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토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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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상세



1. 개요[편집]


기원전 204년, 푸블리우스 셈프로니우스 투디타누스의 로마군과 한니발 바르카의 카르타고군이 크로토나에서 맞붙은 전투.


2. 상세[편집]


기원전 207년 8월 22일, 형 한니발 바르카와 합세하여 로마를 공동으로 공략하려던 하스드루발 바르카의 5만 카르타고군이 메타우루스 전투에서 마르쿠스 리비우스 살리나토르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의 로마군에 궤멸되었다. 한니발은 동생이 죽었다는 걸 알게 되자 더 이상 로마를 이길 가망이 없다는 걸 깨닫고, 전력 보존을 위해 남은 모든 병력과 추종자들을 이탈리아의 가장 외진 구석인 브루티움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루카니아와 마그나 그라키아에 있는 모든 도시와 마을을 포기하고, 브루티움에 이동시켰다. 브루티움은 대부분 산악 지형이고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서 로마군의 진격을 막을 수 있는 완벽한 장소였다.

한니발은 브루티움에 도착한 뒤, 아버지 하밀카르 바르카제1차 포에니 전쟁 때 7년간 시칠리아에서 버텼던 것과 동일한 전략을 펼쳤다. 그는 브루티움에서 최대한 오래 버텨서 더 많은 로마군을 희생시켜, 기나긴 전쟁에 지친 로마인들이 수용 가능한 평화 조약에 동의하도록 유도하려 했다. 이후 카르타고군은 수시로 브루티움 바깥으로 쳐들어가 약탈을 자행했고, 로마군 역시 적의 영지를 습격해 약탈을 벌이곤 했다. 그러나 어느 한쪽도 함부로 대규모 회전을 벌이지 않았다.

기원전 206년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일리파 전투에서 마고 바르카, 하스드루발 기스코의 카르타고군을 섬멸하고 이베리아 반도를 평정했다. 그 후 로마로 귀환한 스키피오는 아프리카 원정을 감행하길 희망했다.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는 기원전 255년 아프리카 원정을 감행했던 마르쿠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 휘하 로마군이 바그라다스 전투에서 크산티푸스가 이끄는 카르타고군에게 완패하고 사로잡혔고, 로마 함대가 패잔병들을 이끌고 본국으로 탈출하다가 해난 사고로 막심한 인명 피해를 입었던 일을 상기시키며, "지금은 한니발을 무너뜨리는 데 집중해야지 아프리카를 쳐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스키피오는 한니발이 험준한 지형에서 웅크리는 상황에서 그를 무너뜨리는 건 기약할 수 없다며,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질 테니 아프리카 원정을 맡겨달라고 요구했다. 민심 역시 오래도록 지속된 전쟁을 하루빨리 끝내고 싶었기에 스키피오의 주장을 열렬히 지지하자, 원로원은 장고 끝에 기원전 205년 집정관에 선임된 스키피오를 시칠리아로 파견해 원정을 준비하게 했다. 그러나 그에게 별다른 정규군을 보내지 않았기에, 칸나이 전투 및 여러 전투에서 패전 후 징벌의 의미로 시칠리아에 보내져 근무하고 있던 로마 패잔병들을 끌어모아 1년간 훈련시켰다.

한편, 원로원은 한니발을 이탈리아에 완전히 가두기 위해 그가 확보한 유일한 항구인 크로토나를 노렸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기원전 205년 집정관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디브스가 콘센티아를 포함한 브루티움의 7개 마을을 공략했다고 한다. 이 마을들이 무력에 의해 정복되었는지, 아니면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 착취를 일삼는 한니발에게 분노한 민중이 귀순했기에 가능했는지는 불확실하다. 또한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는 크로토나 전투 후 콘센티아가 귀순했다고 기록했기 때문에, 크라수스가 콘센티아를 점령했는지도 불확실하다. 크라수스는 여세를 몰아 크로토나까지 공략하려 했지만, 전염병이 창궐하는 바람에 더 이상 공세를 이어가지 못하고 철수했으며, 2개 군단 중 전염병으로 많은 장병이 죽어나간 한 군단을 해산해야 했다.

기원전 204년 새 집정관으로서 브루티움에 파견된 푸블리우스 셈프로니우스 투디타누스는 새로운 군대를 징집하여 크로토나로 진군했다. 그러나 그해 여름, 크로토나로 향하던 한니발의 군대와 우연히 마주쳤고, 양측은 곧바로 교전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이 전투에서 로마 병사 1,200명이 전사했으며, 상당수의 병사들이 부상당했다고 한다. 한니발은 요새화된 진영을 습격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로마군이 완전 무너지는 일은 없었다. 그는 자신의 군단이 카르타고인들과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야밤에 후퇴한 뒤 전직 집정관 크라수스와 합류했다.

이후 복수를 위해 크로토나로 재차 진군했고, 한니발은 투디타누스와 크라수스의 군대에 맞붙었다. 이번에는 로마군이 우세했고,[1] 한니발은 크로토나로 후퇴했다. 이후 브루티움의 여러 마을이 로마군에 귀순했지만, 크로토나에 대한 로마군의 공세는 한니발에게 번번이 막혔다. 한니발은 그렇게 버티면서 카르타고에서 크로토나에 도착한 함대 외에도 더 많은 배를 건조해 적의 해상 공격에 대비했다. 그러다 기원전 203년 카르타고 본국으로부터 "평화 협약을 맺었으니 귀환하라"는 명령이 내려지자, 15,000명의 최정예병만 싣고 나머지는 수용 공간이 없다는 이유로 남겨둔 채 카르타고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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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리비우스에 따르면 카르타고군 4,000명이 전사하고 300명이 사로잡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