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명을 찾아서/가공의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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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각 문단의 도입부에서 언급된 가공의 작품들
2.1. 일 월
2.2. 이 월
2.3. 삼 월
2.4. 사 월
2.5. 오 월
2.6. 유 월
2.7. 칠 월
2.8. 팔 월
2.9. 구 월
2.10. 시 월
2.11. 십 일 월
2.12. 십 이 월
3. 본문에서 인용된 가공의 작품들
3.1. 일 월
3.2. 이 월
3.3. 삼 월
3.4. 사 월
3.5. 오 월
3.6. 유 월
3.7. 칠 월
3.8. 팔 월
3.9. 구 월
3.10. 십 일 월


1. 개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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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각 문단의 도입부에서 언급된 가공의 작품들[편집]



2.1. 일 월[편집]


참새 한 마리가 떨어지는 것도 섭리라고 한다. 그럴지도 모른다. 상징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실제로 그럴지 모른다는 얘기다.

만일 사람의 눈에 뜨이는 길바닥에 떨어지게 된 참새 한 마리가 풀섶에 떨어지게 된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될까? 당신은 말 할 것인가 ─ "까짓것 때문에 무슨 일이 일어나겠소?" 라고? 만일 참새 한 마리가 딴 곳에 떨어지는 문제가 아니고, 국왕의 목을 겨눈 자객의 칼날이 한 자 옆으로 비끼어 떨어지는 문제라면?

어떤 이들은 말한다 ─ "그것은 역사의 강물에 던져진 한 개 돌맹이일 뿐이다. 그러한 조그만 변이가 일으킨 파문들은 역사의 큰 흐름 속으로 곧 흡수되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으로 된다"라고. 다른 이들은 말한다 ─ "만일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사건의 연쇄 반응은 걷잡을 수 없이 퍼져 나갈 것이다. 이 세상의 피륙은 그 힘을 견디지 못하고 문득 날카로운 비명을 내며 찢어져서, 어느 먼 곳에 전혀 다른 세상이 생길 것이다"라고.

- 다까노 다쯔끼찌 (高野達吉), 『도우꾜우(東京), 쇼우와(昭和) 61년의 겨울』에서[1]


그 자체로는 대수롭지 않으나 한 사람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사건들이 있다. 젊을 때부터 격동기를 살아 오면서 죽음을 여러 번 대면했던 사람에게 두 발의 권총 탄환에 어깨를 다친 것은 그리 큰 사건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날 합이빈(哈爾濱) 역두에서의 피습은 사건 자체의 비중만으로써는 설명하기 어려운 충격을 나에게 주었다. 넉 달 뒤 병상에서 일어난 나에겐 세상이 좀 달라진 것처럼 느껴졌다.

- 이또우 히로부미(伊藤博文), 『북정(北征)』에서[2]


의사들이 마침내 사람들을 만나도 좋다고 허락했을 때, 나는 그 자객을 불러 달라고 했다. 나를 죽이려고 한 그 조선 청년이 내 침대 옆에 섰을 때, 나는 그를 어디서 본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한참 생각하다가 나는 문득 깨달았다. 두 손을 뒤로 묶이고 초라한 죄수복을 걸쳤지만, 당당한 자세로 서서 태연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는 그 청년에게서 나는 마흔 해 전의 내 모습을 본 것이었다.

- 이또우 히로부미(伊藤博文), 『북정(北征)』에서[3]


정치인으로서의 자신이 걸어 온 길을 돌아다볼 때 나의 눈을 끄는 것은 내가 언제나 극단적인 주장들을 완화시키는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정부가 위기에 처했거나 어려운 선택을 해야만 되었을 때, 나는 언제나 급진적 해결보다는 점진적 접근을, 무력에 의한 해결보다는 협상을 통한 타협을 주장했었다. 그것은 무력에 의한 막부(幕府)의 전복을 외치면서 정치적 생애를 시작했던 쪼우슈우(長州)젊은이에겐 역설적인 역할이었다.

- 이또우 히로부미(伊藤博文), 『북정(北征)』에서[4]


군대가 지속적으로 정치에 관여할 때 발생하는 문제들은 일반적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자세히 관찰해 보면 그것들은 대부분 정치 분야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이다. 군대 자체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후자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나의 견해로는, 정치적 야심을 가진 젊은이들이 군대를 자신들의 야심을 이루는 수단으로 삼게 된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도우꾜우 데이고꾸 대학교(東京帝國大學校)교우또우 데이고꾸 대학교(京都帝國大學校)의 법학부나 정치학부에 지망했어야 좋았을 젊은이들이 데이고꾸 육군 사관학교(帝國陸軍士官學校)나 데이고꾸 해군병학교(帝國海軍兵學校)로 간다는 사실을 말한다. 이와 같은 현상이 황군(皇軍)의 자질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함은 명백하다.

- 야마모또 이소로꾸 (山本五十六), 『해풍(海風)』에서[5]


미쯔비시(三菱)〉는 단순히 회사의 이름인 것이 아닙니다. 일본 제국에 이로운 것은 〈미쯔비시〉에게도 이롭고, 〈미쯔비시〉에게 이로운 것은 일본 제국에게도 이롭습니다.

- 이나바 유끼오(稲葉行雄) 미쯔비시 쇼우지 주식회사(三菱商事株式會社) 사장, 쇼우와(昭和) 24년 4월 19일 중의원(衆議院) 재무분과위원회에서의 증언에서[6]

[7]


현재 일본은 대국으로 존립하는 데 필요한 요건들을 모두 갖추고 있다. 특히 본토의 고급 인력과 충실한 자본, 조선에 존재하는 양질의 노동력, 그리고 만주국 영내의 풍부한 천연 자원이 이상적으로 결합된 것은 아우타르키 체제로 재편성되기 시작한 지금의 세계 경제에서는 큰 강점이다.

-『상해공론(上海公論)』 1984년 2월호, 「일본의 해부 : 경제편」에서[8]


원숙한 문명은 그 중심지보다 변두리에서 더 사랑받는다. 영국에서 교육받은 인도인보다 더 영국적인 사람이 있는가?

- 더글라스 로렌스, 『식민지』에서[9]


공산주의 세력의 점증하는 위협에 대해 힘을 합쳐 자유 세계를 지킨다는 큰 목표를 위해서, 미국과 일본은 사소한 이해의 상층을 슬기롭게 극복해야 합니다.

- 도우조우 히데끼 일본 수상, 1953년 11월 3일 미국 의회에서의 연설에서[10]


양국의 교섭이 시작된 이래 일본과 미국은 언제나 충실한 친구였읍니다. 그리고 이 우정은 '평화스러운 바다(太平洋)'라고 불려 온 바다를 실제로 평화스럽게 지켜 준 울타리였읍니다.

- 존 피츠제럴드 케네디 미국 대통령, 1970년 5월 12일 일본 의회에서의 연설에서[11]


위의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축첩을 한 사람의 83퍼센트가 내지인이고 그들의 첩이 된 여성의 96퍼센트가 조선인이다. 비록 게이조우가마야마(釜山)의 표본 조사에서 나온 것이긴 하지만, 위의 수치는 전 조선에 걸쳐 상당한 타당성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 다나베 스즈꼬(田邊鈴子), 일본 여권 운동 협의회(日本女權運動協議會) 편, 『일본 여성 연감(日本女性年鑑), 쇼우와(昭和) 60년』에서[12]


서양 문명의 충격으로 동양인의 의식 속에 자리잡은 인종적 열등감은 일본에서 가장 깊었던 것 같다. 일본이 다른 민족의 지배를 받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여튼 서양의 문물을 열심히 배우기 시작했던 1870년대엔 일본인을 인종적으로 개량하기 위해 구주인과 잡혼(雜婚)시켜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왔었다. 이것은 결코 실없는 사람의 망발이 아니었다. 개화 초기에 일본을 사상적으로 이끌었고, 뒤에 도우꾜우 데이고꾸 대학교의 총장을 지낸 선각자의 주장이었다.

정신 깊숙한 곳에 여러 가지 형태로 자리잡은 인종적 열등감을 찾아내어 극복하는 일은 동양인에겐 무척 중요한 일이다. 서양적인 것들이 물질적 면에서만이 아니라 감성의 영역에서도 동양적인 것들을 몰아내고 있는 지금─세안장미(細眼長眉)가 동양에서는 미남의 요건이었다는 것을 들으면, 서양 영화를 보면서 큰 눈이 매력적이라고 배운 요즘의 젊은이들은 무엇이라고 할까?─이것은 생존에 직결되는 문제다. 네안데르탈인이 멸종된 것은 현생 인류에 대한 열등감 때문이었다는 어느 소설가의 견해는, 그것의 과학적 타당성을 떠나, 우리가 음미해 볼 만한 탁견이다.

- 사노 히사이찌(佐藤壽一), 『독사수필(讀史隨筆)』에서[13]


일본은 영국과 여러 가지 면에서 비슷하여 흔히 〈동양의 영국〉이라고 불려 왔다. 지리적으로 섬나라고 본토에 비하여 방대한 식민지를 가진 점, 정치적으로 입헌 군주제를 택한 점, 경제적으로 각기 서양과 동양에서 가장 먼저 산업 혁명을 이룬 점, 사회적으로 오랫동안 안정을 누려 온 점들이 그러한 표현을 정당화시켜 주었다. 그러나 근년에는 달갑지 않은 영국과의 유사점들이 사람들의 주의를 끌게 되었다. 비슷한 환경 속의 비슷한 체제는 비슷한 약점을 갖게 마련이어서, 흔히 '영국병'이라고 불리는 구조적 노후화 현상이 1960년대부터 일본 사회의 각 부면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현상은 특히 경제 분야에서 두드러졌으니, 낡은 생산 시설, 정체된 기술 혁신, 비효율적인 금융 제도와 유통 체계, 보수적인 경영 방식, 문제들에 대한 창조적 접근을 억제하는 사회적 관습이 일본 경제의 활력을 고갈시켰다. 제이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하여 폐허로부터 출발한 독일의 경제가 오늘날 놀랄 만한 활력을 보여 주는 것과 대비하면, 이 점은 더욱 뚜렷해진다.

- 『상해공론』 1984년 2월호, 「일본의 해부 : 경제편」에서[14]


정주 협정(鄭州協定)

1956년 7월 6일 하남성(河南省) 정주(鄭州)에서 중국 국민군을 대표한 이종인(李宗仁)과 중국 공산군을 대표한 팽덕회(彭德懷) 사이에 체결된 휴전 협정으로, 정식 명칭은 〈중화민국 국민군 총사령관을 일방으로 하고, 중화인민공화국 인민군 최고 사령원을 다른 일방으로 한 휴전 협정〉이다.

1931년에 시작된 제1차 국공 전쟁(國共戰爭)은 1935년의 연안(延安) 전투에서 공산군의 마지막 부대가 우세한 국민군에게 포위되어 궤멸됨으로써 끝났다. 더우기 이 전투에서 모택동(毛澤東)주은래(周恩來)주덕(朱德) 등 대부분의 지도자들이 전사함으로써, 공산당은 와해되었다.

그러나 국민당 정권의 실정과 일본의 침략 행위에 대한 굴욕적 외교 노선은 '내정의 개혁과 외교의 자주 회복'을 약속한 공산주의 운동을 도와 주어, 1940년대초에 유소기(劉少奇)를 중심으로 공산당이 재건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종결되자, 노서아는 공산당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하였고, 이에 힘입어 1950년 11월에는 신강성(新疆省) 객십갈이(喀什噶爾)에 〈신강 소비에트〉가 수립되었다. 그 뒤 공산당은 노서아에 가까운 북서부 변경 지대에 세력을 확장하여, 1952년에는 신강성의 태반과 감숙성(甘肅省) 북부를 차지하게 되었다.

1953년 4월 국민당 정부는 마침내 내란 상태를 선포하고 토벌군을 일으켜, 제2차 국공 전쟁이 일어났다. 처음에는 국민군이 우세하였으나, 곧 민심의 이탈을 이용한 공산군이 전세를 반전시켰다. 특히 1954년 2월의 〈토지 개혁 선언〉은 농민들로 하여금 공산당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도록 하여 전쟁의 분기점이 되었다. 1956년 2월 공산군은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북경(北京)과 천진(天津)을 점령하였고, 이어 3월에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한편 강대국들 사이에서는 협상을 통해 전쟁을 종식시키려는 외교적 노력이 일찍부터 있었고, 전세가 국민군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자 그러한 노력은 활발하게 되었다. 이어 1956년 2월 "전쟁이 황하(黃河) 남쪽으로 미치면, 산동성(山東省)에 있는 일본 제국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출병이 불가피하다"는 일본의 선언[소위 도우조우 선언(東條宣言)]은 공산군을 협상에 응하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협정으로 양측은 대략 황하를 경계로 삼게 되어, 신강 ‧ 감숙 ‧ 청해(靑海) ‧ 영하(寧夏) ‧ 수원(綏遠) ‧ 섬서(陝西) ‧ 산서(陝西) ‧ 찰합이(察哈爾) ‧ 하북(河北)의 9개 성(省)은 정식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토가 되었다.

- 상해 자유시(上海自由市) 동양사학회(東洋史學會) 편, 『동양사사전(東洋史辭典)』에서[15]


1940년 경진(庚辰)

1월 독일노서아 : 〈상호 불가침 조약〉 체결.

2월 영국 : 클레먼트 리처드 애틀리 내각 붕괴되고, 아더 네빌 체임벌린 내각 출범. 중국과 일본 : 미국의 중재로 휴전 성립. 국제 연맹 : 이든 위원회 〈상해 자유시(上海自由市) 안〉 제의.

3월 영국 : 인도의 회교도 다수 지역을 분리시켜 별도의 자치제를 구성할 계획 발표, 힌두교도들 폭동을 일으킴. 일본 : 히라누마 기이찌로우(平沼騏一郎) 내각 붕괴되고,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麿) 거국 일치 내각 출범.

4월 서반아 : 반란군 마드리드 함락.

5월 일본 : 찰합이성(察哈爾省)에서 철군 완료.

6월 미국과 일본 : 통상 조약 연장에 합의.

7월 불란서 : 레옹 블룸 내각 붕괴되고, 에두아르 달라디에 내각 출범. 이태리 : 이디오피어에 침입. 미국 : 국제연맹에 가입, 찰리 채플린위대한 독재자」 발표.

8월 일본 : 국제연맹에 재가입. 서반아 : 반란군 바르셀로나 점령, 인민 전선(人民戰線) 정부 노서아로 망명, 내란 종식.

9월 멕시코 : 레온 트로츠키 피살. 국제연맹 : 이태리를 '침략자'로 규정, 만주국의 국제연맹 가입안 부결. 미국 : 웬델윌키 공화당 후보 대통령에 당선.

10월 이태리 : 국제연맹에서 탈퇴.

11월 독일 : 오지리(墺地利) 병합을 선언. 미국 : 에드윈 매티슨 먹밀런이 넵튜니언 발견. 영국 : 그레이엄 그린 『권력과 영광』 발표.

12월 미국 : 10년 안에 비율빈(比律賓)에서 부분적 자치제 실시 용의 천명. 중국 : 유소기(劉少奇) 노서아에서 귀국, 중국 공산당 재건.

- 상해 자유시 동양사학회(東洋史學會) 편, 『동양사사전(東洋史辭典)』의 연표에서[16]


현재 지배적인 견해는 예측 가능한 장래에 조선이 일본의 지배를 벗어나 독립을 얻을 가망은 없다는 것이다. 필자도 그렇게 생각한다. 역사를 잃고, 말과 글을 잃고, 심지어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이름까지 잃은 사람들을 어떻게 민족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그리고 자신의 민족적 실체에 대한 각성 없이 어떻게 독립을 이룰 수 있는가?

- 더글라스 로렌스, 『식민지』에서[17]


제4조 제1항 모든 출판물은 국어를 사용함을 원칙으로 한다. 국어를 사용하지 않는 출판물은 학무국장의 허가를 별도로 얻어야 한다.

- 조선 총독부 제령(制令) 제105호 〈출판사업령(出版事業令)〉, 다이쇼우 3년 4월 4일자[18]


제4조에 다음 조항들을 부가한다.

제3항 총독은 치안 유지 또는 국민 문화 창달에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는, 본령의 제정 이전에 출판된 출판물 중 국어로 되어 있지 않은 것들을 무상으로 수거 ‧ 폐기할 수 있다.

