다가 마침내 1954년에 자신의 7번째 장편 영화로 <고지라(1954)>를 감독하게 된다.

<고지라(1954)>는 원래 급조된 프로젝트로, 제작자인 다나카 토모유키가 추진하던 <영광의 뒤켠(栄光のかげに)>이라는 영화가 엎어지면서,[3] 대체 기획으로 만들어지게 된다. 원래 <영광의 뒤켠>의 감독이었던 혼다의 입사동기 타니구치 센키치(谷口千吉)가 감독직을 이어받을 예정이었지만, 타니구치는 전례가 없는 괴수물의 연출에 난색을 표하며 물러나고, 대신 혼다 이시로가 감독을 맡게 된다. 결과는 잘 알려졌다시피 대성공으로, 1954년 일본영화 흥행수입 8위에 오른다.[4]

이후 50년대 말까지 혼다 이시로는 의외로 특촬물에 치우치지 않고, 오히려 나루세 미키오 감독 풍의 여성영화나 연애물, 일상물을 더 많이 만들었다. 물론 SF영화도 계속 감독해서 <수인 설남(獣人雪男, 1955)>, <하늘의 대괴수 라돈, 1956)>, <지구방위군(1957)>, <미녀와 액체인간(美女と液体人間, 1958)>, <우주대전쟁(宇宙大戦争, 1959)>을 내놓았다. 하지만 이 중 거대 괴수물은 <하늘의 대괴수 라돈> 한 편 뿐이고, <수인 설남>은 괴수물이라기보다 인간과 같은 크기의 미지의 유인원이 나오는 미스테리 모험물이다.[5] <지구방위군>은 외계인 침공과 우주 전쟁을 본격적으로 다룬 SF물로, 지금도 서구권에서 <고지라(1954)>를 제외한 혼다의 대표작으로 꼽힐만큼 팬들이 많은 SF 수작이다. <미녀와 액체인간>은 토호의 "변신인간 시리즈(変身人間シリーズ)" 1탄으로, 성인 취향의 범죄물과 액체인간이라는 SF 소재를 결합한 이색작이다.


2.3. 60년대부터 토호 퇴사까지[편집]


60년대에 들어서면서 TV의 영향으로 일본 영화시장이 급격하게 위축되어 제작 환경이 열악해지기 시작한다. 당연히 그 여파는 특촬물에도 미쳐서, 혼다 이시로는 50년대에 누리던 창작의 자유를 크게 제한 받게 된다. 토호에서는 특촬물 중에서도 어린이 취향의 거대 괴수물에 점차 집중하게 되는데, 괴수물이라고 하면 흔히 연상되는 괴수 VS 물이나 유치한 드라마 등이 이 시기의 산물이다.

혼다는 괴수물에서도 가능한 진지하고 현실적인 연출을 추구해서, 가벼운 오락물을 원하던 제작자 다나카 토모유키와 갈등을 빚었다. 이 시기에 혼다의 조감독이던 후쿠다 준(福田純)이 감독으로 승진하는데, 다나카는 가벼운 연출을 선호하던 후쿠다에게 특촬물 감독 일을 몰아주면서 쇼와 고지라 시리즈의 절반을 맡긴다. 이런 상황은 71년에 토호를 퇴사할 때까지 혼다에게 큰 압박으로 작용한다.

1960년에 개봉한 <가스인간 제1호(ガス人間第1号, 1960)>는 변신인간 시리즈 3탄으로, <미녀와 액체인간>과 비슷하지만 훨씬 깊이있는 플롯으로 호평받았다. 개봉 당시에 미국에 수출되어 상당한 인기를 끌었고, 이후로도 점점 평가가 올라가서 키네마 준보의 올타임 일본 영화 베스트 65위에 올랐다.(출처) 참고로 한국에도 잘 알려진 구로사와 아키라의 걸작 카게무샤(85위), (93위), 거미집의 성(118위) 보다도 순위가 높고, <고지라(1954)>(115위)보다도 한참 위이다.

<모스라(1961)>는 공포스러운 재난으로 묘사되던 <고지라(1954)>와 <하늘의 대괴수 라돈, 1956)>의 괴수 대신, 인간과 교감하는 괴수라는 아이디어를 도입해서 좀 더 상냥한 괴수물로 만들었졌다. 적어도 이 시기까지는 괴수물의 테두리 안에서도 계속 새로운 것을 추구하던 혼다의 창작 의지가 제작사 안에서 받아들여졌다.

