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미국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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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주요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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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아카데미 시상식
파일:oscar_logo.svg
최우수 작품상
제11회
(1939년)


제12회
(1940년)


제13회
(1941년)

우리 집의 낙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레베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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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1939)
Gone with the Wi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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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재개봉 포스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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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100522_72384_1719 (1).jpg

장르
드라마, 역사, 로맨스
감독
빅터 플레밍
각본
시드니 하워드
원작
마거릿 미첼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제작
데이비드 O. 셀즈닉
출연
클라크 게이블
비비안 리
레슬리 하워드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
촬영
어네스트 홀러
편집
할 C. 컨
제임스 E. 뉴컴
음악
맥스 스타이너
제공사
파일:미국 국기.svg 메트로 골드윈 메이어
파일:미국 국기.svg 셀즈닉 인터내셔널 픽처스
제작사
파일:미국 국기.svg 셀즈닉 인터내셔널 픽처스
수입사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UIP 코리아(2차)[재개봉]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피터팬픽쳐스(3차)[재개봉]
배급사
파일:미국 국기.svg 로이스 시네플렉스 엔터테인먼트
파일:미국 국기.svg 메트로 골드윈 메이어(2차)[재개봉]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UIP 코리아(2차)[재개봉]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피터팬픽쳐스(3차)[재개봉]
촬영 기간
1939년 1월 26일 ~ 1939년 7월 1일
개봉일
파일:미국 국기.svg 1939년 12월 15일(애틀랜타 프리미어)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57년 3월 15일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95년 5월 5일(2차)[재개봉]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21년 4월 28일(3차)[재개봉]
화면비
1.37 : 1
상영 시간
233분[1]
제작비
385만 달러
북미 박스오피스
$200,852,579 (최종)
$1,895,421,694[인플레이션][2]
월드 박스오피스
$402,352,579 (최종)
$3,739,000,000[인플레이션][3]
스트리밍
파일:wavve 로고.svg
파일:iOS Apple TV 아이콘.svg
국내 상영 등급
파일:영등위_12세이상_2021.svg 12세 관람가
미국 상영 등급
파일:미국 국기.svg

파일:G등급 로고.svg


1. 개요
2. 시놉시스
3. 예고편
4. 특징
6. 관련 일화
6.1. 캐스팅 비화
6.2. 배우들의 후일담
7. 사운드트랙
8. 평가
8.1. 평론
9. 흥행
10. 수상
11. 영화와 원작의 차이
12. 명대사
13. 비판 및 논란
14. 국내 개봉 및 방영
15. 기타
16. 외부 링크



1. 개요[편집]



1부


2부


3부

마가렛 미첼의 동명 소설을 기반으로 한 1939년 미국 영화.

할리우드의 역사를 대표하는 기념비적인 영화 중 하나이며 인플레이션 적용 기준 영화 역사상 최고의 흥행작이기도 하다.[4][5]


2. 시놉시스[편집]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뜨는 법이니까”
{{{#ffffff 남북전쟁 발발 직전, 오하라 가문의 장녀 ‘스칼렛’은 도도한 매력으로 뭇 남성들의 우상이다. 그녀가 짝사랑하던 '애슐리'가 친구 ‘멜라니’와 결혼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뒤늦게 고백하지만 그 자리에서 거절당하고, 이 모습을 우연히 그 자리에 있었던 '레트'에게 들키고 만다. 당황해 어쩔 줄을 모르는 스칼렛과는 반대로 이미 레트는 거침없는 매력의 스칼렛에게 빠져들고 있었다.전쟁은 남부에 불리해지고 스칼렛은 레트의 마차를 타고 죽을 고비를 넘기며 고향으로 돌아간다. 파란만장한 미국 현대사를 온몸으로 관통하는 가운데, 두 사람은 결혼하게 된다. 하지만, 행복한 결혼생활도 잠시, 레트는 여전히 스칼렛의 마음에는 애슐리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데... 삶의 모든 것을 뜨겁게 사랑했던 여자 ‘스칼렛’그런 그녀를 운명처럼 사랑했던 남자 ‘레트’
생애 가장 가슴 벅찬 클래식 로맨스가 찾아온다!
}}}


3. 예고편[편집]



예고편


75주년 기념 예고편


블루레이 예고편


재개봉 예고편


4. 특징[편집]


제작자 데이비드 O. 셀즈닉은 마거릿 미첼의 당대 최고의 베스트셀러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저작권을 재빨리 확보했고[6], 레트 버틀러 역에 베이실 라스본을 기용하라는 미첼의 제안을 무시하고 팬들이 가장 원하던 클라크 게이블을 캐스팅했다. 전국의 신인 연기자와 주연급 여배우들의 오디션을 거친 후 결국 영국의 비비안 리에게 남부 미녀 스칼렛 오하라 역을 맡겼다.

제작사인 셀즈닉 인터내셔널 픽처스는 이 영화를 역대급 대작으로 만들기 위해 모든 것을 동원했다. 처음부터 세세한 부분까지 모두 화려하게 만들기로 마음먹은 셀즈닉은 감독 세 명(샘 우드, 조지 큐코어, 빅터 플레밍)에게 영화를 맡겼다. 영화에서 가장 스펙터클한 장면인 애틀랜타 화재 장면은 백 포티에서 촬영되었는데, 킹콩 등의 영화에 사용되었던 중고 세트들에 실제로 불을 붙였다. 이 장면을 찍기 위해 할리우드에 존재하는 7대의 테크니컬러 카메라가 모두 동원되었다.[7] 이뿐만 아니라 이 화재 장면에서 소방시설 40여 대와 소방수 50여 명, 자원봉사자 200여 명을 동원하고 촬영 뒤 불을 끄는 데도 물 1900리터를 사용하였다. 또한 남북전쟁을 재현하기 위해 수많은 엑스트라를 동원했다. 멜라니의 출산을 앞두고 스칼렛이 의사를 찾아 헤매는 크레인숏도 마찬가지이다. 병동이 부족해 수많은 부상병과 사망자들이 길거리에 누워 있는 이 장면에서 엑스트라 총 800명과 더미(죽은 사람이나 동물의 모습을 본뜬 마네킹) 800개를 사용하였다.[8] 시대극으로서 의상에도 상당한 투자를 해야만 했다. 코스튬 디자이너 월터 플렁킷은 50명에 가까운 주요 배역을 위해 5천 벌이 넘는 옷을 디자인했고, 영화에서 비비안 리는 다른 옷 44벌, 클라크 게이블은 36벌을 입고 등장했다. 특히 플렁킷은 의상의 변화를 통해 스칼렛의 처지와 심리의 변화를 표현했다. 1부에서 오건디, 망사와 면 재질의 옷을 입던 스칼렛은 점차 부유해지면서 실크와 벨벳 소재 옷으로 바꿔 입는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다큐멘터리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영화사의 기념비적인 작품인 이유는 바로 당대에 할리우드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역량을 활용해 역대 최고 수준의 엔터테인먼트를 완성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결과는 제작자인 데이비드 O. 셀즈닉의 야심찬 계획에서 나올 수 있었는데 그와 스튜디오는 이 영화를 당대 최고의 대작을 만들기 위해 모든 걸 투자했다. 영화에 사용된 의상은 무려 5천 벌이 넘고 엑스트라만 2400명, 말 1100마리를 투입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당시 할리우드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기술력을 쏟아낸 작품으로 할리우드를 세계 영화의 중심으로 떠오르게 하는데 견인차 역할을 했다. 궁극적인 할리우드 영화를 만들겠다는 포부로 출발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이후 수십 년 동안 대작영화의 기준이 되었다. 그중 가장 훌륭한 장면은 상당 부분이 큐코어가 연출한 전반부에 속해 있다. 그는 인물과 분위기를 다루는 특유의 노련한 솜씨로 영화에 장대한 서사적 스케일을 더했다. 셀즈닉이 만들어 낸 장면은 영화사에서 가장 전형적인 특성을 담고 있다. 스칼렛이 부상병을 돌볼 때 뒤로 빠지며 부상병들로 화면을 채우는 카메라, 불타는 애틀랜타의 화염을 뚫고 돌진하는 마차, 게이블이 스칼렛을 안고 위층으로 올라가는 관능적인 그림자 등이 그러하다. 1939년의 테크니컬러 기술로 드레스는 예쁜 파스텔 색조로 표현되고 열정을 표현하는 데는 불타는 듯한 붉은색이 쓰였다. 거기에 맥스 스타이너의 웅장하고 감동적인 음악까지 더해진다. 군홍보단의 카메라맨 출신이자 촬영감독으로 경력을 시작했던 빅터 플레밍 감독은 스튜디오의 요구를 가장 충실히 수행하는 감독으로 평가되었으며, 그와 셀즈닉의 목표는 기술적으로 완벽한 구도와 미술, 조명을 구현하는 것이었다.

남부 특유의 억양, 관습, 예의를 재현하기 위해 원작 작가 마거릿 미첼이 추천한 전문가 수전 미릭(Susan Myrick), 그리고 윌 A. 프라이스(Will A. Price)를 고용해 배우들이 말 끝을 길게 늘리도록 훈련 시켰는데, 덕분에 다른 작품들과 달리 개봉 후 억양 문제로 뒷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렇듯 원작을 최대한 충실하게 영화화했다는 점도 비평가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중에서도 캐스팅과 연기에 대한 평가가 높았는데, 평론가 프란츠 홀러링은 비비안 리의 연기에 대해 “어떤 여배우도 흉내낼 수 없을 만큼 자연스럽고도 예술적으로 완벽하게 디자인된 연기로, 외모와 동작 모두에서 완벽하다”고 말했다. 원작자인 마거릿 미첼은 개인적으로 비비안 리의 스칼렛 해석에 찬성했다. 특히 찬사를 받은 연기는 타라로 돌아온 뒤 저택에 침입한 북군 병사를 해치우던 장면에서 용기와 결단력을 표현한 장면이다. 그리고 결혼 이후에도 여전히 애슐리에 대한 마음을 정리하지 못하는 스칼렛에게 질투심을 느낀 레트가 그녀와 강제적으로 관계를 가진 다음날 아침 침대에서 만족감을 표현해낸 장면도 호평을 받았다. 그외에 레트 버틀러 역의 클라크 게이블과 애슐리 윌크스 역의 레슬리 하워드 또한 마거릿 미첼의 인물 콘셉트와 관객의 상상에 부합한다는 평가를 받았고, 매미 역의 헤티 맥대니얼은 극중에서 비비안 리 다음가는 연기라는 평가를 얻었다.