제4항 우기 제3항의 규정을 위반하여 수거에 불응하는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금고에 처한다.

─ 조선 총독부 제령 제160호 〈출판사업령 중 일부 개정〉, 다이쇼우 6년 10월 25일자[19]



2.2. 이 월[편집]



제3조 제1항 외국에서 발간된 서적 또는 다른 출판물을 판매를 목적으로 반입하려는 자는 사전에 학무국장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제2항 외국에서 발간된 서적 또는 다른 출판물을 휴대하여 반입하려는 자는 조선세무청장에게 신고하여야 한다.

─ 조선 총독부령 제216호 〈외국 서적 및 출판물 반입 규정〉, 다이쇼우 13년 4월 8일자[20]


제3조에 좌기 항을 신설한다.

제3항 조선 이외의 일본 제국 영토에서 발간된 서적 및 출판물도 제1항 및 제2항의 규정을 적용한다.

─ 조선총독부령 제391호 〈외국 서적 및 출판물 반입 규정 중 일부 개정〉, 쇼우와 2년 3월 8일자[21]


군인들이 지닌 각종 미덕들, 예를 들면 국가에 대한 투철한 충성심, 명령에 대한 절대적 복종심, 일사불란한 단결력, 적진을 향하여 과감하게 돌격하는 행동력 같은 것들 말이오, 이런 미덕들을 지금 우리 사회 전체에서 요구하고 있다고 나는 봅니다. 군인들이 현재 우리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지도적 위치에 있는 것은, 이와 같은 사실을 염두에 두고 보면, 자연 이해가 되리라고 생각하는데, 기자 여러분들 생각은 어떻소?

도우조우 히데끼(東條英機) 수상, 쇼우와 26년 4월 10일 〈군부대신 현역 무관제(現役武官制) 부활〉에 관한 기자 회견에서[22]


바람과 서리에 잦아진 내 가슴의 고원(高原)

그 한끝 바위에 서린 세월이여, 이제 대답하라,

정 깊은 이에게, 사랑한다.

그 한마디를 끝내 속삭이지 못한 아쉬움

그보다 큰 아쉬움이 어디에 있는가.

─ 기다하라 고우운사이(北原耕雲齋), 『인적(人跡)』에서[23]


합이빈(哈爾濱) 사건은 나로 하여금 제국의 만주 진출 이전에 수행되어야 할 일이 남아 있음을 절감케 하였다. 대륙 경영의 전진 기지인 조선에 대한 지배가 확고하지 못한 상태에서 만주 진출에 주력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다시 조선으로 건너가 조선 반도의 내지화(內地化)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기로 결심했다.

─ 이또우 히로부미, 『북정(北征)』에서[24]


모든 시는 혁명적이다. 모든 구호는, 특히 시로 변장한 구호는 궁극적으로 반동적이다.

─ 기다하라 고우운사이(北原耕雲齋), 시집 『인적(人跡)』의 서문에서[25]


지금까지 씌어진 모든 역사는 근본적으로 정치사다. 인류사라고 불리는 것도 따지고 보면 정치사라는 골격에 다른 부면의 역사들을 군살처럼 붙여 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점은 근년에 동양사학계에서 중요한 쟁점으로 부각된 〈시대 구분론(時代區分論)〉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단 한 사람도 과학에 있어서의 방법론상의 발전이나 문학 사조의 변화에 맞추어 시대를 구분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에게 무척 중요한 종교도 시대 구분에 있어서는 이렇다 할 역할을 갖지 못한 실정이다.

─ 사노 히사이찌(佐藤壽一), 『독사수필(讀史隨筆)』에서[26]


우리들은 진자 참배가 기독교 교리에 위배되지 않는 뜻을 완전히 이해하고, 진자 참배가 중요한 국가적 ‧ 민족적 의식임을 철저히 깨달아, 이에 진자 참배를 여행(勵行)할 것을 엄숙히 선서함. 나아가 만세일계(萬世一系) ‧ 군신일체(君臣一體)로 세계에 유례 없는 국체(國體)를 가진 일본 제국의 충량한 신민으로서 제국의 무궁한 번창을 위해 적성(赤誠)을 다할 것을 굳게 맹서함.

─ 전선 기독교 연맹(全鮮基督敎聯盟), 다이쇼우 11년 5월 16일자 「진자 참배에 관한 성명서」에서[27]


제11조에 좌기 항을 부가한다.

제3항 씨(氏)는 호주(법정 대리인이 있을 때는 법정 대리인)가 이를 정한다.

부칙. 1) 본령의 시행 기일은 조선 총독이 정한다.

2) 조선인 호주(법정 대리인이 있을 때는 법정 대리인)는 본령 시행 후 6개월 이내에 새로 씨를 정하고, 부윤(府尹) 또는 군수(郡守)에게 이를 계출하여야 한다.

3) 전항의 규정에 의한 계출을 하지 않을 때는 본령의 시행 당시의 호주의 성(姓)을 씨로 한다. 일가(一家)를 창립하지 않은 여호주인 때 또는 호주 상속이 분명하지 못한 때는, 전 남호주의 성으로써 씨를 삼는다.

─ 조선 총독부 제령(制令) 제271호 〈조선 민사령 중 일부 개정〉, 쇼우와 4년 2월 1일자[28]


제2조 조선의 교육은 교육에 관한 칙령에 입각하여 제국의 충량한 신민을 육성함을 그 본의로 한다.

─ 조선 총독부 제령(制令) 제2호, 〈조선교육령(朝鮮敎育令)〉, 메이지 44년 8월 23일자[29]


메이지 유신의 과업은 병영(兵營)에서 완성되었읍니다. 후진국에 있어서 대중을 교화하는 교육 기관으로는 병영보다 더 좋은 것은 없읍니다. 애석하게도 현재 조선인들을 교화하는 데 병영을 이용함에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제약이 따릅니다. 따라서 조선의 각급 학교는 조선에 있어서 충량한 제국 신민을 육성하는 유일한 기관임을 자각하고 정진해야 할 것입니다.

소네 아라스께(曾禰荒助) 정무총감, 메이지 44년 8월 30일, 조선 교육자 대회에서의 유시에서[30]


'부분적 진실'이란 것은 없다. 어떤 사실에 대해 말해져야 할 것이 모두 말해지지 않는다면, 그러한 부분적인 기술은 어쩔 수 없이 그 사실을 왜곡시킨다. 그 사실에 관해 모르거나 언급되지 않은 부분이 있다면, 그렇다는 것이 밝혀져야 한다. 정치적인 이유에서 중국의 역사를 낮게 평가하고 조선의 존재는 아예 빼놓은 채 일본의 역사를 재구성하면서 비롯된 일본사의 왜곡은 이제 와서 보면 인과응보의 느낌마저 주는 비극이다. 나는 슬퍼한다, 그 왜곡된 역사를 만들어내기 위해 희생된 그 많은 양심과 양식과 명성들을 생각하고. 나는 두려워한다, 지금도 그 왜곡된 역사의 등대를 믿고 삶의 바다를 헤쳐 나가는 일본 사람들을 생각하고.

─ 사노 히사이찌, 『독사수필』에서[31]


깨어 있는 넋은 언제나 늦가을 밤

비오는 두시다.

─ 기다하라 고우운사이(北原耕雲齋), 『인적(人跡)』에서[32]



2.3. 삼 월[편집]



이처럼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는 계속 서로 접근하여 왔으며, 지금은 수정 자본주의와 수정 사회주의를 구별하기 어려운 형편이다. 따라서 종래의 관행대로 급진주의를 사회주의와 연관시키고 보수주의를 자본주의와 연관시키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이제는 다시 변혁의 방향이 아니라 그 속도가 급진주의보수주의를 구분하는 주된 기준이 되어야 한다.

변혁의 속도라는 기준을 적용하여 살펴보면, 우리는 뜻밖에도 가장 급진적인 정부들은, 자본주의 정부든 사회주의 정부든, 군부에 의해 지배되는 정부들임을 발견하게 된다.

─ 사노 히사이찌(佐藤壽一), 『독사수필(讀史隨筆)』에서[33]


교육의 진정한 의의는 사회의 생산적 활동에 충실하게 기여할 역군을 만들어내는 데 있읍니다. 총독부에서는 이번 교과 과정의 개편에서 이 점을 십분 고려하여, 각급 학교에서 실업 교육을 위주로 하고 정신 교육을 강화하기로 한 것입니다.

─ 다께꼬시 요사부로우(竹越與三郞) 학무부장, 다이쇼우 4년 1월 14일 〈교과 과정 개편에 관한 담화문〉에서[34]


외로운 길을 가는 자에겐

외로운 이정표가 있느니,

산줄기를 넘어

낯선 고향으로 발을 딛자

진눈깨비가 반갑다 맞는다.

─ 기다하라 고우운사이(北原耕雲齋), 『인적(人跡)』에서[35]


현재의 동양 사회의 제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동양 문명이 서양 문명의 도래라는 엄청난 충격을 흡수하고 있는 문명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더 크게 보면, 16세기 이후의 모든 사회적 현상들은 여러 문명들이 서양 문명을 중심으로 한 하나의 지구 문명으로 통합되는 과정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서양 문명의 도래는 동양 문명의 외부 경계 조건(外部境界條件) External Boundary Conditions을 허물어뜨렸다. 이것은 그 전에 동양에서 이루어진 질서를 깨뜨렸고, 동양의 여러 나라들 사이에 있었던 우열 관계를 상당한 정도까지 의미가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제 한 나라나 민족의 성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우세한 서양 문명의 도래라는 새로운 조건에 대한 적응의 적부였다.

─ 사노 히사이찌(佐藤壽一), 『독사수필(讀史隨筆)』에서[36]


"이제 일본이 조선에서 물러나는 것은 조선인에게 너무 잔인한 짓이다." 삼십 여 년 전 도우조우 히데끼(東條英機) 일본 수상이 한 이 말은 다른 나라의 식민지가 되는 일이 얼마나 비극적인가를 극명하게 말해 준다.

─ 더글라스 로렌스, 『식민지』에서[37]


어느 나라의 군대에 있어서도 군별(軍別) 사이의 경쟁과 대립은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그것들은 너무 격화되지 않도록 조정된다. 일본의 경우, 육군과 해군의 대립은 상당히 심각하여 큰 문제가 될 수도 있다는 지적이 오래 전부터 나왔다. 육군과 해군은 별개의 군대처럼 행동하고 있고, 작전 계획의 수립에 있어서도 협력하는 일이 거의 없다. 정부 조직에 있어서도 육군성 ‧ 해군성, 그리고 공군성이 있을 뿐 국방성과 같이 통괄하는 부서가 없다.

육군과 해군 사이의 대립은 해군이 상대적으로 강한 나라들─일본이나 영국과 같은 섬나라들, 또는 미국이나 노서아와 같이 두 대양에 세력을 유지해야 하는 나라들─에서 자연히 심하다. 강대한 해군만이 내부적 세력 다툼에서 절대적 우위를 가진 육군에 맞설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일본에서는 해군과 공군이 연합하여 육군에 맞서 왔다. 이러한 해군과 공군 사이의 유대는 두 약자가 연합해서 한 강자에게 맞선다는 논리만으로는 설명되기 어려울 만큼 전통적이니, 그것은 공군의 성장에 해군이 기여한 바가 컸다는 역사적 요인에서 상당히 비롯한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공군은 육군 항공대가 발전한 것이다. 일본의 경우, 공군의 모태는 육군이었다기보다 해군이었다고 하는 것이 사실에 훨씬 가깝다. 일본 해군이 항공모함을 중심으로 하는 해양 작전 개념을 세계에서 가장 먼저 도입한 군대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일본의 해군과 공군이 밀착된 까닭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상해공론(上海公論)』1984년 4월호,「일본의 해부 : 군사편」에서[38]


모든 사회적 변혁은 언제나 그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고통을 준다. 더 좋은 질서를 이루기 위한 변혁일지라도, 그 변혁의 영향을 받는 사람들은 고통을 받게 마련이다. 변혁이 커짐에 따라, 거기에 적응하기가 지수 함수적(指數函數的)으로 어려워지고, 고통도 그렇게 커진다. 문명이 발전하는 한 사회적 변혁은 필연적이므로, 이상적인 상태는 변혁이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급격한 변혁도, 변혁이 아주 없음도, 아울러 좋지 못하다. 사람들이 변화를 싫어하는 것을 고려해 볼 때,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사회적 변혁을 게을리하는 일이다. 변혁을 게을리하는 시대는 후대에 크고 급격한 변혁의 불가피성을 유산으로 물려 주는 것이다.

─ 사노 히사이찌, 『독사수필』에서[39]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식민지 토착 언어의 쇠멸은 필연적으로 전통의 단절에 의한 토착 문화의 쇠멸을 가져온다. 이어서 토착 문화의 쇠멸은 필연적으로 토착 언어의 배후지의 상실을 가져온다. 한때는 번영했으나 새로운 교역로의 출현으로 화물을 잃고 급속히 몰락한 항구들과 같은 운명을 맞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악순환은 구주의 제국주의 국가들이 급격히 해외로 발전하기 시작한 16세기 이래 세계 도처에서 보게 된 현상이다.

기원전 3세기 나마(羅馬)가 팽창하여 대제국을 건설한 이래 처음으로 수많은 군소 민족들의 언어들이 단기간에 쇠멸하였다. 신대륙의 원주민 언어들─라틴 아메리카에만 1,700종의 언어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로부터 시작되어 아프리카를 거쳐 아세아에 뻗친 이 죽음의 행렬은 아직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 더글라스 로렌스, 『식민지』에서[40]



2.4. 사 월[편집]



학교에서의 군사 훈련이 확고한 국가관의 함양과 국방력의 증강에 필수적인 제도라는 문부대신의 말씀이 진정에서 나온 것임을 나는 믿습니다. 선전은 흔히 그것이 목표로 한 사람들보다는 그것을 만들어낸 사람 자신을 훨씬 쉽게 설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믿음이 아니라 사실임을 문부대신께서도 인정하실 것입니다. 우리 함께 단 하루만이라도, 아니 단 한 시간만이라도, 정직하게 사실을 바라봅시다. 그러면 우리는 알게 될 것입니다 : 학교에서의 군사 훈련은 확고한 국가관의 함양이나 국방력의 증강을 위해 도입된 것이 아니고, 오십여 년 전에 우가끼 가즈시게(宇垣一成) 육군대신이 예비역 육군 장교들의 일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도입한 제도임을.

─ 후지와라 도시아끼(藤原利明) 중의원(衆議院) 의원, 쇼우와 55년 10월 14일 대정부 질문에서[41]


노예가 되어 보지 않은 사람은 노예가 된 적이 있다는 사실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가 없다. 식민지의 경험은 한 민족의 넋에 드리운 그림자다. 결코 지워지지 않는 그림자다.

─ 투투 오로투투, 더글라스 로렌스의 『식민지』에서 재인용[42]


이와 같이 어느 방면으로 보아도 조선과 일본과의 이해는 상호배치하여 그 해를 입은 자는 조선이니, 조선 민족은 자신의 생존권을 위하여 독립을 선언하노라.

이광수(李光洙), 다이쇼우, 6년 4월 7일 「조선청년독립단(朝鮮靑年獨立團) 선언서」에서[43]


그러나 우리는 생존에 대한 의무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무책임하게 흑백 논리를 가지고 모든 것을 버릴 것이 아니라, 조선 안에서 허가된 범위 안에서 무슨 방침을 세우지 아니할 수 없다.

─ 이광수, 다이쇼우 9년 1월 6일자 『도우아닛뽀우(東亞日報)』, 「조선의 민족적 경륜」에서[44]


하루라도 속히 황민화(皇民化)가 될수록 조선 민족에게는 행복이 올 것이다.

가야마 미쯔로우(香山光郞), 쇼우와 4년 5월 8일자 『한도우닛뽀우(半島日報)』, 「창씨개명(創氏改名)에 관한 소감」에서[45]


아직 어떤 나라도 식민지에서 올림픽 대회를 개최한 적이 없다. 제25차 올림픽 대회를 게이조우에 유치함으로써 일본은 자신의 조선 통치가 성공적이었음을 온 세계에 대해 과시한 것이다. 일본은 1910년의 〈일한 합병 조약〉에 규정된 사항들을 충실히 이행하였고, 가난과 무지에 시달리던 조선 인민들은 일본의 선진국다운 온화하나 확고한 지도 아래 생활 수준이 급속히 향상되었다.

