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 테일러

최근 편집일시 :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주요 수상 및 헌액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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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아카데미 시상식
파일:oscar_logo.svg
여우주연상
제33회
(1960년)


제34회
(1961년)


제35회
(1962년)

시몬 시뇨레
(꼭대기 방)

엘리자베스 테일러
(버터필드 8)


소피아 로렌
(두 여인)

제38회
(1966년)


제39회
(1967년)


제40회
(1968년)

줄리 크리스티
(달링)

엘리자베스 테일러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


캐서린 헵번
(초대받지 않은 손님)


역대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
파일:bafta logo.png
여우주연상
제19회
(1966년)


제20회
(1967년)


제21회
(1968년)

줄리 크리스티
(달링)

엘리자베스 테일러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


에디스 에반스
(The Whisperers)

역대 골든 글로브 시상식
파일:goldenglobe.png
여우주연상 - 드라마
제16회
(1959년)


제17회
(1960년)


제18회
(1961년)

수잔 헤이워드
(나는 살고싶다)

엘리자베스 테일러
(지난 여름 갑자기)


그리어 가슨
(선라이즈 앳 컴포벨로)


역대 베를린 영화제
파일:베를린 국제 영화제 로고.svg
은곰상 - 여자연기자상
제21회
(1971년)


제22회
(1972년)


제23회
(1973년)

시몬 시뇨레, 셜리 맥클레인
(고양이), (데스퍼레이트 캐릭터스)

엘리자베스 테일러
(해머스미스 이즈 아웃)


없음





엘리자베스 테일러 [1]
Dame Elizabeth Taylor
DBE[2]

파일:elizabeth-taylor-time-life-magazine-philippe-halsman-03-802x1024.jpg
본명
엘리자베스 로즈먼드 테일러
Elizabeth Rosemond Taylor
출생
1932년 2월 27일
영국 잉글랜드 런던 히스우드
사망
2011년 3월 23일 (향년 79세)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엔젤레스
국적
[[영국|

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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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 [[미국|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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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신체
160cm[3]
직업
배우
활동
1942년2003년
배우자
콘래드 니콜슨 "니키" 힐튼 주니어 (1950년 결혼 / 1951년 이혼)
마이클 와일딩 (1952년 결혼 / 1957년 이혼)
마이크 토드 (1957년 결혼 / 1958년 사별)
에디 피셔 (1959년 결혼 / 1964년 이혼)
리처드 버튼 (1964년 결혼 / 1975년 이혼) (1975년 결혼 / 1976년 이혼)
존 워너 (1976년 결혼 / 1982년 이혼)
래리 포튼스키 (1991년 결혼 / 1996년 이혼)
자녀
장남 마이클 하워드 와일딩 주니어(1953년생)
차남 크리스토퍼 에드워드 와일딩(1955년생)
장녀 엘리자베스 “리자” 토드 티비(1957년생)
차녀 마리아 버튼(1961년생)[4]
종교
유대교
서명
파일:liz_taylor_signiture.jpg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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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エリザベス・テイラー
중국어
伊丽莎白·泰勒
그리스어
Ελίζαμπεθ Τέιλορ
러시아어
Элизабет Тейлор
아랍어
إليزابيث تايلور
페르시아어
الیزابت تیلور
히브리어
אליזבת טיילור


1. 개요
2. 인기 및 위상
3. 생애
4. 출연작
4.1. MGM 아역스타 시절
4.2. MGM 성인연기자 전성기
4.3. 리즈&딕 시절
4.4. 하향기
5. 사회공헌활동
5.1. HIV/에이즈 운동
6. 외모 특징
7. 인간관계
7.1. 결혼과 이혼
7.2. 가족
7.3. 친구
8. 어록
9. 여담



1. 개요[편집]




영화 <고백>(1965)

난 그녀의 독보적인 재능과 직업정신에 압도되었다. 직관력이 뛰어나고 순간적인 감정몰입에 능했는데 그걸 지켜보는 건 일종의 특권이었다. 톱스타가 되면 거기에 안주해 제멋대로 구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녀는 늘 열의를 갖고 자신을 새로운 한계로 밀어부쳤다. 전설 그 자체인 그녀를 알고 지냈다는 사실이 매우 자랑스럽다.

폴 뉴먼

영국과 미국의 배우.


2. 인기 및 위상[편집]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보라색 눈으로 유명한 고전 할리우드 시대의 전설적인 배우로, 30년[6] 가까이 출연작들을 크게 흥행시켰으며 평생 세계적 명성과 인기를 누린 슈퍼스타다. AFI(미국영화협회) 선정 가장 위대한 여성 배우 7위[7]에 선정되었다.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에 다섯 번 후보 지명되고 그 중 두 번[8] 수상했다. 골든글로브 2회[9], 영국 아카데미 1회, 베를린 영화제 1회 수상자이기도 하다. 할리우드에서 남녀 통틀어 배우 최초로 출연료 백만 달러를 갱신했다. 말년엔 자신의 명성을 발판으로 유명인들 가운데 에이즈 퇴치 운동을 가장 먼저 시작하고 주도적으로 앞서 박애주의자로 칭송 받았다.


3. 생애[편집]



파일:Two-year_old_Elizabeth_Taylor,_mother_Sara_Sothern,_and_brother_Howard,_1934.jpg

런던 햄스테드에서 미술중개상인 미국인 프랜시스 렌 테일러[10]와 역시 미국인인 연극배우 출신 세라 비올라 웜브롯[11]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형제자매는 오빠 하워드가 있다. 엘리자베스라는 이름은 할머니의 이름을 땄다고 한다. 대중에겐 '리즈(Liz)'로 자주 호명됐지만, 테일러는 어린 시절 오빠가 놀리던 별명으로부터[12] 유래된 이 애칭을 싫어해 테일러와 가까운 사람들은 가급적 엘리자베스라고 불렀다.[13]

영국에서 미국인 부모 사이에 태어났기 때문에 출생 때부터 미국과 영국의 이중국적을 가지고 있었다.[14] 아버지 쪽 가계가 미술중개업에 종사한 덕에 미술품에 조예가 깊었고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났다. 두 살 때부터 교양 목적으로 발레와 노래 교습을 받았고 네 살 때부터 승마를 익혔으며, 왕족들과 학교를 다녔다.

고위직들로부터 제2차 세계대전의 전화가 영국에 감돈다는 귀띔을 받고 테일러가 7살이 됐을 때 일가족이 귀국해 LA에 자리 잡았다. 아버지는 베벌리힐스에서 유명인사들이 드나드는 화랑[15]을 운영했고, 가족들은 주말마다 말리부에서 바베큐 파티를 했다. 고모할아버지 하워드 영(Howard Young)은 특히 재산이 많아 아이젠하워와 같은 거물들과 친밀한 사이였고, 뉴욕 펜트하우스에 거주하면서 코네티컷주에는 대저택을, 플로리다주엔 겨울 전용 휴양지를 구비하고 있었는데, 슬하에 자녀가 없어[16] 테일러 가족을 대리로 삼아 자신의 부를 마음껏 누리게 해주었다.

테일러는 "유명하지 않았던 순간을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아기 때부터 빼어난 외모로 근방에 소문이 자자해 할리우드 진출을 자주 권유 받았다. 그러나 부모님은 딸을 연예계에 내놓는 걸 선뜻 내켜하지 않았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주인공 스칼렛과 레트의 딸 보니 역할 제의도 거절해버렸다. 그러나 테일러의 연기 활동이 아직 가족들에게 많이 낯선 미국 사교사회에 녹아드는 데 도움이 될 거란 판단이 서자[17] 1941년 테일러가 9살이 됐을 때 영화사와 계약을 체결했다.

테일러는 1942년 10세 때 배우로 데뷔했으며 12살에 <녹원의 천사>라는 영화의 주연을 맡으며 단숨에 스타덤에 올랐다. 이는 "또래 아이들이 누리는 평범한 삶과의 영원한 결별"을 뜻하기도 했다. 또한 이때부터 아버지는 술에 취하기만 하면 어린 테일러를 두들겨 패게 됐다.[18] 테일러의 말로 미루어 보면, 9살짜리 딸이 자신보다 더 많은 돈을 벌게 된 것을 참지 못했기 때문으로 보인다.[19] 아이러니하게도 테일러의 데뷔를 주저하던 어머니를 설득했던 건 먼저 마음이 바뀐 아버지 쪽이었다. 래시 시리즈 오디션 기회조차도 아버지의 친구가 MGM의 프로듀서여서 받게 된 것이었다.

파일:elizabeth taylor.jpg

유서프 카쉬가 1946년 테일러가 14살 때 찍은 작품

15살 때 MGM 창립자 루이 B. 메이어가 매니저 역할을 해주던 어머니에게 언어폭력을 쓰며 고압적으로 구는 걸 보고 "너나 스튜디오나 다 꺼져버려!"라고 소리 지른 적이 있다. 부회장들까지 나서서 중재했지만 테일러는 끝까지 사과를 거부했고 루이 B. 메이어가 오히려 어머니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테일러는 이때 MGM에서 자신을 내쫓지 않는 걸 보고 본인의 상품적 가치를 깨달았다고.

성인 연기자로 대중의 눈에 확실하게 도장을 찍게 해준 작품은 1951년작 <젊은이의 양지>다. 이때부터 할리우드에 TV와 경쟁해야 하는 세상이 도래하고 기존 영화 체계가 전부 허물어지게 된다. 테일러는 딱 이 시기부터 성인 연기자로 활약했음에도 그 직전에 아역 스타로서 전통 스튜디오 양식을 제대로 다 경험했던 특별한 경우이기 때문에 "할리우드 황금기 스튜디오 시스템이 남긴 최후의 유산"이라고 한다.

이후 2001년까지 50편의 영화 - 드라마나 미니시리즈, 성우로 출연한 것까지 합치면 80여 편 - 를 찍었다. <자이언트>, <클레오파트라>,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 <버터필드 8>도 대표작이다. 특히 개봉 당시 실제 배우자였던 리처드 버튼과 함께 출연한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에서 실감 나게 막장 부부 연기를 보여준 걸로 유명하다.[20]

테일러는 기억력과 현장집중력이 뛰어난 배우였다. 배우라면 웃고 떠들다가도 큐 신호에 즉각 연기에 몰두해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촬영 직전에 준비가 필요하다며 대사를 다시 확인하거나 집중을 위해 워밍업을 하며 다른 배우들을 기다리게 하는 행위를 이해하지 못했다.