원작 소설이 대히트를 치면서 1939년 12월 15일에 영화가 개봉되었다. 2차 세계대전도 발발하기 전에 러닝타임 3시간 50분짜리 영화를 풀컬러[9]로 제작했고, 제작비는 600만 달러를 들였는데 당시에는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엄청난 제작비였다. 2년 뒤 만든 디즈니환타지아가 230만 달러 제작비로 만들었다가 망하고 제작비 회수하느라 22년이나 걸렸던 걸 생각하면 이 영화의 제작비가 얼마나 엄청난지 알 수 있다. 1537%에 달하는 해당 기간의 미국 물가 상승률을 감안하면 1939년 당시 600만 달러는 2012년의 9800만 달러와 맞먹는 구매력을 갖는다. 영문 위키에서는 600만 달러는 과장이고 실제로는 385만 달러 정도라고 표기하고 있는데 이 정도도 엄청난 제작비이긴 하다. 이 영화의 러닝타임은 3시간 58분. 그때도 그렇지만 지금과 비교하면 대단히 긴 러닝타임이다.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영화 중 가장 러닝 타임이 긴 영화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영화 자체를 1부와 2부로 나눠 중간에 휴식 시간(인터미션)을 둘 정도이다. 1, 2부가 나눠지는 부분은 스칼렛이 타라로 돌아온 후 밭에 있는 무를 캐먹다가 절대로 굶지 않겠다고 맹세하는 부분이 끝나고 나서이다. 요즘은 이렇게 긴 영화를 만드느니 그냥 두 편으로 잘라 버리기 때문에 이제 이런 휴식시간이 있는 영화는 없다.

1939년 영화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미장센과 연출을 자랑한다. 한마디로 시대를 초월한 고전의 반열에 오른 작품. 또한 여자 주인공 스칼렛 오하라의 캐릭터는 당시 시대에는 드문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로 등장하며 영화 역사의 아이코닉한 캐릭터로 자리매김 한다. 영화는 원작의 스토리를 거의 그대로 따라가지만 역시 영화에 원작의 방대함을 다 넣을 수는 없었던 듯 하다. 원작에 비해 조연이나 단역에 해당하는 인물들이 잘리거나 비중이 많이 축소되고, 중간중간 이야기도 축소하거나 과감히 제외한 부분이 있다. 하지만 영화가 원작에 비해 딸리지는 않는다. 원작을 알고 봐도 영화가 손색없게 보일 정도로 각색이 상당히 잘되어 있다.

아카데미에서 이 영화와 대결한 영화는 프랭크 카프라(1897-1991)가 연출, 제작한 "스미스씨 워싱턴에 가다(Mr. Smith Goes to Washington)"였는데, 아카데미 11개 부문에 후보로 올라 대결하다가 모두 패배하고 오리지널 각본상 하나에 만족해야 했다. 원작이 있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이 상을 탈 수 없었기에 겨우 수상한 것이다[10]. 이때 프랭크 카프라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나온 해에는 당신의 최고 걸작을 만들지 말라." 하는 명언을 남겼고, 이 명언은 1997년 70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타이타닉(영화)에 밀려 수상을 거의 하지 못한 LA 컨피던셀의 감독인 커티스 핸슨이 다시 한 번 인용했다.


5. 등장인물[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등장인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 타라
    • 스칼렛 오하라 역 - 비비안 리
    • 유모 역 - 해티 맥대니얼
    • 제랄드 오하라 역 (아버지) - 토머스 미첼
    • 엘렌 오하라 역 (어머니) - 바바라 오닐
    • 수엘런 오하라 역 (동생) - 에벌린 키스
    • 카린 오하라 역 (동생) - 앤 루더포드
    • 브렌트 탈레튼 역 - 프레드 크레인
    • 스튜어트 탈레튼 역 - 조지 리브스
    • 포크 역 - 오스카 포크
    • 프리시 역 - 버터플라이 맥퀸
    • 조나스 역 윌커슨 - 빅터 조리
    • 빅 샘 역 - 에버렛 브라운

  • 트웰브 오크스
    • 레트 버틀러 역 - 클라크 게이블
    • 애슐리 윌크스[11] 역 - 레슬리 하워드[12]
    • 멜라니 윌크스 역 -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
    • 존 윌크스 역 - 하워드 C. 힉맨
    • 인디아 윌크스 역 - 알리시아 레트[13]
    • 찰스 해밀턴 역 - 랜드 브룩스
    • 프랭크 케네디 역 - 캐롤 나이에

  • 애틀랜타
    • 피티팻 해밀튼 역 - 로라 호프 크루스
    • 피터 아저씨 역 - 에디 엔더슨
    • 미드 박사 역 - 해리 데번포트
    • 미드 부인 역 - 레오나 로버츠
    • 메리웨더 부인 역 - 제인 다웰
    • 벨 와틀링 역 - 오너 먼슨

  • 그 외 조연들
    • 양키 디저터 역 - 폴 허스트
    • 보니 블루 버틀러 역 - 캐미 킹
    • 조니 갤러거 역 - J. M. 케리건
    • 필 미드 역 - 재키 모란
    • 캐슬린 칼버트 역 - 마셀라 마틴
    • 보 윌크스 역 - 미키 쿤
    • 에미 슬래터리 역 - 이사벨 주얼
    • 양키 캡틴 톰 역 - 워드 본드
    • 양키 소령 역 - 로버트 엘리엇
    • 메이벨 메리웨더 역 - 메리 앤더슨

2023년 현재, 모든 출연진은 고인이다.


6. 관련 일화[편집]



6.1. 캐스팅 비화[편집]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캐스팅을 위한 스크린 테스트

원작자가 처음 레트 버틀러 역에 꼽은 배우는 바실 래스본이었다. 그는 셜록 홈즈로 유명한 배우로서 사람들이 상상하는 레트 버틀러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배우였고, 대중들은 압도적으로 클라크 게이블을 원했다.[14] 클라크 게이블은 대중들의 관심에 부담스러워 했고, 하필이면 바로 직전 남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에 출연하기도 해서, 거절하려 했으나 캐롤 롬바드와 결혼하기 위해 첫 아내에게 지불해야 할 이혼 위자료에 쓸 5만 달러라는 당시에는 막대한 보너스 때문에 결국 수락하였다. 그러나 또 문제는 그의 전속 계약을 맺은 MGM 영화사가 딴지를 거는 통에 셀즈닉은 수익금 절반이라는 엄청난 대가를 주기로 한 계약을 맺고 나서야 비로소 그를 출연시킬 수 있었다.

참고로 마가렛 미첼은 레트 버틀러 역에 그루초 막스를 꼽기도 했으나 명백한 조크에 불과하다. [15] 데이빗 O. 셀즈닉은 마가렛 미첼에게 영화 전반에 대한 조언을 구하였고 그녀는 타라의 외관에 대한 비평을 한번 하였으나 무시되자 더이상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촬영 당시 여러 이야기도 넘쳐났는데, 처음 맡던 감독인 조지 큐코어(George Dewey Cukor,1899-1983)는 제작자 데이빗 O. 셀즈닉과의 마찰로 인해 빅터 플레밍으로 교체되었다. 조지 큐코어는 무척 자상했기에 여배우들에게 상냥했던 반면[16] 빅터 플레밍은 슈퍼 마초 감독으로 유명했기에 교체 소식을 들은 비비안 리는 무척 슬퍼했다고 한다. 그런데 플레밍도 셀즈닉과의 마찰로 촬영을 중단했는데 셀즈닉이 가소롭다는 듯이 '세상에 감독이 당신밖에 없나?'는 투로 다른 감독을 알아보자 백기를 들고 제발로 찾아와 사과를 하고 다시 감독을 맡았다.

주연 여배우가 확정되기도 전에 촬영을 시작했다. 첫 촬영은 1938년 12월 10일 <더 가든 오브 알라(The Garden of Allah)>(1936)와 <킹콩> 등 기존 영화의 세트에 적당히 판자를 붙여 실루엣을 만든 뒤 모두 불태우면서 시작되었다. 어차피 기존 세트를 헐고 새로 만들어야 하니, 아예 불태워버리면서 그 상황을 촬영해서 애틀랜타가 파괴되는 장면에 쓴 것이다. 이 화재 장면에만 25,000 달러가 들었으며 촬영 분량은 113분이었다. 옥외 촬영지 5만 평에서 치솟은 불길이 하도 거세서 MGM이 자리하고 있던 컬버 시티(Culver City) 주민들이 MGM 전체가 불타고 있다고 착각하는 바람에 하도 경찰에 하도 신고를 해대서 전화가 먹통이 될 지경이었다. 이때 스칼렛 오하라 역할은 이런 위험한 장면들에 동원하기 위해 미리 캐스팅해뒀던 스칼렛 오하라 전담 여성 스턴트맨들이[17] 해냈는데 이들은 본 영화의 촬영 끝까지 함께 했다. 이때 레트 버틀러 역도 당연히 전문 스턴트맨들이 대역으로 동원됐다.[18]

제작자 데이빗 O. 셀즈닉은 1938년 2월 비비안 리가 출연한 <Fire Over England>와 <A Yank at Oxford>를 본 순간 리를 스칼렛 오하라 역으로 점찍고 바로 리의 미국 활동을 담당하는 에이전시에 리의 이름을 스칼렛 오하라 후보에 등록시켜달라고 요청했다. 마침 리의 미국 에이전시 대표는 데이빗 O. 셀즈닉의 형제인 마이런(Myron) 셀즈닉이었다. 1938년 여름 셀즈닉 형제는 리의 전체 연예 활동에 관해 계약을 맺고 있던 영국 제작자 앨릭샌더 코다와 협상을 시작한다. 그리고 12월 10일 셀즈닉 형제와 코다는 첫 대면 회의를 가졌는데, 이 날은 마침 애틀랜타가 불타는 장면을 촬영한 날이었다. 그 뒤 데이빗 O. 셀즈닉은 수차례의 스크린 테스트를 거친 뒤 1939년 1월 13일 리를 스칼렛 오하라로 발표하게 된다.