─『뉴욕 타임즈』, 1987년 4월 7일자 사설 「조선에서의 올림픽 대회」에서[46]


제25차 오림삣꾸 대회가 게이조우에서 개최되게 된 것은 오천만 조선 신민 모두의 영광입니다. 우리는 이 역사적 대회를 성공적으로 치름으로써, 망극한 황은(皇恩)에 보답하고 전 세계에 우리 조선 신민들의 저력을 과시해야 할 것입니다.

─ 도우고우 노부오(東鄕信夫) 조선 총독, 쇼우와 62년 4월 9일자 「오림삣꾸 대회 유치에 관한 담화문」에서[47]


근년에 비상 시국에 대처한다는 명목 아래 〈임시 특별세〉라는 것이 여럿 생겼다. 비상 시국이 끝나면 없어진다는 단서가 붙은 세금들이다. 그러나 그 세금들이 없어지리라고 믿는 사람들은 드문 것 같다. 정부 예산을 다루는 관리들까지 그렇게 여기는 것 같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판단해 보면, 그들의 생각은 결코 틀린 것이 아니다. 팔십여 년 전 일로 전쟁(日露戰爭) 중 '평화가 회복될 때까지'라는 단서를 붙여 모든 조세의 세율을 두 배 내지 세 배 올린 〈비상 특별세법〉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존속되었고, 국민의 조세 부담율은 그 세율을 기초로 계속 증가되어 왔다.

─ 사노 히사이찌, 『독사수필』에서[48]


이젠 목청을 돌려다오

세월에 거칠어진 이 마른 살에게.

노래를 돌려다오

질투의 불길에 그슬린 내 검은 넋에게.

─ 기다하라 고우운사이(北原耕雲齋), 『인적(人跡)』에서[49]


이제 게이조우 데이고꾸 대학교(京城帝國大學校)가 설립되어 그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어, 조선의 학생들은 내지로 유학할 필요가 없어졌읍니다. 앞으로 총독부에서는 내지에의 유학은 내지에 연고가 있는 학생들에게만 허용할 방침입니다.

─ 다나까 요시야스(田中吉保) 학무국장, 쇼우와 원년 3월 12일 게이조우 데이고꾸 대학교 제1회 졸업식 축사에서[50]


본인은 조선의 충량한 신민들에게 큰 불편을 주지 않는 범위내에서 〈국어 상용〉을 추진할 계획입니다.

─ 시라까와 요시노리(白川義則) 조선 총독, 다이쇼우 13년 3월 7일 부임 기자 회견에서[51]


본인은 〈국체 명징(國體明徵)〉을 통치의 근본 방침으로 삼을 것임을 천명합니다. 무엇보다도 〈국어 상용〉을 적극 추진할 것이며 이 목표의 실현을 저해하는 어떤 것도 용납치 않겠읍니다.

─ 아라끼 사다오(荒不貞夫) 조선 총독, 쇼우와 3년 8월 15일 부임 기자 회견에서[52]


일본 남북조 시대(南北朝時代) : 1236년에서 1392년까지 일본의 천황가(天皇家)가 요시노(吉野)의 난쪼우(南朝)교우또우(京都)의 호꾸쪼우(北朝)로 분열되어 상쟁하였던 시기로, 가마꾸라 막부(鎌倉幕府) 시대에서 무로마찌 막부(室町幕府)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였다.

12세기 말엽 미나모또노 요리또모(源賴朝)가마꾸라에 막부를 세워, 천황을 상징적 존재로 만들고, 무인 전단 정치(武人專斷政治)를 행하였다. 1318년에 즉위한 고다이고(後醍醐) 천황은 막부를 타도하고 〈겜무 중흥(建武中興)〉이라고 불리는 복고적 정치를 행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천황의 친정(親征)에는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있었다. 이를 틈타 아시까가 다까우지(足利尊氏)는 1335년 반기를 들어 권력을 장악하고, 교우또우에 막부(무로마찌 막부, 또는 아시까가 막부)를 열었다.

이보다 앞서 13세기 중엽에 고사가(後嵯峨) 천황은 장자(長子) 고후까구사(後深草) 천황을 물리치고 차자(次子)를 천황으로 앉혀, 천황가는 분열되었다. 아시까가는 이것을 이용하여 1336년 장자 계통의 고우묘우(光明) 천황을 옹립하였고, 고다이고 천황은 요시노로 가서 조정을 열었다.

그 뒤 막부 정권이 기반을 굳히자, 대세는 호꾸쪼우로 기울어졌고, 난쪼우의 고가메야마(後亀山) 천황이 호꾸쪼우의 고꼬마쯔(後小松) 천황에게 양위하는 형식으로 남북조가 다시 합쳐졌다.

이 뒤로 19세기 중엽의 메이지 유신(明治維新)까지 천황은 다시 실권이 없는 상징적 존재로 남게 되었다.

─ 상해 자유시 동양사학회 편, 『동양사사전(東洋史辭典)』에서[53]


금후로는 각급 학교의 역사 교과서에서 〈난보꾸쪼우(南北朝)〉라는 용어를 삭제하고 소위 〈난쪼우(南朝)〉를 〈요시노쪼우(吉野朝)〉로 고쳐 부를 것.

─ 메이지 44년 1월 9일자 문부성 지시 각서에서[54]


한철의 잎새들로

젊은 꿈들을 털어 버린 내 노래가

바람 속에 누운 바위의 목청이 되면

어느 어둑한 들판에서 기다리리라

먼 길 찾아 온 서러운 그대가

기대어 흐느낄

말 없는 돌담으로.

─ 기다하라 고우운사이(北原耕雲齋), 『인적(人跡)』에서[55]


관료 계급은 자신을 집권 계급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만듦으로써 연명한다. 그래서 그들은 정치적으로 모호하며, 집권자가 누구인가 따지지 않는다. 심지어 그들은 적국에 정복되면, 새 주인을 옛 주인을 섬겼던 것과 같은 충성심으로 섬긴다. 그들은 통치 권력을 충성스럽게 섬김으로써 인민들 위에 군림하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 확장한다.

─ 사노 히사이찌, 『독사수필』에서[56]



2.5. 오 월[편집]



자연은 모든 권리들과 책임들을 개체에게 주었다. 개체와 종족의 보존을 위한 모든 활동들이 개체를 단위로 하여 결정되고 이루어진다. 모든 생명체들은 혼자 태어나서, 혼자 죽는다. 이 의미 심장한 사실은 세균과 풀에서 공룡과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두에게 해당되는 얘기다. 그런 뜻에서 그것을 구성하는 개체들에게 권리들과 책임들을 한껏 주지 않는 어떤 인간 조직도─그것이 가족이든, 정당이든, 국가든─자연스럽지 못하다. 민주주의가 다른 어떤 정치 형태보다 자연스럽다는 과학적 논거가 바로 이것이다.

─ 사노 히사이찌, 『독사수필』에서[57]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일본 헌법의 치명적 결점은 군부가 내각의 통제를 받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 정치 활동에서는 초연하여 거의 상징적 존재라고 할 수 있는 천황의 직접적 통제 아래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내각은 중의원을, 그리고 좀 덜한 정도로 귀족원을, 통하여 국민에게 책임을 지지만, 군부는 천황 한 사람에게만 책임을 지는 것이다. 아무리 천황의 권위가 절대적이고 천황 개인의 자질이 영명하다고 하더라도, 천황이 어떻게 방대한 군부를 통제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군부는 실제로는 책임질 곳이 없는 존재인 셈이다. 그뿐이 아니다. 일본에는 〈군부대신 현역 무관제(武官制)〉라는 제도가 있어서, 육군대신 ‧ 해군대신, 그리고 공군대신 자리에는 현역 중장 또는 대장을 임명하도록 되어 있다. 이 제도를 이용하여, 군부는 언제든지 군부대신들을 사직하게 하고 후임자들의 추천을 거부함으로써 내각을 무너뜨릴 수 있다. 따라서 실제에 있어서는 군부가 내각에 대해 상대적 우위를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은 권력 구조 아래에서 군부가 득세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상해공론』, 1984년 1월호, 「일본의 해부 : 정치편」에서[58]


군사 독재 정권이 불안정하다는 얘기는 자유를 희구하는 사람들의 기원일 따름이다. 동서고금의 역사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 준다. 애급(埃及)맘룩 왕조우리나라의 막부(幕府) 정권들이 그 좋은 예들이다. 무엇보다도 나마(羅馬) 제국몽고 제국이 근본적으로 군사 독재 국가였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 군사 독재 정권이 국내의 모든 반대자들을 힘으로 쉽사리 누를 수 있기 때문에 영속하리라고 생각하는 것도 그 정권 아래서 이득을 보는 자들의 기원에 지나지 않는다. 독재 정권을 안정시키는 경직된 사회 구조는 예기치 못한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없다는 결정적 약점을 안고 있다. 내부적으로 강력하고 안정된 듯이 보이는 정권들이 외부의 압력에 허망하도록 쉽사리 굴복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서양 열국의 개국 요구 앞에 허둥대다가 무너진 도꾸가와 막부(德川幕府) 정권이 그 좋은 예다.

─ 사노 히사이찌, 『독사수필』에서[59]


정당하게 성립되지 않은 정권의 가장 큰 문제점은 그 정권의 존재 자체가 사회의 도덕적 질서를 근본적으로 파괴한다는 점이다. 정치, 즉 권력의 배분 행위는 어느 사회에서든지 가장 근본적인 일이다. 이러한 근본적 차원에서 정의가 실현되지 않는데, 어떻게 다른 차원에서 도덕적 질서가 이루어지길 바라겠는가?

─ 사노 히사이찌, 『독사수필』에서[60]



2.6. 유 월[편집]



다음 세상에서

우리가 다시 만나면

여기서 끊어지는

인연의 실을 찾아

저승의 어느 호젓한 길목에서

문득 마주 서면

내 어리석음이 그 때는

조금은 씻기어 그 때는

이렇게 헤어지지 않으리라

나는 아느니.

아득한 내 가슴은

아느니

어디에고

다음 세상은 없다는 것을.

─ 기다하라 고우운사이(北原耕雲齋), 『인적(人跡)』에서[61]


식민 제국은 일본이 처음도 아니고 마지막도 아닐 것입니다. 나는 현재 세계의 강대국들 가운데 어느 나라가 식민 제국이 아닌가 묻고 싶습니다. 미국? 노서아? 영국? 불란서? 영국과 불란서가 식민 제국의 전형임은 모두가 잘 알고 있읍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인식하지 못하고 있지만, 미국과 노서아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성공적인 식민 제국들입니다.

미국이 자리잡은 대륙을 흔히 '신대륙'이라고 부릅니다만, 그곳엔 이미 수만 년 전부터 사람들이 살고 있었읍니다. 대서양 연안의 조그만 이민 집단으로 시작한 미국은 이제 원주민들을 거의 완전히 말살하고, 대서양과 태평양을 동시에 호령하는 강대국이 되었읍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보면, 미국은 세계 역사에서 유례가 드문 순수한 식민 제국인 것입니다.

노서아는 십육 세기까지 우랄 산맥 서쪽에 있는 별로 크지 않은 나라였읍니다. 지도를 보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놀랄 것입니다, 단 삼백 년 동안에 노서아가 획득한 땅이 얼마나 넓은가에. 그 땅은 사람들이 살지 않던 곳이었나요? 고고학자들은 말합니다. 그 땅에는 중국 대륙보다 먼저 훌륭한 금속 문화가 있었다고. 그 땅엔 물론 몽고 제국의 후예들이 살고 있었읍니다.

이것은 결코 궤변이 아닙니다. 지금 '인디안'이라는 우스꽝스러운 이름으로 불리는 북미 대륙의 원주민들은 어디에 있읍니까? 모두 학살되고, 몇 안 되는 생존자들은 소위 '보호 구역'이라는 불모지에서 비참하게 살고 있읍니다. 일본이 조선을 가혹하게 다스린다고 하지만, 일본이 통치한 오십 년 동안에 조선의 인구는 배 이상 증가했읍니다.

시게미쯔 마모루(重光葵) 외무대신, 1958년 6월[62]

『상해공론』과의 대담에서[63]


제3조 제1항 도부군협의회(道府郡協議會)의 의원은 그 삼분지 이를 당해 지방 유권자들의 직접 선거에 의하여 선출하고, 그 삼분지 일은 도지사 ‧ 부윤 ‧ 군수가 각각 유권자들 가운데 학식과 덕망이 있는 인사들로써 임명한다.

제2항 상기 제 1항의 유권자란 만 20세 이상의 남녀 가운데 공민권의 제약을 받지 않고 연간 납세액이 5원 이상인 자를 말한다.

─ 조선 총독부령 제297호 〈조선 지방 자치 규정〉, 다이쇼우 9년 3월 1일자[64]


제4조에 하기의 항을 부가한다.

제3항 제국 의원(帝國議院)에서 조선을 대표하기 위하여 15인의 귀족원 의원과 45인의 중의원 의원을 선출한다. 전기 귀족원 의원은 칙선(勅選)으로 하고, 중의원 의원은 조선 각 도와 게이조우부(京城府) 및 가마야마부(釜山府)의 협의회에서 3인씩 선출한다.

─ 법률 제2015호 〈제국 의원법(帝國議院法) 일부 개정〉, 쇼우와 31년 9월 11일자[65]


특히 우리나라와 같이 국토가 협소하고 인구가 많은 곳에선 토장(土葬)은 많은 문제점을 야기시킵니다. 그러한 취지에서 총독부에서는 이미 이십여 년 전에 〈묘지 ‧ 화장 및 화장장에 관한 취체 규칙〉을 제정하여 시행해 오고 있읍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일부 종교에서는 아직도 교리를 내세우며 토장을 고집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 가또우 분지로우(加藤文治郞) 내무국장, 쇼우와 8년 7월 4일자 〈암장(暗葬) 근절 운동에 관한 담화문〉에서 [66]


쇼우와 6년 5월의 전일본 종교인 단합 대회는 일본 종교계의 역사적 대사건이었읍니다. 이 대회를 계기로 일본의 모든 종교들은, 불교유교도교기독교를 가릴 것 없이, 야마또 다마시이(大和魂)의 진수인 신또우(神道)와 유기적 연계를 이루어 일본에 뿌리를 둔 국적 있는 종교들로 체질을 개혁하였고, 일본인의 종교 생활에 유례 없는 활기를 불어넣었읍니다. 이러한 획기적인 일을 추진함에 있어 우리 홋께슈우(法華宗)는 호국 불교의 전통을 이어받아 어느 종교, 어느 종파보다도 적극적이고 창조적이었읍니다.

─ 와따나베 몽에(渡邊聞慧), 『홋께슈우 연감, 쇼우와 61년』의 서문에서[67]


근년에 우리나라에는 문제점이 많은 제도들이 〈비상 시국〉이라는 이름 아래 여럿 도입되었읍니다.

국민정신총력연맹, 신생활운동본부, 국민의용대, 청년특별연성대(靑年特別鍊成隊), 애국반상회(愛國班常會) 등이 그것들로서, 그것들을 시행함으로써 얻는 가시적 이득보다는 국민의 기본권에 대한 제약이라는 부작용이 훨씬 큰 것이 사실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은 이들 제도의 대부분이 조선 총독부에서 고안하여 조선에서 실시하기 시작한 것들이라는 점입니다. 식민지 통치를 염두에 둔 제도를 제국의 본토에 그대로 도입시켰을 때, 많은 문제들이 발생할 것은 당연합니다. 이제 우리는 일본 제국의 존립에 필수적인 조선의 영유(領有)와 민주적 사회의 건설이라는 두 명제를 슬기롭게 조화시켜야 합니다.

─ 후지와라 미쯔히데(藤原光秀), 일본민주당 총재, 쇼우와 42년 1월 18일 중의원에서의 정책 기조 연설에서[68]


요사이 조선에서는 개고기를 파는 음식점들이 문을 닫고 있다고 한다. 사람들의 입맛이 갑자기 변해서, '보신탕'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불리는 조선의 별미가 외면당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얼마 전 서양의 〈동물 애호 협회〉인가 하는 단체가 개고기를 먹는 야만적인 나라에서 열리는 오림삣꾸엔 불참하겠다고 위협했기 때문에, 조선 총독부의 명령에 의해서 문을 닫는다는 것이다. 막대한 투자가 따르는 행사를 무사히 치르기 위한 일이라고 이해하려 해도 영 뒷맛이 떫다.

