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기우치 도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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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91919><bgcolor=#f49c00> 감독 || 83 아베 신노스케 ||
||<bgcolor=#f49c00> 1군 || 76 니오카 토모히로(헤드코치 겸 타격수석코치) · 74 무라타 요시노리(종합코치) · 81 스기우치 토시야(수석투수코치)
77 우츠미 테츠야(투수코치) · 78 카와이 마사히로(내야수비코치) · 79 카메이 요시유키(외야수비·주루코치)
88 사네마츠 카즈나리(배터리코치) · # 아나부키 이쿠오(트레이닝코치) ||
||<bgcolor=#f49c00> 2군 || 73 쿠와타 마스미(2군 감독) · 75 안도 츠요시(헤드코치) · 71 야마구치 테츠야(수석투수코치) · 72 오타케 켄(투수코치)
85 와키야 료타(내야수비·주루코치) · 82 스즈키 타카히로(외야수비·주루코치) · 87 하시모토 이타루(타격코치) · 89 카토 켄(배터리코치)
# 이시모리 타카시(트레이닝코치) ||
||<bgcolor=#f49c00> 3군 || 70 코마다 노리히로(3군 감독) · 86 후루키 시게유키(타격코치) · 100 미사와 코이치(수석투수코치)
104 노가미 료마(투수코치) · 105 요시카와 다이키(내야수비코치) · 103 킨죠 타츠히코(외야수비·주루코치)
102 이치카와 토모야(배터리코치) · # 존 터니(트레이닝코치) ||
||<bgcolor=#f49c00> 순회 || 84 쿠보 야스오(순회투수코치) · 110 젤러스 휠러(순회타격코치) ||
||<-2><bgcolor=#000000,#000000> 코칭스태프투수포수내야수외야수육성선수 ||
||<bgcolor=#ffffff,#1f2023><:><-3>틀:요미우리 자이언츠로 돌아가기 ||
||<-2><height=30><bgcolor=#ffffff,#1f2023> 다른 NPB 팀 명단 보기 ||



스기우치 토시야의 수상 경력 / 보유 기록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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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2003fdhnipponserieschampion.png 파일: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우승 엠블럼 V5.svg 파일:12 giants.png
NPB 일본시리즈
우승반지

2003
2011
2012[1]

파일: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로고.svg파일: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로고.svg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c7bc69 우승반지}}}
2006
2009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2005년 일본프로야구 퍼시픽 리그 투수 부문 베스트 나인
이와쿠마 히사시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

스기우치 토시야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사이토 가즈미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2005년 퍼시픽 리그 최우수 방어율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2005년 퍼시픽 리그 최다 승리
--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2008, 2009년 퍼시픽 리그 최다 탈삼진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2012년 센트럴 리그 최다 탈삼진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2009, 2010년 퍼시픽 리그 최고 승률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2012년 센트럴 리그 최고 승률


파일:NPB 로고.svg 2003년 일본 시리즈 MVP

니오카 토모히로
(요미우리 자이언츠)

스기우치 토시야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이시이 다카시
(세이부 라이온즈)

보유 기록(NPB)
통산 K/9 1위
9.28개[2]

후쿠오카 다이에-소프트뱅크 호크스 등번호 47번
브라이언 뱅크스
(2000)

스기우치 토시야
(2002~2011)


호아시 카즈유키
(2013~2015)
{{{#fe5a1d [[요미우리 자이언츠|요미우리 자이언츠]] 등번호 18번}}}
쿠와타 마스미
(1986~2006)

스기우치 토시야
(2012~2018)


스가노 도모유키
(2019~)
{{{#fe5a1d [[요미우리 자이언츠|요미우리 자이언츠]] 등번호 85번}}}
사이토 마사키
(2018)

스기우치 토시야
(2019~2021)


미사와 코이치
(2022~2023)
{{{#fe5a1d [[요미우리 자이언츠|요미우리 자이언츠]] 등번호 81번}}}
아오키 타카히로
(2022~2023)

스기우치 토시야
(2019~)


현역




파일:스기우치 도시야 코치.jpg

요미우리 자이언츠 No.81
스기우치 토시야
杉内俊哉 | Toshiya Sugiuchi

생년월일
1980년 10월 30일 (43세)
국적
[[일본|

일본
display: none; display: 일본"
행정구
]]

출신지
후쿠오카현 오노조시
학력
가고시마 실업 고교 (가고시마)
신체
175cm, 82kg
포지션
투수
투타
좌투좌타
프로입단
2001년 드래프트 3라운드 (전체 22번, 다이에)
소속팀
후쿠오카 다이에-소프트뱅크 호크스 (2002~2011)
요미우리 자이언츠 (2012~2018)
지도자
요미우리 자이언츠 2군 투수코치 (2019~2020)
요미우리 자이언츠 1군 투수코치 (2021)[1]
요미우리 자이언츠 2군 투수코치 (2021)[2]
요미우리 자이언츠 3군 투수코치 (2022~2023)
요미우리 자이언츠 1군 수석투수코치 (2024~ )
등장곡
킷카와 코지 - SPEED

1. 개요
2. 플레이 스타일
3. 선수 경력
3.1. 후쿠오카 다이에/소프트뱅크 호크스 시절
3.2.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
3.3. 국가대표 경력
4. 여담
5. 연도별 기록
6. 둘러보기



1. 개요[편집]


요미우리 자이언츠 소속의 前 좌완투수이자 現 코치.

좌완 선발투수로 왼손 스리쿼터 투수의 모범으로 평가받는 깨끗한 투구폼을 지니고 있으며, 이상적인 릴리즈포인트에서 뿌리는 포심과 커브, 슬라이더, 체인지업으로 타자를 요리하는 타입의 투수였다.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에서 전성기를 보낸 뒤 FA 자격을 얻어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 이적 초기에는 괜찮은 활약을 보여준 시즌도 있었지만 차츰 부상의 연쇄에 시달리며 출장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먹튀 테크를 밟은 끝에 2018년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2. 플레이 스타일[편집]



본인이 꼽은 최고의 투수 3인 중 한명으로 스기우치를 언급한 이범호.[3]



패스트볼
체인지업[4]

포심의 최고구속이 150km이긴 하지만 선발로 나와 던지는 실질적인 구속은 최고 146km/h, 평균 140km/h에 컨디션에 따라서는 평균 구속이 130km/h 중반대까지도 떨어진다. 이러한 낮은 구속만 보고 좌완 기교파 투수로 오해하기 쉽지만 스기우치는 주무기가 포심인 파워피처이다.

그 증거로 탈삼진 능력이 리그 정상급인데 200K 이상 시즌이 4번에, 통산 K/9은 무려 9.27개이다.[5] 이는 NPB에서 1,000이닝 이상을 던진 투수들 중 역대 2위 기록이다.[6] 동시대 퍼시픽리그에서 함께 활약한 다르빗슈의 NPB 통산 K/9이 8.86개라는 것을 감안하면 실로 엄청난 기록.[7][8][9]



중계 카메라 시점에서 본 투구폼
측면에서 본 투구폼

포심의 낮은 구속에도 불구하고 스기우치가 탈삼진 머신이 된 이유는 간결한 투구 템포와 릴리즈 덕분에 포심이 구속 이상의 위력을 발휘하기 때문인데, 실제로 타자의 체감구속은 140km/h 후반대라고 한다.[10] 실제, 미국에서는 스기우치와 비슷한 유형의 투수들의 특징을 deceptive arm swingdelaying release라고 지칭한다. 팔 스윙과 릴리스를 최대한 지연시키는 투구폼을 말하는 것인데, 일본에서 말하는 球の出所が見にくい, 球持ちが良い 라는 표현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한국어로 번역하면 공이 늦게 릴리즈 되어, 볼이 나오는 지점을 보기 힘들다는 의미이다. 즉 공을 최대한 늦게 릴리즈 하는 것을 의미하며, 스기우치의 이러한 특유의 투구폼이 타자들의 히팅 타이밍을 흔들기 때문에 타자들에게 스기우치가 던지는 포심의 체감구속은 더 빠르게 보였을 것이다.

