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세이 오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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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과단한 자
승산과 자신감을 비웃는 소리를
지금은 아직
달게 받도록 하자.
그래도 이것만은 확실하다.
분명 그대들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무모함의 끝에
미래는 퍼져가고
도전의 끝에
위업은 이루어진다고.
-JRA 명마의 초상
99년, 페브러리 스테이크스.
영웅은, 토호쿠에서 왔다.
일본 경마 사상 단 한 마리.
지방에서부터 중앙을 제압한 말.
메이세이 오페라.
밤색털의 내방자.
시대는 밖에서부터 변해간다.
「모래의 왕자로」
2013년 페브러리 스테이크스 CM
일본의 경주마로 이와테 현 지방자치 경마장[2] 에 소속되었던 경주마이다. 지방 경마장 소속임에도 중앙 G1 대회를 사상 처음으로 우승하여 화제가 되었으며, 지금도 이와테 현의 상징으로 남은 명마이다.
은퇴 이후 번식 생활을 하다 한국으로 건너와 활동을 지속하던 중 숨을 거두었으며, 이런 사연으로 어드마이어 돈과 더불어 한국에서도 많이 알려진 외국마 중 하나이다.
2. 혈통[편집]
3. 생애[편집]
3.1. 데뷔 전[편집]
더트 중상 10승마인 아마존 오페라를 배출한 그랜드 오페라와 테라미스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메이세이 오페라가 태어난 타카하시 목장은 후에 플라워 파크를 배출하기도 하지만, 메이세이 오페라가 태어날 당시엔 영세 목장에 불과했다. 부모 각각 1전 0승에 불과했던 둘을 교배한 것도 부마 그랜드 오페라의 저렴한 종부료[3] + 다른 목장에서도 번식 암말로 거절당한 테라미스를 예탁료라도 받기 위해 받아들인 것.
어렸을 땐 몸집이 작았으나 야간 방목으로 마체가 좋아지면서 중앙 경마 입마를 고려했으나, 조교사였던 사사키 슈이치가 육성이라면 미즈사와에서도 가능하니 우선 미즈사와에서 뛰게 해달라고 간청하며 최종적으로 지방에서 데뷔하게 되었다.
3.2. 현역[편집]
1996년 7월 27일 모리오카 경마장의 신마전에서 승리를 거두며 데뷔하였다. 데뷔 첫 해 8전 4승을 기록하며 많은 기대를 모았고 4세(현 3세) 시즌인 1997년 토호쿠 3현 교류의 니가타 경마장에서 열린 토호쿠 더비에서 종전 기록을 1초 단축하며 처음으로 중상 대회를 제패한다. 그리고 이 때부터 스가와라 이사오(菅原勲)가 은퇴까지 주전 기수로 함께한다. 이후 코즈카타 상을 우승하며 4세 더트 삼관 시리즈를 목표로 잡았으나 두개골 부상으로 유니콘 스테이크스[4] 는 회피, 더비 그랑프리와 슈퍼 더트 더비 둘 다 10착으로 침몰했고 그 해 마지막으로 출주한 토카상에선 승리하며 체면을 세웠다.
이후 1998년 제왕상 3착, 미즈사와에서 열린 머큐리컵과 모리오카에서 열린 마일 챔피언십 남부배를 각각 우승하고 그 해 연말에 열린 도쿄대상전에서 2착을 거두며 기대감을 높이게 되었다. 이 시기엔 미나미칸토의 더트마 아부쿠마 포로와 라이벌을 형성해 둘의 대결을 AM 대결이라 부르기도 했다.[5]
1999년 5세(현 4세) 시즌으로 처음 출주한 경기는 2월 JRA에서 주최하는 페브러리 스테이크스로 여기서 생애 처음으로 중앙경마에 도전한다. 중앙 소속도 아닌 이와테 현 지방경마 소속으로 출주한 이 경기에서 메이세이 오페라는 그야말로 압승을 기록, 일본 경마 역사상 지방 경마장 소속으로 중앙 G1 대회를 우승한 최초의 사례로 기록되었다. 또한 2023년 현재까지도 유일한 사례로 남아있다.
이런 파란을 일으킨 이와테 현은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였으며 지역 언론인 이와테일보는 다음날 메이세이 오페라의 우승 소식을 지면 1면에 대문짝만하게 실어서 내보냈다. 또한 NHK에서도 취재를 와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인 '프로젝트X'[6] 에서 우승까지의 기록을 다루기도 했다.
이후 메이세이 오페라는 6월 제왕상에서도 우승해 염원의 2000m의 g1 타이틀을 획득하는 등 5연승을 차지했으나, 도쿄대상전에서는 11착을 기록하며 부진하였고 2000년 2연패를 노리려 출전했던 페브러리 스테이크스는 4착, 제왕상은 14착을 기록하고 이와테 현 중상대회인 미치노쿠 대상전에서 3연패를 거두며 우승한 것을 끝으로 은퇴한다.
