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국 동맹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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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1718년부터 1720년까지 유럽에서 발생한 국제적 전쟁이다. 프랑스 왕국과 합스부르크 제국이 동맹의 역전 이전에 유일하게 손을 잡았던 전쟁이고, 영불협상 이전 영국과 프랑스가 손을 잡는 얼마 안 되는 시기의 전쟁이기도 하다.
2. 과정[편집]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으로 어찌 어찌 왕위에 오른 스페인 국왕 펠리페 5세는 1715년 할아버지 루이 14세가 죽고 조카 루이 15세가 어린 나이에 프랑스 국왕이 되자 프랑스 왕위에 욕심을 보이기 드러냈다.[1] 여기에는 당시 펠리페 5세를 보좌하던 지울리오 알베로니의 역할이 상당히 크게 작용했다.
이러한 펠리페 5세의 움직임에 영국과 프랑스는 서로 동맹을 맺고 이를 견제했고, 1717년에는 네덜란드가 참가하면서 '삼국 동맹'이 형성되었다. 이에 펠리페 5세는 방향을 돌려 기존에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가 차지하고 있던 이탈리아 남부 지중해 일대로 관심을 돌렸다. 당시 시칠리아를 확보한 사보이아 공국[2] 이나 사르데냐와 나폴리 왕국을 확보한 합스부르크 제국[3] 이나 모두 제대로 된 해군력을 가지지 못했다는 점을 이용하려 했다.
1717년 8월 스페인 해군이 사르데냐를 점령하면서 그 마수를 뻗치기 시작했다. 당시 경제적으로 피혜해져있던 프랑스,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 중이었던 합스부르크 제국 모두 전쟁을 피하고자 하였으나 스페인의 움직임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고 1718년 7월에 시칠리아를 침공했다. 결국 합스부르크 제국도 삼국 동맹에 참가하게 되면서 사국 동맹이 형성되었다.
1718년 8월 파사로 곶 전투에서 영국이 스페인 해군에 승리를 거두었고, 곧이어 합스부르크 제국군도 나폴리를 통해 시칠리아로 진격했다. 그러다 알베르니는 루이 15세의 섭정으로 펠리페 5세를 내세우려고 했던 셀리마레 음모를 벌였으나 실패로 끝났고 결국 1718년 12월 프랑스, 영국, 합스부르크 제국군 모두 스페인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었다. 한편 네덜란드는 이들보다 늦게 1719년 8월 개입했다.
1719년 4월 프랑스는 스페인을 침공했고, 스페인은 이에 대항하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물론 스페인은 시칠리아 전역에서는 지속적인 승리를 거두고 있었으나 자코바이트의 개입으로 영국의 심기를 건드렸고, 영국이 스페인 본국에 대한 급습을 하게 되면서 스페인은 육지의 프랑스, 해안의 영국이라는 무시무시한 양대 강국의 동시 침략을 받는 위험한 상황에 놓였다. 이것은 당시 스페인 국력으로서는 절대 막기 어려운 상황임을 의미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결국 펠리페 5세는 1719년 12월 전쟁을 주도했던 알베로니를 해임하면서 강화 협상에 나섰고, 1720년 2월 헤이그 조약에 체결되면서 전쟁은 마무리되었다.
한편 해당 전쟁은 북아메리카 식민지들에서도 진행되었는데 프랑스는 플로리다의 스페인 식민지를 공격하였고, 스페인은 바하마의 영국 식민지를 공격하기도 하였다.
3. 결과[편집]
스페인은 다시 얻었던 사르데냐와 시칠리아를 다시 합스부르크 제국과 사보이아 공국에게 돌려주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펠리페 5세는 두번째 부인 이사벨 파르네제에게서 얻은 자신의 아들 돈 카를로스 왕자(훗날의 카를로스 3세)가 파르마와 피아첸차의 공작령을 세습하는 것을 국제적으로 공인받았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다시금 이탈리아 반도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게 되었다.
스페인의 펠리페 5세와 프랑스를 실질적으로 통치하고 있었던 섭정공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2세는 혼인동맹을 통해 양 가문의 결속을 다질려고 했다. 펠리페 5세의 장녀 마리아나 빅토리아가 루이 15세와 약혼이 결정되어 프랑스로 떠났고, 펠리페 5세의 장남 루이스는 오를레앙 공의 딸 루이즈 엘리자베트와 혼인하고, 3남 카를로스는 오를레앙 공의 딸 필리피네와 약혼하였다. 하지만, 이 혼약은 루이스의 이른 죽음과 오를레앙 공 후임으로 재상이 된 부르봉-콩데 공의 혼약파기로 모두 어그러지게 되어 폴란드 계승전쟁 직전까지 프랑스와 스페인의 관계는 좋지 못했다.
4. 영향[편집]
이 전쟁 이후 합스부르크 제국과 사보이아 공국이 시칠리아와 사르데냐를 맞교환 하게 되었고[4] 이후 사보이아 공국은 사르데냐 왕국을 칭하였다. 또한 스페인이 진 전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스페인의 국력과 영향력이 여전히 상당함을 인식한 프랑스는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을 계기로 다시금 스페인과 손을 잡으면서 왕조간의 유대를 바탕으로 우호 관계를 유지해나간다.
한편 이 전쟁은 카를 6세가 벌인 얼마 안 되는 외교적 승리였으나 이후 섣부르게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에 뛰어들면서 다시금 프랑스와 합스부르크 제국이 멀어지게 만들었고, 밀라노 공국을 제외한 이탈리아 반도의 영토를 전부 상실하면서 자신의 사후 딸 마리아 테레지아에게도 어려운 외교 관계를 안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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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루이 15세가 5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했기 때문에, 당시 유아 사망률에 비추어보면 루이 15세가 갑자기 죽을 가능성도 상당했다. 이 경우, 펠리페 5세는 오를레앙 가문이 아닌 자신이 프랑스 왕위를 계승하고자 하는 야망이 있었다. 사국 동맹 이후에 루이스 1세에게 잠시나마 양위한 것도 프랑스 왕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2] 사보이아 공국은 제대로 된 항구가 니차뿐이어서 해군이 빈약했다.[3] 이쪽도 제대로 된 항구가 아드리아해 안쪽 깊숙히 위치한 트리에스테랑 리예카 정도가 전부라 마찬가지로 해군이 빈약했다. 게다가 바로 옆에 쇠퇴기라고 해도 앞마당인 아드리아해 만큼은 꽉 잡은 베네치아 공화국이 있어서 해군을 양성할 필요성도 못 느꼈다.[4] 말이 맞교환이지 실은 카를 6세가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를 반강제로 협박해서 삥뜯은 것에 가깝다. 나폴리와 시칠리아가 가까워 같이 통치하기 훨씬 유리했고 시칠리아가 사르데냐보다 경제적인 여건이 좋았던 점도 있었다.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는 처음에는 거부하려 했으나 국력 차이 때문에 어쩔수 없이 맞교환에 동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