미쳤다는 소리 들어가면서 이걸 제작한 당시 37살 야심찬 젊은 제작자 데이빗 O. 셀즈닉(1933년판 킹콩도 그가 제작했다.)은 늘그막에 내가 뭐하자고 이걸 제작했는지라며 자주 중얼거릴 정도로 이 영화에 대하여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한다. 그 뒤로 만드는 영화들마다 반드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비교당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가 이후에 제작한 영화들이 듣보잡은 아닌데 바로 영국영화 제3의 사나이를 공동 제작하고 알프레드 히치콕의 미국 진출작인 레베카, 무기여 잘 있거라(1957)를 제작했듯이 결코 제작한 영화들이 듣보잡이 아닌 수작도 많았기 때문이다. 나름 흥행작도 있어 경제적으로 부족함이 없었지만 사생활 문제로 마음도 편치 않아서인지 도박과 폭음으로 인하여 1965년 63살로 초라하게 세상을 떠났다.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데뷔 전에 스칼렛 오하라와 레드 버틀러의 딸 역할을 제의 받은 적이 있다. 딸의 연예계 데뷔를 아직 부정적으로 생각하던 테일러의 부모님이 거절해 무산됐다.


6.2. 배우들의 후일담[편집]


  • 주인공 스칼렛 오하라를 연기한 비비안 리는 이 작품으로 막대한 인기를 얻었다. 스칼렛 그 자체인 아름다운 외모로 유명하지만, 연기로도 인정받는 실력파 배우다. 이후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1951)에 등장해 말론 브란도와 함께 영화사에 길이 남을 걸작 연기를 다시 한 번 보여줬다. 이 작품으로 두 번째 오스카상을 수상했다. 결핵과 양극성장애 등 건강 문제를 많이 겪었으며, 영화보다는 연극 쪽 활동이 더 많았다.

  • 당시 46살이던 레슬리 하워드는 21살의 배역을 맡기에는 자신이 너무 나이들었다는 이유로 애슐리 윌크스 역을 맡기를 거절하였으나 인터멧조에 프로듀서로 크레딧을 올릴 것을 약속받은 후에 수락하였다. 덕택에 촬영 때마다 얼굴에 화장 떡칠을 해야 했다고. 이후에 하워드는 1943년 DC-3 비행기를 타고 포르투갈로 가던 길에 나치 공군 제40전투비행전대 제5편대 Ju 88[19]의 공격으로 격추당해 같이 타고 있던 다른 12명과 같이 죽었다. 그가 탄 비행기가 민간인이 탄 비행기였기에 이게 의문으로 남았는데, 전쟁이 끝나고 나서 드러난 사실은 나치군이 이 비행기를 격추한 것은 민간위장용 작전기로 오해했고, 거기다 윈스턴 처칠이 타고 있는 줄 알았다는 것이었다. 당시 이 비행기가 공격받을 것을 알고도 미군 측이 여기에 끼어들면 미군의 작전에 해가 된다고 하여 일부러 놔둔 것이 오랜 세월이 지난 다음에 드러나서, 다른 탑승객 유족들이 분노하여 미군 측에 소송을 제기하면서 논란이 된 바 있다.

도크: 저는 대개 같은 목표물의 사진을 두 번 찍었죠. 그 중 한 장은 늘 윗분들이 가졌어요. 제일 근사한 사진은 휘틀리 폭격기를 찍은 것이었는데, 우리 비행대대에서 처음 격추한 놈이죠. 우리는 그 첫 번째 격추를 축하하는 파티를 했다니까요! 다음 날 아침 5시 반까지요. 7시에 다시 출격이었는데 말이에요! 모두 술에 취해 비행기에 짐짝처럼 실렸지요! 휘틀리는 우리 대대가 격추한 첫 번째 목표물이었거든요. 그다음에는 4발기 리버레이터, 핼리팩스, 스털링, 서덜랜드도 격추시켰습니다. 그리고 록히드 허드슨도요. 민항기도 네 대나 격추시켰죠.

하일: 놈들은 무장 상태였나요?

도크: 아뇨.

하일: 그럼 그 놈들을 왜 쐈어요?

도크: 우리 엽총 앞에 들어오는 건 다 쐈어요. 한번은 총격을 가했는데, 거기에 큰 짐승들이 잔뜩 타고 있었던 거예요. 열일곱 명이 타고 있었죠. 승무원 네 명, 승객 열네 명이 리스본에서 오고 있었지요. 유명한 영국 영화배우 레슬리 하워드도 있었어요. 그날 저녁에 영국 라디오에서 들었거든요. 놈들은 대담한 조종사들이었죠. 민항기 조종사가 말이죠. 세상에나, 승객 열네 명이 탄 비행기를 뒤집어 버리더라고요. 어이쿠, 그놈들은 모두 비행기 천장에 매달렸을 거예요! (웃음) 그 비행기는 3200미터 상공에서 비행했거든요. 멍청한 놈들! 그 비행기는 직선으로 날다가 우리를 보자마자 커브를 돌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놈들을 잡았죠. 그리고 우리가 가진 걸 다 퍼부었죠. 오, 하나님! 놈들은 기체를 기울여 우리에게서 벗어나려고 했죠. 커브를 그리며 날았어요. 세상에, 한 대가 뒤를 좇았고 다른 한 대가 그 뒤를 따라갔죠. 우리는 아주 침착하고 냉정하게 버튼을 눌렀어요. (웃음)

하일 : 비행기가 추락했나요?

도크 : 당연하죠.

하일 : 그리고 그놈들은 탈출했어요?

도크 : 아뇨, 놈들은 모두 죽었어요.

- 당시 하워드를 격추시킨 Ju 88 폭격기의 승무원이었던 하인츠 도크(Heinz Dock) 상병이 동료에게 이 사건에 대하여 자랑한 내용. 연합군 정보부가 도청하여 기록하였다.[20]


그런데 그 비행기에 하워드가 탄 게 과연 오해였느냐? 이 수수께끼는 풀리지 않고 있다. 하워드가 실은 미국이나 영국 간첩이라서 나치가 정확하게 노리고 제거했다는 주장도 있으며 레슬리 하워드의 아들이던 배우 로널드 하워드(Ronald Howard,1918~1996)는 1984년에 쓴 회고록인 <아버지를 찾아서>에서 아버지가 영국을 위한 스파이였다면서 아버지를 전사자로 대우하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 영화상에서 늘상 순하고 착한 멜라니를 연기한 여배우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는 정작 현실에선 매우 당당하고 밝은 성격이며 손해보는 걸 일절 용납하지 않고 영화사와 계약 문제로 오랫동안 소송을 벌여 승소하는가 하면 지는 걸 싫어하던 강인한 성격이라 사람들은 그녀야말로 성격이 스칼렛 오하라였다고 말했단다.[21] 워너브라더스 소속이었기 때문에 원래 멜라니 역을 맡을 수 없었으나 워너브라더스사의 사장 잭 L. 워너(1892~1978)의 아내에게 간청하여 역을 따낼 수 있었다.

주요 배역 중 최후의 생존자인 드 하빌랜드만 104살까지 프랑스 파리에서 살다가 104번째 생일(2020년 7월 1일)을 넘기고 현지 시간으로 7월 26일에 사망했다. 단역 생존자 중 두 번째는 2014년 4월 6월에 96번째 생일을 지낸 지 사흘 만에 세상을 떠난 메이벨 메리웨더[22] 역의 메리 앤더슨, 세 번째는 2014년 1월에 99세로 사망한 인디아 윌크스 역의 알리시아 레트다. 네 번째로 캐린 오하라 역의 앤 러더퍼드가 2012년 6월 11일에 94세로 사망했다. 이제 출연자 중 유일한 생존자는 보 윌크스[23] 역을 맡은 아역배우였던 미키 쿤(Mickey Kuhn /1932년생으로 1957년 이후로 배우에서 은퇴)이었으나 2022년 11월 20일 향년 90세로 사망하면서 생존자가 남지 않게 되었다.

  • 주요 출연진 중 극소수만이 그들이 그리고 있는 캐릭터를 좋아했다. 클라크 게이블은 당시 아내와 이혼하고 캐롤 롬바드와 결혼하기로 합의함으로써 자신의 역할을 받아들였다. 스칼렛의 첫 남편인 찰스 해밀턴 역을 맡은 랜드 브룩스는 사실 거친 인물이였는데, 그는 순진한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에 반대했다. 버터플라이 맥퀸은 자신의 캐릭터에 대한 부정적인 고정관념을 싫어했다. 레슬리 하워드는 애슐리 윌크스 역을 맡기에는 자신이 너무 늙었다고 느꼈고, 그의 의상이 그를 호텔의 "요정 도어맨"처럼 보이게 만들었다고 불평했다.

  • 주인공 스칼렛의 하녀 역을 맡은 해티 맥대니얼(1895~1952)은 아카데미에서 첫 여우조연상을 받은 흑인 배우였다.[24] 그때는 민권법이 지정되기 전이라 인종차별이 심하던 시절이었고 상을 탔음에도 흑인 출연진들은 시상식에 올 수가 없었다.[25] 이때 클라크 게이블이 말도 안 된다면서 그렇게 하면 자신도 시상식 안 간다고 하는 바람에 해티는 시상식에 참석할 수 있었다. 애틀란타에서 열린 첫 시사회에서도 이랬다.[26] 이때도 클라크 게이블이 해티 맥대니얼 말고도 다른 흑인 배우들도 당연히 이 영화를 빛낸 배우들인데 그들을 피부색 때문에 못 나오게 하면 나도 시사회고 나발이고 안 간다고 따져서 흑인 출연진들이 모두 참석할 수 있었다.[27] 당시 KKK가 반발하여 게이블에게 비난 편지를 보내기도 했지만 라디오 방송에 나온 게이블은 "흑인이고 뭐고 간에 같은 영화에 배우로서 최선을 다했고 맥대니얼이 상을 받을 자격이 있음에도 나오지 말아야 할 이유가 안된다고 생각한다."라며 조금도 기죽지 않았다. 클라크 게이블의 별명이 괜히 할리우드의 왕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일화이다.
결국 게이블 덕분에 시상식에 나온 맥대니얼은 소감으로 "검둥이로서 내가 처음 나오게 되어 기쁩니다. 그리고 그걸 도와준 게이블 씨에게 감사드립니다. 먼 미래에는 (흑인들이) 더 많이 올라오게 되겠죠."라고 했다. 하지만 해티 맥대니얼 이후 우피 골드버그사랑과 영혼의 '오다 메' 역으로 두 번째 아카데미 흑인 여우조연상을 받기까지 51년이 걸렸다. 맥대니얼은 이후로 배우로서 별 다른 활약을 하지 못하며 조연으로 간간히 나오다 사라졌다. 2006년 미국에서 맥대니얼을 기리는 기념 우표가 나오기도 했다.