16세기 말엽의 기독교 금령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 나온 것이다. 나가사끼(長崎)가 기독교 선교회의 영지로 전락한 사실을 보고 기독교가 침략의 선도적 역할을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 점, 기독교를 믿는 농민들이 진자(神社)와 절을 우상이라고 파괴한 점, 서양인이 일본인을 노예로 매매한 점 등이 그것들이다. 그 가운데 하나가, 비록 조그만 것이긴 하지만, 서양인이 쇠고기를 상식하는 것에 대한 혐오감이었다면, 아마 지금의 서양화된 일본인들은 대부분 놀랄 것이다.

그러나 잠깐만 생각해 보면, 그것은 결코 놀랄 일이 아님을 깨닫게 될 것이다. 논에서 벼를 재배하는 동양에서는 소는 사람에게 가장 소중하고 가까운 가축이였으며, 당연히 아낌을 받았다. 따라서 농사에 별 소용이 되지 않는 개가 상대적으로 천시되었고, 개고기를 먹는 것에 대한 혐오감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 반면 목축이 중요한 서양에서는 개가 아낌을 받았다.

─ 사노 히사이찌(佐藤壽一), 『도우요우효우롱(東洋評論)』 쇼우와 62년 7월호, 「동양의 위기」에서[69]


아직 흔들리는

내 넋의 가지,

무슨 세월이 지나야 하는지

흙 위에 누운 저 꽃잎이

인연의 가지 위에

다시 피려면

─ 기다하라 고우운사이, 『인적』에서[70]



2.7. 칠 월[편집]



조선의 경우 이 비율은 15.3이다. 즉 조선에 사는 일본인 한 사람은 조선인 열 다섯 사람 몫 이상의 재산을 갖고 있다는 얘기다. 이것은 세계 평균 41.6에 비하면 매우 양호하다. 그러나 이 수치를 사용할 때, 우리는 대부분의 구주 종주국들과 식민지들 사이에는 처음부터 커다란 생활 수준의 차이가 있었음에 비해 조선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었다는 사실을 감안해야 한다. 칠십여 년 전에 일본이 조선을 합병했을 때, 조선인의 생활 수준과 일본인의 그것은 비슷했었다.

─ 더글라스 로렌스, 『식민지』에서[71]


국가라는 배가 위기를 만나면, 국민들은 굳은 손길로 키를 잡을 사람을 찾는다. 그러나 배가 가야 할 목적지나 항로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다. 국민들은 전제적 통제가 분분한 논쟁들을 종식시키고 그럭저럭 배를 조종해서 험한 물결을 해쳐 나가기를 기원한다. 그러나 옳은 항로를 발견하는 일은 굳은 손길을 가진 사람을 발견하는 일보다 훨씬 어렵다는 것을 역사는 우리에게 보여 준다.

─ 사노 히사이찌(佐藤壽一), 『독사수필(讀史隨筆)』에서[72]


지금 일본의 정치 구조를 살펴보면, 천황은 점점 상징적 존재로 되고 실권은 군부로 옮아가는 것이 눈에 뜨인다. 일본의 권력 구조가 군부에 유리하게 되어 있어 근본적으로 불안하기는 했지만, 20세기 초엽까지는 내각과 군부가 그런 대로 균형을 유지해왔었다. 그러나 1930년대부터는 대외 팽창주의 정책을 앞장 서서 실천한 군부가, 특히 육군이, 내각보다 우위에 서게 되었다. 도우조우 히데끼의 주도 아래 추진된 1940년대의 '쇼우와 유신(昭和維新)' 이후 군부는 내각을 완전히 장악하여, 일본의 유일한 권력 집단이 되었다. 이와 같은 군부의 득세는 필연적으로 천황의 권한을 위축시켰으며, 일본 국민들의 종교적 신앙에 가까운 절대적 지지를 받고 있긴 하지만, 천황은 점차 상징적 기능들만을 수행하게 되었다. 어떤 정치학자들은 이와 같은 상황을 '신막부 체제(新幕府體制)'라고 부르고 있다.

반어적으로, 상술한 상황은 천황제가 오래 존속할 징조라고 할 수도 있다. 일본의 천황가가 세계에서 유례 없이 오래 지속해 온 것은 천황이 일찍부터 실권을 빼앗긴 상징적 존재였다는 사실에 큰 힘을 입었었다. 이것은 서양의 경우도 마찬가지니, 지금 구주의 왕국들은 모두 일찍 입헌 군주제를 채택했던 나라들이다. 불란서, 독일, 노서아, 오지리(墺地利) 등 근래까지 절대 군주제를 가졌던 나라들은 모두 공화국들이 되었다.

─ 『상해공론(上海公論)』 1984년 1월호, 「일본의 해부 : 정치편」에서[73]


우리는 무적 보병

황군의 정예,

적진을 향하여

앞으로 앞으로.

─ 오오다께 노부오(大竹信雄), 「제국 육군 제28보병 사단가」에서[74]



2.8. 팔 월[편집]



관동군(關東軍) : 20세기초부터 중국 동북 지구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 육군 부대를 가리키는 이름이다. 노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 노서아로부터 요동 반도의 조차권(租借權)과 남만주 철도(南滿州鐵道)를 넘겨 받았다. 일본은 곧 요동반도를 관동주(關東州)로 개칭, 관동도독부(關東都督府)를 설치하였으며, 이곳에 약 4만 명의 병력을 주둔시켰다. 이것이 관동군의 기원이다.

관동도독부는 육군 대장 또는 중장이 도독으로 임명되었고, 주둔 병력은 관동도독부 육군부에 소속되었다. 1917년 일본이 조선에서 문화 정치를 표방하면서 대만과 관동주에서도 정무와 군무를 분리할 때, 관동도독부는 관동청이 되고, 관동도독부 육군부는 관동군 사령부가 되었다. 1933년 동북 지구에 일본의 괴뢰 정권인 만주국이 서자, 관동군 사령관은 다시 관동청 장관을 겸하게 되었고, 만주국 주재 전권대사의 직책까지 갖게 되어 동북 지구의 실질적 지배자가 되었다. 일본의 중국 대륙 침략이 진행됨에 따라 관동군은 점점 증강되어, 1932년의 동북 사변(東北事變) 직전에 3개 사단 규모였던 병력이 1942년 제이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을 때는 19개 사단으로 되었다. 1983년 11월 현재 관동군은 39개의 보병 사단, 18개의 기갑 사단, 5개 공수 사단에 약 120만 명의 병력을 갖고 있다.

일본 제국주의의 산물인 이 부대는 1932년의 동북 사변, 1933년의 만주국 수립, 1938년의 새북 지구(塞北地區) 침입, 1985년의 새북 지구 침입 등 시종 여일하게 일본의 대륙 침략의 첨병 노릇을 해 오고 있다.

─ 상해 자유시 동양사학회 편, 『동양사 사전』에서[75]


현재에 대해 말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세계의 수많은 감옥들을 채운 '정치범'들을 보라. 미래에 대해 말하는 것도 위험하다. 당시에는 그럴 듯하게 들렸으나 이내 웃음거리가 된 예언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과거에 대해 말하는 것은 비교적 안전하다. 이미 일어난 일에 관한 것이라, 틀릴 여지도 적고 감옥에 갈 까닭도 적다.

1930년대부터 반 세기 동안 일본에서 역사학자들이, 소위 '황국사관(皇國史觀)'을 신봉하는 사람들을 빼놓고는, 그렇게도 고난을 겪었다는 사실은 지금 일본이 어떤 나라인가 단적으로 말해준다.

─ 사노 히사이찌, 『독사수필』에서[76]



2.9. 구 월[편집]



둘째, 이번 정변이 군부 위계에서 비교적 하층부에 속한 집단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점이다. 약 이백 사십 만 명의 병력을 가진 일본군에서, 비록 수도 방위를 맡아 무척 중요한 수도군단장이긴 하지만, 일개 군단장이 참모 본부의 좌관급(佐官級) 장교들의 도움만을 받으면서 거사를 주도하여 성공시켰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점이다. 명목상의 지도자인 히도쯔바시 히로모또(一橋廣元) 대장도 육군의 위계상 대략 여섯번째인 참모 차장의 직책을 가진 것에 불과하다. 일본이 다른 나라의 경우에 비해 상대적으로 강대한 해군을 가졌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 점은 더욱 뚜렷해진다. 이 사실은 지금까지 일본의 정치적 안정에 기여해 온 군부의 위계 질서가 파괴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상해공론』 1987년 10월호, 「일본의 군사 정변」에서[77]



2.10. 시 월[편집]



"도히하라(土肥原) 대신, 걱정할 것 없읍니다. 실업률이 좀 높아졌다고 해서, 내각이 바뀌진 않습니다. 실업자가 좀 있어야 정권은 안정되는 법입니다. 신문과 테레비종에서 경기 회복엔 무엇보다도 사회 안정이 중요하다고 며칠 떠들어대면, 지식인이다 운동권 학생이다 하는 족속들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가 봄눈 녹듯 사라집니다."

뜻밖의 얘기에 각료들은 모두 할말을 잊고, 수상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수상은 천천히 좌중을 둘러다본 다음, 말을 이었다. "'백성은 재물이 남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게 다스려야 한다'라는 얘기가 있죠? 도꾸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의 중신(重臣)이었던 혼다 마사노부(本田正臣)의 말입니다. 도꾸가와 막부(德川幕府)가 오래 지속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 무라따 도우주우로우(村田藤十朗), 『도우조우 수상과의 18년』에서[78]


제6조 국체를 부인하거나, 사유 재산 제도를 부정하거나, 황실 또는 징고우(神宮)를 모독하거나, 기타 좌경적 또는 용공적 주장을 하는 서적 또는 출판물을 소지하거나 읽는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 조선 총독부령 제352호 〈조선사상선도령(朝鮮思想善導令)〉, 쇼우와 원년 4월 20일자[79]


제23조 경무국에는 경무과, 고등경찰과, 보안과, 위생과를 둔다.

─ 조선 총독부 훈령 제70호, 〈개정 조선 총독부 사무분장 규정〉, 다이쇼우 6년 10월 5일자[80]


요사이 '도우조우 수상은 헌병 사령부를 권력의 획득과 유지에 이용했고, 그 과정에서 헌병이라는 병과를 타락시켜 본연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역사를 왜곡한 얘기다. 권력 기관으로서의 헌병사령부는 도우조우 수상이 권력의 핵심부에 접근하기 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도우조우 수상은 그 특유의 영민함으로써 누구보다도 먼저 그 사실을 인식하고 기회를 포착했을 따름이다.

─ 무라따 도우주우로우(村田藤十朗), 『도우조우 수상과의 18년』에서[81]


밤이면 파랗게 타 오르던

배고픈 지성의 눈동자,

잡으면 살을 파고 들던

지식의 날.

─ 기다하라 고우운사이, 『인적』에서[82]


우리들은 전비(前非)를 뉘우치고 사상 국방 전선에서 반국가적 사상을 격멸하는 육탄적 전사가 될 것을 엄숙히 서약한다.

─ 쇼우와 11년 10월 6일, 일본사상보국연맹(日本思想報國聯盟) 「창립 결의문」에서[83]



2.11. 십 일 월[편집]



개종한 사람보다 더 열렬하고 공격적인 신앙심을 보이는 사람은 없다.

─ 사노 히사이찌, 『독사수필』에서[84]


절망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과격한 행동이다.

─ 사노 히사이찌, 『독사수필』에서[85]


제2조 보호 관찰이란 사상범의 재범(再犯)을 방지하기 위하여 그 사상과 행동을 관찰함을 말한다.

─ 법률 제96호 〈사상범 보호관찰법〉, 쇼우와 12년 5월 4일자[86]


제4조 제3항 기소 전(起訴前) 보호 관찰이란 그 범죄 사안이 경미하고 개전의 정이 뚜렷한 경우 검사가 기소 조치 대신 명하는 보호 관찰을 말한다.

─ 조선 총독부 제령(制令) 제398호 〈개정 조선 사상범 보호관찰령〉, 쇼우와 17년 2월 10일자[87]


내 살 속으로 뻗은 어둠의 긴 뿌리가

천하에 마음 두지 않는

무변(無邊)의 바람으로 풀린 세월이면

스치고 가리

내세의 어느 굽이

호젓하게 피었을 늦가을 한 송이.

─ 기다하라 고우운사이, 『인적』에서[88]


얼마 전에 중화민국 산악회에서 에베레스또 산을 원래의 서장(西藏) 이름인 '초모룽마(株穆朗馬)'로 고쳐 부르자고 제안했다. 국내의 거의 모든 신문과 잡지에서 이것을 한담거리로 여긴 것을 보고 실망스러웠었는데, 달포가 되도록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도 그 문제를 거론하지 않는 것을 보고는 암담한 마음마저 든다.

'에베레스또'라는 이름은 영국의 인도 총독부 소속 측량가였던 조지 에베레스또(1790~1866)로부터 나왔다. 이 지구에서 가장 높고 장엄한 아름다움을 지닌 산에 영국의 인도 식민지 통치 기구의 사소한 관리였던 사람의 이름은, 좋게 얘기해서, 어울리지 않는다.

'초모룽마'는 여신(女神)을 뜻하는 이름이다. 푸른 하늘 아래 만년설을 옷으로 두르고 우뚝선 그 장엄한 아름다움에 얼마나 어울리는 이름인가.

부끄럽게도 그 산에 제 이름을 돌려주자는 제안은 동양 사람이 아니라 서양 사람이 먼저 했다. 서전(瑞典)의 동양 탐험가 스벤 안다스 헤딘(1865~1952)은 불란서의 기독교 포교 단체인 파리 외방 선교회(巴里外邦宣敎會)가 1733년에 간행한 지도에 '초모룽마'라는 이름이 쓰인 것을 발견하고, 이 이름을 쓸 것을 주장했었다. 그러나 그 주장은 서양 여러 나라들에 의해, 특히 서장에 대해 영토적 야심을 품고 있었던 영국에 의해, 거부되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본은 동양의 지도자'라는 말을 즐겨 한다. 그러나 지도자에겐 권위와 아울러 책임도 따르는 법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기 나라가 과연 동양을 위해서 무엇을 했는지, 서양이 자기 나라를 열강의 일원으로 받아들여 준 것에 감지덕지해서 자신의 역사적 위치를 잊고 있는 것은 아닌지, 어째서 동양의 어떤 나라도 일본의 지도적 위치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지, 깊이 반성해야 될 것이다. 동양을 휩쓸었던 서양의 약탈적 제국주의 물결이 멈칫해지고 동양의 전통적 가치와 문물이 소생하는 지금, '에베레스또'를 '초모룽마'로 바꾸자는 이웃 나라의 제의가 신문이나 잡지에 한담거리로 나오고 국민들의 무관심 속에 묻히는 한, 동양에서는 유일한 국제연맹의 상임 이사국(理事國)이고, 핵 무기로 무장한 이백만 명이 넘는 군대와 세계에서 세째로 부유한 경계를 가졌다고 해도, 일본이 '동양의 지도자'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 사노 히사이찌, 『독사수필』에서[89]



2.12. 십 이 월[편집]



내 넋의 뿌리를 갉으며 때를 기다리는

징그러운 몸뚱아리의 틈입자,

무엇으로 달래야 하나,

갈쿠리 입을 한 그 시퍼런 벌레.

멀지 않아 오리라,

소름돋는 살은 속삭인다,

멀지 않아 오리라,

만삭(滿朔)의 달을 향해 진저리치는 여인들

그 깊은 아랫도리를 갯내로 질펀하게 적시는

암홍(暗紅)의 달을 향해

입술에 선지를 바르고

검은 무지개 선 날개를 펄럭이며

변신한 벌레가 내 두개(頭蓋)를 열고 나오는

소리 죽은 밤이.

─ 기다하라 고우운사이, 『인적』에서[90]


기다려야 할 여인들을

그들의 애틋한 눈길을 떨친 이것은

선언, 결별의 선언,

등줄기에 쌓이는 외로움을 검은 돛으로 올리고

나의 젊은 알렉산드리아를 찾아가는

불귀의 뱃길.

