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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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풍무왕(扶風武王)
司馬駿 | 사마준

출생
233년[1]
후한 사례 하내군 온현(溫縣) 효경리
(現 허난성 자오쭤시 원현 샤오징진)
사망
286년 11월 2일[2] (향년 54세)
시호
(武)
재위기간
서진의 여음왕
266년 2월 9일[3] ~ 277년 10월 5일
재위기간
서진의 부풍왕
277년 10월 5일[4] ~ 286년 11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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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성씨
사마(司馬)

(駿)

자장(子臧)
가족
부친: 사마의(司馬懿)
모친: 복부인(伏夫人)
아내: 태비 장씨(臧氏)
자식: 사마창(司馬暢), 사마흠(司馬歆) 외 8명
작위
조위
평양정후(平陽亭侯) → 평양향후(平陽鄕侯) → 평수후(平壽侯) → 동모후(東牟侯)
[서진
여음왕(汝陰王) → 부풍왕(扶風王)
직위
조위
산기상시(散騎尙侍) → 보병교위(步兵校尉)[1] → 둔기교위(屯騎校尉) → 평남장군(平南將軍)[2] → 안남장군(安南將軍)[3] → 안동장군(安東將軍)[4] → 안동대장군(安東大將軍)[5]
[서진
안동대장군(安東大將軍)[6] → 진서대장군(鎭西大將軍)[7] →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 개부벽소(開府辟召), 의동삼사(儀同三司)[8] → 표기장군(驃騎將軍)[9] → 대사마(大司馬)[10]

1. 개요
2.1. 생애
3. 평가
4. 기타
5. 대중 매체에서의 묘사



1. 개요[편집]


고대 중국 위진남북조시대 서진황족. 자는 자장(子臧). 출신지는 사례 하내군 온현. 사마의7남으로[5] 어머니는 복부인이다. 동복형제로는 사마량, 사마주, 사마경이 있다. 최종 작위는 부풍왕.[6] 시호는 무(武).[7] 작위와 시호를 따 부풍무왕준(扶風武王駿)으로 통칭하기도 한다. 사마준의 부인으로는 태비 장씨가 있으며, 장씨 소생으로 자식을 10명이나 두었다. 이들 중에서 이름이 알려진 이들이 사마창[8]사마흠[9]이 있다.

2. 진서[편집]



2.1. 생애[편집]


사마준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은혜로웠다. 특히 학문으로 이름을 날렸는데 대여섯 살에는 글을 써 소통하고 경전을 읽고 외웠으며, 또한 저술, 이론에 능해 자신의 논술을 쓸 수 있었고, 일찍이 순양과 인효의 선후를 논한 바 있어 글의 문채에는 칭찬할 만한 점이 있었다. 그래서 이를 본 사람마다 사마준이 기이한 재주를 가졌다고 여겼다. 또한 사마준은 효행에 있어서 누구보다 밝았다. 형 사마량이 임관하여 어머니 복부인이 형을 따라 궁정으로 들어갔을 때, 사마준은 자주 눈물을 흘리며 사모했고, 병이 났다는 소식을 들으면 언제나 근심했으며, 때에 따라 관직을 위임하고 아침저녁으로 어머니를 문안했다고 한다. 이렇듯 문교를 베풀고 효를 행하는 모습 때문에 사마준은 사마팔달을 배출한 당대의 명문가 사마씨 가문에서도 촉망받는 기대주였다.

조위 경초 연간.[10] 아직 유년기에 불과했던 사마준은 아버지 사마의의 공훈으로 일찍이 평양정후로 봉해졌다.

조위 경초 3년.[11] 사마준은 고작 여덟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관직을 받아 산기상시가 되어 조위황제 조방에게 글을 강론했다. 이후 산기상시를 지내는 동안 보병교위, 둔기교위 등을 역임했다가 작위가 평양향후로 오른 뒤에는 평남장군, 가절, 도독회북제군사가 되면서 평수후로 고쳐 봉해 안남대장군으로 옮겨졌다. 이후 장성해서도 비뚤어지지 않아 청렴결백하고 도를 지켰기에 서진 사마씨 종실 내 최고의 준걸로 기대를 받았는데, 이 평은 결과적으로 사마준의 행보에 딱 맞아떨어지게 되었다.[12]

조위 함희 원년.[13] 사마준은 동모후로 봉해졌고 직위도 안동대장군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사마준은 도독예주제군사가 되어 허창(許昌)을 진수(鎭守)하였다. 이때, 사마준의 나이는 고작 31살이었다. 같은 시기, 그의 형 사마주도 진동대장군으로 임명되어 도독서주제군사가 되어 하비(下邳)를 진수하였다. 형제가 각각 예주와 서주의 방위를 담당하게 된 것이었다.

조위 함희 2년 12월 병인.[14] 조위말제 조환사마염에게 선양을 하면서 위나라가 멸망하고 진나라가 건국되었다. 진무제는 위나라가 고립되었던 폐단을 경계하였으므로 위나라의 전철을 답습하지 않기 위해 즉위 직후부터 가까운 종친들을 적극적으로 기용하거나 크게 책봉하고 직임을 주면서 그들의 권력을 강화했다. 그리하여 건국 다음 날인 12월 18일, 공신들을 고위 관직에 임명하면서 도합 27명의 종친을 제후왕으로 책봉했고, 총 157,939호가 그들에게 식읍으로 분봉 되었다. 동모후 사마준도 이때 여음왕에 봉해지며 식읍이 1만 호가 되었다. 그 외에 관중(關中)의 군권도 가지게 되었다.

서진 태시 4년 11월.[15] 사마준이 허창에 주둔하고 있었을 당시, 합비(合肥) 침공을 준비 중이던 오나라 장군 정봉이 이간책으로 동요를 퍼뜨려 당시 도독양주제군사로 수춘(壽春)에 주둔 중인 석포가 오나라와 내통을 하고 있다는 보고가 회북감군 왕침에게서 올라왔다. 평소 왕침석포를 좋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빌미로 석포를 모함하였다. 그리고 때마침 정봉이 국경에서 움직임을 보이자, 석포는 군을 소집하고, 성루를 쌓으며 전쟁에 대비하였는데, 사마염이 이를 수상하게 여겼다.[16] 양호석포를 열심히 변호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마염석포를 의심하니 결국 그의 아들, 석교를 상서랑에 임명, 중앙으로 불렀다. 그러나 석포가 아들 석교를 보내지 않자, 사마염은 분노하여 곧 그를 파면했고, 사마망, 사마주에게 대군을 주어 석포가 있는 수춘을 정벌케 하였다.

한편, 같은 시기에 손삭(孫鑠)이라는 관리가 석포의 속관으로 임명되어 상관의 임지가 있는 곳으로 가다가 허창에 닿았을 때였다. 이때 허창에서는 은밀히 적은 수의 군사를 이끌고 석포를 덮칠 준비를 하고 있었고, 사마준이 출진해 있었는데, 마침 손삭이 그를 만나려 하였다. 둘은 동향(同鄕)[17] 사람인 데다 오래전부터 알고 지냈기 때문이었다. 토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손삭은 사마준을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자신이 석포의 임지에 부임하게 된 일로 수춘을 향하는 중이라 말했다. 사마준은 이미 조정으로부터 석포를 토벌하려 한다는 소식을 들은 상황이었는데, 손삭을 이대로 내버려뒀다가는 그가 수춘에 도착하자마자 모반에 휘말려 억울하게 죽을 것이 뻔하였다. 그 때문에 사마준은 자신의 동향 친구를 눈감고 모르는 체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귓속말로 손삭에게 말하길, 조정에서 비밀리에 군사를 파견해 석포를 토벌하려 하나, "다툼을 일으킬 생각은 없다."라면서 즉, 군사를 집결시키고 있지만 단순한 제스처일 뿐이지, 석포를 정말로 무찌를 생각은 없는 거라고 전했다.