  • 그밖에 영화상에서는 아주 잠깐 나오던 스튜어트 탈레턴을 연기한 배우가 바로 조지 리브스(1914~1959)로 당시에는 이름 없던 애송이 배우였다. 이후로도 배우로선 그다지 알려지지 못했다가 1950년대 초반 TV 드라마 슈퍼맨에서 슈퍼맨을 맡아 인기를 끌면서 비로소 알려지지만 그 반대로 슈퍼맨 이미지로 가려져 철저하게 묻혀진 끝에 자살하면서 바로 슈퍼맨의 저주 시발점이 되어버렸다.


7. 사운드트랙[편집]










영화가 기념비적인 영화인 만큼 음악도 상당히 유명하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음악은 역대 최고의 영화 음악 중 하나라고 평가받는다. 2005년 미국 영화 연구소 AFI 선정 영화 음악 2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영화의 음악을 작곡하기 위해 제작자 셀즈닉은 1930년대 초 RKO 픽처스에서 함께 일했던 맥스 스타이너[28]를 선택했다. 맥스 스타이너는 <킹콩>, <카사블랑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등의 음악을 작곡했으며 24번 아카데미 음악상에 노미네이션 되고 3번 수상한 당대 최고의 영화 음악가다. 스타이너는 자신의 커리어동안 가장 긴 기간인 12주 동안 악보를 작성했다. 오케스트라에는 위고 프리드호퍼, 모리스 드 팩, 베르나르 카운, 아돌프 도이치, 레지날드 바셋 등 오케스트라 5명을 고용했다.

가장 유명한 음악은 역시 메인 타이틀이다. 주인공 스칼렛의 남부 농장 이름을 딴 Tara's Theme와 같은 멜로디다. 후에 맥 데이빗(Mack David)이 가사를 붙여 My Own True Love라는 제목으로 불렀다. 1999년 KBS FM <김광한의 골든팝스>가 조사한 '20C 최고의 영화음악' 중 22위로 선정되기도 했다. 스타이너는 19세기 독일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가 등장인물과 사물을 상징하는 유도동기(Leitmotiv)로 오페라를 촘촘하게 직조한 것처럼, 스타이너는 '타라의 테마'같은 주제 음악을 영화음악에 도입했다. 실제 그는 "바그너가 우리 시대에 살아 있었다면 최고의 영화음악 작곡가가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는 영화 음악 전문 용어로 '내러티브 큐잉'이라 불리는 기술이 빈번하게 쓰였다. 이야기를 따라가며 그 장면에 맞게끔 한 땀 한 땀 수공업 작업을 하는데 음악이 화면을 해설하고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영화 용어 중 '연속편집' 기법이라 하는 것이 있다. 이는 시간, 장소, 등장인물과 움직임, 소리 등이 하나의 연속성을 이루며 찍는 것을 말하는데, 음악 역시 이런 '시간적, 공간적 연속성'을 반영하여 작곡하는 것이 바로 이 '내러티브 큐잉'이다. 음악적 분위기, 리듬, 작아지고 커짐, 전환 등이 화면의 내용을 음악으로 표현해서, 보이는 대로 들려준다. 맥스 스타이너는 이렇게 화면과 음악이 싱크로나이즈 된 것처럼 작곡하는 것에 아주 능했다. 스칼렛이 집으로 아버지와 돌아가는 장면을 예로 들면 화면에 맞춰 음악이 ‘내러티브 큐잉’되는 것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 아버지가 힘차게 말을 타고 오다가 서면 음악도 잠시 잦아든다. 그리고 스칼렛이 뛰어와 둘이 이야기를 시작하자 음악도 가볍게 흘러가며 스칼렛의 테마가 연주된다. 이때의 스칼렛의 테마는 쾌활하고 밝다. 서서히 대화 주제가 파티, 애슐리의 결혼, 타라 플랜테이션까지 확장된다. 특히 타라의 중요성에 관해 아버지가 이야기를 해주는 중요한 신부터 '타라의 테마'가 연주되는데, 처음엔 잉글리시 혼, 플루트, 스트링, 하프 등의 악기가 쓰이고, 특히 잉글리시 혼과 플루트가 멜로디를 주로 연주한다. 전원적이면서도 가볍지 않고, 무게감이 느껴지는 질감을 가진 악기들을 선택한 것이다.


허나, 대사없이 제랄드, 스칼렛, 타라가 한꺼번에 크게 비칠 때는 스트링과 풀 오케스트라가 전 음역을 커버하며 연주한다. 오케스트레이션까지도 화면이 담는 크기, 대사, 인물 간의 관계를 생각하여 한 것이다.

타라는 이 이야기 전체나 마찬가지예요. 모든 일이 타라를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죠. 타라는 스칼렛의 집이에요. 그녀가 태어난 농장이 있고, 이야기의 마지막엔 그곳으로 돌아가지요. 스칼렛을 위한 테마를 쓰긴 썼어요. 3번인가 쓰이죠. 하지만 스칼렛이 타라 그 자체예요.


맥스 스타이너가 생전에 이런 말을 했다. 여기서 스타이너는 이 영화가 스칼렛의 여자로서의 러브 스토리가 아니라는 것을 정확히 꿰뚫고 있다. 타라의 장대한 테마는, 스칼렛이 여자로서, 철부지 같은 본래의 성격을 드러내는 테마를 잊게 할 정도로 중후하게 이 영화를 지배하고 있다. 영화 음악으로서도, 타라가 스칼렛의 끝까지의 운명임을 드러내주는 것이다. 즉, 스칼렛이 어린 소녀였을 때, 여자로서의 테마가 나오지만(위에 제랄드와의 대화 시작 부분에 나오는 테마), 타라의 테마가 더 인상 깊게 나오는 이유는, 스칼렛과 타라의 관계, 그리고 그것에서 나오는 스칼렛의 정체성을 더 확고하게 드러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테마들 자체가 풍기는 분위기의 경중까지도 애초 고려하여 작곡한 것이다.


8. 평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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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Db Top 250 168위{{{-3 {{{#!wiki style="display:inline-block; display:none; margin-left: 0.5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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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XXX위{{{-3 {{{#!wiki style="display:inline-block; display:none; margin-left: 0.5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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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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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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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RQE|

MRQ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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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점 없음 / 100





당대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흥행작이자 그 생명력을 잃지 않고 오늘날에도 회자되는 고전의 반열에 오른 걸작.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대한 찬사는 주로 제작 과정, 기술적 성취, 거대한 스케일에 집중되었다. 이 영화가 영화사에서 가지는 가치는, 새로운 기법이나 심도 깊은 주제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당대에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역량을 활용해 최고 수준의 대중 엔터테인먼트를 완성했다는 점에 있다. 그리고 제작 단계부터 전국적인 오디션과 “다시 볼 수 없는 명품”이라는 마케팅으로 작품을 홍보하고 물량공세로 대작을 만들어 고수익을 노린 이 작품의 전략도 향후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모범이 되었다. 이러한 대중적인 반향을 바탕으로 1977년 미국영화연구소(AFI)에서는 가장 인기 있는 영화로 선정했다. 또한 평론가들이 선정한 1998년 AFI 선정 100대 영화의 영화 중 4위를 차지했다(2007년 개정판에서는 6위). 그리고 1989년에는 국립영화보관소에 의해 그 보존 가치를 인정받았다.

본국인 미국에서는 여전히 대중들이 사랑하는 영화로 영화계의 스테디셀러, 고전으로 평가받는다. 비록 인종차별 이슈가 있으나 2000년대 이후로도 미국인이 매우 좋아하는 국민 영화이다. 해리스 폴에서 조사한 미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영화 1위를 2008년#, 2014년# 모두 기록했다.


8.1. 평론[편집]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앞으로도 여러 번 재개봉될 것이다. 좋다. 문명은 사라졌지만 잊혀진 것은 아니니까.

로저 이버트[29]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여전히 영화의 높은 랜드마크인데, 아주 단순하게 좋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놀랍도록 잘 말해주기 때문이다.

로저 이버트 (★★★★, 로저 이버트는 별 4개가 만점이다.)#


정말 훌륭한 영화들 중 하나이며, 전 세계 기록을 깨는 박스오피스 사업이 될 운명이다. 제작의 화려함, 제작에 들어간 완벽한 관리와 기술, 훌륭한 출연진과 전문 기술 스태프들의 조합이 어우러져 390만 달러의 왕성한 투자를 정당화하는 연극적 매력을 선보인다.

ㅡ 버라이어티 (★★★★★)#


대형 스크린에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다시 본다는 것은 할리우드가 한때 숭고함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두려움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ㅡ 엔터테인먼트 위클리 (★★★★★)#


나이가 들수록,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통해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미국 영화가 거의 없었던 것처럼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역사적 서사시극이자 친밀한 드라마로 성공한다.

ㅡ LA 타임스 (★★★★★)#


이 이야기의 풍부한 동맥력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가디언지 (★★★★★)#


어떤 요소들은 말도 안되게 구식인 것 같지만, 1939년 고전을 복원한 이 영화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하고 미친 것 같다.

가디언지 (★★★★★)#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미국의 일급 작품이고, 미국인들은 비평가들이 원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기 전에 그들이 원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타임지 (★★★★★)#


아마도 할리우드를 규정하는 영화.

ㅡ 할리우드 리포터 #


이 많은 사랑을 받고 많은 논의를 거친 블록버스터에 대해 더 이상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ㅡ 타임 아웃 #


지금까지 가장 사랑받은 단일 엔터테인먼트.

ㅡ 앤드류 새리스 (영화 평론가)#


의심할 여지 없이 여전히 헐리우드에서 나온 인기 있는 엔터테인먼트 중 가장 훌륭하고 오래 지속되는 작품이다.

ㅡ 주디스 크리스트 (영화 평론가)#


정점에 달한 할리우드의 제작능력과 자신감이 빚은 기념비적 걸작

이동진[30]


지금까지도 할리우드 영화의 결정판이라는 주장에 손색이 없다.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 1001#


헐리우드 역사상 가장 상징적인 영화다.