어머니를 따라 크리스천 사이언스라는 개신교파를 믿고 있었지만, 유대인 남편인 마이크 토드[21]가 1958년 사망하고 찾게 된 유대교 회당에서 정신적 안정을 느끼고 1959년 개종했다. 히브리어 이름은 Elisheba Rachel. 같은 해 이스라엘 채권을 10만 달러 구매해 투자 형태로 시오니즘에 경제적 지원을 한 것이 아랍권의 반감을 사서 통일 아랍 공화국[22]에서 테일러의 출연작 전체가 상영 금지되었다. 1962년 <클레오파트라> 촬영 땐 유대교인이 클레오파트라를 연기하는 것에 분노한 이집트 당국에 의해 입국을 불허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개봉 후엔 전세계적 인기가 이집트 홍보에 도움이 됐다는 결론이 나와 해금 시켰다. 1982~3년엔 이스라엘 총리 메나헴 베긴, 국방장관 아리엘 샤론, 레바논 대통령 아민 제메옐(Amin Gemayel)을 각각 만나 평화 협정을 촉구하기도 했다.

1983년 12월 5일 알콜 중독 문제를 해결하고자 베티 포드 센터[23]할리우드 스타 최초로 자진 입소했다. 이는 중독 문제를 쉬쉬하던 미국 사회의 판도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자니 카슨, 메리 타일러 무어[24] 등 동료 스타들이 그 뒤를 따랐고, 덕분에 오늘날 스타들 뿐만이 아니라 일반 대중들도 자신의 중독 문제를 주변인들과 공유하고 치료소에서 적절한 조치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1984년 1월 20일 퇴소했었지만, 1988년 다시 한 번 들어갔다. <녹원의 천사>에서 승마하는 연기를 하다가 척추를 다친 게 고질병이 되어서 허리 통증을 해결하려다 진통제에 중독돼 고생하기도 했는데, 이는 다름 아닌 의료진이 의도적으로 유도한 과잉복용 때문이었다. 1990년에 캘리포니아 의료위원회는 80년대에 테일러에게 진통제 처방전을 수천 장 내준 3명의 의사에게 경고장을 보내 견책했다.

어려서부터 지병이 많아 평생 지속적인 고통에 시달리며 수십 번의 수술을 받았고 밤마다 끙끙댔지만[25] 티내지 않고 밝게 생활했다. 1994년과 1995년엔 두 번의 고관절 교체 수술이 있었다. 1997년엔 뇌졸중이 뇌종양 제거 수술로 이어졌다. 2002년엔 피부암 방사선 치료를 견뎌야 했다. 1998년과 2004년엔 등에 압박골절이 일어나 수술을 거쳤고 말년엔 휠체어 신세를 지기도 했다. 래리 킹조차도 왜 나한테만 이런 가혹한 질병들이 벌어지나 하늘을 원망한 적 없냐고 안타까워했을 정도. 이처럼 수많은 질병과 각종 사건들을 이겨냈기 때문에 "생존자"라는 표현이 자주 붙었다.

2011년 3월 23일 울혈성 심부전증 투병 중 향년 79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친구 조안 콜린스는 유명인의 사망에 언론 취재가 이 정도로 몰려든 건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타계 이후로 처음 겪는 장면이었다고.[26] LA 인근의 포레스트 론 공원묘지에 묻혔다. 2012년 사후 수익 랭킹 1위를 차지했다.[27]


4. 출연작[편집]



4.1. MGM 아역스타 시절[편집]


  • 귀로(There's One Born Every Minute), 1942: 유니버설 픽처스MGM이 '신비로운 눈을 지닌 9살 여자애' 테일러의 미모에 대한 소문을 듣고 접촉해왔다. 어머니가 유니버설을 택해 계약 후 찍은 첫 작품이다. 식품회사 사장이 시장 후보로 나선 가운데 사장 장녀의 전남친이 회사로 들어와 여성의 성욕을 증진시키는 비타민 Z(Zumf)라는 걸 발명했다고 사기를 치면서 벌어지는 소동을 그린 가벼운 코미디물이다. 테일러는 사장의 막내딸 역할이었다. 그러나 유니버설은 곧 테일러의 아이답지 않은[28] 성숙한 얼굴을 탐탁치 않게 여기게 됐고 계약을 취소했다.
  • 래시 집에 오다, 1943: 그 유명한 래시 시리즈의 탄생이었다. 유니버설과의 계약 해지 후 MGM이 영국식 억양의 조연을 필요로 하면서 오디션을 통해 3개월 임시 계약을 한다. 배우로서의 존재감을 대중에게 첫 각인 시킨 작품이다. 결국 7년 짜리 정식 계약을 체결했다.
  • 제인 에어, 1943: 헬렌 번즈 역. 20세기 폭스 제작. MGM이 테일러를 빌려줬다. 로체스터 역을 맡았던 오슨 웰스는 어린 테일러의 미모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초반에 짧게 나오지만 불운을 고요하게 받아들이는 소녀를 강렬한 존재감으로 표현하며 영화 전체에 고딕 분위기를 잘 깔아주었다는 평론가들의 찬사를 받는다.
  • 도버의 하얀 절벽(The White Cliffs of Dover), 1944: 로디 맥도웰이 아이린 던[29]의 아들로, 테일러는 이 아들이 좋아하는 이웃 소녀로 나온다. 감독은 테일러를 눈여겨 봤다가 <녹원의 천사> 주연으로 추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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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녹원의 천사(National Velvet), 1944: 첫 주연작이다. 테일러는 승마와 영국식 억양이 가능해야하다는 주인공 역 조건을 전부 갖추고 있었다. 테일러를 캐스팅 한 뒤 체격이 작아 원작 주인공에 어울리기 위해선 좀 더 자라날 시간이 필요하다는 판단을 내린 MGM은 몇 달을 기다려줬는데, 테일러는 그 동안 승마를 더 익히다가 부상 당했다. 남장을 한 채 애마에 올라 장애물 경마에 나가는 소녀의 애기다. MGM의 간판스타였던 미키 루니와 함께 출연했고 안젤라 랜스버리도 나온다. 영화는 흥행과 비평 양면으로 성공했다. "그 세대의 또래 소녀들은 모두 녹원의 천사가 되고 싶어했다."[30] 테일러는 이때의 경험에 대해 "연기가 아니라" "동물을 사랑하는 어린아이였던" "내 실제 삶의 연장이었다"고 말했다. 테일러는 같이 연기할 말을 직접 골랐는데 MGM은 이 말을 13살 생일선물로 줬고 테일러는 이 말이 사망할 때까지[31] 길렀다. 테일러에게서 대스타의 가능성을 엿본 MGM은 테일러의 일거수 일투족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 용감한 래시, 1946: 래시 시리즈 주연을 꿰찼다. 흥행에 크게 성공했다.
  • 아버지와 인생을(Life with Father), 1947: 윌리엄 파월과 아이린 던이 이야기의 중심인 부부로, 지미 라이던(Jimmy Lydon)이 이들의 아들이자 테일러의 애정상대로 나온다.
  • 신시아(Cynthia), 1947: 신시아 역. 대본에 버스터 키튼이 참여했다. 다시 한 번 지미 라이던과 연애적으로 엮이는 관계로 나왔다. 메리 애스터가 어머니로 나온다.
  • 주디와 데이트(Date with Judy), 1948: 이 작품을 통해 아역에서 졸업하게 되었다. 테일러의 표현에 따르자면 "처음으로 남자주인공이 네 발 달린 동물이 아닌" 작품이다. 애정상대역이었던 로버트 스택[32]은 테일러가 스크린상에서 처음으로 어른스런 입맞춤을 하게 된 배우였다. 이 작품부터 화장다운 화장을 하게 되었다. 주디 역은 제인 파월[33]이었고, 테일러는 그 다음 비중이었다. 작품은 큰 인기를 끌었다.
  • 작은 아씨들, 1949: 에이미 마치 역. 한참 MGM에서 밀던 준 앨리슨[34] 중심으로 꾸려진 작품이다. 따라서 준 앨리슨이 조 마치 역을 맡았다. 테일러를 새침한 미녀 캐릭터로 고정시키려는 MGM의 의도도 있었다. 마가렛 오브라이언[35]이 베스, 자넷 리가 메그였다.
  • 공모자(Conspirator), 1949: 필름누아르. MGM에서 가능성 있는 여배우(들)에 대한 전례 없는 규모의 고투자 고수익 방침이 세워진 뒤, 테일러를 그 대상으로 결정하고 찍은 첫 번째 작품이다. MGM은 생일잔치를 성대하게 열어주고 프랑스 파리로 호화여행을 보내주는[36] 등 테일러에게 매우 공을 들였다. 처음으로 성인으로 설정된 배역을 받았고, 영국 로케로 촬영되었다. 로버트 테일러가 상대역이었다.
  • 신부의 아버지, 1950: 개봉 직전 있던 니키 힐튼과의 결혼식 비용을 MGM에서 대주었다. '신부'라는 이미지로 연계된 이 영화의 홍보에 써먹기 위해서였다. 테일러에 대한 이런 MGM의 고투자는 보답 받았다. 1950년에 가장 흥행한 영화 중 하나다. 스펜서 트레이시가 아버지로 나온다.
  • 아버지의 작은 배당금, 1951: <신부의 아버지>의 대성공에 고무돼 MGM이 서둘러 제작한 후속작이다. 다시 한 번 흥행면에서 대성공을 거뒀다. 이때까지의 테일러는 이 영화의 감독인 빈센트 미넬리가 아버지라 당시 자주 촬영장에 놀러오던 라이자 미넬리의 표현처럼, "아직 애"였다.


4.2. MGM 성인연기자 전성기[편집]


화면 속 존재감, 민감하고 깊이 있는 연기, 인물에 대한 상상력, 압도적인 관능미 등 사람들이 배우에게서 꿈꾸는 모든 것을 총체적으로 보여준 시기다.