그 말을 들은 손삭은 곧장 석포한테 갔고, 석포에게 조정에서 토벌군이 온다는 소식을 알리면서 수춘을 나와도 죽지는 않을 것이니 병사를 풀고 도정에 걸어가 죄상을 알리도록 권하자 석포는 이를 따랐다. 사실 석포에게 다른 마음이 없더라도 죄를 인정하면 죽음이라는 상황에 몰렸었다면 만에 하나 살아남기 위해 석포가 거병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사마준과 손삭의 기지로 석포가 군권을 내려놓고 수춘을 나오니, 사마염이 이 소식을 듣고 의심을 풀어 석포의 병권만을 빼앗고 낙릉공의 신분으로 집에 돌아가게 했다.

결국, 정봉의 이간계 시도는 원했던 대로 이루어지지 못했으나, 정봉은 포기하지 않았다. 비록 석포의 반란으로 이어지지는 못했지만, 대신 차선책이었던 석포의 경질이라는 나름 괜찮은 결과를 냈다. 어쨌거나 의도대로 수춘의 사령관을 제거한 정봉의 다음 목표는 합비 공략이었고, 곧바로 작피(芍陂)를 향해 공세를 시작했다. 그러나 정봉이 간과한 사실이 한 가지 있었으니, 바로 사마준이라는 존재였다. 분명 허창을 지키고 있어야 할 사마준이 이미 수춘으로 출발했던 태위 의양왕 사마망의 지원군이 오기도 전에 공격 루트를 예측하여 작피를 공격한 정봉의 군세를 격퇴하였고, 합비에서 정봉, 제갈정의 침공을 막아 낸 것이었다. 일을 그르치고 어쩔 도리가 없게 된 정봉은 곧 철수하였다. 이렇게 사마준은 속전속결로 난을 타개하였다.

오나라의 백전노장 정봉의 이간계를 꿰뚫어 보고 간단한 조언을 손삭에게 전하여 사마염석포의 소통 오해로 생겨난 일촉즉발의 상황을 사전에 차단했다. 그리고 수춘의 지휘 공백이 생긴 상황에 뒤이어 덮친 정봉의 공세를 막으러 간 사람도 수춘을 토벌하러 먼저 출발한 사마망이 아닌, 허창에 있다가 이제 막 지원하러 온 사마준이며, 정봉의 공격 루트는 또 어찌 알았는지, 사마준은 합비 신성이 아니라 작피에서 오나라 군을 요격했다. 이처럼 오나라 군의 침략을 사마준이 노련한 대응을 통해 깔끔하게 막아내자, 종실의 공적이 필요했던 사마염은 물론이요, 서진 조정도 그의 신예답지 않은 활약에 일제히 주목하니, 이는 나중에 이민족일으킨 반란 진압에 그가 투입되는 밑바탕이 되었다.

서진 태시 5년.[18] 오나라 군의 공격을 깔끔하게 막아낸 사마준은 뛰어난 군공을 인정받아, 마침 군권을 포기하고 조정으로 간 석포를 대신해서 사지절, 도독양주제군사 자리를 이어받으며 수춘을 지키며 양양(襄陽)의 도독형주제군사 양호, 임치(臨淄)의 도독청주제군사 위관, 하비의 도독서주제군사 사마주와 함께 대오전선의 한 축을 담당하였다. 얼마 안 가 사마준은 다시 도독예주제군사로 복귀해 다시 허창을 지켰다.

동년. 서진(關隴) 지방의 옹양주 일부를 떼어내 진주(秦州)라는 주를 신설했다. 이곳에는 과거부터 선비족(鮮卑族)[19] 사람들이 관중의 주민들과 섞여 살았었다. 일찍이 조위 시절에 등애선비족(鮮卑族)의 투항자 수만 명을 옹주와 양주 사이에 살게 하였었는데, 시간이 지나 촉한이 멸망하였고, 얼마 안 가 조위황제사마염에게 선양해서 서진이 들어섰다. 때문에 사마염은 위촉 최전선에서 행해지던 둔전을 더 이상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으로 폐지를 결정, 대신 점전 과전제를 실시하여 유목민족이던 선비족들에게 강제로 농사를 시켜 조세를 바치도록 했다. 당연히 선비족들은 크게 반발하였고, 조정에서는 이를 우려하여 여러 논의가 있었으나 호열이 그쪽 지방에 밝기에 안심하고 그를 진주자사로 부임시켰다.[20]

서진 태시 6년 7월.[21] 호열이 진주자사에 부임한 지 1년이 채 지나서, 진주 일대에서 독발수기능(禿髮樹機能)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맞서 호열이 독발수기능을 토벌하려 나섰고, 만곡퇴(万斛堆)(오늘날의 감숙성 고란현)에서 독발수기능과 대치하지만, 오히려 호열이 수세에 몰렸고, 호열의 목숨이 위험해지자 도독옹양주제군사 사마량호열 구원에 나섰다. 그러나 사마량의 명을 받고 호열을 지원하러 온 유기가 군을 이끌고 가다가 독발수기능에 지레 겁을 먹고 도망쳐 나와 호열을 도와주러 가지 않았다. 유기가 멀찍이 머물러 앉아 호열이 다시 패하는 것을 그저 관망하는 사이에 호열은 결국 전사하고 말았다.

한편, 유기호열 구원에 실패하자 사마량이 책임을 대신 지고 경질되었다. 호열이 죽고 사마량이 파면된 상태에서 진주, 양주 등이 무너지자 안서장군, 도독진주제군사으로 석감이, 안서군사, 진주자사로 두예가 부임했다. 석감은 평판이 훌륭했고, 두예는 군을 지휘하는 것이 능했다. 때문에 서진 조정은 이 둘의 조합을 믿고 토벌을 보냈으나, 석감두예는 진압 작전에 대해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아 곧 사이가 틀어져 버렸다. 결국 석감두예를 모함해서 날려버리며 자기가 직접 군을 이끌고 독발수기능을 공격했는데, 오히려 대패하고 목숨만 건진 채 퇴각하였다. 이렇게 석감마저 독발수기능 토벌에 실패하자 그제야 서진 조정은 일이 심각성을 깨닫게 되었다.

서진 태시 6년 7월 정미.[22]사마염은 대오전선의 한 축을 담당하던 예주의 사마준을 급히 빼내어 그에게 서방의 이민족 반란 토벌을 명하였다. 조정은 면직된 사마량을 대신해 사마준을 관중에 진수시키고, 곤면시중(袞冕侍中)의 옷 등을 더한 다음 진서대장군, 사지절, 도독옹양등주제군사로 옮겨 옹주, 양주의 모든 군사를 총괄시켰다. 한편, 그러면서 청주의 위관유주로 배치해 동쪽의 이민족 방면을 맡기기도 하였다. 이 기간 동안 사마준은 선정을 베풀어 위엄이 있었고 농사, 양잠을 권해서 노역을 함께 했으며, 사졸들과 고역을 나누었다. 그리고 관리, 병사 등도 사인과 같이 밭을 10무로 제한하고 표문을 올렸으며, 이에 사마염진나라, 들에 사람을 보내 관리들이 농사에 힘쓰도록 했다.