ㅡ 존 윌리 주니어 (영화 평론가)#




9. 흥행[편집]


전 세계 영화 박스오피스(물가상승률 적용)

[ 펼치기 · 접기 ]
순위
제목
박스오피스
개봉년도
1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41억 9,200만 달러
1939년
2위
아바타
38억 2,400만 달러
2009년
3위
타이타닉
34억 8,500만 달러
1997년
4위
스타워즈
34억 4,300만 달러
1977년
5위
어벤져스: 엔드게임
31억 6,500만 달러
2019년
6위
사운드 오브 뮤직
28억 8,400만 달러
1965년
7위
E.T.
28억 1,500만 달러
1982년
8위
십계
26억 6,500만 달러
1956년
9위
닥터 지바고
25억 2,600만 달러
1965년
10위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
24억 9,100만 달러
2015년
같이 보기: 전 세계 영화 박스오피스, 전 세계 영화 프랜차이즈 박스오피스
2021년 물가 상승률 적용 기준 / 출처




역사상 가장 오래도록 인기 있는 영화들 중 하나.

ㅡ 재클린 스튜어트 (영화학자, 시카고 대학교 영화학 교수)#


인플레이션 적용 기준으로만 전 세계 영화 역사상 최고의 흥행작. 이 수치는 재개봉 수치를 뺀 기록이다. 개봉 후 84년이 지난 지금 현재 누적 관객 수는 285,660,086명출처

다만 대한민국식 흥행 측정 방식으로 관객 수로 흥행을 측정할 시, 역대 흥행 1위는 중국 영화 Legend of the White Snake(1980)이다.[31]

재밌게도 현재 전 세계 영화 박스오피스 1위작인 아바타(영화)는 정반대의 경우로 2021년 중국 재개봉 수치 포함해도 누적 관객 수 328,805,225명으로 어벤져스: 엔드게임 누적 관객 수 351,491,996명에게 많이 뒤쳐진다. 근데 아바타는 아이맥스 관에서 주로 개봉해 티켓값이 더 비싸기에 관객 수론 밀려도 매출액으로 이겨서 현재 전 세계 영화 박스오피스 1위 자리에 있는 영화다.# 즉 이 영화가 인플레이션 기준 역대 1위 자리에 올라있는 이유는 당시 물가 기준으로 영화 티켓 가격이 상당히 비쌌기 때문으로 추정할 수 있는 것.

다만 인플레이션을 적용하지 않으면 재개봉 수치를 포함한다 한들 1972년작 대부(영화) 1편에게 33년 만에[32][33][34] 흥행 1위 자리 내준 작품이 된다. 인플레이션 적용 기준 기록으로 2014년 기네스북에도 등재됐다.#


영화도 원작처럼 어마어마한 흥행을 거두었다. 첫 개봉에서만 1억 9000만 달러 이상.[35] 2017년 물가로 환산하면 18억 달러가 넘는 어마어마한 기록이다.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가 북미에서 흥행몰이한 결과가 9억 3천 6백만 달러인 것을 감안하면 정말 상상 이상의 기록이다. 더불어 이후로도 재개봉으로 전세계에서 2억 달러가 넘는 수익을 추가로 벌어들이며 3억 9천만 달러 이상을 벌어들인다. 또한 26년이나 미국 및 세계 영화 극장 흥행 1위를 지켰었다. 이 기록은 1965년에서야 사운드 오브 뮤직이 깼다. 참고로 타이타닉은 13년 만에 아바타에게 미국 및 세계 극장 흥행 기록이 깨졌던 걸 생각하면 이게 얼마나 당시 대박을 거둬들였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물가 변동을 고려하면 여전히 전미 흥행 1위의 기록을 지키고 있다. 80년 전 영화인지라 집계의 어려움 때문인지 물가 변동을 고려한 월드와이드 기록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박스오피스 모조에 따르면 1989년, 1998년, 2016년 재개봉까지 포함해서 물가 상승율을 빼면 4억 달러이다.

모든 개봉작을 통틀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북미 지역에서만 2억 286만 장 이상의 티켓을 판매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 기록은 역대 1위의 기록이다.[36]# 2015년 북미에서 그야말로 역대급 흥행을 한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가 총 티켓 1억장을 판매한 것을 보면 앞으로 깨지기 어려운 불멸의 기록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 영화는 서유럽에서도 놀라울 정도로 성공적이었으며, 영국에서 약 3,500만 장, 프랑스에서 1,600만 장 이상의 티켓 판매를 했는데 이 기록은 영국에서 역대 1위. 프랑스에서 역대 6위의 기록이다. 전체적으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박스오피스에서 전 세계적으로 4억 달러 이상의 수익을 올렸다. 2007년 터너 엔터테인먼트는 인플레이션을 현재 가격에 맞춰 조정했을 때 그 총액이 약 33억 달러에 달할 것으로 추정했다. 반면, 기네스 세계 기록은 2014년에 34억 4천만 달러로 추청하며 역대 가장 성공한 영화로 등재했다. 2019년 물가 상승률 추정치로는 37억 달러가 넘어간다.#

단순 기록또한 상당히 대단한데,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영화산업이 확장되며 블록버스터가 쏟아지던 1970년대까지 역대 흥행 탑 10을 벗어나지 않던 영화였다. 역대 흥행 10위에서 나간 건 1985년 백 투더 퓨처의 개봉 이후의 일이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박스오피스의 수치도 엄청난 기록이지만, 텔레비전에서 첫 방송을 했을 때도 엄청난 시청률을 기록했다. 1976년 NBC가 이 영화를 처음 방영했을 때 미국에서 47.7%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이 기록은 역대 미국 시청률 8위의 기록이다. 또한 이 영화는 상영 시간이 4시간 가까이 되기 때문에, 방송국은 이틀 밤 동안 상영 시간을 쪼개야 했다. 그리고 둘째 날 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47.4%를 기록하며 최고 시청률을 유지했다.


10. 수상[편집]


기타 수상, 평론가 리스트

년도
수상
1989년
미 국립영화등기부에 최초로 등재된 영화 중 하나.[37]
피플스 초이스 어워드 선정 역대 가장 좋아하는 영화
1998년
미국 영화 연구소 AFI 선정 100대 영화 4위
2002년
미국 영화 연구소 AFI 선정 100대 러브 스토리 2위#
2005년
미국 영화 연구소 AFI 선정 명대사
1위 "Frankly, my dear, I don't give a damn."
31위 "After all, tomorrow is another day!"
59위 "As God is my witness, I'll never be hungry again."#
미국 영화 연구소 AFI 선정 영화 음악 2위 #
2007년
미국 영화 연구소 AFI 선정 100대 영화 6위 (재선정)
2008년
미국 영화 연구소 AFI 선정 서사시(Epic) 영화 4위#
2012년
사이트 앤 사운드 선정 역대 최고의 영화 평론가 부문 235위, 감독 부문 322위#
2013년
엔터테인먼트 위클리 선정 역대 가장 위대한 영화 10위#
2014년
할리우드 업계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영화 15위#
2015년
BBC 선정 역대 최고의 미국 영화 97위#
2016년
미국 감독 조합 선정 최고의 감독 영화 9위#

1940년 12회 아카데미 시상식





후보
수상 여부
작품상
데이비드 O. 셀즈닉 (셀즈닉 인터내셔널 픽처스)
수상
감독상
빅터 플레밍
남우주연상
클라크 게이블[38]
후보
여우주연상
비비안 리
수상
여우조연상
해티 맥대니얼[39]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40]
후보
각본상
시드니 하워드
수상
프로덕션 디자인상
라일 R. 휠러
촬영상 (컬러)
어네스트 홀러
레이 레나한
편집상
할 C. 컨
제임스 E. 뉴컴
음악상
맥스 스타이너
후보
음향효과상
토마스 T. 몰튼
시각효과상
잭 코스그로브
프레드 알빈
아서 존스
공로상
윌리엄 카메론 멘지스[41]
수상
기술 공로상
돈 머스그레이브
셀즈닉 인터내셔널 픽처스[42]


11. 영화와 원작의 차이[편집]


이 문서에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문서가 설명하는 작품이나 인물 등에 대한 줄거리, 결말, 반전 요소 등을 직·간접적으로 포함하고 있습니다.


  • 스칼렛의 아이들 중 웨이드와 엘라가 생략되어 보니 하나만 등장한다.

  • 이웃인 탈레턴 일가는 4남 4녀의 대가족인데, 영화에서는 쌍동이 형제만 나온다. 그나마 탈레턴 쌍동이 이외에 다른 이웃들은 몽땅 생략되었다.

  • 원작에서 전쟁 중 대부분 병참부대에 배속되어 있어 부상을 입은 적이 없는 프랭크 케네디가 아틀랜타 포위전 직전 부상을 입고 야전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병원에서 간호중인 스칼렛과 만난다. 원작에서는 1864년 크리스마스 이후에야 비로소 전투부대로 전속된다. 셔먼 부대가 펼친 초토화작전 때문에 병참부대가 긁어모을 물자 자체가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 아틀랜타를 탈출해서 처음 도착한 이웃집이 소설에서는 맬로리 농장이지만 영화에서는 윌크스 농장이다. 원작에서 아틀랜타 공방전에서 전사했고 운구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여기에 없어야 할 존 윌크스의 무덤도 윌크스 농장에 있다고 나온다.

  • 귀향한 스칼렛이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밭에서 무를 뽑다가 다시는 굶주리지 않겠다고 신에게 맹세하는데, 원작에서는 이 장소가 윌크스 농장에 있는 노예들의 텃밭이지만 영화에서는 타라 농장 밭이다.

  • 원작에서 프랭크 케네디는 1864년 크리스마스에 태라를 찾아와 머물 때 수엘렌과 결혼하고 싶다고 처음 고백하나, 영화에서는 종전 후 찾아와 그 이야기를 한다. 원작에서 프랭크는 이 크리스마스 이후로는 스칼렛이 세금 낼 돈을 구하러 아틀랜타에 갈 때까지 스칼렛과 만난 적이 없다. 수엘렌이 프랭크와 편지를 주고받았기 때문에 전쟁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아서 아틀랜타에서 장사를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관심이 없어서 바로 잊었다.

  • 원작에서 애쉴리는 전쟁 중인 1864년 초에 북군 진영에 침입해서 정찰작전을 수행하다가 포로가 되고, 북부에 있는 레트의 연줄을 통해 소재[43] 및 소식도 곧바로 알려지지만 영화에서는 1863년 크리스마스 휴가 때 타를랜타에 다녀간 뒤, 종전 후 귀향하다가 태라에 들른 한 남군 병사가 '스팟실바니아 전투(1864.5.19)에서 포로가 되었다'고 알려줄 때까지 소식이 끊긴다.