  • 젊은이의 양지, 1951: 파라마운트 픽처스 제작. MGM이 테일러를 임대해주었다. 이 작품을 통해 테일러를 아역 때부터 알고 있던 미국 대중들이 테일러를 완연한 성인연기자로 인지하게 됐다. 전형적인 MGM식 "눈요기감" 배우가 될 뻔한 위기에서 벗어나 "깊이 있는 연기가 가능한 진지한 배우"로의 전환이 이뤄졌다. 절친 몽고메리 클리프트를 만나게 된 작품이기도 하다. 흥행과 비평 면에서 전부 성공했다.
  • 최고의 사랑(Love Is Better Than Ever), 1952: 로맨틱 코미디. 사랑의 매혹, 러브 이즈 베터 댄 에버로도 유통되고 있다. 테일러가 무용교사로 나온다. 스탠리 도넌(Stanley Donen) 연출. 이 작품 개봉 직후 도넌의 <사랑은 비를 타고>가 개봉됐다.
  • 아이반호, 1952: 이 작품을 통해 두 번째 남편 마이클 와일딩을 만났다. 와일딩은 다른 영화를 찍고 있었는데 마침 촬영장이 서로 근처에 있던 것이 인연이 됐다.
  • 거상(巨象)의 길(Elephant Walk), 1954: 파라마운트 픽처스에서 만들었다. 신경쇠약을 이유로 하차한 비비안 리의 대타 투입이 필요해지자 MGM이 테일러를 또 임대해주었다. <에밀 졸라의 생애>(1937)로 아카데미를 작품상을 수상했던 윌리엄 디터리 연출. 피터 핀치가 남편으로, 데이나 앤드류스[37]가 여주인공을 흔들리게 만드는 남편 친구로 나온다. 2차 세계대전 직후 영국 배경. 여주인공은 농장주인 남편을 따라 식민지인 스리랑카 실론밭 대저택으로 가게 되는데, 이미 죽은 시아버지의 그림자가 너무 짙게 드리워져있다. 테일러는 이 작품을 좋아하지 않았다.
  • 내가 마지막 본 파리(The Last Time I Saw Paris), 1954: F. 스콧 피츠제럴드의 단편소설이 원작인 로맨스. 밴 존슨[38]이 상대역이었다.
  • 자이언트, 1956: MGM이 이번엔 워너 브라더스에 임대해주었다. 제임스 딘은 자기 파트를 다 찍자마자 요절했는데, 테일러는 딘과 같이 나오는 씬의 단독샷들이 남아있어서 매우 고통스럽게 촬영했다. 노년 모습까지 신빙성이 있게 인물을 구축했음에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에 후보 지명되지 못해 소위 "스넙"으로 여겨진다. 테일러는 이 영화 촬영장에서 허드슨과 함께 처음 마셔본 칵테일을 가장 좋아했다.[39] 워너 브라더스 역사상 최고의 티켓 판매 기록을 세웠다.
  • 레인트리 카운티(Raintree County), 1957: 몽고메리 클리프트, 에바 마리 세인트가 같이 출연했다.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에 후보 지명되었다. 작품 자체는 고평가 받지 못했다.
  •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Cat on a Hot Tin Roof), 1958: 세 번째 남편 마이크 토드가 사망했을 땐 이 영화의 촬영을 시작한지 고작 2주가 지난 때였다. 남편으로 나온 폴 뉴먼은 테일러는 "자신의 연기 도구들을 정확히 사용할줄 아는 배우"라고 평했다.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두 번째로 올랐다.
  • 지난 여름 갑자기(Suddenly, Last Summer), 1959: 친척 역의 캐서린 헵번에 의해 강제로 뇌엽절리술을 받을 위기에 처한 여성 역이다.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에 세 번째로 후보 지명되었다. 테일러는 자신이 이 작품으로 아카데미를 수상했어야 했다고 봤다. 테일러가 스타파워로 집어넣은 몽고메리 클리프트가 테일러의 정신상태를 감정하는 의사로 나온다. 헵번과 테일러는 함께 감독 조셉 L. 맨키위즈나 프로듀서 샘 스피글(Sam Spiegel)과 엄청나게 싸워대서 영화가 미완으로 남을 거란 우려까지 있었지만 강렬한 결과물이 나왔다.
  • 버터필드 8(BUtterfield 8), 1960: MGM 산하에서 찍은 마지막 작품이다. 원래 서류상으론 MGM과 계약이 끝나있었는데, MGM에서 우겨서 성사 시켰다. 그 대신 당시 남편이었던 에디 피셔를 작은 역할로 동반 출연시켰다. 테일러는 이 영화가 대본부터 맘에 안 들었다며 "쓰레기"라고 일갈했다.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네 번째 후보 지명 끝에 첫 수상했는데, 테일러는 이를 막 촬영을 시작했던 <클레오파트라> 세트장에서 폐렴으로 쓰러져 기관절제술을 받은 것에 대한 동정표라고 봤다. "목숨값으로 받은 상"이라는 말까지 했었다. <아파트 열쇠를 빌려드립니다>의 셜리 맥클레인이 받는 게 옳았다고 생각한다고. 평론가들은 나름 정당한 수상이었다고 평하고 있다. 친구 샤론 스톤AFI와의 인터뷰에서 "탁월한 신체언어 활용만으로 서사를 만들어낸" 점을 높이 샀다.


4.3. 리즈&딕 시절[편집]


주로 리처드 버튼과 협업하며 일과 사랑을 양립하던 시기다. 둘은 언론에서 "리즈&딕(Liz&Dick)"으로 불리며 함께 하는 모든 것이 늘 큰 화제를 모았다. 큰 성과도 몇몇 있었지만 후반엔 소위 "하이 캠프"스러운 진부한 영화들만 생산해내 비판 받았다. 보통 영화사에 뜻깊은 기여를 한 연기는 60년대 후반이 마지막이었던 것으로 본다.

  • 클레오파트라, 1963: 20세기 폭스 제작. 테일러가 폐렴에 걸려 임종을 예감하고 있을 때 조안 콜린스가 대체로 물망에 오르며 대기하고 있었지만 회복한 테일러는 다시 촬영장으로 돌아왔다. 조셉 L. 맨키위즈 감독과 두 번째 작업이다. 백만 달러를 계약하며 당대 최고 출연료를 달성했다.
  • 예기치 못한 일(The V.I.P.s), 1963: 심한 안개로 인해 히스로 공항에서 발이 묶인 승객들의 사연을 모자이크식으로 엮는다. 버튼과 테일러가 각각 백만장자 남편과 그 남편을 떠나려는 유명 여배우로 출연해 둘의 스캔들을 연상케 하며 박스오피스에서 큰 성공을 거뒀다. 루이 주르당[40]이 테일러의 연인 역으로 나온다. 오만불손한 제작자 역의 오슨 웰스, 상사를 짝사랑하는 순수한 비서 역의 매기 스미스도 볼 수 있다.
  • 고백(The Sandpiper), 1965: 빈센트 미넬리 연출. 화가인 테일러가 에바 마리 세인트와 결혼한 리처드 버튼과 문제학생의 학부모와 교사로 만나 관계를 갖게 된다. 영화평은 안 좋았지만 흥행한 덕에 주제곡 "The Shadow of Your Smile"이 인기를 끌어 AFI 영화사 100곡에 꼽혔다. 커크 더글러스에 따르면 초연 때 헤다 호퍼[41]할리우드 블랙리스트 명단에 올랐던 공산당원 작가 돌턴 트럼보를 왜 크레디트에 넣었냐고 따져묻자 테일러가 "좀 닥치는 게 어때요?"라고 대꾸했다고. 찰스 브론슨이 테일러의 동료 예술가 중 하나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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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진은 1948년 2월 21일자 Life지에 실린 필립 할스만의 작품이다.[2] DBE를 받은 배우는 엘리자베스 테일러 외에 줄리 앤드루스, 헬렌 미렌, 매기 스미스, 주디 덴치, 크리스틴 스콧 토머스,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 등 열손가락 안에 든다. 다른 분야로는 추리소설 작가 애거서 크리스티가 DBE다.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기사 준 2등급(Knight Bachelor)보다 높으며 KBE를 받은 찰리 채플린과 동등한 정식 2등급 기사 등급이다.[3] 활동 당시 신체 정보[4] 입양한 딸이다.[5] 재단.[6] 40년대~60년대.[7] #[8]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2회 이상 수상한 여배우는 10여 명에 불과하다. 대표적으로 잉그리드 버그만,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 비비안 리, 메릴 스트립, 조디 포스터 등이 있다.[9] 이중 한 회는 여우주연상이 아니라 한동안 존재했던 연기특별상이다.[10] 1897~1968.[11] 1895~1994. 걸음마를 떼자마자 발레 훈련을 받은 무대 배우였다. 브로드웨이에서 활발히 활동했지만 결혼과 동시에 은퇴했다. 테일러가 출산한 뒤에는 바쁜 테일러를 대신해 아이들을 돌봐주곤 했다.[12] "Lizzie, or Lizzie the Cow, or Lizard".[13] 1992년 조니 카슨 에 출연했을 때도 "둘 중 무얼 더 선호하냐"는 질문에 엘리자베스라고 답한 뒤 "엘리자베스라고 불리는 게 진심으로 더 좋다"고 다시 한 번 강조했다.[14] 당시에는 영국도 현재의 미국, 캐나다와 마찬가지로 국적 속지주의를 채택하여 부모의 국적과 관계없이 영국 영토 내에서 태어난 신생아에게는 자동적으로 영국 국적을 부여하였다. 물론 현재는 국적법이 속인주의로 개정되어 영국에서 태어났다고 자동으로 영국 국적이 부여되지는 않는다.[15] 1949년 하워드 휴즈는 이 화랑에 들린 테일러를 잠깐 보고 반해 테일러의 어머니에게 100만 달러(오늘날 원화 가치로 환산하면 100억이 넘는다)을 줄테니 테일러와 결혼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청하기도 했다. 결혼이 성사되면 테일러 한 사람을 위한 단독 스튜디오도 만들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보석이 가득 담긴 서류가방을 보내기도 했다. 돈에 아무런 관심이 없던 테일러는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전부 거절하고, 단 한 번도 만나주지 않았다.[16] 20대 초에 유행성 이하선염을 앓은 뒤 생식능력을 잃고 말았다.[17] 테일러가 화제거리가 되면 가족 전체가 사교사회의 주목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정도의 생각이었다.[18] 1999년 바바라 월터스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사실이다. 피플[19] 어려서 아버지로부터 받은 학대는 테일러가 마이클 잭슨과 가까워지게 된 공통분모이기도 하다.[20] 이때 아카데미를 탔는데, 대리시상자가 다음해 졸업으로 스타덤에 오르게 되는 앤 밴크로프트이다.[21] 랍비의 아들이었다.[22] United Arab Republic. 이집트, 시리아, 예멘[23] Betty Ford Center. 전 영부인 베티 포드가 설립한 곳으로, 베티 포드도 사회 통념 때문에 알콜 중독 문제를 방치하다가 뒤늦게서야 이를 대중과 공유한 바 있다.[24] 본인의 이름을 내건 TV쇼로 유명하다.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수상자이기도 하다.[25] 전남편 리처드 버튼이 증언했다.[26] 사실상 그녀의 사망으로 20세기 할리우드를 수놓은 고전배우들(비비안 리, 마릴린 먼로, 오드리 헵번, 그레이스 켈리) 대부분이 역사로만 남게 되었다. 현재는 소피아 로렌 정도 밖에 남지 않았다.[27] 이전에 1위를 지속적으로 차지했던 인물은 돈독한 사이였던 마이클 잭슨이다.[28] 당시 아역계의 교과서였던 셜리 템플을 기준으로 봤을 때[29] Irene Dunne.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에 다섯 번 후보로 올랐던 주연급 배우.[30] 멜리사 리버스가 어머니 조앤 리버스가 몇 년 동안 테일러를 조롱했던 일을 두둔하며 한 말이다. 이어지는 말은 다음과 같다. "모든 어린 소녀들은 자라서 테일러처럼 아름답고 화려해지길 바랐다 - 다이아몬드들과 자기를 차지하려고 싸워대는 남자들 같은 걸. 어머니는 그런 환상 속 존재를 인간으로 되돌려놓으려고 한 것이다." 폭스뉴스[31] 테일러가 24살 때 죽었다.[32] Robert Stack. 1930년대의 시카고를 배경으로, 금주법 수사관 엘리엇 네스의 활약상을 다뤘던 (1959)라는 TV드라마가 대표작이다.[33] Jane Powell. 대표작은 <7인의 신부>(1954).[34] June Allyson. '이웃집 소녀' 이미지를 표방했으며, 밴 존슨과 콤비로 엮이곤 했다.[35] Margaret O'Brien. 아카데미 아역상을 수상한 바 있다.[36] 묵게 된 호텔의 로비와 방을 수십 개의 난초로 장식했다.[37] Dana Andrews. <로라>(1944), <우리 생애 최고의 해>(1946)가 대표작이다.[38] Van Johnson. 당시 MGM에서 주디 갈란드, 로레타 영, 자넷 리, 라나 터너 등의 상대를 하던 주연급 배우다.[39] 허쉬 초콜렛 시럽, 보드카, 깔루아를 섞은 것이다.[40] Louis Jourdan. <패러딘 부인의 사랑>(1947), <미지의 여인에게서 온 편지>(1948), <지지>(1958)로 유명하다.[41] Hedda Hopper. 매카시즘의 선봉에 섰던 당시 가장 유명하고 영향력 있던 연예계 칼럼니스트다.
  •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 1966: 테일러가 가장 만족스러워하는 작품이다. 캐릭터 형성을 위해 일부러 10kg 가량 살을 찌우고 목소리를 낮추고 자세를 바꾸며 자신의 존재를 전격적으로 다시 돌아보는 과정이었기 때문이라고. 이 영화로 두번째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스크린 속 희끗희끗한 머리는 중년 연기를 위한 가발이다.
  • 말괄량이 길들이기, 1967: 윌리엄 셰익스피어 희곡이 원작. <로미오와 줄리엣>(1968)으로 유명한 프랭코 제피렐리(Franco Zeffirelli)가 감독했다. 1967년 개봉한 작품 중에서 가장 큰 수익을 거둬들였다.
  • 황금 눈에 비친 모습(Reflections in a Golden Eye), 1967: 존 휴스턴 연출. 카슨 매컬러스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테일러는 몽고메리 클리프트의 발탁을 자신의 출연 조건으로 내걸었지만 클리프트가 촬영 직전 사망해 말론 브란도가 대타가 되었다. 영화평은 그리 좋지 않지만 테일러의 연기가 빼어나 대표작으로 자주 꼽힌다.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하며 개봉했다. 테일러가 촬영 중에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로 뉴욕비평가협회 상을 탔을 때 브란도가 왜 진작 테일러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했냐고 기자들을 호통 친 일이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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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하향기[편집]