서진 태시 7년.[23] 첫 1년 동안은 사마준이 독발수기능과 대치하며 전선을 소강상태로 끌어냈고, 양주자사로 견홍이 합류하였다.[24] 이후 관중 지역의 기근과 더불어 독발수기능이 금성(金城)을 침공하자 견홍은 패기있게 독발수기능과 격돌하였으나 도리어 패퇴하고 금성의 후방인 청산(青山)으로 몰리게 되었다. 그때까지 간을 보며 아직 독발수기능에게 동조하지 않고 있던 여러 이민족이 견홍의 패배를 목격하고서는 우르르 반란에 넘어가고 말았다. 이리되니, 금성에서 추격하는 독발수기능과 만곡퇴에서 호응하는 이민족들에게 견홍은 청산에서 앞뒤로 포위되었고, 조여오는 적의 포위망을 뚫지 못해 결국 전사하고 말았다. 견홍의 전사로 사마준은 이민족들에게 진주와 옹주의 약탈을 허용하고 말았다.

사실 호열견홍의 기용을 두고 일찍이 진건이 우려를 표한 바 있었다. 진건사마염에게 간언하길, 호열견홍은 용기가 있으나 지모가 없어 스스로 쓸모 있다고 억지를 부리니 변방을 안정시킬 재목은 되지 못하고, 달리 좋은 사람을 찾아 교체하지 않으면 장차 나라의 치욕이 될 거라고 하였다. 당시 견홍은 강동면 양주자사[25]를 역임하면서 상사였던 진건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었는데, 평소에 이를 알고 있던 사마염이 두 사람에 대한 진건의 언행을 두고 단순히 사사로운 원한으로 불만을 품어서 일어난 장수간의 불화로 여겼다. 그 때문에 사마염은 일단 진건을 존중하여 견홍을 조정으로 불러들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서북면 양주자사로 임명했을 정도로 진건의 의견을 세심하게 고려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진건사마염의 결정을 알고는 반드시 실패할 것이라고 탄식했다. 결국 진건의 말대로 호열견홍 이 두 사람은 변경을 지키던 중 이민족과 충돌하여 둘 다 전사하고, 이러한 난은 토벌 끝에 수년간 지나서야 겨우 수습되니, 사마염도 이 일을 후회하게 되었다. 아무튼, 이제 난의 조기 진압은 물 건너간 셈이 되었고, 결국 그 패전의 책임은 굴욕적이게도 견홍의 상관인 사마준이 지게 되었다.[26]

앞서 보낸 서진의 최고 인재들이 1년 사이에 줄줄이 썰려 나갔다. 일이 이렇게 되니 이제 선택할 수 있는 사령관 후보로는 양호만이 남은 상황. 하지만 그를 대오전선에서 빼 오면 서진의 대오전략은 붕괴할 것이 뻔하였다. 이런 고민으로 사마염은 근심에 빠졌다. 그러자 시중 임개가 앞으로 나와 간언하길, 서량의 관중 쪽을 바로 잡으려면 명망과 지략이 있는 중신을 보내야 한다면서 가충으로 하여금 사령관이 되도록 추천하였다. 물론 실상은 임개가충을 끔찍이 싫어하기 때문에 일부러 변방으로 보내어 중앙의 권력에서 멀어지게 해서 실각시킨 다음에 가충독발수기능과 싸우다 패하거나 죽게 하려는 의도였다.

이에 사마염이 상서령이던 가충을 사령관으로 발탁하여 도독옹양주제군사로 임명하자, 조정의 현량들은 기뻐하였다. 하지만 가충은 죽을 맛이었다. 임개의 모략으로 갑자기 반란 토벌을 떠맡게 된 것도 억울한 데다가, 밖으로 나가 독발수기능을 토벌하는 것도 자기 능력에서 한참 벗어나는 일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가충 자신이 실권을 잃게 될 것이 뻔히 보이는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파견을 회피하자니 황제의 명을 거부할 수도 없었다. 이로 인해, 가충임개에게 깊은 한을 품었으나 이에 복종했다. 가충은 이를 우려하여 순욱에게 상담하자 순욱이 그 일환으로 가충의 딸 가남풍사마충의 황후 후보로 내밀자는 제안하였다. 가충은 그 제안을 수락했고, 물밑 작업 끝에 마침내 혼인이 성사되자 가충은 황제와 사돈이 됐다는 조건으로 다시 중앙에 눌러앉아 진주, 서량행을 피하는 것에 성공했다.

서진 태시 8년.[27] 낙양(洛陽)에 돌아와 있던 사마준은 결국 경질된 지 1년도 채 지나기 전에 가충의 파견이 취소되자, 다시 공석이 되어버린 사령관직에 복귀했다. 또한 양주자사에는 양흔이 임명되어 사마준의 새로운 파트너가 되었다. 여기에 더해 사마준이 평로호군 문앙에게 명하여 양주, 진주, 옹주의 군사들을 감독하게 하니, 이로써 사마준은 양흔문앙이라는 A급과 S급 장수를 양옆에 낀 채로 독발수기능 토벌에 나설 수 있게 되었다.

전임 담당자들인 호열, 석감, 견홍 등이 독발수기능을 얕보고 무작정 진압하려다가 패했던 것을 보고 느낀 바가 있었던 사마준은 독발수기능 토벌을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독발수기능과의 직접 대결을 피했으며, 전번의 기근을 교훈 삼아 각지에 둔전을 설치하여 장기전에 대비하였다. 사마준은 방비를 철저히 하여 자잘한 이민족들의 공격을 완벽히 막아내고, 약라발능을 비롯하여 아직 독발수기능에게 확실히 편들지 않은 이민족들과 화친을 맺었다. 이 정책은 매우 효과적이어서 독발수기능은 더 이상 세력 확장을 위한 탄력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약화했으며, 사실상 파탄이 났었던 관중의 기반 복구에 공헌했다.

