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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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조선 중기의 문신. 세종의 적5남 광평대군의 7대손이다.
2. 생애[편집]
어려서부터 김장생의 밑에서 글을 배운 영향으로 당색은 서인이었다. 1623년(인조 1)에 일어난 인조반정에서 공을 세워 정사공신 3등에 책록되고 본관인 전주의 별호 완산(完山)에서 유래한 완남군(完南君)으로 봉해졌다. 이후 주로 지방관을 두루 거쳐 태인현감과 군수, 단양과 익산의 군수, 충청도와 함경도의 관찰사, 강화부유수, 그리고 한성부서윤, 우윤 및 판윤 직을 역임했다. 태인현감으로 재직할 당시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결사대를 이끌고 반란군 진압에 참여했다.
정묘호란이 발발하자 참전하여 총융청의 주장 총융사를 종사관으로서 보좌했다. 1635년(인조 13) 증광 문과에 급제했고 1636년(인조 14) 대간#臺諫인 지평, 장령을 역임했다. 그 해 말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척화파로서 청나라와의 결사항전을 인조에게 건의했다. 또한 인조가 피신해있던 남한산성을 청나라 군대가 포위하여 인조가 다른 곳으로 갈지 말지 고민하자 남한산성을 끝까지 지켜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전후 승정원의 동부승지, 좌부승지, 우승지를 거쳐 사헌부 대사간, 대사헌을 맡았다. 1644년(인조 22) 심기원이 종친 회은군을 추대하려는 역모를 일으키자 이를 평정했다.
효종이 즉위한 뒤에는 세자좌부빈객 자격으로 《인조실록》 제작에 편수관으로 참여했고, 성균관 대사성을 거쳐 도승지와 예조, 형조, 공조, 이조의 판서를 두루 지낸 뒤 1657년(효종 8) 우의정에 올랐다. 1660년(현종 1) 향년 세는나이 63세, 만 61세로 세상을 떠났다. 사후 8년 뒤인 1668년(현종 9) 시호 충정(忠貞)을 받았고# 1685년(숙종 11) 경기도 광주의 수곡서원에 제향되었다.
3. 가족과 후손[편집]
상술했듯 광평대군의 후손이다. 가계는 이렇게 내려온다.
이후원은 이욱의 3남으로, 위로 형이 2명 있었다. 이들의 이름은 이후재, 이후배이다.광평대군 - 영순군 - 청안군 이영 - 정안부정 이천수 - 이한 - 이인건 - 이욱 - 이후원
이후원은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다. 이중 차남 이운은 자식을 낳지 못하고 죽었으며 양자로 입적한 사람도 없어 후사가 끊겼다. 장남 이주는 1남 2녀를 두었고 3남 이선은 3남 1녀를 낳았다. 이들의 자손이 번성하여 현재 이후원의 후손들은 수가 많다.
- 부 : 완산부원군 이욱(完山府院君 李郁)
- 모 : 장수 황씨(長水 黃氏) - 문정 황정욱(文貞 黃廷彧)의 딸
- 정부인 : 증 정경부인 광산 김씨(贈 貞敬夫人 光山 金氏) - 김반[1] (金槃)의 딸
- 장남 : 이주(李週, 1625 ~ ?)
- 며느리 : 연안 이씨(延安 李氏) - 충정 이시방(忠靖 李時昉)의 딸
- 차남 : 이운(李運)
- 3남 : 이선(李選, 1632 ~ ?)
- 며느리 : 파평 윤씨(坡平 尹氏) - 윤강(尹絳)의 딸
- 며느리 : 창원 황씨(昌原 黃氏) - 황일보(黃一皓)의 딸
- 손자 : 이성휘(李聖輝)
- 손자 : 이창휘(李昌輝)
- 손자 : 이장휘(李長輝)
- 손녀 : 홍우령(洪禹寧)에게 출가
- 장녀 : 이수강(李壽康, 1634 ~ ?)
- 사위 : 청성부원군 문충공 김석주(淸城府院君 文忠公 金錫冑) - 청릉부원군 김좌명(淸陵府院君 金佐明)의 아들
- 계부인 : 정경부인 영월 신씨(貞敬夫人 寧越 辛氏) - 신희도(辛喜道)의 딸
- 차녀 : 이수애(李壽愛, 1655 ~ ?)
- 사위 : 응교 박태보(應敎 朴泰輔) - 문절 박세당(文節 朴世堂)의 아들
4. 여담[편집]
5. 묘역[편집]
현재 서울특별시 강남구에 이후원의 묘가 있다. 조상인 광평대군 묘역 근처에 있다. 원래는 경기도 금천 삼석산에 있었다가 경기도 광주 세곡을 거쳐 1704년(숙종 30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묘의 동남쪽에는 이후원의 일생과 업적이 적힌 묘비가 세워져있다. 이후원이 등용한 송시열과 송준길이 글을 짓고 이경직의 아들 이정영이 글씨를 썼으며, 묘비 상단의 머릿글은 김수항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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