TV 출연이 잦아졌고, 연기력이 작품별로 들쑥날쑥하는 경향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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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사후엔 테일러를 두고 "우리 세대의 여신"이라고 정의 내렸다. 로저 이버트는 테일러를 몇 번 가까이에서 본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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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먼에 따르면 테일러는 하루에 8시간만 일하기로 계약돼있었고 8시간이 지나면 계약대로 남은 촬영 분량이 있든말든 가버려서 작업이 수월하지 않았다. 하루는 스태프들이 세트를 수정하느라 대기하는 사이 2시간이 초과되자 테일러가 왜 날 기다리게 만드냐며 화를 냈는데, 그걸 들은 하먼이 "그러게요 저랑 X나 같은 처지네요"라고 빈정댔다고 한다. 하먼은 당연히 자신이 잘릴 거라고 생각했지만 테일러는 그 다음 날부터는 촬영시간이 얼마가 초과되든 계속 일했다. 테일러는 촬영이 다 끝난 뒤 하먼에게 해밀턴 시계를 선물로 줬는데 뒷면엔 "하먼에게, 2시간, 째깍째깍, 사랑을 담아"라고 새겨져있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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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사회공헌활동[편집]


테일러는 아프리카에 병원을 짓는 데 돈을 보태기 위해 여러 번 보석을 팔았다. 1978년엔 '테일러-버튼 다이아몬드'를 팔아 일부를 보츠와나 병원 건립에 보탰다.


5.1. HIV/에이즈 운동[편집]


80년대 중반 절친이었던 록 허드슨에이즈에 걸리자 에이즈 연구 문제에 천착하기 시작했다. 1985년 허드슨이 UCLA 메디컬 센터(UCLA Medical Center)에 입원해 있을 땐 첩보작전을 방불케하는 방식으로 기자들을 따돌리며 병문안을 다녔고, 허드슨의 주치의이자 1981년 학계에서 에이즈를 신종 질병으로 최초 규명했던 면역학자 마이클 S. 고틀립(Michael S. Gottlieb)을 만나 설명을 듣기도 했다.[43] 그해 9월엔 최초의 에이즈 모금행사인 Commitment to Life를 조직하고 주관했다.[44] 그리고 허드슨이 죽기 전날밤 뼈 밖에 남지 않은 그의 몸을 보면서 "내 모든 생명력을 다 쏟아부어서라도 이 병이 뭔지 밝혀내고 아예 절단을 내겠다"고 결심했다.

결국 10월에 허드슨이 사망하고 비슷한 시기 친딸처럼 여기던 며느리 에일린 게티[45]마저 에이즈에 걸리자 에이즈 정복에 사활을 걸었다. 테일러는 에이즈를 향한 사회의 "거대하고 요란한 침묵"에 "분노"하고 있었다. 테일러는 AIDS Project Los Angeles(APLA)로 처음 재단 활동을 시작해, 캘리포니아주를 기반으로 하던 National AIDS Research Foundation(NARF)의 이사진에 합류했다가, 전국 규모 단위의 에이즈 연구 자선단체 앰파(amFAR)[46]를 공동 창설했다. 앰파는 이후 전세계 3,300개 에이즈 연구팀을 후원했다. 앰파의 설립 기금엔 록 허드슨이 이를 위해 유언장에 지정해놓았던 250,000 달러가 포함돼있었다. 테일러가 앰파를 통해 이룬 업적은 의학박사 마틸드 크림(Mathilde Krim)의 노고와 함께 HBO 다큐멘터리 "The Battle of amfAR"에서 조명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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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로널드 레이건호모포비아로 에이즈의 존재와 그로 인한 피해를 철저히 무시하고 있었다. 테일러는 적극적으로 로비에 들어갔다. 그리고 1987년 로널드 레이건에겐 편지를 쓰고 영부인 낸시 레이건과는 만나서 대화를 나누며 앰파의 기금 마련 만찬에 참석해 공개 발언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로부터 7주 뒤, 테일러의 편지에 설득된 레이건은 자리에 참석해 에이즈의 무서움과 조치의 필요성을 인정했다. 에이즈의 존재가 규명된지 6년만의 일이었다.

사회가 그저 "경멸하고 무시하고 조롱만 할 뿐" "에이즈의 급속한 확산은 외면"해 "아무도 감히 나서지 못하던 시절"에 이런 활동은 친구 엘튼 존[47]의 말처럼 "연민"은 물론 굉장한 "용기"를 필요로 했다. 더 노멀 하트의 작가 래리 크레이머는 테일러는 "우리를 위해 싸워준 최초의, 그리고 최고의 유명인사"였으며 "다른 유명인사들은 바람 맞히던 자리에도 남들의 시선을 상관하지 않고 언제나 나타나주었다"고 술회했다. 테일러는 환자들의 익명성을 보호하기 위해 몰래 호스피스 봉사를 다니면서 필요한 게 무엇인지 환자들로부터 직접 얘기를 듣고 실천했다. 테일러의 광범한 활동은 에이즈 사태에서 마치 "자연이 부리는 거대한 힘"처럼 작용했다.

1989년 테일러는 태국의 최초 에이즈 기금 마련 행사를 위해 방콕을 방문했다. 당시 태국 정부는 에이즈 창궐을 부인하고 있었고 HIV 보균자들은 바로 직장과 마을에서 쫓겨나곤 했다. 테일러는 그중 하나이며 수혈을 통해 감염된 에이즈 환자의 요청으로 만남을 갖고, 장갑을 끼지 않은 채 악수하는 사진을 찍어 HIV 보균자들은 두려워해거나 비난할 대상이 아니며, 수혈만으로도 걸릴 수 있다는 사실을 널리 알렸다. 전세계 환자들의 낙인을 벗겨냈을 뿐만 아니라 이를 계기로 태국 적십자사의 국립 혈액 센터가 전수 조사에 들어가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미리 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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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엔 HIV 보균자들의 치료에 중점을 둔 본인만의 '엘리자베스 테일러 에이즈 재단(The Elizabeth Taylor AIDS Foundation)'을 설립했다.