  • 프랭크 케네디가 죽는 날, 멜라니가 읽는 책이 원작에서는 레 미제라블[44]이지만 영화에서는 데이빗 커퍼필드이다. 애쉴리의 집에 모여 있던 사람들 중 피티팻 시고모는 미드 부인으로 바뀌었고, 아치가 맡은 역할은 마미가 한다. 레트와 함께 애쉴리를 데려온 사람은 휴 엘싱[45]에서 미드 박사로 바뀌었고[46], 인디어가 나가서 습격에 가담하지 않은 다른 의사를 데리고 오는 장면이 자연스럽게 생략되었다. 이후 북군의 추궁과 KKK단에 대한 수사 과정도 모두 생략되었다. 이 과정에서 KKK단 부분이 통삭제되면서 인종차별 묘사 문제는 원작보다 상당히 옅어졌다.[47]

  • 원작 후반부에 무일푼으로 귀향하던 남군 군인으로 등장하여 타라에 정착, 스칼렛의 타라 재건을 돕고 이후 수엘렌과 결혼하는 등 제법 비중있는 조연으로 등장하는 윌 벤틴의 캐릭터가 영화에서는 아예 생략되었다.

  • 영화에서는 보니가 죽기 직전에 벨 와틀링이 자기를 찾아온 레트를 달래서 스칼렛과 화해하라고 주선하지만, 원작에서는 이 타이밍에 벨이 등장하지 않는다.


12. 명대사[편집]







미국 영화 연구소 AFI에서 선정한 100대 명대사에 무려 3개의 대사가 선정되었다.[48]

한국에서는 마지막에 나오는 대사이자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라는 초월번역으로 유명한 "After all, tomorrow is another day!"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지만, 현지에서는 레트의 "Frankly, my dear, I don't give a damn(솔직히 말하면, 내 사랑, 그 딴 건 내 알 바 아니지)."라는 대사가 가장 유명하다. 스칼렛과의 관계에 지친 레트가, 떠나는 자신을 붙잡으며 '그럼 난 이제 어떻게 하라고요?'라며 울먹이는 스칼렛에게 작별을 고하는 이 시니컬한 대사는 AFI 선정 100대 명대사에서 1위를 차지할만큼 미국 영화사에서 가장 유명한 대사이자, 미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대사 중 하나이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명대사를 흉내내거나 패러디 할때도 가장 많이 등장한다.

여담으로 영화 제작 당시 저 대사 하나만을 위해서 검열국과 영화 제작자 측이 상당한 협상을 벌였는데, 'damn'이라는 말이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었다[49].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여지는 말이지만, 시대상[50]을 고려하면 영화에서 저런 말을 쓴다는 것은 EBS 교육방송 중에 욕설이 나오는 수준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농부의 딸은 외판원과 같이 있을 수 없다, 여자가 화면에 등장할 때와 영화 제목에는 욕설을 사용할 수 없다,[* 20세기 초반 개봉된 미국 영화 '똑똑한 여자들은 말을 하지 않는다(Smart Dames Don't Talk)'의 경우 Dames가 Damn과 발음이 유사하다는 이유로 'Smart Girls Don't Talk'로 제목이 바뀐 일이 있었다.] 간통을 스크린에서 묘사하면 안 된다[51] 등 검열이 엄격했던 시기였다. 결국 협상 끝에 저 damn을 유지하는 대신 스칼렛의 다른 대사인 '당신의 그 비열한 영혼이 지옥에 떨어져 영원히 고통받으면 좋겠네요'를 지우는 것으로 합의를 봤고, 결과적으로 신의 한 수가 되었다.


13. 비판 및 논란[편집]


원작 소설은 19세기 중반 당시 남부의 생활상을 잘 버무려 묘사해낸 작품이지만, 남부를 미화하고 당시 노예제도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비판받고 있다. 전체적으로 비춰지는 내용만 봐도 북부의 횡포에 힘들어지는 남부의 상황이 자세히 묘사되고, 자유인이 된 흑인들이 백인 여성들을 상대로 수많은 성폭력을 저지른다는 내용이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기술되는 등, 철저히 남부의 시각으로 작품이 그려지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원작 소설인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문서를 참고할 것.

그나마 영화에서는 각색 과정에서 이런 노골적인 묘사나 차별 요소를 거의 다 쳐냈다. 영화 촬영 당시 2차 세계 대전 유대인 홀로코스트 문제가 조금씩 알려지고 있던 추세였다. 이런 문제에 무지했던 백인들조차 인종차별과 학살 문제에 대해 어느 정도 의식이 생기던 시절이었던 것. 제작 당시에도 NAACP 같은 흑인 인권 단체와 여러 사람들이 반대하기도 했고, 셀즈닉 역시 이들의 의견을 참조해 많이 쳐냈다. 그래서 인종차별적인 요소가 원작보다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원작의 한계 때문에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면서 우울증에 시달린 어느 흑인 청년은 후일 자신의 성을 버리고 스스로 말콤 X라 칭하게 된다.

2010년대 이후 비판 의식은 더욱 거세지고 있다. 2017년 8월 28일, 테네시 주 멤피스의 명소 오피엄 극장(Orpheum Theatre· 1928년에 개관했다.)은 지난 34년간 이 영화를 여름 특선 영화제에서 꾸준히 선보였다가 '인종적 몰이해가 드러난 작품'이라는 비난이 계속되자 퇴출을 공표했다. 극장주 브렛 배터슨은 멤피스 흑인 인구가 63%에 달하는 점을 상기하면서 "인종차별에 대해 무감각한 작품을 더이상 상영할 수 없다"며, "영화제의 목적은 지역사회 주민들을 즐겁게 하고 교육하기 위한 것이니 내년부터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여름 특선작 목록에서 제외시키겠다"고 밝혔다. 일부 영화팬들은 이 영화가 당대 사회와 변화하는 시대상을 보여주는 작품임을 고려하면 시대적 분위기에 따른 또다른 예술 검열이라는 지적을 하고 있다.

2018년 스파이크 리 감독은 자신의 영화 블랙클랜스맨의 오프닝에 바함사의 한 장면을 삽입하면서 이 영화에 대한 비판을 드러낸 바 있다.

2020년 조지 플로이드 사망 항의 시위의 확산으로 일부 있던 옹호 분위기마저 미국에서 위축되고 있다. 인종차별과 연관된 역사적 상징물들이 퇴출당하고 있는 가운데,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도 청산 대상이 된 것이다. 2020년 6월 10일 다음-연합뉴스 미국시위 여파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청산대상 전락-HBO맥스 삭제 결정..'당시 만연한 인종적 편견 묘사' "흑인노예 고정관념 심고 KKK 미화한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HBO서 퇴출 퇴출에 대한 옹호 의견

미국 스트리밍 서비스 HBO 맥스는 2020년 6월 9일(현지시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보유 콘텐츠 목록에서 삭제했다. 1939년 개봉한 이 영화는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10개 부문을 휩쓴 명작으로 평가받지만, 흑인에 대한 고정관념을 고착화하고 백인 노예주를 영웅적으로 묘사해 인종차별적이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또한 노예제를 옹호하고, 흑인의 부정적 이미지를 심화시켰다는 비판도 받아왔다. 특히 백인우월주의 단체 큐클럭스클랜(KKK)의 활동을 미화한 것도 논란거리여서 2020년 2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 영화 ‘기생충’의 아카데미 수상 당시 “‘바람과…’ 같은 영화가 아카데미로 돌아와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HBO 맥스 측은 성명을 통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그 시대의 산물이며 불행히도 당시 미국 사회에 흔했던 윤리적, 인종적 편견 일부가 묘사돼있다. 이런 인종차별적 묘사는 당시에나 지금이나 틀린 것이며, 이에 대한 규탄과 설명 없이 해당 영화를 방영 목록에 두는 건 무책임하다고 생각했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는 영화 노예 12년의 각본을 집필한 감독 존 리들리가 2020년 6월 8일 언론 기고문을 통해 "이 영화는 인종차별 관행의 참상을 무시하며, 그러지 않을 땐 흑인에 관한 가장 고통스러운 선입견을 영구화할 뿐"이라며 HBO 맥스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삭제할 것을 공개적으로 촉구한 직후 나온 것이다.

다만 영구 삭제는 아니고 HBO 맥스 측은 추후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역사적 맥락에 관한 설명과 함께 콘텐츠 목록에 복귀시킬 것이지만, 영화에 별도의 편집을 가하진 않겠다고 덧붙였다. HBO 맥스 측은 "영화를 편집하는 건 이런 편견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일과 마찬가지"라며 "더 정의롭고, 공평하며, 포용적인 미래를 만들려면 우선 역사를 이해하고 인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영화의 판권을 가지고 있는 워너브라더스는 인종차별 문제로 시끄러웠던 1930-50년대 루니 툰에 대해서도 비슷한 조치를 취한 적이 있다.# 우피 골드버그는 이러한 검열에 반대한다고 밝혔다.##

HBO에서 삭제된다는 소식에 오히려 아마존 베스트셀러 1위를 기록했다.# 이러한 논란이 오히려 대중의 관심을 자극하면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아마존 TV·영화 부문 판매 순위에서 1∼4위를 석권했다. 아마존의 영상 콘텐츠 판매 순위 1위에 올랐으며 미 영화전문매체 필름은 6월 12일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인종적 부당함에 대한 항의가 이어진 뒤 1939년 작품인 이 영화가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고 보도했다. 개봉 70주년 기념 DVD(35달러)와 블루레이(139.99달러)는 모두 매진 사례를 기록했다.# 오히려 이런 논란이 이 영화를 모르는 세대들에게까지 작품 홍보를 해준 셈이다.

이후 HBO 측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다시 상영 목록에 넣었지만 역사적 맥락과 한계를 소개하는 부록 영상 두 편을 함께 제공해서 내놓기로 했다. #


14. 국내 개봉 및 방영[편집]


명작 영화를 꼽을때 항상 순위에 들어가는 작품이다. 2019년 한국갤럽이 조사한 '한국인이 사랑하는 외국 영화 6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대한민국에서도 엄청 인기 있었고 극장에서도 수십 년 동안 상시 상영되었을 정도. 젊은 시절의 할머니와 어머니들의 가슴을 불지르게 했던 영화이기도 하다. 국내에서는 1957년 수도극장[52]에서 최초 상영되어 관객 8만 5천 명을 모았다.[53][54] 여러 차례 재상영되었는데 1972년에는 중앙극장에서 재상영되었고, 1977년 허리우드극장 재상영시 139,102명, 1982년 국도극장 재상영시 131,412명의 관객을 모았다.

