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타고 노바 공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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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3. 양측의 전력
3.1. 로마군
3.2. 카르타고군
4. 전투 경과
5. 전투 이후




1. 개요[편집]


기원전 209년 2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이베리아 반도 카르트 하다쉬트(카르타고) 식민지의 중심지인 카르타고 노바(오늘날 무르시아 지방 카르타헤나)를 기습 공략한 공방전.


2. 배경[편집]


기원전 237년, 카르트 하다쉬트의 장군 하밀카르 바르카로마 공화국에 바칠 배상금을 마련하고 국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이베리아 반도로 출정했다. 그는 탁월한 군사적 역량을 발휘해 무수한 이베리아 부족들을 제압하고 이베리아 해안가 도시와 마을들을 장악했다. 기원전 228년 하밀카르가 이베리아 부족과의 전투 도중 전사한 뒤, 사위인 '잘생긴 하스드루발'이 뒤를 이었다. 그는 마스티아에 항구도시 카르타고 노바를 건설하였으며, 여러 부족들을 지속적으로 복속시킨 끝에 에브로 강 이남 일대의 이베리아 반도 상당수를 장악했다. 이후 카르타고 노바는 이베리아 반도 카르타고 지배권의 중심지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기원전 218년, 로마는 9개월간의 사군툼 공방전을 치른 끝에 로마의 '친구'를 자처하던 사군툼을 함락시키고 시민들을 노예로 팔아버린 한니발 바르카를 인도할 것을 카르타고 원로원에 요구했다. 그들이 단호히 거부하자, 로마는 카르타고에 선전포고했다. 한니발은 선전포고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대군을 일으켰다. 그는 우선 피레네 산맥의 원주민들을 제압한 뒤, 11,000명의 병력을 한노에게 맡겨 피레네 산맥의 수비를 맡기고, 자신은 3만 8천 보병, 8천 기병, 코끼리 37마리를 이끌고 이탈리아로 출발했다. 한편, 로마는 전쟁을 선포한 뒤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롱구스에게 2개 군단(기병 8,000명, 기병 600명)과 비슷한 수의 동맹군 보병 및 기병을 맡겨 시칠리아로 파견한 뒤 여차하면 아프리카를 치게 했다. 또한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에게 같은 수의 병력을 맡겨 이베리아 반도로 파견했다. 푸블리우스는 형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칼부스를 부관으로 삼고 마실리아를 경유한 뒤 이베리아로 진군하기로 했다.

한니발은 피레네 산맥을 넘은 뒤 여러 켈트 부족에 사절을 보내 자신들이 그들을 칠 의사가 없으며, 어디까지나 로마를 공격하러 가고자 할 뿐이니 막지 말아달라고 부탁하면서, 상당한 자금을 '선물'로 줬다. 이보다 앞서, 로마 원로원은 켈트인들에게 사절단을 보내 카르타고인의 진군을 막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켈트인들은 "로마가 우리에게 베풀어준 게 뭔데 이런 부탁을 함부로 하는가?"라고 비웃으며 거부하였고, 카르타고인들이 건넨 막대한 자금을 보고 기꺼이 길을 열어줬다. 그 덕분에 여유롭게 진군할 수 있었지만, 9월 볼카이 족의 영토인 론 강 강둑에 이르렀을 때 문제가 발생했다. 볼카이 족은 자기들 영토를 지나가려는 카르타고군을 적대해 모든 배를 강 반대편으로 끌고 가서 이용하지 못하게 하고, 적이 건널만한 여울을 틀어박았다. 이에 한니발은 론 강 전투에서 이들을 물리친 뒤 강을 도하했다.