한편, 1991년 맨해튼 기반의 예술단체 Visual AIDS는 HIV/에이즈 환자들에 대한 연대 메시지를 표명하는 빨간 리본을 만들게 된다. 현재 쓰이고 있는 다른 모든 비슷한 캠페인 리본들의 원조다. 이 단체의 사무총장 넬슨 샌토스(Nelson Santos)에 따르면 "빨간 끈을 한 번 겹쳤을 뿐인" 이 리본은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착용한 순간, 국제적으로 유명한 에이즈 연대 메시지의 상징이 되었다." "테일러는 이 리본을 거의 몸에서 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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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문라이트>(2016)의 대본을 쓴 터렐 앨빈 매크레이니(Tarell Alvin McCraney)는 2017년 제89회 아카데미 시상식 후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어머니는 내가 22살 때 에이즈 합병증으로 돌아가셨다. 그로부터 한 달여 전에 나는 (<문라이트>의 초고인) "Moonlight Black Boys Look Blue"을 완성했다... 25년 전인 1992년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폴 뉴먼과 최우수 작품상을 시상할 때 에이즈 확산 저지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기 위해 하얀 드레스 위에 빨간 리본을 달고 있었다... 오늘 나는 영예롭게도 어머니와 엘리자베스 테일러를 대표하기 위해 25년 전과 똑같이 하얀 양복 위에 빨간 리본을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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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일러는 1992년 에이즈로 사망한 프레디 머큐리 추모 콘서트에 나와 에이즈와 관해 이야기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공적을 인정 받아 테일러는 1993년 아카데미 진 허숄트 박애상 등 인권 관련상을 수차례 받았다. 현재 테일러의 자녀들과 손주들은 물론 케이트 버튼 등 테일러의 전남편들이 다른 결혼(들)에서 얻은 자녀들과 그 후손들도 테일러의 재단에 후원하거나 일에 깊이 참여하고 있다.

친구 바브라 스트라이샌드는 테일러를 두고 "(형체가 없던) 에이즈에 얼굴을 달아준 인도주의자"라고 평가했다.

2019년 미국 하원의장 낸시 펠로시는 29년 전인 1990년 HIV에이즈 관련 기금 조성이 논의되던 국회 하원 예산위원회 회의에 참석해 증언을 하던 테일러, 그리고 바로 그 옆에 함께 있던 자신의 사진을 공유하며 테일러의 노고를 기렸다. 1990년 조지 H. W. 부시 대통령이 에이즈 사망 환자의 이름을 딴 라이언 화이트 법안(Ryan White CARE Act)에 서명하게 된 데엔 테일러의 활동이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테일러는 1986년과 1992년에도 HIV/에이즈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의회를 방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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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테일러는 바이러스성폐렴으로 폐 수술을 받았는데 에이즈 환자들을 너무 가까이 해서 에이즈에 걸린 거라는 소문이 돌아 이를 부인하는 공식 성명을 내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48]

케이티 페리는 테일러의 생애를 다룬 팟캐스트 "Elizabeth the First"에서 "최초의 진정한 인플루언서였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6. 외모 특징[편집]




영화 <클레오파트라>(1963)

(美)의 화신(The Beauty Incarnate)

- 뉴욕 타임즈[49]

전남편 리처드 버튼의 표현에 따르면 "신비로운 가슴"과 19인치의 매우 잘록한 허리를 갖춰,[50] 당시 할리우드가 추구하던 이상적인 몸에 완벽하게 부합했다. 인위적으로 그린 것처럼 짙게 타고난 눈썹"까마귀 깃처럼" 윤이 나는 흑발, 그에 대비되는 "석고 조각처럼" 새하얗고 "도자기처럼" 매끄러운 피부[51] 역시 각광 받았다. 실물을 접한 사람들은 평균을 훌쩍 뛰어넘는 커다란 눈에 강하게 압도되곤 했는데 리처드 버튼은 "내가 일평생 본 눈 중에서 가장 큰 눈"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오른쪽 뺨의 검은 사마귀조차도 애교점으로 인식"되었다.

또한 첩모중생증으로 태어나 속눈썹이 두 겹으로 나서[52] 마스카라가 필요 없을 정도였다. <래시 집에 오다>(1943)에 함께 출연했던 배우 로디 맥도웰[53]은 테일러가 촬영에 들어간 첫날부터 혼이 났던 일화를 전하기도 했다. "저 여자앨 촬영장에서 당장 내보내 - 눈화장이 너무 진해, 마스카라를 너무 많이 얹었잖아." 물을 묻힌 수건으로 테일러의 눈을 문지르고 나서야 촬영기사는 그게 천연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 유명한 보라색 눈은 단지 사진이나 영화 속에서만 그렇게 보인 게 아니다. 오히려 실제로 보면 더 선명한 보라색이어서 당대의 무수한 동료 배우, 감독, 프로듀서, 분장사, 기자들이 예외 없이 상세히 증언하고 있다. 테일러가 보라색눈을 가졌다는 사실은 동시대 업계인들과 관객들에겐 왈가왈부할 여지가 없는, 지극히 당연한 상식이었다. 데뷔 전 아버지의 화랑에 들리던 사람들 사이에서 이미 입소문이 자자하게 나있었을 정도.가디언 보라색 렌즈가 없던 시절 엘리자베스 테일러를 오랫동안 전담했던 대역 배우는 테일러의 보라색 눈과 최대한 닮아보이게 하기 위해서 시중에 나와있던 렌즈들을 조합하며 애써야했던 고충을 털어놓았다.뉴욕타임즈 훗날 미국 렌즈 회사들은 최초로 보라색 컬러렌즈를 개발하면서 테일러의 눈을 집중적으로 연구했다.뉴욕타임즈 본인도 자신의 향수 브랜드 이름 중 하나를 'VIOLET EYES(보라색 눈)'이라고 짓는 등 자신의 눈색이 갖는 상징성을 잘 인지하고 있었다. (더 자세한 관련 내용은 이 항목 참조.) 또한 테일러의 눈엔 특유의 오묘한 광채가 있어서 오팔에 비견되기도 했다.

코와 입술과 얼굴 윤곽의 유려한 곡선은 어머니로부터, 숯같은 눈썹과 빽빽한 속눈썹, 길고 깊은 눈매와 강렬한 눈빛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아버지와 판박이로 닮은 오빠 하워드(Howard)도 <녹원의 천사>에 엑스트라로 나온 것을 시작으로 배우 활동을 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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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들의 스타[54], 테일러가 나타나면 스타들조차도 다들 홀린 표정으로 바라봤다고 한다. MGM 촬영장 내에 위치한 교사[55]에서 함께 수업을 들었던 데비 레이놀즈에 따르면 본인을 포함한 전교생이 재학 내내 테일러의 경이로운 미모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고.

그럼에도 테일러는 자기 외모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오히려 어느 쪽이었냐면 싫어하는 편에 속해 자신이 출연해온 작품들을 보는 걸 극히 꺼릴 정도였다.뉴욕타임즈 존 워너와의 결혼 생활 중 우울증으로 폭식을 거듭한 결과 너무 과하게 쪄버린 살을 빼기 위해 다이어트를 했던 때를 제외하곤 평생 관리조차 하지 않았다. 이는 사실 70년대 이후 배우 커리어가 하강하게 된 원인 중 하나이기도 하다. 반면에 나이 먹는 걸 그저 기쁜 과정으로 받아들이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노화 현상을 오히려 즐기는 모습을 보이는 인터뷰도 자주 했다. 노화에 대한 이런 긍정적 태도는 테일러가 죽기 직전까지 명랑하고 화통한 성격을 꾸준히 유지하는 밑바탕이 되었다.


7. 인간관계[편집]



7.1. 결혼과 이혼[편집]


