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대구 선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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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갑 선거구와 을 선거구로 분구되어 있었으나 인구 감소로 16대 총선부터 두 선거구가 하나로 합쳐져 대구광역시 서구 단일 선거구로 재편되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재 국회의원은 국민의힘 소속의 김상훈 의원이다.
대구의 정치 지형 자체가 원래 보수정당 강세이기는 한데, 그 중에서도 특히 서구는 경북 의성군, 영덕군, 고령군, 성주군 이상으로 제일 보수세가 강하다. 실제로 18대 대선 때는 박근혜에게 대구 최다 득표율인 84%를 몰아줬으며,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선 권영진에게 62%를 몰아줬으며, 심지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및 탄핵 직후 치러진 19대 대선에서도 홍준표 후보에 과반이 넘는 54%를 몰아줌으로써[2] 보수세를 증명했다. 특히 문재인 정부의 임기 초반 민주당 열풍이 불고 역대급으로 보수정당이 폭망했던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도 유일하게 권영진에게 62%를 몰아준 지역이다.
TK의 보수세가 다시 강화된 20대 대선에서는 당연히 윤석열에게 대구 최다 득표율인 79%를 몰아줬다.[3] 대선으로부터 3개월이 지나 허니문 효과까지 더해진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역시 대권주자 급 거물이기도 한 홍준표에게 83%를 몰아줬다.[4]
서구가 이렇게 보수 강세를 보이는 데는 바로 섬유 산업의 몰락으로 인한 노동자 계층의 유출 + 상대적으로 낙후된 학군으로 인한 40대 유입 감소 + 고령화이다. 어찌보면 역시 섬유산업이 융성했다가 몰락한 마산합포구와 꽤 유사한 상황이다. 그나마 마산합포구는 그래도 김영삼의 주요 활동지이자, 경남대학교란 사립대학교도 있고 학군도 나쁘지 않은데다[5] 보금자리주택도 개발되기에 민주당세가 그래도 30%p 정도 존재하지만, 여기는 그렇지도 않다.
사실 달서구가 분구되기 전 서구는 대구직할시에서 가장 인구가 많고 밀집됐던 지역이었다. 또한 달서구가 분구된 이후에도 1992년까지 대구에서 인구 1위를 찍었던 곳이 바로 서구였다. 실제로 1990년에 치러진 4·3 재보궐선거 당시 기사에선 당시 서구 갑 선거구 관내 2030 세대의 비중이 64%에 이른다는 보도가 있었고, 민주당 백승홍 후보가 42.5%를 득표하는 등 당시 대구에서 가장 진보적인 지역이었다.[6][7]
하지만 서구 내에서의 섬유산업이 몰락하고, 칠곡지구, 월배지구, 성서지구가 개발되면서 타지 출신 노동자 인구의 유출이 급증하는 바람에 결과적으로 대구에서 가장 보수세가 강한 지역이 되었다. 실제로 위의 마산합포구와 서구 모두 해당 지역에서 가장 보수세가 강한 지역이다.
이는 여타 서대구 지역들과도 비교가 되는데, 달서구와 달성군은 지속적인 택지 개발에 따른 3040 외지인 유입 또는 산업시설 유치로 인한 노동자 계층 유입으로 대구 평균에 비해 보수세가 약해지는 기미를 보이는데 비해[8] , 서구는 같은 서대구권인 달서구와 달성군과 달리 유입될 요소가 없어서[9] 단기간 내에 변화를 나타날 가능성은 희박한 상황이다.
이 지역구 출신 유명 정치인으로는 유성환 국시론 파동의 주인공 유성환, 이만섭 전 국회의장, 하나회 멤버로 내무부장관과 국방부장관을 역임한 정호용,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 출신으로 후일 민선 1,2기 대구광역시장을 역임한 문희갑, 한나라당 대표최고위원을 역임한 강재섭 등이 있다.
여담으로 서중현 후보가 눈물겨운 도전을 한 선거구이기도 하다. 자세한 건 해당 항목을 참고하면 된다.
이때 서중현 후보가 기록한 28%는 1992년 14대 총선 이후, 서구에서 민주당계 후보가 기록한 최고 득표율이며, 당시 서중현 후보의 선거 전적은 6전 전패였다.