1962년에 나온 <요성 고라스>는 혼다 이시로 본인이 가장 큰 애착을 가진 것으로 꼽은 작품이다. 외부의 적과 싸우는 내용이 아니라, 지구를 향해 날아오는 떠돌이 별 고라스의 재난을 막기 위해 온 세계가 힘을 합한다는 내용은, 평화주의자였던 혼다의 바램이 투영되어 있다. 고라스와 충돌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남극에 거대한 추진 엔진을 건설해서 지구를 움직인다는 아이디어는 유랑지구보다 반세기 이상 빠르다. 혼다 본인은 이 영화를 괴수물로 만들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결국 제작자인 다나카 토모유키의 요구로 바다코끼리 괴수인 마그마를 등장시킨다. 하지만 혼다는 이 장면을 두고두고 싫어했다.

같은 해에 개봉한 <킹콩 대 고지라>는 그 때까지 혼다 이시로의 최고 흥행작으로, 50년대의 잊혀져가던 프랜차이즈인 고지라를 되살린 고지라 시리즈의 구세주 같은 작품이다. 하지만 대박을 낸 흥행 성적과는 별개로 혼다 본인은 이 영화를 연출하면서 무조건 가볍고 웃기게 만들라는 제작자의 요구와 타협하면서 심한 스트레스를 겪었다.

필모그래피만 보아서는 알기 어렵지만, 혼다 이시로는 <킹콩 대 고지라(1962)> 이후로 잠시 일을 쉬어야 할 만큼 깊은 슬럼프에 빠진다. 혼다는 60년대 초부터 특촬물 장르에서 벗어나서 일본의 근현대사를 다룬 시대물이나 전쟁물을 여럿 기획했지만 영화사에서 모조리 반려당했다. 1963년에 토호와 계약이 끝난 츠부라야 에이지가 독립해서 츠부라야 프로덕션을 세우면서, 혼다 이시로에게 TV쪽의 동업을 제안한 것도 그의 고민을 깊게 했다. 하지만 결국 혼다는 영화판을 떠나지 않고 다시 현업에 복귀한다.

츠부라야 에이지는 이후 TV쪽에 집중하던 1969년에도 혼다를 찾아와서, 그때까지의 괴수물이나 거대 히어로물이 아닌 전혀 새로운 영화를 만들어보자고 제의하며 의기투합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직후에 츠부라야 에이지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면서 두 사람만이 알던 프로젝트는 영영 빛을 보지 못하게 된다.

1963년에 나온 <마탕고>는 진지한 작품을 해보고 싶다는 혼다의 바램을 제작사가 받아들였는지, 등신대의 괴물이 나오긴 하지만 그의 필모그래피에서는 예외적으로 어두운 심리 호러물이다. 혼다 본인도 슬럼프 이후 큰 열의를 가지고 연출에 임하면서, 출연진들에게도 진지한 드라마를 연기할 것을 촬영 내내 강조했다고 한다. 하지만 불행히도 개봉 당시에는 흥행에서 별 재미를 보지 못했고, 결국 혼다는 제작사에서 요구하는 밝고 가벼운 특촬물 스타일로 돌아가게 된다. 하지만 이 영화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재평가되어, 컬트 영화의 반열에 올랐다.

이후로 혼다는 <해저군함(1963)>, <모스라 대 고지라(1964)>, <삼대 괴수 지구 최대의 결전(1964)> 등 꾸준히 히트작들을 내놓는다. 특히 <삼대 괴수 지구 최대의 결전>은 인기 괴수 킹기도라가 처음 등장한 작품답게 <킹콩 대 고지라>를 능가하는 흥행 실적을 올렸다. 하지만 이 때를 피크로, 60년대 중반을 넘어가면서 괴수물의 인기는 점차 사그라든다. 그 결과 특촬 영화는 미국 자본을 끌어오거나, 도호 챔피언 축제로 대표되는 저예산으로 어린이 관객들을 공략하는 방식을 모색하게 된다.

특촬 영화는 이미 50년대부터 미국에 수입되어 쏠쏠한 수익을 올리고 있었기 때문에, 미일 합작으로 특촬 영화를 만들려는 시도는 꾸준히 있었다. 그 결과 미국 영화사의 투자를 받고 미국 배우가 출연하는 특촬물들이 만들어지게 되는데, 1965년 이후로 혼다 이시로가 감독한 <괴수대전쟁(1965)>, <프랑켄슈타인 대 지저괴수 바라곤 (1965)>, <프랑켄슈타인의 괴물: 산다 대 가이라 (1966)>, <위도0대작전(緯度0大作戦, 1969)>이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 작품들이다.