8번의 결혼과 이혼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56] 테일러는 "오히려 너무 청교도적으로 교육 받고 자라서, 사귀면 꼭 결혼해야 한다는 사고 방식이 크게 자리 잡았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그 말대로 결혼까지 못 간 교제 횟수는 아주 잠깐이라도 만나봤다고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남자들까지 다 따져도 두 손으로 셀 수 있을 정도다. 어려서부터 "유명세가 마치 공기와 같"을 정도로 대중에게 공개된 삶을 살았기 때문인지 숨기고 한 연애가 없고, 일과 연애를 완전히 분리해서 일 관계로 만난 사람들 중에 엮인 건 리처드 버튼이 유일하다.[57] 리즈&딕 시절이 대중에겐 가장 큰 인상을 남겼지만 테일러의 삶 전체로 보면 가장 예외적인 기간이라고 할 수 있다. 미혼 시절엔 육군사관학교 미식축구 스타 글렌 데이비스[58], 윌리엄 D. 폴리 주니어[59]와 건전한 청소년 교제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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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고틀립에 따르면, 테일러는 자신이 허드슨으로부터 HIV를 옮게 될까봐 걱정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면역체계가 무너져있는 허드슨에게 혹시 모를 병균을 옮길까봐 걱정했다고 한다.[44] 테일러를 비롯한 연예계 인사들이 에이즈 확산을 막기 위해 힘쓴 과정을 다룬 동명의 다큐멘터리가 개봉될 예정이다.[45] Aileen Getty. 진 폴 게티의 손녀다. 콘돔을 사용하지 않고 혼외정사를 한 게 원인이었다. 에이즈 환자가 된 건 1985년이고, 언론에 알린 건 유명한 농구선수인 매직 존슨HIV 보균자라는 걸 고백한 후인 1991년이다. 게티는 처음엔 수혈 과정에서 걸렸다고 거짓말했지만 에이즈의 실체를 제대로 알려야 한다는 테일러의 뜻에 공감해 사실대로 대중에게 다시 고했다. 아들 크리스토퍼 와일딩과 게티는 이를 계기로 1987년에 이혼해 8년 간의 결혼생활을 끝냈지만 테일러는 게티가 계속 자신을 "엄마"라고 부르게 해주었다. 에일린 게티 역시 에이즈 타파를 위해 힘쓰고 있는데, 병원에 입원해 관련 행사에 참석할 수 없었을 때 테일러가 대리 출석해준 적도 있다.[46] Foundation for AIDS Research.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의 의사들을 모았다. 1983년 출범 때는 AIDS Medical Foundation(AMF)였는데, NARF와 합치면서 American Foundation for AIDS Research가 되어 이 이름을 2005년까지 유지하다가 American을 떼어버렸다.[47] 역시 에이즈로 친구들을 잃어 본인만의 에이즈 재단을 설립하고 관련 활동을 하면서 테일러와 가까워졌다. 테일러가 사망하자 콘서트에서 Don't Let the Sun Go Down On Me로 테일러를 기렸다.[48] 이 병은 1992년에 재발했다.[49] "마릴린 먼로는 섹시함의 여신(sex goddess)이었고, 그레이스 켈리는 얼음 여왕 (ice queen) 이었으며, 오드리 헵번이 영원한 말괄량이(eternal gamine)였다면,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미의 화신 (beauty incarnate)이었다."[50] 관능미로 유명했지만, 체구가 굉장히 작았다. 실물을 처음 보고 너무 가냘퍼서 깜짝 놀랐다는 증언이 많다.[51] 나중에 한때 태닝에 열광해 검게 그을린 피부를 지니기도 한다.[52] 睫毛重生症, distichiasis. 테일러의 출생 시 의사는 이를 돌연변이(mutation)라고 기록했다. 기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눈 위쪽은 두 줄이었지만, 아래쪽은 한 줄이었다.[53] abc 뉴스 인터뷰 등에서 한 말이다. 평생 가까웠던 친구로, 나중에 <클레오파트라>(1963)에도 함께 출연했다.[54] 이에 동의하지 않은 스타는 한때 같은 MGM 소속이었던 에바 가드너 정도다. 가드너는 미국 최대 출판사인 사이먼 앤 슈스터 수장 리처드 E. 스나이더에게 "테일러는 아름다운 게 아니에요. 예쁜 거지. 아름다운 건 나였죠"라고 했다. 그러나 이런 말도 하긴 했다. "테일러의 아름다움은 얼굴 코 입의 모양새나 그 굉장한 눈이 아니라 극소수에게만 주어지는 내면의 강인함과 활력에서 기인한다."LA타임즈[55] 캘리포니아 주법에 따라 교육연령이던 MGM 소속 스타들이 매일 일정시간 수업을 듣던 빨간 건물이다. 그 시절의 예고라고 할 수 있다.[56] 사실 할리우드에서 7-8번 결혼을 한 사람들은 테일러 외에도 상당수 존재한다. 테일러가 유독 이 화제로 유명한 건 본인 자체가 너무 유명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는 할리우드 내 최고 기록은 아닌데, 자자 가보라는 선배 배우가 9번에 달하는 기록을 보유하였기 때문이다. 자자 가보는 테일러의 첫 번째 남편 콘래드 니콜슨 "니키" 힐튼 주니어의 아버지 콘래드 힐튼 시니어와 1942년부터 1947년까지 결혼생활을 했는데, 1944년에 당시 자신의 의붓아들이었던 니키 힐튼과 불륜을 저지른 적이 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57] 심지어 이 원칙을 HIV/에이즈 운동과 유대교 관련 활동에도 적용했다.[58] Glenn Davis. (1924~2005) 포지션은 하프백. 별명은 "Mr. Outside." "Mr. Inside" 독 블랜차드(Doc Blanchard)와 함께 묶여 유명세를 떨쳤고 웨스트포인트 미식축구팀 영구결번이 되었다. 테일러와는 군복무중이던 1948년부터 교제를 시작했다. 1949년 한번 전역하고 LA 램스에 스카웃되어 2시즌을 뛰었다. 그가 1951년 재입대 처리된 후 한국전쟁에 참전하는 게 결정됐을 때 테일러는 그를 빼내려고 집안 연줄을 총동원했지만 실패했다. 수많은 위문편지를 보내며 장거리 연애를 했지만, 무사 귀환으로 재회한 뒤 청혼을 거절하면서 헤어졌다.[59] William D. Pawley, Jr. 명문가 자녀로, 아버지는 브라질페루외교관을 역임했던 백만장자였다. 약혼까지 했었지만 취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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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Matinée idol. 젊은 여성팬층이 두터운 소위 "꽃미남" 연기자.
그런데 테일러는 결혼할 때 몰랐지만 사실 와일딩은 앨프리드 히치콕의 <무대 공포증>(1950)에 같이 나왔던 마를레네 디트리히와의 관계를 정리하지 않은 상태였다. 테일러가 <자이언트>(1956)를 찍으러 떠난 사이 집으로 스트리퍼들을 불러 기사화 되기도 했다. 심경을 묻는 기자들의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지만 테일러는 침묵하다가 별거-이혼 수순을 밟았다. 그래도 와일딩을 아이들 아버지로서 끝까지 존중했고 디트리히와도 업계 동료로 무난하게 지냈다.
데비 레이놀즈의 말에 따르면 이 부부는 금슬이 매우 좋은 편이었다. 토드는 농담을 잘하고 장난기가 많은 성격으로 테일러와 죽이 잘 맞았고, 테일러의 지적인 면을 좋아했다. 테일러는 요리해주길 좋아하는 토드의 곁에서 "사랑 받고" "보호 받았다." 토드는 테일러에게 "사랑의 의미"와 결혼생활의 기쁨을 최초로 알려준 사람이었다. 또한 테일러에게 선물하는 걸 즐겼는데, 테일러 역시 선물 주고 받는 게 취미였다. 테일러가 소장했던 보석 중엔 토드의 선물 비중이 상당히 크다.[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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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1956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썼던 다이아몬드 티아라도 토드가 선물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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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토드는 결혼 1년 만에 뉴 멕시코에서 전용기[62] 사고를 당한다. 탑승한 전원이 사망했다. 원랜 테일러도 함께 하기로 했던 여정이었지만 갑자기 고열에 시달려 집에 머물러 있었다. 첫째 딸은 막 6개월차가 된 터였다. 테일러는 죽을 때까지 토드의 죽음을 극복하지 못했다. "단 하루도 그를 떠올리지 않고 지나간 날이 없다." 테일러는 리처드 버튼과 더불어 자신이 사랑한 두 남자로 토드를 꼽았다. 토드의 급사 후 테일러가 유대교 관련 활동에 평생을 투신했고 엔테베 작전 때처럼 아예 목숨까지 내놓으려 한 적도 있기 때문에 리처드 버튼보다 토드를 더 사랑했을 거란 분석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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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이름이 Lucky Liz였다.[63] 1948년 가수로 데뷔했고 프랭크 시나트라페리 코모, 냇 킹 콜과 어깨를 나란히 하던 팝 가수였고, 1950년 초반에 가장 인기 있는 연예인 중 한 명이었다. 시나트라가 에디 피셔의 엄청난 인기에 자신의 시대가 끝났다고 생각해 자살 시도를 했을 정도다. 그러나 테일러와의 결혼을 부도덕하게 보는 세간의 평가에 자신의 이름을 내건 단독 TV쇼 <디 에디 피셔 쇼(The Eddie Fisher Show)>가 취소 당하면서 슬럼프에 빠진 뒤 재기하지 못했고, 2010년에 세상을 떠났다. 테일러와 함께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헌액됐다. 헌액 분야는 음악과 텔레비전. 할리우드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의 악명 높은 바람둥이였다.[64] 레이놀즈도 <태미와 독신자(Tammy and the Bachelor)>(1957)에서 본인이 부른 노래가 빌보드 1위를 할 정도로 전성기였다.
그러나 훗날 레이놀즈와 그 자녀들은 테일러의 연약해진 심리를 피셔가 계획적으로 파고든 당시 상황을 각자의 회고록을 통해 증언하게 된다. 그 중 하나가 스타워즈레아 공주 역을 도맡아했던 캐리 피셔다.[65] 당시 테일러를 걱정하며 지켜본 많은 주변인들은 "테일러가 토드의 뒤를 따라가기 위해 곧 자살할 거라고 생각했다." 테일러를 전담했던 미용사 시드니 길라로프[66]에 따르면 테일러는 깨어있는 동안에는 계속 비명을 질러댔다. 자해가 염려돼 진정제가 투여되기도 했다. 테일러의 이런 위태로운 상태를 에디 피셔는 접근하기 좋은 절호의 기회로 봤던 것이다.
레이놀즈가 나중에 밝혔던 얘기 중 가장 소름 끼치는 부분은 에디 피셔가 토드의 사망 즉시 "토드의 모든 점을 정확히 모방했다"는 사실이다. "인격을 아예 토드로 갈아끼운" 수준이었다고 한다. 피셔는 "원래 평생 술담배를 전혀 안 하던 사람이었는데, 토드처럼 술을 마시고 시가를 태우기 시작했다"고.
테일러는 커리어를 그대로 이어가고 에디 피셔는 재기하지 못한 것 역시 이런 정황들과 맥락이 맞닿아 있다. 이를 두고 "테일러의 팬들은 테일러를 용서하게 됐지만, 에디 피셔의 팬들은 끝까지 피셔를 용서하지 못했다"고들 한다.
위와 같은 이해가 바탕이 되어, 레이놀즈와 테일러는 1966년엔 관계를 회복했고[67], 제화업계 재벌과 재혼한 레이놀즈와 테일러-버튼 부부가 자주 함께 어울리기도 했다.[68] 캐리 피셔가 대본을 쓴 TV영화 <디즈 올드 브로즈>(2001)에 테일러와 레이놀즈가 함께 출연하기도 했을 정도. 캐리 피셔는 이 영화 속 대사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아버지 에디 피셔를 또 한 번 비난했다.
이혼 후 에디 피셔와 테일러는 서로 연락 한 번 없이 살다가 40여 년이 지나고서야 통화를 재개했다. 그럼에도 캐리 피셔에 따르면, 테일러는 에디 피셔가 사망했을 때 가족의 죽음이라 여기고 울었다고 한다. 말년에 테일러는 에디 피셔와의 결혼은 토드를 되살려놓는 하나의 방법이었다고 술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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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트 스턴이 <클레오파트라> 촬영장에서 찍은 작품
버튼과 관계를 갖게 되면서 테일러는 피셔에게 대놓고 차가운 태도를 취했지만 피셔는 이미 할리우드의 모든 사람들이 알게 된 이 염문에 대해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었다. 피셔의 자서전에 따르면, 피셔가 이 둘의 밀월에 대한 진상을 처음 알게 된 건 다름 아닌 당사자 버튼과의 직접 통화를 통해서였다.[70] 극도로 분노한 피셔는 바로 테일러와 살던 로마식 빌라 저택으로 달려와 테일러에게 총구를 겨눴지만, 곧 마음을 고쳐먹고 "괜찮아, 엘리자베스, 널 죽이지 않을 테니까. 그러기엔 넌 너무 아름다워"라는 말과 함께 총을 내려놓았다고.
버튼 역시 이미 따로 가정을 꾸린 사람이었기 때문에 전세계에서 난리가 났다. 무려 미국 국회에서 두 사람이 재입국 못하게 막아야 한다는 얘기가 나왔다. 이 세기의 스캔들이 하필 촬영장인 로마, 즉 바티칸이 자리한 지역에서 벌어진 탓에 교황청에서조차 공개서한을 통해 꾸짖었다.[71] 테일러-버튼의 투샷을 건지기 위해 전세계의 무수한 파파라치들이 로마 촬영장 근처에 몰려들어 나무 위나 건물에 숨어있곤 했다.[72] 이를 통해 오늘날 파파라치의 모습이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테일러는 친구 셜리 맥클레인에게 "버튼은 사랑하는 방법을 알려준 남자"라고 말했다.[73] 둘의 결혼식 역시 '세기의 결혼식'이라고 불리웠다. 둘은 테일러가 에디 피셔와 준비해왔던 독일 태생 고아 마리아의 입양 수속도 함께 마쳤다. 버튼은 다혈질적인 성격에다가 알콜 의존증까지 있어서 테일러와 엄청나게 싸웠지만 테일러가 가장 사랑한 남자였고, 테일러는 죽은 후에 이 사람과 함께 묻히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버튼은 테일러의 사진 뒷면에 "그녀를 만나보지 못했거나 알게 된 적이 없는 사람은 삶에서 많은 걸 놓친 것이다"라고 적었다. 이혼 후 다시 재혼을 감행할 정도로 서로에게 매료돼 있었지만 결국 두 번째 이혼으로 마무리 되고 말았다. 테일러는 "우린 너무 사랑해서" "서로의 사정과 감정과 영혼에 함몰된 나머지 개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경지"에 이르렀던 게 문제였다고 말했다.
버튼은 테일러에게 선물한 33캐럿짜리 다이아몬드 반지가 유명한데 불리는 이름이 아예 "엘리자베스 테일러 다이아몬드"다.[74]
결혼 전 버튼이 멕시코에서 <이구아나의 밤>(1964)을 찍을 때 테일러가 따라갔는데, 그 테일러와 버튼이 머물렀다는 사실만으로 세계적으로 큰 화제가 돼 촬영장이 있던 항구 푸에르토 바야르타는 하루 아침에 세계적인 관광 명소가 되었다. 둘은 이 영화를 감독한 존 휴스턴에게서 멕시코의 저택 까사 킴벌리(Casa Kimberly)를 사서 함께 거주한 적이 있다.
테일러는 연기를 뒤로 하고 일중독 남편을 위해 워너의 지역구인 버지니아주 뿐만이 아니라 미 전역의 공화당 정치 행사를 바삐 돌며 헌신했다. 하지만 공허하고 외로운 정치인 아내로서의 삶에 적응하지 못해 우울증에 시달리고 그에 따른 폭식으로 체중이 급격히 증가하는 등 정신건강이 전반적으로 심히 악화되자 이혼을 선택했다. 이때 80kg까지 쪘다가 후에 몇 차례의 시행착오를 거쳐 30kg 감량에 성공한 뒤 그 요령을 1987년에 발간한 베스트셀러 를 통해 자세히 공유하기도 했다.[76][77] 살이 찌고도 화술과 카리스마로 청중을 잘 휘어잡아 가는 곳마다 열렬한 호응을 얻었기 때문에 정치 다시 안 하냐는 질문을 꽤 받았는데, 그때마다 진심으로 질색하고 당시 얘기를 길게 풀어놓는 것조차 싫어해 함구했다. 아무리 재능이 있었어도 이렇게까지 스트레스를 받을 정도로 적성은 아니었기에 다시는 정치 쪽에 발 들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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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에디 피셔가 바람 피운 역사를 엮어 자서전으로 내자 DNA를 소독하고 싶다는 등 악감정을 내비쳤을 정도로 아버지에 대한 경멸감을 평소 공공연하게 드러내곤 했다. 그만큼 회고록 속에도 아버지가 테일러를 손에 넣기 위해 총동원한 수법들에 대한 묘사와 단어 선택이 매우 적나라하다. 아버지의 성기까지 언급한다. 반대로 테일러에겐 수차례 존경심을 표했고 테일러를 위한 각종 행사에서 모습을 드러냈다.[66] Sydney Guilaroff. 할리우드 황금기를 대표하는 미용사로, 그 외 주요 고객으로 프랭크 시나트라, 캐서린 헵번, 제임스 스튜어트, 잉그리드 버그만, 그레타 가르보, 캐리 그랜트 등이 있었다. 1938년엔 미국 독신 남성 최초로 입양을 허가 받기도 했다.[67] 런던으로 향하는 여객선 퀸엘리자베스호 안에서 우연히 마주친 것이 계기가 됐다.# 캐리 피셔가 어머니 데비 레이놀즈와 양아버지를 위해 예약해준 티켓이었다.[68] 그래서 레이놀즈와 그 자녀들이 버튼과의 살벌한 부부싸움에 대한 생생한 증언 역시 남기게 되었다.[69] 재밌는 건, 친구 로디 맥도웰도 9살 때 테일러를 처음 보고 너무 완벽하게 완성돼있는 아름다운 얼굴에 폭소했다고 말한 바 있다.[70] “What do you think I’m doing? I’m f***ing your wife.”[71] 그중 "erotic vagrancy"란 표현이 유명하다.[72] 덕분에 촬영장에서 일어난 온갖 시시콜콜한 일들이 전부 기사화 되었다. 테일러가 할리우드 단골식당의 칠리를 로마까지 배달 시킨 얘기조차 아직도 회자되고 있다.[73] 버튼과 엮인 초기에 맥클레인이 두 사람 사이를 반대할까봐 울면서 한 말이었다. 맥클레인도 덩달아 울면서 알겠다고 했다고.[74] 1920년대 이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세계 최초로 특허를 받은 커팅법인 애셔컷으로 제작되었다. 화학적으로 가장 순수한 형태의 다이아몬드인 IIa형에 무색인 D 컬러로, 광학적으로 매우 투명해보인다. 원랜 나치에 무기를 제작해 공수하던 독일크루프 가문 소유였는데, 테일러는 그런 보석을 유대교인인 자신이 소유하게 된 것의 의미가 크다고 생각했다.[75] 부고 기사 제목조차 "한때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결혼했던 전 상원의원 별세"였다.[76] 이 책이 베스트셀러로 등극한 이유 중의 하나는 테일러의 솔직하고 재기 넘치는 입담이다. 이 책에서 테일러는 데비 레이놀즈가 한참 자신과 사이가 안 좋던 시절에 자신이 가장 살쪘을 때의 사진을 냉장고 앞에 붙여놓고 반면교사로 삼으며 식욕을 다스렸던 일화를 풀어놓는다. 그러면서 레이놀즈에게 효과가 있었다면 여러분도 효과를 볼 수 있을 거라며 자신의 뚱뚱한 모습이 담긴 사진을 책에서 잘라 냉장고에 붙여보라고 권한다.[77] 기자가 직접 2주간 실천해본 더컷 체험담 기사가 있다.
테일러가 워너와 결혼했을 때 워싱턴 정가에서 제일 궁금해했던 건 역시나 "눈이 진짜 보라색일까?"였는데, 실제로 보니 정말로 보라색이었고, 테일러는 실물이 더 아름다워 모두가 황홀해했다고.워싱턴 포스트 둘 중 누군가에게 유책이 있어서 헤어진 게 아니라 친구로 남았고, 워너의 자녀들은 특히 계속 테일러와 가깝게 지냈다. 1978년 워너를 위해 유세를 돌다가 버지니아주 빅 스톤 갭(Big Stone Gap) 타운에서 닭뼈가 목에 걸려 질식할 뻔한 적이 있는데 이를 존 벨루시SNL에서 패러디하기도 했다.
워너는 테일러가 여성의 평등한 권리에 대한 생각을 뿌리 내리게 해줬다고 말한 바 있다.
포튼스키가 강박증에 시달리면서 집안에만 틀어박히는 등 이상행동을 보이고 테일러의 거듭된 수술로 의사소통이 부재하게 되면서 결혼생활이 무너져 헤어졌지만 서로에 대한 인상은 좋게 남아 이혼 후에도 자주 연락하며 지냈다. 포튼스키는 나중에 세간의 지나친 관심이 괴로웠다고 고백했다.