이 선거 이후 4명 중 3,4등은 6년 후 각각 정의당[12] , 새정치민주연합 소속으로 서구의회에서 만나게 되었고,[13] , 당선자는 4년 뒤에 서울로 진출했지만, 민주통합당 중진급에게 지고 은퇴하였다.
당선자인 김상훈 후보는 60%에 맞먹는 득표율을 받으며 당선에 성공하였다. 반면 민주통합당 윤선진 후보는 10%를 겨우 넘겨서 반액보전 받는데 그쳤다.[14]
여담으로 서중현 후보는 이번 낙선으로 11전 3승 8패가 되었다.
윤두현은 서구와 먼 경산시 출신인 반면 김상훈은 서구 토박이로 지역구 관리에 신경썼다. 당연히 여론 경선에서도 서구와 먼 경산 출신인 윤두현보다 서구 토박이인 김상훈이 더 좋은 결과를 얻어 김상훈이 경선에서 승리하고 공천받았다.
여기서 서중현은 탈당하고 무소속으로 출마하였지만 결국 김상훈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로써 서중현의 선거 전적은 13전 3승 10패(...)가 되었다.아니 차라리 탈당하지 말고 그냥 출마하지...
당시까지만 해도 서구 인구가 20만명 수준이라 8만의 중구와 합쳐 서구 갑과 중구·서구 을 2개의 선거구로 만들고 남구를 단독선거구로 환원시키자는 주장이 제기됐으나 실현되지는 않았다.
미래통합당에서는 현역 김상훈 의원이 재출마하고, 서중현 전 구청장도 입당했는데 경선을 치를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결국 컷오프되고 다시 탈당했다. 조호현 전 새로운보수당 노동위원장도 예비후보로 등록했으며 결국 현역 김상훈 후보가 공천되었다.
서중현 후보는 무려 14번째 도전을 하게 되었으며, 이로써 8년만의 리매치가 벌어지게 되었다.
정의당에서는 장태수 시당위원장이 예비후보로 등록했으며 결국 공천되었다.
이변 없이 김상훈 의원이 70%에 가까운 득표로 당선되었으며, 서중현 후보는 윤선진 후보에게도 밀리면서(...) 반액도 보전 못받는 굴욕을 겪게 되었다. 이로써 선거 전적은 14전 3승 11패(...)[16]
관련 문서: 서구(대구광역시)/정치
1. 개요[편집]
본래 갑 선거구와 을 선거구로 분구되어 있었으나 인구 감소로 16대 총선부터 두 선거구가 하나로 합쳐져 대구광역시 서구 단일 선거구로 재편되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재 국회의원은 국민의힘 소속의 김상훈 의원이다.
대구의 정치 지형 자체가 원래 보수정당 강세이기는 한데, 그 중에서도 특히 서구는 경북 의성군, 영덕군, 고령군, 성주군 이상으로 제일 보수세가 강하다. 실제로 18대 대선 때는 박근혜에게 대구 최다 득표율인 84%를 몰아줬으며,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선 권영진에게 62%를 몰아줬으며, 심지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및 탄핵 직후 치러진 19대 대선에서도 홍준표 후보에 과반이 넘는 54%를 몰아줌으로써[2] 보수세를 증명했다. 특히 문재인 정부의 임기 초반 민주당 열풍이 불고 역대급으로 보수정당이 폭망했던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도 유일하게 권영진에게 62%를 몰아준 지역이다.
TK의 보수세가 다시 강화된 20대 대선에서는 당연히 윤석열에게 대구 최다 득표율인 79%를 몰아줬다.[3] 대선으로부터 3개월이 지나 허니문 효과까지 더해진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역시 대권주자 급 거물이기도 한 홍준표에게 83%를 몰아줬다.[4]
서구가 이렇게 보수 강세를 보이는 데는 바로 섬유 산업의 몰락으로 인한 노동자 계층의 유출 + 상대적으로 낙후된 학군으로 인한 40대 유입 감소 + 고령화이다. 어찌보면 역시 섬유산업이 융성했다가 몰락한 마산합포구와 꽤 유사한 상황이다. 그나마 마산합포구는 그래도 김영삼의 주요 활동지이자, 경남대학교란 사립대학교도 있고 학군도 나쁘지 않은데다[5] 보금자리주택도 개발되기에 민주당세가 그래도 30%p 정도 존재하지만, 여기는 그렇지도 않다.