한편, 마실리아에 도착한 푸블리우스 스키피오는 카르타고군이 어디쯤에 있는지 확인하고자 정찰대를 파견했다. 그들은 곧 한니발의 정찰대와 조우하여 짧은 교전을 벌인 뒤 돌아가서 본대에 보고했다. 스키피오는 즉시 한니발과 맞붙기 위해 북상했지만, 한니발은 그와 교전하지 않고 알프스 산맥을 향해 진격했다. 스키피오는 곧 버려진 적진을 발견한 뒤, 더 추격해봐야 소용없다는 걸 깨닫고 마실리아로 돌아갔다. 그는 한니발의 의도가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로 진군하는 것임을 깨닫고, 형 그나이우스 스키피오에게 군대를 맡겨 이베리아로 파견하고, 자신은 이탈리아로 돌아가서 병력을 새로 소집한 뒤 한니발을 저지하기로 했다. 그나이우스 스키피오는 키사 전투에서 한노의 11,000 카르타고군을 격파하고 에브로 강 이북의 이베리아 부족들을 복속시켰으며, 뒤이어 한니발을 대신해 이베리아 수비를 맡은 하스드루발 바르카의 공세를 에브로 강 해전에서 격퇴했다. 이후 푸블리우스가 티키누스 전투, 트레비아 전투에서 연이어 패한 뒤 원로원의 지시에 따라 2개 군단을 이끌고 형과 합세했다.

스키피오 형제는 히스파니아에서 하스드루발 바르카를 포함한 카르타고 장성들과 대적했다. 두 형제는 먼저 사군툼을 급습하여 그곳에 억류되어 있던 여러 부족의 인질을 확보한 뒤 각자의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그러자 수많은 히스파니아 부족들이 로마 쪽으로 넘어갔고, 형제는 이를 토대로 카르타고에 대적할 기반을 닦을 수 있었다. 기원전 215년 하스드루발이 이탈리아로 진군하여 한니발과 합류하려 하자, 형제는 한니발 하나만 해도 로마가 고통을 겪고 있는데 하스드루발까지 가세하면 나라가 망할 거라 확신하고 하스드루발의 진로를 차단했다. 양측은 곧 데르토사의 전투를 치렀는데, 히스파니아를 떠나고 싶어 하지 않은 이베리아인들이 전투 중 도주하는 바람에 로마군이 승리를 거두었다. 로마는 이 덕분에 칸나이 전투에서 회복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스키피오 형제는 이후에도 본국으로부터 별다른 지원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하스드루발 바르카, 마고 바르카 형제, 그리고 하스드루발 기스코의 카르타고 대군을 상대로 우세한 전과를 거두었다. 또한 누미디아 왕 중 한 명인 시팍스와 동맹을 맺고, 백인대장 퀸투스 스테테리우스를 시팍스에게 보내 누미디아 보병대를 로마 보병에 맞춰 훈련시키도록 하였다. 이후의 공세 끝에, 두 형제는 기원전 212년에 카르타고의 주요 광산 마을인 카스툴로를 점령했다. 그러나 6년간 지속적인 공세 결과 확보한 영토를 지키기 위해 병력이 분산되었다. 이에 그해 겨울에 20,000명의 켈티베리아인들을 용병으로 고용해 병력을 충원하였다. 이후 푸블리우스는 로마군 2/3을 이끌고 마고와 하스드루발 기스코를 상대하였고, 그나이우스는 1/3의 로마군과 용병대를 이끌고 하스드루발 바르카를 상대했다.

그러나 곧 최악의 사태가 벌어졌다. 그나이우스와 상대하게 된 하스드루발 바르카는 이베리아의 족장 인디빌리스와 만도니우스에게 하스드루발 기스코와 함께 카스툴로에 주둔한 마고의 군대를 지원토록 지시하는 한편, 진지를 요새화하면서 그나이우스 휘하에 있는 용병들을 회유했다. 용병들은 막대한 돈을 주겠다는 말에 넘어가 그나이우스의 군대에서 대놓고 이탈했다. 로마군은 그들의 숫자가 너무 많아서 무력으로 제지하지 못하고, 제발 떠나지 말라고 애원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켈티베리아인들은 고향에서 전쟁이 나서 집에 간다고 둘러대고 그대로 진영을 떠났다. 이로 인해 그나이우스는 한순간에 전력이 급락하는 사태에 직면했다.

