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군툼 공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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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사군툼의 마지막 날.jpg
프란시스코 도밍게스 마르케스 작, <사군툼의 마지막 날>(1869년)

1. 개요
2. 배경
3. 전개
4. 여파




1. 개요[편집]


기원전 219년, 한니발 바르카가 이끄는 카르타고군이 이베리아 반도의 도시국가이며 로마의 '친구'를 자처했던 사군툼을 포위한 후 9개월간 공성전을 벌인 끝에 함락시킨 전투. 이 사건을 계기로 제2차 포에니 전쟁이 발발했다.


2. 배경[편집]


사군툼(현재 스페인 발렌시아 부근 사군토)은 기원전 6세기경 이베리아 부족 중 하나인 에데타니 족에 의해 처음 건설되었다. 이 도시는 내륙의 교역로와 풍부한 농경지로의 접근을 통제하는 위치 때문에 번영하였고, 카르타고 등 지중해 서부 해안가 도시국가들과 교역하면서 도시 이름을 도안 위에 새긴 청동 또는 은화를 독자적으로 주조했다. 기원전 3세기 경에는 이베리아 도시들 중 상업적으로 가장 번영한 곳으로 손꼽혔다. 그러나 하밀카르 바르카가 이베리아 반도에 군대를 이끌고 들어온 이래, 하밀카르와 그의 후계자들이 세력을 점차 확대하자, 그들은 큰 위협을 느꼈다. 그들은 카르타고가 장차 자신들의 자주권을 침해할 지도 모른다고 여기고, 이를 막아줄 만한 외세와 손 잡길 희망했다.

한편, 로마 역시 하밀카르의 이베리아 반도 진출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기원전 231년 하밀카르의 이베리아 반도 진출을 조사하기 위해 사절단을 파견했다. 하밀카르는 사절단에게 자신이 이베리아를 공략한 건 제1차 포에니 전쟁 이후 전쟁 배상금을 갚기 위한 충분한 자금을 확보하려는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사절단은 이 말을 듣고 "그를 어떻게 비난해야 할 지 막막했다"고 한다. 로마는 결국 하밀카르의 행위에 어떤 트집도 잡지 못했고,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이베리아에 직접 개입할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그 대신, 그들은 카르타고가 이베리아를 완전 장악해서 로마의 패권을 위협하는 걸 미연에 방지할 방안을 모색했다.