하지만 일본 국내의 제작 여건이 점점 열악해지고 흥행이 저조해지면서 영화의 질은 계속 떨어진다. 그 결과 혼다 이시로가 <고지라 미니라 가바라: 올괴수대진격(1969)> 같은 짜깁기 영화까지 만들어야 할만큼 쇼와 고지라 시리즈는 몰락한다. 결국 <게조라, 가니마, 가메바 결전! 남해의 대괴수(ゲゾラ・ガニメ・カメーバ 決戦! 南海の大怪獣, 1970)>를 끝으로 혼다는 토호를 떠난다.

공식적으로는 1971년에 토호를 퇴사한 것으로 되어있지만, 사실 혼다 이시로는 이미 1965년부터 전속 계약이 끝나고 작품 단위로 계약을 하는 반 프리랜서 상태였다. 혼다에게 이런 사실을 통보한 사람이 바로 혼다를 영화업계로 이끈 모리 이와오(당시 토호 부사장)였다고 하니, 혼다가 느낀 인간적인 실망감을 짐작할 수 있다.

이때 토호 내에서 좁아진 입지와 몰락해가는 괴수물 때문에 혼다가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몇 해 뒤에 쇼와 고지라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인 <메카고지라의 역습(1975)>의 감독 제의를 혼다가 받아들였을 때, 당연히 거절할 줄 알았던 주변 사람들이 크게 놀랐다고 한다. 이 작품에서 혼다는 초대 <고지라(1954)>의 세리자와 다이스케를 연기한 히라타 아키히코를 다시 출연시키는 등 유종의 미를 거두고자 했지만, 안타깝게도 저조한 흥행으로 쓸쓸하게 쇼와 고지라 시대의 막을 내리게 된다.


2.4. 80년대 이후[편집]


토호를 떠난 혼다 이시로는 <메카고지라의 역습(1975)>을 제외하면 토호 계열의 제작사나 츠부라야 프로덕션에서 만드는 TV 특촬물 에피소드들을 간간히 연출하는 걸로 소일하면서 70년대 말까지 은퇴생활을 즐긴다.

그런데 마침 20세기 폭스의 지원을 받으면서 긴 슬럼프에서 벗어나 대작 <카게무샤(1980)>의 제작을 준비하던 구로사와 아키라가 오랜 친구인 혼다 이시로에게 도움을 청하면서 다시 영화판에 복귀하게 된다. 혼다는 이후로도 <(1985)>, <(1990)>, <8월의 광시곡(八月の狂詩曲, 1991)>, <마다다요(まあだだよ, 1993)>까지 5편 연속으로 구로사와의 영화에 참여한다.

일본 위키백과의 혼다 이시로 항목에는 <카게무샤>를 연출할 당시 구로사와가 혼다에게 공동 감독 크레딧을 제안했지만 혼다가 사양했다는 언급이 나오는데, 출전이 적혀 있지 않아서 검증은 안 된다. <카게무샤>와 <>에서 혼다는 주로 군중 신이나 대규모 전투장면, 특수 촬영 등의 연출을 맡았다. 혼다의 젊은 시절의 오랜 군생활이 이 때만큼은 전쟁 장면의 연출에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또한 구로사와의 별난 성질머리를 다독이고 현장 스텝과의 소통을 중재하는 것도 혼다의 역할이었다. 스텝들의 증언으로는, 걸핏하면 화를 내는 구로사와 대신 친절하게 경청하는 혼다와 작업하게 되니까 일이 너무 편했다고.

80년대 초에는 고지라 프랜차이즈를 부활시키기 위해 헤이세이 고지라 시리즈 첫 작품인 <고지라(1984)>를 기획하던 제작자 다나카 토모유키가 혼다 이시로에게 감독직을 제안하지만, 혼다는 거절한다. 고지라는 이제 자신의 손을 떠났다는 것이 이유였다.

구로사와의 영화들에 참여한 혼다의 크레딧은 연출부 수석, 연출 보좌 등으로 표기되지만, 구로사와 자신은 스텝들에게 혼다를 자신과 동등한 공동감독으로 예우하게끔 했다. 같이 작업했던 제작진들의 이야기로는, 제작현장 뿐 아니라 일상 생활에서까지 둘이 같이 붙어다니면서 영화 이야기만 했다고 한다. 게다가 촬영 일정 동안에는 숙소도 같이 썼다고 하니, 어지간히 죽이 잘 맞았던 것 같다. 혼다의 아들이 회상하기로는, 구로사와와 작업할 때의 아버지는 전에 없이 정말 행복해보였다고 한다. 제작사의 간섭 없이 친한 친구와 원 없이 영화를 만드는 생활이 혼다에게 무척 만족스러웠던 모양이다.