한편, 푸블리우스는 누미디아 왕자 마시니사가 이끄는 누미디아 기병의 유격전에 시달렸다. 로마인이 물을 긷거나 공사를 하러 캠프 밖에 나가면 곧바로 공격하였으며, 한밤중에도 기습하여 큰 소동을 일으키고 물러나는 일을 끊임없이 반복하였다. 이로 인해 로마군은 극심한 피로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던 중 이베리아 족장 인디빌리스가 7,500명의 이베리아군을 이끌고 마고 바르카에게 합류한다는 소문을 접했다. 이에 푸블리우스는 그들이 합류하기 전에 급습하기로 하고, 2천 명의 병사를 티베리우스 폰티우스에게 맡겨 진영 수비를 담당하게 한 뒤 전 병력을 이끌고 인디발리스를 추격했다. 밤을 꼬박 새워가며 행군한 로마군은 인디빌리스의 군대를 따라잡고 공세를 개시했다. 그런데 전투 도중 마시니사가 이끄는 누미디아 기병이 들이닥쳐 측면과 후방을 공격하였고, 로마군은 이로 인해 큰 혼란에 빠졌다. 여기에 마고 바르카와 하스드루발 기스코가 각각 군대를 이끌고 전장에 도착하면서, 로마군은 완전히 포위되었다.

푸블리우스는 어떻게든 활로를 뚫고자 사활을 걸고 싸우다가 한 기병이 내지른 창에 찔러 그 자리에서 절명했다. 그가 죽자 로마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흩어졌고, 적군은 이들을 추격하여 살육을 자행했다. 그 후 마고, 하스드루발 기스코, 마시니사는 재빨리 하스드루발 바르카와 합세하여 그나이우스를 공격하였고, 결국 그나이우스 역시 크게 패하고 목숨을 잃었다. 7년간 본국으로부터 별다른 지원을 받지 않고도 이베리아 반도에서 승승장구했던 스키피오 형제는 그렇게 최후를 맞이하였고, 로마군 8천 명만이 적의 추격을 뿌리치고 에브로 강 북쪽에 집결했다. 그들은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셉티미우스의 지휘하에 자신들을 마저 섬멸하려던 하스드루발 기스코를 물리쳤고, 이후 카르타고군이 더 이상 관심을 보이지 않으면서 에브로 강 이북에서나마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기원전 210년,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가 원로원으로부터 히스파니아에 가서 군대를 수습하라는 통보를 받고, 6,000명의 보병과 300명의 기병, 그리고 라틴 동맹에서 온 6,000명의 보병과 800명의 기병을 이끌고 히스파니아로 향했다. 타라코나에 상륙한 뒤 스키피오 형제의 잔당과 합세했다. 이후 한니발 바르카의 동생이며 히스파니아의 주요 지휘관인 하스드루발 바르카를 일루투르기스와 멘티사 사이에 있는 흑석 근처의 협곡으로 가두었다. 하스드루발은 협곡을 벗어나게 해준다면 카르타고군을 히스파니아에서 철수시키겠다고 제안했고, 네로는 협상에 응했다. 그러나 하스드루발은 온갖 사소한 일로 협상을 질질 끌다가 야밤을 틈타 부하들을 이끌고 작은 길을 통해 포위망을 빠져나갔다. 날이 밝아서야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된 네로는 하스드루발을 추격했으나, 그때는 이미 멀리 달아난 뒤였다. 그는 이 일로 명예가 실추되었고, 원로원은 다른 인물을 히스파니아 전선 사령관으로 선임하기로 했다.

그러나 다들 본국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진 데다 실패할 가능성이 너무 높은 히스파니아 전선으로 가고 싶어하지 않았기에, 새 지휘관 선출은 쉽사리 이뤄지지 않았다. 이때 24살의 청년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가 나섰다. 그는 아버지 푸블리우스 스키피오가 못다 이룬 사명을 이루고 싶다면서, 자신에게 일을 맡겨달라고 청했다. 그는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언변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민회에서는 그를 파견하는 것을 압도적으로 지지했다. 원로원은 법무관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에게 공식적인 지휘권을 주되, 실질적인 지휘는 스키피오가 위임받도록 했다. 이리하여 스키피오는 실라누스, 절친한 친구인 가이우스 라일리우스와 함께 1만 보병, 기병 1,000명, 35척의 함선을 이끌고 이베리아 전선으로 출진했다. 그는 티베르 강 입구에서 배를 타고 출진하여 에트루리아 해안을 따라 피레네 산맥 근처까지 이동해서 군대를 상륙시킨 뒤, 여기서 해안선을 따라 육군과 해군이 나란히 진군하게 했다.