─ 기다하라 고우운사이, 『인적』에서[91]


신도 과거는 바꾸지 못한다고 한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것은, 아마도 우주 그 자체를 빼놓고는, 자신보다 큰 어떤 체계의 한 부분을 이룬다. 그러므로 과거의 어느 것도 자신이 그 한 부분을 이룰 체계가 형성되어 가는 동안에는 확정되지 않은 것이다. 다만 가능성의 영역에 머무를 따름이다. 바로 그것이 '과거를 규정하는 것은 미래다'라는 명제가 뜻하는 것이다.

역사는 씌어지는 것이 아니다. 역사는 고쳐 씌어지는 것이다.

─ 다까노 다쯔끼찌 (高野達吉), 『도우꾜우, 쇼우와 61년의 겨울』에서[92]


3. 본문에서 인용된 가공의 작품들[편집]



3.1. 일 월[편집]


일중 정상 회담에 거는 우리의 기대

그동안 여러 번 거론되었으나 실현되지 않았던 일중 정상 회담이 마침내 실현 단계에 있다는 소식에 접하고, 우리는 크게 기뻐하며 그 결과에 대해 기대를 거는 바다. 아울러 우리는 과감하게 결단을 내려 회담 추진을 선언한 장세빈(張世斌) 중화민국[93]

총통과 남경(南京)까지 가서라도 현안 문제들을 허심탄회하게 의론하겠다고 국제 정치가다운 면모를 보인 아베 하루노리(阿部治憲) 수상에게 경의를 표하는 바다.

두말할 나위도 없이, 일본 제국과 중화민국은 동아(東亞)의 두 주역이다. 인구 ‧ 영토 ‧ 경제력 ‧ 군사력 ‧ 문화 수준 등 모든 면에서 두 나라가 차지하는 비중은 거의 절대적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두 나라가 공존 공영을 모색하는 일은 비단 두 나라만이 아니라 전체 동아에 중요한 것이다. 특히 두 나라의 북방에는 세계 적화(赤化)를 공언하고 있는 노서아와 그 괴뢰인 지나 공산당 정권이 있다는 사실을 두 나라의 국민들은 잠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두 나라 사이의 관계를 소원하게 한 것은 소위 '만주국 문제'였다. 중화민국이 만주국을 승인하지 않는 한 두 나라 사이의 관계는 가까와질 수 없었다. 중화민국 정부가 마침내 만주국의 존재를 인정하게 된 것은 만시지탄의 감이 있지만 다행스러운 일이다.

만주국은 만주족이 중심이 된 나라로, 원래 그 본거지인 만주를 그 영토로 하는 역사적 정통성을 지닌 나라다. 청조(淸朝)의 전신인 후금(後金) 제국이 성립된 것이 1616년, 명조(明朝)를 멸하고 북경에 입성한 것이 1644년, 중화민국에 의해 청조가 망한 것이 1912년이니, 만주족은 근 삼백 년 동안 중국 대륙의 주인이었다. 그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宣統帝)가 고토(故土)에 돌아와 새로운 나라를 세운 것은 부조(父祖)의 유산을 되찾은 것이며, 이제 제2대 황제 후강희제(後康熙帝)가 유업을 계승하여 만주국 왕조는 그 영속성을 과시하고 있다. 더우기 지난 반세기 동안 '오족 협화(五族協和)'와 '왕도 낙토(王道樂土)'를 국시로 하여 선정을 편 결과, 안으로는 일익 부강해지고 밖으로는 국제 사회에서 어엿한 주권 국가로 인정받게 되었다. 1933년 건국 이래 독일 ‧ 교황청 ‧ 이탈리아 ‧ 미국 등 53개국으로부터 승인을 받은 것이 저간의 사정을 말해 주는 것이다.

아무쪼록 다음 달에 남경에서 열릴 두 나라의 정상 회담이 소기의 성과를 거두어 동아 번영의 기초가 되기를 기원하는 바다. 아울러 편견에 사로잡혀 만주국의 엄연한 존재를 굳이 외면해 온 나라들도 이제는 현실을 정확하게 인식하여 만주국을 승인함으로써 동아의 국제 질서가 탄탄하게 자리잡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 『도우꾜우 타임즈』, 1987년 1월 사설 「일중 정상 회담에 거는 우리의 기대」에서[94]


서 장

메이지 42년 10월 26일 추밀원(樞密院) 의장 이또우 히로부미 공작은 조선인 자객 안주우공(安重根)이 쏜 부라우닝 권총 탄환 세 발을 가슴에 맞고 만주 합이빈(哈爾濱) 역두에서 69세를 일기로 운명하였다. ⋯⋯

⋯⋯ 어떻게 보면, 이 사건은 추밀원 의장이라는 비교적 한가한 직책을 가진 한 원로 정치인의 죽음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또우 공작은 왕정 복고와 메이지 유신 이래 일본을 이끈 가장 탁월한 지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고, 원숙한 나이에 갑자기 찾아 온 그의 죽음은 일본에게는 큰 손실이었다. 그리고 그의 죽음은 훌륭한 정치 지도자 한 사람이 일본의 정치 무대에서 사라졌다는 의미 외에도 또 하나의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원래 이또우 공작은 매사를 순리로써 대하려고 애쓴 사람이었다. 그는 도꾸가와 막부(德川幕府)에 대한 무력 투쟁으로 정치의 첫발을 내디딘 사람답지 않게, 일을 무리하게 힘으로 추진하는 것을 즐겨 하지 않았다. 메이지 정부에서 실권을 쥐었던 '겐로우(元老)'들 가운데서는 맨 먼저 정당 정치의 장래를 예견하고 〈입헌제정당(立憲帝政黨)〉을 설립한 것, 거의 혼자 힘으로 제국 헌법을 제정한 것, 해외 출병에 언제나 신중했던 것 등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그는 언제나 소위 온건파에 속했다.

그가 갑작스럽게 죽자, 그를 중심으로 한 온건파는 그 구심점을 잃었고 정부에서는 야마가따 아리또모(山縣有朋) 공작을 중심으로 하는 강경파가 득세하기 시작했다. 야마가따 공작은 육군의 창설에 지대한 공로가 있는 제국 육군의 대부(代父)였고, 그의 지도 아래 군부, 특히 육군은 내각에 대항하는 독자적 세력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

─ 다까노 다쯔끼찌 (高野達吉), 『도우꾜우(東京), 쇼우와(昭和) 61년의 겨울』에서[95]


쇼우와 9년에는 만주국이 성립되었다⋯⋯.

쇼우와 17년에는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다⋯⋯.

쇼우와 19년 일본은 미국과 싸우기로 결정하고⋯⋯.

쇼우와 22년 미국은 가고시마와 나가사끼에 원자폭탄을 투하⋯⋯.

쇼우와 24년 강화조약에 따라 일본의 영토는 일본 열도 가운데 혼슈우(本州), 시고꾸(四國), 규우슈우(九州)의 삼 개 도서로 국한되었다. 만주국의 영토와 대만은 중화민국에 통합되고, 남가라후또(南樺太), 찌시마 열도(千島列島), 홋까이도우는 노서아에 할양되었고, 오끼나와(沖縄)와 태평양의 제도(諸島)들은 미국에 할양되었다. 조선은 국제연맹의 신탁 통치에 맡겨졌다⋯⋯.

쇼우와 26년 조선에서는 국제 연맹의 주관 아래 총선거가 실시되어, 독립 정부가 출현하였다⋯⋯.

─ 다까노 다쯔끼찌 (高野達吉), 『도우꾜우(東京), 쇼우와(昭和) 61년의 겨울』 에서[96]


만리의 가을

하늘가에 맑은 기운으로 서리고

돛이 부풀어도 늙은 어부는

노래가 없느니

천리 세또(瀬戸)의 한 끝

느지막이 깨어난 주막에선

지극한 작부가 쉰 목청으로 부른다

아득한 어느 세월을.

먼 길 내지에 와서

물결에 이렇게 손을 적시면,

내 고향은 북국

나뭇잎새 성기어진 반도의 기슭,

천 년 지나고야 슬픔은 비로소

오롯해지는가

바다는 문득

시린 빛으로 가라앉는다.

세월의 먼지를 삼키고서

오히려 푸르른지

물결은 저리 밀려 오는데

무심한 몸짓으로 밀려 오는데

어느 아득한 세상의

스산한 바람 속으로 떠도는가

전설 뒤로 숨은 임.

왕손귀불귀(王孫歸不歸).

─ 기노시다 히데요(木下英世), 「단노우라 회고」에서[97]

[98]



3.2. 이 월[편집]



일본 역사에서 특이한 점들 가운데 하나는 민중 반란의 역할이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일본 역사를 통독한 외국인들이 흔히 지적하는 점이다.

피지배 계급에 의한 사회적 변혁의 시도는 역사를 형성한 주요한 조류들 가운데 하나였다. 이 조류가 크게 일렁였을 때, 그것은 민란(民亂)이라고 역사에 기록된 민중 반란의 형태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점은 동양에서나 서양에서나 마찬가지지만, 동양에서 더욱 두드러졌다.

중국의 역사를 어느 정도 공부한 사람이면 누구나 중국에서 민중 반란이 차지하는 비중에 놀라게 될 것이다. 민중 반란은 줄기찼고, 대부분의 왕조들은 민중 반란에 의해 무너졌다. 진(秦) 제국을 무너뜨린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의 난〉 이래로 후한(後漢) 말엽의 〈황건적(黃巾賊)의 난〉, 당(唐) 말엽의 〈황소(黃巢)의 난〉, 원(元) 말엽의 〈홍건적(紅巾賊)의 난〉, 명(明) 말엽의 고영상(高迎祥) ‧ 장헌충(張獻忠)이자성(李自成) 등이 이끈 유구(流寇), 청(淸) 말엽의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난〉 등이 모두 당시 중국 대륙을 지배하고 있던 왕조를 무너뜨리는 데 직접적이고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특히 이들 민중 반란은 사회 구조를 완전히 바꾸는 데에 목표를 두었으니, 진승이 기병(起兵)하면서 부르짖은 '임금과 제후, 장군과 재상이 어찌 씨가 있겠는가? (王侯將相寧有種乎)'는 그 뒤 모든 민중 반란의 구호였고, 대부분의 반란 지도자들은 왕 또는 황제를 칭하여 정권을 장악하려고 했다.

중국에서만 그러했던 것은 아니다. 월남(越南)에서는 18세기 후반에 유명한 〈떠이싼당(西山黨)〉의 성공적 반란이 있었다. 심지어 조선에서도 19세기 후반에 〈동학란(東學亂)〉이 있었으니, 조선 정부 자체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수습할 수 없어 일본과 청의 출병으로 수습해야만 했었다.⋯⋯

─ 사노 히사이찌(佐藤壽一), 『독사수필(讀史隨筆)』에서[99]


그러나 일본에는 〈잇끼(一揆)〉라는 형태의 집단 항의가 있었을 뿐이다. 다른 나라의 민중 반란이 사회 구조의 근본적 개혁을 목표로 하였음에 비해, 잇끼는 지배 계급의 수탈이 지나친 것에 대한 항의였을 따름이다. 지배 계급의 수탈 자체에 대해서 항의한 것이 아니고, 그 수탈의 정도가 지나쳐서 생존에 위협이 되는 것에 대해서 항의한 것이었다. 따라서 소위 〈도꾸세이레이(徳政令)〉의 선포에 의한 부채의 탕감이 잇끼의 목표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또한 잇끼가 전국적으로 파급되어 통일된 운동으로 발전한 적이 없었다. 잇끼들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주장이 혁명적이었다고 일컬어지는 1485년의 〈야마시로고꾸 잇끼(山城國一揆)〉도 조그만 번국(藩國)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다른 곳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고, 그나마 그 지도층이 자진해서 지배 계급에 흡수됨으로써 와해되고 말았다.

이와 같이 일본 역사에서 민중 반란의 역할이 거의 없었던 사실은 무엇에 기인하는가? 그리고 그 사실은 일본 역사의 전개, 특히 개화가 이후의 역사의 전개에 있어서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이 두 질문들은 무척 흥미롭고 중요한 질문들이다.

─ 사노 히사이찌(佐藤壽一), 『독사수필(讀史隨筆)』에서[100]


이 글은 그런 질문들에 대해 답변하려고 씌어진 글이 아니다. 이 질문들에 대한 답변은 쉽지도 간단하지도 않다. 나는 그러한 질문들이 아직도 답변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었을 따름이다. 왜냐하면 나는 그 질문들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 사회의 어지러운 현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문제들과 관련하여 흥미롭고 시사하는 바가 많은 사실이 하나 있다. 그것은 일본이 세계 역사에서 드물게 보는 폐쇄적 신분 제도를 가졌었다는 점이다. 동양에서의 신분 계급은 전통적으로 유학의 영향을 받아 대략 사농공상의 네 계층으로 나뉘어졌다. 성리학이 유학의 주류를 이룬 이래 이와 같은 신분 계층의 구분은 더욱 엄격하여졌다.

한편으로는 과거 제도가 일찍 발명되어 이와 같은 신분 제도의 모순을 완화시켰다. 과거를 통하여 사회의 하층 계급에, 적어도 중간층 계급에 속한 사람들이 능력에 따라 정치 권력을 잡은 상층 계급으로 신분적 상승을 할 수 있는 장치가 마련된 것이었다. 과거는 신분 제도의 모순으로 발생하는 파괴적인 힘들을 사회에 유용한 방향으로 배출시키는 훌륭한 안전판이었다.

동양의 다른 나라들과 달리, 일본에서는 과거 제도가 시행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동양에서 가장 안정된 사회였다. 성리학이 국가의 공식적 이념 체계가 되어 동양의 다른 나라와 시대에선 보지 못했던 엄격한 사농공상의 신분 제도가 확립되었던 도꾸가와 막부(德川幕府) 시대가 역설적으로 일본 역사에 있어 가장 안정된 시대였다.

도꾸가와 막부 시대를 대표하는 특징 가운데 하나로 흔히 도시 상인 계층인 쪼우닝(町人)들에 의해 이룩된 〈쪼우닝 문화〉를 꼽는다. 그러나 자신들의 독특한 문화권을 이룰 만큼 성장한 쪼우닝들이 신분적 제약을 타파하려는 노력을 한 적은 거의 없었다. 당시 지배 계급인 무샤(武者)들은 아래 계급의 사람이 모욕적 언동을 하였을 때는 〈부레이우찌(無禮討)〉라는 제도에 의해 재판 없이 그 자리에서 목을 벨 수 있었고, 주기적으로 상인들에게 진 빚을 일방적으로 파기하였고, 〈겟쇼(闕所)〉라는 제도에 의해 사치가 분수를 넘었다는 명목으로 상인들의 재산을 몰수하였다.

대부분의 사회에서 경제적 능력은 정치적 능력과 상응한다. 그러나 도꾸가와 막부 시대의 쪼우닝들은 그들의 재력을 권력 획득의 수단으로 삼지 못하였다. 아니 삼으려는 노력조차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분적 한계에 부딪칠 때마다, 극도의 사치로 애써 모은 재산을 단숨에 낭비하는 패배주의적 행동 양태를 보여 주었다. 위에서 기술한 바와 같은 지배 계급의 불법적 횡포는 세계 역사에서 드문 일이다. 상당히 발달된, 더구나 활발한 해외 무역에 종사한, 상인 계급이 그와 같은 횡포에 대해 단 한 번도 항거하지 않았다는 것은 세계 역사에서 유례가 없는 일이다.

개인적 능력과 덕성이 신분에 어느 정도 연관성을 가졌던 중국, 또는 월남이나 조선에서도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었을까? 이 질문에 대해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 사노 히사이찌(佐藤壽一), 『독사수필(讀史隨筆)』에서[101]


환경보호과(環境保護課)는 '게이조우의 산성우(酸性雨)가 우려할 만한 수준'이라는 조우다이(城大) 오오야마 모(大山某) 교수의 발표에 대해 언성을 높여 불만을 토로, 환경보호과의 한 관계자는 13일 '빗물을 받는 데 사용한 합성수지 용기는 산도(酸度)를 높인다'라고 말하면서 '산성우의 측정에 필요한 기본 설비조차 갖추지 못한 처지에, 인기만 노린 그와 같은 행위는 지탄을 받아야 한다'고 흥분.

한편 이 말을 전해 들은 그 교수는 '본의아니게 물의를 일으키고 당국에 심려를 끼쳐, 죄송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이번 시험에 사용한 측정 기구가 문제되는 것은 아니라는 소신에는 변함이 없다'고 해명⋯⋯.