옴니버스 영화인 <(1990)>은 특히 혼다 이시로의 영향이 짙게 드러난 작품이다. 전쟁에서 혼자 살아남은 군인이 전사한 부하들을 환상 속에서 만난다는 "터널" 에피소드는 혼다가 평생 꾸던 전쟁 악몽의 내용과 비슷하다. 그리고 특수효과 장면들에서도 숨길 수 없는 혼다의 특촬물 느낌이 드러난다. 때문에 몇몇 에피소드는 혼다가 감독했다는 설도 있지만 확인된 것은 아니고, 공식적으로는 구로사와가 단독 감독이다. "까마귀" 에피소드에는 마틴 스코세이지빈센트 반 고흐 역으로 출연했는데, 일본의 촬영장에 와서는 "당신이랑 사진 찍으려고 일본에 왔습니다"라며 혼다 이시로와의 사진을 남겼다고 한다. 특수효과를 맡은 ILM의 직원들도 여러 명 혼다와 사진을 찍고 사인을 받아갔다.

<마다다요(1993)>의 촬영이 끝난 직후에 혼다는 갑작스레 건강에 이상을 느끼고 병원에 입원했다가 곧 숨을 거둔다. 혼다의 묘비명은 오랜 친우인 구로사와가 썼다. 죽을 때까지 창작을 하다 떠났으니, 예술가로서는 최고의 복을 누린 셈이다.


3. 평가[편집]


토호에서 왕성하게 영화를 찍던 시절에는 특촬물 전문 감독이라는 꼬리표때문에 일본 안팎의 평론가들에게 외면받던 혼다 이시로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그에 대한 평가는 점점 올라가는 추세다. 장르 영화에 대한 편견이 덜한 미국 등지에서는 일찌기 혼다 이시로에 대한 연구와 관련 서적들이 나왔고, 일본 내에서도 꾸준히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상술되었듯, 키네마 준보의 올타임 일본 영화 베스트에도 <가스인간 제1호(ガス人間第1号, 1960)>(65위)와 <고지라(1954)>(115위)가 올라가 있고(출처), 퍼시픽 림의 엔딩 크레딧에 혼다 이시로에 대한 헌정사가 나올만큼 전 세계의 서브컬쳐 팬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혼다 이시로는 같이 작업한 스텝들이나 배우들이 거의 이견 없이 그의 선한 인품에 대해 증언할만큼 인격적으로 존경받았다. 영화는 모두 함께 즐겁게 만드는 것이라는 신조를 갖고 있어서, 강한 리더십을 발휘하기보다는 제작 현장에서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많이 반영했다. 혼다 본인도 농담처럼 종종 자신을 가장 영화감독 같지 않은 사람이라고 자평했다고 한다. 이런 성격 때문에 제작진들 뿐 아니라 영화사의 요구에도 가능하면 따랐기 때문에, 흔히 작가 보다는 장인에 가까운 감독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하지만 괴수물이든 SF물이든 항상 사실적이고 진지한 접근을 해야한다는 신념은 초지일관했다. 의외일 수도 있지만, SF 영화를 만들때는 항상 관련 분야의 과학자들에게 자문을 구해서 영화에 등장하는 아이디어들을 검증했다고 한다. 그래서 혼다의 영화들을 보면, 시대적인 한계가 보이면서도 묘한 부분에서 사실성이 도드라질 때가 있다. 배우들에게도 과장된 스타일을 자제하고 사실적으로 연기할 것을 늘 주문했다. 또한 전쟁을 몸소 겪었기 때문에 국가 간의 화합과 평화에 대한 메시지를 항상 기회가 되는 대로 영화에 집어 넣었다.