서진 태시 10년.[28] 형주를 지키던 육항이 병으로 사망하였다. 오나라 군대의 중심축이 사라졌지만, 양호는 서량에서 독발수기능이 맹위를 떨치고 있는 상황에 등 뒤의 문제를 떠안고 긴장을 세우고 있는 오나라를 공격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사마준이 서량에 있는 동안 최소 1, 2년은 안정될 것으로 보였기에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였고, 그 말대로였다. 사마준은 이런 양호의 믿음대로 이민족들에 대한 본격적인 거센 반격에 나섰으며, 4년에 걸친 그의 공세에 독발수기능은 엄청난 피해를 보고 퇴각했다. 이때의 전공을 대강 정리해 보자면,

  • 서진 태시 10년 8월.[29] 금성군을 침공한 오랑캐를 격퇴하고 그 수령 걸문니(乞文泥)를 참살.
  • 서진 함녕 원년 5월.[30] 독발수기능이 다시 거병하였으나 사마준이 도리어 독발수기능의 군사를 격파하고 여세를 몰아 그의 본대 3,000여 명을 참살. 독발수기능은 사마준에게 인질을 보내고 휴전을 맺는다. 한편으로는 그의 연맹을 해체하기 위해 사마준은 다른 연맹의 일원들을 하나하나 격파해 나간다.
  • 동년 6월. 사마준은 서역무기교위 마순(馬循)을 보내 배반한 선비족을 토벌하여 난을 진압하고 그 수령(其渠帅)을 참살.
  • 서진 함녕 2년 5월.[31] 사마준은 북쪽의 오랑캐를 격퇴하고 그 수령 토둔(吐敦)을 참살.
  • 동년 7월. 아라다(阿羅多)가 이끄는 선비족이 변방을 어지럽히자, 사마준은 서역무기교위 마순을 보내 변경을 침범한 오랑캐를 격파. 4,000 명을 죽이고 9,000 명의 포로를 사로잡으며 아라다의 항복을 받아냄.
  • 동년 겨울 10월. 양호[32]와 사마준은 각각 정남대장군과 정서대장군으로 진급, 둘은 동시에 의동삼사[33]가 되었다. 또한 사마준의 기존 직책인 지절, 도독도 예전과 같이 하였다. 사마염은 사마준에게 조서를 내려 군사 7,000 명을 보내 양주 방위군과 교대하도록 명하였다.
  • 서진 함녕 3년.[34] 입지가 좁아진 독발수기능은 후탄발(侯彈勃)과 함께 둔전 하는 병사를 위협하였다. 그러자 사마준은 문앙을 시켜 양주, 진주, 옹주의 군사들을 전진배치하며 독발수기능을 격파하고 그의 세력을 거꾸로 위협하니, 독발수기능은 바로 자신의 휘하에 있던 20부에 각각 사마준에게 인질을 보내도록 명한다. 그리고 이에 저항한 후탄발을 군문에 면박하자[35] 20부는 각각 사마준에게 인질을 보낸다. 이듬해까지 그 여파가 이어졌으며, 독발수기능을 따르던 세력은 그에게 신뢰를 거두고 안정군(安定郡), 북지군(北地郡), 금성군 등지에서 길가라(吉軻羅), 후금다(侯金多), 열경(熱冏)등의 선비족들이 독발수기능을 등지고 서진에 항복하며 선비족 연맹은 와해하였다. 이때의 투항자 수만 무려 이십여 만.

사실상 독발수기능의 몰락은 사마준 대에 이뤄졌다고 봐도 무방하다.

함녕 2년 겨울 10월. 사마준이 서방 이민족들의 반란을 한참 토벌하던 시기에 오나라 정벌에 관한 얘기가 점차 나오기 시작했다. 사마준과 함께 사정장군, 의동삼사로 임명된 양호는 육항이 병으로 죽은 이래, 2년 전에 했던 예측대로 동오 황제 손호의 폭정 때문에 강동의 정세가 어지러워지자 지금이 기회라고 여겼다. 따라서 사마염에게 손오 정벌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탁지상서 두예와 중서령 장화(張華)를 제외한 대부분의 신하가 이를 회의적으로 받아들였고, 그중에서도 가충순욱등이 독발수기능이 아직 버티고 있다는 이유로 강력하게 반대했다. 이에 대해 양호는 사마준이 서량방면 사령관으로 복귀한 이래 4년, 독발수기능의 세력을 완전히 차단했다고 반론하였으나, 신하들의 반대가 거세자 사마염은 정벌을 포기하기로 하였다. 이에 대해, 양호는 하늘이 주는 기회를 받지 않는다면서 한탄을 금치 못하였다.

하지만 사마준이 독발수기능을 완전히 토벌하기도 전에, 문앙은 중앙으로 불러들여졌다.[36] 사마준 또한 8월 즈음에 사마염의 부름으로 조정에 입조하여 중앙으로 돌아왔다. 그동안 사마준이 10여 년 가까이 기반을 옹주에 두었기에 서진 조정에서는 사마량과 사마준의 봉국을 맞바꾸기로 결정하였다.[37]

서진 함녕 3년 8월 계해.[38], 이날 조정은 종실 제후들의 대대적인 인사 이동을 실시하였다. 먼저 가평후 양호를 남성후에 책봉[39], 그리고서 사마염의 황자들인 사마위(瑋), 사마윤, 사마해, 사마하 이하 4명을 새로운 왕으로 책봉하였다. 그리고 기존 종실 제후 11명의 봉국을 교체하였다. 사마주, 사마륜, 사마보, 사마옹, 사마릉, 사마빈, 사마탐, 사마위(威), 사마간, 사마량 그리고 사마준이 그 대상이었다. 사마준은 부풍왕이라는 작위를 임명받아 정서대장군, 가절, 도독옹양주제군사의 자리를 지켰다. 또한 서량 국경 주변에 사는 또 다른 이민족집단 강족(羌族)의 호수가 사마준에게 증봉되었으며, 추가로 우보(羽葆)·고취(鼓吹)를 하사하였다.

서진 함녕 4년.[40] 아직 독발수기능을 완전히 끝내버리지 못했을 때 일이었다. 당시 사마준의 부재로 양주자사 양흔이 혼자서 독발수기능과 대치하고 있었는데, 양흔이 생각해보니 이민족들의 세력이 이젠 약해져 더 이상 독발수기능을 견제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약라발능과의 화친을 일방적으로 끊고 강족을 공격했으나, 이에 화가 난 약라발능의 역공으로 양흔은 패하고 되려 목숨까지 잃고 말았다. 양흔이 엉뚱하게 공격을 감행했다가 죽어버리자 졸지에 서량의 진나라군은 리더를 잃었는데, 변방의 약소 군세로 몰락한 독발수기능은 그 틈을 타 끝내 재기에 성공했다.

서진 함녕 5년 1월.[41] 독발수기능이 금산(金山)을 침공, 양흔의 후임인 소유를 금산에서 패사시키고 양주를 점거하는 초유의 사태를 벌인다. 서진의 총병력 1/3에 달하는 양주 방위군 전원이 10,000 명이 채 안 되는 독발수기능의 군사에게 패하여 전투 불능이 된 것이었다. 심지어 양주는 위나라 시기부터 여러 이민족과 촉한의 위협을 지속해서 받았던 지역이지만 함락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양주의 상실로 근심에 빠진 사마염은 서량 방면으로 마륭을 파견보내서 독발수기능을 마침내 토벌한다. 이때 마륭에게 주어진 군사가 3천 명뿐이었는데, 정예병이라지만 고작 소수의 병력만으로 마륭은 반란 진압에 성공하였다. 남들이 그토록 쩔쩔매던 독발수기능을 고작 삼천의 병력으로 토벌한 마륭도 대단했지만, 선비족의 세력을 약화해서 그 독발수기능마륭에게 패할 정도로 몰락하는 실마리를 제공한 요인은 바로 사마준에게 있었으니, 그의 공도 또한 컸다.

서진 함녕 6년.[42] 사마준은 표기장군으로 진급했고, 개부·사지절·도독옹량등주제군사 직위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오나라 정벌에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가충은 오나라 정벌을 반대[43]했으나 황제의 명 때문에 강제로 대오전선의 대도독을 맡아야 했다.