이후, 2차 매체로서는 1987년에 무비크로스라는 업체에서 비디오로 출시한 게 처음이었으며 국내에서 마지막으로 정식 상영한 것은 1995년으로, 1989년 MGM의 필름 보관소를 매입한 CNN의 사장 테드 터너가 리마스터링하여 50주년 기념으로 공개한 버전으로 가장 먼저 한국에서는 1991년에 대우비디오에서 VHS새롭게 출시한 버젼이었다. 이걸 이미 2부작으로 나눠서 1992년 2월 3일, 4일 밤 9시 30분 KBS 1TV에서 설날 특선으로 더빙 방영한 바 있다. 여기서 장면 삭제나 수정은 없고, 오래된 필름에서 새 필름으로 옮기고 바랜 색감을 다시 살리고 손상된 부분을 복원한 버전이다. 이 판을 제작하면서 더불어 50주년 기념으로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는데 당시까지 살아 있던 배우들(흑인 하녀를 연기한 버터플라이 맥퀸(1911~1995)과 스칼렛 누이동생를 연기한 에블리 키예스(1916~2008)와 앤 루더포드(1917~2012.6.11) 인터뷰도 수록했는데 당시 하빌랜드는 인터뷰를 거절했다고 한다. 이 다큐멘터리도 영화 방영 이틀 전날밤인 1992년 2월 2일에 KBS 1TV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이렇게 만들어졌다>라는 제목으로 더빙 방영된 바 있다. DVD에는 다큐멘터리뿐 아니라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가 한 인터뷰까지 실려 있다.

참고로 당시 국내 한 신문으로 이 영화 방영판 수입가가 70만 달러나 된다고 기사를 쓰면서 외화 낭비라고 깠던 바 있다. 당시에는 방영 영화로 엄청나게 비싸고 주고 사왔던 돈인데, 1년전인 1991년 극장 개봉 영화 흥행 1위 늑대와 춤을을 동아수출공사에서 88만 달러에 사왔다는 걸 생각하면 정말 비싸게 주고 사온 걸 알 수 있다. 더 예를 들자면,1991년 12월에 SBS 창사 특선 더빙으로 방영한 다니엘 데이 루이스 주연 영화 "나의 왼발"은 5만 달러로 KBS에서 방영권을 사오려던 것을 SBS에서 2배인 10만 달러를 제시해 사오는 통에 당시 언론에서 달러낭비라고 온갖 비난당하고 방송심의위원회 경고까지 받았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비싸게 사왔다는 비난을 받았지만 경쟁으로 값을 올린 게 아니라 저런 경고를 받지 않았다.

이후에 SBS에서도 더빙 방영된 바있다.

KBS 성우진은 다음과 같다.

SBS 성우진

이후 1995년 5월 5일에 이 리마스터 버전도 극장에서 재개봉했다. 당시 신문광고

2011년 2월에 CGV에서 '백투더무비' 이벤트 형식으로 4개관에서 각 1회씩 상영한 적이 있다. 자막은 엉망에, 휴식시간 없음이었다는 문제가 있었지만... 이런 악조건에서도 이영화 보려고 사람들이 하도 예매를 해서 관을 크게 옮겨서 틀어주기도 했다. 오오.

1989년을 마지막으로 한국에서는 저작재산권이 소멸되었다. 2013년 저작권법 개정 때 법인저작물의 저작권 보호 기준으로 삼은 1963년 이전 저작물이기 때문에 공표 후 50년을 적용받는다. 위 영상처럼 한글 자막이 달려서 유튜브에 올라가 있는 이유가 이것 때문이다. 미국은 발표 후 95년까지이기 때문에 2034년까지 유지된다.


15. 기타[편집]


  • 2014년 9월 유고브에 여론조사에 의하면 58%에 미국인들이 이 영화를 본 적이 있다고 밝혔다. 이 영화를 본 비율은 이 책을 읽었다고 주장하는 20%보다 더 많다고 한다. 이 영화를 본 많은 사람들은 이 영화를 자신들이 본 영화들 중 최고의 영화들 중 하나 또는 아주 좋은 영화로 평가했다고 유고브는 설명했다. 그러나 유고브는 백인흑인에 대한 평가에는 차이가 있다고 발표했다. 이 영화를 본 백인 중 3분의 2는 이 영화가 아주 좋거나 더 낫다고 말하고, 흑인의 3분의 1만이 이 영화가 그렇다고 말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절반은 이 영화를 본 적이 있다고 말했다.#

  • 가장 먼저 촬영된 장면은 1938년 12월 10일 촬영된 애틀랜타 디포 화형 장면이었다. 촬영 중 큰 실수가 있었다면 영화 전체가 폐기됐을 수도 있다. 그들은 실제로 알라의 정원(1936년)과 킹콩(1933년)의 "만리장성"을 포함한 많은 오래된 세트들을 스튜디오 뒷마당에서 치워야 했다. 그 화재는 2만 5천 달러가 넘었고 113분 분량의 영상을 만들어냈다.

  • 1999년 NBC/월 세인트저널 여론 조사에서 28%의 미국 대중들은 20세기 최고의 영화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꼽았다. 모든 영화를 통틀어서 1위였다.#

  • 해티 맥대니얼이 인종적으로 분리된 애틀랜타에서 시사회에 참석할 수 없다는 사실이 클라크 게이블을 격분시켜 그녀가 참석할 수 없는 한 시사회를 보이콧하겠다고 위협했다. 그녀가 그에게 가라고 설득하자 그는 나중에 후회했다고 한다.

  • 레트가 보니 탄생 후 마미에게 술잔을 기울이자, 촬영 중 농담으로 클라크 게이블은 실제로 해티 맥대니얼이 눈치채지 못한 채 술집에 평상시 차 대신 술을 따랐다.

  • 제작자 데이비드 O. 셀즈닉은 소설의 작가 마가렛 미첼에게 제작의 모든 측면을 비평해 달라고 간청했다. 극도로 사적인 사람인 그녀는 무시당한 타라의 디자인 면모에 대해 한 가지 비판을 했다. 그 후 그녀는 영화 제작 중 영화의 어떤 측면에 대해서도 언급하기를 거부했다.

  • 도널드 트럼프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다. 그는 이 영화를 "고전이다. 그것은 세월의 시험을 견뎌냈다. 나에게 있어, 그것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우리 진화의 중추적이었던 시기와 결합된 사랑 이야기다. 이야기의 범위가 엄청나다."고 평했다.# 기생충이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하자 이 영화를 들먹이며 "제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다시 (시상식으로) 부를 순 없을까?"라며 기생충을 디스하기도 했다.#

  • 첫 상영 당시 아직 남북전쟁 참전자가 일부 살아있어 생존 장병들이 특별 초대되어 관람하기도 했다.

  • 이 영화가 개봉되자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의견은 대체로 엇갈렸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인종차별주의라고 불렀고 몇몇 도시에서는 반대 시위가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해티 맥대니얼의 따뜻하고 재치 있는 캐릭터화에 찬성하며 이 영화가 강한 아프리카계 미국인 캐릭터를 특징으로 한다고 느꼈다. 다른 이들은 영화 속 흑인 배우들의 실제 묘사에 대해 더 양면적이긴 했지만, 흑인 배우들의 두드러진 역할의 사용은 다른 흑인 배우들의 영화판의 기용이 증가시킬 수 있다고 느꼈다.

  • 상술했듯이 한국에서의 영화의 저작재산권은 1989년에 소멸되었으므로 한글 자막이 첨가된 영화 전체를 인터넷에서 쉽게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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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명 영화답게 미국 대중 문화에서 끊임없이 패러디되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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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칭도 이 영화를 아주 좋아해서 몇번이나 다시 봤다.

  • 김정일도 이 영화를 좋아했고 이로운 미국영화라고 측근들에게도 보게 해주었다. 2004년, 방북한 프랭크 자누지에게 김계관의 통역 최선희가 "Frankly My Dear, I Don't Give a Damn"라고 대답해서 미국 측을 뒤집어지게 만든 적도 있었다.

  • 국내 트위터에서 영화 속 멜라니 캐릭터에 대한 여러가지 재해석이 담긴 어마어마하게 긴 타래가 만 단위 리트윗과 마음을 찍을 만큼 인기를 끌어서 2020년에 책으로도 나왔다. '다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스칼렛 오하라를 사랑하시나요?' 라는 2권짜리 책인데 특이하게 사철 누드 제본으로 만들어서 어느 페이지든 완전히 펼칠 수 있게 되어 있다.

  • 영화배우 신영균 씨가 이 영화 촬영에 사용된 미셸 70㎜ 모션픽처 카메라 한 대를 수집해서 자기가 세운 신영영화박물관에 전시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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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외부 링크[편집]