7.2. 가족[편집]


어렸을 때 자신을 때렸던 아버지를 용서해서 아버지까지 포함해 모든 가족들과 사이가 돈독했다. 매해 추수감사절 테일러의 자택 식탁에 모여앉는 친지들이 50명에 달했다.






7.3. 친구[편집]


테일러는 "한 번 우정을 쌓으면 끝까지 진정한 친구가 되어주는" 사람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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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스탁폴[80]이 1950년 <젊은이의 양지> 촬영 중에 쉬는 시간에 찍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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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무엇보다도, 에디 피셔와 엮이고부터 9년의 기간을 제외하곤 데비 레이놀즈와 평생의 우정을 누렸다. 사망 직전 몸상태가 너무 나빠져 모두의 전화를 거절하던 테일러가 레이놀즈에게서 걸려온 전화만큼은 받았을 정도. 레이놀즈는 소원했던 사이에도 테일러를 향한 사랑을 멈춘 적이 없다고 고백했다.[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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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일러의 40세 생일파티에 참석한 그레이스 켈리의 머리를 만져주고 있는 모습
26살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둘은 연인 관계라는 의심을 사곤 했다. 1989년 테일러가 잭슨에게 자기 집에서 살면 어떻겠냐고 물어봤던 때가 있는데, 나중에 전기 작가와의 인터뷰에서 이를 회상하며 잭슨이 "그렇게 했다면 정말 즐거웠을 거에요. 결혼까지 했을지도 모르죠"라고 말한 적이 있긴 하다. 하지만 둘은 친구 사이였다. 1993년 성추행 논란에 휩싸였을 땐 테일러에게 많이 의지했다. 테일러는 잭슨의 자녀 3명의 대모이기도 하다.[86] 2001년 잭슨의 마지막 공연 때도 함께 해주었다. 잭슨은 테일러에게 다이아몬드 팔찌, 시계, 목걸이를 선물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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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어록[편집]


나는 항상 남편과 아이들을 원했지만, 가정주부로서의 내 삶은 한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다.