그러다 보니 실질적으로 대오 진나라군을 총괄하는 것은 오랫동안 오나라 정벌을 같이 외쳤던 장화두예가 맡았다. 10여 년 간 대오정벌을 준비하던 양호가 병으로 죽기 전 모든 작전 계획을 장화에게 인수인계했으며, 이 전략을 지휘할 사령관으로는 두예를 낙점하였다. 이후 오나라 정벌두예를 필두로 익주자사 왕준, 왕혼왕융 부자와 호분[44], 낭야왕 사마주가 종군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의아한 점은, 사마준 또한 오나라 정벌에 분명 빠뜨릴 수 없는 인물이지만 어째선지 오나라 정벌에는 참전하지 않았다. 사마준은 이미 대오전선에서 정봉의 군세를 격퇴한 경험과 더불어 독발수기능의 기세까지 꺾어 놓은 대활약을 했음에도 참전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불명하다.

다만 추측을 해보자면, 일단 사마준은 280년 당시에도 도독옹양주제군사로서 서북면의 방위를 담당하고 있는 입장이라 이민족의 동향을 계속 지켜봐야 했기 때문에 곧바로 오나라 정벌까지 맡기기에는 무리였을 것이다. 이러한 점은 과거 조위 시절 대촉전선을 담당했던 하후연, 장합, 곽회가 대오전선에 참전하지 못하고 있는 것과 상황이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다만, 다른 점을 굳이 따지자면 있긴 있었다. 일단 그들은 한 국가를 상대로 계속 대치하며 방어만 한 것이고 사마준은 반란을 일으킨 이민족을 토벌해서 진압을 마무리했다는 것이다.[45] 그러니 서진 입장에서는 오나라를 상대로 최상의 전력을 발휘하기 위해 서쪽을 평정해 놓은 사마준을 잠시 대오전선으로 돌려서 투입해 봄 직한 것도 분명했다. 하지만 사마준을 굳이 오나라 정벌에 참전시킨다 해도 그가 표기장군으로 진급한지라 이제는 대오전선의 사령관을 맡으면 맡았지 야전에서 일개 부대만 움직이는 짓을 할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사마염의 명으로 명목상 지휘관이 된 가충을 사마준이 제낄 리도 없었고, 결국 사마준은 대외적으로나마 가충의 부관으로서 참전을 해야 했을 것이다. 물론 가충이 대도독을 맡았다고 해서 그에게 평소에 없던 능력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어쨌든 그가 전군을 통솔하는 막중한 임무를 무사히 수행할 리가 없는 것도 자명한 사실이었다. 게다가 대도독임에도 직무 유기는 기본이요, 사사건건 딴죽만 걸어대며 사마준의 정벌전을 방해할 것이 분명했다.[46]

이러한 점들을 보면 요는 가충결재하에 사마준 본인이 오롯이 작전 계획과 지휘·전략을 구상해야 하며 거기에 더불어 이른 시일 내에 완성케 해야 하는데, 그것이 가능할 수 있냐는 말이 된다. 물론 이러한 점들을 다 감수하고 사마준의 주도하에 실제로 오나라 정벌을 성공시킨다면 북방의 적과 남방의 적을 평정한 사마준의 입지는 그야말로 천상천하 유아독존, 명성은 천정부지로 치솟을 것이 확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러 가지의 가정이 무색하게도 사마준에게 그런 번거로운 일을 맡길 일은 진작부터 없었다. 일단 사마준이 이민족 토벌을 멈추고 중앙으로 돌아왔던 때부터가 대오전선에서 손을 뗀 지 10년이나 넘은 시기였다. 그 기간에 대오전선 사령관이었던 양호가 이미 오나라 정벌 전략을 구상했을뿐더러, 양호가 병에 걸려 요양하고 있을 때 장화에게 자신의 전략을 전수한 후 후임으로는 두예를 직접 지명했다.[47]

그 말은즉슨, 이미 완성된 오나라 정벌의 작계와 지휘·전략에 사마준이 끼어들 껀덕지가 애초에 없었다는 말이 된다. 그러다 보니 오나라 정벌을 실질적으로 지휘하는 사람은 사실상 두예란 건데, 이러한 상황에서 사마준이 참전을 할 유일한 방도는 자처하여 종군하는 형식으로 군을 이끄는 것만이 남게 된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또 이상해지는 것이, 두예는 이때 진남장군이었으므로 사마준보다 직급이 한참 아래였다. 아무래도 하급자인 두예에게 사마준이 명령받는 모양새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결국 사마준이 어떤 방식으로 참전하든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러한 까닭으로 사마준이 오나라 정벌에는 자의로 참전하지 않거나 혹은 타의로 참전하지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

서진 태강 3년.[48] 사마유가 후계자로 지명될 것을 염려한 순욱, 풍담사마염에게 건의하여 사마유를 대사마 겸 도독청주제군사로 임명해 청주로 쫓아내려 하자 이에 맞서 사마유, 왕혼과 함께 강력히 반대하며 황제에게 뜻을 재고하기를 상주했으나,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다.

서진 태강 4년.[49] 결국 사마유는 청주로 보내지고 이를 반대했던 신하들은 오히려 사마염의 분노만 부채질한 꼴이 되었다. 부마인 왕제 등을 비롯하여 간언한 여러 인물이 좌천되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마유가 봉국에 부임한 지 불과 이틀 만에 죽고 말았다. 이 일로 울분을 크게 얻은 사마준은 결국 병에 걸렸다.

서진 태강 7년 9월 무인.[50] 병을 앓던 사마준은 끝내 훙서(薨逝)했다. 그 소식은 사마준의 통치를 받았었던 서쪽 변경의 관리와 백성들에게도 전해 졌다. 다들 그의 죽음을 듣자, 그를 위해 슬퍼하는 자들이 많았다. 백성들은 자발적으로 사마준을 기리기 위한 비석을 세웠는데, 모든 장로는 그 비석을 보면 절을 했다고 한다. 후에 알려지는 역사를 보면 험한 꼴 보기 전에 적절히 잘 간 셈이다.

사마준 사후 조정에서는 사마준을 대사마로 추증하였고 시중, 황월이 더해졌다. 시호는 무(武)라고 하였다, 그의 후사는 사마준의 장남 사마창이 이어받아 부풍왕으로 봉해졌다. 또 다른 아들 사마흠은 형 사마창의 요청으로 식읍을 분봉받아 신야현공으로 봉해졌다.[51] 이 둘을 제외한 나머지 자식들도 8명이 있었지만, 이들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기에 행적도 불명하다.

3. 평가[편집]


진서(晉書』 선오왕문육왕전(宣五王文六王傳)
-사관 방현령의 사마준에 대한 평가

아버지 사마의와 큰형 사마사, 둘째 형 사마소에 비교해 절대 뒤떨어지지 않는 인물로 평가된다.[52] 출세도 형들인 사마량사마주보다 빠르기도 했으며, 사마준에 관련된 일화들을 보면 확실히 종실 제일의 재능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진서 열전(列傳) 38권(三八券) 열전제8(列傳第八) 선오왕 부풍무왕준전에 적혀있는 기록에 따르면 사마준은 일단 떡잎부터가 남달랐다. 어릴 적부터 총명하고 인자한 성품과 더불어 문채에도 밝았고, 이를 보는 사람마다 기이하게 여겼다. 여덟 살에는 산기상시가 되어 조위황제 조방에게 글을 강론했던 것으로[53] 일찍이 문재(文才)를 드러냈었지만, 보병교위로 임관하여 차례대로 승진한 끝에 실무적으로 대오전선 방면을 담당하는 중임을 맡으며 무재(武才)에도 두각을 나타냈었다.