기원전 226년, 로마는 지난날 전사한 하밀카르를 대신하여 히스파니아 속주를 관할하고 있던 '잘생긴 하스드루발'과 협상하여 '에브로 조약'을 체결했다. 조약의 내용은 카르타고가 에브로 강 이북의 영토에 군대를 투입하지 않는다면, 로마는 카르타고의 이베리아 패권을 용인하겠다는 것이었다. 로마는 이 시기에 포 강 이북의 켈트족을 격파하고 그 땅에 식민도시를 건설하고 농경지를 빈농들에게 나눠주려는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의 농지법을 실행했다. 켈트족은 당연히 반발해 대대적으로 봉기했다. 로마는 켈트족이 카르타고와 손잡으려 들면 골치 아파진다고 여기고, 카르타고를 묶어두는 차원에서 이 조약을 제의했다. 카르타고 원로원은 에브로 조약을 승인했고, 양자는 더 이상 마찰을 벌이지 않을듯 보였다. 하지만 여기엔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이 조약에는 로마가 에브로 강 이남의 도시국가들과 외교 관계를 맺거나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 규정되어 있지 않았다. 지금 당장은 로마가 이베리아 반도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기에 별 문제 없었지만, 차후에 양국이 조약의 내용을 다르게 해석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기원전 220년대 사군툼 정계에서 내분이 일어나면서 몇몇 관리들이 살해되자, 시민들이 로마에 중재를 요청했다. 로마는 이를 받아들여 혼란을 수습해줬고, 이후로 사군툼은 로마의 '친구'가 되었다고 한다. 즉, 사군툼은 로마의 보호를 받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로마가 충분히 멀기 때문에, 로마의 지원을 받더라도 그 여파로 자주권을 잃지 않을 거라고 여겼다. 로마 역시 카르타고의 이베리아 확장을 견제하는데 최적의 장소라고 여겼다. 현대의 몇몇 학자들은 사군툼과 로마 사이에 공식적인 조약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지만, 로마가 그들의 친구로서 책임을 가지고 있던 것만은 분명하다. '잘생긴 하스드루발'은 에브로 강 이남의 상업 도시국가 사군툼과 로마의 우호 관계에 대해 어떠한 반발도 하지 않았지만, 카르타고 정부는 이를 인정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220년, '잘생긴 하스드루발'이 그리스 출신 노예와 사소한 일로 다투다가 피살되었다. 그의 뒤를 이은 한니발 바르카는 사군툼을 제외한 에브로 강 이남의 모든 지역을 공략하고 부족민들의 반란을 진압했다. 그 후 그는 사군툼을 공격할 기회를 노렸다. 사군툼인들은 로마로 사절을 보내 한니발의 위협을 전했고, 원로원은 즉시 한니발에게 사절단을 보내 로마의 친구인 사군툼을 건드리지 말라고 경고했다. 당시 로마는 포강 이북의 켈트족을 완전 제압하고 농경지 분배에 골몰하고 있었으며, 이와 동시에 일리리아에 대규모 원정군을 파견했다. 그래서 사군툼이 공격당하더라도 당장 원군을 보내주기 곤란했다. 하지만 그들은 지난날 카르타고가 사르데냐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함대를 파견했을 때, "당장 철수하지 않으면 전쟁으로 간주하겠다"라고 위협하여 그들을 돌려보내고 사르데냐를 자기들 속주로 삼았듯이, 이번에도 카르타고가 로마의 압도적인 국력에 압도되어 굴복하리라 여겼다.

그러나 한니발은 로마의 엄포에 굴복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는 사군툼을 이대로 놓아준다면, 로마가 차츰 에브로 강 이남에 세력권을 뻗칠 거라고 여겼다. 그는 먼저 사군툼과 분쟁이 있던 투르데타니 족과 손을 잡았고, 사군툼이 그들과 전쟁을 벌이자 "동맹 부족을 공격한 사군툼을 응징한다"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기원전 219년 대군을 동원하여 사군툼을 침공했다. 이리하여 사군툼 공방전의 막이 올랐다.


3. 전개[편집]


한니발은 도시 외곽의 농경지를 황폐화시킨 뒤, 군대를 3개 부대로 나누어 도시를 에워쌌다. 당시 사군툼 시의 벽 한쪽 모퉁이는 다른 곳보다 좀더 평평하고 개방적인 계곡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공성용 숫양을 그쪽 성벽으로 밀어붙였다. 하지만 사군툼인들은 더 높은 성벽을 세우고 탑을 쌓았으며, 성벽에 접근하는 적을 향해 화살 세례를 퍼붓고 돌을 던지며 격렬히 저항했다. 또한 때때로 성벽 바깥으로 출격하여 참호를 파고 있던 적군을 습격했다. 이 격렬한 교전에서 양측 모두 막대한 사상자가 발생했고, 무심코 성벽에 접근했던 한니발도 허벅지에 다트를 맞고 쓰러졌다. 수비대는 한니발이 쓰러졌으니 공세가 약화될 거라고 기대했지만, 한니발을 대신하여 지휘를 맡은 마하르발이 한니발의 공백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능숙하게 지휘했기에 별다른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