3.3. 은퇴 이후[편집]
은퇴 이후 종마 생활 중 한국으로 수출된 자마가 좋은 성적을 거두자 2006년 아예 한국으로 건너와서 종마 활동을 시작, 처음에는 3년 한정 체류였으나 2011년 자마인 솟을대문이 KRA컵 마일(G2)[7] 에서, 가문대장군이 경남도민일보배에서 우승을 차지하는 등 자마의 좋은 성적이 지속적으로 나오자 체류 기간이 계속 연장되었다. 교배료는 2016년 기준으로 100만원이었다.
한국에 온 2006년부터 줄곧 제주도의 푸른목장에서 머물렀으나, 2015년 기존 목장 종마가 다른 말과의 다툼으로 갑자기 숨져[8] 교배를 진행해야 할 종마가 없어진 성수목장에 푸른목장 대표가 급히 메이세이 오페라를 보내면서 그 해 성수목장에서 10마리를 교배하는 등 교배를 무사히 마치기도 했다.
그렇게 체류가 연장되다가 귀국이 결정되어 준비 중 2016년 7월 1일에 숨을 거두었다. 목장주에 따르면 건강상 문제는 없었으며 노환에 따른 자연사로 보인다고 한다. 호쿠토 베가 때와 마찬가지로 검역법 문제로 시신은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경기도 이천시 성수목장 내 나무 밑에 묻혔으며, 이와테 현에서는 대신 갈기를 잘라 가져가[9] 미즈사와 경마장에 미즈사와의 영웅이라는 문구를 새긴 기념비석을 세워서 함께 전시 보관하고 있다.
자마 중 대상경주를 우승한 가문대장군은 거세마로 현역 활동중이던 2012년에 장골골절로 안락사, 솟을대문은 은퇴 후 승용마로 활동하다 2018년에 죽는 등 2021년 8월 기준으로 부계쪽으로는 번식 활동 없이 혈통이 절멸 상태이며 대신 암말인 금수봉, 대성퀸 등이 번식암말 활동을 함으로서 혈통을 이어나가고 있다.
2022년 4월 7일에는 자마인 금수봉이 어드마이어 돈[10] 의 손자마를 출산하기도 했다. 덕분에 이 말은 현역 시절 일본 더트 경주에서 활약했던 두 명마를 조부와 외조부로 맞이하게 되었다.
4. 여담[편집]
- 메이세이 오페라가 데뷔 할 당시 마주였던 오노데라 요시마사는 병마로 인해 레이스를 관전하러 나올 수도 없을 정도로 건강이 악화된 상태여서, 메이세이 오페라의 경기를 녹화한 비디오 테이프를 병상에서 시청하면서 메이세이 오페라의 앞날을 기대하기도 했다. 결국 오노데라 마주는 메이세이 오페라가 신마전을 뛰고 한달 뒤 세상을 떠났다.
이후 부인이였던 아키코 여사가 오노데라 마주의 영정을 들고 페브러리 스테이크스를 관전하러 왔는데, 메이세이 오페라가 최종 직선에서 선두에 서자 오노데라 마주의 영정을 들고선 "보세요! 당신의 말이 선두를 달리고 있어요"라고 외쳤다는 일화가 있다.
- 메이세이 오페라의 부마는 그랜드 오페라였는데, 메이세이 오페라의 우승 이후 메이세이 오페라를 오페라 하우스의 자마로 오해한 사람들로 인해 엉뚱하게도 오페라 하우스의 교배 요청이 폭등하기도 했다. 그랜드 오페라는 당시 종마 성적 하락으로 몬베츠에서 아오모리로 좌천되었다가 메이세이 오페라의 우승을 계기로 다시 몬베츠에 복귀해 150두 이상의 교배를 기록할 수 있었다.
- 메이세이 오페라가 죽은 2016년부터 이와테 경마의 중앙 교류 중상대회인 머큐리 컵(Jpn3)이 '메이세이 오페라 기념'이란 부제가 붙어서 개최되고 있다. 머큐리컵은 1997년부터 개최한 대회로 지금까지 1998년에 미즈사와 경마장 소속의 메이세이 오페라가, 2015년 오오이 경마장 소속의 유로비트 단 2마리만이 지방 소속으로 우승하고 나머지는 JRA 소속마가 우승을 독식하던 대회였다. 특히 2016년 대회는 7월 18일에 열렸는데, 메이세이 오페라가 죽은 지 겨우 2주 밖에 안된 시점임에도 그 2주동안 중상 대회에 '메이세이 오페라 기념'이란 부제가 붙기까지 속전속결로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이와테 경마에서의 메이세이 오페라의 존재감을 확인할 수 있다.
- 페브러리 스테이크스 우승 당시의 기수가 이와테 경마의 전설적인 말 토케이 니세이(1987~2012)[11][12] 의 주전기수였기 때문에 토케이니세이와 메이세이 오페라 중 누가 더 강했냐는 질문이 있었는데 토케이니세이가 더 강했다고 답한 적이 있다.[13]
- 메이세이 오페라가 제주도 푸른목장에서 종마 생활하던 시절에는 일본인 부부가 이 말을 보기 위해 목장까지 신혼여행으로 방문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 제주도 일대 생산목장 관계자들 사이에서도 일본인 신혼부부의 일화가 유명하긴 한데, 윤천보 계림목장 전 대표에 의하면 사사키 조교사와 동행한 우시야마 모토야스 프리랜서 기자를 필두로 이런 저런 일본팬들이 100여 명은 다녀갔다고 한다.