이러한 구위에다가 공을 숨기는 디셉션 동작도 매우 훌륭하니[11] 타자 입장에서는 타이밍을 더 맞추기 어려워진다. 또한, 스기우치는 종종 투구 템포를 바꿔가며 던졌다.[12] 스기우치는 인터벌을 달리하여 투구 템포를 바꿨는데, 이를 굉장히 자유자재로 바꿔 던졌다. 투구폼 자체도 워낙에 간결한 데다가 스트라이드 직전에 특유의 글러브를 팍 치며 확 앞으로 나가는 동작과 맞물려 매 투구마다 달라지는 인터벌이 예측 불허니 체감 구속이 더욱 빨라져 타자들을 더욱 까다롭게 했다. 이렇듯, 타이밍을 빼았는데는 도사 수준이었다.[13] 즉, 포심 자체의 위력도 뛰어났지만 투구 템포나 디셉션 등으로 타이밍 뺏는 능력까지 겸해 포심의 위력이 더욱 배가 된 케이스라고 보면 된다.[14] 여담으로, 이러한 스기우치의 노력은 일본 대표 언더 투수 와타나베 슌스케의 노력과 비견될만 하다. 와타나베의 경우, 패스트볼의 완급 조절시 미세하게 투구폼의 속도까지 조절했다. 그리고 릴리즈 포인트도 최저 5CM로 맞추어 던지기는 하지만 미묘하게 릴리즈 포인트를 다르게 던지는 노력을 했다고 알려져있다. 스기우치 역시 상술하였듯, 릴리즈나 디셉션, 투구 템포 변화 등에서 본인이 가진 무기를 극대화 하는 방향의 노력을 하였다. 두 투수 모두 타고난 유형의 파워 피처는 아니였지만[15], 타자의 타이밍을 빼앗는 투구폼으로 둘 다 강속구 투수 못지 않은 위력[16]을 보이는 투수가 될 수 있었던 셈.[17][18] 이러한 두 투수의 모습은 강속구를 장착하지 못한 후배 투수들에게 본인이 가진 무기를 어떻게 극대화해서 타자를 상대해야 하는지, 좋은 귀감이 되고 있다.[19]


현역시절 커브[20]
무엇보다 변화구가 무시무시하다는 점도 포심의 위력을 높이는데 한몫 한다. 스기우치의 커브는 NPB를 대표하는 커브 중 하나였는데, 커리어 연차가 쌓이며 커브보다는 슬라이더와 체인지업의 비중을 높였을 정도로 두 구종 모두 위력이 더해졌다.[21] 특히 위 영상에서 이범호가 언급했듯이 본인만의 독특한 그립으로 던지는 체인지업은 거의 마구 수준.[22] 그립 덕에 워낙 무브먼트가 특이하다 보니 무회전 체인지업이라는 우스갯 소리도 있었다.[23] 탈삼진이 많다고 이닝을 못 먹어주는 것도 아니고 평균 7이닝 이상을 꼬박꼬박 먹어주니 그야말로 이상적인 선발투수라고 할 수 있었다.[24]

워낙 구위와 변화구가 좋다 보니 그에 가려져서 잘 언급되지는 않지만, 제구도 상당히 뛰어난 투수다.

하지만 영광의 호크스 시절을 뒤로 하고 요미우리로 FA 이적한 이후로는 만성화된 고관절 부상으로 신음하면서 첫 2년 이후로는 제대로 출장조차 하지 못하고 결국 은퇴를 선택했다.


3. 선수 경력[편집]



3.1. 후쿠오카 다이에/소프트뱅크 호크스 시절[편집]



소프트뱅크의 에이스 시절
가고시마실업고등학교 시절 에이스로 활약하며 여름 고시엔 가고시마 현 예선에서 47.2이닝에 64탈삼진이라는 무시무시한 기록을 보여주며 '남국의 닥터 K(南国のドクターK)'라는 별명으로 통했다. 1998년 여름 고시엔에서 1회전 노히트 노런을 기록했으나 2회전에서 마쓰자카 다이스케의 요코하마고등학교에게 8이닝 6실점(마쓰자카에게 허용한 홈런 포함)으로 패전투수가 됐다. 하지만 현 대회에서 엄청난 성적을 거둔지라 촉망받는 유망주로 손에 꼽혔다.

고교 졸업 후 일본 실업야구팀인 미쓰비시 중공업 나가사키에 입사한 뒤 사회인 신분으로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로스터에 포함되었고 2001년 신인드래프트에서 3라운드로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에 입단했다. 데뷔 시절부터 투구폼 자체가 매우 깨끗하고 안정적이라 그런지 기복이 거의 없는 꾸준한 활약을 보여주었다. 조정기였던 데뷔 첫 해의 성적을 빼고 보면, 2003년부터 FA이적 전인 2011년의 기간동안 손가락 부상으로 시즌아웃 된 2004년을 제외하면 한 해도 부진한 적이 없어서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의 중흥에 큰 공헌을 했다. 특히 2003시즌 사이토 카즈미-와다 츠요시-스기우치 토시야-아라카키 나기사로 이어지는 황금 선발진의 일원으로 뛰며 2003년 일본시리즈 MVP를 수상, 파리그의 수준급 투수로 성장하게 된다.

문제의 그 시즌인 2004년 6월 1일 지바 롯데를 상대로 2이닝 7실점을 기록하여 강판당한 직후 분에 못이겨서 양 주먹으로 콘크리트 바닥을 강타하다 셀프골절을 당한 흑역사급 경험을 하게된다.# 그리고 이 경기가 04시즌 스기우치의 마지막 선발등판 경기가 된다.(...) 다만 이 사건 바로 다음해인 2005년 26경기 196.2이닝(8완투) 18승 4패 ERA 2.11 218탈삼진[25]으로 최다승, 최우수 평균자책점, 최고승률의 타이틀을 차지하고 퍼시픽리그 MVP, 투수 부문 베스트나인은 물론 퍼시픽리그 좌완 투수로는 사상 최초의 사와무라상 수상자가 되며 명실상부한 일본 대표 사우스포 선발투수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호크스에서 남긴 성적만 보더라도 10시즌 평균자책 2.92에 103승 55패 42완투 17완봉 1520.1이닝 1597탈삼진 WHIP 1.15라는 실로 괴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이는 한때 센트럴리그를 풍미했던 6대 에이스 우에하라 코지(전 요미우리), 이가와 케이(전 한신), 카와카미 겐신(전 주니치), 이시카와 마사노리(야쿠르트), 미우라 다이스케(요코하마 디엔에이), 쿠로다 히로키(전 히로시마)랑 비교해보더라도 더 뛰어난 성적이다. 동갑내기인 괴동 마쓰자카 다이스케와 비교해도 완투기록을 빼면 떨어질 게 없는 수준. 능력, 성적, 꾸준함 등 모든 면에서 실로 최고의 투수라고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왠지 일본야구, 아니 퍼시픽 리그에서조차도 최고의 투수라는 느낌은 거의 없는데, 안 그래도 호크스가 워낙 투수 강팀인데다가 전성기가 시작된 2003년은 하필이면 지금까지도 꾸준히 회자되는 사이토 가즈미, 스기우치 토시야, 와다 츠요시, 아라카키 나기사라는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 4선발 투수진이 결성된 해이기 때문. 그 중에서도 지금으로 치자면 다르빗슈 유에 맞먹는 괴물로 평가받던 사이토 가즈미에게 포커스가 워낙 집중된 경향이 커서 상당히 손해본 감이 있다.[26] 사이토와 아이들이라는 인상이 워낙 강한 탓에 온갖 야구 커뮤니티가 마쓰자카 다이스케사이토 가즈미의 비교로 들끓었던 시대였으니. 팀 내에서 사이토의 입지가 워낙 독보적이라 그가 부상으로 잠정 은퇴하게 되는 2007년까지는 단 한번도 개막전 선발 등판을 맡아본 적이 없다. 이후 마쓰자카는 메이저로 떠나고, 사이토는 잠정 은퇴하게 되어 드디어 파리그를 좀 호령해 보게 되나 싶었는데 다른 괴물이...

그렇다고 사와무라 에이지사이토 가즈미처럼 비운의 에이스라든가, 미우라 다이스케쿠로다 히로키처럼 약팀에서 홀로 고군분투하는 안타까운 에이스라는 이미지가 있는 것도 아니고, 조강지처가 좋더라이와쿠마 히사시처럼 화려하게 재기한 것도 아닌 그냥 꾸준히 잘 하는 선수이기에 호크스 팬이나 타팀 팬이나 스기우치가 잘 던지더라도 이기든 지든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3.2.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편집]


파일:external/www.sports-neta.com/20111223-toshiya-sugiuchi-giants-join-conference.jpg
교진군 입단회견. 왼쪽은 하라 타츠노리 감독.

2011시즌 종료 후 FA권리를 행사, 당시 최고 수준의 대우라고 할 수 있는 4년 총액 20억엔의 계약과 함께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했다. "어제까지는 FA 신청할 생각도 없었다. 평생 호크스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라는 발언으로 신나게 까이는 중(...). 가고시마 출신이라 호크스의 홈보이인데, 고향팀을 져버린다는 자체가 호크스 팬들의 멘붕을 불러 일으킨 건 당연하다.

이미 FA 권리 취득을 1년 남겨둔 2010년 시즌 후부터 이적 조짐은 보였다. 소프트뱅크에서 LG 트윈스의 이른바 신연봉제와 비슷한 연봉시스템을 채택하면서 연봉산정에서 커리어 고과의 비중이 줄어들고 직전 해 성적의 비중이 높아진 것. 그때문에 스기우치는 연봉산정 시스템에 이의를 제기했고 연봉협상 석상에서 "구단이 이 시스템을 고집하면 나도 FA를 진지하게 생각해 볼 수 밖에 없다."라고 발언했다. 그런데 협상을 담당한 구단이사라는 분이[27] 당시 9년동안 95승을 올린 리그의 에이스 투수에게 "FA 신청하면 손들고 나서는 구단은 있습니까?"라는 어이가 안드로메다로 날아가는 멍청한 대답을 했고 여기서 빡친 스기우치는 이미 2011년 시즌 들어가기 전에 구단에서 마음이 떠나 있었다.

구단 프런트가 머리를 박고 사죄를 하고 오 사다하루 구단 회장과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이 직접 나서서 만류를 해도 모자랄 판에 스기우치가 FA를 선언한 이후에도 미적지근한 대응으로 일관했고, 기껏해서 성의를 보인다는 게 요미우리와 같은 대우였다. 결국 모두의 예상대로 스기우치는 호크스를 떠나서 요미우리로 이적하게 되었다. 결국 그 이사님은 스기우치 이적의 책임을 지고 사직서를 내야 했다. 소뱅이나 여기나 그놈의 신연봉제와 막장 프런트가 문제다.