어린이 영화를 싫어한 것은 아니지만, 어린이 영화이기 때문에 유치하게 만들라는 제작자의 요구에는 항상 부정적이었다. 비슷한 맥락에서, 시청률 때문에 작품의 질을 쉽게 타협하고, 아이들의 눈높이를 낮추어 본다고 생각해서 TV 매체에도 비판적이었다. 특히 고지라가 점점 원래의 상징성을 잃고 유치해져가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킹콩 대 고지라>에서 고지라와 킹콩이 서로 바위를 던지며 싸우거나, <괴수대전쟁>에서 고지라가 오소마츠 군에 등장하는 이야미 흉내를 내며 폴짝폴짝 뛰는 장면을 보면서 깊이 탄식했다고 전해진다. 헌데 반대로 특수촬영 감독이었던 츠부라야 에이지는 이런 장면들을 굉장히 좋아했다. 고지라가 아이들의 우상이 되는 것을 무척 기뻐했다고 한다. 특수 촬영 장면에서는 츠부라야 에이지의 발언권이 더 강하다보니 이런 장면들이 들어갈 수 있었다. 성향이 정반대이다보니 얼핏 두 사람 사이가 안 좋았을 것 같지만, 혼다와 츠부라야는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평생 돈독한 사이였다.

혼다 이시로의 연출력에 대해 논할 때는, 젊은 시절과 말년의 영화 작업을 모두 함께 해본 구로사와 아키라의 평가를 많이 인용한다. 완벽주의자로 유명한 구로사와지만, 혼다와 작업할 때는 그의 능력에 전폭적인 신뢰를 보냈다. <카게무샤>와 <> 같은 대작을 찍으면서도 건강 문제로 본인이 촬영장에 나가지 못할 때는 혼다에게 현장의 전권을 넘겼고, 주변에도 "혼다가 찍은 장면들은 고칠 필요가 없다"면서 좋아했다고 한다.

토호에서 경력의 대부분을 보냈지만, 토사구팽에 가까운 푸대접을 받으며 창작욕구를 다 펼쳐보지 못한 불행한 일면도 있다. 혼다 이시로 스스로도 고지라의 성공이 자신에게는 득과 실을 모두 가져다 주었다고 회고한다. 제작자로서 혼다와 오래 일한 다나카 토모유키는 훗날, 만약 혼다에게 특촬물만 계속 맡기지 않고 하고 싶은 것을 하게 해주었다면, 아마도 나루세 미키오 같은 감독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고 미안한 마음을 표했다. 사실 혼다의 필모그래피를 자세히 보면, 멜로물이나 일상물에서 섬세한 감정을 연출하는 데에도 일가견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혼다 이시로가 감독한 <가스인간 제1호>는 인간이 기체로 변해 범죄를 저지르는 SF 소재를 다루면서도,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를 진지한 드라마로 풀어낸다.

흔히 일본 영화계의 거장이라고 하면 미조구치 겐지, 오즈 야스지로, 나루세 미키오, 구로사와 아키라 등이 꼽히지만, 50-60년대 세계 영화시장의 흥행 실적이나 팬층의 규모면에서 본다면, 혼다 이시로의 작품들이 거둔 성과는 앞의 네 사람을 합친 것 이상이라고 할 수 있다. 영미권과 유럽의 아트 하우스 위주로 상영되던 이들의 영화와 비교하면, 혼다 이시로의 영화들은 90년대까지도 전 세계의 심야 텔레비전이나 재상영관, 자동차 극장, 비디오 대여점 등을 통해 주구장창 재소비 되면서 수많은 서브컬쳐 장르의 팬들을 열광시켰다.

그럼에도 혼다 이시로의 이름은 그가 만든 작품에 비해 알려지는게 한참 늦었다. 예술영화로 다뤄지던 거장 감독들의 작품에 비해 저렴한 오락물로 취급되면서, 마구 재편집 되거나 미국인 배우가 연기한 장면을 넣고 미국인 감독 이름을 넣어서 헐리우드 영화인 것처럼 배급하던 관행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혼다 이시로의 영화들이 일본 밖에서도 온전한 형태로 소개되면서 그의 작품들에 대한 진지한 연구와 비평작업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4. 주요 작품[편집]



4.1. 영화[편집]



4.2. TV 드라마[편집]




[1] 모리 이와오는 이후 토호의 경영진으로 일본 영화의 황금기를 이끌게 된다.[2] 수중 카메라라고는 하지만, 소형 16mm 카메라를 기밀용기에 넣은 간단한 물건이다.[3] 인도네시아에 남은 구 일본군이 인도네시아 독립운동을 돕는다는 내용으로, 현지 합작으로 만들어질 예정이었다. 엎어질만 하다.[4] 참고로 3위는 구로사와 아키라7인의 사무라이.[5] 부라쿠민 묘사가 문제가 되어서 일본에서는 2차 매체가 나오지 않는 봉인된 작품이 되었다. 하지만 일본 밖에서는 문제 없이 발매가 되었기 때문에 쉽게 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