- 2012년 인하대학교에서 주최한 36회 인하문학상에 메이세이 오페라라는 작품이 당선되었는데, 작중 주인공이 메이세이 오페라를 소개할 때 "경주 중 낙마로 두개골이 함몰되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무려 열 번의 대수술 끝에 스물 여섯 번의 재팬컵 우승을 이루어냈습니다"라고 소개해 말딸 팬들 사이에서는 괴문서 취급을 받고 있다.
5. 경주 성적[편집]
[지방] A B [중앙] A B [1] 현재까지 지방 소속 경주마가 중앙의 G1 대회를 우승한 유일한 사례다.[2] 산하에 모리오카 경마장, 미즈사와 경마장이 운영되고 있다. 이 중 메이세이 오페라는 미즈사와 경마장 소속이었다.[3] 이 시기의 그랜드 오페라는 종마 성적 하락으로 인해 몬베츠에서 아오모리로 이동되기도 했다. 후에 메이세이 오페라가 성적을 내면서 다시 몬베츠로 복귀해 1999년 한해에만 150회 이상의 교배를 기록했다. [4] 당시 우승마는 타이키 셔틀[5] 98년 한 해 동안 가와사키 기념, 제왕상, 마일 챔피언십 남부배, 도쿄대상전 등 4경기에서 맞대결을 했는데, 마일 경주인 남부배에선 메이세이 오페라가 승리했지만 중거리인 나머지 세 경기에선 아부쿠마 폴로가 승리했다.[6] 성공시대나 신화창조의 비밀과 유사한 포맷의 프로그램이었다.[7] 삼관 대회 중 하나로 꼽힐 정도로 중요한 대회이다.[8] 기존 성수목장에는 '캐피털스팬딩'이라는 미국에서 온 종마가 있었는데, '스마티문학'이라는 다른 말이 들어오면서 경계심에 울타리를 넘어 공격하다 스마티문학의 뒷발질을 맞고 두개골 함몰이라는 큰 부상을 입고 다음날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이듬해 메이세이 오페라가 숨을 거둔 이후 이 캐피털스팬딩 옆자리에 매장되었다. 참고로 스마티문학은 현역 시절 1등급까지 올라가고, 2세의나이에 2011년 그랑프리(G1)에서 3위, 부산광역시장배(G3)에서 2위를 차지하는 등 대상경주에서도 출중한 실력을 보였던 경주마로 2021년 현재도 씨수말로서 활동 중이다.[9] 정확히는 매장했던 걸 일본 기자가 갈기 채취를 요청하자 다시 꺼낸 후 갈기를 자르고 매장했다고 한다.[10] 2011년부터 한국에서 종마로 활동중이나 2018년 이후 종마 활동은 없으며(다만 실제론 자료 누락 탓에 기재가 안 되어 있을 뿐, 21년에 최소 1건(판타스틱), 22년에 1건(송암론다도르)의 출산 및 수태가 확인되었다.) 대신 자마 중 서울마주협회장배 우승마인 천지스톰이 2022년 기준 유일하게 종마로 활동하고 있다. 금수봉과 교배한 상대 역시 천지스톰이었다.[11] 소개글 43전 39승. 데뷔하자마자 굴건염을 크게 앓아서 굴건염이 재발할까봐 조심스럽게 훈련을 한데다, 마주도 다른 경마장에 보내는 것을 굉장히 꺼려서 소극적인 출주 스케줄로 연승을 올리다가 같은 나이 대의 말들이 은퇴각을 재고 있을 만한 나이에 뒤늦게 중상급 대회에 나가기 시작하면서 그 때부턴 이와테 지방경마의 패왕으로 군림한다. 별명부터가 이와테의 마왕 이었을 정도. 95년에 처음으로 시작된 교류중상에서 처음 만난 중앙의 말들에게 3착 패배했는데 이 때 아무리 현역이 긴 편인 더트마라지만 너무나 고령인 9살. 1, 2착마와는 나이차이가 4,3살이나 났으니 기수는 1살이라도 더 어렸을때 이런 대회가 생겼다면 하며 아쉬워했다고.[12] 사실 이와테에선 토케이니세이가 쌩쌩하게 살아있는 2000년 부터 토케이니세이 기념을 만들었을 정도의 압도적 위상을 가지고 있다. 메이세이 오페라가 토케이니세이의 이와테 최강마의 위상을 이어받은 후계자에 가깝다.[13] 실제 전적과 실력을 견주어봐도 토케이니세이와 비견될 말은 1988년 오구리 캡이 중앙으로 진출한 후 카사마츠의 패왕으로 군림했던 페이트 노던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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