네이버에서 일본프로야구 관련 칼럼을 기고하는 키무라 고이치 기자는 이 과정이 석연치 않다면서 의혹을 제기했다. 퍼시픽 리그 관중동원 1위를 기록하면서도 선수들의 연봉 상승으로 재정 압박에 시달리는 소프트뱅크와 당장 선발로테이션을 채울 선발투수가 절실한 요미우리 사이에 모종의 거래가 있지 않을까하는 견해를 피력한 것. 실제로 소프트뱅크는 스기우치에 대한 보상으로 선수 대신 금전을 선택했고 이 점은 두터운 선수층으로 기회를 못 잡는 유망주들이 넘쳐나는 요미우리의 선수층을 생각하면 약간 의혹이 남는 부분이기도 하다. 하지만 소뱅이 이후 주축 선수들이 빠진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돈지랄브래드 페니윌리 모 페냐를 영입한 것을 생각해보면 사실일 가능성은 별로 없는 듯. 막상 그 둘은 다 망했고, 특히 페니는 NPB 역대급 먹튀 용병[28]이었기에 전혀 빈자리를 채우진 못했지만.

어쨌든 교진군에 입단, 에이스 번호인 18번을 달고 뛰게 되었다.[29] 그리고 원 에이스인 우츠미 테츠야와 에이스 자리를 놓고 다투게 되었다.

2012년 5월 30일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전 홈경기에서 노히트노런을 달성했다. 아쉬운 점이라면 9회말 투아웃까지 26 up 26 down을 시전하다가 마지막 9번 투수 타석 대타 나카시마 토시야에게 풀카운트에서 아쉽게 볼넷을 내주며 노히터에 만족해야 하는 신세가 된 것. 해당 경기 장면

결과적으로 2012년 시즌에서는 163이닝을 던지며 12승 4패, 평균자책 2.04, WHIP 0.98, 탈삼진 172개를 기록하며 요미우리의 세리그 우승에 큰 공헌을 하며 돈값을 톡톡히 했다. 다승에서는 우츠미에게 밀렸으나 그 외 세부성적으로는 에이스로 꼽기에 손색없는 좋은 기록을 남겼다. WHIP과 탈삼진의 경우는 리그 1위.[30] 특히 시즌 초반 거인이 개삽을 푸고 있을 때 연패를 계속 끊어주며 거의 홀로 팀을 지탱했다는 점 때문에 팬들의 평가도 매우 좋다. 그러나 정작 막판에 어깨부상이 도지면서 중요한 클라이맥스 시리즈일본시리즈에는 출전하지 못했지만, 일본시리즈 40인 로스터에 들어 우승반지를 받았다.

2013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일본 대표팀으로 선발되었으나 대표팀 합숙 훈련 도중 숙소에서 한 여성과 밀회하여 키스를 나누는 장면이 프라이데이에 잡혀 크게 곤욕을 치뤘다. 스기우치는 2003년에 결혼한 유부남. 이걸로 이와쿠마 히사시에 이어 합법 대열 합류 결국 요미우리 구단으로부터 엄중 경고 조치와 함께 벌금 징계에 처해졌고니오카 꼴 안난게 어디냐, 이 때문인지 브라질전에서 2이닝 1실점, 대만전에서는 불륜세이브블론세이브를 할 뻔 하는 등 WBC에서의 폼도 영 좋지 않다.

2013년에는 전년도보다 떨어지긴 하지만 그런대로 무난한 성적을 거뒀다. 최종 153이닝 11승 6패 ERA 3.35.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선 그럭저럭 호투했지만 일본시리즈에서 2경기 선발 등판해서 두 번 다 2이닝도 채우지 못하는 등 대차게 말아먹으며 교진팬들에게 역적으로 찍혔다. 그리고 두 경기 모두 단신 미마 마나부에게 패하면서 미마의 일본시리즈 MVP 수상의 일등공신이 되었다.

14년에도 10승 6패 방어율 3.16으로 그럭저럭 던졌고 한신과의 클라이막스 3차전에 출전해 5.1이닝 2실점으로 선방했지만 이 날은 불펜이 털리며 팀은 패전하고 본인은 노디시전을 기록했다.

15시즌엔 방어율 1위 순항을 하기도 했으나 어린이날에 0.2이닝 6실점으로 거하게 말아먹고 나서 전반적으로 흔들리다 7월 21일 이후로 1군에서 자취를 감췄다. 현지에서는 만성적인 엉덩이 통증으로 구속이 저하되어 그런 것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다. 결국, 10월에 오른쪽 고관절 수술을 받는다고 한다. 같은 팀의 다른 선수들은 고관절 수술 후 1년만에 복귀했다고는 하는데, 스기우치는 수년 동안 참았던거라 언제 복귀할지는 미지수라고 한다. 15시즌 최종 성적은 6승 6패 ERA 3.95. 결국 연봉이 5억엔에서 5천만엔으로 무려 90%나 삭감되었다. 이는 일본프로야구 최다 연봉 삭감액.#[31]

프로 입단 후 처음으로 2016년 시즌 단 한경기도 등판하지 못했다. 먹튀테크

2017 시즌에서도 최종전 기준 1군에 올라온 적이 없다. 2군에서만 3경기 등판.

2018 시즌에서도 2018년 9월 현재까지 1군 기록이 없다. 그리고 결국, 2018년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했다. # 3년전 고관절 통증으로 이미 몸상태가 한계였다고 한다.

커리어 최종 성적으로 통산 142승[32] 77패, 평균자책 2.95에 2091.1이닝 2156탈삼진을 기록했다.

2018년 11월, 요미우리 팜(2군) 투수코치로 부임하면서 지도자로서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 이전에는 은퇴를 기념하여 후쿠오카 방송에 많이 나오기도 했다.


3.3. 국가대표 경력[편집]


일본 내에서도 국가대표 단골로 유명하고, 한일전의 성적이 리그내 위상과 성적에 비해 기대 이하라 그렇지[33] 다른 국가와의 경기에서는 굉장히 좋은 피칭을 보여주었으며 성적도 준수하다. 스기우치가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일원으로서 메이저 대회에 나온 것은 2000 시드니 올림픽2008 베이징 올림픽 그리고 2006 WBC, 2009 WBC, 2013 WBC 정도이다. 참고로, 2008 베이징 때만 선발로 경기를 나섰으며 이를 제외하고 나머지 대회는 모두 불펜 투수로 출전하였다.

여담으로, 스기우치는 그의 커리어 전성기 때 1군 정예 NPB 선수들이 출전했던 대회들인 2003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2004년 아테네 올림픽, 2007 아시아 선수권 대회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이 대회들까지 출전하였다면 스기우치는 본인의 전성기 때 모든 1군 대회에 승선하는 드문 기록을 세웠겠지만 후술한 이유들로 인해 무산되었다.

우선, 12월에 열린 2003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의 경우 당시 3경기만 진행되었기에 단 9명의 투수만이 뽑혔고 어쩔 수 없이 좌완 투수는 3명만이 승선하였다. 좌완 선발 투수로는 당해년도 다이에 호크스의 우승을 이끌었던 신인왕 와다 츠요시가 뽑혔다. 스기우치도 2003년 일본 시리즈 MVP를 차지하는 등의 맹활약을 펼쳤으나, 페넌트 레이스에서 와다[34]의 성적이 더 좋아 와다가 승선하게 된다. 그렇다고 불펜으로 뽑힐 수도 없는 것이 좌완의 이와세 히토키는 당시 저승사자에 가까울 정도로 엄청난 위력을 보여주던 좌완 투수였으며 한국과의 경기에서는 필승조로도 출전한다. 또한, 추후에 2006년 초대 WBC 한일전 경기에서 이승엽에게 8회의 결정적 홈런을 맞게 되는 같은 좌완 이시이 히로토시도 당해 엄청난 성적을 보여주었으며, 이 때문에 스기우치는 좌완 투수 풀이 다 차는 바람에 승선하지는 못한다. 당해 스기우치 2003 일본 시리즈 2승을 기록하며 MVP가 되었고 페넌트레이스에서 성적도 준수했지만, 나머지 우완 투수들을 제치고 선발될 만큼의 성적이나 경험은 아니었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의 경우 2004년 6월 1일 흑역사에 가까운 셀프 부상으로 인해 2004년 8월에 열린 올림픽에 승선하지 못하였으며, 부상이 없었다 하더라도 스기우치의 커리어에서 손 꼽힐 정도로 부진한 시즌(오히려 교진 때보다 이 시즌의 성적이 더 안 좋다.)이었기 때문에 승선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의견이 우세하다.

또한, 2007년은 그의 최전성기 시즌인 2005년만큼은 아니었지만 197이닝에 15승 6패 187 탈삼진 ERA 2.46의 훌륭한 성적을 기록했음에도 2007 아시아 선수권 대회고관절 통증으로 인해 출전하지 못한다. 2003년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나 2004년 아테네 올림픽[35]은 승선한 선수들 대비 실력 부족이나 성적 부진이 원인이었으나, 이 때는 경험과 실력 모두 절정에 있었던 시기라 스기우치의 국가대표 커리어에서 정예 1군 프로들이 참가한 대회에 불참한 대회 중 가장 아쉬운 사례로 꼽힐만 하다. 일본은 스기우치가 없는 가운데 해당 대회에서 3승 무패로 베이징 올림픽 본선행 직행 티켓을 따내었다. 하지만 정확히 8개월 뒤, 그렇게 시원하게 진출한 베이징 본선에서 역대급 참사가 발생하며 여론이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이외에도, 그의 프로 커리어 말미와 2015 WBSC 프리미어 122017 WBC도 시기가 겹치지만, 이 때의 스기우치는 전성기의 위용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진 시기었으므로 그가 출전했을법한 대회로 꼽히는 편은 아니다.