이후 카르타고군의 공성추들이 성벽에 부딪치면서 곳곳에서 벽이 허물어졌다. 수비대는 내성으로 후퇴하여 항전을 이어갔고, 카르타고군은 상당한 손실을 무릅쓰고 계속 공격했다. 그렇게 8개월간 치열한 접전이 이어지면서, 사군툼은 점차 함락 위기에 몰렸다. 그러던 중 로마 사절단이 한니발을 찾아와 항의하려 했지만, 한니발은 전투가 급하다며 만나주지 않았다. 이에 사절단은 카르타고로 건너가 항의했지만, 카르타고 원로원은 전쟁은 사군툼인이 일으킨 것이지 한니발이 일으킨 게 아니며, 사군툼과 카르타고 모두 로마의 동맹국인데 왜 사군툼을 우선하느냐며 거부했다.

결국 공방전이 8개월째 되었을 때, 중앙 성채를 제외한 모든 거점이 카르타고군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이에 사군툼은 시민 알콘과 스페인 원주민 알로크로 구성된 2명의 교섭단을 한니발에게 보내 강화 제의를 시도했다. 두 사람이 눈물을 흘리며 간절히 호소했지만, 한니발은 단호히 뿌리치며 다음과 같은 강화 조건을 제시했다.

1. 사군툼인은 투르데타니 족에게 충분한 보상을 제공하고 모든 재산을 카르타고군에게 양도한다.

2. 1인당 한 벌의 옷만 가지고 도시를 떠나 카르타고가 명령한 곳에 정착하라.


사군툼인 알콘은 사군툼인이 이러한 조건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며 도시로 돌아가길 거부했지만, 알로크는 모든 저항 수단이 소진되었으니 평화 조건을 시민들에게 전달하겠다고 약속했다. 알로크는 자신의 무기를 경비병에게 공개적으로 넘겨주고 사군툼에 돌아가서 한니발이 내건 강화조건을 밝힌 뒤, 주민들에게 항복할 것을 권고했다. 그러나 시민들은 모든 금과 은을 광장으로 쏟아부은 뒤 거기에 불을 질렀고, 그 중 많은 이가 불 속으로 몸을 던졌다. 시내에서 이 혼란이 벌어진 사이, 카르타고군이 시내에 침투했고, 저항하는 자들을 모두 죽이고 남은 이들을 노예로 팔아버렸다. 이리하여 사군툼 공방전은 카르타고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4. 여파[편집]


한니발은 사군툼을 공략하면서 상당한 전리품을 획득하였고, 병사들에게 밀렸던 급료를 모두 지불했다. 이 소식이 로마에 전해지자, 원로원은 즉시 6개 군단과 4만 동맹시 보병, 4,400 동맹시 기병을 편성하고, 카르타고에 두 번째 사절을 보냈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가 이 사절단의 리더였다고 한다. 반면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마르쿠스 파비우스 부테오가 리더였다고 한다.

로마 사절단은 자신들이 사군툼과 동맹을 맺었으며, '잘생긴 하스드루발'도 동의했는데, 한니발이 불법적으로 공격했으니 조약 위반이라며 한니발을 넘기라고 요구했다. 반면 카르타고 원로원은 자신들은 로마와 사군툼의 동맹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에브로 조약에 따르면 로마는 카르타고가 에브로 강 이북에 군대를 투입하지 않는다면 카르타고의 행동을 용인하겠다고 했는데, 에브로 강 이남의 사군툼과 손을 잡고 간섭하는 건 명백한 조약 위반이라고 주장했다.

로마 사절단은 강경하게 나오는 카르타고 원로원의 태도에 분노하여 로마와 전쟁과 평화 중 무엇을 택할 거냐고 협박했다. 카르타고 원로원이 "그대들이 원하는 대로 하시오."라고 맞받아치자, 사절단은 "좋다! 전쟁을 주겠다!"라고 했다. 이에 원로원은 "그러면 우리는 최선을 다해 당신들을 상대하겠소."라고 답했다. 이리하여 18년간 지중해 세계를 전화에 휘말리게 한 제2차 포에니 전쟁의 막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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