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헤르도니아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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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3. 양측의 전력
3.1. 로마군
3.2. 카르타고군
4. 전투 경과
5. 전투 이후



1. 개요[편집]


기원전 212년 한니발 바르카의 카르타고군과 그나이우스 풀비우스 플라쿠스의 로마군이 이탈리아 남부 아풀리아의 헤르도니아(현재 포지아)에서 맞붙은 전투.

2. 배경[편집]


기원전 212년, 카푸아 공방전을 치르던 로마 집정관 퀸투스 풀비우스 플라쿠스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는 한니발을 카푸아에서 멀리 떨어지게 하기 위해 각자의 진로로 후퇴하기로 했다. 풀케르는 루카니아로 이동했고, 플라쿠스는 쿠마이로 이동했다. 그들은 한니발이 한 쪽을 추격하여 카푸아에서 떨어지게 한 뒤, 다른 쪽 부대로 카푸아를 재포위하기로 했다.

로마군이 2개 그룹으로 나뉘어 각자의 진로로 후퇴하자, 한니발은 루카니아로 이동하는 풀케르를 추격했다. 풀케르는 계속 후퇴하면서 한니발이 자신을 멀리까지 쫓아가게 유도했다. 이때 백인대장 마르쿠스 켄테니우스 페눌라원로원에게 자신이 그동안 한니발의 승리를 쭉 지켜봤기에 그의 전략전술을 훤히 꿰뚫고 있으며, 루카니아 지리를 잘 알고 있으니 5천 명만 주면 카르타고군을 물리치겠다고 주장했다. 원로원은 그의 용기와 기백에 감동하여 1개 로마 군단병과 1개 동맹시 군단병으로 구성된 8천명을 주기로 했다.

그가 이들을 데리고 진군하자, 시민들이 여기에 가담하면서 총 1만 6천에 달하는 병력이 편성되었고, 페놀라는 즉각 한니발을 향해 이동했다. 정찰병을 통해 이를 파악한 한니발은 즉시 요격에 나섰고, 양군은 실라루스 강변에서 대치했다. 이후 벌어진 실라루스 전투에서, 한니발은 2시간 만에 적군을 섬멸하였고, 켄테니우스는 적진에 자살성 돌격을 하다 전사했다. 당시 전투에 투입된 장병 중 살아남은 이는 단 1천 명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한니발이 페놀라의 군대를 섬멸하는 데 집중한 사이, 풀케르는 카르타고군의 추격을 따돌릴 수 있었다. 또한 플라쿠스는 한니발이 동료 집정관을 멀리 추격한 사이에 카푸아로 돌아와 포위했고, 얼마 후 풀케르가 돌아와 그와 합세했다. 그들은 카푸아 주변에 3개 요새를 짓고, 해자와 성벽으로 도시를 에워쌌으며, 샤르데냐와 카실리눔으로부터 대량의 밀을 공출해 장기 포위할 태세를 갖추었다. 한니발은 카푸아를 버리고 싶지 않았지만, 플라쿠스의 동생인 법무관 그나이우스 풀비우스 플라쿠스가 한니발의 근거지인 아풀리아에서 여러 도시를 공략하며 근거지를 위협하자, 일단 그부터 물리친 뒤 카푸아로 돌아가기로 했다.


3. 양측의 전력[편집]



3.1. 로마군[편집]



3.2. 카르타고군[편집]




4. 전투 경과[편집]


아풀리아에서 2개 군단 18,000명을 이끌고 공세에 나선 그나이우스 풀비우스 플라쿠스는 카르타고에 넘어간 일부 도시를 성공적으로 공략했다. 그러나 한니발이 카푸아에 묶여 있느라 자신에게 오지 못하리라 여겨 경계를 게을리 했다. 한니발은 곧장 그에게 진군하는 한편, 농장과 주변 숲에 경보병 3,000명을 매복시켰다. 여기에 삼니움 인 마구스에게 2,000명의 기병을 이끌고 로마군의 모든 퇴로를 차단하라고 명령했다.

다음날 새벽 한니발이 접근해오자, 그나이우스 풀비우스 플라쿠스는 즉각 군대를 이끌고 평원에 전투 대형을 갖췄다. 그러나 그는 어서 싸우길 갈망하는 병사들을 통제하길 힘들어 했고, 한니발이 포위해 들어오는 걸 우려해 전투 대형을 지나치게 길게 포진했다. 이윽고 전투가 개시되자, 카르타고군이 길고 얇게 선 적의 대열을 거칠게 밀어붙여서 흐트러놓았다. 여기에 숲과 농장에 매복해던 적이 로마군의 측면을 습격했다.

로마군은 곧 전의를 상실하고 도주했지만, 2,000 가량의 기병대가 퇴로를 차단했다. 결국 그들은 곧 궤멸되었고, 불과 2,000명 만이 가까스로 탈출했다. 그나이우스 풀비우스 플라쿠스는 200명의 기병과 함께 전장에서 탈출했다. 카르타고군의 피해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으니 미미할 것으로 추정된다.


5. 전투 이후[편집]


패배 소식을 접한 로마 정계는 분노했다. 희대의 명장 한니발에게 패한 것이야 그럴 수 있다 쳐도, 한니발이 접근할 때까지 알아채지 못했고, 적의 매복을 사전에 감지하지 못했으며, 병사들을 수습할 생각도 않고 먼저 이탈해버리는 등 무능한 행보로 일관해 아까운 장병들을 날려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기원전 212-211년 겨울 형의 집정관 임기가 끝난 직후 호민관 가이우스 셈프로니우스 블라수스에게 고발당했다.

플라쿠스는 변호 연설에서 패배 원인을 병사들 탓으로 돌리려 했다. 자신은 신중하게 전투 준비를 하고 전투를 잘 이끌었는데, 병사들이 제멋대로 달아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러 증인이 그가 전투 도중 제일 먼저 도망쳤다고 진술하였고, 그는 막대한 벌금을 물고 정계에서 은퇴를 강요당하는 처지로 내몰렸다. 당시 카푸아 공성전을 이어가고 있던 형 퀸투스는 동생을 카푸아 공성전에 참여시켜서, 공을 세워 속죄하게 해달라고 청했지만 거부당했다. 결국 그는 판결이 내리기 전에 타르퀴니아로 망명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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