3.3.1. 2000 시드니 올림픽[편집]


먼저 시드니 올림픽의 경우, 스기우치는 당시 사회인 야구 소속이었고, 2001년 드래프트 이전에 아마추어 신분으로 올림픽을 참가하게 된다. 첫 경기 미국과의 경기에서 부터 등판했지만, 패전 투수가 되었고 이후에는 딱히 중요한 경기에 나오지 못하며 중용받지 못했다. 그래도 위안거리라면, 트리플 A 올스타라고 볼 수 있는 미국과의 경기에서 2이닝간 번뜩이는 피칭을 보여줬다는 것.

  • 예선 풀리그 첫 경기인 미국과의 경기에서 선발 마쓰자카의 뒤를 이어 11회부터 등판한 스기우치는 첫 타자 샌더스 안소니[36]를 3루 땅볼 처리, 후속 타자 존 코튼[37]을 삼진 처리하였다. 다음 타자 마이크 킨케이드[38]에게 안타를 맞았으나, 대타로 나온 트래비스 도킨스를 삼진으로 잡아내며 무실점으로 이닝을 끝낸다. 12회말 다시 등판한 스기우치는 선두 타자 마커스 젠슨[39]을 중견수 플라이 아웃, 다음 타자 아담 에버렛[40]을 1루수 플라이 아웃, 브렌트 애버내시[41]를 2루수 플라이 아웃 처리하여 삼자범퇴로 이닝을 마무리하였다.
하지만 문제의 13회말, 아웃 카운트 하나도 잡지 못한 채 선두 타자 브래드 윌커슨[42]에게 볼넷 허용 이후, 상대 타자 마이크 닐[43]에게 끝내기 2점 홈런을 맞으며 패전 투수가 된다. 이 날 기록은 2이닝동안 무려 9타자를 상대하며 2피안타(1홈런 포함) 2탈삼진 1볼넷 2실점을 기록한다.
  • 이때문인지, 이후에는 딱히 중용받지 못하다가 약체인 남아프리카 공화국과의 경기에만 출전하였고 이 경기에는 불펜으로 나와 1이닝 무피안타 무사사구 삼자범퇴로 타자들을 돌려세우며 전 경기와 다른 비교적 깔끔한 피칭을 선보였다. 상술하였듯, 강팀인 미국과의 중요한 상황에서 끝내기 실점한 여파로 인해 중용받지 못한 스기우치는 이후 예선 강팀들과의 경기인 대한민국쿠바와의 경기에도 출전하지 못하였고, 4강전과 동메달 결정전[44]의 중요한 경기에도 출전하지 못하며 남아프리카 공화국과의 경기를 마지막으로 이 대회를 마감하였다.

최종 성적은 2경기 3이닝 2피안타(1홈런 포함) 1볼넷 2삼진 2자책점 ERA 6.00을 기록했다.


3.3.2. 2008 베이징 올림픽[편집]


  •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일본의 첫 두경기(쿠바전, 대만전)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다가 예선 풀리그에서 네덜란드 전에 등판 하여 7이닝 4피안타 6탈삼진 1볼넷 무실점 호투하였다. 네덜란드가 비교적 약체이기는 했으나, 스기우치의 호투덕에 일본은 투수를 아낄 수 있게 되었다. 이후, 잔여 예선라운드 경기에서 모두 휴식을 취하다가 힘을 비축한 채로 한국과의 준결승전에 선발 등판하게 되었다.

  • 한국과의 준결승전에서 3과 3분의 2이닝 동안 3피안타 3삼진 2볼넷 1실점으로 기대 이하의 피칭을 보여 조기 강판되었다. 당시 경기에서 2회 이대호에게 내준 볼 넷과 3회 박진만에게 볼 넷 즉, 3회까지는 두 개의 볼넷만을 내주었다. 그 외에는 무피안타 무실점으로 3회까지는 무난히 막고있었다. 문제는 4회.
4회 선두타자 이용규가 원 히트 원 에러[45]로 2루까지 출루하였고, 이후 김현수의 안타로 무사 1,3루의 위기를 맞는다. 다음 타자는 당시 컨디션이 안 좋던 한국의 4번타자 이승엽[46]. 이승엽을 4-6-3 병살 처리했으나 그 사이 3루 주자 이용규가 홈을 밟아 1실점하게 된다. 누상에 주자가 다 사라진 2아웃에 다음 타자 김동주의 타석에서 깨끗한 좌전 안타를 맞았고 4회에만 3안타를 맞으며 흔들리자 일본은 즉시 스기우치를 마운드에서 내렸다. 이후, 투수는 카와카미 켄신으로 교체되었고 후속 타자 이대호를 볼 넷으로 내보내며 2사 1,2루 위기를 자초하게 되나 이후 고영민을 삼진 처리하며 승계주자 분식회계 없이 4회 이닝은 끝났다. 이후, 팀은 이와세 히토키가 한국의 합법적 병역 브로커 이승엽에게 8회 결정적인 투런 홈런을 내주는 등 이를 포함 8회에만 4점을 내주고 무너져 6:2로 참패하게 된다. 이날 스기우치는 리그내에서 최고의 이닝이터 다운 면모를 한국전에서는 보이지 못했다. 특히, 4회에는 공이 높게 형성되며 한국 타자들에게 쉽게 안타를 허용하는 모습을 보였다.[47] 심지어, 스기우치는 준결승전 직전 무려 6일간을 쉬며 당시 일본 대표팀에서 가장 많이 힘을 비축해놓았던 상태였기에 더욱 아쉬운 피칭 내용이었다. 즉, 시즌 중에 열린 대회이기에 몸도 이미 만들어져 있던데다가 충분한 6일 간격의 등판이었기에 컨디션 난조 탓을 하는 것은 변명에 가까운 셈. 차라리, 낮 경기 적응을 못했다는게 이 날 부진의 이유로 꼽는 것이 더 타당할 수 있다.[48]
하지만, 그것도 변명에 가까운 이유가 당해년도 3월 20일 야후돔에서 오후 한시에 열린 개막전에서 스기우치는 등판해 7과 3분의 1이닝 동안 3실점 노디시전 호투했고, 5월 10일 그리고 5월 24일, 6월 7일 낮 경기에서도 각각 9이닝 1실점, 7이닝 1실점, 9와 3분의 1이닝 3실점으로 좋은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물론, 베이징 올림픽 준결승전이 10시 30분 부터 게임이 시작돼 스기우치가 아침 경기에 적응하기 어려웠다는 것도 이유라면 이유가 되겠지만, 이는 상대 선발 김광현도 마찬가지로 오전 게임을 리그에서 해본 적이 없으므로 서로 같은 조건이었다. 여러모로, 스기우치가 리그를 대표하는 좌완 선발 투수로서 한일전에 아쉬운 모습을 보였다는건 변명의 여지조차 없는 사실이었다.
여하튼, 4회를 다 채우지 못하고 조기강판되는 바람에 한국에서는 그를 상대해 본 이진영 등의 타자에게 "생각보다 평범했다"는 혹평까지 받게 된다.[49][50] 출처 실제 상대해 본 타자에게도 그닥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지는 못했던 것. 심지어 스기우치는 올림픽 직전 2008년 전반기에 18경기 9승 5패 142이닝 동안 151K ERA 2.60으로 훌륭한 성적을 기록하던 중이었다. 여러모로, 리그 내 성적에 비해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지 못했다고 볼 수있다.

한국에 패해 동메달 결정전으로 밀린 팀은 여기에서도 역대급 참사가 터지며 노메달로 고국에 돌아와야했다. 당연히 일본 야구 대표팀은 일본내에서 거칠게 비판을 받았는데, 스기우치는 한국전에서 아쉬운 모습을 보이기는 했으나 네덜란드전을 합쳐 전체적으로 성적을 보면, 베이징 올림픽에서 2경기 10.2이닝 7피안타 7탈삼진 3볼넷 1실점 ERA 0.84로 선발로서 제 몫은 해주었다고 볼 수 있다. 그나마 투수 쪽에서 좋은 모습을 보인 몇 안되는 투수[51]기에, 중심 비판 대상에서 피해갈 수 있었다. 다만, 준결승 한국전에서 리그 최고의 이닝이터의 위상과는 다르게 조기 강판한 것이 유일한 흠이라면 흠.