[재개봉] A B C D E F G [1] 인터미션 및 서곡 포함.[인플레이션] A B 현재 물가상승률 적용 시[2] 북미 박스오피스 역대 1위#[3] 전 세계 박스오피스 역대 1위#[4] 약 4조 1600억원.[5] 인플레이션을 감안하지 않으면 아바타가 1위다.[6] 제작자인 데이비드 O. 셀즈닉은 소설이 출간되기도 전에 영화화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책이 발간되고 한달 만에 5만달러를 주고 판권을 구매했다.[7] 테크니컬러는 색 재현력을 월등하게 높인 당시의 최첨단 컬러필름을 가리킨다.[8] 시사회에서 이 영화를 본 원작자 마가렛 미첼의 남편은 아틀랜타 기차역 앞에 남군 부상병들이 끝없이 누운 광경을 보고 "우리가 저렇게 많았으면 전쟁에 안 졌지."...라며 농담을 했다고 한다. 컴퓨터 그래픽도 없던 시절이고 안 그래도 제작비가 많이 들어가는데 엑스트라 동원 비용이라도 아끼려고 인형으로 대신했다. 원거리 촬영을 해서 들통이 나진 않았지만, 손을 흔드는 정도로 움직임이 단순하다는 점과, 모형 근처에 누워 있는 다른 엑스트라가 직접 조작해야 하는 문제가 있었다.[9]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최초의 컬러 영화다.[10] 사실 이 영화도 루이스 포스터(1898~1974)가 쓴 몬태나에서 온 신사(The Gentleman from Montana)라는 원작 소설이 있긴 했는데, 소설이 나오기도 전에 컬럼비아가 판권을 사서 영화로 제작했고 각본 역시 작가가 직접 영화로 각색하여 오리지널 각본으로 해석, 후보에 오른 것이다.[11] 이랜드 패밀리 레스토랑 애슐리는 이 사람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12] 장국영의 영어식 이름인 레슬리는 이 배우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한다.[13] 올비아 드 하빌랜드와 함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캐스트 중 장수한 배우다. 2014년 향년 98세에 나이로 사망했다.[14] 그런데 영화 관련 책자나 이선영(1번성우)의 영화음악실 같은 라디오 방송에선 원작자가 소설을 쓰면서 클라크 게이블을 레트로 상상하며 썼다는 이야기가 나와서 이걸로 아는 경우도 많았다.[15] 항목 보면 알겠지만 이 사람은 코미디언이다.[16] 이에 반해 클라크 게이블은 큐코어가 여배우들에게는 친절할지 몰라도 남자 배우들은 개처럼 취급했다고 회고했다.[17] Aline Goodwin과 Lila Finn.[18] Yakima Canutt와 Jay Wilsey.[19] 본래는 폭격기로 개발된 기체지만, 항속거리가 긴데다가 폭격기 치고는 속도가 빠르고 비행 성능도 뛰어나서 장거리 전투기나 야간 전투기로도 일부 쓰였다.[20] 출처: 공군 특별보고서(SRA) 4212, 17. 7. 1943, TNA, WO 208/4130. 《나치의 병사들》, 죙케 나이첼 및 하랄트 벨처, 김태희 옮김, 민음사, 121p에서 재인용[21] 동생 조안 폰테인과 의절한 걸로 유명한데 특히 폰테인이 1941년 자신을 제치고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면서 관계가 더욱 악화되었다. 몇년 후 드 하빌랜드가 아카데미상을 수상할 때 폰테인이 인사를 건넸으나 매정하게 무시해버렸다고 한다.[22] 피티퍼트 해밀턴의 친구 메리웨더 부인의 딸이다. 모녀가 다 소설에서는 출연도 꽤 많고 상당한 비중이 있는 조연이지만 영화에서는 그저 지나가는 단역 정도의 비중이다.[23] 애쉴리 윌크스와 멜라니 해밀턴 사이의 외아들이다.[24] 이 부분은 2017년 12월 31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뤄졌다.[25] 미국에서 공식적으로 인종차별이 폐지된 시기는 1954년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 판결 이후이다.[26] 제작자였던 셀즈닉이 엄청 노력했음에도 못 했다고 한다.[27] 해티 맥다니엘을 유모 역으로 추천한 사람도 클라크 게이블이었다. 둘은 이전부터 친한 친구 사이였다고 한다[28] 맥스 스타이너는 1888년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태어나, 구스타프 말러에게 작곡을 공부, 16살에 잉글랜드의 마제스티 극장의 지휘자로 고용됐다. 1914년 뉴욕으로 건너가, 브로드웨이에서 뮤지컬과 오페레타의 지휘자로 일했다. 그 후 로스앤젤레스로 건너가, 할리우드 클래식 영화 음악의 선봉장이 됐다.[29] 그의 저서 '위대한 영화'에서[30] 더 굿 무비에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남긴 한줄 평. 왓챠에는 별점은 4.5개를 매겼다가 삭제했다.[31]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2배 이상 수치인 약 7억명.[32] 대부 기준으로는 깔끔하게 33년 만이지만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기준으로는 아니다. 65년작 사운드 오브 뮤직(영화)하고 흥행 기록을 놓고 몇 번 엎치락뒤치락했었다. 최근의 사례로 치자면 아바타가 개봉한 지 10년 뒤에 엔드게임이 개봉하여 역대 1위가 되었으나 아바타가 재개봉해서 역대 1위 자리를 탈환한 것과 유사하다. 어쨌든 저쨌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흥행 기록을 최초로 깬 것은 사운드 오브 뮤직이지, 대부가 아니다.[33] 참고로 대부가 개봉했을 때 영화의 주역들인 클라크 게이블과 비비안 리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그만큼 오랫동안 흥행 1위를 차지한 셈이다.[34] 클라크 게이블비비안 리가 당시 기준으로도 단명한 게 가장 큰 원인이다.(...) 그 증거로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 인지도가 낮다는 이유로 비비안 리에게 자신의 배역을 빼앗긴 제시카 탠디(Jessica Tandy. 1909.06.07 ~ 1994.09.11.)는 비비안 리 보다 4살이나 연상인데 85세로 장수하셔서 1990년, 제6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로 최고령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수상자가 된다. 이 기록으로 1990년 3월 29일 기네스북에도 등재됐다.# 또 클라크 게이블과 동갑내기 리 스트라스버그대부2(1974)에서 하이먼 로스를 잘만 연기하셨다.[35] 사실 1억 9000만 달러는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 1939년 당시 1인당 영화 가격은 0.23$ 정도가 된다. 미국 관객 수는 당시 인구의 절반이었던 6000만 명 정도 된다고 하는데, 1억 9000만 달러가 아닌 총 1200~1300만 달러를 벌어들였을 가능성이 높다.[36] 2위는 스타워즈의 1억 7,800만장.[37] 후손에게 영구히 물려주어야 할 영화로 인정받은 것이다.[38] 이 영화로는 수상하지 못했지만 4년 전인 1935년 '어느 날 밤에 생긴 일'(It Happened One Night)로 7회 오스카 남우주연상을 받은 바 있다. 본인 성격 또한 상운에 미련이 없었다.[39] 최초의 흑인 배우 아카데미 시상식 수상자[40] 클라크 게이블과 마찬가지로 이 영화로는 수상하지 못했지만 8년 뒤인 1947년 '투 이치 히스 오운'(To Each His Own)으로, 또 1950년 사랑아 나는 통곡한다(The Heiress)로 19회, 22회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2번이나 수상해내고 만다. 이는 비비안 리의 오스카 수상기록과 같다.[41]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제작에 있어 드라마틱한 무드향상을 위한 색채 사용의 탁월한 성과를 했기에 수여.[42]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제작에서 조정 장비를 사용하는 선구자적인 역할을 해 수여.[43] "록 아일랜드" 수용소에 있다고 포로수용소 이름까지 확인해주었다.[44] 작중에서는 남군 병사들이 전쟁 중에 이 책을 읽으면서 이 책의 제목에 빗대어 자신들을 "리즈 미제라블(리의 불쌍한 부하들)"이라는 드립을 쳤다는 묘사가 있다.[45] 영화에서는 캐릭터 자체가 생략되었다.[46] 원작에서도 미드 박사는 보복 행위에 동참한 공범이었고, 도망칠 때 흩어져서 따로 집에 돌아갔기 때문에 공모 여부를 들킬 우려가 있어서 데려올 수가 없었다.[47] 원작에서는 스칼렛이 흑인 빈민촌에서 노상강도에게 성추행을 당함(단, 장소는 흑인 빈민촌이지만 강도는 흑백 콤비였다. 게다가 흑인은 말을 잡았고, 스칼렛의 몸에 손을 직접 댄 범인은 백인이었다.) → 프랭크가 KKK단을 동원하여 범죄 소굴인 그놈의 빈민촌을 이참에 쓸어버리겠다며 복수하러 가는 구도였으나, 영화에서는 스칼렛이 흑인 빈민촌에서 강도에게 습격당함(성추행 묘사 삭제-여기서도 스칼렛의 몸에 손을 대려고 하는 쪽은 백인이다.) → 프랭크가 친구들을 모아 복수하러 가는 구도로 변경되고, 이 과정에서 등장인물 누구도 인종차별 대사를 직접적으로 하지 않는다.[48] 1위 "Frankly, my dear, I don't give a damn."
31위 "After all, tomorrow is another day!"
59위 "As God is my witness, I'll never be hungry again."
[49] 이 당시 이 대사가 얼마나 파란을 불러 일으켰는가 하면 현재 영어에서 유명한 욕설 'Goddamn'이란 말이 이 당시에는 'F***'과 비슷한 위치에 있던 말이었다.[50] 헤이즈 오피스 항목 참조.[51] 알렉 기네스 주연 '선장의 낙원(The Captain's Paradise, 1953)'에서는 두 곳의 항구(모로코와 지브롤터)에서 두 아내(이본느 드 카를로와 셀리아 존슨)를 둔(중혼) 선장이 나오는데 이것 때문에 영화 시작 직전 '이런 식으로 행동해서는 안 됩니다'라는 자막을 먼저 내보내야 했고, 브로드웨이 연극이 원작인 1955년 영화 '7년 만의 외출(원제 Seven Year Itch)'의 경우 연극판에서는 주인공이 불륜을 저지르지만 영화판에서는 그런 고뇌에 시달리는 수준에서 끝냈다.[52] 1935년 서울 중구 충무로 29에 약초좌(若草座)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어, 약초동보극장(若草東寶劇場) 혹은 약초극장이라고도 불렸다. 1946년 수도극장으로 재개관하였고, 1962년 스카라극장으로 바뀌었다가 2005년 건물 철거와 함께 사라졌다. 지금은 그 자리에 아시아미디어타워라는 빌딩이 들어서 있다.[53] 당시 신문 기사에서 "우리는 18년 전에 개봉된 영화를 오늘에서야 보게 된 셈이다."라고 썼을 만큼 늦은 개봉이기는 하나 높은 수입가와 전란의 시기를 고려하면 이해가 된다. 일본도 1952년에 처음 상영(1942년에 일본이 싱가포르를 점령했을 때 이 영화를 보았다는 일본 기자의 회고는 있다)했고, 프랑스가 1950년, 독일이 1953년이다. 동양권에서는 영국령이었던 홍콩이 1940년으로 가장 빨랐다. [54] 지금처럼 인터넷이고 TV도 없던 시절에는 한참 세월이 걸려 개봉하는 사례는 많았다. 심지어 1990년대에도 흔했으니. 그 시절에 해외 개봉작을 보자면 불법 짝퉁 비디오로 보던 1980년대 이전에는 사실상 어려웠기에 개봉 아니면 티브이로 방영하는 걸 기다려야 했다.[55] 당시 영화 제작자들 사이에서 그녀의 별명이 "box office poison"이었다.[56] 이와 견줄만한 제작비가 벤허(1925년 영화) 정도인데, 벤허의 경우 너무 막대한 제작비로 흥행에 성공했음에도 1950년대 사극 대작 붐에 편승해 리메이크되기까지 무려 34년이 걸린다(...).[57] "Gone With The Wind is going to be the biggest flop in Hollywood history. I'm glad it'll be Clark Gable who's falling flat on his nose, not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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