사실 달서구가 분구되기 전 서구는 대구직할시에서 가장 인구가 많고 밀집됐던 지역이었다. 또한 달서구가 분구된 이후에도 1992년까지 대구에서 인구 1위를 찍었던 곳이 바로 서구였다. 실제로 1990년에 치러진 4·3 재보궐선거 당시 기사에선 당시 서구 갑 선거구 관내 2030 세대의 비중이 64%에 이른다는 보도가 있었고, 민주당 백승홍 후보가 42.5%를 득표하는 등 당시 대구에서 가장 진보적인 지역이었다.[6][7]
하지만 서구 내에서의 섬유산업이 몰락하고, 칠곡지구, 월배지구, 성서지구가 개발되면서 타지 출신 노동자 인구의 유출이 급증하는 바람에 결과적으로 대구에서 가장 보수세가 강한 지역이 되었다. 실제로 위의 마산합포구와 서구 모두 해당 지역에서 가장 보수세가 강한 지역이다.
이는 여타 서대구 지역들과도 비교가 되는데, 달서구와 달성군은 지속적인 택지 개발에 따른 3040 외지인 유입 또는 산업시설 유치로 인한 노동자 계층 유입으로 대구 평균에 비해 보수세가 약해지는 기미를 보이는데 비해[8] , 서구는 같은 서대구권인 달서구와 달성군과 달리 유입될 요소가 없어서[9] 단기간 내에 변화를 나타날 가능성은 희박한 상황이다.
이 지역구 출신 유명 정치인으로는 유성환 국시론 파동의 주인공 유성환, 이만섭 전 국회의장, 하나회 멤버로 내무부장관과 국방부장관을 역임한 정호용,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 출신으로 후일 민선 1,2기 대구광역시장을 역임한 문희갑, 한나라당 대표최고위원을 역임한 강재섭 등이 있다.
여담으로 서중현 후보가 눈물겨운 도전을 한 선거구이기도 하다. 자세한 건 해당 항목을 참고하면 된다.
2. 역대 국회의원 목록과 역대 선거 결과[편집]
2.1. 제16대 국회의원 선거[편집]
2.2. 제17대 국회의원 선거[편집]
이때 서중현 후보가 기록한 28%는 1992년 14대 총선 이후, 서구에서 민주당계 후보가 기록한 최고 득표율이며, 당시 서중현 후보의 선거 전적은 6전 전패였다.
2.3. 제18대 국회의원 선거[편집]
이 선거 이후 4명 중 3,4등은 6년 후 각각 정의당[12] , 새정치민주연합 소속으로 서구의회에서 만나게 되었고,[13] , 당선자는 4년 뒤에 서울로 진출했지만, 민주통합당 중진급에게 지고 은퇴하였다.
2.4. 제19대 국회의원 선거[편집]
당선자인 김상훈 후보는 60%에 맞먹는 득표율을 받으며 당선에 성공하였다. 반면 민주통합당 윤선진 후보는 10%를 겨우 넘겨서 반액보전 받는데 그쳤다.[14]
여담으로 서중현 후보는 이번 낙선으로 11전 3승 8패가 되었다.
2.5. 제20대 국회의원 선거[15] [편집]
당시 현역 의원이었던 김상훈 역시 친유라는 이유로 컷오프 대상으로 거론됐고, 친박 성향 윤두현이 출마를 선언했다. 그런데 새누리당 지도부에서 서구는 경선 지역으로 분류하였고, 서초구 갑의 이혜훈, 평택시 을의 유의동, 중구·성동구 을의 지상욱과 같이 경선을 치루었다.
윤두현은 서구와 먼 경산시 출신인 반면 김상훈은 서구 토박이로 지역구 관리에 신경썼다. 당연히 여론 경선에서도 서구와 먼 경산 출신인 윤두현보다 서구 토박이인 김상훈이 더 좋은 결과를 얻어 김상훈이 경선에서 승리하고 공천받았다.
여기서 서중현은 탈당하고 무소속으로 출마하였지만 결국 김상훈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로써 서중현의 선거 전적은 13전 3승 10패(...)가 되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서구 인구가 20만명 수준이라 8만의 중구와 합쳐 서구 갑과 중구·서구 을 2개의 선거구로 만들고 남구를 단독선거구로 환원시키자는 주장이 제기됐으나 실현되지는 않았다.
2.6. 제21대 국회의원 선거[편집]
더불어민주당에서는 출마할 후보자를 한참 구하지 못하다가 윤선진 지역위원장이 불출마를 번복하고 예비후보로 등록했으며 공천되었다.