결론적으로, 스기우치가 출전한 두번의 올림픽에서는 최종성적 13.2이닝 9피안타(1피홈런 포함) 4볼넷 9탈삼진 3실점 ERA 1.98을 기록하며 준수한 활약을 보여주어 제몫을 다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스기우치의 개인적인 활약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2000 시드니 올림픽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 메달을 획득하지 못한다. [52]


3.3.3. 2006 WBC[편집]


WBC에서도 스기우치는 일본팀의 일원으로 참가하였다. 스기우치는 초대 대회인 2006 WBC에서 일본 대표팀의 한일전 담당 불펜으로 활약했다.
  • 1라운드에서는 같은 조 대만, 중국과의 경기는 던지지 않았다. 그리고 첫 등판은 1라운드의 하이라이트 경기라고 볼 수 있는 1라운드 한국전에서 이루어졌다. 스기우치는 당시 불펜으로 나와 최희섭 등을 삼진으로 돌려세우며 결과적으로 2이닝 2탈삼진 무실점으로 2이닝 퍼펙트를 기록하였고, 이닝을 그야말로 삭제시켜 버렸다. 2:1로 앞선 상황에 나와 2이닝 퍼펙트로 막았기에 홀드를 기록했지만, 8회에 스기우치 뒤를 이어 마운드를 넘겨받은 이시이 히로토시가 이승엽에게 역전 투런 홈런을 맞으며 팀은 3:2로 역전패 당했다.
  • 2라운드에서도 마찬가지로 같은 조의 미국멕시코전에는 등판하지 않았으며 2라운드 한국전에서만 등판하였다. 이 경기에서는 선발 와타나베 슌스케의 뒤를 이어받아 7회는 잘 막아냈으나, 8회 김민재에게 볼넷, 이병규에게 안타를 내주어 1사 2,3루 위기를 만들었다. 이 두명의 승계주자를 남겨놓고 스기우치는 강판되었고, 이후 마운드는 후지카와 큐지가 이어받았으나 이종범에게 결정적인 2타점 2루타를 얻어맞으며 분식회계로 인해 2점의 자책점이 발생하였고, 팀이 2:1로 패배하여 패전투수가 되었다. 이 경기에서 스기우치는 1.1이닝 1피안타 2볼넷 2실점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이후 일본은 준결승전, 결승전까지 승리하며 우승하였으나 스기우치는 왕정치감독에게 중용받지는 못했고 이 경기들에서 등판하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2006 WBC에서는 준결승전을 제외한 2번의 한일전만 등판한 셈이며 2경기 1홀드 1패 3.1이닝 2탈삼진 1피안타 2볼넷 2실점 ERA 5.4로 부진하였다. 직전년도 2005년에 괴물같은 성적[53]으로 사와무라상을 획득한 스기우치였지만 국제대회에서는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것이다.[54]


3.3.4. 2009 WBC[편집]


  • 그러나, 2009 WBC에서는 초대 대회와 달리, 괴물같은 모습을 보여주며 스기우치의 국가대표 성적과 커리어의 정점을 찍었다. 한일전만 불펜으로 나와 던졌던 초대 대회와 달리 2009년에는 스기우치는 어느 경기에서든 중요할 때 나오는 필승조의 핵심 불펜 역할을 담당하였다. 대표적으로, 2009 WBC 1라운드 승자조 경기에서는 1이닝 무실점, 1라운드 순위결정전 경기에서 0.2이닝 무실점 호투, 결승전에서도 단 한타자지만 이용규를 잘 잡아내어 홀드를 기록했다. 또, 일본의 탈락과 4강 진출의 당락이 결정되는 경기였던, 2라운드 쿠바전에서 불펜투수로서 맹활약하였다. 선발 이와쿠마 히사시의 뒤를 이어받아 3이닝을 출루조차 허용하지 않으며, 3이닝 퍼펙트로 이닝을 그냥 삭제시켜 버렸다. 또한, 4강전에서는 선발 마쓰자카 다이스케의 뒤를 이어받아 승계주자의 득점을 허용하지 않는 등 미국 타선을 1.1이닝동안 그야말로 틀어막으며 승리에 일조했다. 이처럼, 핵심 불펜으로서 팀이 필요할 때마다 이닝을 그냥 삭제시켜버린 스기우치였다. 선발로 출전하지는 못했으나 불펜 필승조로서 6게임에 나와 6.1이닝 동안 6탈삼진 2볼넷 무피안타 무실점 ERA 0.00의 엄청난 피칭을 보여주었다. 우승의 일등공신이 되어 일본 언론의 칭송을 받았던 스즈키 이치로[55]이와쿠마 히사시[56], 마쓰자카 다이스케[57] 등 맹활약을 한 선수들에게 가려졌지만, 스기우치도 당대회 최고의 활약을 보여주어 일본 언론에 의해 당대회 숨은 MVP라는 칭호도 얻게 된다.


3.3.5. 2013 WBC[편집]


  • 스기우치의 마지막 국가대표 커리어인 2013 WBC에서도 불펜 투수로서 필승조이자 마무리 투수로 활약하였다. 첫 경기인 브라질과의 경기에서는 2이닝 1피안타 1탈삼진 1볼넷 1자책점을 기록하며 불안하게 출발했다. 이후, 1라운드 경기는 출전하지 못하다가 2라운드 대만과의 경기에서 마무리 투수로 등판해 1이닝 무실점하며 세이브를 기록했으나 2안타를 내주며 블론 세이브를 기록할 뻔하는 등 여전히 불안하였다. 이때문에 중용받지 못하여 이후 2라운드 경기는 출전하지 못하다가, 준결승전인 푸에르토리코와의 경기에 출전해 0.2이닝 무피안타 무실점으로 비교적 호투하여 국가대표 커리어 마지막 경기에서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 당대회 최종 성적은 3경기 3.2이닝 3피안타 1탈삼진 1볼넷 1자책점 ERA 2.45로, 2009 WBC만큼은 아니지만 2012년 교진에서 좋은 성적[58]을 거두며 당당히 대표팀에 선발된만큼 그 이름값에 걸맞는 활약정도는 보여주었다는 평. 여담이지만, 스기우치는 대회를 치르기 직전 불륜 행각이 발각되어 소속팀에서도 경고조치를 받고 벌금을 내었으며 스기우치가 첫 두경기에서 불안한 모습을 보이자 일각에서는 그 심란한(?) 마음이 피칭 내용에 반영된 것 아닌가 하는 우스갯소리도 나왔다. 어찌됐든, 첫 경기를 제외하고 나머지 두 경기는 무실점으로 마무리했으므로 마지막 국제 대회에서 유종의 미는 거둔 셈.

상술된 메이저 5개 대회에서 스기우치의 국가대표 최종 성적은 15경기 27이닝 13피안타 (1피홈런 포함) 9 볼넷 6실점 ERA 2.00[59]로 이름값을 톡톡히 해냈다. 이 성적에서 특이한 점은 통산 한일전 성적인 8이닝 3실점[60]을 제외하면 그의 성적은 19이닝 3실점 ERA 1.42로 더욱 무시무시한 성적이 된다는 점이다. 같은 아시아의 한국 타자들만이 그나마 그를 제대로 공략하였다고 풀이할 수 있는셈. 실제로 스기우치의 저 국가대표 최종 성적은 최종 27이닝 중에서 대만과의 1이닝, 한국과의 8이닝, 남아프리카 공화국과의 1이닝을 제외하면 미국, 푸에르토리코, 쿠바같은 중남미 강팀이나 유럽 등의 서양팀을 상대로 기록한 것이다. 이를 통해 판단컨대, 스기우치는 본인과 비슷한 피칭 스타일이 생소한 서양권 타자들에게 더욱 위력적이었으며 저승사자같은 면모를 보여줬다는 것.

여담이지만, 스기우치는 프로 투수가 되어 참가한 국제대회에서 피홈런이 없다. [61] 국제대회 단판으로 만나는 경기에서 스기우치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 실제, 플레이스타일 란에서도 스기우치의 피칭 특징 중 하나로 deceptive arm swings와 훌륭한 디셉션이 그의 주요 피칭 특징으로 서술되어있는데 이러한 이유때문에 타자들 눈에는 스기우치 공이 안익은 상태에서 소위 말하는 '공 나오는게 안보인다.', '공 나오는 지점이 파악이 안된다'라는 특징처럼 느껴졌을 것이며 타이밍을 잡기 더욱 힘들었을 것이다.[62] 특히, 그 정점이었던 2009 WBC에서의 스기우치의 피칭은 그의 국가대표 커리어에서 백미 중의 백미라고 할 수 있겠다. 이렇듯, 스기우치는 일본의 자국리그인 NPB 뿐 아니라 국제대회에서도 좋은 성적을 보여주었던 투수였으며 본인의 전성기에 일본이 출전한 모든 메이저 대회에서 출근 도장을 찍은 투수라는 점에서 한 시대를 풍미한 최고의 일본 좌완 투수라는 점은 자명하다.


4. 여담[편집]


  • 앞서 언급한 것처럼 체인지업 그립이 특이한 투수. 보통 서클체인지업 그립은 검지와 소지 사이에 공을 두고 중지와 약지로 공을 덮는 형태인데 스기우치는 손이 작아서 중지를 세우고 검지와 약지 사이에 공을 끼우고 던졌다고 한다. 여러 투수들이 흉내내보려고 했지만 중간에 중지에 공이 걸려서 아무도 흉내낼 수 없었으며 스기우치와 팀메이트였던 이범호도 2011시즌 국내로 복귀하고 나서 기아 투수들에게 스기우치의 체인지업 그립을 가르쳐 줬는데 스프링 캠프 내내 연습해도 제대로 구사하는 선수들이 없었다고 한다.[63] 그나마 비슷한 그립으로는 구대성체인지업이 있는데 구대성은 전통적인 스리핑거 체인지업과 스기우치처럼 중지를 들고 던지는 방식의 체인지업을 구사했다. 속도가 느리고 움직임이 큰 체인지업을 구사하고 싶을 때 종종 저렇게 던졌다고 한다. 출처

  • 1980년생에 2020년 기준 만 39살이지만 20대 중반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의 동안이다.