당시 대오전선을 책임지던 중책으로는 사마준을 포함해, 사마준의 동복형인 동완왕 사마주, 양호, 위관이 있었다. 이 중에 위관은 촉한멸망전에 참전한 이력과 더불어서 종회·강유의 난을 진압하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운 1등 공신이었다. 그리고 양호는 말할 필요도 없을 정도의 명사였으니, 이들에 비해 딱히 두드러진 전공이 없었던 사마준이 대오전선을 함께 책임졌다는 점에서 사마염이 사마준의 잠재력을 확실히 믿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사마염의 종실 밀어주기로 인해 직위가 평탄하게 상승하는 등, 사마주, 사마준 형제에게도 특혜가 없지는 않았으나, 서진의 개국 이래 왕으로 책봉되어 군권을 얻고 관직에 진출한 종실의 인원은 27명이나 되었고, 그 후로도 몇몇 인원들이 추가로 꾸준히 관직에 진출했지만, 사마주와 사마준 형제만큼이나 출세를 빨리하거나 능력을 보여준 인원들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가장 두터운 신망을 받던 사마준만이 그 기대에 부응하였고, 전공에 있어서 종실 내에서 가장 뛰어난 모습을 보였다. 사마준이 신인이었을 때, 오나라 명장이자 전쟁터에서 50년을 구른 정봉을 상대로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줄 아는 시선을 발휘해 그의 이간계를 간파하여 석포를 구명하거나, 정봉제갈정의 합비 공세를 여유롭게 막아냈다. 또한 이민족 진압 때는 전임자들이 독발수기능에게 처참히 깨진 것을 반면교사 삼아 이민족들을 무작정 토벌하려 하기보다는 이이제이를 적극적으로 활용, 상대방이 방심할 때 빈틈을 노려 공격해 반란 세력을 야금야금 갉아먹으며 선비족들을 약해지게 했다. 그럴뿐만 아니라 둔전을 통해 진나라 군대의 전력을 다듬으면서 독발수기능의 반격에도 대비하였다. 이런 모습들을 보면 사마준은 사리 분별에 밝은 것은 물론이고, 실패를 겪으면 순순히 받아들인후에 그 원인을 냉철히 분석할 줄 아는 인물이라 평가된다. 또한 사마사의 죽음을 초래하고, 사마소와 여러 번 충돌했었다는 이유로 사마씨로부터 중용받지 못하던 문앙을 사마준은 적극적으로 써먹었다. 이를 보아 사마준이 인재를 등용할 때는 편협한 시각을 갖지 않고 능력에 주목하는, 그릇이 큰 인물이라는 것도 알 수 있다.

가충등의 실권자들의 내부 암투로 인해 독발수기능 토벌이 오랫동안 늦춰진 감이 없잖아 있지만 서진 조정에서 내세운 인재중, 그 강력한 독발수기능을 상대로 혁혁한 공을 세운 건 사마준밖에 없었던 것만 봐도 그의 능력이 입증된 셈이다.[54] 물론 이런 사마준에게 맥없이 당한 독발수기능이 마냥 호구인가 하면 또 그런 것만은 아닌 것이, 사마준을 제외한 그 누구도 독발수기능에게 반격하지 못하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사마준이 진압에 나서게 되기 전, 진압, 진압 후의 과정은 다음과 같다.

  • 첫 번째. 진주자사 호열을 기점으로 사마량, 석감이 줄줄이 진압에 나섰으나 전부 실패했다.
  • 두 번째. 다음 타자로 사마준과 견홍이 독발수기능 진압에 나섰지만, 사마준이 뭘 해보기도 전에 견홍이 이른 패배로 전사하였고, 사마준은 그 책임을 물어 경질되었다.
  • 세 번째. 가충이 부담을 느껴 진압을 회피하고 다시 사마준에게로 기회가 오자 양흔, 문앙, 마순을 기용하여 재차 토벌에 나섰다. 사마준은 일련의 실패들을 따져보니 모두 상대의 기세에 말렸음을 간파, 이에 토벌을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사마준은 자기만의 전략을 짜서 대응했고, 처음으로 독발수기능의 기세가 꺾이기 시작했다. 이것으로 양호는 사마준의 활약 덕분에 서량이 안정화되었다고 판단, 약해진 오나라를 토벌하기로 결심하는 바탕이 되었다.
  • 네 번째. 사마준이 선비족, 강족들을 포섭해 기껏 독발수기능의 세력을 약하게 만들었지만, 사마준과 문앙이 조정에 불려 가 자리를 비우자, 양흔은 독단으로 강족과의 화친을 일방적으로 끊은 후 공격하는 실책을 저질렀고, 되려 역습을 당해 죽고 말았다. 이렇게 양흔이 자충수를 두며 자멸한 사이에 그 틈을 타 독발수기능이 금산을 침공하여 양주자사 소유를 죽여버리며 다시 재기했다.[55]

즉, 이러한 전임자들의 행태를 자세히 살펴보자면 이민족들의 기세에 말려들어 갔다는 거나[56], 실책을 저지르거나[57], 상관과 부하의 대립으로 일을 그르친 것[58]들이 있다. 하지만 사마준은 기세에 말려들지 않은 것을 물론이요, 실책을 저지르지도, 부하들과 대립하지도 않으며 기본을 지켰다. 그러면서도 유일하게 독발수기능을 말 그대로 압살했다. 때문에 사마준의 전장장악능력은 물론, 그의 차분하고 성실한 태도도 높이 평가된다.

또한, 세설신어 덕행 편에 나온 일화로는 당시 서진의 명사 유보가 죄를 지어 도형에 처하면서 노역하고 있었는데, 사마준이 오백 필의 베로 대속시켜 줬다가 유보를 종사중랑으로 기용하자 사람들이 사마준의 미덕에 대해 칭찬하며 훌륭한 일이라 여겼다고 한다. 그 외에도 사마준은 부하를 좋게 어루만져 거느려 위엄과 은혜가 있었고, 뽕나무 농사를 감독할 때는 사졸과 더불어 일을 나누었다는 일화와 그가 졸했을 때는 서쪽 땅에서 그의 죽음을 듣고 우는 자가 길에 가득했고, 사람들이 슬퍼하며 비석을 세웠다는 것만 봐도 인품 또한 훌륭했음을 알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제헌왕 사마유의 좌천을 유일하게 반대한 종실 인물이었다. 평소 사마유의 인품과 명망을 알기에 사마준이 그를 지지[59]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결국 사마염은 사마준의 간언을 듣지 않았고, 사마유는 그대로 좌천되어 임지에서 죽고 말았다. 이후 사마준은 별다른 행적 없이 울분으로 병사했다는 기록만 나오는 것으로 보아 아마 사마준 또한 그 일로 사마염의 신뢰를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주변의 눈치를 보지 않고 목소리를 냈던 종실 인물은 결과적으로 사마준이 유일했으니, 그야말로 강단 있고 소신대로 행하는 성격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정리하자면 사마준은 인품, 성실, , 문무를 모두 겸비한 꽉 찬 육각형인데, 이를 어릴 적부터 실천해서 죽을 때까지 유지했다. 보통 초년에 출세하면 말년에 초라해지는 꼴이 많은데[60] 사마준은 그러지 않았다는 점에서 여러모로 완벽한 능력을 갖춘 인물이라 설명할 수 있다. 다만 사마준의 활약은 지방을 통치하면서 이민족 토벌을 했던 게 주를 이루었고, 오나라 정벌에는 참전하지 않았다. 그 때문인지 삼국지연의에서 사마준은 등장하지도 못했는데, 인지도가 떨어지는 탓에 언급이 되질 않는다.[61] 하지만 상술했다시피 실제 역사에서 보여준 면모들을 보면 가히 특급 인재였다 할 수 있겠다.[62]

지략이 돋보이는 군재뿐만 아니라 인품까지 빠짐없는, 지장과 덕장의 면모를 두루 갖춘 서진의 명장이다. 이 점에서 굳이 다른 인물과 비교하자면, 연의에서 업적이 모조리 묻혀버렸지만, 정사에서는 뛰어난 명장이자 덕장이었던 주연전예가 그와 대응될 것이다.