얼마 후, 스키피오는 타라고나에서 현지 군대와 합세했다. 이리하여 이베리아 전선의 로마군은 보병 25,000명, 기병 2,500명, 함선 35척으로 불어났다. 그는 이곳에서 일전의 심각한 패배에도 불구하고 전의를 잃지 않고 에브로 강 이북의 영역을 끝까지 사수한 마르키우스 외 병사들을 극찬하고, 자신이 조만간 이베리아를 정복할 테니 끝까지 따라달라고 요청했다. 스키피오의 탁월한 언변은 군심을 사로잡기에 충분했고, 병사들은 스키피오 형제가 이루지 못한 사명을 그가 이룰 수 있도록 소임을 다하겠다고 맹세했다. 이후 적군의 배치 상황을 면밀히 조사한 끝에, 카르타고군이 하스드루발 바르카, 마고 바르카, 하스드루발 기스코의 3개 군대로 나뉜 채 로마군을 막을 태세를 갖췄다는 걸 알게 되었다. 반면, 적의 본거지인 카르타고 노바가 이베리아에서 대규모 함대를 수용할 수 있는 유일한 항구도시라는 것도 파악했고, 적은 로마군이 여기로 조기에 들이닥치지 않으리라고 여기고 3,000명의 수비대만 배치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스키피오는 카르타고 노바를 급습하기로 작정하고, 기원전 210/209년 겨울 내내 그곳의 지형과 방어 구조 등을 철저히 조사했다. 그는 그곳에서 일했던 어부들로부터 도시 북쪽을 둘러싼 석호는 매일 저녁에 썰물로 물이 얕아지면서, 도시로 걸어서 접근이 가능할 만큼 얕은 갯벌지대가 드러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만약 카르타고 노바를 공략하는 데 성공한다면, 적이 본국으로부터 지원받을 길이 요원해지면서 이베리아 전쟁의 전환점이 될 것이었다. 그러나 카르타고 노바는 난공불락의 요새로 명성이 자자했으며, 초기 공략에 실패할 경우 적군이 되돌아와서 로마군을 섬멸하려 들 위험성이 있었다. 여러모로 도박수였지만, 그는 위험을 감수하기로 결심했다. 이리하여 제2차 포에니 전쟁의 분수령이 될 카르타고 노바 공방전의 막이 올랐다.


3. 양측의 전력[편집]



3.1. 로마군[편집]




3.2. 카르타고군[편집]


  • 사령관: 마고(마고 바르카와는 다른 인물이다.)
  • 병력: 3,000명


4. 전투 경과[편집]


기원전 209년 초, 스키피오는 모든 군대와 함선을 에브로 강 하구에 집결시켰다. 그는 병사들에게 에브로 강을 건너 3개의 카르타고군을 잇따라 격파하여 이베리아 전역을 장악하겠다고 선포했다. 그는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에게 일부 병력을 맡겨 에브로 강 이북 영토를 지키게 하고, 자신은 나머지 병력을 함선에 태우고 출진했다. 스키피오는 자신의 의도를 오직 절친한 친구이며 함대 사령관을 맡은 가이우스 라일리우스에게만 알렸기에, 다들 하스드루발 바르카, 마고 바르카, 하스드루발 기스코 중 한 장수를 먼저 공격할 거라 여겼다. 그래서 스키피오가 이베리아 해안을 따라 계속 항해하라는 지시를 내리자, 다들 뭔가 이상하다고 여겼지만 감히 묻지 못했다고 한다.