  • 아직 사회인 야구선수였을 때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 참가했는데 첫경기 미국전에서 연장승부 때 구원등판했지만 끝내기홈런을 맞고 패전투수가 된 적이 있다.[64]

  • 올림픽에 2차례 참가했지만[65] 모두 메달획득에 실패했다.[66]

  • 상술된 것처럼 2006 제 1회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1라운드2라운드2008 베이징 올림픽 준결승전[67]2009 WBC 1라운드 승자조 경기, 1라운드 순위결정전 경기, 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결승전 등 국제경기에서 한국 대표팀과 자주 마주쳤던 선수.[68] NPB에서의 괴물 같은 성적과는 달리 국제 대회에서 통산 대 한국전 성적이 8이닝 5피안타 ERA 3.38로 평범하다.[69] 여담으로 다르빗슈 유도 한국전 성적이 8이닝 4실점(3자책점) ERA 3.38로 스기우치의 성적과 동일하다.[70] NPB를 대표하는 좌우 에이스들이었지만 의외로 한국전에서는 기대에 못미친 것. 스기우치와 다르빗슈의 NPB 성적만을 보고 지레 겁을 먹은 한국 타자들이 막상 NPB 성적이 저 둘보다 못한 우에하라 고지[71], 와타나베 슌스케[72], 이와쿠마 히사시[73] 같은 투수들에게 더 고전했다.[74][75]

  • 2013년 WBC 대만전의 불펜피칭하는 장면에서 해설가가 ちょっと心配ですがブルペンには杉内がいます(조금 불안하지만 불펜에는 스기우치가 있습니다!) 라고 말한 뒤 불펜 피칭을 힘차게 던지는데 되받는 장면에서 받지를 못하고 그 순간 NEC의 광고가 흐르는 장면이 절묘해서 니코동에서 큰 인기를 끌기도 했다. 링크 참조

5. 연도별 기록[편집]


NPB 통산기록
년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2002
다이에/소프트뱅크
11
44.0
2
2
0
-
0.500
5.93
48
5
23
46
29
29
1.61
2003
27
162.2
10
8
0
-
0.556
3.38
148
13
55
169
64
61
1.25
2004
10
45.2
2
3
0
-
0.400
6.90
56
8
27
51
36
35
1.82
2005
26
196.2
18
4
0
0
0.818
2.11
150
14
43
218
51
46
0.98
2006
22
132.2
7
5
0
0
0.583
3.53
130
15
44
114
57
52
1.31
2007
28
197.2
15
6
0
0
0.714
2.46
166
12
46
187
58
54
1.07
2008
25
196.0
10
8
0
0
0.556
2.66
162
15
36
213
63
58
1.01
2009
26
191.0
15
5
0
0
0.750
2.36
145
14
63
204
59
50
1.09
2010
27
182.2
16
7
0
0
0.696
3.55
169
12
60
218
75
72
1.25
2011
23
171.1
8
7
0
0
0.533
1.94
122
8
49
177
40
37
1.00
년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2012
요미우리
24
163.0
12
4
0
0
0.750
2.04
116
6
43
172
42
37
0.98
2013
24
153.0
11
6
0
0
0.647
3.35
122
19
49
149
60
57
1.12
2014
26
159.1
10
6
0
0
0.625
3.16
144
18
41
145
59
56
1.16
2015
17
95.2
6
6
0
0
0.500
3.95
88
9
35
93
42
42
1.29
NPB 통산
(14시즌)