─ 모 신문 사회면 기사 중 「시험 기구 논쟁」 에서[102]


세월에 씻겨 호수로 고인

파아란 눈

그 언저리에 간간 내린

부드러운 선들의 어스름─

인연의 먼 물가

하염없는 눈으로도

내가 이렇게 그대의 어깨 위에 기원하는

포근한 눈으로도

부드러워지지 않을 모진 세월이

어느 험한 세상엔들 있으랴.

─ 기노시다 히데요(木下英世), 「설후(雪後)」 에서[103]

[104]


상민(上民) 437,803명

중민(中民) 9,483,202명

소민(小民) 25,119,626명

세민(細民) 11,934,871명

궁민(窮民) 4,864,411명

표랑자(漂浪者) 및 걸인(乞人) 210,910명

계 52,040,823명

─ 쇼우와 58년도판 『조선 총독부 행정 연감』, 「사회 부문」에서[105]

[106]


조선의 시가 문학의 기원은 조선의 역사가 오랜 만큼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조선(古朝鮮) 때의 작품인 「공후인(箜篌引)」이 전해 내려오니, 조선 시가의 역사는 적어도 이천 년 이상이 된다. ⋯⋯

─ 후지와라 다까지까(藤原孝第) 편, 『조선 고시가전(朝鮮 古詩歌選)』의 서문에서[107]


어느 민족의 문화적 유산이든, 그것이 사라지는 것은 슬프고 아쉬운 일이다. 조선과 같이 일찍부터 문화가 발달했고 이웃 나라의 문화 형성에 크게 기여했던 나라의 그것이 사라지는 것은 더욱 그렇다. 조선이 일본에 합병된 지 십 년이 채 못 되었는데 벌써 조선의 고유 문화는 많은 손상을 입어서, 뜻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다. 이렇게 가다가는 오십 년 안쪽에 조선의 문화는 폐허로 남을 것이라는 얘기는 이미 기우라고 할 수 없다. 정치적인 면에서 조선인들을 교화하여 조선을 일본에 동화시켜야 할 필요성은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 동화 정책이 문화적 말살 정책으로 둔갑해서는 안 될 것이다. 더우기 조선은 이미 일본 제국의 일부가 되었고, 그 문화적 전통은 일본 제국의 자산이 되었다. 우리로서는 상속한 유산을 스스로 파괴하는 어리석음을 당연히 피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 여러 가지 어려움을 무릅쓰고 이 책을 내어놓는 뜻이 있다. ⋯⋯

─ 후지와라 다까지까(藤原孝第) 편, 『조선 고시가전(朝鮮 古詩歌選)』의 서문에서[108]



3.3. 삼 월[편집]



총독부는 3월 1일자로 총독부령 제3217호 〈기업 사채의 처리에 관한 법령〉을 선포하여, 기업 사채를 전면 동결시켰다. 이것은 기업들이 사채의 중압에서 벗어나 회생할 수 있도록 하는 조치로서, 주요한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3월 1일 현재로 기업이 차용한 모든 사채에 관하여 이와 관련된 모든 거래를 금한다. 따라서 사채의 원금 및 이자의 지불 또는 상계는 금지된다.

2. 모든 기업은 3월 1일 현재로 부담하고 있는 모든 사채를 조선 세무청에 3월 7일까지 신고하여야 한다.

3. 신고된 사채에 대해서는 연리 10퍼센트로 20년에 걸쳐 원리금을 분할 상환하도록 한다. 단 2월 28일까지 발생된 이자에 관해서는 당사자간의 계약 조건대로 처리한다. 기타 상환에 관한 세부 사항들은 추후 별도로 정한다.

4. 본 법령의 규정을 어긴 자는 조선 총독부령 제1513호 〈경제 안정에 관한 특별 법령〉의 규정에 준하여 처벌한다.

5. 위의 조치에 대한 보완 조치로 총독부는 동일자로 은행 금리를 현행 예금 12퍼센트, 대출 15퍼센트에서 각각 10퍼센트와 13퍼센트로 인하하였다.

나까무라 마사히사(中村正久) 지신다이(慈信臺) 대변인은 위와 같은 조치를 발표하면서, '이 조치는 세계적인 불경기로 어려운 상황에 놓인 조선의 기업들로 하여금 사채의 중압에서 벗어나 기사 회생토록 하는 데 그 목적이 있으며, 아울러 건전한 경제 질서 확립에 암적 존재가 되어 온 지하 경제를 양성화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믿는다'라고 말했다.

─ 『게이조우 마이니찌 신문(京城每日新聞)』, 「기업 사채 전면 동결(企業私債全面凍結) : 기업의 기사 회생을 위한 극적 처방」에서[109]



3.4. 사 월[편집]



네 수줍은 꽃술로

날 느껴 보렴,

검은 머리로 덜미를 감춘 소녀야.

지난 여름엔 내가 무엇이었나,

살며시 감고서

내 넋의 흘러간 물살을 느껴 보렴

먼 파도 소리로.

파란 숨결 깃든 네 씨방

은은한 등불로 날 느껴 보렴.

무엇이 될 수 있다고,

아직은 무엇이 될 수 있다고,

속삭여 보렴 네 보드라운 꽃술로.

네 꽃핌의 보오얀 신비로

내 마른 줄기를 감싸 주렴.

마지막 봄철이 아픔으로 익으면

열려 오는 살

열리는 땀방울들이 맑으리.

껍질이 된 세월 훌쩍 벗어 던지고

정숙한 네 눈길 앞에 문득

자랑스럽게 벗고 설 수 있도록

도와주렴. 날 도와주렴.

─ 기다하라 고우운사이(北原耕雲齋), 「화불어(花不語)」에서[110]

[111]


⋯⋯독립한 식민지들은, 거의 예외 없이, 정치적 독재, 사회적 혼란과 분열, 경제적 퇴보와 빈부 격차의 심화, 그리고 문화적 궁핍을 맛보고 있다. 더우기 일부 식민지들은 종주국에 너무 동화되었거나 경제적 ‧ 문화적으로 종속되어, 주민들이 독립을 원하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와 같은 점들을 고려해 볼 때, 아무런 준비 없이 식민지들을 독립시키는 것은 비인도적인 일일 뿐이라는 주장에는 분명히 일리가 있다. 그러한 주장이 강력하게 제기될 수 있는 곳들로 영국의 로데시아나이제리아, 불란서의 코친차이나와 세네갈, 백이의(白耳義)콩고, 포도아(葡萄牙)의 동아프리카, 노서아의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미국의 비율빈, 일본의 조선을 들 수 있다.⋯⋯

─ 『뉴스월드』, 「식민지 문제 : 쉬운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 식민지 문제가 세계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에서[112]

[113]


⋯⋯따라서 비록 식민지들이 전처럼 다스리기 쉽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서양 열강의 식민 제국들이 곧 와해되리라고 보는 것은 성급한 생각이다. 오히려 21세기 초엽까지는 식민 제국들이 현재의 모습대로 유지되리라는 것이 이 방면에 정통한 전문가들[114]

의 거의 일치된 견해다. 그와 같은 사실이 식민지, 그리고 전세계에, 꼭 나쁜 일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바로 그 점에 식민지의 비극이 있는 것이다.

─ 『뉴스월드』, 「식민지 문제 : 쉬운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 식민지 문제가 세계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에서 [115]


어느 망명 정부의 황혼

『상해공론(上海公論)』의 편집인이며 『뉴스월드』의 고정 기고가인 더글라스 로렌스는 작년에 출간된 그의 『식민지』로 이름을 얻었다. 그는 『뉴스월드』의 요청으로, 이번 특집과 관련하여 상해 자유시(上海自由市)의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방문하였다. 아래의 글이 그의 방문기다.

상해 자유시 불란서 조계(租界) 마랑로(馬浪路) 보경리(普慶里)의 지저분한 뒷골목을 걷다 보면, 낡은 이층 건물의 창에 낯선 깃발이 내걸린 것을 볼 수 있다. 흰 바탕은 때에 절어 잿빛이 되었지만, 그 깃발이 적어도 무슨 회사나 다른 민간 단체의 깃발이 아님은 그것을 처음 보는 사람도 이내 느낄 수 있다. 한옆에 난 좁은 입구를 들어서서 좁고 어두운 계단을 따라 이층으로 올라가면, 구석방의 출입문 위에 조선어 ‧ 중국어, 그리고 불란서어로 〈대한민국 임시 정부〉라고 씌어진 간판이 걸려 있다. 문을 들어서면, 왼쪽 벽에 아까 본 깃발이 걸려 있고, 오른쪽에 머리를 짧게 깎은 젊은이의 바랜 사진이 걸려 있다. 그리 크지 않은 방에 조그만 나무 책상이 넷, 서류함이 셋 있고, 거기다가 한쪽 구석의 소파는 꽤나 커서, 방은 복잡한 느낌을 준다. 제법 푹신하게 보이는 소파는 가장 애용되는 가구인 듯 천이 해져서 군데군데 올이 드러나 있다. 이곳이 바로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청사인 것이다. 사천 년이 넘는 역사를 가졌다는 오천 만 조선 민족을 대표한다고 칭하는 정부의 청사로는, 아무리 망명 정부의 그것이라고는 하더라도, 좀 초라한 것이 사실이다.

필자가 들어서자, 소파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던 늙수그레한 남자 둘이 낯선 방문객에게 호기심어린 눈길을 보냈다. '청사'엔 그 두 사람뿐이었다. 둘 가운데 한 사람이 이 청사를 실제로 관장하는 비서장(祕書長) 김두산이다. 필자가 찾아온 목적을 말하자, 김은 반갑게 웃으면서 소파로 필자를 안내했다.

김에 따르면, 망명 정부가 언제나 이렇게 초라했던 것은 아니었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은 1910년이었는데, 일본의 압력으로 아들에게 양위했던 조선 황제 고종(高宗)이 1917년 4월 의심스러운 상황에서 죽었을 때, 조선 본토에서는 거국적 시위 운동이 일어났고, 그 운동이 결실한 것이 바로 이 상해 임시 정부(약칭 〈임정〉)였다. 〈임정〉은 한때 조선 반도 전역에 연락 조직을 두고, 세금도 징수하였다 한다. 그러나 일본의 조선 통치가 점점 강화되면서, 〈임정〉은 설 땅을 잃기 시작하였고, 급기야는 커다란 이름만을 유산으로 지닌 조그만 폭력 단체로 전락해 버렸다. 결정적 타격은 1940년대초에 일본과 미국이 〈만주국 문제〉에 대해 타협점을 찾아 일본이 동아세아의 강국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히한 것이었다. 그 뒤로 〈임정〉은 일본인에 대한 테러리즘으로 그 명맥을 유지해 왔다. 그러나 그것도 1973년 상해 중산(中山) 국제 공항에서의 〈일본 제국 항공사〉 소속 여객기에 대한 공격으로 불란서 당국에 의해 수뇌들이 체포되자 끝나 버렸다.

〈임정〉이 당면한 장벽은 무엇보다도 상해가 지리적으로 조선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점이다. 〈임정〉이 상해에 자리잡은 이유들 가운데 하나는 강력한 일본의 세력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야 하는 필요성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임정〉이 그 국민들로부터 유리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 사실은 〈임정〉의 구성 요원들의 출생지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각료급인 부장(部長)들 가운데 조선 반도에서 태어난 사람은 단 셋뿐이고, 나머지는 상해 또는 다른 중국 도시들에서 태어났다. 김도 그 점을 시인했다. "〈임정〉의 많은 요원들이, 나 자신을 포함해서, 조선을 모릅니다. (그의 아버지가 임정의 외교부장을 지낸 김은 상해에서 태어났다.) 조선에서 탈출한 사람이 우리 조직에 참여한 것은 1963년이 마지막이었읍니다. 일본의 조선 통치 조직이 하도 악랄해서, 빠져 나오기도, 잠입하기도 힘듭니다." 이와 같은 사정은 국민당(國民黨)의 중화민국 정부가 일본과 공식적으로 화해하게 되면 더욱 악화될 것이다. 중화민국 정부는 지금까지 〈임정〉에 가장 큰 지원을 해 준 정부다.

김은 조선 독립의 전망에 대해 현재로서는 낙관적이 아님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는 애써 비관적이 아님을 강조했다. 그는 〈임정〉은 당분간은 본토에서 잊혀진 역사와 언어 같은 조선의 '정신'을 보존하여 후일을 기약할 계획이라고 밝히고, 현재 편찬중인 조선어 사전의 원고를 가리켰다.

뉘엿한 햇살이 창으로 들어와서, 벽에 걸린 사진을 비췄다. 1931년 일본 천황을 저격하려다가 실패하고 처형된 이봉창이란 테러리스트─김은 '지사(志士)'라고 불렀다─의 사진이라고 김은 설명했다. 반 세기 전에 활약한 테러리스트의 바랜 사진 아래서 이미 본토에서는 사라진 모국어의 사전을 편찬하는 궁기(窮氣) 들은 얼굴들을 대하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었다. 그것은 더 억센 이웃 민족에게 정복당한 한 민족의 황혼을 상징하는 슬픈 풍경이었다.

─ 『뉴스월드』, 「어느 망명 정부의 황혼」에서[116]


조선 : 동부 아세아의 중심부에 위치한 반도인 조선은 일본의 가장 중요한 해외 영토다. 만주와 노서아로부터 남쪽으로 뻗어 내린 조선 반도는 길이가 525마일이고 폭이 125 내지 200 마일에 이르는데, 북쪽은 압록강과 두만강, 남쪽은 조선 해협, 서쪽은 황해, 그리고 동쪽은 일본해로 경계를 삼는다. 5,400 마일에 이르는 해안선을 따라 약 3,500개의 섬들이 있으며, 면적은 85,543평방 마일이다.

'조용한 아침의 땅'으로 번역될 수 있는 조선은 이 왕조(1392~1910)가 사용한 이름이다. 일본이 조선을 합병했을 때 그들은 일본식 발음으로 나마자(羅馬字)로 'CHOSEN'이라고 적었으나, 조선 사람들의 발음은 'CHOSON'에 가깝다. 서양 이름인 코리아는 코료(코라이) 왕조(935~1392)로부터 유래하였으며, '높은 산들과 빛나는 강들의 땅'이라고 번역될 수 있는데, 이것은 반도의 모습을 적절하게 묘사한 것이다.⋯⋯

─ 1971년판 『브리태니카 백과사전』 중 「조선」 항목에서[117]


인종 : 근본적으로 조선인은 중국인이나 일본인과 같이 몽고 인종에 속한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일본인보다는 키가 크고, 북부 중국인보다는 작다.