미래통합당에서는 현역 김상훈 의원이 재출마하고, 서중현 전 구청장도 입당했는데 경선을 치를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결국 컷오프되고 다시 탈당했다. 조호현 전 새로운보수당 노동위원장도 예비후보로 등록했으며 결국 현역 김상훈 후보가 공천되었다.
서중현 후보는 무려 14번째 도전을 하게 되었으며, 이로써 8년만의 리매치가 벌어지게 되었다.
정의당에서는 장태수 시당위원장이 예비후보로 등록했으며 결국 공천되었다.
이변 없이 김상훈 의원이 70%에 가까운 득표로 당선되었으며, 서중현 후보는 윤선진 후보에게도 밀리면서(...) 반액도 보전 못받는 굴욕을 겪게 되었다. 이로써 선거 전적은 14전 3승 11패(...)[16]
2.7. 제22대 국회의원 선거[편집]
[1] 사실 무소속 후보들도 모두 새누리당이다. 공천받지 못하자 탈당하고 무소속으로 출마한 것이다.[2] 참고로 여기와 비슷한 득표율을 얻은 지역은 바로 경상북도 영양군이다. 즉 경북 북부의 군과 비슷한 득표율을 얻은 것.[3] 민주당 후보 이재명은 대구에서 유일하게 20% 미만의 득표율을 얻어서 선거비 보전 기준인 15%만 넘겼다.[4] 민주당 시장 후보 서재헌은 대구 8개구, 군 중 유일하게 선거비용보존 기준인 15%도 넘기지 못했다.[5] 야구팀이 있는 마산용마고등학교, 마산고등학교/마산여자고등학교가 있다.[6] 지금으로 치자면 달서구 을 정도의 포지션이다. 2010년대 기준이라면 수성구 갑[7] 다만 이는 정호용의 지지층을 일부 흡수한 효과라는 분석도 있다.[8] 실제로 이 두 곳은 19대 대선 당시 문재인 후보가 대구 평균 이상의 득표율을 기록한 반면, 홍준표 후보는 대구 평균 이하의 득표율을 기록했는데, 이는 서구에 비해 10% 이상 낮은 수치였다.[9] 위에서 선술했듯이 학군이 안 좋기에 학부모 세대인 4050대와 그들의 자녀인 10대가 유입될 요소가 적기 때문이다. 물론 인구 증가로 인해 새로 학교가 지어진다면 학군이 개선되겠지만 그러려면 최소 10~20년 정도는 기다려야 된다.[10] 1990년 1월 8일 의원직 사퇴.[11] 1990년 4월 3일 재보궐선거.[대구서구] A B C D E F G 비산1동, 비산2·3동, 비산4동, 비산5동, 비산6동, 비산7동, 평리1동, 평리2동, 평리3동, 평리4동, 평리5동, 평리6동, 내당1동, 내당2·3동, 내당4동, 상중이동, 원대동.[12] 노동당 소속으로 당선되었지만, 정의당 소속으로 합류했다.[13] 당시 오세광 의원은 서구 나 선거구(평리2동,평리4동,평리5동,평리6동,상중이동)에서, 장태수 의원은 서구 라 선거구(비산2,3동, 비산4동,비산6동,평리1동,평리3동)에서 당선되었다. 그 뒤 차기 지방선거에서 오세광 의원은 같은 동네에서 재선에 성공했고, 장태수 의원은 더 높은 자리를 도전했지만 낙선하였고, 차차기 지방선거에선 오세광 의원은 장태수가 3선했던 그 지역구로 옮겼지만 1%p 격차로 3선 도전에 실패했다.[14] 다만 해당 후보의 출신지는 대구광역시가 아니라 서울특별시고, 대학교만 대구에서 나왔다. 이를 감안하면 어찌보면 노년층 인구가 많은 서구에서 이 정도 득표율도 사실 선전한 거나 마찬가지라고 봐도 무방하긴 하다.[15] 사실 무소속 후보들도 모두 새누리당이다. 공천받지 못하자 탈당하고 무소속으로 출마한 것이다.[16] 특히 이번 총선에서의 패배는 매우 굴욕적인데, 아무래도 서구 토박이이자 서구에서 여러번 도전해서 인지도가 있는 후보가, 서울 출신의 외지인에게도 밀리는 대굴욕을 겪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