파일:Siege_of_Cartagena_209_BC.svg.png
일주일간의 항해 끝에 카르타고 노바가 모습을 드러내자, 스키피오는 비로소 이곳을 공략하겠다는 뜻을 공표했다. 그는 육지에 상륙한 뒤 도시를 곧바로 포위했고, 가이우스 라일리우스는 함대를 이끌고 항구를 봉쇄했다. 스키피오는 도시 북쪽에 숙영지를 세운 뒤 참호를 파도록 지시했다. 로마군이 난데없이 나타나자, 현지 수비대 지휘관 마고는 화들짝 놀라 전선에 나가있는 3명의 장수들에게 당장 구원해달라고 요청하는 전령을 보냈다. 하지만 세 장수는 이때 카르타고 노바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어서[1], 카르타고 노바까지 전속력으로 돌아온다 해도 10일 이상 걸렸다. 그렇지만 카르타고 노바는 천혜의 요새로서 명성이 높았다. 도시의 남쪽은 바다에 의해 직접적으로 보호되었고, 북쪽은 조수에 따라 깊이가 변하는 큰 석호에 의해 보호되었다. 육로로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경로는 도시 동쪽의 육지인데 거의 250피트에 달하는 언덕이 있었으며, 도시 자체의 벽도 20피트에 달했다. 따라서 대군으로 공격한다 해도 단시일에 함락하긴 거의 불가능했다.

스키피오는 참호 건설을 마무리한 뒤 회의를 소집하여 부관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그대들을 이곳에 데려온 것은 단지 도시를 공격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는 단지 이 도시를 공격하는 것만으로 이베리아 전체를 점령하게 되리라."


그는 이베리아의 모든 부족장과 저명한 혈통의 사람들이 저 도시에 인질로 붙잡혀 있다면서, 그들이 로마인의 손에 넘어간다면 이베리아 부족들은 더 이상 카르타고를 따르지 않을 거라 설명했다. 또한 카르타고 노바는 카르타고인들이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군자금을 가득히 보관하고 있으며, 전쟁 기계, 무기 및 모든 종류의 전쟁 물자가 있다고 덧붙였다. 그리고는 처음으로 성벽을 오른 사람들에게 황금 월계관을 씌워줄 것이며, 용맹을 떨친 자들에게 충분한 보상을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한편, 그는 자신이 꿈속에서 포세이돈의 계시를 받았다며, 포세이돈이 가르쳐준 방식대로 도시를 공략할 테니 지켜보라고 했다.

도시 수비대장 마고는 적군이 육상과 해상에서 동시에 공격할 태세를 갖춘 걸 보고 요새와 도시와 고지대에 각각 500명씩 배치하고, 나머지 병사와 주민들에게 다른 지역을 경계하면서 이변이 벌어지면 어디든 달려가라고 지시했다. 다음날, 전투 개시를 알리는 나팔 소리를 시작으로 로마군이 공세를 개시했다. 로마군은 성벽에 접근해 사다리를 걸고 올라가려 했지만, 성벽이 워낙 높은 데다 수비대가 결사적으로 항전해 많은 희생을 내고도 좀처럼 오르지 못했다. 한편 해상에서는 가이우스 라일리우스가 이끄는 함대가 해안 성벽을 공격했지만 역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반나절 동안 공격을 퍼부었지만 함락될 기미가 없고 피해가 막대해지자, 스키피오는 후퇴 신호를 보냈다. 로마군이 철수하자, 수비대는 몹시 기뻐하며 3명의 카르타고 사령관들이 돌아올 때까지 충분히 버틸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그러나 이것은 적을 방심시키기 위한 스키피오의 계략이었다. 그는 부상병들을 숙영지에서 쉬게 한 뒤, 숙영지에 배치되어 있던 군단병 500명을 이끌고 도시 북쪽의 큰 연못으로 향했다. 그는 곧 썰물이 되어 석호가 바닥을 드러내고 도시로 이어지는 얕은 갯벌지대가 형성된 걸 확인하고, 즉시 병사들을 이끌고 갯벌을 지나 성벽으로 달려갔다. 병사들은 포세이돈의 계시가 바로 이것이었다고 확신하며, 스키피오의 지시에 따라 사다리를 가지고 가 북쪽 성벽에 걸었다. 사실 그쪽의 성벽은 석호를 믿고 다른 방면의 성벽에 비해 높이가 낮은 편이었기 때문에, 사다리를 상대적으로 쉽게 걸 수 있었다. 마고는 적이 북쪽 성벽을 오르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황급히 병력을 보내 막으려 했다. 하지만 스키피오가 사다리를 손수 설치하고 성벽을 오르는 것을 목격한 로마군이 사력을 다해 성벽을 올랐고, 결국 북쪽 성벽은 로마군에게 장악되었다. 성벽에 오른 병사들은 스키피오의 지시에 따라 승리의 나팔을 불었고, 카르타고군은 그 소리를 듣고 동요했다.