언어 : 조선어는 터키어 ‧ 몽고어, 그리고 일본어와 같이 알타이 어족에 속한다. 중국의 문화적 영향은 문자에서 뚜렷하니, 조선인들은 오랫동안 중국 문자를 써 왔다. 조선인들은 중국 문자를 차용하여 자신들의 말을 적는 〈이두〉라는 표현 체계를 만들었는데, 15세기에 〈언문〉이라고 불리는 독자적 자모를 만들었다. 그러나 일본이 조선을 합병하여 일본어가 공용어가 된 뒤로 조선어는 점차 쓰이지 않게 되었다. 1920년대 후반에 추진된 강력한 일본의 동화 정책 아래 조선어는 급속히 쇠퇴하여, 1940년대 후반까지는 조선 반도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 1971년판 『브리태니카 백과사전』 중 「주민과 인구」 항목에서[118]



3.5. 오 월[편집]



지난 4일 도우꾜우 데이다이(東京帝大)게이오우 대학(慶應大學)에서 시작된 학생 시위는 점점 더 거세어져, 6일에는 도우꾜우에 있는 거의 모든 대학들로 파급되었다. 도우다이(東大)에서는 약 이천 명의 학생들이 교내에서 집회를 가진 다음, 가두로 진출하려다가 경찰의 제지를 받자, 정문을 사이에 두고 경찰과 싸움을 벌였다.⋯⋯학교 관계자들은, 이번 시위의 원인이 원인인 만큼, 다른 때와는 달리 대학가가 평온을 찾기 까지는 상당한 시일이 걸리리라는 견해를 조심스럽게 표명했다.⋯⋯

─ 모 신문 기사 중「도우꾜우 대학가 시위」에서[119]


대학가에 요원의 불길처럼 번지고 있는 금번 시위는 도우꾜우 데이다이(東京帝大) 인류학과 3학년 학생 우에다 시게루(上田茂) 군의 죽음에서 발단된 것이다. 그러면 우에다 군의 죽음의 진상은 무엇인가? 우에다 군의 죽음이 일반에게 알려진 것은 지난 4월 30일이었다. 경찰이 우에다 군의 가족에게 우에다 군이 4월 25일 사망하여 4월 27일 화장되었음을 통보한 것이었다. 경찰의 발표에 따르면, 우에다 군은 4월초의 시위를 주동한 혐의로 4월 22일 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찌요다(千代田) 경찰서에서 취조를 받던 중, 경찰의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삼층 화장실 창문을 열고 뛰어내려 자살하였다.⋯⋯

─ 모 신문 사회면 해설 기사 중「대학가 시위 전국 확산」에서[120]


다음은 도우꾜우 정가(政街) 소식입니다. 오늘 오전 호소까와 히데오(細川秀夫) 해군대신과 하또야마 세이끼(鳩山淸輝) 공군대신이 아베 하루노리(阿部治憲) 내각 총리대신에게 사표를 제출했읍니다. 해군성과 공군성 대변인들의 공동 발표문에 따르면, 호소까와 해상(海相)과 하또야마 공상(空相)은 오늘 오전 열시 아베 수상을 집무실로 방문하고 잠시 요담한 다음 사표를 제출하였는데, 두 대신들은 국내외 정세의 변화에 대한 정부의 대응이 미흡함을 절감하고 현재의 고식적 대책 대신 근본적 대책을 수립할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사임한 것이라고 합니다. 두 대신이 사임하게 된 직접적 동기는 최근의 학원 사태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풀이되고 있읍니다. 후임자의 추천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으나, 대변인들의 공동 기자 회견에서의 발언 내용으로 보아, 해군과 공군에서는 당분간 후임자를 추천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읍니다. 수상관저와 관방성(官房省)에서는 논평 없이 사표 접수 사실만을 확인하였는데, 두 대신들의 사표는 곧 수리될 것으로 보입니다. 한편 육군성에서는 즉각적인 논평을 하지 않았으나, 곧 다나까 고오끼(田中弘毅) 육군대신의 거취가 밝혀지리라는 것이 도우꾜우 관측통들의 견해입니다. 이번 해상과 공상의 사임에 대하여는 오늘밤 열한시 본 방송의 〈열한시의 초대석〉 시간에 자세한 해설이 있을 예정입니다. 많은 시청이 있으시길 바랍니다. 다음에는 경제 소식입니다. 조선은행의 발표에 따르면, 올해 일사분기의 경제 성장은 사점오 파센또가 될 것으로⋯⋯.

─ 게이조우 제일방송(제1방송)「9시 종합 뉴스」에서[121]


5월 19일 오전 중의원은 내각 총리대신 후보로 일본 공화당의 사또우 게이스꼐 의원을 선출하였다. 재적 485명 가운데 481명이 출석하여 9시 정각에 열린 오늘의 회의에서 사또우 의원은 찬성 372, 반대 2, 기권 107로 당선되었다. 사또우 의원은 다이쇼우 14년생(63세)으로 쇼우와 21년에 공군병학교를 졸업, 임관한 다음 공군의 요직들을 두루 거쳐, 공군 군령부 총장을 지냈다. 55년에 폐편한 다음 주영 대사(駐英大使)를 지냈고, 57년 총선에서 시즈오까(靜岡)의 공화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어 정계에 진출하였다. 61년에 재선되었으며, 현재 공화당의 당무위원이며⋯⋯

─ 『게이조우 마이니찌 신문(京城每日新聞)』,「후임 수상에 사또우 게이스께(佐藤啓介) 의원」에서[122]



3.6. 유 월[편집]



'1940년'하면 얼핏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없다. '쇼우와 15년'으로 고쳐놓아 봐도 그렇다. 누구도 자신이 태어나기 전의 어떤 해에 대해 선명한 인상을 갖기는 어려울 것이다. 현대 일본의 시작인 메이지 원년 같은 역사적 시기에 대해서도 나는 무슨 또렷한 느낌을 갖고 있지 않다.

1940년엔 나의 아버지께서는 세 살이셨고, 어머니께선 겨우 돌이 지난 아기이셨다. 그리고 나의 탄생은 아득한 스물 네 해 뒤에 일어날 사건이었다.

나에겐 1940년은 그런 해다. 기억력이 좋지 못한 나로서는 유감스럽게도 역사 교과서 연표에 나오는 사실들을 적을 수가 없다. 다만 그 해에 〈서반아 내란〉이 끝났다는 것을 기억할 따름이다. 전쟁은 언제나 비참하고, 내란은 더욱 비참하다고 한다. 그러나 그 내란은 무척 비참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비극적이었다. 그 전쟁은 이 세상에선 정의로운 자들이 패배하고 약한 자들이 승리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결코 드물지 않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에게 일깨워 준 사건이었다. 또 있다─구레이아무 구린의 『권력과 영광』이 그 해에 출간되었다는 것이 마악 생각났다. 별것을 다 기억한다고 할지 몰라서, 얼마 전에 읽었기 때문에 기억한다는 것을 덧붙여 둔다.

─ 이또우 소우끼(伊東桑姬), 「1940년에 대해 알거나, 느끼거나, 생각하는 것이 있으면, 적으시오」에 대한 답변[123]

[124]


쇼우고우(小空) 스님 입적

조선 불교 연맹(朝鮮佛敎聯盟) 고문을 지낸 쇼우고우 스님이 6월 26일 세쯔뽀우상(雪峰山) 샤꾸오우지(釋王寺)에서 입적하였다. 향년 76세. 소우앙(草庵) 스님에게서 법을 받은 쇼우고우 스님은 일찍부터 학승으로 이름을 떨쳤고, 후학 양성에 큰 공헌을 하였다. 스님은 또한 시집 『세한(歲寒)』을 낸 시인이기도 하였으며, 특히 한시에 조예가 깊었다.⋯⋯

─ 신문 사회면 기사 중 「쇼우고우(小空) 스님 입적」에서[125]

[126]



3.7. 칠 월[편집]


칼날로 걸린 달

저승의 닭이 길게 울었다.

허술한 주막

골방에서 깨어난 중년의 나그네

한 생애가 닫힌

어둑한 하늘 속

인연의 실뿌리는 오늘도

굽이굽이 뻗는다.

감발하고 뜨락에 내려서면

그래도 산뜻한 새벽

어느 아득한 전세(前世)의

한 송이 기억이냐,

우물가 울타리 아래

이슬 머금은 백일홍

반갑다고

낯익은 얼굴을 내민다.[127]

─ 기노시다 히데요(木下英世), 「해후(邂逅)」 에서[128]


다시 한번 긴급 뉴스를 말씀드리겠읍니다. 오늘 새벽 애국 황군은 나약한 매국 외교로 국익을 해치고 일부 난동 세력의 질서 파괴 행위를 방관하여 사회적 혼란을 야기시킨 사또우 게이스께 내각의 실정으로부터 국가를 구하기 위해 과감히 궐기하였읍니다. 애국 황군은 모든 국가 권력을 장악하고, 당분간 국사를 처리할 〈호국군사위원회〉를 설치하였읍니다. 다음은 오늘 새벽 호국군사위원회가 내건 공약입니다. '첫째, 일부 불순 세력에 의해 야기된 사회적 혼란을 신속히 극복하고 법과 질서를 회복시켜, 국기(國基)를 다진다. 둘째, 황실의 안녕과 국민의 복리를 위해 최선을 다한다. 세째, 방공(防共) 정책을 강력히 추진하고, 미국, 영국, 불란서, 독일 등 자유주의 우방과의 전통적 우호 관계를 더욱 긴밀하게 한다. 네째, 세계 평화를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되, 해외에 있어서의 일본 제국의 모든 이권을 확고히 수호하며, 일본 제국에 불이익을 초래하려는 어떤 기도도 단호하게 분쇄한다. 특히 매국 사또우 정권에서 지금까지 지나 공산당(支那共産黨) 괴뢰 정권과 추진해 온 휴전 협상을 백지화하고, 만몽(滿蒙) 지역에서 일본 제국의 이익선(利益線)이 보장될 수 있는 휴전만을 고려한다. 다섯째, 혼란이 극복되어 사회가 안정되고 해외에서 제국의 이익이 확보되면, 적절한 절차에 따라 조직된 내각에 전권을 이양하고 군으로 복귀하여, 국방의 신성한 임무를 계속 수행한다.' 이상은 호국군사위원회가 내건 공약입니다. 모든 국민들께서는 애국 황군이 위기에 처한 조국을 구하기 위해 궐기한 취지를 십분 이해하시어 호국군사위원회를 충심으로 지지하고, 조금도 동요함이 없이 각자 맡은 바에 충실하게 임하시길 바랍니다. 긴급 뉴스를 마칩니다. 여기는 도우꾜우 제일방송입니다.

─ 도우꾜우 제일방송(제1방송) 긴급 뉴스에서[129]


오늘 아침 일찍 일본에 정변이 일어났음. 육군측에서 무력으로 현 사또우 게이스께 정권을 전복시키고 권력을 장악한 다음, 호국군사위원회를 설치하였음. 이 과정에서 오늘 아침 2시와 3시 사이에 도우꾜우의 관청가에서 총격전이 있었음. 히도쯔바시 히로모또(一橋廣元) 육군 대장을 위원장으로 한 상기 위원회는 다음과 같은 공약을 내걸었음. '첫째, 일부 불순 세력에 의해 야기된 사회적 혼란을 신속히 극복하고 법과 질서를 회복시켜, 국기(國基)를 다진다. [⋯⋯] 다섯째, 적절한 절차에 따라 조직된 내각에 전권을 이양하고 군으로 복귀하여, 국방의 신성한 임무를 계속 수행한다.' 육군의 거사에 대해 공군측은 반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7시경에는 전폭기에 의한 두 차례의 공습이 있었음. 그러나 육군측의 거사는 성공적인 것으로 보이며, 현재 도우꾜우는 평온을 유지하고 있음. 놀랍게도 일본 천황은 7시경에 텔레비전 방송에 나와 이들의 거사를 추인하고 국민들의 지지를 호소했음.

─ 브라우넬, 「전문 번호 522」에서[130]


522호로 보고한 사항에 대한 추가임. 오늘 새벽에 있었던 관청가의 총격전은 나가따마찌의 수상 관저에서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음. 호국군사위원회의 공식 발표문에는 이번 거사가 '무혈'이었던 것으로 나와 있으나, 실제로는 상당수의 사상자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음. 공군 헌병을 주축으로 구성된 수상 관저 경비대는 거사 병력의 항복 권고를 거절하고 끝까지 저항하였음. 거사 병력은 부득이 전차를 동원하여 수상 관저를 점령하였으며, 경비대는 큰 피해를 입은 것으로 알려졌음. 사또우 수상은 처음에는 죽은 것으로 알려졌으나, 가벼운 부상만을 입은 것이 확인되었음. 현재 수상의 거처는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도우꾜우 근처의 육군 병영에 연금된 것으로 추측됨.

─ 브라우넬, 「전문 번호 523」에서[131]


523호의 추가임. 이번 정변의 주동자는 수도군단장 아라끼 마사야스(荒木正休) 중장인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수도군단 예하 제1보병사단, 제28보병사단, 그리고 제1기갑사단이 거사에 참가한 것으로 보임. 도우꾜우의 외교가에서는 그가 실권을 장악한 것으로 보고 있으며, 호국군사위원회 위원장인 참모차장 히도쯔바시 히로모또 대장은 명목상의 지도자로 보임. 공군성은 이미 육군 병력이 점령했고, 공군의 저항의 중심지인 나리따(成田) 공군 기지도 제28보병사단 병력에 의해 완전히 포위된 것으로 알려졌음. 7월 31일 11시 현재 해군측의 중재에 의해 육군측과 공군측 사이에 협상이 진행중인 것으로 알려졌음. 해군측은 이번 거사를 기정 사실로 보고 육군의 우세를 인정하는 기색임.

─ 브라우넬, 12시 55분에 타전된 마지막 전문에서[132]



3.8. 팔 월[편집]



사회 혼란을 조성시켜 온 반사회적 분자 74명이 계엄사령부에 의해 구속되었다. 계엄사 대변인 마루야마 도우상(丸山道三) 소장은 '7 ‧ 31 궐기' 이후에도 구시대의 작태를 청산치 못하고 계속 국론을 분열시키는 행동을 한 악질적 반사회적 분자 74명을 국가보위법 ‧ 치안유지법 ‧ 방공법(防共法) 등을 위반한 혐의로 체포하였다고 5일 오전 밝혔다. 이번에 구속된 사람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우에스기 쇼우헤이(上杉昇平), 63세, 중의원 의원, 일본민주당 총재

후지와라 도시아끼(藤原利明), 46세, 중의원 의원, 일본민주당 정책심의위원회 간사

노사까 규우이치(野坂球一), 50세, 중의원 의원, 일본민주당 인권보호위원회 위원장

요시무라 따로우(吉村太郎), 76세, 전 일본민주사회당 위원장

마쯔다이라 고우지(松平亭二), 70세, 전 일본민주사회당 부위원장

우에하라 에이도꾸(上原永徳), 42세, 전 일본민주사회당 청년부장

이노우에 스미또모(井上純友), 59세, 소설가

혼다 자꾸스이(本田若水), 43세, 시인

무라따 다다기요(村田忠淸), 57세, 전 와세다대학 교수, 일본헌정연구회 회장

시가 산조우(志賀參三), 49세, 도우꾜우 데이다이(東京帝大) 교수, 일본헌정연구회 부회장

우에하라 지로우(上原次郞), 38세, 리쯔메이깡대학(立命館大学) 교수, 일본헌정연구회 간사

사노 히사이찌, 56세, 전 교우또우 데이다이(京都帝大) 교수, 일본헌정연구회 이사

─ 『요미우리 신문』, 「계엄사(戒嚴司) 반사회적 분자 구속」에서[133]


남경(南京)의 뜨거운 여름

─국민당(國民黨) 정권은 민족주의의 위험한 불길을 다룰 수 있을까?

그들의 구호는 '매국 정권 타도하자!' '민족 반역자들이여, 각성하라!' '만주국 승인 결사 반대!' 였다 ; 그들의 무기는 함성과 벽돌 조각이었다 ; 그들의 적수는 최루탄과 곤봉으로 무장한 중화민국의 준군대적(準軍隊的) 공안 경찰이었다. 그들이 얻고자 한 것은 육 억 중화민국 인민들의 가슴이었다 ; 그리고 성난 파도와 같은 그들의 시위 행렬이 남경의 거리를 휩쓸고 지나간 다음, 국민당 정권은 뿌리째 흔들리고 있었다.

지난 사월에 폭발적 힘으로 재개된 중화민국의 학생 시위 운동은 갈수록 격렬해지고 있다. 팔월 십 삼일의 시위에는, 대학들이 방학중이었고 화씨 95도를 웃도는 무더운 날씨였는데도, 이만 명이 넘는 학생들이 참가했다. 근래에 가장 규모가 컸던 이 날의 시위에 대해 공안 경찰은 무자비하기로 이름난 그들의 기준으로도 유난히 혹독한 진압 방법을 사용하여, 7명이 죽고, 94명이 다치고, 600명 이상이 체포되었다. 칠월 이십 팔일 무한(武漢)에서 있었던 시위에서도 학생 둘이 머리에 최루탄을 맞아 죽었다. 그러나 정부의 탄압이 혹독해져도, 학생 시위는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이번 시위의 쟁점은 국민당 정권의 만주국 승인 움직임이다. 일본과 미국의 압력을 받은 국민당 정권은 지난 봄부터 종래의 방침을 바꾸어 만주국을 승인할 기미를 보여 왔다. 1933년에 세워진 만주국은 형식상 독립국이지만 실제로는 일본의 괴뢰 정권으로서, 이 정권의 승인은 일본에게 만주를 공식적으로 할양해 주는 것을 뜻한다. 19세기 이래 국토의 상당 부분을 강대한 외국들에게 빼앗기는 아픔과 모멸을 겪어 온 중국 인민들에게 그것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제안이다.