316
2091.1
142
77
0
0
0.648
2.95
1766
168
614
2156
735
686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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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7월 18일까지[2] 7월 19일부터[3] 다른 2인은 이와쿠마 히사시류현진.[4] 이범호가 언급한 것 처럼 타자 앞에서 뚝 떨어진다.[5] 14시즌 동안 2091.1이닝을 던지며 2156개의 탈삼진을 기록했다.[6] NPB 역대 1위는 통산 5시즌 동안 1051/1이닝을 소화하면서 1204개의 탈삼진을 잡은 노모 히데오의 10.3개.[7] 다르빗슈가 2005년부터 2011년까지 NPB에서 7시즌 동안 1268.1이닝을 던지면서 잡은 탈삼진이 1250개이다. 같은 기간 동안 스기우치는 1268이닝을 던지면서 1331개의 탈삼진을 잡았다.[8] 물론 이는 다르빗슈가 신인 시절부터 쌓은 성적과 스기우치가 리그 적응이 끝난 2005년도부터 쌓은 기록을 비교한 것임 감안해야 한다. 하지만 다르빗슈가 본격적인 포텐을 터트린 2007년 시즌부터 2011년 시즌까지의 기록만을 고려해도, 스기우치는 938.2이닝 999탈삼진, 다르빗슈는 1024.1이닝 1083탈삼진을 기록했다. K/9을 따진다면 스기우치가 9.58개, 다르빗슈 유는 9.51개로 스기우치가 아주 살짝 앞선다. 스기우치의 탈삼진 능력이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알 수 있는 기록.[9] 여담이지만 이 둘의 전성기 시절인 2010년 9월 25일 스기우치는 니혼햄다르빗슈 유와의 맞대결에서 투수전 끝에 1대 0으로 승리하여 완봉승을 거뒀고 포스트게임 인터뷰 도중에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10] 지바 롯데에서 스기우치를 상대해 본 김태균은 스기우치가 던진 공이 이미 포수 미트에 들어가고 나서 본인이 스윙을 하고 있을 정도로 공끝이 뛰어나다고 평했다.#[11] 스기우치는 주자가 없는 상황에서는 스트라이드 직전에 글러브를 한번 팍 치며 팔을 뒤로 숨겼다 던진다.[12] 실제 릴리스 타이밍이 계속 달라지면 같은 구종이 와도 타이밍을 맞추기 어렵다는건 자명하다. delaying release라는 용어에 적합한 케이스이며, 릴리스를 최대한 지연시켜 던지거나 때로는 릴리스 속도를 높여서 타자들의 히팅 타이밍을 흔들어 버렸다.[13] 하지만, 인터벌을 달리하는 것은 투구의 기본이다. 업템포로 불릴 정도로 빠른 투구 템포를 가진 김광현도 미세하게 나마 인터벌을 달리하며 던진다. 이렇듯 인터벌을 자유자재로 바꾼 것이 스기우치만의 특징이라 볼수는 없으나, 특유의 투구폼과 그 투구 템포 변화가 결합되어 구속이 느린 포심의 구위가 극대화 된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14] 실제 제구와 구위 유지를 위해 디셉션을 과감히 버리는 투수들도 많다. 스기우치는 반대 케이스.[15] 두 투수다 신체 조건이나 신체 능력 면에서 흔히들 생각하는 강속구를 던지는 투수들의 조건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이 둘은, 타자의 타이밍을 빼앗는 방법론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터득해 강속구를 던지는 투수 못지않게 혹은 그 이상의 위력을 리그에서 발휘할 수 있었던 것.[16] 실제 와타나베는 2006 WBC와 2009 WBC 한국전에서 네 차례 나와 12.1이닝 동안 단 1실점하는 좋은 모습을 보였다. 오히려 강속구를 주무기로 삼고 다른 변화구를 곁들여 타자를 상대하는 마쓰자카나 다르빗슈 유는 한국전에서 와타나베에 비해 그닥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17] 다만, 와타나베의 경우 스기우치처럼 구속이상의 체감구속을 보이는 포심 패스트볼을 던진 유형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투구 처음부터 끝까지 변칙으로 무장해 변칙적인 방식으로 타자의 타이밍을 빼앗은 것이지, 스기우치처럼 패스트볼의 위력을 높이는 방향으로 타이밍을 빼앗은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두 투수 모두 각기 다른 방식을 선택해 타자의 타이밍을 뺏어 리그내 흔한 강속구 투수 이상의 위력을 보였던 투수들이라는 점은 분명하다.[18] 타자의 타이밍을 빼앗는 투구폼으로 체감 구속 이상의 패스트볼 위력을 지닌 선수를 언급할 때 와다 츠요시를 빼놓을 수 없다. 원조 한국 킬러로 유명했던 선수며 스기우치와 같이 deceptive arm swing의 특징을 지닌 선수다. 그리고 와다의 경우 볼에 걸리는 회전수가 많아 패스트볼로 탈삼진을 무지막지하게 잡아낸 선수며 본인 역시도 '나의 생명선은 스트레이트다'라고 말할 정도로 패스트볼로 과감하게 스트라이크존을 공략하는 유형의 투수다. [19] 실제, 일본의 1998년생 언더 투수 나카가와 하야테의 경우 인터뷰에서 와타나베의 투구를 많이 참고했다고 밝혔다. NPB 요코하마 소속 좌완 이시다 켄타의 경우, 스기우치의 투구폼을 많이 참고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20] 스기우치의 호크스 시절 주 무기중 하나였으나, 호크스 마지막 해인 2011년부터는 통증으로 인해 봉인하고, 국제경기 같은 중요한 경기에서만 사용하였다.[21] 하지만 이는 단순히 커브의 위력이 떨어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교진 입단 이후 커브를 던지면 생기는 어깨 통증 때문에 비중을 극도로 줄인 것이다. 실제로 스기우치의 변화구 구사율을 보면 다이에~소뱅 초중반엔 커브의 비율이 20~15%정도 였지만, 소뱅 마지막 시즌부터 구사율이 3%로 뚝 떨어지고, 요미우리 이적 이후엔 봉인하여 사실상 포심 슬라이더 체인지업의 3피치가 된다.[22] 실제 2009년 체인지업의 피안타율은 0.143이었다...[23] 실제 2000년대 중후반 류현진의 체인지업과 스기우치의 체인지업중 무엇이 더 좋은 구종인지 커뮤니티에서 자주 논쟁이 있었다. 다만 스기우치의 노쇠화와 류현진이 MLB 진출후 맹활약한 시기가 겹치다보니 거의 논쟁이 사라졌지만.. [24] 다만 커리어 내내 200이닝을 넘긴 시즌은 없었다.[25] 최다탈삼진은 마쓰자카 다이스케(226K)가 차지했다.[26] 사이토 가즈미는 96년 드래프트 1라운더로 구단에서 애지중지하던 유망주였으나, 어깨부상으로 오랜동안 제 활약을 못한 '비운의 에이스'라는 이미지가 있었다. 그리고 그걸 완전히 깨고 나온게 바로 2003년 시즌.[27] 고바야시 이타루라는 사람으로 치바 롯데 출신의 선수였다. 드래프트 때는 일본프로야구 사상 두번째 도쿄대학 출신이라는 이색적인 이력 때문에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그러나 공부해서 도쿄대 들어갈 정도인 사람이 고등학교 때부터 프로를 목표로 단련해온 괴물들과 상대가 될 리는 없고 결국 1군에서 등판 못하고 은퇴했다. 그래도 머리는 좋았는지 은퇴 후 유학을 떠나 미국에서 스포츠 마케팅을 공부하고 일본으로 돌아와서 프런트로 활동했었다.[28] 플로리다 말린스에서는 2003 월드 시리즈 우승 멤버였고 입단 시점에서 메이저 통산 119승(최종적으로 MLB 121승)의 실적이 있는 우완 선발. 추정 연봉 2억 2500만엔을 받은 거물 용병이었지만, 소프트뱅크에서는 1경기 3.1이닝 64구를 던지고 6실점(자책점 4)한 뒤 어깨 통증을 이유로 미국으로 귀국한 뒤 5월에 방출되었다. 투수판 마이크 그린웰.[29] 잘 알다시피 18번은 후지타 모토시-호리우치 츠네오-쿠와타 마스미에서 이어진 교진 에이스 세습번호로, 교진이 얼마나 스기우치에게 건 기대가 컸는지 알 수 있는 부분. 당대에는 순혈도 아닌, 교진에서 활약이 검증되지 않은 이적생에게 18번을 덜컥 내주는 데에 반발도 있었으나, 스기우치가 이적후 몇 년간 에이스다운 활약을 보여주면서 사그라들었다.[30] 양대리그 탈삼진왕 타이틀을 차지한 것은 일본프로야구 사상 최초라고 한다.[31] 다만 이러한 연봉 대폭 삭감은 스기우치의 동의를 얻은 것이다. 일본프로야구는 연봉 1억엔 이상이면 40%까지만 삭감할 수 있으며 그 이상은 본인의 동의가 필요하다...라고 하는데, 뭐 동의를 한 건 맞지만 사실상 강제로 스기우치가 을이라 구단이 제안한 금액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기다리는 건 방출이기 때문에 싫어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32] 2018 시즌 종료 기준 마쓰자카 세대 중에서는 최다승. 마쓰자카 다이스케는 미일 통산 170승이다.[33] 사실 한일전에 던진 경기들 중에서도 한 두 경기 제외하면 못 던진 경기는 없다.[34] 와다는 2003년 189이닝 동안 14승 5패 195탈삼진 ERA 3.38을 기록 한 반면, 스기우치는 162와 3분의 2이닝 동안 10승 8패 169 탈삼진 ERA3.38을 기록했다.[35] 부상이 아니었더라도 이미 당해년도 성적이 처참해 프로 데뷔 이후 국가대표 경력까지 없던 스기우치가 뽑혔을지는 의문.[36] 훗날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의 용병으로 오는 선수.[37] 금메달 리스트 존 코튼과의 Q&A[38] 2002년과 2003년 다저스에서 시즌을 보내기도 한다.[39] 시드니 직전까지 메이저 저니맨으로 팀을 옮겨다녔지만 별 다른 활약은 없었고, 당시는 마이너 팀 소속이었다.[40] 수비형 유격수로 2006년 휴스턴 애스트로스에서 뛰며 필딩바이블 어워드를 수상했다. 그 해 수비 WAR로만 4.1을 기록하며 메이저리그 역대 최고 수준의 단일시즌 유격수 수비를 선보였으나 빈약한 타격이 발목을 잡았다. 그래도 MLB 통산 0.242의 타율에 40홈런을 기록하며 최소한의 족적(놀랍게도 휴스턴이 60년대에 생긴 신생팀이고 유격수 포지션이 빈약했기에 에버렛이 35홈런을 친 것은 그 시점에서 휴스턴 유격수 통산 최다 홈런 기록이었다. 지금은 카를로스 코레아 등이 날뛰며 잊혀졌지만) 정도는 남긴 선수.[41] 2001년에 템파베이에서 메이저 데뷔전을 치뤘지만, 별 다른 활약은 없었고 2005년을 마지막으로 MLB에서 자취를 감췄다.[42] 훗날, 메이저리그에 데뷔해 통산 타율 0.247 홈런 122개를 때려냈다. 하지만, 2008년 허리 부상이후 별다른 활약은 하지 못했고 2010년을 마지막으로 메이저에서 자취를 감췄다. 한 시즌에 32개의 홈런을 쳐낸 적도 있을 정도로 일발장타 능력이 있던 선수. 이외에도 몬트리올 엑스포스 구단의 마지막 홈런과 워싱턴 내셔널스의 첫 만루홈런을 친 진기록도 가지고 있다.[43] 커리어 내내 대부분을 마이너에서 뛰었으며, 메이저 경력은 1998년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에서 뛴 6게임이 그의 커리어에서 전부였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을 마지막으로 선수 생활에서 은퇴한다.