그 후 로마군이 성문을 열고 시내로 쏟아져 들어오자, 마고는 시장터로 병사들을 철수시킨 후 최후의 항전을 벌였다. 그러나 대다수 수비대가 전사하고 로마군이 사방에서 포위하자, 더 이상 가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항복했다. 스키피오는 도시를 접수한 뒤 약탈을 엄격히 금지하고, 사흘에 걸친 축제를 개최해 시민들의 환심을 샀다. 그리고 군영을 설치하고 성벽을 수리해 카르타고군의 예상되는 반격에 대비했다. 이리하여 카르타고 노바 공방전은 이틀 만에 로마군의 완승으로 종결되었다.


5. 전투 이후[편집]


로마군은 카르타고 노바를 장악하면서 무수한 전리품을 수집했다. 기록에 따르면, 이때 로마군이 접수한 전리품의 무게는 600달란트(19,600kg)에 달했다고 한다. 여기에 276개의 금잔, 가공하지 않은 은 18,300파운드 및 수많은 은그릇, 밀, 무기, 청동 주괴, 철괴, 항해용 천, 건물 자재를 실은 63척의 수송선, 120개의 대형 투석기, 281개의 소형 투석기, 74개의 군사 휘장, 소형 발리스타와 수많은 검, 창, 활 및 다트를 확보했다. 스키피오는 모든 전리품을 병사들에게 골고루 나눠준 뒤, 도시에 있던 카르타고에 의해 끌려온 모든 인질을 불러모은 후, 각자의 부족으로 돌아가게 했다. 또한 도시에 있는 2,000명의 장인들에게 당분간 로마를 위해 일해달라고 하면서, 전쟁이 끝나면 자유를 주겠다고 약속했다.

이베리아 부족들은 아무런 대가없이 인질을 돌려주자 무척 기뻐했고, 카르타고에 대한 충성 맹세를 철회했다. 스키피오는 뒤이어 주변 도시들을 별다른 저항 없이 공략했다. 그러던 중 어느 도시민들이 스키피오에게 아름다운 여인을 바쳤다. 그는 여인의 아름다움에 감탄했지만, 단순한 군인으로서 더 환영받을 선물은 없지만 로마 군대의 총사령관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하며 거절했다. 그는 여인에게 고향과 부모에 대해 물어본 후, 그녀에게 약혼자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에 그녀의 아버지에게 연락하여 그녀를 넘겨주고, 약혼자와 결혼하게 했다. 이베리아 주민들은 스키피오의 인자한 성품에 감탄했고, 카르타고에 아직 귀속되어 있는 도시들도 스키피오에게 가담하려는 기미를 보였다.

한편, 로마군이 카르타고 노바를 이틀만에 공략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접한 하스드루발 바르카는 스키피오가 더 이상 세력을 뻗치지 못하게 하고자 군대를 이끌고 카르타고 노바로 향했고, 하스드루발 기스코는 주변 도시에 사절을 보내 원군이 곧 오니 이탈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마고 바르카는 누미디아 왕자 마시니사와 함께 용병을 소집하여 병력을 증강했다. 하지만 섣불리 로마군과 맞붙지 못하고 전열을 가다듬기만 했다. 스피키오 역시 병력을 증강하는 데 공을 들이면서, 기원전 209년은 더 이상 전투가 벌어지지 않은 채 지나갔다. 그러다 기원전 208년, 스키피오가 바이쿨라 언덕에 주둔한 하스드루발 바르카를 물리치러 진군하면서, 바이쿨라 전투가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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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스드루발 바르카는 사군툼 인근에 있었고, 하스드루발 기스코는 루시타니아에 있었고, 마고 바르카는 카스툴로 근처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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