그러나 국제 정치의 냉정한 현실은 중국 인민들의 소망과는 다르게 전개되고 있다. 만주국은 이미 반 세기가 넘는 역사를 자랑하고 있고, 아직까지 국제 연맹에 가입하지는 못했지만, 대부분의 서방 국가들로부터 승인을 받아 외교 관계를 맺고 있다. 무엇보다도, 국민당 정권의 가장 큰 적은 일본이 아니라, 황하 북쪽의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사실이었다. 국민당 군대가 훨씬 잘 조직되고 사기가 높은 공산당 군대를 막아내기 위해서는 일본의 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1956년 북부 중국을 석권하고 '파죽지세'로 남하하는 공산군을 황하에서 멈추게 하여, 국민당 정권이 붕괴되는 것을 막은 것은 만주와 산동성에 대군을 주둔시키고 있던 일본이었다. 지금 공산군과 국경 분쟁을 벌여 만주에서 세 해째 싸우고 있는 일본은 국민당 정권에게는 적의 적은 친구라는 논리에서 가장 좋은 우방인 것이다. 더우기 국민당 정권의 가장 충실한 지원자인 미국이 일본과의 화해를 강력히 종용하고 있다. 이미 미국은 일본 ‧ 만주국 ‧ 중화민국 ‧ 불령(佛領) 인도지나를 연결하여 노서아와 중화인민공화국에 대항하는 전략을 실천에 옮기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당 정권이 만주국을 선뜻 승인하지 못하는 것은 중국 인민들의 높은 민족적 자각을, 특히 일본에 대한 증오심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일본은, 오랫동안 선진 중국 문명의 혜택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19세기말의 중일 전쟁 이래 중국을 가장 괴롭혀 온 나라다. 중국의 영토를 여러 차례에 걸쳐 침입하여 빼앗았고, 특히 중국이 하나의 강력한 정부 아래 통일되는 것을 끈질기게 방해하여 왔다. 당연히 중국 인민들은 일본을 그들의 가장 큰 적으로 보고 있으며, 국민당 정권은 일본과의 협력 문제를, 특히 만주국 문제를, 무척 조심스럽게 다루어 왔다. 국민당 정부의 한 고위 관리는 이 점을 솔직히 시인했다, "어느 정권도 만주국을 승인하고서 살아남을 수는 없읍니다. 그리고 그 정권은 역사에 매국노로 영원히 기록될 것입니다." 더우기 근래에는 국경에 관계 없이 모든 중국 인민들 사이에 셋으로 분열된 중국이 하나로 통일되지 않는 한 중국의 앞날에는 희망이 없다는 인식이 높아 가고 있다.

학생 운동은 정연한 논리에 의해 인도된 깊은 정열로 뒷받침되고 있다. 학생들을 선동했다는 혐의로 광주(廣州)의 남양대학교(南洋大學校)에서 쫓겨난 한 철학 교수는 말했다, "부패한 군벌이 권력을 독점하고서 정권의 유지를 위해 민족의 앞날을 위태롭게 하고 있고, 거의 모든 재벌들이 매판 자본이며, 언론 기관들이 정부의 철저한 통제 아래에서 정부의 우민화 정책(愚民化政策)의 도구 노릇을 하는 지금의 중국 사회에서 민족주의적 정열이 학생들에 의해 표출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중국의 학생들은 나라가 위태로울 때는 언제나 용감하게 일어섰읍니다." 가장 큰 학생 운동 단체인 중국민족통일위원회의 위원장인 예지민은 상해 자유시 영국 조계(租界)에 있는 본부에서 중국 학생 운동의 성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중국 역사를 움직여 온 가장 큰 힘은 대중 혁명이었읍니다. 압제에, 특히 외족의 압제에, 맞서 일어선 것은 언제나 대중이었읍니다. 그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중국의 가장 위대한 교사들인 공자와 맹자가 가르친 것이 바로 대중혁명이었읍니다. 공자는 '불의를 보면, 자식이 아비와 다투지 않을 수 없고, 신하가 임금과 다투지 않을 수 없다'고 가르쳤읍니다. 이천 년 동안 중국의 모든 어린이들이 배워 온 『효경(孝經)』이라는 초급 교과서에 나오는 말입니다. 맹자는 '한 사내인 주(紂)를 죽였다는 말은 들었어도, 임금을 시해(弑害)했다는 말은 아직 듣지 못했다'고 말했읍니다. 폭군을 죽이고 새로운 나라를 세운 사람에 대한 평가였읍니다. 생쥐스트가 태어나기 이천 년 전에 나온 얘기입니다. 이처럼 혁명적인 유교 전통 속에서 자라난 중국 학생들이 민족의 이익을 배반하는 정권에 맞서서 민족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 투쟁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따름입니다." 그는 중국을 침해하는 나라들에 대한 경고도 덧붙였다.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역사 기록을 간직하고 있는 나라입니다. '나라는 없어질 수 있으나 역사[기록]는 없어져서는 안 된다'는 13세기초 남송조(南宋朝) 사람의 말이 지금도 자연스럽게 들리는 나라입니다. 중국을 침해하는 외국인들은 중국인들의 기억이 무척 길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지금 국민당 정권은 민족주의라는 위험한 불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잘 다루면 민족과 국가가 융성하지만, 잘못 다루면 정권을 단숨에 태울 수 있는 강력하고 위험한 불인 것이다. 이천 년 전부터 내려온 혁명적 가르침에 의해 인도된 민족주의적 정열로 해서 남경의 뜨거운 올 여름은 더욱 뜨겁다.

─ 『글로우브』, 「남경(南京)의 뜨거운 여름」에서[134]



3.9. 구 월[편집]



잎 진 가지 끝

마른 바람결에

그늘 덮인 정

맑게 씻어서

기러기떼 떠 가는 가을

푸르름 속에

화안한 보름달로

걸어 놓고

떠나는 마음.

떠나는 마음.

─ 기다하라 고우운사이(北原耕雲齋), 「유별(留別)」에서[135]


위로는 감로(甘露)와 같은 천황 폐하의 은택을 입고 아래로는 포근한 대지와 같은 제국의 자양을 받아 충성된 신민의 한 사람이 되는 것보다 조선에 태어난 사람에게 더 큰 행복과 영예가 있을 수 있겠는가? 나는 단언한다, 결코 있을 수 없다고. 이 사실을 마음에 깊이 새기면서, 나는 앞으로는 모름지기 충성된 황국 신민이 될 것을 굳게 다짐한다.

─ 마쯔무라 고우이찌(松村絋一), 「재생의 다짐」에서[136]



3.10. 십 일 월[편집]



이름 없는 개울에 뜬 노송

벗은 가지 끝

물새 한 마리.

문득 들리느니

먼 땅의 송뢰(松賴).

흐르는 물엔 생각이 멀다던 말씀.

누운 가지 위

다시 빈 하늘.

길이 바쁜가, 어느새 떠난 흰 날개.

갈 길 늦추며 천하에 머문 걸음, 언제는

사람을 만남이

쉬운 적이 있었으랴.

낯선 땅

무심한 손길로 문득 건진

이름 없는 물새 한 마리.

─ 기다하라 고우운사이(北原耕雲齋), 「보살행(菩薩行)」에서[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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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복거일 지음, 『비명을 찾아서』, 서울, 문학과지성사, 1987, p.17.[2] 같은 책, p.21.[3] 같은 책, p.26.[4] 같은 책, p.29-30.[5] 같은 책, p.33.[6] 같은 책, p.39.[7] 미국 굴지의 대기업 제너럴 모터스에서 12년 간 최고경영자로 군림했던 찰스 에르윈 윌슨(Charles Erwin Wilson, 1890~1961)이 아이젠하워 행정부 초대 국방부 장관으로 지명되어 열린 상원 인사청문회에서 ”미국 정부와 GM의 이익이 상충할 경우 어떻게 처신하겠는가?“라는 의원의 질문에 재치있게 응수한 답변을 패러디한 것이다.[8] 같은 책, p.42.[9] 같은 책, p.46.[10] 같은 책, p.48.[11] 같은 책, p.48.[12] 같은 책, p.51.[13] 같은 책, p.56.[14] 같은 책, p.60.[15] 같은 책, p.63-64.[16] 같은 책, p.73.[17] 같은 책, p.75.[18] 같은 책, p.80.[19] 같은 책, p.80.[20] 같은 책, p.87.[21] 같은 책, p.80.[22] 같은 책, p.92.[23] 같은 책, p.99.[24] 같은 책, p.103.[25] 같은 책, p.107.[26] 같은 책, p.110.[27] 같은 책, p.117.[28] 같은 책, p.122-123.[29] 같은 책, p.135.[30] 같은 책, p.135.[31] 같은 책, p.139.[32] 같은 책, p.142.[33] 같은 책, p.148.[34] 같은 책, p.151.[35] 같은 책, p.156.[36] 같은 책, p.159.[37] 같은 책, p.161.[38] 같은 책, p.166.[39] 같은 책, p.168-169.[40] 같은 책, p.177.[41] 같은 책, p.182.[42] 같은 책, p.189.[43] 같은 책, p.194.[44] 같은 책, p.194.[45] 같은 책, p.194.[46] 같은 책, p.200.[47] 같은 책, p.205.[48] 같은 책, p.209.[49] 같은 책, p.212.[50] 같은 책, p.218.[51] 같은 책, p.226.[52] 같은 책, p.226.[53] 같은 책, p.228.[54] 같은 책, p.228.[55] 같은 책, p.232.[56] 같은 책, p.234.[57] 같은 책, p.246.[58] 같은 책, p.251.[59] 같은 책, p.254.[60] 같은 책, p.260.[61] 같은 책, p.263.[62] 실제 역사에서 시게미츠 마모루는 1957년 1월 26일 사망하였다.[63] 같은 책, p.279.[64] 같은 책, p.286.[65] 같은 책, p.286-287.[66] 같은 책, p.296-297.[67] 같은 책, p.301.[68] 같은 책, p.309.[69] 같은 책, p.313-314.[70] 같은 책, p.320.[71] 같은 책, p.328-329.[72] 같은 책, p.332.[73] 같은 책, p.337.[74] 같은 책, p.340.[75] 같은 책, p.347.[76] 같은 책, p.355.[77] 같은 책, p.371.[78] 같은 책, p.379-380.[79] 같은 책, p.384.[80] 같은 책, p.386.[81] 같은 책, p.399.[82] 같은 책, p.403.[83] 같은 책, p.411.[84] 같은 책, p.415.[85] 같은 책, p.434.[86] 같은 책, p.437.[87] 같은 책, p.437.[88] 같은 책, p.445.[89] 같은 책, p.451-452.[90] 같은 책, p.481.[91] 같은 책, p.498.[92] 같은 책, p.508.[93] 작중 히데요는 "우리는 보통 중화민국을 〈지나 국민당 정권〉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여기에선 〈중화민국〉이라고 정식 명칭을 썼군요. 흥미있는 일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다.(같은 책 p.66.)[94] 같은 책, p.65-66.[95] 같은 책, p.71-72.[96] 같은 책, p.74.[97] 같은 책, p.81.[98] 히데요의 독백에 따르면, 이 시는 대학교 2학년 때 조국 성지 참배단(祖國聖地參拜團)에 끼어 일본을 방문하였을 무렵 혼자 단노우라에 방문하여 "안도꾸(安德) 천황의 애달픈 고사에 비감해진 마음으로 단숨에 지은 즉흥시"라고 한다.(같은 책, p.82.)[99] 같은 책, p.89.[100] 같은 책, p.89-90.[101] 같은 책, p.91-92.[102] 같은 책, p.95-96.[103] 같은 책, p.113.[104] 「설후」는 히데요의 말에 따르면 본디 그가 만주리(滿州里)에 있을 때, 토니아와 눈 내리는 니콜라이 공원에서 마지막으로 만났던 일을 모티프로 창작한 시로, 다만 장소가 니콜라이 공원이 아니라 눈 내리는 미나미 공원(南公園)에서 회상하는 형식으로 바뀌어 창작되었다고 한다.(같은 책, p.113.)[105] 같은 책, p.131-132.[106] 작중에서 이 자료가 작성된 곳은 조선총독부 내의 '사회국 사회발전과'로 언급되고 있으나, 분류 기준이 나와있지 않다고 언급되고 있다.(같은 책 p.132.)[107] 같은 책, p.136.[108] 같은 책, p.137.[109] 같은 책, p.148-149.[110] 같은 책, p.192.[111] 작중에서 인용된 말에 따르면, 본래 이 시는 기다하라가 34살 때 15살 된 여제자에게 준 시였으나, 쇼우와 유신(昭和維新) 체제 아래에서 도우조우 히데끼(東條英機) 수상을 비판했던 것이 수상의 눈에 나게 되었고 그 이후 그가 육군헌병사령부에 의하여 체포된 뒤, 어린 제자를 유혹한 색마로 몰아붙이는 증거로 활용되었다고 언급된다. 그가 육군헌병사령부에 의해 체포된 뒤 당국은 그 시를 증거로 삼아 어린 제자를 유혹한 색마로 몰아붙였다고 언급되고 있다.(같은 책, p.192)[112] 같은 책, p.197-198.[113] 몇 월 호 『뉴스월드』지인지는 본문에서 언급되지 않았으나, 작중 앤더슨이 "『뉴스월드』 이번 호에 흥미있는 기사가 나왔더군요. 한번 보십시요."라고 언급하며 주인공에게 잡지를 건네는 장면(같은 책, p.189)과 「사 월」이라는 장 이름을 통하여 추측해본다면 4월호 『뉴스월드』지로 추측할 수 있다.[114] 본문에서 "그는 부아가 끓어올라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기사 끝에 나온 이름들을 보았다. 미국 잡지라, 기사는 미국인 두 사람이 썼고, 런던, 파리, 사이공, 제네바, 라고스, 그리고 상해(上海)에 주재하는 기자들이 도운 것으로 되어 있었다."(같은 책, p.198)라고 하는 히데요의 대사를 통하여 이들을 짐작할 수 있다.[115] 같은 책, p.197-198.[116] 같은 책, p.198-200.[117] 같은 책, p.222.[118] 같은 책, p.223-224.[119] 같은 책, p.243-244.[120] 같은 책, p.246-247.[121] 같은 책, p.252-253.[122] 같은 책, p.259.[123] 같은 책, p.281.[124] 한도우 경금속 주식회사에서 근무하던 시마즈 도끼에(島津時技)가 에릭 앤더슨(Eric Anderson)과 결혼하며 한도우 경금속 주식회사를 퇴직하게 되면서 그 후임자 충원과 관련한 신입 사원 선발에서 등장한 문제이다. 작중 언급된 바에 따르면, 본래 "신입 사원 선발은 인사과 소관이었으나, 시험은 기획조정과에서 보이기로 합의가 되어"(같은 책, p.279.) 주인공 히데요가 필기시험을 출제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문제를 출제한 이유로 히데요는 "1940년은 특별한 사건이 일어난 해가 아니었기 때문에 답안에서 창의성을 엿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같은 책, p.280.)라고 언급하고 있다.[125] 같은 책, p.320.[126] "'다른 것은 몰라도, 스승의 이름은 알고 떠나야 할 것 아닌가?' 입을 열려다가 그는 멈칫했다. 스님은 그에게 어디 사는 누구냐고 묻지 않았던 것이었다."(같은 책, p.308)라는 대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히데요는 샤꾸오우지에서 자신에게 가르침을 준 쇼우고우 스님의 이름을 몰랐으나, 이 기사를 통하여 히데요는 샤꾸오우지에서 자신에게 한용운의 유품을 물려준 쇼우고우 스님의 이름을 알게 된다. 그러나 1987년 판 『비명을 찾아서』에서는 "'저렇게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면, 아직 조선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 조선 말은 이제 조선 사회의 변두리에서나 찾을 수 있으니까. 쇼우고우(小空) 스님처럼 정부의 입김이 덜 미치는 산 속에서 수도를 하신 분이나 사회의 최하층에서 사회적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한 사람이나⋯⋯.'"(같은 책, p.310)라는 말이 언급되는데, 이미 히데요가 이 기사를 읽기 전부터 쇼우고우 스님의 이름을 아는 것으로 언급이 되고 있다.[127] 본래 마지막 줄의 내용은 '가녈픈 고개를 든다.' 였으나, 작 중 히데요가 마지막 연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낯익은 얼굴을 내민다.'로 고쳤다. (같은 책, p.326.)[128] 같은 책, p.325-326.[129] 같은 책, p.338-339.[130] 같은 책, p.344.[131] 같은 책, p.344-345.[132] 같은 책, p.345.[133] 같은 책, p.356.[134] 같은 책, p.361-364.[135] 같은 책, p.367.[136] 같은 책, p.406.[137] 같은 책, p.457-4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