4. 기타[편집]


서진 태시 6년(270년) 이래 진나라 초 부풍왕(扶風王) 사마준이 진서대장군 도독옹량주등제군사(都督雍凉等州諸軍事)로 관중을 진수할 때, 사마 고평(高平, 연주 산양군 고평현)사람 유보(劉寶), 장사 형양(滎陽, 하남윤 형양현)사람 환습(桓隰) 등 여러 관속 사대부들이 제갈량에 대해 함께 논했다. 이때 논의하는 자들 다수는, '제갈량이 잘못된 곳에 몸을 맡겨 촉 백성들을 수고롭게 했으며, 힘은 적으면서 계획만 거창했으니 자신의 덕과 역량을 헤아리지 못했다'고 비웃었다.

금성(金城)사람 곽충은 '제갈량의 임기응변과 지혜, 뛰어난 지략이 관중, 안영보다 뛰어난 점이 있으나 공업(功業)을 이루지 못해 논자들이 미혹되었다'고 하며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제갈량에 관한 다섯 가지 일(이른바 곽충5사)을 조목조목 제시했다. 유보 등이 또한 다시 반박하지 못하고, 부풍왕은 개연(慨然)히 곽충의 말이 옳다고 하였다.

「촉기」


왕은이 편찬한 촉기에 곽충오사와 관련해서 사마준이 곽충의 말에 납득하는 모습이 나온다. 주 내용을 보자면 여러 관속 사대부들이라는 자들은 제갈량에 대해 실제로는 제대로 아는 게 없어서, 비웃으며 떠들다가 곽충의 5가지 일화를 듣고도 감히 제갈량에 대해 의심을 가지지 못해 반박하지 못하고 더 이상 비웃지 못했다는 것. 곽충의 일화를 그저 옳다고 한 사마준 역시 제갈량에 대해선 제대로 알지 못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대해 배송지는 곽충삼사(郭沖三事)[63]를 인용하면서, 해당 일화의 배경 자체가 실재하지 않음을 지적하고, 곽충이 상급자인 사마준을 상대로 발언하는 상황에 사마준의 아버지인 사마의가 조롱당한 일을 어떻게 대놓고 말할 수 있겠냐면서, 『촉기』가 허황된 일화를 기록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참고로 사마준은 사마의의 일곱째 아들이자 종실의 준걸로 이름을 날리던 사람이니 아버지 사마의의 일화를 잘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 사람 앞에서 부친이자 진나라의 추존 황제인 사마의를 비방하는 데다가 내용도 잘못된 말을 할 이유가 곽충에겐 전혀 없고 설령 말했다고 해도 사마준이 납득했을 리도 없다. 실제로 곽충오사는 1사를 제외하고는 자치통감에도 들지 못했다. 그 때문에 왕은은 와전된 일화를 촉기에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5. 대중 매체에서의 묘사[편집]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아직 미등장. 사마씨 가문에 흔치 않은 호걸형 인물이기 때문에 나오면 충분히 인기가 있을 법하지만 아직은 나오지 않았다. 나오면 일단 매력하고 통솔만은 80대 이상을 응당 받아야 하는 인물이기에 인물 부족에 시달리는 삼국지 후반부에 유용한 인재가 될 것이다.

삼국전투기에서는 형들이 청의 엑소시스트으로 패러디되면서 자연스럽게 아서 A 엔젤로 패러디됐다. 독발수기능의 난 (3)편의 타이틀 컷을 장식하기도 했으며, 소개컷에서는 사마의의 7남으로 여러모로 완벽한 능력자라고 서술되어 있다.

전투외편 8편에서 처음 등장. 석포가 의심을 받아 공격당할 위기에 처해서 손삭이 대책을 물으러 찾아오자 싸울 필요가 없는 싸움은 피하라고 조언했다. 이후에는 작피로 공략을 들어온 정봉제갈정개발살내기도 했다. 이후에는 군사권을 포기한 석포 대신 도독양주제군사로서 수춘에 주둔했다고 언급되기도 했다.

독발수기능의 난 편에서는 호열, 석감/두예 콤비가 전부 독발수기능의 난 제압에 실패하자 견홍과 함께 세 번째로 서량에 보내졌다. 그러나 사마준이 뭘 해 보기도 전에 견홍이 싸우러 뛰쳐나갔다 죽어버리면서(...) 난의 조기 진압은 물 건너 가게 되었고, 사마준은 견홍의 상관으로서 책임을 지고 경질됐다. 그러나 이후 후임으로써 서량으로 향할 예정이었던 가충이 이런저런 이유로 빠지게 되면서 이번에는 양흔문앙 등을 데리고 다시 옹양주 방면의 사령관으로 복귀하게 되었다.

사마준 본인은 이를 하늘이 다시 준 기회로 여겨 이번엔 반드시 성공시킬 것임을 다짐하며 다시 서량으로 향했다. 사마준은 서량에 도착한 뒤 독발수기능의 토벌을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보았다. 일찍이 호열, 석감, 견홍 모두 상대 페이스에 말리고 실패하며 그때마다 주변 이민족들이 독발수기능에게 가세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으니 일단 독발수기능이 상대의 뻘짓에 편승하지 않고도 세력을 키울 수 있는지 확인부터 해 보자고 생각하여 직접 대결을 피하고 둔전을 다시 시작해 장기전에 대비하였다. 그리고 사마준의 판단은 적중하여 독발수기능은 더 이상 세력 확장을 위한 탄력을 받지 못하였다.