[44] 애초에, 이 경기는 마쓰자카 다이스케를 제외하고 어떤 투수도 등판하지 못했다. 선발이었던 마쓰자카는 8이닝 3실점하며 완투패한다.[45] G.G.사토가 볼을 흘렸다. 8회 고영민의 높게 뜬 타구를 놓친 것보다 이 실책이 오히려 더 초보적인 실책이었을 정도.[46] 일본과의 경기전 올림픽 기간 동안 23타수 2안타로 매우 부진하던 중이었다. 여담으로, 상대 팀 감독인 호시노가 부진한 이승엽을 두고 코웃음 치며 "1할도 못치는 타자를 4번에 두는 것이 웃기다."며 도발하기도 했었다.[47] 당시 SBS 특별 해설위원이었던 김성근도 스기우치가 4회 들어 공이 반개에서 한개 정도 높게 제구된다고 말했을 정도.[48] 하지만, 이는 상대 선발 김광현도 마찬가지인 조건이었다. 심지어 김광현은 스기우치보다 더 적은 4일 밖에 휴식을 못 취하고 나왔다. 낮 경기 적응을 못했다는 것도 핑계에 불과한 것이 NPB에서도 연휴 중에는 종종 낮 경기가 있었다. [49] 이진영은 스톡킹에 나와 스기우치를 상대하며 "예전 차명주 선배 느낌이었다. 왼손 (투수)인데도 왼손 타자가 상대하기 더 편했다"고 그를 혹평했다. 그 발언 전에 스기우치와 와다 츠요시를 지칭하며 "제(이진영)가 생각하기엔 별로인 투수들이 나오니까"라고 발언한 것은 덤.[50] 심지어는, 심수창 해설위원이 옆에서 "장원삼 vs 스기우치"라고 묻자 이진영은 "장원삼이 더 좋을 때가 있어"라고 발언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를 어느 정도는 걸러들을 필요가 있는 것이 국제대회에서는 단판으로만 만나므로 표본이 매우 적기 때문이다. 한 시즌의 리그를 같이 치루며 느낀 바를 술회한 것이 아니므로 신뢰도가 다소 떨어진다. 국제대회 경기만으로 선수 개인간의 실력이나 고저를 논하기에는 표본이 너무 적다. 실제, 스기우치와 같이 같은 팀에서 한 시즌을 보내본 이범호는 스기우치를 본인이 본 최고의 투수 3명 중 한 명으로 꼽기도 했다. 물론, 선수 평가에 있어 국제대회에서의 활약이 라이트 팬에게는 중요한 요소이지만, 선수 개인의 실력을 논할 때는 한 경기 혹은 몇 경기 안되는 표본을 가지고 논하기 보다는 시즌에서의 성적과 모습들을 보아야한다. 그렇기에, 이진영의 스기우치에 관한 반응도 그의 실력이 뒤떨어졌다는 측면에서 발언했다기 보다는 국제대회에서는 기대만 못했고 생각보다 별로였다고 받아들이는 것이 낫다.[51] 우에하라 고지, 후지카와 큐지, 나루세 요시히사 등 당시 좋은 모습을 보인 투수들도 강한 비판을 받지는 않았다. 하지만, 경기를 대놓고 말아먹은 이와세 히토키는 전범 수준의 비난을 받았고, 기대만 못한 모습을 보인 와다 츠요시다르빗슈 유도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으나 꽤나 조롱받고 비판받았다.[52] 아베 신노스케도 같은 케이스. 아베의 경우에는 스기우치와 달리 2004년 성적도 매우 준수하였다. 하지만, 조지마 겐지와 아이카와 료지에 밀려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 발탁되지는 못하였고 스기우치와 같이 다른 두 번의 올림픽에 출전하였으나 메달 획득에 실패하며 노메달 신세가 된다. 그나마 스기우치는 2004년 부상에 부진한 성적 탓에 발탁되지 못한 것이 덜 억울하기라도 하지, 아베는 아테네 올림픽 개최 직전년도인 2003년 규정 타석 장타율 5할에 15홈런, 2004년에도 규정타석에서 장타율 6할대에 ops는 무려 1.016 거기다가 홈런은 33개라는 무지막지한 타격을 보여주었는데도 뽑히지 못하였다. 조지마는 2003년부터 엄청난 성적을 기록했고 2004 당해년도 기록도 홈런 36개 ops 1.087로 아베보다 근소 우위였다. 하지만, 아이카와 료지는 성적도 별로였거니와 수비형 포수 였기에 수비 보강 차원에서 데려간 느낌이 강했지만, 정작 아테네로 건너가서 몇 경기 출전하지도 못하고 별 다른 활약도 없었다. 실제, 팀은 9경기를 치르는 동안 아이카와 료지는 세 경기 출전했는데 모두 대수비로 들어간 것이며 공격에서는 타석에 들어서지조차 못했다. 이래저래 아베 입장에서 이렇게 발탁 되지 못한 올림픽과 정작 출전한 올림픽을 떠올리면 억울할만도 하다.[53] 18승 4패 196과 3분의 2이닝 동안 218 탈삼진 ERA 2.11 기록.[54] 물론, 리그내에서 스기우치는 선발로만 등판하므로 2006 WBC에서는 불펜으로만 등판 했다는 것을 감안해야한다.[55] 대회 기간 동안 이름값에 비해 굉장히 부진하여 All WBC Team에 들지도 못했지만, 마지막 결승전에서 임창용을 상대로 결승 2타점을 올리며 혁혁한 공을 세우며 일본 우승의 일등공신이 되었다.[56] 3경기 동안 20이닝 15탈삼진 3자책점 ERA 1.35를 기록하며 대회 All-star 팀인 All WBC Team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다.[57] 마쓰자카 역시 선발로서 맹활약하며 유일한 3승을 기록한 투수가 되었고, 2009 제 2회 WBC MVP를 차지한다.[58] 12승 4패 163이닝 172탈삼진 ERA 2.04를 기록하였으며, 후쿠오카에서의 전성기 시즌으로 회자되는 2005년, 2007년, 2008년, 2009년, 2011년만큼의 성적은 아니었으나 등판 때마다 기대만큼의 준수한 피칭을 보여주며 교진에서 유일하게 돈값한 시즌으로 회자된다. [59] 2009 WBC와 2013 WBC 대회 직전의 호주와의 각 한 차례씩 평가전까지 포함하면 17경기 31과 3분의 1이닝 동안 6자책 ERA 1.72 기록.[60] 한국 타자들이 스기우치를 그나마 잘 공략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 스기우치가 국가대표 커리어 내내 실점한 6점 중 절반을 한국에게만 내주었기 때문이다[61] 아마추어 신분으로 참가한 2000 시드니 올림픽에서도 단 1홈런만을 내주었다.[62] 피칭 스타일은 다르지만, 구대성의 경우에도 그만의 독특한 디셉션으로 타자들을 요리하였으며 국제대회에서 어마 무시한 성적을 내었다. 스기우치나 구대성은 국제대회에서 만나는 타자들에게는 공 나오는 지점이 단박에 파악이 안되기 때문에 단판에서 바로 적응하고 타이밍을 잡고 치기가 어려워 저승사자 그 자체였던 셈.[63] 윤석민이 포크볼 대용으로 써먹기 위해 자기와 마찬가지로 손이 작은 스기우치의 체인지업 그립을 배우려 했는데, 도저히 자기 것으로 만들 수가 없어 때려치웠다고.[64] 당시 선발투수는 마쓰자카 다이스케로, 10이닝 2실점을 기록했다.[65] 2000 시드니 올림픽, 2008 베이징 올림픽.[66] 아베 신노스케도 같은 케이스이다.[67] 당시 3회까지 무피안타 2볼넷으로 호투했으나, 4회에만 3안타를 맞으며 강판당하고 만다. 스기우치가 엄청난 이닝이터였다는 것을 고려하면 아쉬운 피칭 내용.[68]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는 한국전에서 등판하지 못했다. 다들 알다시피, 이때는 헤이세이의 괴물이 한국전 전담.[69] 이 성적에는 2006년 WBC 2라운드 한일전 경기 8회에 스기우치가 김민재에게 볼넷 이병규에게 안타를 허용하며 1사 2,3루 위기를 맞이한 상황에서 강판되어, 이후 교체 등판한 후지카와의 분식회계도 포함된다. 하지만 스기우치가 불펜 투수로서 한국에게 점수를 내준 경기는 이 경기가 전부이다. 동일 대회에서 도쿄돔에서 열린 1라운드 경기에서는 중간 투수로 2이닝 동안 단 한타자도 출루시키지 않고 이닝을 삭제시켰다. 2009 WBC 1라운드 승자조 경기에서는 1이닝 무실점, 1라운드 순위결정전 경기에서 0.2이닝 무실점 호투, 결승전에서도 단 한타자지만 이용규를 잘 잡아내어 홀드를 기록했다. 즉 불펜으로 등판한 한국전은 2006년 WBC 2라운드 한일전 경기를 제외하고는 제몫을 한 경기들이었다. 하필이면 선발로 등판한 유일한 한국전 경기인 2008 베이징 올림픽 준결승전에서 기대 이하의 피칭을 보여줬을 뿐.[70] 다르빗슈가 한국전에 등판한 국제 경기는 제 2회 WBC에서 세 차례 등판한게 전부이다. 2라운드 승자조 경기에서 선발로 등판하였으나, 1회에만 3실점하여 패전투수가 되었고, 결승전에서는 이범호에게 동점타를 내주며 블론을 기록했다. 그 이후 10회말을 잘 막아냈으나 주자를 내보내며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71] 우에하라는 NPB에서 선발로서는 스기우치와 다르빗슈 유보다 명백히 아래의 성적을 기록했다. 물론, 사와무라 상을 수상한 1999년도와 2002년도 등 전성기 단일 시즌만의 기록으로는 저 둘에 비빌만하지만 NPB 통산 선발로서의 성적은 저 둘보다 못했다. 오히려 불펜으로 보직 변경을 하고나서 대기만성한 유형의 투수.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한국 타자들에게는 선발 투수로서 한창 헤매던 시기에 출전한 2006 wbc에서 악몽을 선사했다. [72] 와타나베의 최고 전성기는 2005년 시즌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 해에는 스기우치가 역대급 성적을 내면서 사와무라상을 내주었다. 이외의 시즌은 비교가 의미없을 정도로 스기우치와 다르빗슈 유가 명백히 더 좋은 성적을 내었다.[73] 이와쿠마의 경우 2008년 투수 3관왕과 사와무라 상을 차지하였으나, 단일 시즌 비교가 아닌 NPB 통산 성적을 한정해 비교한다면 명백히 스기우치와 다르빗슈 유가 더 좋은 성적을 냈다. [74] 실제 저들을 모두 상대해봤던 이진영은 스기우치는 평범한 투수였고(본인이 보기에 차명주랑 똑같다더라.), 다르빗슈도 제구보다는 힘으로 밀어붙이는 유형이라 상대할만 하다고 평했다. 오히려 이와쿠마가 상대하기 더 어려웠다고. 실제로 이와쿠마는 커맨드만은 다르빗슈보다도 위라는 평가를 받는다. 전통적으로, 와다 츠요시(한국전 통산 12이닝 2실점 ERA 1.5)나 이와쿠마(통산 2경기 13이닝 3실점 ERA 2.08) 등 제구와 변화구 무브먼트가 뛰어난 투수들이 한국 타자들을 애먹이긴했다.[75] 다만 이는 어느정도 걸러들을 필요는 있는데 우선 리그에서 계속 상대하는 것이 아닌 국제 경기에서는 많아 봐야 한 두번만 상대하기 때문에 표본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힘으로 밀어붙이는 유형이라 상대할만하다'는 이진영의 평가도 반례가 있다. 2006 WBC 준결승전에 선발 등판해서 스플리터로 한국 타자들에게 악몽을 선사한 우에하라 고지는 구속이 느려서 기교파 투수로 보일 뿐, 실제 투구 스타일은 빠른공의 구위를 믿고 스트존 한가운데 빠른공을 팍팍 꽂아넣는 파워 피처에 가깝다. 그리고 2015년 프리미어 12에서 오타니 쇼헤이는 150km 후반대 패스트볼과 140km 초중반대의 스플리터 레파토리로 한국팀 타자들을 두 번이나 무실점으로 털어버렸다. 이진영의 평가는 당시 상대했을 때는 이와쿠마의 인상이 더욱 강렬했고 공략하기 까다로웠다는 정도로 받아들이면 될듯. 실제 이진영은 당시 이와쿠마를 묘사하며, 공 반개에서 한개 정도만 스트라이크 존을 왔다 갔다 하는데 이걸 쳐야할지 말아야할지 고민만 하다가 경기가 끝났다고 회상했다. 전성기 이와쿠마의 커맨드가 얼마나 뛰어났는지 이진영의 묘사를 통해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부분.