내 자리는 관객들이 봐주는 영화속이다.


나는 평생 화려한 보석에 둘러싸여 살아왔다. 하지만 내가 정말 필요로 했던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진실한 마음과 사랑, 그것 뿐이었다.


너무나 사랑하기에 헤어진다.

-

리처드 버튼과 이혼하면서 한 말.


성공은 탈취제 같다. 과거의 향기를 다 앗아가 버리니까.


나는 많은 남편과 보석을 얻으려고 의도한 것이 아니었다. 누구에게나 그렇듯 내게도 삶은 그저 발생했다.


당신이 스캔들에 휘말릴 때 진짜 친구가 누구인지 알 수 있다.


아름다움.

아카데미 시상식 후 피로연에서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말을 꼽으라고 했을 때의 대답.



9. 여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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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당시 상황을 소재로 BBC4에서 상상을 가미해 라는 TV 영화를 제작한 바 있다. 헬레나 본햄 카터가 테일러였고 도미닉 웨스트가 버튼이었는데, 평은 그리 좋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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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Ardeshir Zahedi. 1928~2021[79] George Hamilton. 여러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한 베테랑 배우다. 워너와의 이혼 후 테일러가 회복하는 과정에서 물심양면으로 조력했다.[80] Peter Stackpole[81] 이건 비단 허드슨 뿐만이 아니라 먼저 촬영을 시작했던 모든 배우들 사이에서 조성된 공감대이기도 했다. 캐롤 베이커는 제임스 딘이 자기들한테서 테일러를 뺏어갔다고 생각했다. 이때 딘은 테일러와 밤을 새워 대화하며 어려서 목사에게 성추행 당한 과거를 털어놓고 있었다.[82] 1993년 헵번이 사망한 후 그녀의 장례식장에서 “하늘이 가장 아름다운 새 천사를 갖게 됐다”고 조문하였다.[83] 캐리 피셔는 "우리 엄마는 테일러 '팬'이라 테일러를 미워하지도 못했다"며 차라리 자신이 테일러를 더 미워했다고 말했다.[84] 테일러는 잭슨의 스케쥴을 전부 파악하고 있었다. 잭슨이 알려준 게 아니라 업계 연줄 덕이었다.[85] 주디 갈란드오즈의 마법사를 10대 후반인 청소년기에 찍어서 테일러나 잭슨처럼 초등학생 나이에 스타가 된 경우가 아니었다.[86] 대부는 맥컬리 컬킨[87] 이 공연이 끝나고 얼마 안 있어 사망했다.

테일러가 소장했던 보석 중엔 안목이 뛰어난 버튼이 경매 입찰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낙찰에 성공해 선물한 것들이 많다. 아예 '테일러-버튼 다이아몬드'라고 불리는 배 모양 해리 윈스턴 68캐럿 다이아몬드가 존재한다. 버튼은 테일러에게 주려고 이 보석을 구매한 뒤 "이건 반드시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여성이 가져야만 했다. 이게 만약 재키 케네디[88]소피아 로렌[89]의 손에 들어갔다면 난 졸도했을 것이다"라고 일기에 적었다.
16세기에 타지마할의 주인공인 무굴 제국의 왕비 뭄타즈 마할이 소유했던 하트 모양의 다이아몬드나,[90] 윈저 공작부인이 소지하고 있던 보석, 500년 전 파나마만에서 한 노예가 건져올려 펠리페 2세메리 1세에게 선물했던 세계 최대 크기의 배 모양 천연진주 '라 페레그리나(La Peregrina) 진주'가 달린 목걸이[91], 장엄한 상형문자가 음각된 파루크 1세의 팔찌 등도 있다.
테일러의 보석 사랑은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 코스튬 브로치(costume brooch)를 선물할 때부터 시작되었다. 테일러는 보석이 "신이 부린 솜씨의 현현"이고 자신은 그 "수호자"라고 생각했다. 관련 저서로 《My Love Affair with Jewelry》(2002)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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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5월 13일에 방영된 4시즌 막화 "Krusty Gets Kancelled(크러스티 쇼 중단되다)"에서 본인 역으로 다시 캐스팅되었다. 방송에서 쫓겨난 광대 크러스티를 구제하기 위해 베트 미들러, 자니 카슨, 레드 핫 칠리 페퍼스, 휴 헤프너, 루크 페리가 모여 컴백쇼를 준비하는데, 테일러는 에이전트의 훼방으로 출연하지 못해서 에이전트를 해고해야겠다고 마음 먹는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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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이즈음 테일러, 로렌, 케네디는 모두가 동경하면서도 질시하는 여성들의 세 표본으로 같이 호명되곤 했다.[89] 버튼이 로렌과 영화를 찍으며 친구가 되고 서로를 배우로서 존경하게 되기 전의 일기다.[90] '나의 사랑하는 마할에게'라는 글귀가 새겨져있다.[91] 테일러는 이 목걸이를 라스베가스 호텔방에서 잃고 몹시 놀란 적이 있다. 목에 걸치고 있었는데 한순간에 없어져 찾던 중에 키우던 개가 뼈를 물어뜯는 소리를 내서 개의 입안을 살펴보니 진주에 기적적으로 흠집이 안 나있었다.[92] 3등급 CBE, 4등급 OBE, 5등급 MBE는 그것만 받아서는 호칭이 따라붙지 않는 일반 훈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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캡틴플래닛에서 앤드루스 부인 역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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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그 1971년 4월호[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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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버튼에 따르면, 이혼 사유엔 이 부분에서 테일러와 뜻이 맞지 않아 충돌한 비중이 상당히 크다고 한다. 버튼은 테일러의 반려동물들을 함께 아껴주긴 했지만, 그와 동시에 감당할 수가 없었다.[94] 사진작가는 Antony Armstrong-Jo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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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같은 시기 본인의 이름을 딴 메뉴를 가졌던 다른 MGM 소속 배우는 시드 셔리스(Cyd Charisse)로, 당시 진 켈리, 프레드 아스테어의 상대역을 도맡아하던 뮤지컬 스타였다.[96] 나머지는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 마릴린 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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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앤디 워홀이 창간한 잡지 인터뷰에서 1976년 11월호 표지로 테일러의 초상화를 그려 인쇄한 적이 있다. 같은 초상화를 2007년 2월호에 다시 썼다. 화가는 워홀 사단에 있던 팝아티스트 리처드 번스타인(Richard Bernste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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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양의 서커스(Cirque du Soleil)를 저택으로 초청해 가족, 친구들과 야외공연을 감상하곤 했다.

  • 코미디언 조앤 리버스는 정치인 존 워너와의 결혼 후 우울증으로 살이 찐 테일러를 자신의 주된 농담 대상으로 삼아 조롱하며 커리어를 쌓아나갔다. 리버스와 테일러의 공동 친구였던 로디 맥도웰은 이에 대한 테일러의 기분을 묻고 리버스에게 전달했는데, "그런 건 내 삶을 상처 낼 수 없다"는 게 테일러의 답이었다. "테일러는 자신에 대한 확신이 있는 사람이었고 체중이 증가한 걸 모르지도 않았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중심을 확고하게 잡고 있어서 (리버스의 농담은) 테일러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조앤 리버스는 1991년에 낸 책 "Still Talking"에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97]이 자기 관리를 안 하면 우리 여성들은 분노할 수밖에 없다. 그런 여성이 게으름을 피우면 나머지 여성들은 뭐가 되겠는가"라고 적었다.

  • 조안 크로포드는 테일러가 여러 번 결혼한 것을 두고 자주 비판적인 논평을 했는데 남의 인생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해선 안 됐다며 나중에 이를 후회했다. 크로포드는 결혼을 총 네 번 했다. 그래도 테일러의 연기는 훌륭하다고 칭찬했다.

  • 미래지향적 성향이 매우 강했다. 말년에 왜 회고록을 쓰지 않냐고 묻자 테일러는 "그건 오늘을 포기하고 어제로 뛰어드는 행위"라며, "내겐 아직 끊나지 않은, 깜짝 놀랄만큼 수많은 내일들이 있어요"라고 답했다. 친구 데비 레이놀즈가 임종에 가까워진 테일러에게 전화했을 때도 테일러는 숨을 색색거리면서도 "더 살기 위해 힘내고 있다"고 말했다.

  • 생전 테일러가 에이즈 인식개선 운동가였고, 성 소수자 인권 운동에 호의적이었다[98]는 이유로 웨스트보로 침례교회에서 "잘 죽었다" 팻말을 들고 테일러의 장례식에 참석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이 교회는 동성애 반대 운동을 굳이 장례식장에서 하는 고인드립으로 악명 높다. 한편 장례식은 비공개로 거행되었다.

  • 1995년 NBC TV 전기 영화 의 제작을 저지하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셰릴린 펜[99]이 테일러를 맡았다. 시청자 평가는 좋지 않았다.

  • 2012년 라이프타임린제이 로한을 기용해 만든 TV 영화 도 있다. 테일러를 자택에서 만나봤던 제작자의 요청으로 유백광이 가미된 연보라색 렌즈를 껴서 테일러의 눈까지 재현했지만 역시 낮은 완성도로 기대 이하의 평가를 받았다.피플

  • 2011년 파라마운트가 책[100]을 바탕으로 테일러와 버튼의 관계를 다룬 영화를 마틴 스코세이지와 함께 만들려고 한 적이 있었다. 나탈리 포트만킹스 스피치 작가 데이비드 사이들러[101]도 제작에 관심을 보였지만 경쟁에서 밀렸다. 이후 파라마운트는 레이첼 바이스를 테일러 역으로 점찍고 버튼 관련인들의 협조까지 받고 있었지만 흐지부지 되다가 소식이 끊겼다.인디와이어

  • 유복한 어린시절, 뛰어난 미모와 여배우 커리어, 화려한 이혼경력 등 한국 원로 배우 김지미와 유사점이 많고, 실제로 언론에서도 김지미를 묘사할때 '한국의 엘리자베스 테일러'라고 일컫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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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미국에서 널리 쓰이는 테일러의 별칭이다.[98] 동성혼 지지자였다.[99] Sherilyn Fenn. 트윈픽스로 유명하다.[100] Sam Kashner와 Nancy Schoenberger가 쓴 “Furious Love”[101] David Seidler. 한국어 언론에 세이들러로 나와있지만 사이들러가 맞는 발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