그리고 그런 대치 상태에서 몇 년의 세월이 쭉쭉 흘러갔다고 묘사됐다. 사마준은 자잘한 공격은 철저한 방비로 막아내고, 양흔 등을 시켜 아직 독발수기능의 편에 붙지 않은 이민족들과 화친을 맺었으며, 이에 독발수기능의 세력은 해가 갈수록 힘이 떨어졌다고 언급되었다. 결국 조바심을 이기지 못한 독발수기능이 선제공격을 해 오자 문앙을 보내 독발수기능을 완전히 박살 냈다. 이 승리로 인해 독발수기능 휘하의 이민족이 20만 명 가까이 투항했지만, 이 엄청난 대승리가 역으로 작용해 중앙에서는 독발수기능의 난을 제압한 것이나 다름없다 여겨 사마준을 다시 중앙으로 불렀으며, 결국 미처 난을 다 제압하기도 전에 중앙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1] 청룡 원년생.[2] 음력 9월 29일이다.[3] 음력 12월 18일이다.[4] 음력 8월 21일이다.[5] 세설신어에 따르면 17남이라고 한다.[6] 지금의 산시 바오지 푸펑현.[7] 동복형 사마주와 같은 시호이다.[8] 부풍왕 직위를 이었고, 후에 순양왕에 봉해졌으나, 사마창은 아버지와 달리 성품이 포악하기에 그지없었다고 한다. 다만 동생에게는 우애가 있었는지 부풍왕에 봉해졌을 당시에 어린 소년이었던 사마흠에게도 식읍을 분봉하길 원했다고 한다. 후에 사마창은 영가의 난에 휘말려 생사 불명.[9] 이 작은아들 사마흠이 팔왕의 난에 휘말리게 되는데, 신야현공으로 분봉을 받은 후 제왕 사마경의 조왕 사마륜 토벌에 참여하여 신야군왕이 되었다. 이후로 이렇게 저렇게 줄타기하다가 장창반란군에게 살해당한다. 또한 사마흠은 그의 형 사마창과 마찬가지로 좋지 않은 성품을 지녔는데, 그의 폭정이 반란의 원인이었다.[10] 237 ~ 239년이다.[11] 239년.[12] 사마준 열전에 그대로 적혀있는 말이었다. 이런 높은 평가는 종실중에서도 아버지 사마의를 제외하면 없다.[13] 264년.[14] 양력 266년 2월 8일.[15] 268년.[16] 이는 수춘삼반의 영향도 컸다.[17] 사마준은 온현 출신이고 손삭은 회현(懷縣) 출신인데 두 곳이 하내군에 속하는지라 고향이 같았다.[18] 269년.[19] 서량(西涼) 이민족집단 중 하나[20] 형주자사로 지내던 호열정봉의 합비 침공 당시, 이에 호응하여 강하를 침공한 시적을 물리치며 주가를 올리고 있었다.[21] 270년.[22] 양력 270년 8월 27일.[23] 271년.[24] 사마준과 견홍, 둘 다 대오공략의 핵심이었으니, 이들의 대오전선 이탈은 차후 서진의 대오전략에 큰 차질을 빚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25] 흔히 서량이라고 불리는 양주가 아니라 강동에 있는 양주이다.[26] 사마준 입장에서는 좀 억울한 경질이지만, 서진 종실의 기대주를 보호하기 위한 측면도 없잖아 있다.[27] 272년.[28] 274년.[29] 274년.[30] 275년.[31] 276년.[32] 4년 전, 손오의 서릉독 보천을 구원하는 것에 대한 실패와 패전으로 평남장군으로 강등되었었다.[33] 대체로 공훈이 많은 원로대신에게 수여하는 1품계 직책.[34] 277년.[35] 얼굴에 두건을 쓰고 손을 뒤로 묶은 항복 표시.[36] 일설로는 사마씨의 원수인 문앙의 공적이 너무 높아질 것을 우려한 조치라고한다.[37] 사마량이 다스리는 부풍군은 옹주에 있고, 사마준이 다스리는 여음은 예주에 있었다.[38] 양력 277년 10월 5일.[39] 다만 양호가 이를 사양했다.[40] 278년.[41] 279년.[42] 280년.[43] 반대 이유로는 표면적으로 독발수기능을 완전히 토벌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었지만, 실상은 밖에 적을 두어야 안이 조용해진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 점을 가충의 노린 것이다.[44] 호열의 형이다.[45] 독발수기능이 재기할 수 있었던 것도 양흔의 실책 덕분이지 그 트롤링만 아니었으면 서량점거는 없을 일이었다.[46] 물론 사마준은 황족이라 가충이 대놓고 대들 수는 없었을 것이다.[47] 사마준은 그 당시 서량에서 이민족들 때려잡느라 바빴으니, 양호는 사마준을 어차피 후임으로 고려하지도 않았을 것이다.[48] 282년.[49] 283년.[50] 양력 286년 11월 2일, 음력으로는 9월 29일.[51] 나중에 사마흠은 팔왕의 난에 가담하여 줄타기 끝에 죽고 말았다. 사마창은 영가의 난 당시 실종되었다.[52] 사실 큰형과 둘째 형과는 아버지뻘, 아버지와는 할아버지뻘의 나이 차이다. 큰조카인 사마염하고 나이 차이가 고작 3살이니. 사실 세 아들 모두 아버지 사마의 능력을 잘 물려받은 케이스이지만, 각각 두드러지는 능력을 보여준다. 사마사는 정치력, 사마소는 군사능력, 사마준은 인품이다.[53] 물론 사마씨 입장에서는 꼭두각시나 다름없는 신세였던 조위 황제를 조롱할 의도도 있었겠지만, 어찌 됐든 매우 어린 나이에 황제에게 글을 가르칠 정도로 머리가 매우 명석했던 건 사실이었다.[54] 호열, 견홍, 석감은 독발수기능에게 쪽도 못 쓰고 당해버렸다. 사마량은 호열을 구원하기 위해 유기를 파견했으나 유기가 독발수기능에 겁을 먹고 지체하는 바람에 결국 호열이 전사하였고 그 책임으로 면직되었다.[55] 호열, 견홍, 양흔촉한멸망전때 군공을 세웠던 나름 서진의 A급 베테랑 장수들이었음에도 난을 진압하지 못하고 삽질끝에 목숨을 잃었다. 석감의 경우, 병주자사를 역임하며 흉노족과 하루가 멀다하고 싸워 온 경력이 있었고, 같이 갔던 두예도 유주 출신이라 이민족 상대 경험이 제법 있었다. 그럼에도 둘의 의견 충돌로 한쪽을 날려 버리는 바람에 석감도 패배하며 진압에 실패했다.[56] 호열, 견홍, 석감, 소유[57] 사마량, 유기, 양흔[58] 석감, 두예[59] 흥미롭게도 사마준과 사마유의 인연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아들 대로도 이어졌다. 사마준의 차남 신야왕 사마흠팔왕의 난 당시에 사마유의 삼남 사마경과 결탁했기 때문. 물론 그들도 결국 몰락하고 말았다.[60] 멀리 보면 공손찬, 제갈각등이 있고 동시대로는 사마염으로 예를 들 수 있다.[61] 그의 형 사마주는 오나라 정벌에 참전한 이력 때문인지 삼국지연의에 등장하긴 했다.[62] 아이러니하게도 사마준에게 빌빌 기던 이민족들은 사마준이 죽고 10여 년이 지난 영가의 난 시기에 서진을 말 그대로 먹어버렸다.[63] 역사적으로 확인되지 않는 일화로, 제갈량이 1만 병력으로 성을 지키던 중 사마의가 20만의 병력을 이끌고 왔음에도 제갈량의 허세에 속아 군을 물리자, 제갈량이 박장대소하며 사마의를 겁쟁이라 조롱했다는 내용이다. 배송지는 제갈량전에서 228년에 기산으로 출병하기 직전 대목에 이 일화를 인용하였는데, 그 영향인지 『삼국지연의』에서는 가정 전투 패전 직후 제갈량이 성문을 열어두고 문루에서 거문고를 켜면서 추격군을 이끄는 사마의를 물러나게 한 장면으로 각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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